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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바삼 티비의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l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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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gwoo (이메일 보내기) l 2013-01-03 11:12

https://blog.aladin.co.kr/797865117/6054127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 - 이슬람세계에 대한 오해와 이해
바삼 티비 지음, 유지훈 옮김 / 지와사랑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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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바삼 티비Bassam Tibi는 누구인가?

 

이 책의 저자 바삼 티비Bassam Tibi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무슬림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슬람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진보주의 이슬람교 학자로서 명성이 높아지자 이슬람세계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독일에 영주했다. 그는 독일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40여 년에 걸쳐 이슬람 문화를 주제로 독일어로 28권, 영어로 8권을 책으로 출간했으며, 은퇴하기에 앞서 최후의 저작으로 이 책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를 출간했다. 이 책은 그가 말한 대로 15년 동안 이슬람주의를 연구한 결과물이면서 평생 연구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는 예일 대학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이 책을 집필했고, 탈고한 후에는 두 차례에 걸쳐서 전문가 여덟 명이 검토하고 네 차례의 편집과정을 거쳐 최종 통과되었다. 그러나 예일 대학 출판부는 다시 세 명의 검토자를 선정하여 몇 차례의 원고를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했다. 이 책은 열한 명의 전문가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까다로운 검토과정을 통과했으므로 내용의 신뢰성에 문제가 없다고 본다.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는 어떻게 다른가?

 

저자는 이 책에서 이슬람교와 종교를 정치의 구실로 삼는 이슬람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이슬람권 밖의 사람들이 이슬람교와 이슬람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까닭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념의 뿌리가 이슬람교라고 확신하며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슬람교를 순수한 종교로 보지 않고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신정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무슬림의 사명으로 간주하고 17억 무슬림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선동하고 있다.

이슬람주의는 국가질서를 위한 정치적 수단에 불과하고 이슬람교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무슬림의 생활양식과 세계관을 규정하는 문화적, 종교적 제도다. 이슬람주의의 정교일치 사상은 이슬람교 자체라기보다는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주요 경계를 표시하는 특징이다. 이런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영향력 있는 서양 학자와 정치가들이 중동 이슬람세계에 대한 정책을 펴기 때문에 현재 이슬람교가 문명의 충돌 혹은 문명의 위기에 분수령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서방세계가 중동에 대한 개입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으로서 이슬람교를 끌어들인 점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이슬람주의자들의 주장하는 내용을 그들뿐 아니라 17억 무슬림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야기되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을 17억 무슬림이 지지하고 있다는 오해에서 문명의 충돌 혹은 문명의 위기가 운운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주의는 종교를 빙자한 정치세력이다

 

저자는 이슬람주의를 반대하는 무슬림으로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 안에서 이슬람교가 새로이 인식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진보주의 무슬림으로서 바삼 티비는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이슬람주의의 전체주의적 외관은 반유대주의와 관계가 깊으며, 이슬람주의자들이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양극화를 부추길 뿐 아니라 이슬람 공동체의 내분을 일으키고 있고, 심지어는 자기방어의 일환으로 ‘이슬람혐오증’을 꾸며내는 데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슬람주의자들이 자살테러 등 폭력으로 세계를 위협하는 데도 서양의 학자와 정치가들이 이슬람교와 이슬람주의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해 정치적으로 혼선을 빚는 데 대해 이슬람교 연구에 전념해온 학자로서 바삼 티비는 이슬람주의가 종교를 빙자한 정치세력이며 신정정치를 추구하는 폭력집단임을 거듭 역설한다.

 

 

책의 주요 내용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역설하는 점은 “이슬람주의는 신앙이 아닌, 정치질서에 중점을 두면서도 단순한 정치가 아니라 종교화한 정치라는 점에서 이슬람교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종교화한 정치”는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필히 숙지해야 할 개념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원하는 “종교화한 정치란 국민의 주권이 아닌, 알라의 뜻에서 비롯된 정치질서를 장려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이슬람교에는 없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슬람주의는 이슬람교의 부흥이 아니라 전통과는 거리가 먼 선입견을 부추긴다. 바삼 티비는 이슬람주의가 전통을 꾸며낸 경위와 그 이유를 이 책에서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문명의 충돌 혹은 문명의 위기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세상을 다시 만들겠다는 야망을 실현하려고 폭력까지도 서슴지 않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슬람주의는 “폭력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질서 위에 있으며, 이데올로기의 중심은 단연 질서nizam(니잠)에 있다. 이슬람주의의 정치질서가 바로 새로운 세계질서인 것이다.” 바삼 티비는 정치색을 띤 이슬람교의 기원은 1928년 당시 카이로의 수니파-아랍 이슬람교에서 창설된 무슬림 형제단의 출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서 이슬람주의가 1979년 이란에서 벌어진 시아파인 호메이니가 주도한 혁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수니파 이슬람주의가 호메이니 사상보다 역사가 훨씬 깊다고 말한다. 그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유대인을 “세계의 원수”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 기원을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세계질서를 둘러싼 경쟁의식에서 찾는다. 그는 무슬림 형제단이 창설될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무슬림 형제단이 이슬람교에 대항하는 “유대인의 모략”과 스스로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간주하는 부분에서 경쟁의식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주의식 유대인혐오증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비롯되었으므로 그것이 일단락되면 곧 사그라질 것으로 보는 견해는 어불성설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무슬림 형제단의 역사를 감안해볼 때, 정치색을 띤 이슬람교는 중동 분쟁과는 관계없이 유대인을 문제 삼아 왔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차이는 폭력의 정당화 혹은 성전聖戰(지하드)를 거론할 때 특히 부각된다. 이슬람교 학자로서의 저자는 지하드를 ‘자기수련’이자, 코란에 따르면, 포교의 일환으로 불신자와 벌이는 물리적 투쟁의 실천임을 강조한다. 자기수련과 물리적 투쟁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지하드의 정의다. 그렇지만 테러가 아니다. 신실한 무슬림은 지하드를 종교적 의무이자 이슬람교의 사명에 저항하는 세력을 끊는 방어 전쟁으로 지하드를 이해한다. 이에 반해 이슬람주의의 지하디스트(성주의자)의 정치적 아젠다는 경쟁문명에 대항하는 전쟁이라는 문화적 맥락에서 제기된다. 따라서 이슬람주의를 세계질서를 둘러싼 문명의 경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바삼 티비는 “폭력을 행사하려는 의지는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의 기본 특성이긴 하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목표는 단연 이슬람교의 질서가 될 것”이라면서 지하드운동의 폭력은 테러행위이므로 자기수련과 물리적 투쟁으로서의 고전 지하드 윤리와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무슬림으로서 이슬람세계에서 비난을 자초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실한 무슬림으로서의 그는 이슬람주의 때문에 17억 비이슬람주의 무슬림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람들로 인식되므로 앞장 서 이슬람주의를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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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철학은 관람용 스포츠가 아니다l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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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gwoo (이메일 보내기) l 2012-10-12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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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
나이절 워버턴 지음, 박수철 옮김 / 지와사랑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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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


 
 
철학은 관람용 스포츠가 아니다

 

철학을 공부할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철학이 관람용 스포츠가 아니라는 점이다. 학생들이 철학의 개념들을 다룰 때는 어떤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기자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접근해야 한다. 철학공부를 한다는 건 철학적 사고를 배운다는 걸 의미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이를테면, 시를 공부하는 것과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시를 공부하는 사람은 굳이 시인처럼 시를 지을 필요가 없다. 대신 시를 날카롭게 비평하는 방법만 배우면 된다. 시에 관한 비평을 시처럼 쓸 필요도 없다. 실제로 소네트를 지을 수는 없어도 소네트를 공부할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구태여 그림을 잘 그릴 필요가 없다. 다만 그림과 조과 건축물을 감상하는 방법과 그것들을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면 족하다. 그러나 철학은 다르다. 예를 들면, 모든 철학 논술은 그 자체로 철학의 일부다. 논술에서는 어떤 주장을 펼쳐야 한다. 굳이 깜짝 놀랄 만한 독창적인 주장일 필요는 없다. 다만 적절한 논증이 요구된다. 논술을 할 때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철학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주장했듯이, 우리도 자신의 견해를 주장해야 한다. 즉 위대한 철학자들이 그들의 위치에서 그랬던 것처럼 논술을 쓰는 학생은 자신의 위치에서 여러 가지 개념들을 설명하고 해석하며 비판하고 제시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철학은 물리학이나 역사학과 유사한 점이 있다. 이를테면, 지금 물리학 실험을 수행하는 사람은 과거의 위대한 물리학자들과 동일한 종류의 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나름의 역사연구에 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철학적 사고를 외면할 수 없다.
철학을 읽을 때, 들을 때, 논할 때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 철학자로서 읽어야 하고, 철학자로서 들어야 한다. 철학을 논한다는 건 단순히 철학에 관한 토론이 아니라 철학적 토론을 뜻한다. 이것은 철학이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인 학문의 자리에 오른 여러 가지 이유들 가운데 하나다. 단순히 타인의 생각을 배우는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철학자로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는 문제인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철학자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철학공부는 다른 철학자들의 발언과 그것의 맥락을 배우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우리가 철학자로서 철학의 과거를 공부하는 목적은 무미건조한 개념으로 가득한 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철학의 과거를 공부하는 진정한 목적은, 오늘날의 철학에 기여하고 적어도 지금 우리가 탐구하는 문제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면, 철학과에서 르네 데카르트 같은 17세기 철학자에 관한 수업을 듣게 되면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과 회의론에 관한 그의 견해를 다루게 될 것이고, 생각이 존재를 입증한다고 주장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Cogito.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견해, 즉 사유를 갖는다는 것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견해를 배울 것이다. 우리는 단지 데카르트의 지적, 역사적 맥락에 관한 사실이나 그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 자체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역사적, 인생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까닭은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한 것, 그가 반대한 견해, 그가 활용한 중요한 모델 등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그의 저작물이 갖는 문헌적 가치에 집중하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그의 문맥과 문체를 비롯한 데카르트의 모든 측면들은 그에 대한 철학적 연구에도 필요하다. 그러나 궁극적 목표는 오늘날까지 이어진 여러 가지 철학적 논의의 시발점을 제공하고 후학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 데카르트의 주장을 이해하고 논하는 것이다.
전공자로서 철학 강의를 듣는 것은 철학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 과정이다. 사상의 역사는 공부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다. 철학은 기본적으로 지식의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의 활동이다. 이는 철학이 무척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한 학문인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갈고 닦는 여러 기술들은 철학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응용할 수 있다. 철학을 공부하면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자신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 사상가와 단순한 학자의 차이

수동적으로 습득한 진리는 의족과 틀니와 밀랍 코, 혹은 타인의 살집으로 성형한 코에 불과하다. 반면 우리 자신의 사고를 통해 획득한 진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팔다리와 같다. 바로 여기에 단순한 학자와 사상가의 차이점이 있다. 스스로 사고하는 사람의 지적 자산은 적절한 명암, 일관된 색조, 완벽한 색의 조화를 자랑하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다. 반면 단순한 학자의 지적 자산은 다양한 색상을 자랑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조화, 순서, 중요성 등이 없는 커다란 팔레트 같다.
철학적 사고를 배우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훌륭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음 네 가지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 네 가지 습관은 어떤 공부를 할 때도 도움이 될 것이다.


■ 적극적으로 읽기
■ 적극적으로 듣기
■ 적극적으로 토론하기
■ 적극적으로 글쓰기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바로 이 네 가지 습관을 적절히 조합해 실천함으로써 나름의 철학적 기술을 다듬어왔다. 물론 소크라테스 같은 예외도 있다. 알다시피 그는 철학과 관련한 글을 남긴 적이 없지만, 탁월한 토론 능력 덕분에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심각한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 그러니까 독순술, 동시수화, 동시자막 등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도 위대한 철학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철학 전공자들은 이 네 가지 활동을 적절히 구사해야 그들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내가 강조하는 건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인 읽기, 적극적인 듣기, 적극적인 토론, 적극적인 글쓰기다. 앞서 강조한 대로 철학은 관람용 스포츠가 아니라 오히려 쉽게 만족되지 않거나 아주 신나는 실천이다.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보다 명확하게 사고하는 것이며 지금 우리가 탐구하는 주제를 이미 철학적으로 사고한 바 있는 사람들의 빛나는 업적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대부분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철학도 기본적 수단들을 배우고 그것들을 적용하면 더 쉬워진다. 한 사람의 정체된(진부한) 사상가가 되기는 쉽다. 그런 사상가가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진정으로 사고하기를 외면한 채 타인의 말과 글을 단지 암기하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소극적 방식에 안주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결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독창적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는 방법을 터득하면, 그것을 삶의 여러 영역에 응용할 수 있다.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철학이 다른 모든 학문에 비해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들은 더 이상 타인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이끌어내고, 검토하며, 검증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치밀하게 사고한다. 결론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매우 추상적이고 난해한 주제를 다룰 때조차도 그들의 글에는 진정한 힘이 실려 있다. 이처럼 적극적인 철학 공부는 보답과 보람이 뒤따르는 경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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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아름다운 인연이 주는 감동'l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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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gwoo (이메일 보내기) l 2012-10-11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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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김의 메모아 - 내가 사랑한 한국의 근현대 예술가들
김정준 지음 / 지와사랑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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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김의 메모아: 내가 사랑한 한국의 근현대 예술가들』에 붙여서

'아름다운 인연이 주는 감동'

환기미술관장 박미정

 

 

우리 모두 인생에 사연事緣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와 우리가 만난 사람과의 의미 있는 관계를 설명해준다. 우연한 만남이든 의지에 작용한 필연의 만남이든 사연은 인연因緣이 되어 인생의 근저를 형성하는데, 세월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이를 운명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인연은 인생을 구체적으로 조명해주는 또 다른 명칭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인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름다운 인연의 시작과 그 기쁨에 대하여.

피난지에서 시작된 인연

김마태 박사가 수화 김환기 화백을 처음 만난 건 한반도를 순식간에 공포의 땅으로 만든 한국전쟁 중 1951년 부산에서였다.

부산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남하할 수 있는 한반도의 끝자락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많은 이들이 그곳 피난지에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인연으로 수놓아지는 인생은 피난지에서도 계속되었다. 예술가들의 삶도 생소한 환경과 궁핍 속에서도 인연을 통해 한결같이 새로운 방향으로 뻗어갔다. 김 박사의 부인 전재금 여사는 소설가였던 어머니 김말봉 여사를 통해 일찍이 40년대 중반부터 김환기 화백의 부인 김향안 여사를 잘 알고 있었고, 당시 문인들과 교류가 잦았던 김 화백과도 어울리곤 했다. 문인들은 주로 찻집(다방)에서 모이곤 했는데, 이런 전통은 해방 후 서울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과거 유럽에서의 카페문화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예술가들의 사교 장소, 창작의 산실 역할을 하였다. 부산으로 피신한 예술가들 역시 만남의 장소를 물색하여 그들의 단골 찻집을 만들었다. 서울 장안의 유명했던 음악다방 르네상스가 부산으로 이전해와 예술가들의 안식처가 되었으며, 금강다방, 온달다방, 밀다원, 야자수, 녹원다방 등은 예술가들의 대표적인 창작과 친교의 공간이었다. 김 화백 부부가 자주 찾던 금강다방에는 김동인, 조병화, 조연현 등 문인들과 이중섭, 백영수 등 화가들이 늘 진을 치고 있었다. 녹원다방, 온달다방, 밀다원 등에서도 예술가들의 만남이 잦았다. 찻집은 약속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예술가들은 날이 밝으면 찻집에 와서 정보를 교환하고, 글을 쓰고, 작품 발표의 기회를 성립시키면서 피난지에서의 암울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김마태 박사와 김환기 화백 부부의 첫 만남은 부산의 길거리에서였다. 피난지 거리에서의 우연한 만남은 두 사람의 운명적인 인연의 시작이 되었다. 그날 김 박사와 김 화백의 눈인사는 두 사람의 여생에 선명한 빛으로 남을 회고의 출발점으로서 두 사람의 만남을 인연으로 발전시켰다. 그로부터 두 사람의 인생이 운명적으로 연결되었고 두 사람 모두 그 인연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각자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김 화백 부부는 영도에 위치한 일본식 가옥 다락방에 세 들어 있었다. 전재금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비록 난리통의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김 화백 부부의 집안은 늘 정갈했고, 김향안 여사는 풀을 먹여 손질한 모시적삼을 단정하게 입고 다녔다고 한다. 궁색하고 비좁은 다락방에서의 불편한 삶이었지만, 김 화백은 창작의지를 꺾지 않고 드로잉과 수채화와 유화를 제작하였으며 전시에도 참여하였다. 김마태 박사는 1951년 뉴-서울 다방에서의 전시회를 두 번이나 관람했다. 거리에서 시작된 인연이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져 훗날 먼 이국땅 미국으로까지 연결되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일생에 자리 잡게 된다.

미국에서 꽃피운 인연

1953년 6월에 도미한 김마태 박사는 첫 10년을 뉴욕에서 보내게 되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방문한 김 박사는 18세기 이탈리아 화가로 신화와 성서를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긴 티에폴로의 회화에 감동을 받아 김환기 화백에게 엽서를 보냈다. 엽서에 화답하듯 김 화백은 브라질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관 커미셔너 겸 작가로 참석하고 돌아가던 길인 1963년 10월, 뉴욕에 도착했다. 서구미술의 중심지인 뉴욕에 들러 생생한 현장을 직접 느끼고 자신의 미학적 위치를 점검하고자 한 김 화백은 부산 피난시절 그에게서 그림을 배운 이탈리아계 미국인 브루노를 만나 그의 작업실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이듬해 봄, 김 박사의 보증 겸 추천으로 김 화백은 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아 맨해튼 서쪽 73가 160번지 유서 깊은 아파트에 작업실과 생활공간을 겸한 스튜디오를 얻게 되었다. 록펠러재단은 2년 동안 그의 건강보험까지도 해결해주었다. 그로부터 타계할 때까지 김 화백은 뉴욕을 떠나지 않고 귀국할 기회를 미룬 채 작업에만 매진했다. 김 화백과 김 박사 두 가족은 타국에서 자주 어울리며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랬고, 생활의 힘겨움을 위로하였으며, 예술을 공유하고, 인생의 고된 여정을 서로 응원하며 지냈다.

뉴욕에 정착하게 된 김 화백은 거침없이 생기발랄한 도시의 풍경과 황당하리만치 모든 것이 풍요로운 환경 속에 자리 잡은 현대미술의 중심지에서 철저한 작가의 입장이 되어 자신의 작품세계를 정리하고 끊임없는 도전으로 재료를 실험하고 조형에 대한 탐구에 열중하였다. 물론, 머나먼 이국땅에서의 예술가의 삶은 곤궁과 고달픔의 연속이었으리라. 김 화백은 부둣가에서 짐을 나르는 노동을 하면서 “내가 미국에서 배운 건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만 된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껄껄 웃었다고 전재금 여사는 회상한다. 김 화백은 넥타이를 제조하는 봉제공장에서도 일한 적이 있었다. 그는 급여를 받으면 맥주 버드와이저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을 올려다보곤 자유와 행복을 함께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회화에 대한 새로운 실험과 연구에 바친 열정과 동료, 후배 예술가들의 관계에서 보여주던 호쾌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있어서 김 화백은 강한 생활력을 갖지 못했고 작업준비와 의식주의 유지를 대부분 아내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형국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삶의 기반을 마련하는 굳센 기질을 지닌 김향안 여사였지만, 그녀 역시 김마태 박사를 많이 의지하였다. 김 여사가 뉴욕에 타고 온 비행기표의 외상값을 갚아준 이도 김마태 박사였다. 1960년대, 머나먼 이역 땅 뉴욕에서 예술가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궁색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김 여사는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무장하고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일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실행해나갔으며, 김 화백과 관련된 일이라면 어떤 장벽이라도 뛰어넘을 자세로 임해 용맹스러운 행동을 감행했다. 김 화백이 자신을 찾아온 후배들과 한 잔 하겠다며 술상을 요청하면 비록 끼니를 걱정하는 상황에서도 외상으로 술과 안주를 마련했으며, 김 화백이 작업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강한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루는 조각가 한용진과 화가 문미애 부부가 집을 짓기 위해 자재를 구입할 돈을 마련하자 바로 김 여사는 김 화백 작품을 상파울로 전시회에 보내기 위해 그들이 마련한 돈을 모두 가져갔다. 김 화백이 지닌 예술 혼과 김 여사의 불굴의 의지를 주변 사람들은 존경과 존중으로 일관하였으며 그들 부부에게 늘 협조적이었다. 뉴욕에서 다시 만나게 된 그들 모두의 인연이 다정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가운데 그들 모두의 삶이 견고하고 융성해졌다. 그리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뉴욕에 본격적으로 한국 미술계가 터전을 잡고 형성되었다.

 

맨해튼 73가에 위치한 김 화백의 스튜디오가 제작이 끝난 많은 작품들을 모두 걸기에 비좁다는 이유도 있지만 김 화백은 새로 완성한 작품이나 마음에 드는 작품을 김 박사 댁 거실에 걸어두고 감상하기를 즐겼다. 그는 김 박사 댁 거실에 자신의 작품을 거는 것을 자연스런 일로 여겼는데, 그만큼 김 박사 부부를 가족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묵묵히 작업에만 몰두하지만 김 박사 집에 가면 거실에 앉아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고 또 다른 작품으로 바꾸어 걸기도 하면서 김 박사 부부와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뜰에 나가 수영도 하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작업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달밤의 섬>은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작품으로 김 박사의 거실에 반년 이상 걸려 있었다. 이 작품은 김환기 부부가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전재금 여사가 소개한 친구가 고른 작품이기도 했다. 그 사람은 김 화백의 작품이 막 추상으로 전환된 시점이라서 구상화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그 사람이 <달밤의 섬>을 마음에 들어 하자 김 화백은 “아 그것이 마음에 들어요? 다음에 내가 좋은 그림을 그리면 그때 바꿉시다”라고 당부했고 김향안 여사는 정성껏 식사를 준비하여 그분을 대접했다. 후에 약속대로 김향안 여사가 푸른 색조의 점화작품으로 바꾸어주고 <달밤의 섬>을 찾아갔다. 이 작품은 현재 환기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렇듯 김 박사의 거실에 자리 잡았던 김 화백의 여러 작품이 현재 환기미술관에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 <우주Universe> 역시 30여 년간 김 박사 댁 거실에 걸려 있던 작품이다. 뉴욕에서 김 화백의 회화가 인정받게 된 것은 포인덱스터 갤러리에서 <우주>를 소개하고 그것을 『뉴욕타임즈』가 호평한 후부터라고 김 박사는 말한다.

김 화백은 미국으로 건너간 1963년부터 타계한 1974년에 이르는 소위 ‘뉴욕시대’를 통해 가장 원숙하고 완성된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초기부터 부단히 추구해온 산, 달, 강, 새, 나무 등 자연풍경의 구상성을 더욱더 단순화하여 종국에는 점, 선, 면 등 극도로 절제되고 응축된 조형미로써 심화된 추상의 세계를 구현했다. 1950년대 드로잉에서 간간이 나타났던 점과 선의 조형적 실험이 1970년경 본격적인 전면점화全面點畵로 나오기까지 엄청난 양의 소재와 구성적 실험으로 이뤄졌다. 점, 선, 면의 다양한 조형적 실험은 산월추상, 십자구도, 색면추상 등의 방법과 종이죽을 사용한 오브제작품을 비롯하여 신문지, 한지, 포장용 기름종이 등 다양한 재질감의 시도로 추구되었으며, 입체와 평면의 장르를 막론하여 풍요롭게 제작되었다. 김환기 미학의 정점을 이루는 전면점화는 캔버스와 유채라는 서양의 재료와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한지나 천에 스며드는 부드러운 번짐을 이용한 수묵화 같은 효과로 동양의 정서를 드러내는 미적 표현을 구현하여 ‘수화 김환기의 대표적인 작품코드’가 되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화백에게 1970년은 뉴욕에 도착한 이후 가장 행복했던 한 해였다. 그는 뉴욕 미술계의 인정과 관심을 끌기 시작했으며 여러 전시를 제안받아 더욱더 작품 제작에 매진하게 되었다. 과도한 작업으로 육체는 노곤해졌더라도 분출하는 창작 욕구를 마음껏 발산하며 생활의 근심조차 잊게 된 상황 속에서 비로소 화가로서의 소명의식을 확인하고 그러한 인식에서 느끼는 희열과 행복을 만끽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뛰어난 직관으로써 변화하는 서구의 현대미술을 받아들였고, 회화의 평면성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작품세계를 확장한 피카소의 불굴의 도전 정신을 칭송하였다.

이 시기, 화백은 다양한 재료와 새로운 조형실험의 과정에서 부단히 추구해온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회화에 대한 그의 정신이 확연히 드러나는 색감과 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음악적 운율이 내재된 시적 조형성과 세련된 색감이 어우러진 수많은 걸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그는 오로지 열과 성으로 작업에 정진하고 또 매진했고 분출하는 영감과 에너지를 수개월간 집중하여 다양한 푸른 색조의 전면점화를 연속적으로 제작했다. 절친한 친구였던 시인 김광섭의 시구에서 제목을 따온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는 그 시기의 연작 중 하나로 캔버스 전체에 푸른 점을 가득 찍은 작품이다. 무수한 단색 톤의 점으로 채워진 절제되고 통일된 색조의 바다가 주는 감동은 관람자로 하여금 초월적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한다. 발이 고운 면포에 그가 수년간의 실험으로 찾아낸 농도의 유채 물감으로 혼신의 기를 모아 선을 긋고 점을 찍고 그 점을 하나하나 둘러싸듯 감싸안기를 반복함으로써 무한히 확산되어 가는 형이상학적 공간을 창조해낸다. 절제된 응축으로 찍혀지는 점 하나하나는 각기 다른 기운으로 반향을 일으키며 미세한 울림의 융합을 이룬다. 즉 점이 선이 되고 그것들이 모여서 면을 이뤄 하나하나의 점이 개별적 요소가 아니라 전체로 통일된 조화로운 메아리가 되어 숭고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점들은 의도된 울림-율동으로 화면을 조화롭게 채우면서 색조의 바다를 이루는데, 그것은 곧 각각의 별들이 발광하여 운집한 은하계가 또다시 어우러져 우주 공간을 이루는 것처럼 신비로운 아름다움의 결정체를 이루어갔다.

김환기 화백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자유와 행복을 함께 느낀다고 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그가 바라본 하늘, 무수한 별들이 쏟아내는 빛의 울림, 자연을 감싸고 있는 숲의 호흡이 들려주는 메아리, 또한 그가 내려다본 맨해튼의 명멸하는 불빛이 만드는 야경, 허드슨 강물처럼 흐르는 자동차 불빛의 여운을 연상하게 하고, 그러한 경관을 바라보면서 떠오르는 고향의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독백을 떠올리게 한다. 다양한 푸른 색조의 깊고 신비한 조화가 빚어내는 우주적 공간, 섬세한 색점의 음영에는 과거 그가 즐겨 그리던 산, 달, 구름 같은 구체적인 형상을 유추할 수 있는 구상적 표현을 대신하여 이국에서 그가 홀로 느끼고 맞이하는 우주를 대하는, 시공을 초월한 무한의 세계에 대한 그의 동경이 자리 잡고 있다. 그가 선망해온 인연과 자연, 그가 살아온 삶의 여정이 섬세한 색점의 음영으로 구현되어 감동의 바다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부단히 추구해온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더라도 고도의 집중이 요구되는 수년간의 고된 작업으로 혹사한 그의 육신은 지쳐가고 있었다. 김향안 여사는 “그 즈음 전시 제의가 많아졌는데 그것에 다 응하느라고 몸을 너무 혹사해서 수화가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김 화백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선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세로 필사의 기를 모아 점을 찍고, 휴식도 없이 다음 작업을 위한 틀을 메는 일을 중단 없이 매진하는 가운데 그의 육신은 서서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1974년, 김 화백이 갑자기 타계하자 김 여사는 그의 작품이 흩어지는 걸 막고 그의 예술세계를 널리 알리고자, 또 그의 유지를 받들어 후진을 양성하고 문화 창달에 기여하고자 환기재단을 설립했다. 여사는 남편의 작품을 그의 분신인 양 모으기 시작하였고 콜렉터들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을 회수하거나 바꾸어 재단 설립과 미술관 건립을 준비하였다. 예술가가 남겨놓은 위대한 작품은 작가 개인이나 그의 유족이 아니라 후손에게 영원히 물려주어야 할 국가적 문화유산이라는 신념으로 공익재단을 설립하고 환기미술관의 기초를 닦아놓은 김향안 여사의 훌륭한 업적이 실천되는 과정에는 김마태 박사와 전재금 여사를 비롯하여 한용진, 문미애, 문성자 등 주변 지인들의 김환기 예술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 의한 헌신적인 도움과 사명감이 큰 역할을 하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인연이 낳은 또 다른 인연

내가 김향안 여사를 처음 만난 건 12년의 긴 프랑스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고 출산을 앞두고 있던 1999년 봄이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거침없이 쏘아서 투과하는 눈빛을 가진 여사는 범할 수 없는 위엄과 지성을 지녔으며 왜소한 체구와 조용한 제스처만으로도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매력적인 분이었다. 김환기 예술세계에 대한 흠모와 함께 여사의 적극적이고 진지한 태도, 환기미술관에 쏟는 열정에 매료된 나는 곧 환기미술관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평소 말이 별로 없는 분이었지만 군더더기 없는 여사의 말은 신기하게도 그 어떤 긴 설명보다도 명확한 이해와 의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새 천 년이 시작되던 해, 나는 김환기 화백의 창작의 산실이자 두 분의 삶의 공간이었고, 이후 환기재단을 탄생시킨 곳이며, 여전히 김 여사가 살고 있던 뉴욕 맨해튼 73가 스튜디오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마치 작업 도중에 잠시 자리를 비운 듯이 김 화백의 삶의 체취와 창작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후로 나는 뉴욕에 갈 때면 호텔보다는 73가 스튜디오에 머물곤 했는데 여사는 화백에 대한 이런저런 많은 기억들을 전해주려고 애썼다. 김환기 화백이 작업하던 공간에서 그의 창작열과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직접 화백을 만난 듯 흥분되곤 했다. 우리는 환기미술관 소식과 미술계 이야기를 나누었고 미술관, 박물관과 소호의 화랑들을 방문하고 센트럴파크와 허드슨 강변을 산책했으며,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 주말에는 거리에 서는 벼룩시장을 구경하고 저녁이면 뉴욕 지인들과 함께 식당에 가거나 그들의 집에 초대받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내가 김마태 박사와 전재금 여사를 만난 건 그때였다. 김 박사 내외와 김환기 화백, 김향안 여사와의 인연이 또 하나의 새로운 인연으로 나에게 이어진 것이다.

 

김향안 여사가 생존해 있을 때부터 매년 7월 25일 김 화백의 기일이면 따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더라도 약속이나 한 듯 정오에 산소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 누군가가 가지고 온 꽃을 놓고 준비해온 담배와 술을 대접하고 잡초를 뽑거나 담소를 나누고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김 박사 부부를 위시하여 조각가 존 배 부부와 한용진, 문미애 부부, 최일단, 문성자, 조천형 부부, 문병기 박사님, 박원창, 노찬주 부부는 김향안 여사 생전부터 자주 모이고 김환기 화백의 제사를 지내온 것처럼 지금도 매년 만나서 함께 제사를 드리고 근처 식당이나 어느 분의 집에 모여 식사를 하며 담소로 하루를 보낸다. 세월이 흘러 함께했던 문미애와 문병기 박사님이 세상을 떠났다. 이경성도 고인이 되었다. 여전히 우리는 김 화백과 김 여사의 기일이면 두 분의 산소에서 제를 드리고 근처에 있는 문병기, 손인실 박사 내외분과 문미애의 산소에 들러 추모의 시간을 갖는다.

 

이번 여름 뉴욕에서의 우리 제사모임은 특별했다. 서울 환기미술관에서는 나와 직원 백승이가 환기재단 이사인 박충흠 조각가와 함께 참석했고, 뉴욕에서는 김 박사 부부, 조각가 존 배, 이은숙 부부, 문성자, 조천형 부부와 화가 최일단 선생이 참석했다. 박원창 박사는 몸이 불편해서 제사에 참여하지 못했고 대신 우리가 며칠 후 코네티컷 주 바닷가에 있는 집으로 박원창, 노찬주 부부를 방문했다. 뉴욕에 머문 10일 내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김마태 박사, 전재금 여사와, 주말에는 자녀들(유진, 수잔, 다니엘, 올리비에)과 시간을 함께하며 인터뷰를 완성했다. 김환기, 김향안 부부와 가족처럼 지냈던 이들의 추억담은 몇 번씩 들어도 언제나 새롭고 흥미롭다. 샘솟듯 무궁무진한 김마태 박사의 회상은 늘 우리를 웃게 만들고 전재금 여사가 전해주는 김환기 화백과 김향안 여사의 일화들은 유용한 기록이 된다. 이번에는 환기미술관의 ‘김환기 부처 뉴욕지인들 인터뷰 계획’에 따라 녹음과 촬영이 동반된 조금 특별한 목적의 업무로서 진행되었지만, 평소에도 우리는 함께 모일 때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선생들이 김환기, 김향안 부부와 함께했던 추억을 듣거나 김 여사와의 일화들을 무용담처럼 차례로 늘어놓으며 웃고 수다를 즐긴다. 그런 시간이면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공감의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이는 우리 각자가 어떤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다른 해석을 곁들여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우리 모두에게 한결같은 그리움의 정서가 동반되기 때문이다. 이런 정서를 바탕으로 한 우리들의 인연은 훌륭한 작품들로써 세상에 남겨진 이들을 끝없는 감동과 따뜻한 추억으로 결속시켜주는 김 화백과, 아름다운 인연의 역사를 잇고 예술의 감동을 후세에게 지속시켜줄 환기미술관을 만들어 남긴 김 여사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훌륭한 예술이 뿜어내는 감동을 늘 함께 누리고 격려하며 지켜주는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이번 여름에 1년 전부터 추진해온 ‘김 박사 부부의 환기미술관에 대한 기부내용’을 정리하는 최종 약정서를 작성했다. 두 분은 숭고한 용기와 결단으로, 실로 대단한 의미가 있는 일을 지극히 자연스럽고 조용하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라’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셨다.

김 박사 부부의 용기와 결단으로, 환기미술관은 제2의 탄생을 맞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문화와 예술의 역할과 그 중요성이 더없이 강조되고 있지만, 실제로 사회의 질적, 정신적 기반을 이루는 문화와 예술의 활성화를 위한 자발적 기여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에 김 박사 부부의 용기와 결단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실천으로 모든 이에게 감동을 주고 모범을 제시한다. 더욱이 환기미술관에 몸담고 있는 나로서는 그 고마움과 감동을 표현할 길이 없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거대한 단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선행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 금년 여름, 우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동으로 환기미술관의 번영에 대한 각오를 다지고 있다. 인연이 낳은 또 다른 인연의 소중함과 그 고귀한 힘과 아름다움을 절감하면서 내가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2012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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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gwoo (이메일 보내기) l 2012-09-20 09:50

https://blog.aladin.co.kr/797865117/5868466

법왕 달라이 라마 ㅣ 지혜의 씨앗 씨리즈 1
달라이 라마 지음, 앨런 제이콥스 엮음, 이문영 옮김 / 지와사랑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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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갈등 해결하기

 

해결이 불가능해 보일 때는 양측이 서로를 연결하는 기본이 되는 인간의 본성을 상기해야만 합니다. 양측이 모두 양보하면 적어도 더 큰 갈등이 일어날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형태의 타협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이런 방법을 자주 사용하면 안 될까요? 저는 꿀벌과 같은 작은 곤충의 사례에서 감동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자연법칙에 따라 꿀벌은 생존을 위해 함께 협력합니다. 일반적으로 꿀벌 집단은 협력을 기반으로 생존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특별한 자질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실천에 있어서는 곤충만도 못합니다. 어떤 면에서 저는 우리가 꿀벌보다 가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적 성장에 대한 과도한 강조
우리는 물질을 추구하는 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사랑, 친절, 협력, 보살핌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등한시했습니다. 우리의 토대인 본질적인 인간성을 상실하고 오로지 물질적인 발전만을 추구해서 어쩔 건가요?

 

비폭력과 국제 질서
비폭력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일은 전 세계적으로 아직도 실험 중입니다만, 사랑과 이해를 토대로 비폭력을 추구하는 일은 신성합니다.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훨씬 더 평화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습니다.

 

이타주의의 필요성
국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연민을 불러오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경제적 불평등, 특히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불평등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고통의 원천입니다. 경쟁과 부에 대한 욕망이 아닌 이타주의가 사업의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과학윤리의 중요성 또한 현대의 과학 분야에서 인간의 가치 존중을 재차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타적인 동기가 없다면 과학자들은 유익한 기술과 단순한 편의주의를 구별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환경 파괴는 이런 혼동에서 기인한 가장 명백한 사례입니다. 특히 생명의 섬세한 구조를 조작할 수 있는 새롭고 놀라운 생명공학 분야에서는 합당한 동기가 더욱더 요구됩니다.

 

종교는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종교의 목적은 관용, 너그러움, 사랑과 같은 긍정적인 인간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심을 줄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모든 종교의 전통은 그것들 나름대로의 고유한 가치와 정신적, 영적 건강을 위한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평화를 위한 무장해제
엄청나게 파괴적인 무기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는 비극을 목격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무기를 축소해야 하는 건 분명합니다. 대규모의 군대를 제거하고 국제 통합군을 운영하는 데 따르는 모든 갈등의 요소가 사라진다면 큰 나라건 작은 나라건 모두가 정녕 평등해질 것입니다. 무기 생산을 중단하면 경제적으로도 큰 이득이 뒤따라서 예상치 않은 발전이 지구에 찾아올 것입니다.

 

평화의 구역
저의 제안은 이렇습니다. 한 나라 또는 여러 나라들에 군사력을 행사할 수 없는 평화의 구역을 지정하여 각 공동체의 ‘중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지역 공동체 운동과 함께 평화의 구역은 안정의 오아시스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규정을 정하여 중대한 변화가 발생할 시에는 유엔이 중재해야 합니다.

 

비폭력주의
저는 미래에 대해 낙관적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이가 세계평화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비폭력적인 사람들의 힘’ 운동의 출현은 반론의 여지없이 인류가 압제통치 아래서는 견딜 수 없고 제대로 기능할 수도 없다는 점을 보여줬습니다.

 

과학과 종교
또 하나의 희망적 사실은 과학과 종교의 양립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은 매우 정교한 수준에 도달해 많은 연구자들이 우주와 생명의 궁극의 본질을 캐는 심오한 질문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질문들은 종교의 기본적 관심사입니다. 따라서 더 통일된 관점이 나타날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예로부터 동양은 마음의 이해에, 서양은 물질에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제 동서양이 만났으므로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삶의 두 관점이 더욱더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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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고통도 기쁨도 모두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l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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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gwoo (이메일 보내기) l 2012-09-2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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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푸페이룽 지음, 한정선 옮김 / 지와사랑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고통도 기쁨도 모두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생에는 기쁨보다 고통이 많다. 노자는 이것이 모두 인류의 탓이라고 말했다.


“오색령인목맹五色令人目盲, 오음령인이롱五音令人耳聾, 오미령인구상五味令人口爽, 치빙전엽령인심발광馳騁畋獵令人心發狂, 난득지화難得之貨, 영인행방令人行妨. 시이성인위복불위목是以聖人為腹不為目, 고거피취차故去彼取此”

즉 다섯 가지 색깔은 사람의 눈을 거의 멀게 만들고, 다섯 가지 음은 사람의 귀를 거의 먹게 하며, 다섯 가지 맛은 입의 감각을 잃게 한다는 뜻이다.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하고, 손에 넣기 어려운 물건을 발견했을 때는 사람의 행실이 나빠진다. 훔치고 속이고 빼앗아서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성인이라면 어떻게 할까? 성인은 배불리 먹되 너무 많은 것을 보지 않도록 주의한다. 인간의 인지력이 좋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 지음으로써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성인은 이 때문에 수습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하며 취사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노자는 수행을 통해 갓난아이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수행한다고 해도 인간의 생명을 처음 갓난아이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다. 노자가 갓난아이로 돌아가라고 한 말은 단순히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뜻이 아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더라도 마음만은 어린아이처럼 쉽게 만족하고 기뻐하며 단순해지라는 뜻이다.
영국의 문학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가 말했다.


“인생에는 오직 두 가지 비극만 있다. 한 가지는 내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학에 떨어졌다거나, 유학 계획이 무산됐다거나, 사랑에 실패했다거나,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면 확실히 비극이니 말이다.


“다른 한 가지는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이다.”


이 말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얻지 못하는 것이 비극이지, 얻는 것이 왜 비극일까? 바로 얻고 난 후에야 그것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막상 손에 넣고 보니 처음 기대와는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한번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고 결코 쉽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최후의 목표로 달려가는 생명체이며,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그렇다면 인생을 어떻게 꾸려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까? 인생의 고통과 기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다뤄왔던 엄숙한 문제가 아닌가.
고통과 기쁨은 종교에서 빈번하게 다루는 소재다. 불교에서는 이를 ‘중생개고衆生皆苦’라고 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를 근본원리로 둔다. 인생에서 고통은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선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 그것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마지막에 도를 찾아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인생을 십자가를 지고 자신이 지은 죄를 속죄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철학에서도 인생의 경험을 빼놓고 고통과 기쁨을 논할 수 없다. 장자는 고통과 기쁨이 생기는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인간의 감정은 외부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잠을 잘 때는 마음이 복잡하고, 깨어나서는 늘 불안하다. 바깥세상과는 복잡하게 얽혀 있고, 매일 서로 헐뜯는다.”


이 말만 보아도 인생은 충분히 피곤하다. 그래서 장자는 수행으로 도달할 수 있는 단계로써 진인眞人을 강조했다. 동시에 진인이 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간단히 알려줬다. 잠을 잘 때는 꿈을 꾸지 않고 깨어났을 때는 걱정이 없으면 된다. 진인은 잠을 잘 때 꿈을 꾸지 않고 깨어 있을 때 아무런 근심이 없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이와 정반대다. 잠을 자면 꿈을 꾸고 깨어 있으면 근심 걱정에 시달린다. 매일매일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 늘 피곤하다.
고대에는 이러한 인간의 감정을 다양하게 분석했는데 그중 『장자』의 분석이 가장 정확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감정을 희喜, 노怒, 애哀, 락樂 네 가지로 본다. 유가의 사서 중 하나인 『중용』에서 특별히 이에 대해 거론한 부분이 있다.


“희로애락지미발喜怒哀樂之未發, 위지중謂之中; 발이개중절發而皆中節, 위지화謂之和”


사람에게 희로애락의 감정이 생기기 전을 ‘중中’이라고 하는데 마음이 매우 평온하고 순수한 상태다. 희로애락의 감정이 생기면 절제가 중요한데, ‘절節’은 곧 적절하게 조절하여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하라는 뜻이다. 희喜와 락樂만 좋아하지 말고 노怒와 애哀 또한 적절한 선에서 발산해야 함을 명심하자. 유가에서 말하는 이 네 가지 감정에 애愛, 악惡, 욕欲 세 가지를 더한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칠정육욕七情六慾이다.

 

고통이 많고 기쁨이 적은 것은 인생의 필연이다.
내심의 욕망이 외부의 간섭을 받아 고통과 기쁨이 생긴다 .
‥‥‥ 노장의 지혜 ‥‥‥

 

이와 달리 장자는 인간의 감정을 열두 가지로 보았다. 희喜, 노怒, 애哀, 락樂, 노盧, 탄歎, 변變, 열熱, 요姚, 요仸, 계啓, 태態이다. 우리는 기뻐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며, 슬퍼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한다. 때로는 걱정하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하며, 변덕을 부리거나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또한 아첨하고, 거드름 피우거나 뽐내기도 하며,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고대에 인간의 감정을 이토록 상세하게 표현한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장자는 예리한 관찰력을 발휘해 인간의 감정을 상세히 표현했다. 인간은 외부 환경의 간섭 때문에 감정의 변화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어렵다. 그래서 기쁨을 얻기도 쉽지 않다. 인간이 기쁨을 얻는 것과 인간의 마음을 따로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에 관한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
장자는 고통이 많고 기쁨이 적은 것은 인생의 필연이라고 했다. 실제로 고통과 기쁨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마음은 외부의 간섭에 쉽게 흔들린다. 그래서 잠을 자도 꿈을 꾸지 않고 깨어서는 근심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기 마음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양의 심리학과는 달리
장자는 인생의 고통과 기쁨의 근원을 무엇이라고 이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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