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B의 은유 - 윤슬빛 소설집 꿈꾸는돌 38
윤슬빛 지음 / 돌베개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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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윤슬빛님의 일곱 가지 단편이 담겨 있는 소설집이다. 그 중 첫 번째 이야기가 ‘플랜B의 은유’인데 이 책의 타이틀이 되었다. 주인공은 청소년들이다. 성소수자의 고민을 가진 가족이나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플랜B의 은유>는 “플랜B를 세우지 않게 된 이유를 까먹지 않도록, 계속 ‘플랜B’라고 불러 달라”(p.9)는 성소수자 플랜B이모의 “항상 플랜B를 세우면서 살았는데 플랜 A도 B도 C도 다 실패하는 게 인생이더라고.”(p.9)라는 대화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첫 번째 이야기를 읽으며 느낀 것은, 도시에 있는 ‘나’의 친구, 찬우는 공황장애약을 먹는 아빠를 걱정한다. 하지만 주인공 재호와 은유, 그리고 재호엄마와 플랜B이모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만 제외하면 매우 행복해보인다. 그 이유가 뭘까, 작가님은 답을 은유에 스며놓은 것 같다.

“음, 비유지. 직유, 은유 할 때 그 은유. 서로 다른 A랑 B 사이에서 어떻게든 공통점을 발견해 내려는 마음, 되게 간절하지 않아?”(p.24)
“아, 은유의 그런 면도 좋아. 이거는 이거다, 라고 말하는 게 꼭 선언하는 것 같잖아. 너는 나다. 나는 너다! 쫌 멋지지 않아?”(p.25)

공통점을 발견하려는 간절한 마음과 선언한다는 것. 이 두 가지 다, 혼자서는 못한다. ‘함께’여야 할 수 있다. 재호엄마와 이모가 함께 하며, 재호와 은유가 함께여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의미들이다. 사회적 약자이면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의 연대가 한참인 요즘이다. 거기에 성소수자들이 참여하고 있다.(아닌가, 아직도 유럽만의 이야기인가) 그래서 나는 이 책이 꼭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들을 포함한, 사회에서 소외되어온 사람들의 “너는 나다. 나는 너다”라고 외치는, 독립선언서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런 선언은 두 번째 이야기인 <내일의 우리>의 마지막 문장에서도 반복된다. “나는 똑바로 거울을 봤다. 거울에 비친 나는, 그냥 나 같았다.”(p.60)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다음에 나오는 ‘빽붓’이었다.
“아주 멀리까지 가고 싶은 마음과 기꺼이 이곳에 붙들려 있고 싶은 마음이 매번 부딪쳤다. 마음이란 게 실체가 있다면 나는 그 마음들을 꺼내 두고 가만 노려보다 큰 ‘빽붓’을 집어 들어 슥 칠해 버리고 싶었다. 얼룩덜룩한 흔적이 조금도 남지 않게. 그러면 모든 게 한결 또렷해질 것도 같았다.”(p.44, <내일의 우리>) 이건 정말 이 글에서 사족이 되겠지만 요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이 빽붓이다...

읽으며 내내 정현종 시인님의 ‘방문객’이 머리에 맴돌았음을 고백한다. 나는 사실 이 책을 읽으며 동성애에 대해 미화하는 건 아닐까 싶은 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온다는 건(...)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라는 시구가 바람이 되어 이 책을 읽는 내내 환기시켜주었다. 내 마음은 이런 바람을 흉내낼 수 있을까가 나의 숙제가 된 책이었다.
p.s 작가의 이름이 예뻐서 제목과 같은 크기로 책 표지에 실리는 구나 싶다. 이름 지어주신 분이 뿌듯해하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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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저녁의 연인들
서윤빈 지음 / 래빗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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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SF다. 인간의 장기를 임플란트로 바꾸어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임플란트가 구독형태이면서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누진되는 그런 시스템이다. 아내가 더 수입이 좋아 주인공'나' 유온이 육아를 했으나 헤어진 이후 수입이 없어진 그는 가애가 되었다. 가애란, 수명이 얼마 안남은 사람은 유혹해 연인이 된 후, 중개인 그러니까 매켄지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돈을 쓰게 만들고, 상대방이 죽으면 유산으로 받는 구조다. 좋게 말하면 고독사 할 사람들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아이를 먼저 세상에서 떠나보내고, 아내와 헤어진 후 가애가 된다. 그러다가 같은 가애인 성아를 만난다.
*아무래도 중경삼림의 임청하&금성무가 그려진 일러스트 스티커를 받았기에 이 소설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경삼림의 금성무는 사랑의 기억을 통조림에 담고 싶어한다. 기한은 만년으로 해서. 전여친에게 이별을 통보받았으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킬러인 임청하를 만난다. 유온도 한 카페에서 와이프, 이령으로부터 갑자기 이별을 통보받는다. 그리고 영영 그의 삶속에서 사라졌다. 그때 마시던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은 다 녹아버리고 유온은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이령을 기다리며 급속냉동을 실험하던 생방송 유투버(는 아닐 것이다 뭐 그런 미래의 플랫폼이라 치자)에게 다시 얼리는 방법은 없냐고 질문도 한다. 난 이 부분이 중경삼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아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되돌리고 싶어하는 유온을 보며, 슬픔이라는 얼음을 냉동시키고 싶었을까? 아니면 시간을 돌리고 싶었을까?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이령을 보내지 않고 꽉 잡았을까? 아무래도 유온의 스타일로 봐서는 잡지 않았을 것 같다. 그는 우유부단하다. 유온이라는 이름처럼. 따뜻하지만 뜨겁진 않다.
*장기를 임플란트로 대여할 수 있는 미래의 이야기다. 기본적으로 버디라고 하는 지금의 챗GPT같은 AI 비서를 뇌에 장착하고 있다. 만 3세 아이에게 이 버디를 심었을 때 생기는 문제들은 지금 우리가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쓰게 해도 되는 것인가, 나아가서 챗GPT를 쓰게 해도 되려나, 하는 우려와도 같아 보인다. 유온이 나이가 많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지금 있는 것들이 그때 가서 그런 식으로 쓰인다는 작가의 상상력이 재미있었다. 한편으로는 성아와 같이 사는 주아를 만나러 갈 때 비타민 음료수를 사들고 가는 모습에서는 “아니 무조건 박카스지, 에이”라고 생각하는 나를 보며 흠칫 놀랬다.
*사실 가애를 직업이라고 생각한다면 유온보다 성아가 훨씬 적합하다. 물론 존재통이라는 심각한 후유증때문이지만. 주기적으로 부팅해야 하고, 그래서 기억을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그 동안 만나 보냈던 수애의 미이라 몇 구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유온보다는 훨씬 즐겁게 생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이를 영원히 잊지 않으려는 이령과 대조적이면서 매력적이다. 성아와 유온 이 둘 사이에서는 미안하다가 사랑한다로 들리는 커플이었다. 작가는 어두운 밤에 빛나는 달이라는 이미지를 성아에게 녹였는데 잘 어울렸다. 이 책이 총 15장인 것도 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래서 이 소설이 SF냐 Romance냐 누가 묻는다면(아무도 안물어보겠지만) 나는 단연 후자라고 말하겠다.
*작명에 대하여
가애라는 직업의 플랫폼과도 같은 라이브 재즈 바의 사장님 이름 참 잘 지었다. 매켄지. 미국의 유명 컨설팅회사 이름 아닌가. 그들이 제공하는 전략컨설팅과 그가 수익을 받게 되는 구조가 뭔가 닮아보였다.
p.s 1. 요새 오렌지가 얼마나 싸고 달고 맛있는데 오렌지 냄새를 죽음의 향 디퓨저로 쓴 느낌이라 요 며칠 밤에 아이 깎아줄 때마다 섬뜩했다.
2. 유온이 차 사고로 잃은 아이 때문에 지하철을 타 버릇 할 때 나오던 노인커플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싸인을 보고는 뿜었다. 작가님은 꼭 상금 2억이 걸린 문학상을 주는 곳에서 1등했으면 좋겠다. (2등까지는 하신 것 같다) 그리고 작가님만의 책을 임플란트화해서 지구인 모두에게 장기구독했으면 좋겠다.
3. 인간의 수명은 영원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물론 돈이 받쳐줘야하지만) 사랑의 기한은 여전히 짧구나. 어쩌면 사랑이야말로 변하지 않고 영원한 정의를 가지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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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솔로 탈출 프로젝트 개나리문고 16
김희정 지음, 시은경 그림 / 봄마중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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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이가 여친을 사귀는 걸까? 나도 궁금하다. 이 책에 나오는 윤석민처럼 재미있는 아이는 여친을 금방 사귄다. 지혁이는 잘난척쟁이라고 싫어하지만 아이들에게 웃음을 주는 석민이는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리고 수줍음 많은 재우도 가은이라는 여친이 생겼다. 많은 사람들앞에서 하는 자기소개같은 건 부끄러워하지만 1대1에는 강했나보다. 심지어 여자애에게 먼저 고백해서 얻은 커플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일로 재우의 단짝 지혁이는 충격받는다.

“나는 정말 석민이 말처럼 아직 어린가 봐. 관심 있는 애가 없어. 그리고 고백하기보다는 고백을 받고 싶고.”(...) 그러고 보니 무슨 유행처럼 아이들은 고백을 하고 고백을 받았다. 내가 여자친구에게 관심 없을 뿐이었다. 하지만 석민이마저 고백을 받았다는 말을 들으니 뭔가 기분이 별로였다.(p.50)

유행처럼 사귀지 않아도 되는데 자신이 얄미워하는 석민이도 모솔이라고 놀려대고, 찐친인 재우까지 커플이니 더 쫄리는 걸테다. 둘의 행각을 지켜보고 있는 지혁이는 ‘아! 이제 알겠어. 내 편이 생기는 거야.’라고 커플의 장점을 하나 하나 발견해나간다. 그러다가 반장선거 공약으로 모솔탈출 프로젝트를 내걸고 출마한다. 하지만 소외되는 친구가 없는 반을 만들겠다는 하영이의 공약을 반 친구들이 선택하고(이부분에서 반 아이들이 제대로 된 투표를 하는 민주시민으로 보임은 덤) 그런 하영이에게 하트를 뿅뿅 보내면서 이 책은 끝난다.
하영이의 공약이 정말 괜찮았다. “여러분의 친구가 되기 위해 일주일동안 돌아가며 모든 아이들에게 말을 걸고 말을 듣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반 모두와 친구가 되겠습니다. 저는 한 명이나 몇 명의 단짝 친구 만드는 걸 포기하고 우리 반 모두와 친구가 될 계획입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소외되는 친구도 없겠지요.”(p.73) 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하영이는 1학기 임원동안 한명의 여친을 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지혁이의 하트 뿅뿅은 어쩌면 무의미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헐.. 생각하던 중, 하지만 2학기에는 지혁이를 밀어주겠다고 했다. 지혁이의 공약은 모태솔로 탈출! 아마도 지혁이의 모태솔로의 탈출은 2학기 때 이뤄질 것 같다. 해피엔딩이다 ㅋ

덧붙여서..올해 5학년인 아이 반에서는 올해 유난히 커플들이 많이 탄생했다. 알고보니 가위바위보에 진 아이들이 장난 고백하는 식으로 사귄다고 한다. 그러면 고백받는 애가 충격받지 않냐고 묻는 나에게 아이는 “싫으면 싫다하면 되잖아. 싫지 않으면 사귀는 건데 그게 왜?”라고 대답하며 알파세대임을 뽐냈다. 생각해보니 선을 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 할 말을 잃었다. 이후 나는 책 속의 지혁이처럼 사귄다는 아이의 친구들이 슬슬 부럽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 다녀오는 딸래미에게 "잘 다녀왔냐"는 말 대신, “또 누가 사귄다든?”묻곤 했다. 그리고는 퇴근하는 김아빠를 붙잡고 “딸래미 이쁘다메, 왜 재는 누가 고백하는 애가 없을까? 우리 닮았나봐”라고 이야기했다. 김아빠는 “나 안닮았어. 난 고백 100번은 들었는데?”라는 언빌리버블한 TMI를 들었다. 헐. 나를 닮은 거였던 것인가, 이대로 질 순 없다. “재 외모는 여보랑 똑닮인데 왜 고백을 못듣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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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각본집
강승용.오선영 지음 / 씨네21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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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용 오선영 각본집 <1980>

*앞 표지에는 평화반점의 주인 철수네 3대의 사진이, 뒷 표지에는 도망치듯 떠나는 영희의 단촐한 식구의 뒷모습이 못내 인상적인 책이었다.
이준익 영화감독이 <왕의 남자>, <사도>를 찍을 때 함께 호흡을 맞췄던 강승용 미술감독이 이 영화의 스피커를 잡았다. ‘감독의 말’을 보면 그는 “철수네 가족사를 풀어가던 2년여의 기간은, 외적으로는 새로운 도전”을 했다고 쓰여있다.

“영화<1980>은 여덟 살 소년과 가족, 그들과 관계 맺고 있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으로 풀어간 5·18 민주화운동 10일간의 기록이다. (...) 이야기의 주체인 여덟 살 소년 철수의 맑고 순수한 눈으로 민주화운동을 바라보고 경험한 이야기를 담고자 했다.
계엄군의 잔혹하고 무자비한 폭력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시민들이 무기를 들게 되면서 ‘폭도’라는 누명을 썼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대통령이 여덟 번 바뀌었고, 평화로운 듯 평화롭지 않게 가해자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상처를 평생 가슴에만 묻고 살았을 힘없는 소시민 철수네 가족을 통해, 국가가 휘두른 폭력의 결과가 개인에게 한평생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담고 싶었다.”(p.29)-기획 의도의 문장이다.

주위의 1973년생들을 떠올려본다. 한참 우리 사회에서 중추역할을 맡았다가 인생의 후반부를 향한 이들이다. 그들이 여덟 살 이었을 때, 특히 광주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박정희 시대의 끝을 보고 힘찬 미래를 꿈꾸었을 그들의 부모가 보인다. 민주화를 열망하던 ‘서울의 봄’이 신군부에 의해 부서지고 어느 날 갑자기 광주시내로 진입하는 탱크들의 행렬을 목격한다.

“1980년 5월 17일부터 10일간, 암울하고 악몽 같았던 여정 한가운데··· 화평반점 1대 철수 할아버지, 2대를 꿈꾸는 철수 아빠, 그리고 3대를 이어야 할 숙명 앞에 놓인 철수가 있었다.”(p.31) 하지만 이들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무고한 시민들이었을 뿐이다. 그저 그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1947년의 4.3의 동백꽃이 지고 벚꽃이 졌다. 이제 곧 4.16 세월호의 비극이 지나가면 1980년 광주에서의 5. 18을 지난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접할 때면, 나는 한국인으로서의 봄이 마치 고난주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6.10일이 지나야 겨우 숨통이 트인다.

*이번 4.9일 선거 개표방송을 지켜보며 한결같이 경상도는 국힘을, 전라도는 더불어를 찍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경상도의 지지율이 60% 정도였다면, 전라도는 거의 90%에 육박했다. 그때는 ‘여전하구나’라는 일반화로 별 생각없이 지켜보았더랬다. 그런데 이 각본 속 평화반점이라는 짜장면 집주인의 장남, 철수아빠와 세들어 사는 직업군인, 영희아빠의 관계를 보며 개표방송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철수아빠는 베트남 참전 후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야학을 운영했을 뿐인데 빨갱이로 지탄받았고, 영희아빠는 먹고 살기 위해 직업으로 군인이 되었을 뿐인데 5.18의 가해자가 되었다. 그저 100점짜리 남편감이 되기 위해 군인을 선택한 영희아빠의 죄라고 손가락 질할 수 있을 까? 나는 이 <1980>이라는 각본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남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투표뿐임을, 그 상처를 가진 이들이 아직도 그 지역에 살아있음을, 평화반점이 철거되는 일은 그 일을 기억에서 지우는 것과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철수, 영희아버지들의 자녀(나라는 5.18로 부모를 잃은 아이를 입양한 아이지만)의 이름이 각각 ‘우리’와 ‘나라’인 것으로 보아 이 각본을 쓴 두 분의 생각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너무 비극적이어서 작가님을 조금 원망하기도 했다. 바둑이나 아모레 이모, 철수 엄마의 쌍둥이, 그리고 영희의 부모로 보이는 이들의 마지막이 그랬다. 다시 생각해보니 현실은 더 처참했을 것이다.

*전쟁통에도 아이들은 태어난다는 말을 쉽게들 한다. 철수 엄마 역시 그랬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가 낳은 쌍둥이의 비극을 보며 나는 앞으로 ‘전쟁통에도 아이들은 태어난다’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을 것만 같다. 그렇게 태어나기가 쉽지 않은 일임을 이 각본집에서 깨닫는다.

*각본집을 처음 읽어보았다. 새삼 매력이 있는 장르임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전라도나 가끔 나오는 황해도 사투리를 따라 읽으며 대화 사이의 여백이 소설에서 행간을 읽어내야 하는, 그런 유추의 순간이 참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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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시작의 날 - 계절 앤솔러지 : 봄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15
박에스더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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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시작의 날>

*“신비롭고 다정한 문학의 세계를 보여 주는 작가들의 청소년과 어른의 마음을 함께 감싸안을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다홍빛의 띠지를 두른, 박에스더, 범유진, 설재인, 이선주, 한정영 작가님의 앤솔러지 책이다. 제목처럼 3월 2일, 시작이라는 봄을 담은 이야기. 개인적으로는 제목에서도 뭔가 고심의 흔적이 느껴졌다. ‘3월’이라고 할 법도 한데, 굳이 ‘2일’을 붙였다는 점과 또 ‘3월 1일’ 해버리면 역사라는 장르로 가버리니 이 얼마나 편집자의 노고가 붙은 제목인가!!

*우연찮게 며칠 전에 읽은 <오후에는 출근합니다>에서 범유진 작가님의 이야기를 이미 만난 터라 반가웠다. 이 책에서는 <3월에 벚꽃색 입히기>로 첫 시작을 연다. 엄마의 소원대로 선생님이 된 영우는 학교에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상처받은 영혼을 감싸안을 때 이들은 서로 상생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남긴 단편이다.

*이선주 작가님의 <여러분은 분명 실패할 겁니다>가 나에게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누군가가 원하던 대학을 입학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은 슬아, 자기처럼 오고 싶었던 대학에 청강 온 보람이를 만나는 주인공 ‘나’는 20살의 아가씨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3의 연장선처럼 보였다. 이런 부분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대학교 정문에 가까워지자 패딩을 껴입고 머플러까지 한 채로 서 있는 슬아가 보였다. 신입생의 차림새는 아니었다. 나를 살폈다. 슬아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3월 2일, 봄이라고는 하나 겨울의 끝자락과 더 닮았다. 몸도 마음도 추워서 무엇으로라도 덮고 싶었다.”(p.48) 봄이라는 단어는 참 예쁘고 따뜻하지만 사실은 아직 추운, 그런 3월 2일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그런 그녀들이 “여러분은 분명 실패할 겁니다”라는, 저주같은 말을 노교수로부터 듣는다. 이 상황이 현실이라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질문하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중 한 명은 심각한 마음의 병을 안고 있고, 나머지 둘은 이 학교를 목표로 했으나 떨어진 학생들이라 더더욱 질문하러 가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교수에게 질문을 하러 간 그녀들의 용기와 패기가 만들어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노교수를 찾아가는 능동적인 모습의 삶의 태도가 그녀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앞으로 지켜보라는 작가의 의도로 읽혔다. 사실 이런 주제는 굳이 이런 노교수를 만나지 않더라도 책을 읽다보면 많은 책들이 실패하라고 권해오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는 역사의 주인공처럼 승리하고 극복해낸 사람들이 아니라 찌질하고 실패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장르이니 말이다. 하지만 부러웠다. 슬아와 하람이라는 원군을 둔 ‘나’가. 그리고 아직 20살에 불과한 그녀들의 앞으로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는 다섯 개의 단편들은 앞으로의 삶이 더욱 기대되는 주인공들의 시작부분에 대한 내용이다. 이들은 이제 막 서문을 열었을 뿐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계속되어 벽돌 소설이 되면 좋겠다. 한국문학에서는 단편이 주 장르이고, 가물어버린 장편이지 않은가, 이 책이 아주 두꺼운 장편이 되어 단비같은 소설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 여름의 중간에는 소나기 편도 나오고 겨울에는 눈이 펑펑오는 그런 엔솔러지도 나오길 상상해본다.
p.s 곧 더워질 것이다. 계절 앤솔러지 여름의 책도 응원한다. 그리고 이분들의 장편소설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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