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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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날 : 2023. 12. 22

 

헤밍웨이의 여섯 단어로 유명한 소설이 있다. 이것이 실화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도 있고, 이 소설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한 이야기도 분분하지만, 그 여섯 단어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풍성하고 여운이 길다.

헤밍웨이는 수식어를 배제한 짧은 문장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인데(소설가 김훈은 그의 문장을 뼈다귀만으로 이루어진 문장이라 평한 바 있다.) 영미문학사에서 그러한 문장을 구사한 최초의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래서일까, 다른 작가들 및 평론가들과 10단어 미만의 단어로 소설을 써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내기를 했고, 그는 여섯 단어의 소설을 써 내어 그 내기에 이겼다고 한다.(다른 버전으로는 친구와 술자리에서 6단어 만으로 사람들을 울릴 수 있는가에 대해 내기를 했고, 헤밍웨이는 냅킨에 이 짧은 소설을 써서 친구를 울렸다고)

 

그 여섯 단어의 소설이 이것이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이 여섯 단어, 세 줄의 문장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위력적이다. 무엇도 서술하고 있지 않음으로 되려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다. 임신을 기다리며 아이의 신발을 구입하는 부부의 설레임, 임신이 된 것을 알았을 때 아기 신발을 선물 받았을 기쁨, 아이는 사산되었을 수도, 태어났지만 신발을 신을 필요가 있을 때가 되기 전에 죽었을 수도 있다. 아이의 신발을 팔아야만 할 만큼 가난한 부부였을 수도 있고, 단지 집안에 남아있는 아이의 흔적을 견딜 수 없지만 차마 버리지는 못하여 누군가에게 파는 것일 수도 있다.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엄마 또는 아빠,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상대방은 싸웠을까, 그로 인해 관계가 멀어졌을 수도, 같은 아픔을 공유하면서 그 관계가 더 밀착되었을 수도. 무엇을 상상하건 독자의 자유이고 각자의 상황으로 이 문장을 풀어내면서 우리 안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절제의 힘이다.

 

지난 연말에 클레어 키건의 소설 두 권을 연달아 읽었다. 맡겨진 소녀이처럼 사소한 것들. 사실 맡겨진 소녀가 나왔을 때 만 해도 딱히 읽을 생각이 없었는데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시끄러울 정도로 여기저기서 말을 해 댔다. 뭐라더라. 출간 8일 만에 조선일보 올해의 책으로 선정이 되었다던가. 알라딘의 광고 문구였다. 아니 대체 뭐 어떤 소설이길래 이렇게들 시끄러운가 싶어 두 권을 함께 구입했고 연달아 읽었다.

 

맡겨진 소녀를 읽는 내내 황순원의 <소나기>를 생각했다. 아마 책 날개에 있던 출간 이래로 교과과정에 줄곧 포함되어 아일랜드에서는 모두가 읽는 소설로 자리잡았다는 문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 교과서에 실릴만한 깔끔하고 단정하게 잘 쓴 소설이네. 마치 <소나기>처럼. 뺄 곳 하나 없고 덧붙일 것 하나 없이 완전하고 완결된 매끈한 소설. 절제된 묘사와 풍부한 은유. 마지막 장면의 중의성은 압권이었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다산책방, 2023, p.98

 

내가 경고한 가 나를 안고 있는 킨셀라 아저씨라면 아빠가 오고 있으니 이만 당신의 감정을 추스르라는 말일 것이다. 너와 나의 감정을 나의 생물학적 아빠에게 들키지 말고 오롯이 당신과 나의 비밀로 간직하자는 이야기. 그리고 두 번째 부른 아빠는 킨셀라 아저씨에게 들려주는 호칭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나의 진짜아빠. 라는.

 

내가 경고한 가 우리-나와 나를 안고 있는 킨셀라 아저씨-에게 다가오고 있는 나의 생물학적 아빠라면 잠시 그곳에 멈추라는 경고일 것이다. 나를 안고 있는 이 사람과 내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니 그곳에 멈추라는. 그리고 두 번째 부르는 아빠는 킨셀라 아저씨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나의 생물학적 아빠가 오고 있으니 감정을 추스르자고.

 

작가는 이 중의성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장면을 열어 둘 뿐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독자의 상상에 맡김으로써 이 장면의 이야기를 훨씬 풍성하게 만들어 낸다. 내가 경고한 가 누구냐에 따라 아빠를 부르는 어조는 전혀 달라질 것이다. 이것을 음성으로 듣지 못하고 문자로만 읽기에 독자는 그 어조를 마음껏 상상해 낼 수 있다. 나와 킨셀라 아저씨와 아빠의 표정이 묘사되지 않았기에 더욱 풍부해진다. 경고하는 아빠와 부르는 아빠라니. , 이 작가 천재로세.

 

이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전작만큼 서술을 절제하지는 않는다. 다만 제목 그대로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만을 하는 것으로 거대한 중심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오히려 부각시키는 효과를 얻는다.

 

주인공 빌 펄롱은 부유한 미망인 미시즈 윌슨의 집 가정부로 일하던 열여섯살 엄마의 미혼자녀로 태어난다. ‘펄롱 엄마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가족들은 외면하고 등을 돌렸지만 미시즈 윌슨은 엄마를 해고하지 않고 계속 그 집에 지내며 일할 수 있게 해 줬다. 펄롱이 태어난 날, 아침에 엄마를 병원에 데려가고 또 둘을 함께 집으로 데려온 사람도 미시즈 윌슨이었다.’(p.15-16) 가족은 펄롱의 엄마를 버리지만 미시즈 윌슨은 그 모자를 거둔다. 그렇다고 뭐 엄청난 선행을 베푼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일자리와 잘 곳을 제공했을 뿐. 미시즈 윌슨의 덕에 그럭저럭 잘 자라 지금은 아내도 있고 딸도 다섯이나 둔 가장이 되었다. 그래서 펄롱은 자신의 친부가 누구인가 하는 거대하고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두고 안전하게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p.22)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p.24) 사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빈 주먹으로 태어나 최악의 환경에서 그래도 안정된 직장과 직업, 아내와 다섯 딸을 둔 안정을 일궈낸 소시민 빌 펄롱은 현재 자신이 얼마나 안정되어 있는지 알고 있고 이 안정이 사실은 얼마나 위태로운 기반 위에 있는지도 알기에 더욱 조심하며 살려 한다. 그럼에도 그는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p.44) 버섯 공장에서 일하던 때의 반복된 일상에 가슴이 쿵 내려 앉았던 기억을 아내와 공유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것은 어리석은 욕구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의 그러한 소시민적 일상의 반복에 균열이 일어나는 것은 크리스마스 즈음 방문하게 된 수녀원에서 만난 소녀들 때문이다. 아마도 그에게는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들었을. 어머니가 받았던 미시즈 윌슨의 건조하지만 차갑지 않았던 호의와 돌봄이 그 소녀들에게는 없었다. 그는 드디어 어리석은 욕구를 참지 못하고 아내 아일린에게 그 소녀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만 아일린은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 아일린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p.55) 라고.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고, 당신은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p.57)이었던 미시즈 윌슨이 아니니까. 그리고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아일린과 비슷할 것이다. 식당의 미시즈 케호가 그렇듯. “정말 열심히 살아서여기까지 온 빌 펄롱을 그녀는 열심히 일깨운다. “그곳하고 세인트 마거릿 학교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 뿐이라고.”(p.106)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 쉽게 일어난다는 말의 구체화 버전이다. 네가 조금만 잘못한다면 네 딸들은 세인트 마거릿 학교가 아니라 수녀원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그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 뿐이라고.

 

그러나 펄롱은 끝내 수녀원 소녀를 외면하지 못했다. 크리스마스의 저녁, 수녀원 소녀 세라를 구해 집으로 데리고 오던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p. 119-120)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을 했던 그는 그제야 드디어 알게 되는 것이다. 미시즈 윌슨이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해서.

 

극소의 세계와 극대의 세계는 닿아있다. 미시즈 윌슨의 그토록 사소한 것들이 진짜로 사소한 것들이었을까. 한 인간을 구하는 것은 한 세계를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p.121)는 말로 이 소설은 끝이 나지만 아마도 펄롱의 그 순진한 마음과 믿음은 쉽게 지켜지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와 수도원 사이의 담장이 펄롱의 삶 안에서 유지될 수 있었을지에 대해 자신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결말이 따뜻하게 읽히는 것은 미시즈 윌슨이, 네드가, 미시스 케호가 보여주는 사소한 것들의 역설이 펄롱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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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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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하게 되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by 무라카미 하루키

 

읽은 날 : 2024. 1. 19

 

내가 처음으로 읽은 하루키의 소설은 해적판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대학 1학년 때의 일이다. 1987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 소설은 1988년 한국에서 무려 세 개의 출판사에서 판권계약 없이(!!!) 해적판으로 번역 출간되었고, (다행히 1989년 문학사상사에서 정식 판권 계약을 하고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을 달고 정발되기는 한다.) 내가 읽은 것은 그 해적판 중의 한권이었다.

 

그때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이었고, 집에 내려갔다가 다시 서울로 복귀하기 전에 큰집에 들러 인사를 하러 간 참이었다. 큰집에 갔는데 인사를 드릴 큰아버지도 큰어머니도 계시지 않았고, 기다렸다 인사를 드리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어른을 기다리면서 그 책을 읽은 거였다. 점심때는 지난 이른 오후 시간에 책을 잡았고, 그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어른들은 귀가하지 않았다. 책이 끝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이렇게 어두웠는데 내가 어떻게 책을 읽었지 싶게 어둑신한 방에서 망연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하루키는 해거름의 작가라는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날 큰집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서울로 복귀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그날 그 집에서 읽은 하루키의 책, 그 제목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니, 너무 세련됐잖아!

 

그 뒤, 하루키가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 작가가 되었음에도 나는 딱히 하루키를 찾아 읽지 않았다. 다른 좋은 소설도 많았으니까. 그랬던 나를 하루키 월드로 끌어들인 책은 2003년 출간된 해변의 카프카였다. 하루키의 작품치고는 별로 반응이 없었던(또는 좋지 않았던) 작품이었다는데, 나는 열광하며 읽었다. 가출 소년 카프카가 머물던 고무라 기념 도서관의 존재 때문에.

 

그래서 나는 이 책이 해변의 카프카의 연장 선상에서 읽혔다.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스핀오프가 아니라. 이계의 도서관이라니. 아니, 도서관이라는 이계라니 너무 매력적이잖아. 생각하면서. (작가 후기에서 카프카 이야기가 나올 것을 기대했는데 전혀 아니어서 조금 슬프기도)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p.11)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이어지는 열여섯, 열일곱 소년과 소녀의 달달한 연애담은 소설의 제목에 나오는 불확실한 벽에 둘러싸인 도시가 아마도 이 어린 연인이 만들어 낸 완결되고도 고립된 둘만의 세상이겠구나 상상하게 만들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길고 긴 편지를 주고 받는 어린 연인이 만나서 구축하는 이상향 같은. 그러나 하루키는 하루키답게, 그 예상을 깨부순다.

 

이 실제 세계’(p.18)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그 도시에는 실제 세계의 가 상실하는 열여섯의 가 있다. ‘그곳에서 시간은 의미가 없.’(p.703)한자리에 머물러 있’(p.737). 그 도시를 알려준 것은 열여섯의 이고 너와 함께 그 도시를 만들어 나간 것은 열일곱의 이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 M**이자 원래의 가 그렇듯. 너와 나는 열여섯 열일곱 때 만든 그 도시에 열여섯 열일곱의 모습으로 남게 된다.

 

언젠가 밤하늘에 떠 있는, 아니, 보이는 별들 중 많은 수가 실제로는 별의 생명을 다하여 이미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보는 건 몇십 몇백만 광년을 달려온 별의 빛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멍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분명 내 눈 앞에서 반짝이고 있는 저 별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미 사라진 별이라고? 저렇게 반짝이고 있는데 이미 없다고? 존재와 무존재가 엉망으로 뒤섞이던 느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어떤 행동도, 백만광년 떨어진 별의 외계인은 내 존재가 이미 사라진 뒤의 백만광년뒤에 볼텐데, 그럼 나는 백만광년을 사는 것인가. 하는 생각. 삶은 뭐고 죽음은 뭔가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인가 나는 백만광년을 달려 온 이미 사라진 별의 빛을 보고 있는데 그럼 저 별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현실은 하나만이 아니다. 현실이란 몇 개의 선택지 가운데 내가 스스로 골라잡아야 하는 것이다.’(p.725-726)라는 설명으로 하루키는 그 도시와 이 실제 세계, 열일곱의 나와 마흔다섯의 내가 동시에 분리 중첩되는 것을 설명해 낸다. 아니, 명확하게 분리시킨다. 실제세계의 는 열일곱의 나를 열여섯의 너와 함께 둘이 만든 도시에 남겨두고 실제세계로 돌아오기로 한다. 도대체 얼마만한 사랑이면 그 나이의 나를 뚝 잘라서까지 둘만의 완결된 세계에 남겨두고 싶어질까.

 

열여섯의 너를 잃은 는 불완전해진다. 그렇게 열일곱 이후 이 세상을 사는 내내 어딘가 한군데가 상실된 채로 이 세상을 겉돌며 살아간다. 그것은 어떻게해도 메꾸어지지 않는 상실이다. 끝내 열일곱의 나를 떼 내어 열여섯의 너를 다시 만나게 해 주고서야 완전해지는 그런 삶. 열일곱의 나와 분리되어 실제세계로 돌아오는 것을 선택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쓸쓸해지는 것이 아니라 뭔가 안도감이 들었다. 이 세상에, 여러개의 현실중에 적어도 두 개의 현실에서 행복한 두 사람이 있겠구나 하는. 열여섯의 너와 만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의미없는 도시에서 영원히 나이 먹지 않고 살아갈 열일곱의 , 드디어 열여섯의 너를 상실한 아픔을 가진 열일곱의 나와 분리되어 아마도 커피숍 그녀와 행복할 마흔다섯의 둘 다 이제는 행복하겠구나, 하는 안도감.

 

다들 무언가를, 누군가를 원해요. 원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p.568)라는 나의 고백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해졌겠구나 하는 안도. 그렇게 안도하고 나니 뜻밖에 이 소설이 참 따뜻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문득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기묘한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을 계속 읽게 하는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의 소설은 본디 이렇게 따뜻하였구나, 하는 깨달음.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도서관, 이계의 도서관이든 도서관이라는 이계든.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죠. 아마 어디에도.(p.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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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4-01-20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마님, 너무 반가워요. 저는 아직 <해변의 카프카>는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 책 도서관 이야기가 정말 좋았어요. 저는 마지막 장 덮으면서 하루키 나이를 계산하고 그가 장편을 한 권 더 쓸 수 있을까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하더라고요. 참 따뜻한 책이죠. 대학교 1학년 때 <노르웨이의 숲>을 읽으셨다니, 부럽네요. 저는 삼십 대 후반에 읽었답니다. ㅋㅋ 이게 하루키의 책은 딱 읽어줘야 하는 시기가 있는데 놓쳐 버린 것 같아 아쉬워요. 딱 그 나이의 감성이 있는데...

아시마 2024-01-21 03:44   좋아요 0 | URL
노르웨이의 숲은 대학 1학년 때 읽었지만 과연 그때 제가 그 책을 제대로 읽을만한 정신적인 수준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듭니다. 하하하. 전 그 뒤로 그 책을 몇 번 더 반복해 읽었는데, 매번 새로운 걸 발견하며 좋더라고요. 나와 함께 나이먹어가는 책 중에 하나예요, 저 한테는. 하루키가 어느 연령대의 말랑한 정신에 특화된 작가라는 점엔 저도 동의하는데, ㅎ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의 하루키와 30대의 하루키, 40대의 하루키는(독자 나이 기준이에요, 작가 나이가 아니라.ㅋㅋ 하루키는 별로 나이를 먹지 않는 작가죠.) 각자 다른 맛이 있는 것 같아요. (아. 그 측면에서 블랑카님은 20대의 하루키를 놓친 셈이시군요. 하하하) 어느 나이에 읽어도 그 나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이 있어요. 좋은 작가죠.

<해변의 카프카> 저는 하루키 책 중 가장 좋았던 책인데, ㅎㅎ 별로 평이 좋진 않더라고요. ㅋㅋㅋ 전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아직 안 읽었습니다. 책장에 꽂아두고 언젠간 읽으리라 노려만 보고 있었는데, 이번에 드디어 꺼내 읽을까 싶어요.
 
[세트] 본 아이덴티티 1~2 세트 - 전2권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9
로버트 러들럼 지음, 최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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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한참이나 지난, 구시대 스파이의 멋진 활약. ㅎㅎ 소설의 현재성이란 것에 관해 생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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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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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날 : 2023. 8. 23

 

요즘은 각종 지식을 전달하는 유투버들을 지식소매상이라고 설명하는가 보다. 내가 아는 한 지식소매상이라는 희한한 명칭을 처음 쓴 사람은 유시민 작가다. 한때 정치인과 방송인이었다가 노무현(여전히 아픈 이름)의 그림자이자 호위기사로 꼽혔던, 문재인 정부 어용지식인을 자처하며 정치 외곽에서 문재인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모습으로 2008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명함에 새겼던 직함 지식소매상이 되었다.

 

나는 물론 순혈의 노무현 빠순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외치는 바 당연히 문재인 조국도 유시민과 함께 내 유구한 빠질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이유가 좀 다르다. 노무현을 기본에 깔고서 문재인과 조국을 추종하는 농반 진반의 제 1 이유는 잘;;; 생겨서 라면, 유시민을 추종하는 제1이유는 글을 잘 쓰기 때문이다. 이건 진담 100%

 

유시민이 지식소매상이라는 말을 처음 들고 나왔을 때, 사람들이 다들 대체 지식소매상이 뭔가요, 라는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단어 자체가 당시 꽤 오랜 화두였다. 지식을 만드는 사람(제조자, 창조자)이 있고, 그 지식의 도매상은 전공자들에게 그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라면 소매상은 일반인들이 그 지식을 어떻게든 알아먹고 소화시킬 수 있도록 전달해 주는 사람이라고 그 옛날 유시민의 말을 주워들은 기억으로 대충 재구성해 본다.(전적으로 내 기억에 의한 재구성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음 주의)

 

날카로운 논설, 단단한 논리 구조로 유명한 유시민이지만 뜻밖에도(뜻밖이 아닐 수도) 유시민은 비유와 유추에 매우 능하다. 비유 중에서도 대유법(제유법+환유법)을 기가 막히게 사용한다. 유추법 사용은 식상한 표현이지만,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할 만큼 탁월하다. 유시민의 이러한 능력이 원조 지식소매상이 될 수 있게하는 원동력이었다.

 

본래 비유는 표현하려는 사물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국문학자 구인환 선생이 말하고 있다. 유추법은 같은 종류의 것 또는 비슷한 것에 기초하여 다른 사물을 미루어 추측하는 것이다. 새로운 지식이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물이나 현상, 지식에 빗대어 최소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쪼개어 설명해 주는 것. 우리가 글쓰기에서 비유나 유추를 사용하는 이유다. 여기에 덧붙여 유시민의 가장 탁월한 능력 중 하나는 요약 정리다. 전체를 아울러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낼 수 있어야 요약을 잘 할 수 있다. 유시민은 이걸 잘한다.

 

글 쓰는 문과 남자유시민은 인문학만 공부해서는 온전한 교양인이 될 수 없다는 생각”(p.8)에 과학책을 읽기 시작했고, 이 책은 그 결과물의 모음집이다. 그는 이 책을 과학을 소재로 한 인문학 잡담’(p.9) 이라고 말하며 책의 서문을 연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인문학의 표준 질문이다. 그러나 인문학 지식만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먼저 살펴야 할 다른 질문이 있다. ‘나는 무엇인가?’ 이것은 과학의 질문이다. 묻고 대답하는 사유의 주체를 철학적 자아라고 하자. 철학적 자아는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인 몸에 깃들어 있다. 나를 알려면 몸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일반 명제로 확장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과학의 질문은 인문학의 질문에 선행한다. 인문학은 과학의 토대를 갖추어야 온전해진다.’

p. 47

 

이 부분에서 유시민 찬양에 온몸을 바쳤다.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이렇게나 명료하게 정리해내다니. 문과가 과학을 알아야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낼 줄 아는 아, 이 똘똘이 스머프.

 

이후 유시민은 뇌과학을 거쳐 생물학 화학 물리학을 지나 뿌리로 회귀하듯 수학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가 서문에서 말했듯 중요한 과학의 사실과 이론을 쉽고 정확하게 설명할 능력이 없으니 흥미롭게 본 사실, 내게 지적 자극과 정서적 감동을 준 이론, 인간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내 생각을 교정해 준 정보를 골라 나름의 해석을 얹었을 뿐’(p.9)인 글인데(, 이 너무 명확한 자기 인식이라 과공비례라는 말조차 못하게 되는, 또 한번, 이 똘똘이 스머프야.) 무지하게 재미있다. 유시민의 사유는 과학을 시작으로 역사와 종교와 인문학과 언어학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복잡한 이론을 딱 일반인의 수준으로 쉽게 풀어낸다. 어떻게 이런 글을 써 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여전히 나에게 유시민은 단순한 작가가 아니다. 단순한 개인으로 인지되지 않는다. 나에게 유시민은 언제나 노무현과 연관되는 이름이며 그래서 늘, 아프다. 그가 해맑게 웃고 있어도 그저 아프다. 2009년의 523일에 멈춰있는 이름이기도 하다. 애틋하고 아픈 손가락이라 어떤 글이든 가산점을 얹어주리 맘먹고 보게 되는 이름이기도 한데, 실제론 가산점을 얹을 수가 없다. 이미 그 글 자체로 만점이라.

 

유시민이 지식소매상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세상에 크게 외친 책.


2023.9.21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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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만 끼리끼리 먹는 - 이현수 음식산문
이현수 지음, 이정웅 그림 / 난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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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날 : 2019.7.6.

 

최근 엄마의 레시피 하나를 정복했다. 여름에 먹는 열무 물김치다. 이게 경상도식인지 우리 엄마 식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기억나지 않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 물김치를 먹고 자랐고, 우리집이 아닌 그 어디에서도 이와 같은 열무물김치를 먹어 본 적이 없다. 이런 레시피를 본 적도 없다. 경상도는 물론 서울에서도. 그래서 나는 이 열무물김치가 경상도 식이라고 확언할 수가 없다.

 

엄마의 열무물김치는 열무, 양파, 청양고추, 마늘, 생강 만이 들어간다. 여기에 밀가루풀을 푼 국물이 전부다. 젓갈을 쓰지 않고 간은 오직 소금으로만 한다. 일반적인 열무김치는 열무와 얼갈이를 함께 쓰고, 붉은 고추를 갈아서 넣어 국물에 붉은 기가 도는데 엄마의 열무물김치는 오직 초록초록할 뿐이다. 청양고추도 갈지 않고 얇게 썰어서 넣는다. 열무도 잎사귀는 많이 쓰지 않고 줄기를 주로 쓴다. 열무를 다듬어 소금에 절이고, 양파를 얇게 썰고, 청양고추(경상도에서는 이걸 땡초 라고 부른다)를 썰어 두시간 쯤 절이고 헹궈 물기를 뺀 열무에 찧은 마늘과 생강을 양파 땡초와 함께 버무린 뒤 밀가루 풀을 푼 국물을 부어준다. 끝이다.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엄두가 안나는 종류의 레시피였다.

 

첫애는 설날 직전에 자신이 생겼음을 알려왔다. 입덧은 아주 심하지는 않았으나 오래갔고, 첫 아이를 가진 나에 대한 주변의 관심은 따듯하다 못해 뜨거웠다. 모두가 내게 뭔가를 먹이는 것으로 그 애정을 표현하고자 했으나 입맛이 없어도 없어도 그렇게 없을 수가 없었다. 남들은 입덧할 때 한밤중 남편에게 순대를, 바나나를, 딸기를 구해오라고 집 밖으로 내쫓기도 한다는데, 나도 그런 추억 하나쯤 가지고 싶은데 당췌 먹고 싶은 게 정말 단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 오직 하나 그 열무물김치가 먹고 싶었다. 우리 엄마가 담는 거 말고는 어디가서도 본 적이 없던 그 물김치가 말이다. 엄마만 볶아댔다. 그때 엄마는 첫 아이 가진 셋째에게 그 물김치를 해 주고 싶었으나 열무 철이 아니었다. 이틀이 멀다고 시장에 나가 봤지만 열무가 나와야 말이지.

 

열무철이 되었을 때는 이미 입덧이 끝난 뒤였다. 그리고 그해 추석 즈음에 첫애를 낳았고, 엄마는 누런 종이에 싼 산모 미역 한 뭇을 머리에 이고(진짜 말 그대로 머리에 이고) 내 산후조리를 해 주러 서울로 상경했다.

 

박완서의 자전적 경험이 담긴 소설 목마른 계절에 이 산후 미역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피란을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늙은 엄마와 만삭의 올케 혜순을 돌보게 된 진이. 추수는 아직 멀었고, 서울의 식량난은 심각했다. 친구 순덕과 남의 집 울타리에 잡초처럼 피어오른 줄콩의 콩꼬투리를 수확해 먹을 것을 구했다 안도하던 진이의 앞에, 임신 중인 아내가 먹지 못해 각기증을 보인다며 고뇌하는 현민이 나타났다.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이 발길로 차던지고 싶게 못나 보이며, 다시 한번 흰쌀과 미역조각이 눈 앞에 떠오른다. 그리고 극히 중대하고도 어려운 결단을 즉석에서 강요당했을 때처럼 심한 곤혹을 겪는다. 그러나 선반 위에 꺽지도 않고 얹어놓은 미역과 항아리에 소복한 흰쌀을 반으로 나누는 일의 결단은 좀처럼 내려지지 않는다.

안된다. 안되고말고. 차라리 한 점의 살을 뜯기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다.

 

박완서, 목마른 계절, 세계사, 2009, p. 135

 

주인공 진이는 끌려간 오빠 열 대신 올케 혜순의 해산구완에 골몰한다. ‘마련해 논 흰쌀을 절대로 해산 전에 축내는 일이 없도록 악착같이 하루의 양식을 구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모른다든가, 그녀는 놀랍도록 억척스럽게 집안일을 다스렸다. 문득문득 자신의 끈질긴 생활력에 혐오감 같은 걸 느끼기도’(p.129) 할 정도로. 진이는 자신이 산모용 미역을 이미 구해 놓았음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것은 진이의 자신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나의 출생에 관한 서사는 아무리 들어도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다. 60년만에 최고로 춥다고 뉴스에서 외쳐대던 지독한 계절이었단다. 마당에 내 놓은 간장독이 얼어서 절로 터져나갈만큼 춥던 그 섣달에 엄마는 셋째 딸로 나를 낳았다. 며느리의 산후구완을 해 주러 와 있던 할머니는 셋째도 또 딸이라는 소리에 끓이고 있던 미역국을 수채에 확 쏟아 부어버리고 손녀 딸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몸을 갓 푼 며느리에게 푸짐하고도 걸판진 욕을 욕을 하고 가 버리셨단다. 사악하기도 하지. 인간이 어찌 그리 악할 수 있었을까. 왜 그렇게 악하게 굴어야만 했을까. 지옥에 갔을 거야. 그야말로 악마가 사표를 낼만한 악.

 

딸만 내리 넷을 낳은 엄마에게, 산후조리란 없는 얘기였다. 나를 낳고 첫 국밥도 엄마가 끓여먹었고, 내 첫 기저귀를 빤 것도 엄마였단다. 산후조리를 해 주어야 했을 할머니는 내가 태어난 사흘 뒤 엄마의 머리맡에 앉아 세시간 동안 욕설만 하다 가셨단다. 넷째를 낳았을 땐 산후조리를 할 사람이 있었지만 엄마가 염치없어 그 조리를 제대로 받지도 못했단다. 그런 엄마에게 딸의 산후조리는 한풀이의 장이었다. 본인이 못 받은 산후조리를, 본인이 받고 싶었던 그대로 딸에게 하는 것으로 엄마는 그 한을 풀고 싶었던 것 같다.

 

둘째를 해산한 후 미역국을 먹었으나 어머니가 바라던 미역국이 아니었다. 딸만 줄줄이 낳은 터라 쇠고기미역국을 먹을 염치가 없었다. 하여 어머니는 딸을 낳을 때마다 황태와 마른 홍합을 넣거나 통들깨와 불린 쌀을 함께 갈아서 끓인 산후미역국을 먹었다. “고소하고 시원한 게 쇠고기미역국보단 맛나겠네.” 헛말이라도 우리 자매들은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쇠고기미역국이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알 나이였으니까.

 

쇠고기미역국 끓여줄까?”

어머니는 박꽃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의 이 말은 당신의 가장 귀한 것을 내어주겠다는 의미였다. 사태와 양지머리로 육수를 낼 때, 기장 미역을 물에 불릴 때 어머니의 입가엔 달콤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쇠고기가 많이 들어간 탓에 껄쭉해진 미역국이 달갑지 않으면서도 자매들은 그걸 좋아하는 척 연기하곤 했다. 그것이 우리가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였다.

(p.158-159)

 

엄마는 머리에 꺾지 않은 산모용 미역을 이고 손에는 그 미역국을 끓일 거대한 곰솥을 새로 사서 들고 왔다. 그 거대한 솥의 안에 소고기 뭉치가 들어있었다. 엄마는 딸 집 부엌에 서서 그 미역을 불리고, 불린 미역의 질긴 줄기를 손으로 일일이 갈랐다. 산모용 미역국엔 칼을 쓰지 않는 법이며, 칼질을 할 필요도 없을만큼 미역이 푹 풀어지도록 끓여야 한다는 것이 엄마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미역국을 하루에 냉면 사발로 일곱사발을 들이 마셨다. 끓여댄 엄마도 대단하지만 먹은 나도 대단했다. 남편과 자고 있는 나를 새벽에 살그머니 깨워 새벽참으로 먹이고, 출근하는 남편과 함께 아침으로 먹이고, 10시가 좀 넘으면 중간참으로 먹이고, 점심으로 먹이고, 오후참을 먹이고, 저녁밥을 먹이고, 자기 전에 또 먹이면 일곱끼니를 먹게 된다. 식도부터 직장까지-_-가 미역국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나 스스로 느껴질 정도였다. 밥 먹다 화장실 갔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였다. 나는 정말 열심히 먹었다.

 

한달간의 산후조리를 마치고 내려가기 전에도 엄마는 미역국을 한솥(그 곰 솥에 한 솥!) 끓여놓고, 다음 미역국을 끓일 수 있도록 미역을 불려 손으로 줄기를 일일이 찢어 갈라 두고, 남편에게 이 미역국까지는 네가 끓여주라 신신 당부를 하고 내려가셨다.

 

남편은 한동안 나와 첫째를 미역종족의 원수;;;;라고 불렀다.

 

다행인 건 난 미역국을 그때도 좋아하고 지금도 좋아한다. 미역종족은 내가 그렇게 먹어댔음에도 다행히(?) 멸종되지 않아 둘째를 낳고도 미역국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을 푼 엄마는 둘째 산후조리는 그렇게 강박적으로 해 주지 않더라. 사실 언니가 나보다 10년도 더 전에 조카를 낳았는데, 왜 엄마 산후조리 한풀이를 나한테 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엄마 말론 언니는 줘도 안먹고, 난 주는 대로 다 먹더란다. 그 덕분인지 난 언니는 하지 못한 완모에 성공하긴 했다.

 

엄마의 열무물김치 레시피를 정복하면서 문득 슬퍼졌다. 우리 엄마는 이제 곧 팔순 고개에 다다를 것이고, 사람같지 않은 짓을 했던 나의 할머니는 지옥에 가신지 이십년이 다 되어간다. 엄마의 한은 이제 풀렸을까. 나의 할머니는 이제 지옥에서 그 죄닦음을 다 하셨으려나.

 

이현수라는 작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소설을 쓰는 재주는 별로다 싶던 이 작가가 뜻밖에 아주 괜찮은 음식 에세이를 썼다. ‘그동안 눈앞의 산해진미에 홀려 전통음식을 홀대하진 않았는지, 이대로 가다간 그 맥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향토음식 조리에 관한 기록을 작정하고 남겼다는 이 글은 조선일보에 2년간 연재한 요리칼럼을 모은 글이란다. 미역국, 올갱잇국, 청양고추 멸치비빔장, 옛날 부추전 같은 우리 전통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구체적인 레시피가 제공되는 음식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음식에 얽힌 자신의 경험담 추억담이 많아 더 잘 읽힌다. 내가 음식 에세이에서 기대하는 기대치를 완벽하게 채운다.

 

2023.9.18.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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