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책이 우스개 섞어 지적한 허점들에 제법 수긍이 간다. 법이 시행되자 세세한 부분에서는 입법 당시 미처 예측하지 못한 불합리, 불균형들이 드러나 오락가락한 사례들이 꽤 있는 것 같은데, 법을 나름대로 정성껏 분석한 티가 난다. 프리덤월드라는 출판사가 어떤 덴지는 알 수 없지만(이 책 말고 유이하게 낸 책이 오스트리아학파를 다룬 『대중을 위한 경제학』이라는 점에서 짐작만 할 뿐이다), 제대로 된 교열을 거치지 않은 티도 난다. 예컨대, 책 119쪽에 아예 마치지 않은 문장이 있고, 책 135쪽, 147쪽 등에 잘못 쓴 글자도 많다.




  그물을 아주 촘촘하게 엮어 피라미, 새우까지 모두 잡고자 하였지만, 한쪽 구석의 큰 구멍으로 숭어, 잉어는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책 125-126쪽). 구체적 사례에서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되는지를 당사자도, 법률가도, 유권해석을 하는 권익위조차도 여전히 시원하게 답을 내릴 수 없다는 점은 불이익처분을 규정한 법이 갖추어야 할 '명확성 원칙'에 반한다고 볼 소지가 있다(법에는 3-5-10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치페이하면 된다'는 것만으로는 이들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


  숭숭한 빈틈을 약삭빠르게 빠져나갈 잔머리, 분석력, 시간과 체력이 없으면 결국 방어적이고 보수적으로, '애매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전략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책 172쪽). 행정가들은 이제 현장을 더 모른 채 탁상에서, 엉뚱하고 생뚱맞은, 때로는 기괴한 일들을 벌이게 될 공산이 훨씬 커졌다. 바보가 되어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편이 한결 안전하므로... 우리나라를 여전히 자유당 시절과 같이 부정부패와 비리가 만연한 사회로 진단하는 시각도 물론 타당한 일면이 있기는 하나, 법이 본의 아니게 주된 과녁으로 삼아버린 일선 공무원들의 수준과 의식은 걱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높아져 있다고 생각된다. 아니, 일자리 갖기가 얼마나 힘든 시대인데, 그렇게 힘들게 공부해서 어렵사리 맡게 된 직책을 쉽게 차버리는 그런 위험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일부 소수를 제외하고는 겁도 없이, 용감하게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다만, 이번 예천군의회 사태도 그렇고, 본업이라기보다는 덤으로 주어지는 자리에 가까운 선출직은 잘 모르겠다. 평소에 어떻게 살았든 뽑히면 그만이고, 선거에서는 이기는 것이 최고선이니까...). 여하간 요즘 들어 더 하게 되는 생각은, 이러한 것들은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부분 같다(이 나라 저 나라, 이 지역 저 지역을 겪어 보면, 추상적/복합적 사고, 권리의식, 다양성과 소수자에 대한 존중, 폭력 민감성과 같은 사회의 기본 수준이라 할 것들이, 시류나 문화적 배경에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측면은 있어도, 경제가 성장하고 '평균'소득이 늘어남에 따라 일정 수준까지는 전반적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단적으로 거리 구석구석의 디자인만 보더라도, 길어지는 불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도 취향이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이 끝내 맥주시장의 배치까지 바꾸어내는 데 성공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아무래도 지방 소도시에서는 규범이 지체된다.).


  적용대상자들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바로 그것이야말로, 이 법이 갖는 '선언적 의미'라고 기리는 견해도 꽤 있는 것 같은데, 실제 집행이 아니라 선언에 법이 자꾸만 쉽게 동원되는 것은 우려스럽다. 선언을 위한 법은 필연적으로 자의적, 차별적 집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법은 일단 세웠으면 틀림없이 집행되도록 하여야 하고, 틀림없이 집행될 수 있는 것들만 법으로 규정하여야 한다. 형벌규정은 더욱 그렇다. 행운에 의존하는 법을 만들어 그것이 집행되기도 하고, 집행되지 않기도 하게 내버려두는 것은 법 전반에 대한 냉소를 부추길 뿐이다. "법은 최소한의 규범"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존재감을 뽐내려는 정치인들의 이해관계 내지 유인구조와 맞물려, 최근 들어 이와 같은 '최대주의'적 입법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그러나 법 집행의 현장은 언제나 사회 현실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이런 법을 만들었노라' 하고 언론에 한 줄 나오고 카메라 세례를 받고나면 그만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 법이 실제로는 어떻게 작동할지, 또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면밀히 보아야 한다).


  법은 만능이 아니다.

  그 어떤 시험도 상위권과 하위권의 변별력을 동시에 가질 수 없는 것처럼,

  [교육당국은 그간, 수능시험을 운전면허 필기시험 같은 자격시험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과 학력고사로 만들어야 한다는 모순된 주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여 왔다. 그런데 대중의 관심은 자꾸 누군가가 불공정하게 'SKY캐슬'에 입성하는 게 아닌가에 쏠린다. 강력한 경제적 유인이 존재하고, 돈으로 시간과 노력을, 그것도 정형화된 상품과 맞춤형 상품 중에 필요한 것을 골라 쉽게 살 수 있는 고도화, 다각화된 사교육시장은 그 어떤 조치도 비웃으며 언제나 교육당국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논다. 특정한 문제를 공교육이나 EBS 시청만으로 풀 수 있는지로 옥신각신할 것이 아니라, 국가 단위 시험은 '촘촘하게 정규분포하도록만' 해놓고, 대학이 고르게 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다.]

  또 최저임금 인상의 역설에서 뼈저리게 겪은 것처럼,

  [말이 사장이지 더 이상 안정적 근로소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을 때 여는 것이 치킨집이다. 우리나라 자영업 비율은 OECD 평균의 두 배에 달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높고, 근로자 가구와 근로자 외 가구의 소득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직장 다니다 가게를 열면 생애소득이 왕창 줄어든다. 자영업자가 된다는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도 정책도 누구를 목표 삼을 것인가를 실증 분석과 세심한 모형 예측을 통하여 분명히, 똑똑하게 세워야 한다. 이는 좋은 뜻과 착한 마음만으로는 이루기 어렵다.


  다음 논문도 참고할 만하다.

  최한수, "경제학자 관점에서 본 김영란법의 문제점", 법경제학연구, 제13권 제3호 (2016. 12.) (알라딘 서재에는 논문 제목에 링크를 걸어두었으나, 북플에서 클릭이 안 되어 링크를 다시 건다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7241018)


  전에 한 번 쓴 것처럼, 법이 워낙 아리송하다 보니 대중의 불안을 틈타 한몫 벌어보려는 양심 없는 책들도 꽤 나왔다[모든 기업과 단체가 그간 해오던 일들을 모조리 다시 따져보아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결국 '대중'이다. 자신들에게 법이 적용될 수 있다는 의식조차 없는 채 법을 어기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법을 적용받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법을 지킬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면, 그 법은 규범력을 가질 수 있을까? 잠재적으로 모든 국민에게 적용되는 법에 이렇게나 많은 해설서와 그때그때의 '유권해석'이 필요한 상황은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비교를 위하여,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것과 술 마시고 운전대 잡으면 안 된다는 규범은 얼마나 단순하고 명쾌한가(다만, 음주운전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결코 처벌이 약해서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형량을 높이는 방식으로는 이미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음주운전을 현격히 줄이거나 없앨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기회에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일단은 다 차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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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01-13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김영란 씨가 유명하긴 유명하군요.
이렇게 책이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ㅎ

2019-01-14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찍 자려다 한 해 마지막 날이라 하니 왠지 잠이 오지 않아 가볍게(?) 읽어치울 책을 한 권 빼들었다. 이 분의 놀라운 이력에 흥미를 느껴 산 책이다. 알라딘 평점도 나쁘지 않고. 그런데...


  석좌교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셨나 보다...

  별의별 이야기를 다 욱여넣으셨다.


  솔깃한 대목도 없지는 않은데 헛웃음이 나오는 뜬금포가 많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1960년대 한국에서는 국내 대표적 대기업이 밀수를 하다가 탄로나고, 충분히 이익을 내고 있는 기업들이 독성 폐기물을 하천에 방류하다가 발각되는 등 많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런 비리들은 이익 최대화 목적함수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인용자 추가: 자, 여기서부터 심호흡) 철학자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등 저서를 통해서 인간의 이성을 비판했다. 이성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속성의 하나이지만, 그것이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이성이 중요한 만큼, 자본주의 체제 속의 기업에게는 이익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익 최대화 목적함수가 사회에 많은 부작용을 일으킨다면 그것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책 145쪽)


  도대체 칸트는 왜 구태여 끌어다 쓰신 건지;;; 게다가 저 두 권이 '인간의 이성을 비판한 책'이라고 요약하면 될 책인지;;; (하지만 아직 『판단력 비판』이 남았으므로 충격받기엔 이르다...)


  이런 문단도 있다.

  "자유경쟁 사회에서는 아무리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도 자기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 나타나면 패자(loser)가 되어 도태된다. 이는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부조리(不條理, L'absurde)의 하나이다. 실존주의 작가 카뮈(albert Camu)에 따르면, "부조리란 인생에서 의미를 찾으며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인간을 좌절시키는 세계의 비합리성(irrationalness)"을 말한다. 이런 비합리성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세계는 고뇌하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고 했으며,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지성인은 패배 속에서 승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지성인의 패배, 지성의 희생은 신(god)이 가장 기뻐하는 것"이라고 은유적으로 말했다."(책 157쪽)


  부조리하게 동원된 까뮈(Albert Camus), 하이데거, 키르케고르에게 괜히 미안해진다.


  하지만 칸트 선생님에 비하면 뭐...

  "(...) 칸트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상상력도 자기완성(self-completion) 능력은 없다. 인간이 상상해낸 것이 언제나 실현 가능하고 실제 환경에 부합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상력은 그 실현 가능성을 검증받기 위한 '탐색시행'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이유로 상상력은 11장의 탐색시행으로 이어진다."(책 208쪽 10장 Intro의 후반부) 


  자, 이제 3대 비판서를 완성시킬 때가 되었다.

  "이런 상상력의 오류는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을 통하여 인간의 판단력을 비판했다. 인간의 상상력도 이런 비판을 받아야 한다. 상상력의 오류가 천동설(天動說)이나 지구 평면설(平面說)처럼 오류 그 자체에 그치면 다행이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인류에 치명적인 폐해를 주는 일도 많다. 역사적인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책 232쪽)


  이어지는 '역사적 사례'에는 "히포크라테스의 잘못된 상상력"이라는 작은 제목이 붙어 있는데, 히포크라테스의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2천여 년 동안 의료계에서 활용된 방혈요법 때문에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인후염에 걸렸다가 2.5리터 피를 뽑고 이틀만에 사망했다는 '역사적 사례'이다... 상상력으로 가닿기에는 역사적 연대가 너무 떨어져 있는 거 아닌지...


  그 밖에도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웹상에는 서울대 독어독문학과로 입학하셨다가 1학년을 마치고 물리천문학과로 전과하셨다는 정보와 두 학과 다 학사를 졸업하셨다는 정보가 함께 있는데, 어쨌든 물리학을 전공하시고(전체 수석으로 졸업하셨다 한다ㅎㄷㄷ) 전기공학 박사이신 분답게, 자연과학, 공학 원리도 논거로 많이 활용된다. 이 분 책 중에 제목에 혹해 산, 『계량적 세계관과 사고체계』라는 책도 집에 있는데, 여튼 과학기술 이야기는 재미있게 읽을 만했다.

  다만, 이걸 당신의 경영학 이론에 갖다붙이시는 과정에서 때로는 무리수(교수님처럼 "irrational number"라고 부연해봄) 내지는 유사과학(pseudoscience)스럽게 되어버리는 것은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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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19-01-01 0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고 특이한 이력을 가진 분이다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왠지 손이 안가더군요. 혹시 이분이 <니체는 나체다>를 쓴 저자의 스승이 아니실지 ㅋㅋㅋ 여튼 써주신 글을 보니 왠지 이분이 스승이실듯 ㅋ

묵향 2019-01-01 13:50   좋아요 0 | URL
Nykino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니체는 나체다』 리뷰 쓰신 것을 읽어보니, 딱 그 느낌이 맞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책 181쪽 이하에 실제로 ‘나력(裸力, naked strength)‘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부분도 일관됩니다.

˝(...) 나력의 개념은 인간이 창조한 작품에도 적용될 수 있다.수에즈 운하 개통을 경축하는 행사에 쓰기 위해 베르디에게 위촉하여 작곡된 오페라 <아이다>는 경축 행사가 끝난 뒤, 즉 옷을 벗은 지 100년이 넘었지만 오늘날까지 인류의 사랑을 받고 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의 격전지 게티즈버그에 국립묘지를 헌정하는 연설에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영원히 멸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 행사가 끝난 지 2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나력을 유지하고 있다.˝(책 182쪽)

이렇게 떠오르는 대로 읊으시면 나력의 산물 아닌 작품이 없을 것 같은데... (경영학 책들이 대개 그런 면들이 좀 있지만) 10년마다 내신다는 대작으로서는 싱거운 책입니다. 역시 꼭 읽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초란공 2019-01-01 14: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려한 이력을 상세히 밝히셨기에 조사하보면 왠지 재미있을 것 같은 분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부러운건 화려한 이력이기보다 지하 벙커보다 더 두꺼울것 같은 이 자신감/절대무한긍정의 태도라고 할까요. 대부분 무기력하고 우울한 저로서는 ㅋㅋ 내심 배우고 싶은 점입니다. ^^아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묵향 2019-01-01 23:42   좋아요 1 | URL
이전에는 책만 있으면 우울과 무기력을 언제라도 털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편이었는데, 세상살이가 늘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더라구요~ 윤 교수님도 짧지 않은 세월 중에 그런 시기가 분명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새해에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프로폴리스 2019-02-14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사회학 하시는 교수님들은 글쎄요..제가 아는 선에서는 대개가

묵향 2019-02-15 10:14   좋아요 0 | URL
윤석철 교수님은 경영학과 교수님이시지만, 물리학과를 졸업하시고 전기공학 박사시라고 하네요~
 


  에스토니아는 올해로 (러시아로부터의) 독립 100주년을 맞았다.


  2차 세계대전 후 다시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었다가 노래혁명 후 1991년 다시 독립을 선언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여담이지만, 인구 130만 명에 불과한 에스토니아가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 러시아 등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언어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전국 노래자랑' 덕분이었다. Laulupidu라 불리는 이 행사는 1994년부터는 5년마다 열리고 있는데, 바로 내년 2019년이 27회째 송 페스티벌이 열리는 해이다(7월 4일부터 7월 7일까지).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공연장에서(노래혁명 때는 30만 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무려 3만 명에 달하는 참가자들이 며칠 내내 노래를 부르고, 순위는 매기지 않는다. 에스토니아 송 페스티벌을 이끈 송(song)해 아저씨 같은 분이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Gustav Ernesaks(1908. 12. 12. ~ 1998. 1. 24. 생몰연대에서 알 수 있듯, 에스토니아 현대사의 영욕을 모두 보셨다. 우리로 치면 대한제국부터 IMF 위기에 문민정부 말까지이다. 아래 사진 참조)인데, 마지막날, 이 분이 Lydia Koidula의 시에 음을 붙인 "Mu isamaa on minu arm (나의 조국은 나의 사랑입니다)"를 부르는 것으로 행사가 마무리된다. 위 노래는 소비에트 시절 비공식 국가처럼 쓰이기도 했는데, 가사와 도입부 때문에 에스토니아 국가와 곧잘 혼동되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공식페이지 https://2019.laulupidu.ee/en/와 다음 2014년 영상을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OneQRawdLv4 또 여담이지만, 에스토니아 국가와 핀란드 국가는 신기하게도 같은 멜로디를 쓴다.].



  

  우리와 에스토니아의 인연은 물론 고려인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30982), 실질상 1988년 서울올림픽 때부터 시작되었다. 사이클 트랙에서 금메달을 딴 에리카 살루메는 "나는 (소련인이 아닌) 에스토니아인"이라고 말해 화제가 되었고, 소련 국적으로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딴 에스토니아 선수들이 에스토니아로 돌아가 소련 국기가 아닌 에스토니아 국기를 대규모 군중들과 함께 흔든 것이 1991년 에스토니아 독립의 도화선이 되었다(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8&no=101253).


  계획에 없이 다른 이야기가 자꾸 튀어나오는데, 1996년 한 목사님 가족이 탈린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정착하시고(지금도 올레비스테 교회를 중심으로 예배와 한인 모임을 이어가고 계신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특히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열풍에 힘입어(?) 에스토니아는 뒤늦게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다(비트코인의 창시자, 나카모토 사토시의 백서가 나온 것이 2008년 10월인데, 에스토니아에서는 그보다 1년 전부터 유사한 보안 기술이 개발되고 있었고, 이제는 국가 차원의 ICO를 고민하고 있다. https://www.coindeskkorea.com/비트코인-이전에-에스토니아에-블록체인이-있었다).


  사실 에스토니아는 이미 2005년경부터 국가 전략을 '디지털 공화국'에 두고 꾸준한 혁신을 해왔다. 일본과 유럽 여러 나라들은 일찌감치 이를 눈치채고 긴밀한 교류협력을 이어오고 있다(NATO는 탈린에 합동사이버방어센터를 설립했고, 최근 룩셈부르크에는 데이터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아베 신조 총리는 에스토니아 전자영주권자이기도 한데, 2018년 첫 방문국을 에스토니아로 잡을 정도로 에스토니아를 중시하고 있다(일본은 전자영주권 제도를 먼저 확립한 에스토니아의 도움을 받아 주민등록제도를 개편하였다 https://www.economist.com/europe/2017/07/06/estonia-is-trying-to-convert-the-eu-to-its-digital-creed 사실 내가 에스토니아에서 심상찮은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음을 직감하고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한 것도 이코노미스트지 덕분이었다). 반면 우리는 케르스티 칼률라이드Kersti Kaljulaid 에스토니아 대통령이 평창동계올림픽 때 자국 선수단을 격려하기 위해 제 발로 한국을 찾았을 때에도 의례적인 회담만 가졌을 뿐인데, 지난 10월 칼률라이드 대통령이 세계지식포럼 등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방한하였을 때에야 국회에서 초청강연을 여는 등 법석을 떨었다[칼률라이드 대통령 이 분은 상당히 흥미로운 과정을 거쳐 대통령이 되셨는데, 우선 네 아이의 어머니이시고, 2016년 8월부터 시작된 에스토니아 대통령 선거가 9월까지 연장되어 세 차례에 걸친 원내투표(간선제이다)를 하고도 당선자를 가리지 못할 때까지 대통령 후보로 등록조차 하지 않은 무명의 정치인이었다. 각 정당 원내대표와 국회의장, 부의장 등으로 구성된 원로회의가 소집되어 이 분을 잠재 후보로 삼기로 한 뒤 9월 30일에야 공식적으로 후보 등록을 하였고 타 정당의 유력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싫어하였던 정당들로부터 두루(?) 지지를 받아 결국 당선까지 되었다(토머스 제퍼슨을 선출한 1800년 미국 대통령 선거도 연상된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않은 대통령이었지만 지금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여하간 에스토니아는 전 세계로부터 폭발적 관심과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고, 유럽의 실리콘밸리, 4차 산업혁명의 허브로 도약하고 있다(세계은행 디지털 국가 순위 1위, 세계경제포럼 기업가 정신 1위, OECD 평가 조세 경쟁력 1위...). 


  에스토니아는 작은 크기에, 인구가 적고 젊음으로 인한 기동성을 십분 활용하여, 작은 아이디어의 단초라도 바로 실행전략을 짜서 행동으로 옮긴다(맨날 '창의', '혁신', '실험' 이런 생각만 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던 것이, 다소 가벼운 자리에서 내가 지나가는 말로 툭 내뱉은 아이디어를 메모하더니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당장 회의를 잡아야겠다며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다른 글에서 에스토니아 고위직이 대단히 젊다는 이야기를 쓴 적이 있는데, 참고로 대통령은 1969년생, 총리는 1978년생이고, 국가 CIO인 심 시쿳Siim Sikkut은 01학번, 전자영주권 총괄대표인 카스파르 코률루스Kaspar Korjus는 07학번이다.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은 오히려 이들의 젊고 열린 생각을 보좌한다). 국가라기보다는 하나의 기업처럼 민첩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그 바탕에는 "기술 분야에서 국가가 민간을 앞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부는 기술 개발에 투자하는 '주체'가 아니라 '퀵 팔로워'일 뿐이다. 정부가 할 일은 단지 기술 진화를 위해 법적인 토대를 만들고, 민간이 경쟁에 뒤처지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기술 개발 자체는 민간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이다."(책 65쪽)라고 하는 확고한 철학이 깔려 있다(서울시가 추진하는 '제로페이'를 보면 역시 서울시에서 개발했다가 사라진 택시 호출 앱 '지브로'를 떠올리며 한숨짓지 않을 수 없다).


  블록체인에 관해서도 상당히 합리적이고 균형있게, 실사구시적으로 사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블록체인 기술을 현실에서 가장 활발하게 적용하고 있는 기업, 가드타임의 Martin Ruubel 사장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블록체인이 바꿀 세상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지 않아도 된다. 블록체인은 아파트로 비유하면 재건축이 아니라 리모델링 기술이다. 불록체인이 기존 시스템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블록체인은 기존 시스템에 통합되어 새로운 장점을 찾아가는 기술로 봐야 한다. 블록체인을 논의하면 일반적으로 암호화폐, 스마트 컨트랙트부터 떠올리지만 이보다 중요한 가치는 상호 간 신뢰성에 기반한 새로운 기술이다. (...) 블록체인 기술이라도 보안 측면에서 100%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정치가나 행정가들이 100% 완벽한 사이버 방어 장치를 만들겠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불가능한 목표이며 100% 안전한 사이버 보안 장치는 없다. 책임 있는 리더라면 취약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가정하고 어떻게 대처할지, 잠재적 가해자 배후에는 누가 있을 수 있는지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책 129~132쪽)


  모든 행정망과 민간 DB를 연결하는 X-Road도 부럽기만 하다. 조금 구경할 기회가 있었는데, 민관 각 참여 주체들이 개인정보들을 분산 저장하되 필요할 때 당사자 동의와 기관의 승인을 통해서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건강기록은 핀란드와도 연결하여 에스토니아, 핀란드 사람들은 서로의 나라에서 편리하게 진료받을 수 있다(핀란드인으로부터 에스토니아를 '작은 동생little brother' 정도로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도를 보면 헬싱키는 탈린의 정북 방향에 있다. 비행기로는 이착륙까지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탈린의 서쪽으로는 스톡홀름이, 동쪽으로는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있다. 어떻게 한자동맹의 중심 무역항이 되었는지를 지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바다 진출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가 훗날 탈린에 당도하여 '이 곳을 조금만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하고 아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좌우간 이러한 것들도 우리나라의 현재 인식수준과 논의지형에서는 거의 꿈꾸기 어려운 일이다.


  책은 중언부언 나열식에, 수박 겉핥기, 용두사미가 된 감이 없지 않지만, 기자로서 할 일은 충분히, 그것도 때맞추어 신속히 잘 해주셨다고 생각한다. 기업들이야 기회가 있으면 알아서들 할 것이고, 이제 개발자, 연구자들과 위정자들이 파고들 차례이다(에스토니아 연구정보 포털 https://www.etis.ee도 기가 막힌데,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그동안은 어떤 연구를 해왔고, 지금은 어디서 돈을 받아 누구와 함께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투명성'이라는 무기를 통해 더 많은 기회와 협업을 도모하겠다는 거다.). 알고 있는 것을 어딘가에는 풀어둘 필요도 있을 것 같아 주저리주저리 간략하게나마 써보았다.


  덧1. 5장에 실린 법인 설립에 관한 여러 팁과 정보는 어느 정도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에스토니아는 정말 많은 것을 (특히 그것이 외국자본 유치에 필요한 사항이라면) 온라인에, 영어로 공개해두고 있다.


  덧2. 6장은 나머지 발트 3국 멤버인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를 짧게 다루었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 아래에서부터 리투아니아(수도 빌뉴스), 라트비아(수도 리가), 에스토니아인데, 인구도 아래에서부터 280만, 190만, 130만 정도이고, 면적과 GDP도 그 순서이며, 놀랍게도 각각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쓰기 때문에 서로 말이 안 통한다(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사람들이 각자 자기네 말로 떠들어도 소통이 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1인당 GDP는 에스토니아가 2만 달러 정도로 가장 높다. 삼성전자가 1999년, LG전자가 2006년 리가에 진출하여 현지 법인을 두었는데, 올해 9월 우리와 라트비아가 항공협정에 서명하여 주3회 직항노선이 생길 예정이다.




  덧3. 국내서 몇 권을 보태어 본다. 책이 많이 부족하다. 티나 유진선 님의 『북유럽 셀프 트래블』은 매우 훌륭한 책이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여 탈린(에스토니아) 정보가 많이 부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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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아지는 수요에 부응하는 발빠른 출간. 단행본으로서는 세계적으로도 앞선 것 같다. 블록체인도, 에스토니아에 관하여도, 이제 옥석을 가려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해나갈 때라 생각하지만(또 자연히 가려지겠지만), 먼저 기대를 갖고 읽어보려 한다.


기본적인 설명은 아래 공식누리집 자료들을 참조.

https://e-estonia.com/tag/blockchain/

https://e-estonia.com/wp-content/uploads/faq-a4-v02-blockchai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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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 개정판
카스 R. 선스타인 지음, 박지우.송호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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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너무너무너무 훌륭하다. 별점 열 개로도 모자랄 지경.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결론부에 내용이 대체로 잘 요약되어 있고, 상세한 리뷰는 다음 기회에... 더 많은 정보를 갖고, 더 나은 결정을 하기 위해 이견을 환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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