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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라 일지
김금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평점 :
<경애의 마음>으로 한국인을 사로잡은 소설가 김금희님이 2024년 2월 1일부터 약 한 달간 남극살이에 도전했다. 이 경험을 한겨레S에서 ‘김금희의 나의 폴라일지’라는 이름으로 2024년 1월20일~11월9일까지 총 22회 연재했다. 이 기록들과 귀여운 일러스트와 함께 묶은 책이 <나의 폴라일지>이고, 작가님의 세 번째 산문인셈이다.
“주권도 화폐도 국경도, 당연히 도시도 없지만”(p.12) “남극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오래전이다.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들에 강하게 끌렸다.”(p.13)라는 문장과 이 곳에 가기 위해 파상풍 주사를 맞고 수상훈련을 받고, 주위에서 ‘북극곰 보고 오느냐’라는 질문을 받는 작가를 읽는다. 버킷리스트 상위권인 순례길보다 더 희귀한 경로인 남극을 향해 산티아고행 비행기를 타고, 장시간의 비행동안 읽을 책으로 동료들에게 유언과도 같은 편지를 남긴 스콧의 ‘남극일기’를 골라온 작가와 함께 1장을 읽다보니 어느새 나 역시 남극에 스며든다.
MBTI 중 TTT인 과학자들만이 득시글(!)거릴 것 같은 곳에 소설가의 눈으로 보는 남극에 대한 묘사가 가장 매력적이다. 남극이라는 공간 역시, 추위와 펭귄 외에는 전혀 아는 것이 없는, 낯설게 하기 기법이 필요없는 곳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높은 분들이 남극에 오면 찾는다는 펭귄보다 더 흥미로운 것들이 존재했다. 카펫처럼 깔려있지만 웬만하면 밟지 않기를 권하는 이끼들 -“남극좀새풀, 우스네아, 솔이끼, 클라도니아, 히만토르미아.....”(p.84) - 허리를 굽히거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를 요구하는 지의류부터 “중위도 지역에서 주로 형성”되며 “수분과 열을 품은 채 수천 킬로미터 길이”와 “폭은 수백 킬로미터에 불과한 좁고 긴 형태”를 가지는 ‘대기의 강’같은 하늘에 펼쳐져있는 현상까지, 상황에 맞게 현미경과 망원경을 갈아끼우는 작가의 렌즈 덕에 남극을 샅샅이 살펴보게 된다. 물론 펭귄과 해표는 호감도 때문일까, 가장 친근감이 든다. 이 책 중에는 해표마을을 바라보는 저자의 인상도 기록되어 있다.
“정작 나는 추워 덜덜 떨고 있었지만 마음은 녹듯이 포근해졌다. 일면 슬퍼지기도 했는데 너무 순정한 것, 아름다운 것, 들끓는 자아 따위와는 무관한 자연 자체의 풍경과 맞닥뜨릴 때 느끼는 기이한 상실감 같은 것이었다. 남극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나는 실제 내 삶은 이곳과 얼마나 다른가를 동시에 감각했다. 적어도 지금의 내게는 남극이 인간이 인간처럼 살 수 있고 해표가 해표처럼 살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공간이었다.”(p.138)“
남극뿐 아니라 세종기지 속 사람들도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작가님이 얼마나 남극요원들을 다정한 눈으로 관찰하고 잘 지내셨는지 벡터, 홍선생님, 카밀라언니 등등은 아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L박사가 탐사 때 내는 문제를 작가님보다 훨씬 잘 맞추는 M과는 나도 모르게 친해져버린 느낌이다. 중식을 잘한다는 요리사님의 튀김은 나도 한번 먹어보고 싶었고 이들의 안전을 위해 이 곳을 지원하시는 분들 마저 믿음직스러웠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살아가는 도시생활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방향을, 더 먼 곳을 바라보는 이들이 자신만의 폴라일지를 남기기 위해 이 세종기지로 모여들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기후변화로 인한 남극의 변화가 과학자들을 이곳으로 오게하는 이유라는 점이 슬프기도 하다. 작가님의 말대로 펭수와 같은 종족인 아델리 펭귄은 이제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걸까? 웬만하면 남극 환경을 망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츄럴한 제품들을 가져가고 탐사하면서도 플로깅을 하는 그곳 사람들의 생활을 보며 조금있다가 분리수거해야 할 플라스틱더미들을 쉽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카피바라의 인기에도 휘둘리지 않고 펭귄을 계속해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다큐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그리고 호기심이 많은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서울은 커녕 집밖도 나가기 싫어하는 나같은 게으름뱅이인 독자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