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연자리를 두 개나 꿰찬 조재현이 <목포는 항구다>에 이어 출현하는 두번째 작품이다. 두 영화가 동시에 개봉되어 모두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조재현도 이제 '흥행배우' 대열에 들어섰음을 느낀다. 과거 감칠맛나는 단역이나 조연 수준에 그친 것에 비하면 그로써는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영화 <맹부삼천지교>는 영화 제목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듯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에서 따온 제목이다. 맹자가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이나 갔다는 이 말을 응용해 극중 맹만수는 '맹사성 서울대보내기'를 위해 없는 돈에 사채를 빌려 강북에서 강남의 노른자부위인 대치동 아파트로 이사, 사성이의 교육에 열을 올린다. 강북에서 1등해도 서울대 갈 수 없다, 학교와 학원거리가 1킬로미터 이상이면 서울대 떨어진다 는 알만한 학부형은 다 안다는 '사실(?)'에 기초해 이사를 간 것이다. 오로지 자식의 서울대보내기를 위해...

결국 영화말미에는 맹사성이 음대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되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 현실교육의 문제점들을 지적해내는 것은 그와는 별도의 문제다.

첫째, 맹만수의 '맹사성 서울대보내기'는 '서울대 지상주의'를 엿볼 수 있는 사례다.
학교교육이 인성교육은 저리가라하고 오로지 대학보내기에 열중되어 있는 이 시대에, 그것도 공부 좀 한다하는 학생을 둔 학부모라면 자식 서울대보내기, 그라도 안되면 연고대 보내기에 몰두하고 있는 지금의 세태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세태에 비난을 가하거나 풍자를 하지는 않는다. 그저 영화를 통해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비판적 풍자영화는 되지 못하고 그저 코미디일 뿐이다.
(공부 좀 한다는 자식을 둔) 모든 학부모가 자식 서울대 보내기에 열중하는 것은 영화 속에서 맹만수를 도와주는 일수쟁이인 손현주의 말을 통해 정당화되는지도 모른다. 이 나라는 붕어빵 장사를 하더라도 서울대를 나와야 성공한다고... 일견 맞는 말이다. 연예인을 하더라도, 붕어빵 장사를 하더라도, 학생운동을 하더라도 '서울대' 출신이면 격이 상승된다.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것이려니, 혹은 서울대 출신이니 달라도 뭔가 다르겠지 하는 심리적 기대감은 '자식 서울대 보내기 열풍'을 정당화한다.

둘째, 자식의 적성보다는 학벌에 중점을 두는 교육풍토를 보여준다. 돐 때부터 마이크를 집어 맹만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맹사성은 어린 시절에도 동네에서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강남에 있는 고등학교로 이사간 뒤에도 아버지 몰래 학교가 끝나면 연습실에서 노래를 부른다. 극중 찰떡궁합인 현정이에게 미행을 당해 들키기는 했지만 현정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연 연습 중 전기쇼크를 당한 맹사성이 병원에 실려가며 맹만수는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가 끝날 시점 맹만수가 사성이가 노래하는 공연장을 찾게 되면서 둘의 갈등은 해소된다. 결국 아버지는 자식이 원하는 공부를 하게 해주지만, 그전까지 사성이는 아버지가 원하는대로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공부를 하지 못한 아버지가 자신의 공부 못한 한을 자식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다. 나는 공부를 못했으니 너라도 공부를 해서 나의 꿈을 이뤄다오. 하지만 아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부담스럽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향해 노력하고픈데 아버지는 내게 다른 것을 원하신다. 내가 원하는 것과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다르다. 여기서 자식의 갈등은 시작된다.

아버지의 꿈을 무시하고 내 갈길을 가느냐, 아니면 아버지가 원하는 꿈을 위해 노력하느냐.
전자를 택할 경우 때로는 그 가정은 가족간의 심한 갈등과 불행으로 점철되고 자식이 가출하는 사태를 낳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자식은 자신의 꿈을 이뤄 성공하기도 한다. 성공한 뒤에는 그간의 갈등이 무너진다. 하지만 그다지 바람직한 모습은 아닌 듯 하다. 성공하지 못한 경우에는 아버지는 자식을 향해 "거 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 그건 니 길이 아니다"라는 식의 눈초리를 보낼 수 있고, 오히려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공했다 치더라도 그간의 갈등으로 인한 고통은 너무나 크다.
후자를 택할 경우 자식은 아버지의 꿈을 이뤄낼 수도 있고 아버지에게 만족을 드릴 수도 있지만 정작 꿈을 이룬 자신은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게 아닌데 하면서 평생을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자학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더군다나 꿈을 이루지 못했을 경우에는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실망감, 본인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으로 앞서 언급한 세가지 경우의 사례보다도 가장 처절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어느 쪽의 만족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상 두 가지가 이 영화를 통해 볼 수 있는 현실교육의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서울대 지상주의와 자식을 통한 대리만족주의. 두 가지 모두 우리가 지양해야할 부분이다. 서울대를 개혁한다는 말은 예전부터 나왔다. 대학원 중심의 연구대학으로 만든다, 학부를 통폐합시킨다는 등의 이야기가 들린지는 수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서울대는 자신들의 막강한 권력을 놓치 않으려 한다. 어떤 학과목이던 서울대가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한 서울대 지상주의는 없어지지 않는다. 국문과도 서울대, 정보통신공학도 서울대, 철학과도 서울대, 교육학과도 서울대. 서울대가 전 과목을 석권하고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개혁은 없다. 서울대는 다른 학교에는 없는 특수 학과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연구대학원으로 탈바꿈해야한다. 아니면 프랑스와 같이 파리1대학, 파리2대학 하는 식으로 모든 대학의 이름을 없애고 숫자를 부여해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둔 부모가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려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서울대에 보내려하는 부모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서울대' 자체를 탓해야 한다. 서울대가 변해야 다른 대학도 변하고, 그렇게 되면 부모들은 오로지 서울대에만 목을 맬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학벌중심주의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면 서울대가 먼저 변해야한다.

작년 수능시험을 치고 서울대와 다른 대학에 동시 합격한 한 지방학생이 서울대 중심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서울대를 택하지 않고 다른 대학을 택한 것은 귀감이 될만한 사건이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보다는 문제의 중심은 대학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

孟 : 맏 맹
母 : 어미 모
三 : 석 삼
遷 : 옮길 천
之 : 어조사 지
敎 : 가르칠 교

전한(前漢) 말의 학자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烈女傳)》에서 비롯된 말이다. 맹자(孟子)는 이름이 가(軻)로, 공자가 태어난 곡부(曲阜)에서 멀지 않은 산둥성 추현(鄒縣) 출신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어머니 손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현명한 사람으로 아들 교육에 남달리 관심이 많아 단기지교(斷機之敎)의 일화를 남긴 분이다.

맹자가 어머니와 처음 살았던 곳은 공동묘지 근처였다. 놀 만한 벗이 없던 맹자는 늘 보던 것을 따라 곡(哭)을 하는 등 장사지내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 이 광경을 목격한 맹자의 어머니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이사를 했는데, 하필 시장 근처였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맹자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꾼들의 흉내를 내면서 노는 것이었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곳도 아이와 함께 살 곳이 아니구나 하여 이번에는 글방 근처로 이사를 하였다. 그랬더니 맹자가 제사 때 쓰는 기구를 늘어놓고 절하는 법이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법 등 예법에 관한 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맹자 어머니는 이곳이야말로 아들과 함께 살 만한 곳이구나 하고 마침내 그곳에 머물러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어머니의 노력으로 맹자는 유가(儒家)의 뛰어난 학자가 되어 아성(亞聖)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맹자 어머니는 고금에 현모양처(賢母養妻)의 으뜸으로 꼽히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자녀교육에 있어서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며, 또한 어린이들이 얼마나 순진무구한가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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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가 항구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 하지만 영화는 굳이 남들이 다 아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정의내려주려한다. 왜? 나도 모른다.

영화 시작과 함께 비장한 배경음악이 흐르며 등장하는 장면은 남기남(조재현 분)의 권투연습 장면. 마치 삶과 죽음을 갈라놓기라도 하는듯이 심각한 표정으로 링위에서 땀방울 흘려가며 연습하고 있는 그는, 잠시후 벌어지는 연습게임에서 단 한방에 쓰러진다. 아 분위기 깨진다. 비장미는 어느새 코믹스럽게 승화된다.

좀도둑 하나 잡으려고 강력계 형사 세 명이 붙어 작전을 펴지만 남기남은 지레겁을 먹고 도둑과의 일대일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저 벌벌 떨며 찌그러져있을 뿐이다. 그러나 두뇌회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 짓으로 밥먹고 사는지도 모른다.

어느날 갑자기 투입된 잠입수사를 통해 그는 백성기(차인표 분)의 부하가 되고, 특유의 두뇌회전으로 백성기의 신임을 받아 단 몇 개월만에 그의 오른팔로 성장한다. 급격한 성장에는 그를 시기하는 자가 생기는 법. 장장 20년간 그를 모신 실제 오른팔은 그를 시기하며 백성기와 함께 없애버릴 계획을 세우고, 남기남은 이를 눈치채고 백성기에게 알려주려하지만, 임자경 검사(송선미 분)로 인해 실패한다.

죄없는 백성기를 무조건 잡으려는 부장검사와의 다툼으로 남기남은 경찰을 그만두겠노라 선언한다. 백성기의 끈끈한 우정과 믿음은 그를 진정한 친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결국은 백성기를 없애려는 세력에 맞서 둘은 함께 싸운다.

이 영화를 보고 3류 영화라고 비판하는 평론가들에 맞서 조재현은 인터넷상에서 영화는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다며 평론가들의 평을 일축한 것이 한때 화재가 되기도 했었다.

아무런 교훈도 그렇다고 시원한 액션을 선보이는 것도 아닌 예술영화와 허리우드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 영화는, 그저 어설프고 덜떨어진 코믹스러운 연기와 허술한 구성이 더욱 매력적이다. 최근 선보이는 한국영화에서의 탄탄한 줄거리나 구성, 혹은 새로운 기법을 동원한 각종 쇼를 보여주는 것도 아닌데 이 영화는 벌써 대박이다. 흥행가도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은, 다른 좋은 영화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신기하다. 그렇다고 입소문이 많이 퍼져 영화를 본 사람들이 새로운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형국도 아닌 듯 하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러 오게 되는 것일까?

차인표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난 개인적으로 차인표보다는 조재현을 보러 왔다) 하지만 이전의 작품에서도 종종 보여주었던 조재현의 특유한 마초적 분위기는 조재현 매니아들을 끌어보아 흥행에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이 영화를 통해 그는 한국판 '알 파치노'로 자리잡았으니 말이다. 비장미를 풍기며 어둠속에서 씨가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은 전형적인 알 파치노다. 하지만 영화 곳곳에서 이런 비장미는 곧 어설픈 코믹으로 승화된다. 비장미와 코미디를 오가는 영화인 셈이다. 전혀 다른 두 가지 분위기를 한꺼번에 잡아내 관객들로 하여금 무표정에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영화. 이 영화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새로운 영상기법이나 예술성, 혹은 교훈을 얻으려는 자는 일찌감치 영화보기를 포기하라. 이 영화에서는 그런 것들은 아무리 찾아봐야 나오질 않는다. 그냥 차인표와 조재현의 특유한 말담을 즐겨라. 이 아름다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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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이어 비디오대여점에서는 그와 관련된 영화들이 잘 나가고 있다한다. 닉슨 대통령을 사임하게 만든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영화들.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이 '대통령의 음모'이다.



'의견'이 아닌 '사실'에 기초하라

1972년의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영화 <대통령의 음모>는 현재 개봉되어 최단기간 최대관객수의 기록을 돌파하고 있는 <태극기를 휘날리며>가 우리나라 분단의 비극인 '6.25 전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듯, 미국의 닉슨대통령의 사임을 불러일으킨 '워터게이트'사건을 생동감있게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의 음모>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전개과정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곁가지로 '기자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정치적이면서 한편 교과적이다. 기자지망생들의 '교과서'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기자강령 "첫째, 기자는 사실을 밝혀, 간추려서, 널리 알리는 일을 하는 직업인이다."
그 밑에 줄줄이 따라오는 다른 강령들은 제쳐놓고라도 첫번째 강령 하나만으로도 '기자란 참 해먹을 짓이 못된다'라는 '사실'을 깨닫기엔 별 무리가 없을 듯 싶다.

실제 인물이자 영화 속 인물인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 기자 밥 에드워즈와 칼 번스타인은 "사회 민주화와 언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애쓰며"(기자강령 2에서 인용) 각종 권력의 압박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다. "당신은 지금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다"라는 이름모를 정보원으로부터의 경고에도 사건이 단순하지 않다는 결론을 도출할 뿐 신상의 위험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편 영화 속에서 이들의 취재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입이 떡 벌어진다. 기본적인 전화인터뷰는 물론, 도서관에서 수많은 자료를 뒤적거리고, 동료기자를 이용해 선거인단의 명단을 빼내기도 하고, 수십잔의 커피를 마셔가며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긴 시간에 걸쳐 취재원으로부터 소기의 정보를 캐내는 등 이들의 취재기술은 뛰어나다 못해 교활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만든다. 그 모든 것이 '의견'이 아닌 '사실'에 기초해야한다는 첫번째 기자강령 때문이리라.

기자는 현장에서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등의 경험요소를 배제하고 오로지 '사실'만을 기초해 기사를 작성해야 한다. 신상의 위험을 느끼는 취재원 앞에서 사실을 '불으라'고 하고, 유도질문을 던져 암묵적 동의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면은 아니지만 심지어 기자는 사고로 자식을 잃은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심정을 '캐묻'기도 해야한다. 그것이 기자다. 이쯤되면 기자는 냉혈인간이 되지 않고는 해먹을 짓이 못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따뜻한 감정과 냉철한 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써는 이러한 현장에서 '냉정함'을 유지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시민운동가'가 되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결론을 토대로 “과연 나는 기자를 할 수 있는가?”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면, 대답은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않다. 내가 사고현장에 있다면 난 결코 아이를 잃은 부모님에게 그들의 심정을 물어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난 시민운동가가 되어야하나?

이 영화는 정의감에 가득차 있는 기자의 표본을 보여줌과 동시에 나로하여금 '기자로 가는 길‘에서 걸음을 멈추게 한다. 기자여! 그대는 그다지 만만한 콩떡이 되지는 못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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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행운이라고는 별로 따라다니지 않는 나에게도 행운이 왔다.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 이런 행운이 내게도 찾아온다. 연극 '미롱'과 영화 '스쿨 오브 락' 시사회가 당첨된 것인데, 연극표는 다른 이에게 넘기고, 부대에서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 휴가를 나와서 이 놈과 함께 영화 '스쿨 오브 락'을 봤다.

'스쿨 오브 락'에 대한 다수의 평론가들이 평이 그렇듯, 이 영화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재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두 영화는 너무나 닮았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의 키튼선생이 전자기타를 메고 돌아왔다고나 할까? 다소 서정적이고 조용하게 감동이 밀려오는 '죽은 시인의 사회'와는 달리 '스쿨 오브 락'은 매우 떠들썩하고 시끄럽고 정신사나운, 하지만 이것 역시 서서히 밀려오는 감동에 희열을 느끼게 하는 영화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눈물의 감동이라면, '스쿨 오브 락'은 희열의 감동이다.

작고 뚱뚱하고 못생긴(?) 듀이핀(잭 블랙 분)은 무대에서조차 자신의 열정을 자제하지 못해 20여분이나 되는 기타솔로와 온갖 '쌩쑈'로 밴드 멤버들에게조차도 별로 달갑지 않은 친구다. 결국 밴드에서 쫓겨난 듀이, 보결교사를 나가는 친구 네드의 집에 얹혀살며 방세도 내지 않는 그야말로 실업자이자 빈대다. 네드의 여자친구는 그를 내쫓으려하고 네드 역시 이런 듀이가 못마땅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느날 걸려온 한통의 전화. 그린 초등학교에서 임시 보결교사를 뽑는데 네드를 찾는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것은 듀이. 듀이는 네드의 행세를 하고 그린 초등학교에 보결교사로 취직한다. 듀이는 첫날부터 기타만 가지고 놀고 수업은 뒷전이다. 아는 것이 없으니 가르칠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따분한 교사생활에 유일한 낙은 수업이 끝나는 순간. 이렇게 따분하게 학교를 오가며 우연히 음악시간에 합주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게 된다. 헉! 이럴수가. 아이들의 연주실력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듀이는 아이들을 밴드로 만들어 경연대회에 나갈 계략을 짜는데...

아이들은 다음 학기 수업을 미리하는 것인줄로 믿고 듀이를 따라 록의 역사와 음악을 배운다. 클래식 기타와 콘트라 베이스, 그랜드 피아노는 저리가라. 소위 '칼기타'라 불리우는 일렉기타와 4현 베이스기타, 신디사이저가 이를 대신한다. 역시 음악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답게 듀이가 가르치는대로 잘 따라한다. 점점 반항적이 되어가는 아이들. 결국 나중엔 듀이가 네드를 사칭하고 거짓 교사행세를 한 것이 들통나지만 아이들에겐 이미 록의 정신이 깃들어있는 상태다. 아이들은 버스를 대절 집에서 자고 있는 듀이를 깨워 경연대회에 출전한다. 그 어떤 밴드보다도 열정적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그들은 비록 1등은 아니지만 앵콜곡을 받기에 이른다. 듀이와 아이들의 돌발적인 행동에 불구하고 아이들을 찾으러 공연장에 온 학부모와 교장선생은 이들에게 감동을 받는다.

이 영화에서 놀라운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어린 꼬마들이 실제로 곡을 연주하고 공연했다는 사실이다. 잭 블랙이야 락커로써 유명하지는 않지만 밴드를 하고 있는 엄연한 락 뮤지션이라 하지만, 아이들의 경우는 정말 놀랍다. 아기때부터 클래식 기타를 배워 베이스를 연주하고, 기타를 연주하고, 그리고 또 드럼을 연주하고, 건반을 연주하는 이 꼬마들은 정말 뛰어난 실력을 지닌 아이들이다. 어릴때부터 악기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미국 환경이 부러운 동시에, 이 땅에서 음악한답시고 끼니 굶어가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록 뮤지션들이 가엾게 느껴지는 것은 왜인가?

록 음악을 좋아하는 이라면 이 영화를 본 후 실망하지는 않을터이다. 혹 댄스음악 애호가이고 평론가들의 댄스음악에 대한 비판이 영 못마땅한 분이라면 이 영화를 봐도 별다른 감흥을 못느끼리라. 이 영화는 '죽은 시인의 사회'처럼 제도권 교육을 탈피 아이들이 느낄 수 있는, 즐길 수 있는 교육을 실험하는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도 말해주지만(물론 그것이 의도되었건 그렇지 않건간에), 무엇보다 '록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절실히 느끼게 해주는 영화다.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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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열 두명의 웬수들'은 전형적인 가족코미디다. 결론이 뻔한 '가족애'를 그리고 있는 영화이지만, 우리는 결론을 알고 있음에도 영화를 보며 살짝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가족'을 주제로 하는 영화는 항상 결론이 뻔하다. "가족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뻔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영화들이 항상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남녀간의 사랑을 그린 영화들이 결코 흥행에 실패하지 않는 이유와도 같다. 아주 근본적인 인간의 감정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사랑', '연인' 의 단어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며 잠시 활동을 멈추고 있는 휴화산과도 같은 것이다. 언제 다시 타오를지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힘겨운 일상속에 이런 감정을 파묻어놓고 있다가 영화를 통해 끄집어내는 것이다.

낳고 낳다보니 어느덧 열 두명이나 되는 아이들. 시골의 풋볼감독인 아버지와 글을 쓰는 어머니 사이에 아이는 열 둘이나 된다. 큰 딸아이는 뉴욕에서 애인과 함께 살고 있고, 큰 아들은 풋볼선수다. 셋째는 자칭 얼짱이라는 소녀. 그리고 나머지는? 아직 한참 어린 꼬마들이다. 이들을 모두 관리하기는 쉽지 안다. 어느날 아버지는 대학친구로부터 모교 풋볼감독 스카웃을 받고 이사를 결심한다. 시골에서 뻑쩍지근한 도시로... 게다가 이사한 뒤 엄마의 책이 출간되는 운이 잇따라 터진다. 하지만 아이들은 불행하다. 이사전 행복을 보장한다던 아빠의 말은 아이들에겐 거짓이다. 아빠와 엄마 자신의 욕심은 채웠을지 몰라도 아이들은 그전보다 불행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엄마, 아빠를 포함한 열 네명의 가족은 이기주의적으로 변해간다.

하지만 꼬마 마크의 가출로 인해 가족이 다시 뭉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고, 큰 딸은 수많은 개구진 동생들을 싫어하는 애인을 차고 가족에게 돌아오고, 아빠는 사표를 낸다. 자신의 욕심을 줄이고, 가족을 선택한 것.

이미 우리가 예상했던 결론이다. 하지만 감동이 밀려온다. 왜냐면...
당신에게도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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