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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동남아 - 동남아시아의 어제와 오늘을 이끈 16인의 발자취
강희정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평점 :
화려한 서양의 문학, 철학, 음악, 예술을 바라보느라 눈이 먼 나는 가까운 동남아시아에는 흥미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 속, 열 여섯명의 인물 중 내가 알던 이름은 고작 폴 포트, 팃낫한, 아웅산, 보응우옌잡 정도였다. (그나마 최근에 읽은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덕에 한 명 추가) 겨우 네 명 이름만 간신히 익숙하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균형 감각을 가지고 세계를 보고자 하는 독자”(p.5)가 되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 나는 “서양에 치우친 인식과 사고의 불균형”을 가진 채 동아시아에서 살아가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국에서 무척 유명한 사람들이지만 우리에게는 생소하다. 나는 만약, 동남아시아라는 경계가 없었다면 김구 선생님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 혹은 박정희, 전두환씨가 실리지 않았을까, 혼자 상상해보기도 했다.
나는 치앙마이의 마지막 공주인 ‘다라랏사미’나 2022년 입적한 ‘팃낫한’,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먼저 접한 캄보디아의 대학살자 ‘폴 포트,’ 버마의 아이러니 ‘아웅산’도 주목할 만한 인물이지만 “저널리즘을 사회 발전의 수단으로 인식했던”(p.164)‘목타르 루비스’라는 인도네시아의 저널리스트가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다. 이 챕터에서는 인도네시아의 정세가 소개된다. “유럽에서 나치즘이 확산되자 식민 지배국인 네덜란드는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일본은 중국을 넘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전쟁 범위를 확장시키고 있을 무렵이었다. 인도네시아의 석유는 전쟁 당사국인 일본으로서는 승리를 위해 꼭 필요한 자원이었다.”(pp.162~163) 이런 부분을 읽으며 그동안 한국인으로서 일제강점기에 머문 나의 세계사적 시야가 확장되어 새로운 관점을 선물받은 느낌이었다.
그의 한국전쟁 종군기자 이력도 그렇다. 그는 이 전쟁에 대해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를 무능한 지도자로 짚었다. 그리고 그의 소설 <호랑이! 호랑이!>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챕터를 마무리한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적대 관계에 있는 세계적 강대국들의 휘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 나라가 어떻게 파멸의 길에 이르는지를 보고 배울 수 있을 것이다.”(p.169) 우리나라 대통령보다 미국 대통령 누가 될 지가 더 궁금했던 한 명으로 콕 찔린 문장이기도 했다.
이 책을 덮으며 의외로 나는 너무나도 이상적이어서 실현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백범 김구 선생님의 ‘세계시민주의적 민족주의 사상’을 다시 생각해본다. 이 책에 서술된 근대는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점령당한 우리나라처럼, 동남아시아의 여느 나라도 네덜란드, 영국, 일본에 의한 식민지의 경험과 저항, 독립을 향한 열망, 이후 새롭게 출현하는 독재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동남 아시아 근현대사를 조망하다 보면 오랜 식민지 역사를 만나게 된다. 제국주의 식민지가 곳곳에 건설되면서 현지인들을 착취했고 이에 반제국, 반식민을 표방하는 저항이 다양한 사상적 배경하에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민족의 영웅’들이 떠오르면서 민족주의 열풍을 주도했다. 이들은 식민지를 넘어 새로운 공동제를 만들고 전통을 계승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스스로 국가 및 민족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pp.174~175) 이 정도 동질의 아픔이면 힘을 합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 즈음, 살아 이루지 못한 백범선생님의 이상국가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동남아시아에 대해 그저 휴양지나 값싼 열대과일의 대명사로, 다문화가정으로만 보지 않을 수 있기를, 같은 아픔을 가진 아시아인으로서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동남아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