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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평점 :
*<저주토끼>때 느꼈던 섬뜩함은 그대로지만 그로테스크한 유머, 아니 위트가 담겨있는 현실이 더 해진,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를 만났다.
지구 생물체의 문어라고 하기엔 더 많은 다리를 가진, (외계행성에서 온, 아차, 스포다) 파란 문어 표지보다, 차례가 담긴 페이지에 나는 더 끌렸다. 바닷물 속으로 보이는 심연, 오른쪽 하단에 문어,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라는 각 장의 이름이 써있다. 지금은 낮인지, 반짝거리는 물결인 윤슬이 물빛을 만들어낸다. 이 바다 속에서 살고있는 지구 생물체들의 위기가 이 소설에 고스란히 담겼다. 하지만 지구의 정복자가 확실한 사피엔스이긴 하지만 매우 평범한 주인공들 형편 역시 썩 좋아보이지 않는다.
*대학교 강사인 ‘나’는 대학 노조인 위원장과 함께 정체 모를 검은 양복 무리들에게 잡혀와서 취조받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위원장이 밤에 농성하는 천막에서 “지구ㅡ 생물체는ㅡ 항복하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문어를 홀랑 잡아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잡아먹기 전, 이들은 한참 투쟁하던 중이었다. 이런 상황이 한 페이지 이상으로, 그러니까 문어다리처럼 긴 문장으로 구구절절 써 있다. “그리하여 땡볕에 땀범벅이 되어 기자회견을 하고 구호를 외쳤고 총장실 앞에 가서 성명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총장은 오늘 출근하지 않았다며 사무처 사람들이 나와서 우리를 총장실에서 멀리 떨어진 소회의실에 밀어 넣으려고 해서 말다툼이 벌어졌고 경비 회사 직원이 달랑 한 명 등장하여 불안한 표정으로 뒤에서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고 위원장님이 ...(pp.16~17)” 이런 상황에서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나 잡아먹어 잡혀간 것이었고 알고보니 그동안 위원장님이 먹은 문어는 꽤 되는 걸로 밝혀진다. 이제 이런 문어를 시작으로 러시아어를 하는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가 이들의 삶에 스며든다. 아무래도 작가님의 전공이 러시아어여서 그럴까, 난 내내 고골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골은 사실만을 묘사하려는 리얼리즘 이전 단계인 자연파 작가로 분류된다. 그의 소설에는 지리하면서도 지난하고 긴 문장의 묘사가 담긴 리얼리즘에 그로테스크한 판타지를 더한다. 이 소설 역시 그렇다.(19세기 러시아 소시민이었던 아까끼 아까기예비치가 21세기의 ‘나’와 ‘위원장’으로 보인다는 얘기다.) 이 그로테스크한 아이러니가 주는 지점이 있다. 바로 이 부분이 정보라 작가님만의 개성이라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해본다. 사피엔스끼리도 언어가 다양해 서로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꼭 언어 문제 때문은 아니군) 대부분의 나라에 자유와 평등이 버젓이 헌법으로 적시되어 있음에도 우리는 같은 종족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느라 지구는 죽어간다. 나에게는 이 소설이 사피엔스를 포함한 모든 지구 생물체들의 다잉메세지로 읽혔다. ‘나’와 위원장의 꿈은 소박하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투쟁해야 함을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켜야 한다. 남편과 나는 손을 잡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p.253)라고 작가님은 끝맺는다. 하지만 나는 뭔가 성에 차지 않는다. 다시 이 책의 첫 장 ‘문어’의 끝으로 돌아가본다. “지구ㅡ생물체는ㅡ 항복하라. 우리는 항복하지 않는다. 나와 위원장님은 데모하다 만났고 나는 데모하면서 위원장님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함께 데모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교육 공공성 확보와 비정규직 철폐와 노동 해방과 지구의 평화를 위해 계속 함께 싸울 것이다. 투쟁.(p.46)” 나 역시 25년 전쯤에 해보고 그동안 한번도 하지 않았던 손동작을 취해본다. 어깨 위치에 주먹을 쥐고 귀를 스쳐 주먹을 치켜든다. “투쟁!” 21세기를 살아가는 소시민 한 명의 외침이 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