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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 개정판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평점 :
한겨레출판에서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숨 쉬러 나가다" 3종을 리커버 세트로 출간했다. 그 중 <숨 쉬러 나가다>이다.
<1984>와 <동물농장> 외에 조지 오웰이 쓴 다른 소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유명하지 않다는 뜻은 ‘별로인가’하며 기대감 없이 읽었다가 진흙 속에서 보석을 줍게 되었다.
중년의 보험 외판원, 조지 볼링이 새 틀니를 맞추는 날, 우연히 경마로 따게 된 17파운드를 아내 힐다 몰래 쓸 생각에 부풀면서 소설이 시작한다. 그는 보채는 아이들로 목덜미에 묻은 비눗물을 다 씻지도 못한 채 욕실에서 나와 일터에서도, 집안에서도 끈적끈적한 불편한 일상을 참고 있는 중이다. 돈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아내는 그런 그를 더욱 지치게 만들 뿐이다. 게다가 라디오에서는 끊임없이 들려오는 전쟁이야기는 그를 불안하게 한다. 이러한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조지 볼링은 20년 전 떠나온 고향을 혼자 방문하여 낚시와 같은 소일거리를 하는데 이 돈을 쓸 생각이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의 자연에 둘러싸인 고향과는 달리, 대규모 주택 건설로 연못은 쓰레기매립지가 되어 있고, 비밀의 연못은 정신병원으로 변해 있다. 볼링은 자신의 기억 속 과거의 고향과 현재의 모습 간의 괴리감을 느낀다. 라디오로 힐다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 다시 돌아오지만 여행을 하기 전과 다를바 없는 불편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틀니를 새로 맞추는 날이라는 설정부터 힐다에게 무어라고 이야기할 지에 대한 3개의 객관식까지 인상적인 부분이 정말 많았다. 그중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이루어진 상아탑에 스스로 갇힌 포티어스와 히틀러에 대해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잘못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히틀러는 차원이 다른 존재예요. 스탈린도 그렇고요. 그들은 그저 재미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머리를 베고 하던 옛날 인간들하곤 달라요. 그들이 추구하는 건 사뭇 다른 무엇이에요. 전혀 못 들어본 것이라고요.”
“이 친구야! 태양 아래 새로운 건 없다네.”
물론 그건 포티어스가 아주 좋아하는 말이었다. 그는 새로운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p.248)
조지 볼링은 ‘바보도 아니지만 지식인도 아닌 자신’조차 “다가올 전쟁이, 전후와 식량배급줄과 비밀경찰이, 생각할 것을 지시해주는 확성기가 눈에 선하다”(p.249)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만나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이, 펍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이들이, 버스 운전사들이, 철물회사의 출장 외판원들이 세상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음을 직감하고 있”(p.249)다. 그러나 포티어스에 대해서는 “이 학식 있는 사람은, 평생 책과 함께 살았고 역사에 푹 빠져 있어 몸에서 역사 향이 발산되는 듯한 이 사람은, 세상이 변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 히틀러가 문제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또 한 번의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지난번 전쟁에 나가 싸우지 않았으니 전쟁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pp.249-250) 조지 오웰이 가장 경계하고자 하는 사람이 이런 류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에피그라프- “그는 죽었네, 하지만 누워 있지 않으려 하네, 어느 대중가요“-를 떠올려본다. 오웰은 포티어스 같은 사람을 ”‘그는 죽었다.’ 유령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죽은 것이다.“(p.251)라며 평범한 볼링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한다. 내면적으로, 정신적으로 죽은 지식인층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 챕터의 마지막 문장 -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의아했던 건 도대체 왜 나 같은 인간이 그런 걱정을 해야 하느냐였다.“(p.253) -은 사회 문제에 대해 고뇌하는 미약한 개인, 조지 볼링을 우리가 바라볼 수 있도록 쓴 오웰의 전방위적 시각이 돋보였다.
고향을 방문한 일주일동안에도 변해버린 고향 사람들과 전쟁의 불안이 느껴진다. 어린 시절,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엘시가 뚱뚱하고 추한 할망구가 되버린 모습은 상징적으로 자신의 기억 속 과거의 고향과 변해버린 현재의 상징으로 보인다. 제목처럼 숨 쉬러 나갔지만 그는 오히려 물먹은 종이처럼 상실감과 절망을 잔뜩 흡수해버리고 말았다.
조지 오웰의 이 작품은 ‘조망하고 예견하는 글쓰기’로 소개한다.
”현대 사회의 실체인 ‘불안’과 ‘소외’의 징후를 예리하게 밝혀내는 시선에, 다가올 2차대전과 파시즘이 지배하는 세상을 너무나도 정확히 예견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작품이다.“
유명한 두 작품이 설명없는 은유로 쓰였다면 이 소설은 조지 볼링의 내면의 목소리를 직접 묘사하기에 조지 오웰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청소년들이 이 작품을 먼저 읽고 나머지 두 작품을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