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무하마드 유누스 외 지음, 정재곤 옮김 / 세상사람들의책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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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 총재의 그라민은행 스토리.

  브라질 산탄데르은행, 인도의 SKS, EU지역의 ENM 등 마이크로크레딧(빈곤층의 경제적 자활을 위한 무담보 소액대출) 사업은 (그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제 어느덧 세계각국에 보편화되어 있다. 한국에서도 미소금융, 새희망홀씨, 햇살론 등 이른바 정책대출 3인방이 서민금융 명목으로 공급되고 있다. 1976년에 방글라데시에서 설립된 그라민 은행은 그 대표격이다.

  저자는 빈곤퇴치와 경제적 자립에는 단순히 일자리를 창출하거나 빈자들에게 매월 사회보조금을 주는 방식보다는 차라리 이들에게 목돈(그래도 '소액'이다)을 일시에 쥐어주어 다른 기회를 잡게 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아주 미미한 여유 자본만 있어도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 가족 단위의 자립형 경제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슨 새로운 직업 교육을 시키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까지 말한다.
  그렇기에 저자에게 있어서 신용(보증과 담보로부터 자유로운 융자)은 빈곤문제의 유일한 탈출구로서 인권의 차원으로까지 승격된다. 저자는 사회사업이 시장경제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면서 소액융자를 통해 우리사회는 가난과 사회보조금을 동시에 몰아내고 끝내 인간의 존엄과 상호신뢰, 연대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종래의 미시경제학 이론이 경제활동 주체를 소비자나 생산자로만 파악함에 따라 자립형 노동과 같은 것들은 이른바 비공식 부문(informal sector)으로 주변화되었고, 분석과 처방에 있어서도 불충분성을 드러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라민은행의 실험이 그 사회의 경제구조를 막론하고(자영업 기반 사회-대체로 제3세계 국가들-가 아닌 곳에서도) 뿌리내릴 수 있는 보편적인 모델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또한 오늘날처럼 경제적 성공의 가능성이 (권력과 부를 한층 집중시키고 있는 일부 기득 독점세력을 제외하고는) 전 사회적으로 협애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그와 같은 고리(편차가 있지만 서민금융도 자선사업이 아닌 이상 결코 저리로 대여되지 않는다)의 대출사업이 과연 튼튼하게 지속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가난을 (정책입안자들이나 사회구성원들의) '의지'의 문제로 치부하는 저자의 시각은 지나치게 순진한 유토피아주의이거나 따뜻한 자본주의의 가면을 쓴 생산적 복지(workfare)론의 아종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가난은 세상만큼이나 오랜 것이다. 그라민은행 모델은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일정한 성공을 거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다 너그러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모색의 하나로 참고할 만한 시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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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2-05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변질되었죠...휴

묵향 2015-02-13 12:31   좋아요 0 | URL
안타깝게도... 많은 순수함들이 한국 사회라는 장(場)에만 들어오면 이리저리 다양하게 왜곡되어 순진함으로 귀결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인민주의 비판 공감이론신서 25
정인경.박정미, 윤종희, 박상현 지음 / 공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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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문장 한 문장 버릴 게 없다.
  2005년에 출판된 이 책은 원래 노무현 정부를 분석하는 우회로로서 제출된 것이다(인민주의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나 아르헨티나 메넴 등의 정치가적 인민주의를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인민주의가 부상하는 정치경제적 토대(세계체계의 위기라는 조건)가 변하지 않았고, 인민주의적 유산 역시 건재하기 때문에 이 책이 던지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2) 시간 관계상 서문의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서문이 그 자체로 명문이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는 현대 정치의 조건으로서 민족국가를 해체한다. 자본의 초민족화가 가속되면서 개별 민족국가는 경제정책의 자율성을 상실한다. 의회가 더 이상 계급적 타협을 위한 안정적 합의를 담보하지 못하는 반면, 경제부처를 중심으로 초민족화된 기술관료의 영향력이 강화된다. 그 결과 정치와 대중의 분리는 심화되고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정치와 여론 조작이 그 공백을 채움으로써 정치위기가 일반화된다. 20세기 후반에 다시 출현하는 인민주의는 이 같은 정치위기를 표현하는 동시에 그 경향을 더욱 강화한다.

  인민주의는 경제위기와 정치위기에 따른 대중적 불만에 기초하여 태동한다. 기존 정치에 대한 거부와 공격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반정치의 정치'로서 인민주의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가와 정치제도를 ‘적’으로 규정하는 ‘원한의 정치'를 통해 대중을 동원한다. 인민주의는 기존 정치․경제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파괴력을 갖고 있지만, 대중의 능동성과 자율성을 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수동적 종속을 심화한다. 이런 점에서 인민주의는 해방과 변혁의 정치를 표방하는 사회운동과 크게 대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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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3.0 - 김광수 소장이 풀어쓰는 새시대 경제학
김광수 지음 / 더난출판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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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의 한국경제』(김광수경제연구소, 휴먼앤북스)가 시기시기마다 발표된 보고서 내지 경제시평의 모음집이라면, 『경제학 3.0』은 칼럼집에 가깝다. 후자는 쉽게 풀어쓰긴 했으나 전자와 겹치는 부분이 많고(아니, 오히려 새로운 내용이 그리 많지 않다) 통계자료 등이 생략되다 보니 도리어 임팩트가 떨어져 버렸다. 전자를 읽었을 때의 명쾌함이나 풍부함 같은 게 많이 떨어진다. 보지는 못했지만 강의 CD까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민간 전문 싱크탱크”를 표방하는) 김광수경제연구소를 소개하기 위해 기획 출간된 책처럼 느껴진다. 『경제학 3.0』을 진작 사놓고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정도만 읽고 (큰 흥미를 못 느껴) 덮어 두었는데, 만약 『위기의 한국경제』를 헌책방에서 발견해(이 충실한 책에 2,000원을 메겨 두다니, 이건 거저에 가깝다) 먼저 읽지 않았다면 아마 한참 뒤에나 읽게 되었을 것 같다. 『위기의 한국경제』를 먼저 읽기를 잘 했다고 생각한다. 『위기의 한국경제』를 읽었다면 『경제학 3.0』은 굳이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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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대한다 - 4대강 토건공사에 대한 진실 보고서
김정욱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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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맥없이 자지러지는 둑이여, 마음이여

  가엾어라 발 앞의 어둠이여

  왜 듣지 못하나 이 강물 소리를


* 장석남 시인의 시구들을 차용해 필자가 작성



 "낙동강 몰개를 막 파 제끼 싸놓으이 글타 카대요. 소문내지 마이소. 잘 모하몬 마카 다 붙들리갈라."

 - 2011. 7. 1.자 경향신문에서 주민 이모씨(44)의 말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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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단체의 경영
피터 드러커 지음, 현영하 옮김 / 한국경제신문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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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좌, 우 진영을 막론하고 사회 전반의 문제를 모두 국가가 해결할 수 있고, 또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투표를 하고 세금을 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늘 한계가 있었으며, 이들 문제들을 시장에 맡긴다 하여 해결될 것도 아니다. 이에 따라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의식적인 개인들의 연합체로서 사회 부문 내지 비영리단체가 대두된다(피터 드러커는 비영리단체가 진정으로 지속적인 ‘성장산업’이라고 말한다). 물론 국가 대 사회라는 허구적 이항대립은 지양되어 마땅하고,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보충하는 이른바 NGO들과의 섬세한 거리두기가 필요하겠으나, 여기서는 그 논의를 생략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관하는 개념으로 ‘비영리단체’라는 용어를 그냥 쓰기로 한다.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면, 비영리단체란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는 조직이다. 비영리단체는 자아를 실현하고 이상을 펼치며, 신념을 갖고 신념대로 살 수 있는 삶을 돕고 충족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서비스를 제공하여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향유하도록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용자들이 이를 통해 어떤 변화를 겪고 적극적 참여자로 되어, 이제는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비영리단체도 수혜하게 되는 사회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른 사람의 계발과 발전을 도움으로써 나 자신을 계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비영리단체의 중요한 활동영역이다.


2) 비영리조직의 세계에서 ‘경영’이라는 개념은 그간 관심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금기시되어 왔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영리사업과의 결탁을 암시하는 것처럼 여겨졌고, 비영리조직이 영리사업을 하지 않을 것이라면 경영을 둘러싼 그 어떤 것과 연관을 맺어 덕 볼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영리조직에서 성과의 문제가 제기되는 순간 “우리가 선한 일로서 봉사를 하고 있는데 성과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사람들의 생을 좀 더 선하게 변화시킨다면 그것 자체가 성과이고, 결과가 아닙니까?”하는 반문에 직면하기 십상이다. 그러다가 조직 자체를 선이요, 궁극적인 목적으로 확신해버리는 함정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그런 좋은 의도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비영리단체의 이익 내지 성과를 평가하는 뚜렷한 기준이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더욱 경영을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영리단체는 무보수 내지 낮은 보수로 헌신하는 활동가와 자원봉사자들, 기부금 헌납자들의 순수한 신뢰에 바탕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측면에서도 더 신중하게 자원을 운용해야 한다. 강력하고도 효율적이며 목적의식적인 경영은 비영리단체에도 필요하다.

 

  물론 비영리단체에 몸담는 사람들은 각자 어떤 선한 동기에서 일을 맡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동기 자체를 보람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비영리단체가 만약 조직의 관리와 경영에 합당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활동가들이 과로로 인한 Burn-out 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사명감이 아무리 투철한 사람이라도 이를 영원히 감내할 수는 없다. 비영리단체의 경영방법을 가다듬는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활동의 지속가능하고 견고한 기반을 고민하고 탐색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할 때 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본래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직접적으로 투자할 수 있다.


3) 뭐, 그리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피터 드러커의 책(혹은 경영학 서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을 읽다보면 이런 내용에 학문이라는 이름까지 붙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울 때가 많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그저 말잔치라고 여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별 내용 아닌 것 같은데도 예상보다 포스트잍 flag를 많이 쓰게 하는 힘이 피터 드러커에게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수양록 같기도 한 이 책을 읽으면서 이따금 얼굴이 화끈거렸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미국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총연맹(The American Federation of Teachers AFL-CIO)의 위원장, Albert Shanker 씨의 인터뷰가 실린 장이었다.


4) ‘시민’이란 바로 지금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자, 이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슴 뜨겁게, 신나게 비영리단체를 꾸려 경영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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