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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라 - 2024 제7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작
김아인 지음 / 허블 / 2024년 9월
평점 :
제 7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4회는 <천 개의 파랑>이, 6회는 <라스트 젤리 샷>이 받았다.
에피네프라는 전염병이 창궐한다. 그래서 넷 중 한 명은 죽은 이후, 살아남은 미래인들의 이야기다. 우리가 사는, 지금이 AI의 시작인 시대라면 이 책 속 세상은 AE(Artificial Eden)가 진행중이다. AE, 이 기업은 인간의 뇌와 척수만으로 데이터화하여 갈 수 있는 세상을 창조했고, 현재 5억명이 조금 안되게 입주하여 유지, 보수하고 있다. 살아남은 이들 중 AE에 입사하면 에피네프 백신을 맞을 수 있다. 이 곳에서 죽은이들의 뇌와 척수를 제외한 “남은 신체인 ‘반송체’를 폐기하는 일‘(p.28)을 담당하는 웨이시안이 남주인공이다. 그는 이 전염병이 돌기 전 홍콩 염습소에서도 일했다. 그의 여자 친구 페이는 AE가 가짜천국임을 증명하려 파고드는 기자이다. 이 AE를 원하지 않던 페이가 강제입주 당했음을 알게 된 웨이시안은 육체를 동면시키는 방법의 로밍셀이라는 새 기술을 연구해낸 하라바야시 가스미와 함께 AE가 은폐하려는 일들을 밝히려 애쓰며 소설은 전개된다.
읽으면서 웨이시안의 직업이 눈에 들어왔다. 에피네프 이전에는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함께 영혼도 사라졌다. 그리고 추모가 있었다. 전염병 이후의 세계에서는, 육체는 사라지나 뇌와 척수가 남아 영혼은 AE의 세계로 이전되므로 추모의 의미가 상실되었다. 영혼이 분리된 육체를 마지막으로 추모하는 사람이 웨이시안이라는 의미이다. 그 많은 시체를 처리하던 남주였기에 죽으면 거기서 끝을 맺어야 한다는 페이의 이야기에 함부로 대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웨이시안의 성격이 애매모호한 이유다. 페이와 달리 웨이시안은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건 모르는 거야. 네가 남들 인생을 정하지 마.“(p.206)라고 마지막 부분에 이야기하기도 한다.(이후는 스포라 말을 못하겠음 읍읍) 나는 궁금하다. 하라바야시와 웨이시안은 죽음앞에서 뇌와 척수만 남길 것인지, 육체는 동면시킬 것인지. 아니면 AE를 선택하지 않을지.
신으로 불렸으나 수명이 유한하고 또 자신이 생각하던 방향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이 프로젝트의 개발자 라만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소설의 애매함에 빠져들었다. AE가 능력있거나 특출난 이들을 강제입주 시키는 것만큼은 확실히 잘못되긴 했지만, 그거 빼고는 이 시스템의 옳고 그름에 대해 생각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하라바야시도, 웨이시안도 이 AE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계를 없애려는 황신부가 오히려 악의 축으로 보인다. 이 불확정성과 불안함이 이 소설의 아우라로 느껴진다. AE에서 빅데이터화되어가는 페이를 설득하기 위해 웨이시안을 보내는 전개라던가, 페이의 인격 데이터를 삭제하는 프로그램을 아네모네라는 꽃잎으로 표현하는 서정성은 덤.
이 작품이 독특한 것은 ’동아시아 SF‘-한국인 작가가 썼고 주인공은 홍콩출신의 웨이시안이며, AE의 주요 기술은 일본인 여성, 하라바야시 가스미가 연구해낸다는 점이다. 홍콩이 지금은 반환되어 사라진 나라라는 생각을 해본다. 육체와 영혼에 대해 뼛속 깊은 유전자가 새겨졌을 웨이시안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설정이라고 상각한다. 그 밖에 ’에덴‘이라던가 ’스파이라‘와 같은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하는 유럽인 중심의 세계,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도 맘에 든다.
또 나는 개인적으로는 황신부 밑에서 일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 폴이 인상적이었다.
”저는 그런 유일한 권위라는 게 사람보다 중요하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도나 형태가 수억 명을 부조리한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준 AE를 파괴할 이유가 된다고도 생각하지 않고요.“
AE와 종교, 두 개를 대척점에 위치시키며 이분법적 논리에 빠진 황신부를 구원할 폴을 응원한다. 폴이 벗어주는 외투를 입고 살아남은 웨이시안은 이후 더 용기있게 행동한다는 점에서도 마음에 진하게 남았다.
AI가 진행중인 오늘날을 생각해본다. 기후위기로 더 다양한 전염병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는 기사를 읽는다.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태어난 작가들의 소설을 읽는다. 불안함 가운데에서도 소중한 것(페이의 소원)을 지켜내는 웨이시안을 만난다. <스파이라>를 덮으며 ”현실로 돌아가는 문을 열었다“(p.207) 나 역시 내일이면 어떤 새로운 기술이 펼쳐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작지만 소중한 것을 지켜낼 용기를 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