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전산 이야기 - 불황기 10배 성장, 손대는 분야마다 세계 1위, 신화가 된 회사
김성호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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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무지막지한 기업이 다 있어 싶을 정도의 무대뽀 기업 이야기. 여기저기서 언뜻 들어본 것 같아서 헌책방에 싸게 나와있는 김에 사봤다.

시간을 한 순간에 함축시켜 죽음까지도 이승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렇게 매순간 전쟁 치르듯 목숨 걸고 온힘과 긴장을 다 바치는 일본인들의 '이치고이치에(一期一會)' 내지 '잇쇼겐메이(一生懸命)' 정신이 기업에 발현된 한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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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론 -상 - 경제학고전선 애덤 스미스, 개역판 국부론 시리즈
아담 스미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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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인내가 필요한 책;;; 고작 (상)권을 읽는 데 매우 오랜 세월이 걸렸다(그래서 기분 전환 삼아 '애덤 스미스 구하기'를 먼저 읽은 것. 하지만 원전을 직접 읽기 전에 특정한 입장에서 인용, 해설된 개론서를 먼저 접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지를 가두기 때문이다. 개론서가 좋은 마중물이 되는 경우도 물론 있다. 어찌되었든 이번엔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 힘이 많이 들었는데, 『국부론』도 안 펼쳐보고 경제학을 공부했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운 일 같아서 꾸역꾸역 억지로 읽어냈다.

다루는 주제의 폭이 대단히 광범하고(이른바 ‘(정치)경제학’이 분화하기 이전에 쓰인 책임에도, 의외로 경제학의 기초개념들 다수가 맹아적인 형태로나마 이미 대부분 다뤄진다), 동원된 자료가 시시콜콜하다 할 정도로 방대하다.

아직 (하)권을 읽기 전이니 구체적인 언급은 미루고, 몇 가지 단상만.

먼저,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an invisible hand)’은 『국부론』에서 단 한번 언급될 뿐이다(4편 2장). 해당 부분의 맥락상으로도 그것이 공식화, 정형화된 교육내용처럼 수요 공급의 법칙(에 따른 균형의 달성)이나 시장의 가격기구를 의미하는 것이 전혀 아닐 뿐 아니라, 애덤 스미스 사상 전체로 보면 이는 극히 부분적인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분명한 오해와 과장(침소봉대!)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차라리 부분과 전체의 문제 내지 사회의 조화(혹은 예정조화?)에 관한 개념이다. [참고로,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한번(4부 1절 10장), 『철학적 주제에 관한 에세이』에 수록된 「천문학 에세이」에서 한번(3장 2절) 쓴 것까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을 총 3번 사용했는데 매번 다른 의미로 썼다(원문을 확인해보아야겠지만, 나의 깜냥으로는 그 의미적 복수성과 관련하여 정관사가 아닌 부정관사 ‘a'가 쓰였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것 같다).]

그런데, (아직 생각이 가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이에 관해 애덤 스미스의 철학에는 어떤 궁지 내지는 난점이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국부론』의 궁극적인 목표는 중상주의의 비판적 극복으로서, 애덤 스미스는 책 곳곳에서 (경쟁 제한을 꾀하는) 상인과 제조업자의 이익 추구가 사회 전체의 일반이익과 충돌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또 한편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또는 빵집 주인의 자비가 아니라 자신의 돈벌이에 대한 그들의 이기심과 관심 때문”이라는 유명한 구절을 들면서 공공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은 개인의 이기심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은 결과-조화와 공공선-를 가져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평생을 두고 대결했던 버나드 맨더빌의 주장-개개인의 부도덕이 공공선을 만든다-과 묘하게 겹치게 된다. 지금은 잠도 오고,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만 맴도는데, (하)권과 『도덕감정론』을 읽으면서 좀더 고민해보려 한다.

끝으로 놀라지 말 것! 다음은 주류경제학의 비조,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인용한 것이다(1편 8장).

“고용주들은 수적으로 적기 때문에 훨씬 더 쉽게 단결할 수 있으며, 또한 법률은 고용주들의 단결은 인정하거나 적어도 금지하지 않지만, 노동자들의 단결은 금지하고 있다. 노동가격을 인하시키기 위해 단결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회법률은 하나도 없지만, 노동가격을 인상시키기 위해 단결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회법률은 많이 있다. 모든 쟁의에서 고용주들은 훨씬 오랫동안 견딜 수 있다. 토지소유자․차지농업가․공장주․상인은 노동자를 한 사람도 고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획득한 자본으로 1년 또는 2년은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직업을 가지지 않는다면, 1주일을 버틸 사람이 많지 않으며 1개월을 버틸 사람은 거의 없고 1년을 버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기적으로 보면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필요할 것이지만, 그 필요성은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만큼]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의 단결에 관해서는 자주 듣지만 고용주들의 단결에 관해서는 거의 듣지 못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때문에 고용주들의 단결은 매우 드물다고 상상하는 사람은 이 문제뿐만 아니라 세상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고용주들은 노동임금을 현재의 수준 이상으로 인상시키지 않기 위해 언제나 어디서나 일종의 암묵적이지만 끊임없는 통일된 단결을 맺고 있다. 이 단결을 위반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매우 인기 없는 행동이며 이웃사람들과 동료로부터 비난을 받을 행동이다. 우리는 사실상 이러한 단결에 대해 거의 듣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이 단결이 아무도 주의하지 않는 평상시의 그리고 자연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고용주들도 노동임금을 현재의 수준 이하로 인하시키기 위해 때때로 특별한 단결을 맺는다. 이 단결은 항상 실행의 순간까지 매우 조용히 비밀로 맺어지며, 노동자들이 [때때로 그러한 것처럼] 저항 없이 항복할 때 그 단결을 뼈저리게 느끼지만 다른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다.”


p.s. “나를 매력적으로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날 좋아해주는 건 내 책들뿐일 거야(애덤 스미스, 친구에게 자신의 서재를 보여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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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구하기 - 개정판
조나단 B. 와이트 지음, 안진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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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1723~1790)에 서린 칸트(1724~1804)의 아우라?? 데이비드 흄과는 일생에 걸친 깊은 친교가 있었다는 것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그도 칸트를 읽었을까? 혹은, 칸트는 애덤 스미스를 읽었을까? 과문하여 들은 바가 없지만, (방법론상으로는 대척에 놓이는) 둘 사이의 친화성은 흥미로운 주제인 듯.

통념과 달리 『국부론』이 아니라 ‘공감’의 원리에 바탕을 둔 『도덕감정론』이 애덤 스미스 사상의 정수라는 기본 전제 하에 소설형식으로 쓰인 책(저자가 등장인물의 대사 곳곳에 애덤 스미스의 원전들을 녹여낸 노력은 가상하나 효과는 그다지 좋았던 것 ...같지 않다).

법학 박사였던 애덤 스미스는 원래 법에 관한 책을 집필함으로써 도덕철학(『도덕감정론』), 교역(『국부론』), 법학으로 이어지는 3부작을 완성하려 했고, 그 중에서도 『도덕감정론』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는 사실이 당대의 기록을 통해 드러난다. [마지막, 법학서는 완성하지 못한 탓에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료와 원고를 모두 소각해버렸다. 불완전한 연구서가 대중에게 유출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R. L. Meek 등 학자들은 스미스가 글래스고 대학에서 법학을 강의할 때 썼던 두 권 분량의 강의 노트를 수집해 단행본으로 펴냈고, 한국에도 『애덤 스미스의 법학강의』(자유기업원)란 제목으로 나와 있다.] 체계적 구성을 보더라도 『도덕감정론』이 철학적 토대를 마련하고 있는 반면 『국부론』과 『법학강의』는 그에 따른 세부사항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고, 그는 죽기 두 달 전인 1790년 5월에까지 『도덕감정론』의 6번째 개정판을 냈을 정도였다. [슘페터는 『국부론』이 매우 중요한 저작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거기에 새로운 생각이나 원리 내지 방법은 하나도 없다면서, 스미스는 단지 그 이전의 사상가들, 스콜라철학에 자연법철학자들, 중농주의자와 중상주의자들로부터 나온 방대한 자료들을 나름의 원리에 따라 꿰어 체계화 했을 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스미스의 분석이 깊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웠고(으응??), 스미스의 주장이 모호했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져서 역설적으로 많은 추종자를 거느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하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할 수 있는 이유가 개인의 (이기심에 바탕을 둔) 이익 추구와 경쟁 압박 때문만이 아니라, 각자가 양심(도덕감정)에 따라 자신의 행동에 가하는 ‘자제’ 때문이기도 하다는 애덤 스미스의 전언은 음미를 요한다.

즉자적이고 수동적인 감정은 본성상 이기적이고 곧잘 우리를 속이기 때문에(우리는 “현재”, “내 자신이” 처한 문제가 가장 크고 절망적이라고 여긴다), ‘타당성’과 ‘정의’에 기준을 둔 투시법을 통해 정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인상적이었다.


나도

1.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되뇔 것(時點의 객관화),

2. 내 안에 있는 ‘번뇌 자체’를 볼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라앉히고, 제3자의 입장에서, ‘번뇌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관찰할 것(視點의 객관화),

3. 이도 저도 잘 안 되겠으면 현재 내가 처한 문제를 잠시 내려놓고, 혹은 결국 자살할 결심이 섰다면 나는 이미 죽은 것이라 생각하고(남은 삶은 덤이라 생각하고), 타인들의 호소와 어려움에 귀 기울여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볼 것


을 얘기하곤 했었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고 나도 번번이 무너지곤 하지만, 개중에 뭔가가 얻어 걸려서 단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돌릴 수 있을까 싶어서.

"사람을 영혼을 가진 지성적 존재로 대하면 모든 것을 잃지는 않는다. 반대로 소 떼로 취급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언젠가 그 뿔로 당신을 들이받게 될 테니까(애덤 스미스, 볼테르를 인용)."

"어느 사회라도 그 구성원의 대부분이 가난하고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회는 결코 번영을 누리거나 행복할 수 없다. 국민 전체의 의식주를 공급하는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의 노동생산물 중 좋은 의식주를 영위하는데 필요한 부분을 가져갈 수 있어야 공평하다(『국부론』 1편 8장 중에서)."

"정의야말로 사회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든든히 떠받치는 대들보이다. 사회가 혼탁해져서 그 대들보가 약해지고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인간사회는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질 수밖에 없다(『도덕감정론』 2부 2절 3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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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쌩 2015-01-30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봤습니다. 10년전에 대학원 다니던 삼촌이 읽어보라고 던져주어
읽은적이 있는데,나름 재미있게 읽었던것 같습니다


오쌩 2015-01-30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미스의 책으로 말미암아,후대 사상가들의 이론적 토대가 된것은 무시할수가 없조 ㅎ
저도 이책을 보며 님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거 같습니다.
책표지를 보니,예전에 제가 읽었던건 구판인가보네요ㅎㅎ

묵향 2015-01-30 15:48   좋아요 0 | URL
저도 오쌩 님처럼 구판을 읽었는지, 표지가 다르네요^^ 제가 읽은 것은 흰 바탕에 하늘색으로 Adam Smith 이름이 새겨져 있고, 노란색 초상화가 배치되어 있는 책이었습니다. 저는 이전의 디자인이 더 편안하고 세련되게 느껴지네요ㅎ
 
윤리학과 경제학
아마티아 센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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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경제학의 시조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글래스고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였다(경제학의 윤리학적 기원은 사실,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애초에 경제학은 가정경제학이었고, 정치경제학이었다). 더구나 경제학의 주제는 오랫동안 윤리학의 한 분과로 여겨졌다. 하지만 현대 경제학의 역사적 진화 과정에서 경제학과 윤리학은 서로를 타자로 인식하게 되었고, 양자의 관계는 단순한 불신의 상태를 넘어 상호부정의 단계에 이르렀다. 근대의 산물인 이러한 거리두기가 두 학문분과 모두에게 이론적 엄밀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논리적 체계화로부터 언제나 미끄러지는 현실세계 역시 그들로부터 멀어지고 말았다.



2) 센에 따르면 ‘합리성’, 다시 말해 ‘자기이익의 (이기적) 극대화’라는 경제학의 편협한 가정은 행위(동기)와 시장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복잡한 태도를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우리 모두는 실수를 저지르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혼란에 빠진다. 따라서 세상에는 햄릿, 맥베스, 리어왕, 오셀로 같은 이들의 몫이 있게 마련이다. 냉정하고 합리적인 유형의 인간들이 우리 교과서를 채우더라도, 세상은 그보다 훨씬 다양하다.


  그는 효율성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로 군림하게 된 ‘파레토 효율성’을 비판하면서(단적으로 말해, 극도의 빈곤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호화판으로 사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상태라도 빈곤한 사람들이 부자들의 호사를 줄이지 않고는 유복해질 수 없다면, 이 기준에 따를 때 그것은 ‘파레토 최적상태’가 된다) 후생경제학 제1정리와 제2정리의 현실적인 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경제학과 윤리학의 불행한 분리 때문에 현실 분석의 중요한 부분들이 가로막혔음을 센은 한탄한다.


  센은 인간의 행위가 궁극적으로 사회적 문제이고 윤리적 성찰의 영향을 받는 만큼, (후생)경제학이 (애초에 그랬던 것처럼) 윤리학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보다 풍부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용의자의 딜레마 게임에서 참여자들은 상호의존성을 인식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목표를 고려하기 때문에 (비반복 게임에서도) 협조적 행위를 전략으로 선택할 수 있다. 이기적 행위로부터의 이와 같은 이탈을 경제분석에 체계적으로 도입할 수 있다면 더 정확한 현실분석이 가능하리라는 것이다.


  『불평등의 재검토』에서처럼 센은 복지(후생)가 가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니며, 효용만으로 복지가 적절하게 표현될 수도 없다는 점을 근거로 ‘복지 측면’과 ‘행위능력(자유) 측면’을 구별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사람들에 대해 좀 더 폭넓은 시각을 취하면서 사람들이 바라는 다양한 목표들 뿐 아니라 그러한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는 능력에 대해서도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윤리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복수로 존재한다. 경제적 분석에 관련된 요인과 변수들은 확대되고 다양화되어야 한다.



3) 일원론적 틀에 집착할 때 이론은 편협해지고 배타적으로 된다. 다원성 그 자체는 물론 복잡하고 모호하다. 그것이 하나의 장애로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저, 망설임, 고통의 형태로 나타나는 갈등과 난관은 경제학의 대상인 인간 행위가 직면하는 장벽 그 자체이다. 따라서 그러한 딜레마는 경제학과 무관할 수 없다. 딜레마가 존재한다면, 그러한 딜레마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경제현상을 이해하고 평가하고 예측하는 길이다. 경제학에 다양한 차원을 도입해 윤리학과 결합하려는 시도는 결국 현실과 인간 행위의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움켜쥐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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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재검토
아마티아 센 지음, 이상호 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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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Amartya Sen의 대표작,

『Inequality reexamined』의 번역본.


1) 평등에 대한 올바른 질문 방식은 ‘왜 평등인가'가 아니라, ‘무엇에 대한 평등인가'이다. 인간의 다양성에 따라 평등을 평가하는 기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불평등에 대한 판단과 측정은 비교되는 중심변수(공간)의 선택에 철저하게 의존한다. 한 변수의 평등이 다른 변수와 관련해서는 심각한 불평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균등한 기회는 아주 불균등한 소득을 초래할 수 있다.


  오히려, 모든 이론들은 어떤 의미에서 ‘평등주의’이다. 이론들의 기본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좀 더 중요성을 부여하는 특정 영역(공간)에 대한 평등을 요구하는 대가로 다른 부차적인 영역(공간)에서의 불평등을 용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反평등주의’로 알려지고 저자 자신들조차 그렇게 표현하는 이론들도 다른 기준에서 보면 평등주의가 된다. 예컨대 재화의 분배 상태를 문제 삼지 않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효용 극대화)’만을 지상목표로 삼는 것처럼 보이는 고전적 공리주의는 기실 목적함수에서 모든 사람의 효용에 ‘평등한’ 가중치를 부여하는 이론이다. 이렇게 어떤 변수에 대한 평등의 거부 이면에 모종의(다른 변수에 대한 어느 정도 적절하고 실질적인 수준의) 평등주의를 내포하지 않고서는 (표준)이론으로서 지지받는 데 필요한 객관성, 신뢰성 내지 사회적 개연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얘기지만, 따라서 모든 평등론은 ‘불평등 옹호론’이기도 하다. ‘기본’으로 여겨지는 것의 평등이 하찮은 ‘주변부’의 불평등을 논리적으로 옹호할 뿐 아니라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이론이 설득력을 갖추는 기본적인 전략에 속한다.


  따라서 평등에 대한 논쟁을 평등‘옹호’론 대 ‘반대’론의 구도로 파악한다면, 핵심을 놓치게 된다. 어떤 평등인지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는 결코 평등을 옹호하거나 비판할 수 없다. 평등 그 자체는 독자적으로 어떤 실질적 내용도 갖추지 못한 공허한 개념일 수 있다. 우리는 불평등을 검토해야 한다.


  이는 결국 ‘자유와 평등의 관계’ 논제와 다르지 않은데, 결론부터 말해 그것은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다. 이 둘을 대당항으로 놓는 것은 ‘범주상의 오류’이다. 자유는 평등의 가능한 적용분야에 속하고 평등은 자유의 가능한 분배유형에 속한다. 센의 이러한 언설에서 나아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등을 억압하거나 제한하지 않으면서 자유를 억압하거나 처벌하는 조건들의 예는 역사상 없었고, 그 역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자유를 제한하지 않기 위해 평등이 조절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외연은 필연적으로 동일한 것이기에 양자가 현존하거나 부재하는 상황 역시 필연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제한된 평등은 더 많은 자유로 피어나지 않으며, 억압된 자유가 더 많은 평등으로 분배되지도 않는다고. 그래서 우리는 불평등을 재검토해야 한다.



2) “이제 정치철학자들은 롤즈의 이론틀 내부에서 연구하든지,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Robert Nozick(동의 여부를 떠나서 Nozick의 자유지상주의는 롤즈의 정의론에 대한 하나의 유력한 비판론이다)의 말처럼 롤즈의 관점은 우리가 정의나 평등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그의 이론은 오로지 결과와 성취의 불평등에만 머물렀던 우리의 관심 방향을 기회와 수단-자유(롤즈에 있어서는 특히 ‘기초재’)-의 불평등으로 이동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센에 따르면 이는 부족할 뿐 아니라(평등성취의 수단으로서 자유의 중요성을 이해하게 해주었지만) 적절한 관점이 될 수 없다. 자원이나 기초재를 평등하게 보유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사람들이 실제로 누리는 실질적 자유의 평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같은 수준의 자원과 기초재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목표하는 바의 자유(성취)로 전환시키는 ‘능력’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소득, 부, 자유와 같은 기초재를 많이 갖고서도 노령, 장애, 질병으로 인해 실제로 향유하는 능력이 제한받을 수 있다. 따라서 평등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선택하고 누리는 자유에 따라 평가되어야 하고, 이런 현실적인 자유는 바로 개인들이 다양하고 대안적인 기능조합들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으로 표현된다. 요컨대, 불평등의 문제는 평등하지 못한 ‘자유’의 문제이다!



3) 불평등을 취급하는 후생경제학 이론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지금껏 인간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을 정확히 비슷한 존재로 취급했다. 사회후생을 개인효용의 총합으로 측정했으며 개인효용은 ‘소득’의 함수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주어진 총소득을 균등하게 분배하면 사회후생이 틀림없이 극대화된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불평등에 대한 관점을 제한한다. 이는 개인의 소득을 복지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개인별로 실질적인 (능력의) 차이가 난다는 점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으며 나아가 좋은 사회의 구성요소이자 사회후생을 결정짓는 한 가지 요인인 ‘자유’의 중요성을 담아내지 못한다.


  불평등의 한 표징인 ‘빈곤’을 정의함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관점은 소득공간에만 의탁했고, 그것은 손쉽게 ‘저소득’과 등치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빈곤은 개인별 특성과 무관한 소득결핍의 문제가 아나라, 어떤 최소 수용수준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기본‘능력’의 ‘부적합성’-불충분성을 포함한-으로 봄이 타당하다.


  소득크기만을 기준으로 평가할 경우 부유한 사회에서 굶주림이 지속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나라의 중산층보다 소득이 높지만 전자는 굶주리는 반면 후자는 특별히 굶주림 때문에 고통 받지는 않는다. 한 연구에 따르면, 번창한 도시인 뉴욕의 할렘가 거주 남성들은 방글라데시의 남성들보다 40세가 넘게 살 확률이 낮다. 그것은 물가 탓에 부유한 나라의 화폐로는 더 적은 상품만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식량이 상대적으로 싼 품목이 아니기도 하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옷을 차려입고 전화를 사용하는 등)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는 데 더 많은 비용이 들고, 이러한 사회적 기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원 분배의 왜곡이 건강 등 최소의 생존에 이용 가능한 금융수단을 고갈시키기도 한다.


  요컨대 빈곤문제에 있어서도 소득에 대한 정보를 넘어 사회적 상황과 특성의 다양성으로 나아가야 하며, 소득과 다른 자원들을 복지로 전환시키는 다양한 능력에 주목해야 한다. 올바른 공간에 주목함으로서 우리는 정확한 빈곤구제책도 도출할 수 있다. Kerala 주(州)는 인도에서도 1인당 실질소득이 낮은 편에 속하는 지역이지만, 장기 평균 수명은 가장 높고, 유아사망률은 인도 평균보다 훨씬 낮으며, 그밖에 문자해독율과 여성권 등 수많은 핵심 기능에서 다른 주보다 훨씬 높은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의 관심을 국민소득과 소득분배 향상을 넘어 폭넓은 개발 노력으로 확장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를테면, ‘건강상태’를 측정함에 있어서 공중위생이나 의료시설, 이웃 등 공동체 생활, 사회적 호혜평등, 자연환경과의 지속가능한 상호작용, 문화 인프라 등을 도외시한 채 ‘수명’의 척도로만 환원해볼 수는 없지 않은가.



4) 아마르티야 센은 개념을 워낙에 꼼꼼하고 엄밀하게 구사하는데, 번역의 과정에서 의미전달력이 떨어지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책을 읽는 내내 많이 들었다. 언젠가는 다시 읽어야 할 책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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