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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의 증명
단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0월
평점 :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와 <수능 해킹>의 작가, 단요의 장편소설이다.
“아무도 내 안에 시한폭탄이 있다는 것을 믿어주지 않는다 그것을 터뜨리기 전까지는”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무절제기-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이렇게 부른다-가 지고, 앞선 역사 속 문제점들을 통제하려는 ‘문명재건청’의 휘하에 여러 가지 거주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종 사회 실험이 진행 중인 세계이다. 시기는 <1984>를 지나 <멋진 신세계> 전, 그 중간을 지나고 있다. 문명재건청은 빅브라더와, 태서는 존에 가깝다.
책의 시작. 주인공 태서는 삼촌과 함께 살고 있다. 그를 낳아준 부모님은 어릴 때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의문을 품은 열일곱 살 태서는 가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곧 문명재건청에 걸리고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는 병명으로 인지과학, 뇌공학 연구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 곳에서 “내게는 망가져 있을 자유가 있지.”(p.230)라 말하며 일부러 얼굴에 흉터와 신경통을 고치지 않는 40대 연구원이자 심리상담가인 가문비와 만나게 된다.
1호, 2호, 3호의 목소리가 한 몸에 있는 주인공 태서는 특별한 아이다. 1호는 “나는 나 자신을 알고 믿는 거의 유일한 존재고, 가능하다면 한 명이 아니고 싶다.”(p.31)라고 말하면서 타인을 잘 믿지 않고 냉소적이면서 잘 우는 목소리이다. 2호는 세상을 바꿀 정도의 번뜩임을 지닌 천재지만 아홉 살에 4개월 된 동생의 손을 놓아버리는, 반사회성을 가진 목소리다. 3호는 이 둘을 진정시키고 위로하며, 피폐해진 육체에 밥을 챙겨먹어주고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성을 유지해주지만 1호와 2호에게 인공지능으로 오해받는 목소리이다.(이건 딴소리인데 키오스크가 있는 곳에서 태서 뒤에 서면 엄청 오래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셋이 뭐 먹을지에 대해 싸운다면...)
“결국 내가 나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거예요, 그렇죠?”착한 아이로 태어나지 못한 소년과 나쁜 아이를 위한 자리가 없는 세계 -이 책의 뒷표지에 써있는 문구이다. 가출 전 태서는 문명재건청에 추천될 만큼 뛰어난 인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2호의 반사회성이 결격사유였다. 나쁜 아이는 이 세계에 있을 자리가 없다는 저 문장을 보며 능력주의시대인 오늘날을 생각해본다. 범죄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사실 2호는 우리 사회에서 누구보다도 잘먹고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능력주의 만능 편향 사회가 무절제기의 종말을 가져왔음을 떠올리자면 이 소설의 방향이 보인다.
한편으로는 나의 목소리는 1호, 2호, 3호 중 어떤 목소리에 가까운지도 생각해볼만한 지점이다. 따지고보면 우리는, 이 소설 내내 느낄 수 있던, 태서의 슬픔이 다가오기 전 무언가를 바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있는 그대로도 괜찮다고. 똑똑하지 않아도, 잘나지 않아도 소중하다고. 누군가 나한테 그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그냥 칭찬받고 싶어. 내가 아무것도 돕지 못할 때도,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 반드시 내가 하자는 대로 따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날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p.211) 2호가 1호에게 하는 이 목소리를 읽으며 1호의 말, “우리가 어떤 점에서는 대등하거니와 서로의 공백을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협력하며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p.226)를 생각해본다. 2호가 못미더웠던 1호는 3호를 필요로 한다. 2호는 3호를 싫어하지만 1호만 자신에게 귀기울여주면 참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사회성의 2호를 인정하는 것, 3호라는 가장 적정한 타협,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불확실한 시대에 사는 감정적인 인간인 1호, 이것이 바로 ‘우리’이며 태서의 모습이다.
단요작가님의 예리한 사회적시각이 이 소설에 얼마나 많이 녹아있는지 모른다. 나는 흉터를 고칠 수 있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파괴할 권리를 자유로 생각하는 가문비나 나사역할의 청견, 북정, 남정 거주구 등 곱씹어볼만한 소재들이 넘쳐난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을 덮으며 나는 이제 SF 소설을 쓰는 한국작가를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게 되었다.
#목소리의증명#단요#위즈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