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골동품점
범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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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 사이에 숨어 있는 이 호랑골동품점을 찾아올 방문객이 누구일까 궁금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책들 사이에 끼어있게 될 이 책을 집게 될 독자를 환영한다. 참 재미있는 책을 고르셨다. 일단 축하드린다.

작가의 성이 ‘범’씨라 ‘호랑’골동품점일까 궁금해하며, 또 한편으로는 표지 그림에 그려진 벽지를 보고 어릴 적 방을 떠올리며(정말 딱 저 모양이었는데!!) 책을 펼쳤다. 사실 작년에 <오후에 출근합니다>라는 책에서 ‘마법소녀 계약주의보’ 라는 작가의 판타지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터라 더 반갑게 책을 맞이하기도 했다.

이 소설의 세계관은 이렇다. 산의 주인인 백호가 눈병에 걸린다. 백호의 신음소리에 산에 살던 짐승들은 산을 떠나 인간을 해친다. 그러던 중 죽으려고 작정하던 한 청년이 눈병을 치료해주고, 백호는 고마움의 표시로 자신의 속눈썹 하나를 뽑아 청년의 눈썹에 심어주며

“너는 앞으로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는, 사람 아닌 것들의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영생을 살며 나의 눈을 고쳤듯이 사람들을 구하라.”(p.9) 라며 능력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 청년은 영생을 살고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백호는 다시 제안한다.
“힘을 넘기기를 원하면 안개 속으로 들어가라. 그 속에서 헤매는 아이를 구하면, 그 아이가 후계자가 될 것이다.”(p.10)라고 대답해준다.

이후 그는 원한이 담겨 문제를 일으키는 물건들을 기운 좋은 터에 두어 정화시켜 문제를 해결했다.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은 수상쩍은 물건들을 가지고 그에게 몰려왔다. 사람들은 그를 ‘호미’라 불렀다. 호미는 정화해야 할 물건들은 가게에 두어 전시하고 그렇지 않은 물건들은 팔았다. 그렇게 호미의 가게는 ‘호랑골동품점’이 된다.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이 책을 들여다 보면 된다. 차례의 여섯가지 골동품 이름은 이 소설의 각각의 여섯가지 이야기가 된다.

여섯가지 에피소드마다 각종 사회적인 문제 –노동인권, 가정폭력, 왕따문제, 외모지상주의 등을 다뤘음에도 이렇게 재미있다니. 이야기마다 각각의 매력이 있어 뭘 소개해야 한참 고민한다.

‘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편은 콜센터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김규리가 호랑골동품점을 지나다가 홀린 듯이 들어가 “나를 가져. 나를 가져가” 하는 성냥갑의 목소리를 듣고 도둑질을 한다. 이후 무명천으로 턱을 감싼 여자 귀신들을 매일 같이 마주치며 시달린다. 어린 시절 다 한번 읽어봤을 ‘성냥팔이 소녀’에서 그 소녀가 추울 때 성냥을 그어 잠깐 동안의 행복과 따뜻함을 느끼는 그 부분이 이 소설에서는 콜센터 흡연실에서 급사한 이미선 아줌마의 환영과 같은 기이한 호러의 문법으로 사용된다. 이 성냥이라는 상징은 콜센터에서 화장실 마저 순번으로 돌고 휴가나 반차를 쉽게 쓰지 못해 병원에 가기도 힘든 노동자들을 대변한다. “이미선은 타 죽었다. 저 성냥처럼, 자기 자신을 끝까지 태우다가 소진되어 죽었다.”(p.37) 알고 보니 이 성냥갑은 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회사에서 만들던 제품이었다. 이 공장에서 일하던 어린 나이의 여자아이들은 인 노출로 인해 턱이 녹아내려 암이 되는 인중독성 괴사에 시달리고 있었다. 죽어가던 여자아이들의 원념이 담긴 이 성냥갑은 호랑골동품점에서 정화 중이었던 물건이었다. 그렇게 성냥을 만들던 시대의 사회적 약자와 오늘날의 사회 속 약자들이라는 접점은 성냥이 부딪히듯 불꽃튀는 이야기가 되는 매력, 아니 마력이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이야기에서 ‘운수좋은 날’을 계속 떠올리며 읽게 되는 구성이 좋았다. 세 번째 이야기는 벽괘형 공중전화기가 마치 시그널에서 무전기같은 매개체가 되어 가슴따뜻한 이야기로 변신한다. 네 번째는 자신을 호구로 아는 두 남자아이들에게 학창시절부터 당해온, 심리적으로 구덩이에 갇힌 심길용이라는 대학생이 진짜 구덩이에 파묻히게 된 토끼 롭을 구하면서 구원을 받는 이야기이다. 다섯 번째부터는 호랑골동품점과 깊은 인연을 쌓아가는 소하연이라는 아이를 눈여겨 보며 읽었다. 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는 지금 호랑점을 운영하는 이름부터 수수께끼같은 이유요와 사부의 관계, 그리고 소하연이라는 아이가 미래의 호미가 될 재질인데 어떻게 안개 속에서 데리고 왔을까 각종 궁금증이 증폭하던 가운데 끝나버렸다. 처음에 이 책을 잡을 때보다 더 궁금해져버린 느낌이랄까. 다행인 건 후일담에서 ‘호랑골동품점 영업 시작 [열림]’이라니 앞으로 이야기가 계속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겠다.

이 거대한 도시 속에서 남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한 골동품점이 있다. 오늘날의 사회적 약자들도 그렇다. 보려고 하는 이들은 턱없이 적고, 보일 법도 한데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는, 똑같은 크기의 파이를 들고 있는 나와 같은 이들이 내 옆을 스쳐지나간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각박함을 만들어낸다. 나는 이 재미있는 책을 읽으며 이런 씁쓸함이 남았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고 달라진 나는 이미선 아줌마가 체조할 때 옆에서 같이 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p.s 아이가 전천당을 읽을 때 부모는 이 책을 읽으면 참 좋을 것 같다. 그리고 가독성이 좋아 청소년이 읽어도 좋다! 사회적인 이슈가 많아 토론용으로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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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23 - 피아니스트 조가람의 클래식 에세이
조가람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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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에 대해 ‘나무막대기를 두드리는 시간’이라고 표현하는 겸손한 저자이자 피아니스트인 조가람씨의 에세이 <Op.23>을 소개한다. 나는 이 분을 유투브 채널 또모를 통해 먼저 알게 되었다. 썸네일에 ‘연습실에서 10년동안 은둔하며 어려운 곡들을 전부 마스터해버린 레전드’라고 써 있어 호기심에 클릭했던 기억이 있다. 그 영상에서 또모운영자들이 어렵다고 소문난 곡들을 계속해서 요청하다가 극난이도의 ‘스트라빈스키의 불새’까지 요청했는데 “오른손으로 동그라미 그리면서 왼손으로 세모, 그리고 왼발로 하트 그리며 오른발로 별을 그려 봤느냐, 그런 느낌이 드는 악보다”라고 설명하시더니 막상 칠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를 완성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피아니스트로서 각종 콩쿠르 수상과 우수한 졸업점수, 수많은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그리고 교수진으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저자는 또한 칼럼니스트로서 클래식 에세이를 연재 중이다. 그래서 예술가와 관객을 이어주는 <Op.23>이라는 책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총 세 파트로 파트 1에서는 여러 피아니스트들을 소개한다. 가장 처음으로 이보 포고렐리치를 소개하며 1980년 폴란드 바르샤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현장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익숙한 패턴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악보 해석의 왜곡’(p.16)과 과감한 질감으로 쇼팽을 연주한 그에 대해 심사위원들 중 반은 찬사하고 반은 반대하여 결국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이치 그라모폰은 이 대회에서 1위 수상자가 아닌 포고렐리치와 계약을 맺는다. 이후 그의 혁명적인 음악을 사랑하는 대중들로부터
“음악이 가져다준 부와 명예를 세상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쏟는다.”(p.14)
재능은 있으나 재정문제로 곤란한 음악도들에게는 장학금을, 발칸 전쟁 당시의 병원 재건을 위해 쓴다. 뿐만 아니라 콘서트를 열어 아픈 아이들의 의료비용을 조달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이가 있었음을 저자는 소개한다.
“세월호가 도착해야 했던 제주항으로 달려간 그는 리스트의 ‘사랑과 죽음’과 베토벤의 ‘비창’을 연주한다. 달리할 바를 몰라,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 피아노를 연주했다는 그.”(p.65)
백건우 피아니스트이다. 그 뿐 아니라 파트 2에서는 예술로 총검을 잡으라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폴란드 망명자 생활을 하며 곡을 썼던 쇼팽의 삶을 묘사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변화가 필요한 시대에서 보여주는 예술의 힘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저자가 느껴졌다. 이후 라흐마니노프, 리스트, 라벨, 조지 거슈윈 등 다양한 음악가들의 각 곡과 작곡가에 얽힌 당시의 시대와 개인적 서사 그리고 감정들에 대한 저자만의 음악적 경험이 2부에 함께 한다.

파트 3에는 피아니스트로 살아가는 저자만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담겼다. 어려서부터 특별한 레슨 없이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긴 시간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모든 심사위원의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평균치에 합당한 연주를 해야 하는 콩쿠르와의 타협없이 좁은 길을 선택한 저자는 비록 2와 3이라는 콩쿠르의 성적으로 좌절하기도 한다. 하지만 긴 순례길처럼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나가는 피아니스트 조가람씨를 알게 되는 것은 덤이다. 또 피아노를 치는 아티스트 내면의 목소리를 이렇게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또 어디 있을까. 미래의 음악가들을 꿈꾸는 아이들이라면 선배의 비밀일기장을 읽는 느낌으로 한 층 더 레벨 업할 수 있는 예술가적 세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관객으로서도 그렇다. 일반인이 표현하기 힘든 예술가의 고뇌를 공감할 수 있도록 언어화한 이 에세이를 읽는 독자에게는 또 다른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만의 고유한 음악적 감성을 따라 향유할 수 있는 찬스이면서 음악을 추앙하는 각각의 예술가들을 책으로 읽는 것같은 경험이기도 해서 이 한 권으로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추천받은 느낌이라 나는 다 읽고나서도 음악가들과 곡을 리스트업하느라 마음이 바빴다.

세상의 모든 슬픔을 흡수해서 피아노로 그 아픔들을 예술로 바꾸려는 삶을 살아가는 음악가들을 응원한다. 그렇게 삶이 음악이 되고, 음악이 생이 되는 순간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다양한 예술가들을 향한 여행길을 소개하는 책이었다. 별점 다섯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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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터 2 허블청소년 2
이희영 지음 / 허블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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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출간한 <테스터 1>은 달에 호텔을 짓고 화성에 대규모 관광단지를 조성하는 근미래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 SF 장편소설이다. 200년전 멸종당한 오방새(Rainbow bird)를 관광용으로 복원하던 중 위험한 바이러스가 함께 부활한다. 그래서 1권은 오방새가 살고 있던 동굴에 제물로 바쳐지는 전설 속 아이와 화성복권에 당첨된 사람 그리고 마오와 같은 테스터에 대한 주제가 담겼다. 따끈따끈한 후속 <테스터 2>는 류온과 하라의 서사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강회장으로 대표되는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욕망에 의해 고도의 과학기술이 이용되고, 이 기술을 성공시키기 위해 필요한 테스터들을 1권에서 그렸다면 이 기술 개발을 위한 결과값인 기후위기 속에서 삶의 터전이 사라진 사람들을 2권에서 등장시킨다. 서해바다 근처에 살던 이들은 2년 전 바다에서 생겨난 재난으로 큰 해일이 덮쳐 가족과 이웃을 잃었다. 정부에서 급하게 지어준 좁은 거주지와 채소와 과일 농사를 그린돔 몇 개만이 이들에게 남은 생명줄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하층민에 가까운 이들의 사이는 돈독하다. 이반이 소장님이 운영하는 보건소에는 가족과 이웃을 잃은 이들이 찾아오고 J사장이 운영하는 로봇들의 무덤인 정크랜드에서는 류온이 폐기휴머노이드를 조립하여 고장은 잦지만 메이드 로봇이나 강아지 로봇을 선물한다. 강회장과 그의 아들 본부장, 그리고 며느리는 COO, 쿠라고 불리우며 이름도 주어지지 않았고 그들의 휴머노이드는 에이와 비 같이 알파벳으로 불리우지만 정크랜드 마을 속 사람들은 류온, 새별이처럼 이름이 있고 각자의 로봇에게는 -메이드 로봇의 이름은 미스터킴, 강아지 로봇은 파랑이- 인간다운 이름이 존재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분명 2권을 읽으며 주인공이 류온과 하라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에 남는 캐릭터는 로봇인 정우와 진솔, 보보였다.

이 휴머노이드 로봇들은 강회장같은 소수의 권력자들에게는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최고의 보안용 비서로 쓰인다. 하지만 휴머니즘을 간직한 인간과 함께 했던 정우와 진솔, 보보는 그 인간적인 이름 만큼의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들이 말하는 ‘부탁’에 있다. 사람이 부탁을 하면 부탁을 했지, 사람에게 부탁을 하는 로봇봤는가? 이 책엔 있다. 그것도 셋이나.

일단 정우.
“부탁드립니다” 그가 손을 뻗어 살짝 온의 무릎을 건드렸다. 바닥을 내려다보던 온의 두 눈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에 의해 비밀을 간직한, 인간에 의해 파괴되어 버린, 이 휴머노이드를 보며 온은 자신도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란 사실이 좀처럼 견딜 수가 없었다.(p.107)

그리고 보보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멍하니 서서 오래된 구형 메이드봇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 아이를 지켜준 건, 자신이 만든 치료제가 아닌지도 몰랐다. 이 낡고 고리타분하며, 인간보다 훨씬 꼬장꼬장한, 바보처럼 착한 저 친구였는지도.(p.205)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솔.
“그것이 하라님이 아닌 저를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입니다.”(p.274)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들은 많다. 하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강회장과 하라, 그리고 류온과 류휘라는 가족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그 로봇들의 부탁하는 마음이 인상적이었다. 휴머노이드들에게도 있는 이 마음이 왜 지구를 고쳐쓰면 되는데 고칠 생각은 안하고 화성 땅따먹기하고, 가족에게 잘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고 로봇에게 시키는 인간들이 많냐고. 인간은 왜 이 모양이냐고 묻는 작가의 질문에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어마어마한 숙제가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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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숲속 일기 - 메릴랜드 숲에서 만난 열두 달 식물 이야기
신혜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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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들어오는 식물들은 이상하게(나는 우리집이 도로변이기 때문이라고 우겨보지만) 시름시름 앓다가 내 곁을 떠난다. 그래서인지 식물에 대해 미안함을 좀 가진 편이고 식집사들을 무조건적으로 리스펙한다. 그리고 식물에 대한 책도 좋아한다. 특히 호프 자런의 <랩 걸>을 보며 그림을 그린 신혜우 저자님도 마음속에 저장해두었다. 저자님의 이전 책들 <식물학자의 노트>를 즐겁게 읽었다.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출간한 다음 해에는 강연도 zoom으로 들은 적 있다. 그리고 이번에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가 나왔다. 바로 이 책이다. 그래서 메릴랜드에 눈이 내렸을 때 저자님이 만들었다는 스노우엘리(집주인 할머니네 개 이름이 엘리다)도 어떤 모양인지 떠올릴 수 있었고, 자원봉사로 농사 짓는 에피소드가 나올 때도 흙속 미생물이 죽을까봐 1950년대에 나온 가볍고 작은 트랙터만 이용할 수 있다는 예전에 담배 농사짓던 땅도 떠올라서 반가웠다.

저자의 식물학자라는 직업 하나 만으로도 굉장히 바쁠 것 같지만 누군가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여행자라고 답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움직이지 않는 식물을 찾아 여행하는 분이니까. 또 자원봉사로 주말에 친환경 농사짓는 파머이기도 하다. 심지어 영국왕립협회 보태니컬 아트 국제전시회에서 한국인 최초 금메달과 최고 전시상을 수상했고 또 올해에는 과학적인 식물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에게 수여되는 ‘질 스미시스’상을 한국인 최초로 받을 분이시기도 하다. 이렇게 24시간을 풀로 쓸 것만 같은 다재다능한 저자의 이 책은 ‘아트’ 그 자체다. 꽃 그림이니까 예쁘겠지, 평범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문장마저 아름답다. “눈이 비가 되면 나뭇가지에 새싹이 틉니다”(p.5)라고 시작하는 프롤로그 첫문장을 읽어본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되는 시간 조차 나뭇가지의 새싹을 향해 있는 문장이다. 홀딱 반하며 읽기 시작한다.

이 책에는 메릴랜드의 4계절 12달이 들어있다. 내가 사는 곳은 온대기후의 서울이지만 나는 숲에 갈 때 이 책을 들구 갈 것을 다짐한다. 말못하는 나무들과 인사하기만 해도 더없이 좋겠지만 이 책을 더하면 내가 식물들을 보며 느끼는,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언어를 더 구체화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꽃집에서 꽃을 사서 그리길 꺼린다. 원예품종은 야생식물을 연구하고 기록하는 식물학자에게 식물종이라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야생난초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계속 개발되는 품종과 사람들의 열렬한 난초 사랑의 본질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꽃을 사랑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p.45) 예쁜 꽃은 가게에서 멍때리고 보던 내가 보였던 구절이다. 비닐하우스 속 식물이 화려하더라도 거친 바람과 강렬한 햇빛, 그리고 다시 땅으로 묻어버릴 것만 같은 강한 비를 버텨내고 피워내는 야생식물들을 더욱 응원하게 된다.

서양배에 대한 에피소드도 인상적이었다. 떫은 서양배에 질린 저자는 알고보니 후숙해서 먹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배의 씨앗을 둘러싼 그 신부분을 석세포라고 부르고 이것은 리그닌이 축적되고 단단한 세포벽이 발달한 죽은세포라는 것이 더 쑈킹했다. ”열매가 자라날 때 수분이 충분하지 않으면 그 스트레스로 많은 석세포가 생긴다.(p.50)“는 지식은 덤으로 생긴다.

또 4년 만에 난초 곰팡이를 냉동고에서 꺼냈는데 살아있음을 보고 기뻐하며
”누군가 이어서 발전시킬 것이다. 완전한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모든 과학이 그렇게 축적되어 온 것처럼“(p.204)이라는 과학의 이어달리기라는 표현을 쓴 부분도 마음에 남았다. 뭔가 과학자들만의 바톤터치가 상상 속에 그려졌다.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엄마의 우산에서 내보내서 내리는 비도 맞아봐야 하듯 저자도 자연에서 강하게 크는 식물들을 응원하는 책이다. 브로콜리의 꽃을 보려고 몇 번을 물꽂이 하던 저자의 모습을 보고 싶은 식집사들을 포함해서 꽃을 좋아하고 나무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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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국정 노트 - DJ 친필 메모로 읽는 '성공하는 대통령'의 조건
박찬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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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25.4.10.) 몇 명의 정치인들이 오는 6월 3일에 있을 21대 대통령 선거에 나서겠다고 공식 선언하고 있다. “제가 만들 대한 대한민국은 이러저러합니다!”라고 외치며 동시에 괴물정권 탄생을 막겠다고 또 지난 3년간의 정부가 방치해 둔 경제성장을 이루어내겠다며 출마하는 실정이다. 이 뉴스를 보다 보니 대통령 후보들이 만들겠다는 나라 말고, 진정 내가 원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궁금해진다. 좀 안싸웠으면 좋겠다. 정당들은 정책을 세울 때 서로 좋은 안건으로 정정당당하게 겨루고 국가가 위험할 땐 서로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고질적인 지역감정이나, 젠더와 세대로 잘게 파편화되고 고립된 국민들을 화해시켜주었으면 좋겠다. 쓰고보니 이상적이다. 유토피아가 따로 없다. 나 역시 구체화하기 힘든 막연한 나라를 상상하고 있었구나 싶다. 그러던 중 이 책, <김대중의 국정 노트>를 만났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원하는 나라로 실현해줄 대통령의 역량이 무엇인지 자명해진다.

부제로 ‘성공하는 대통령’의 조건을 단 이 책은 2000~2002년 청와대 출입 기자로서 김대중 대통령을 가까이 지켜본 박찬수 저자가 김대중 탄생 100주년인 2024년에 한겨레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22년 만에 공개되는 국한문 혼용체로 쓰인 27권의 DJ 친필 메모를 사진으로도 볼 수 있는 책이다. 사실 국어보다 한문이 더 많아 이를 해석하는데 시간 꽤 보냈을 저자의 노고가 느껴짐과 동시에 꼼꼼하게 메모하고 이를 토대로 국정운영을 해나갔던 DJ 스타일이 인상적이다.

이 책을 다 읽으면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그 시절의 일들이 어제인 것처럼 떠오른다. 대선 4수 만에 대통령이 되었으나 전 대통령 시절에 벌어졌던 IMF를 수습하는 DJ, 감옥에 있었던 시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정독하고 이후 손정의와 빌게이츠를 만나 초고속 인터넷을 보급한 일, 문화란 물처럼 흘러야 한다는 생각대로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했으나 스크린 쿼터제는 최대한 막으려고 했던 그. 언론개혁,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생산적 복지, 정치적으로 화합을 위해 야당총재와의 여덟 번의 영수회담, 햇볕정책을 펴기 위한 남북정상회담 등이 그렇다. 그의 행보는 오늘날의 K-wave의 위상을 떨치는 문화강대국으로서의 면모와 IT강국의 발판이 되었다. 또 정치적으로는 야당과 화해하려 했고, 위로부터의 부정부패를 여, 야당 상관없이 제거하려 애썼고 통일까지는 아니어도 전쟁이라는 남북의 위험요소를 없애려 노력한 리더였다.

“진보와 보수는 지향과 가치가 다르지만, 국정 운영 방식과 목표에서 큰 차이가 나는 건 아니다. 정권이 바뀐다고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갑자기 새롭게 시작되는 정책은 없다. 이전 정권 정책을 모조리 부정만 할 게 아니라, 좋은 건 평가하고 부족한 부분은 메우면서 필요한 곳에 역량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래야 임기 중에 가시적 정책 성과를 낼 수 있다.(...) 5년 임기의 대부분을 전 정권 정책을 부정하고 시행착오만 거듭하며 보내는 대통령들이 한번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pp.33-34) 이 부분을 읽으며 정당의 존립을 위해 그들의 지침대로 꼭두각시처럼 행동할 정치인이 아닌, 잘한 것은 치하하고 모자란 것은 덧댈줄 아는 그런 대통령이 필요하다.

대통령의 소통방식도 인상깊었다. “DJ는 절대 자기 생각을 먼저 말하지 않는다. (외부 인사가) 의견을 말하면 수첩에 깨알 같은 글씨로 받아 적는다. 그러고는 배석한 수석이나 비서관에게 ‘이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묻곤 다시 나한테 물어본다. 그런 식으로 참석자들 얘기를 충분히 들은 뒤에 마지막에 자기 생각을 반드시 밝힌다.”(p.55) 이 부분은 나중에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때 빛을 발한다.
“전체 대화 중에 70%는 김 위원장이 말을 하고, 내가 30% 정도 이야기를 했을 거다. 내가 상대방 이야기를 경청하는 이유는 회담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판단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좋은 합의문이 나올 수 있었다”(p.283) 경청이 DJ의 특별한 정치전략이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앞으로의 대통령은 국민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뭐니뭐니해도 자신을 몇 번을 죽음으로 몰아간 박정희기념관의 건립을 허락했다는 부분에서 DJ는 용서와 타협의 정치로 민주주의를 실현한 사람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지 않았을까? 박대통령이 이뤄낸 경제적 근대화를 부인하지 않고 인정한 DJ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내가 바라는 대통령의 모습이 그려졌다. 훌륭한 학벌을 바탕으로 리더십있고 능력있는, 위인전에나 나올 법한 사람 말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삼권분립과 의회 민주주의를 존중하며 국정 운영을 할 수 있는 사람. 아무리 배째라 야당으로 나온다 해도 포기하지 않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연대할 의지가 있는 그런 사람말이다. 여기에 기후위기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면 더더욱 좋겠다.
다가오는 6월 3일, 당신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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