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한국 영화이다.
윤동주를 그린 영화 동주는 2016년에 박열의 삶을 그린 영화는 2017년에 개봉한 것으로 따지면 유관순의 삶은 너무나도 늦게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스페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기 전, 영화가 개봉해서 다행이다.
영화를 보면서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주 울고 싶었다.
유관순의 이야기였지만 유관순과 같은 방을 쓰던 사람의 이야기가 더 사무쳤다. 그저 자신의 삶을 살던 사람이었을 뿐인데, 자식이 죽어 일본군에게 자식을 살려내라고 했다고 아니면 아는 언니의 발이 일본군이 휘두른 칼에 잘려나가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잡혀들어왔다는 숨소리가 더욱 슬펐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문득 머릿속에 전장연이 생각났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는 매일 그렇게 만세운동을 하는 것처럼 한강다리 위를 기어다니고 도로를 막고 시청사를 점거했다. 그저 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만세를 외쳤던 1919년의 3.1운동처럼 전장연에 있는 많은 사람이 그저 살아보겠다고 아직도 거리에서 몸을 던져 기어다닌다.
유관순은 같은 방을 함께 쓰는 사람 앞에서 울며 이야기했다. 자신에게는 이 운동이 그저 관념일 뿐이고 의무였을 뿐이라고.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생각은 모두 달랐다. 어떤 사람에게는 독립이라는 것이 그저 관념일 뿐이었지만, 어떤 사람은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만세운동을 한 것이었다.
사실. 이런 글을 쓰면 욕을 먹을 수도 있는데 조선인이지만 일본이름으로 자신을 바꾸고 유관순 고문에 동참했던 니시다의 슬픔어린 모습을 동정한다. 그가 출근길에 같이 일을 하는 일본인을 만났을 때, 인사를 건넸다. '오하이오'.
니시다에게 돌아온 것은 인사가 아니라 냉소였다. '저게 뭐야. 어린 애도 아니고.'
니시다가 어떤 사람을 고문한 것은 잘못된 일이나, 그가 어떤 사람에게 차별받으며 살았는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김환향과 같이 일본사람에게 인간 취급도 못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김환향과 니시다의 선택이 달랐을 뿐일거다. 김환향은 죽더라도 인간으로 죽는 것을 택한 것 뿐이고, 니시다는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선택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