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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종말 - 개정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영호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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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에 대한 단상

종말이라는 단어는 가소롭다. 실상, 종말은 것은 ‘인간의’ 종말 일 뿐이니까. 베이컨의 말을 빌리자면 ‘종족의 우상’이다. 천지에 사는 것이 어디 인간뿐이겠는가. 오히려 다른 종에게 인간의 종말이란 긍정적인 사건에 가까울게다. 생각해 보건대 일상문법상 종말이라는 어휘가 담을 수 있는 함의는 매우 협소하다. 

역사적으로도 마찬가지, 세계 문명사를 상고해 볼 때 종말이 그 문명의 이슈가 되는 것은 헤브라이 문명 단 하나뿐이다. 그러한 헤브라이즘 문명의 판타지가 서구의 그레코-로망과 기독교 문명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존속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일개 문명의 찌꺼기가 세계사의 주류자리를 꿰 차고 그 사상을 좋은 면이든 좋지 않은 면이든 가리지 않고 여타 문명에 강제적으로 주입시키려는데 있다. 그 선봉이 바로 개신교의 전도주의다.

그 와중에 인간의 역사는 종말이라는 어휘를 둘러싸고 수 없는 종말적 폐혜를 겪었다. 종말론자로 몰려 죽은 사람, 종말론에 가담하지 않아 맞아죽은 사람. 이 범주에는 예수도, 가롯 유다도, 어쩌면 자본의 종언을 말한 맑스도, 반공주의로 먹고 산 박정희도, 그로부터 비롯한 인류의 근현대사의 소용돌이도 포함된다. 이러한 문제는 현실과 신화의 구분이 모호했던 인류 여명기의 관성이 인류 역사를 통털어 멈추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제, 종말에 대한 편견 없는 독해법을 세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종말을 대하는 두 개의 관점을 제시한다. 간단하다. 하나는 낡은 관점으로, 종말론과 협박자의 논리에 휘말려 간이고 쓸개고 빼다 바치는 것, 또 하나는 종말이 독선에 대한 신화적 비판자임을 알고 그와 조화를 모색해 나가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이 바로 본 글에서 제러미 리프킨의 저서, 노동의 종말을 대하는 독해법이 될 것이다.

   

『제러미스트라다무스』

리프킨의 문제의식은 기술발전이 인간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는 자각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술발전이 인간 역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리라고 예언한다. 그러한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산업 혁명기에 발명된 증기기관과 그에 연계되는 컨베이어 벨트다. 그 전까지 수많은 노동력이 달려들어 해결해야 했던 일을 증기기관의 힘을 빌려 단축시킨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전까지 컨베이어벨트의 역할을 해 줬던 사람들에게 ‘기술실업’ 을 야기한다. 어떤 공장장도 비싼 노동력을 사용하기 보다는 싼 값에 컨베이어 벨트를 돌리려는 선택을 할 테니까. 거칠지만 리프킨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기술발전으로부터 비롯한 대량 기술실업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태의 종착역이 바로 노동의 종말이다.

제러미스트라다무스

 

책에서 리프킨은 근 현대사를 아우르는 역사적 근거와, 무수히 많은 기술실업 사례들에 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그러한 결론을 내린다. 예를 들어, 194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목화 생산업에서 기계에 밀려,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북부로의 대 이동을 했으며 북부에서는 이미 자동화 된 생산기계들에 밀려 비숙련 일용직 노동자로 몰리게 되고 결국 하층계급으로 떠밀린 현상은 리프킨이 말하는 기술실업의 대표적인 예다. 또한 도요타를 필두로 한 일본의 자동차 기업들이 기계 가동시간을 최고조로 높이는 방식으로 일자리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제조공정이(린 생산방식) 미국 자동차 업계에도 전이되어 이른바 포스트 포디즘을 이끌어 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작업장의 리엔지니어링이 결국 공업,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계층을 파쇄시키고 결국 블루칼라의 종말을 가져오며, 나아가 서비스업의 노동력도 대폭 대체할 것이라고 본다.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강의방식 E-Edu, 사서가 필요 없는 정보 도서관, 음악가를 배재시키는 디지털 합성 음악, CG기술의 발달로 인한 영화 엑스트라의 퇴출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예다.


그래서 2003년 미국의 경기 회복세는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고용회복을 동반하지 못했고, 2001년부터 2003년 9월 사이에만 유례없이 3백만 개 가까운 일자리가 소실되었으며, 장기실업자들은 질은 숙련된 노동자와 고학력층으로 높아져 가고 있다고 한다. 이 시대에 중졸이 설 자리는 도대체 어디인가. 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리프킨은 대안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노동시간의 단축, 두 번째는 제 3부문의 강화, 세 번째가 사회적 경제의 세계화다. 과연 실효성이 있는 대안일까?

 

『아스트랄로피테쿠스』

뭔가를 주장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특징은 자신의 주장에 도취된다는 점에 있다. 가령 이명박이 주장하는 경부운하의 장대한 계획을 보라, 허경영의 바이칼 호수를 이용해 수자원을 충당하자는 옹골찬 계획을 보라. 그들은 이미 사바의 번뇌를 넘어 아스트랄의 세계로 향해 가는 자들이니.. 그들을 일컬어 신 인류, 아스트랄로피테쿠스라 하자.

 

노니는 아스트랄로피테쿠스 한쌍


 

리프킨의 첫 번째 아스트랄계 여행은 스러져 가는 노동시장에 대한 분석은 치밀하지만 새로 창출된 노동력에 대한 분석은 전무하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러한 분석의 결여는 다품종 소량생산 사회로 넘어가는 현대사회의 과도기를 과도기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리프킨의 두 번째 아스트랄은 기술진보에 대한 너무도 확고한 믿음이다. 아무리 디지털 샘플링이 발달한다고 해서 베토벤이 죽는 건 아니다. 아무리 AI가 발달하고 인공지능에 의한 실험적인 글쓰기가 성공했다고 해도 소설가들 밥줄이 끊어졌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다.

 

 

결국 기계가 인간의 마인드까지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은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인지과학이 정상과학의 고지로 올라 선 후에. 또, 신경생리학, 컴퓨터 공학, 인공지능학, 전산언어학, 심리학의 연구성과가 한데 묶여 미녀 로봇을 만들어 내고 그 미녀 로봇이 쓴 책의 마지막 구절이 이제 리프킨 즐. 을 선언하는 그 날, 그러니까 최소한 향후 100년 후에나 가능할 거라는 얘기다. 따라서 리프킨의 귀여운 주장에 기술낙관주의자나 SF틱 기술결정론적 사고라는 무시무시한 딱지는 붙이지 않겠다. 본업인 사회학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컴퓨터 공학에 대해서 높은 이해를 쌓지 못했기 때문일 테니까. 

  

리프킨의 세 번째 아스트랄은 세계사적 통시성의 결여다. 그는 미국에 대한 이해가 곧 세계사회에 대한 이해를 대변하듯이 주장한다. 기실, 기술실업의 영향을 받고 있는 미국인구가 세계 인구의 몇 프로나 되는가 하는 문제는 그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세계 인구의 가장 큰 덩어리는 아프리카와 아시아권에 있다는 점과, 일본을 제외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분석이 없다시피 하다는 점도 그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유럽이나 제 3세계의 논의조차 새발의 피 수준이다.

그래서 그의 대안인 제 3부문의 강화가 와닿게 들리지 않는 것이다. 제 3 부문이라 함은 교회나 지역사회, 사회단체 등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지불되는 ‘그림자 임금’(예컨대, 1시간 봉사를 하면 30분 봉사 받을 권리를 화폐화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사회구조가 조밀하게 지역경제를 떠받히고, 이러한 사회적 경제가 뭉쳐 세계적인 구조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현실성이 있는 얘긴가.

도시화 율과 아파트화가 고도로 진척된 한국 사회에서는 지역사회도 없고, 사회단체의 수준은 한심하고, 교회나 종교집단도 없느니만 못한 형국이다. 그림자 임금도 역시 찾아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사활동의 공급은 넉넉한 편이다 개인의 기본의식 구조가 공동체 의식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내 친구 필립이 사는 가나의 경우를 보자, 무려 인구 8000만이 복작거리는 그곳에서는 모두가 지역사회의 일원이고, 삶이 봉사활동이고, 국가 전체가 사회단체이자 종교단체다. 가나가 꼭 미국사회처럼 발전하게 될까? 인도도?  


『결론- 리프킨과 꿈을 꾸자』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이라는 예언서를 들고 우리를 무섭게 다그친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관심은 노동의 종말에 있지 않다. 책에는 종말이 닥쳐왔을 때 지리산에 들어 가라던가, 정도령을 찾으라던가 따위의 언급도 없다. 그의 고민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경제적인 인간 사회구조의 밸런스를 깨뜨리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을 개척할 수 있을지에 맞닿아 있다. 즉, 앞으로 닥쳐올 변혁을 올바로 맞아들이기 위해 제 3부문을 확대하고, 제 3부문에 대한 국제적 연합을 통해 신자유주의라는 리스크에 대해 경계하자는 요지다.

하지만 리프킨의 전망과 진단은 나에게 있어서 체감온도가 높지 않다. 앞서 지적했듯이 리프킨의 견해가 미국사회에 최적화 된 것이며, 사회문화 전반에 대한 그의 견해도 내게는 그다지 설득적이지 못하다. 제 3부문에 대한 언급도 자원봉사단체, 종교단체 등의 여러 제 3부문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한 경험이 있는 본인에게 별로 깊게 체감되는 바가 없다. 특히 그림자 임금에 대한 부분은 우리 사회에서 요원해 보인다.

또 그의 견해처럼 자동화가 우리사회의 실업문제를 위협하는 요소이고, 노동시간 단축과 제 3부문의 확대가 그러한 위협에서 우리를 기적처럼 구해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실질적인 저임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은 노동업무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의 진짜 노동자 계층에 대해 그러한 견해가 희망적일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시장 경제의 작동을 너무 과시’하고 있기 때문일까?

어떤 사회학자가 그랬다. '리프킨이여 꿈을 꾸어라.' 가당찮은 소리 하지 말라는 얘기다. 어쩌면 노동의 종말은 사회학적 예언서에 불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언서가 보여주는 파국적 미래를 현실이 진보하도록 하는 채찍질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무분별한 신자유주의의 지랄발광과, 제 3부문, 국제적 연대, 실업문제에 대해 별 생각 없기가 체계적이기까지 한 우리 사회에 따끔한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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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강호 세트 - 전16권
김용.양우생 지음 / 중원문화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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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고로 강호에는 예의가 있었다. 제자는 사부에게 사부는 사조에게 깍듯했고 감히 후배가 선배를 능멸함이 없었다. 협객들은 사악함을 불 보듯 했으며 협의를 목숨처럼 숭앙했다. 종종 이런 법도를 거스르는 무뢰배들은 마침내 선배 대협들의 한 칼에 자신의 예의 없음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된다. 그것이 무림의 법칙이다. 그래서 대협 김용은 ‘사조영웅전’의 마지막 장에서 ‘그래도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하여 언급했던 것이다.  


나도 소싯적 3류 무협지 강호에서 협의의 길을 걸으며 졸작, 아류작, 삼류작들과 밤 새기를 날밤 까 먹듯 한 인간이지만, 보다보다 이런 예의 없는 무협지는 처음이다. 물론, 김용 대인의 작품 중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소오강호를 그 내용이나 문학성에 있어서 쓰레기라고 매도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내용과 문학성을 저급하게 만드는 번역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간판을 철판으로 코팅한 출판사다.


출판사는 표지 외에 책을 만들기 위한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반면 책을 팔아먹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한 페이지 당 한번이상 등장하는 오자와 탈자, 번역인지 반역인지 모를 오역은 읽는 이로써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양우생의 소설을 소오강호 2부라는 타이틀로 한 세트를 묶어 팔아먹겠다는 심보는 가히 놀부 볼따구를 왕복으로 쌔려줄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독자에 대한 우롱이고, 저자에 대한 모욕이며, 상도에 대한 후안무치다.


그리하여, 무뢰배에게는 정의의 심판이, 예의 없는 출판에는 예의 없는 리뷰가 남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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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7-01-17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점에 0개는 없는 비극...

마노아 2007-01-18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예의 없군요. 저자와 독자에 대한 모욕이에요ㅡ.ㅡ;;;

뷰리풀말미잘 2007-01-18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라님/ 그러게 말입니다! 알라딘은 별점 0개를 허하라! 허하라!
마노아님/ 네, 중원문화사 편집 담당자 뒷통수에 항룡십팔장을 시전하고 싶은 기분입니다.

조선인 2007-01-18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오강호 이부라니. 이런. 꼬르르륵.

뷰리풀말미잘 2007-01-19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정말 꼬르르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achedge7 2008-04-04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출판그대로 우려먹기 반성하라

뷰리풀말미잘 2008-04-06 02:09   좋아요 0 | URL
반성하라! 반성하라!
 
소금가마니 외 - 2005년 제6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구효서 외 지음 / 해토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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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1  about 구효서

구효서는 특출한 작가가 아니다. 주지주의적 기품이 묻어나는 이문열의 글이나, 유장하고 지독한 김훈의 문장, 혹은 참신하고 창조적인 박민규의 필체처럼 어떤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의 문장은 평이하고 담담하며, 자극적인 소재를 찾아내는 후각도 예민한 편은 아니다. 문단에서 구효서의 위치도 늘 그러했다. 수많은 문학상에 번번이 거론되는 것도 그의 이름이지만, 19년의 작가활동을 통틀어 별반 특별한 수상실적을 거두지 못한 것도 또 그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 또한 그의 이름이다. 수많은 "기대주"와 "총아"가 쉴 새 없이 명멸하는 문단에서 그는 은근한 빛을 오래 밝힌 수성의 작가다. 윤대녕의 말 대로 "어떤 소설의 국면에 처해서도 자기 나름의 색깔로 이야기 할 줄 아는 작가"인 것이다. 다른 말로 그의 글에는 꾸준한 생명력을 품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생명력은 오래된 산삼의 약효처럼 응축되어 이제 비로소 제 향을 풍기고 알싸하고 끈적끈적한 진액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로 2005 이효석 문학상을 수상한 "소금가마니"가 그 결과물이다.

소설 ‘소금가마니’에서 이효석이 수성의 대상으로 삼은 이야기는 닳고 닳은 모성신화다. 수많은 고통과 싸워 삶의 현실을 초극하고 끝내는 자식의 마음속에 각인되어 영원히 살아갈 그런 어머니의 이야기다.

 

#. 2. 소금가마니- 세 인물을 중심으로

소금가마니에서는 세 인물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감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키는 어머니와, 빼앗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유품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을 통해 수십 년의 세월을 넘어 어머니를 읽는 주인공 ‘인호’다.

어머니는 '지키는 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패악과 폭력 속에서 애틋한 과거의 사랑을 지켰고, 집안의 경제를 도맡아 지켰고, 나무에서 떨어져 죽어가는 딸을 지켰고, 처가의 어머니와 조카를 지켰고, 자신의 지성을 지켰다. 작가에게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은 '부처'의 모습과 대비되어 나타난다.

“남편에게 얻어맞아 구시월의 늙은 호박처럼 붉게 부푼 몰골로도 아무 소리 없이 두부를 만들고, 그 두부 판돈을 남편에게 빼앗기고, 그 두부 판에 온몸이 처박히게 맞는 일이 되풀이 된다” 그 가운데서도 어머니는 모든 것을 묵묵히 참으며 아이들을 끌어안는다. “마치 눈 안보이는 장님처럼, 안 들리는 귀머거리처럼 (중략)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울음소리 한 번 내 뱉지 않고 모든 것을 초연한 어머니의 모습은 마치, 불당 안에 온화한 모습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미소 짓는 부처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머니가 두부를 만들어 팔아먹고 사는 형편이라 집에는 세 개의 소금 가마니가 있었다. 그런데 그 소금 가마니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덜어져나가면서 뱃구레가 꺼지는 모습이 영락없이 삼존불처럼 보이는 것이었는데 어쩌면 어머니는 소금가마니며 부처인지도 몰랐다.”
 
이런 어머니 상은 소설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어머니의 유품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에서 어머니가 밑줄을 그어가며 읽은 구절(소설에서는 고딕체로 표기된다)과 맞닿아 있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신에게 이르기 위해 무한히 체념하고 다시금 모든 것을 부조리의 힘으로 손에 넣었다. 어머니도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삶 속에서 온전한 자신과 자신을 이루게 하는 요소들을 지키기 위해 '무한 체념'이라는 고행을 실천하며 끊임없이 침묵했던 것이다.

이러한 어머니와 대비되며 소설의 긴장구도를 형성하는 것은 '빼앗는 자'로서의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눈에 불을 키고 어머니에게 '두부를 판 돈'으로 대표되는 그녀의 노동력을 착취했으며 성을 착취했고 그러고서도 죽 한그릇이 새어나갈까 두려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그는 가문의 맥 빠진 힘을 신봉하는 가부장이며, 어머니를 겁간해 임신시키는 마초이고, ‘해산한지 사흘’ 밖에 안 되는 어머니를 다시 생업전선에 밀어 넣어 착취하는 억압자이다. 결국 아버지는 다분히 인과응보적이고 권선징악적인 최후를 맞게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갈등은 아버지가 죽어가며 ‘어머니의 손을 움켜쥔 손’과 ‘한줄기 눈물’을 흘리면서 일단락된다.

주인공 인호는 이런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를 한 시대 건너에서 관찰하는 오이디푸스적 고민의 체현자이다. 그는 아버지를 멸시하며, 회상을 통해 어머니에게 다가가려 하고 키에르케고르의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려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두 책의 밑줄 친 부분을 대조하고 있는 지금,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내가 밑줄을 그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었던 때문이라고.”

무슨 의미일까? 작가는 근대적 어머니, 아버지 상의 대립을 통해 아버지와 정서적 연결고리를 끊어 버리고 주인공 인호라는 매개체로 현대사회와 어머니와의 조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작가는 남성주체로서 품고있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어머니라는 한 인물에 집약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이것은 명백한 모성신화의 연장이며  여성에게서 여성 본연의 여성성을 거세한(요상한 표현이지만) 남성용 판타지의 일종이니까.

하지만 문학이 반드시 현실을 초월하고 비전을 제시해야 할 의무는 없다. 소금가마니도 분명 해석상의 한계와 의미론적인 평론에 있어서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의 감동조차 한정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이유일까? 이효석의 단단한 문장과 고밀도의 문단을 곱씹고 있자면 어떤 근본적인 향수가 뿌리부터 젖어 올라오는 것이다. 결국 '소금가마니'에서 구효서가 지켜낸 것은 근대적 어머니 상과 '리얼리즘의 승리' 그 두 가지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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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2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1-02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 멋진 리뷰!^^
'소금가마니'라는 제목부터 땡기네요.
구효서, 이순원, 박상우가 말미잘님 말씀처럼 제겐 큰 특징이나 매력 없는
작가들로 묶이는데 말이죠.

뷰리풀말미잘 2006-11-02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분/ 옛날 라디오 DJ라.. ^^ 적절하고 재미있는 비유네요. 사실 구효서의 소설이 좀 뭐랄까.. 있으면 읽게되지만 억지로 찾아읽기는 좀 그렇잖아요. ㅋㅋ 저도 사실은 읽으려고 읽은게 아니라 모종의 어떤 이유때문에 반 강제로 읽게 된 거랍니다. 근데 구효서씨 계속 이렇게만 써 주신다면야 눈에 불을 키고 찾아읽게되는 작가군에 포함될 날도 머지 않은 것 같네요. 반갑습니다.

로드무비/ 앗! 로드무비님.. 멋진 리뷰라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 요 소설 만큼은 매력이 찰찰 넘친답니다. 2005년 현장비평가 어쩌구 좋은 소설로 뽑힌 작품이기도 하구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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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Book]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필립 얀시

 

 

싫다. 정말 오지게 싫다. 뭐가? 서점가를 배회하는 수천 수만의 유령들. '나는 이렇게 성공했네' 류의 자뻑충만 도서, '이렇게 하면 돈 잘버네' 류의 사이비 컨설팅 도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라' 류의 새디스틱 훈계도서. 아주 그냥 제목만 들어도 닭살이 오소소.

 

'집 팔아서 땅을 사라' '애들은 대치동 엄마들처럼 키워라' '웰빙해라' '몸 만들어라' '느리게 살아라' '7가지 습관을 익혀서 성공해라' '밥은 굶어도 돈은 모아라' oh my god! 그렇다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너는 가서 '집 팔아 대치동에 땅을 산 다음에 애를 낳고 매일같이 요가를 수행해 몸을 만든 후 매우 느린 속도로 7가지 습관을 익히는 동시에 밥을 굶으면 돈이 생길 것'이다. 아멘.

 

교회에서 전도사 형제님과 교회 안에서 동성애가 허용이 되느니 마느니 하는 문제로 모처럼 한 따까리 하고 씨근덕거리는 내게 이 책을 빌려준 K누이의 의도 때문이다. 솔직히 뻔한 거 아닌가. 필시 그녀는 논쟁에서 나와 반대 방향에 앉아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훈계'가 하고 싶었으나 대 놓고 하기에는 화목한 교회의 평화가 저해된다고 판단 했을 터. 그래서 선택한 것이 점잖은 책을 통한 감화정책. 정치색을 띠고 내 손에 들어온 이 책이 내게 이쁘게 보이리 만무하다. 보나마나 '순종' 이 어떻고 하는 '조신하게 믿어라' 류의 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의 저자 '필립얀시'.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복음주의 진영의 컬럼리스트 아니던가.

 

그래서 마지 못해 펴들었는데, 이럴수가. 놀랍게도 제법 읽어볼만한 내용이다. 생각했던 것 보다 촌스런 예수쟁이 냄새가 안 나는, 마치 눈이 그물그물한 할아버지가 화롯가에서 조근조근 풀어놓는 옛날 이야기 같았달까? 그러니까 이 책의 최대 장점은 '은혜'라는 신학적 개념을 학문이 아니라 이야기로 풀어내는 힘이다. 그 한 주제에 관한 한 그의 성찰은 분명 깊고 넓은 것이었다.

 

사실 '감사'라는 교회 사투리를 문자로 찍 써 놓고 나면 얼마나 감이 안 잡히는가. 왜 감사를 해야 하냐고 물어보면 그것 또한 얼마나 감이 안 잡히는 것인가. 하지만 이야기가 갖는 힘을 이용하면 낮은 수준에서도 어려운 개념들을 이해 시킬 수 있다. 마치 셰헤라쟈드의 천일야화처럼 살의를 품은 임금도 순한 양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야기의 힘이다. 예수도 학적 개념이 아닌 비유적 이야기로 진리를 설파했다. 2000년을 이어 내려오고 있는 성경의 힘은 이야기의 힘이다.

 

하지만 K가 내게 이 책을 준 목적은 안타깝게 달성되지 못했다. 복음주의적 시각으로 동성애를 해석하는 얀시의 수준은 겨우 성경이라는 틀 안에서 기존 권력이 장악하는 헤게모니를 방어하는 수준이지 그것을 신학과 세상 안에서 정당화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쓸 정도가 되기에는 함량미달이다.

 

이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컨텐츠가 "육체에 흠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무릇 흠이 있는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곱사등이나 난쟁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상한 자나... (레위기 21:17~20)" 라는 말씀을 그대로 신봉하던 중세 수준에서 오랫동안 업데이트가 안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단적으로 들어나는 예가 현대 영화를 은혜롭게 해석하는 대목에서다. 얀시 曰 "포레스트 검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의 현대판이라 할 수 있다. 불러일으킨 반응도 비슷했다. 그 영화를 단순하고 황당하고 교묘히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으로 본 사람들도 있지만, 그 속에서 "펄프픽션"이나 "내츄럴 본 킬러"의 잔혹한 비은혜를 깨끗이 상쇄해준 은혜의 루머를 본 사람들도 있다. 그 결과 "포레스트 검프"는 당대 최고의 성공작이 되었다. 세상은 은혜에 굶주려 있다."

 

아니, '은혜'롭기 때문에 '펄프픽션'과 '본 킬러'의 '비은혜'를 마구 '상쇄'해 주며 '당대 최고의 성공작'이 된 '포레스트 검프'.라.. 영화 팬 입장에서 가슴을 치며 한탄할 얘기다. 타란티노의 '펄프픽션'을 '내츄럴 본 킬러'와 단지 '잔혹하'다는 이유로 묶어 '포레스트 검프'와 대조하다니. 이건 운동선수라는 이유로 펠레와 마이클조던을 묶어 미셸 콴이랑 권투로 2:1 맞짱을 뜨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닌가. 사실 영상이 주는 잔혹함을 충격량으로 계산한다면 언뜻 봐도 포레스트 검프의 베트남 전쟁 장면은 어디 내어놔도 빠지지 않을 장면일게다.

 

사실 이것 말고도 율법주의를 자신의 복음주의에서 의식적으로 배제하려고 애는 쓰지만 결국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논리적으로 전전긍긍하는 필립 아저씨의 귀여운 모습은 이 책의 백미중 하나다. 231~232p 등등등. 이런 은혜로운 얀시 아저씨의 삑사리를 발달 심리학적으로 해석해 보려는 나의 시도는 안타깝게도 길게 쓴 글을 날려먹는 바람에 게시하지는 못하게 됐다. 아무래도 착한 아저씨 너무 놀려먹지 말라는 주님의 뜻이리라. 이런 것이 바로 은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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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7-18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잖은 책을 -- 점잖은 책들
눈에 띈 오타 신고!


로드무비 2006-07-18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혜의 루머라고요?
재미있는 말이네요.
그래도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 쪽으로 리뷰를 쓰셨습니다.^^

뷰리풀말미잘 2006-07-18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그런 오타가 있었군요. 이 쓸모없는 손가락 확 잘라버릴까. ㅠ_ㅠ
예, 신앙인이시라거나 그쪽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 쯤 읽어볼만한 책이지요. 어려운 개념 몇개 잡고 낑낑거리는 신학 입문서가 아니라 페이지도 쉽게 너머가구요.. 물론 얀시와 저는 견해가 다른 부분이 있어서 중간 중간 조금 껄끄럽기도 했지만 특별히 성격 모나지 않은 분들이야 문제없이 넘어가실 수 있겠죠. ^^ 편안한 이야기를 듣는다고 생각하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마음이 마구 맑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근데요 로드무비님.
'젊잖은 책을 -- 점잖은 책들' 이 부분에서 (--) 요 건 인상 찌푸린 이모티콘으로 봐야 하나요 하이푼으로 봐야 하나요? 저.. A형이에요..

치니 2006-07-19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사무실 내 예배 시간에 놀라운 은혜를 찬송하는 소리가 엄청 크게 들립니다.
동성애까지는 바라지 않고, 흑, 그냥 소리만 조금 줄여주심 고마울텐데, 저같은 비신앙자에게는...아무래도 어렵겠죠?

그나저나 안 읽어봐도 정말 잘 쓰신 리뷰 같아서, 추천!

rainy 2006-07-19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분이 하늘만큼이나 가라앉을려던 참인데.. 리뷰를 읽고 나니 슬몃 웃음이 나요.
저를 볼 때 가끔 심사가 뒤틀려 있을 때 글이 잘 써지는 것 같다 싶을 때가 있어요.
너무 다 그런게야 싶을 땐.. 쓰고 앉아 있는 글도 참 재미가 없더라구요 ^^
쓰는 사람의 호흡이 읽는 사람과 맞을 때, 잘 읽히고 좋죠. 그래서 추천이요.
그리고 너무 오랜만 아니셔요? ^^

뷰리풀말미잘 2006-07-19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 거 참 이기적으로 은혜로운 사무실이군요. ^^ 치니님이 고생이 많으시네요. 엄니 뱃속에서 부터 교회를 다닌 저도 가끔 적응이 안 될 때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듣자하니 우리나라 기독교가 그토록 요란뻑적지근 한 이유가 왈가닥스럽기로 어디 안 빠지는 캐나다 북장로파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더 그렇다는 얘기도 있고, 특유의 샤머니즘적 오버라는 얘기도 있고, 심지어 유독 영성이 강한 민족이라 그렇다는 얘기도 있더라구요. 싹수부터 촌스러웠단 얘기죠 뭐.. ^^ 기독교 문화도 좀 바뀔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은 낌새가 보이질 않네요.. 여하튼 추천 감사합니다. 히히

뷰리풀말미잘 2006-07-19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니/ 맞아요! 저도 그렇더라구요. 그 뭔가 짜증나고 울컥하는 그 감정이 글이 될때 '오, 내가 이런 걸 썼단 말이야?" 할 때가 종종 있죠. ^^ 감정이 글로 승화 된 걸까요? 그런데 그런 글은 가끔 날카로와서 읽는 사람들에게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주게 될 때도 있더구만요.

정말 오랫만이에요 레이니 님. 그 동안 팔자에도 없는 주독야경을 하게 되어서 말이죠. 이제 방학이라 자주 오게 될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랫만에 '방학'이란걸 해 보는데 주책맞게스리 너무 신나는 거 있죠?

로드무비 2006-07-19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하이푼이지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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