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image.aladin.co.kr/cover/cover/8943305842_1.jpg)
또 한권의 소장하고 싶은 책 등장!!
p.13 울적한 내 마음을 옛사람들의 노래로 위로해 주기도 하고, 낯선 섬나라의 파도 소리로 마을을 들뜨게 하기도 한다.
p.14 하지만 대궐에 들어간 뒤로는 이 방에서 책과 만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늘 아쉽기만 하다.
p.19 내가 읽은 책 속의 옛 어른들은 날마다 시간을 정해 두고 책읽기에 힘써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아직 어려 시각을 익히는 일에 서툴렀기에, 나는 어떻게 시간을 정해야 할 지 몰랐다. 궁리 끝에 벽에 금을 그어 해가 지나간 자리를 표시해 두기로 했다. 내 나름대로 만들어 본 해시계였던 셈이다.
p.22 온종일 방에 들어 앉아, 혼자 실없이 웃거나 끙끙대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기도 하며 책만 들여다보는 날도 많았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간서치(看書痴)'라고 놀렸다. 어딘가 모자라는, 책만 보는 바보라는 말이다. 나는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p.24 가만 생각해보니, 배고플 때뿐만이 아니었다. 추위에 떨 때, 근심 걱정에 시달려 마음이 복잡할 때, 아플 때도 책을 읽으면 그 모든 괴로움이 덜어지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문득 느꼈던 책읽기의 이로움을 나는 이렇게 써 두었다.
p.33 "일 년 내내 맹씨와 좌씨으 책을 읽어 봐야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구할 수 있겠는가? 제 식솔의 굶주림 하나 구제할 수 없는 것을." "그렇지요. 당장에 팔아 한때의 굶주림을 면한 우리가 차라리 현명하지요. 맹자와 좌씨도 잘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는 기꺼이 맞장구쳐 주었다. 얼굴을 마주보녀 껄걸 웃기는 했지만, 웃음 뒤의 쓸쓸한 뒤끝을 우리는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과연그랬을까. 자신들의 오랜 사색의 결과물을, 양식과 바꾸어 배를 채운 우리의행동을 맹자와좌씨는 잘했다고 할 것인가.
p.43 정작 나와 동갑은 유득공의 숙부 유련이었으나, 가슴속의 이야기를 다 터놓을 만큼 허물없는 벗으로 지낸 이는 나보다 일곱 살 아래인 유득공이었다.
p.51 책 속에는 또 사람의 목소리가 있다. 세상살이와 사람살이에 대한 깨우침을 주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있고, 그늘진 신세를 한탄하는 울적한 목소리도있다.
p.63 사람들은 박제가의 됨됨이가 글러 먹었다고 했다. 도무지 위아래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보면 누구에게나 누을 부라리며 따지고 들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면 생각을 굽히는 법이 없었다. 언젠가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위아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정말 싫습니다. 예의를 지키라는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집안이나 신분,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고개를 들고 숙이는것을 정하라는 게 아닙니까? 옳고 그름에 따라 고개를 들고 숙여야지, 어찌 그 사람의 껍데기만 보고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p.85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함께 흥분하여 소리 높여 잘잘못을 따지거나, 우스갯소리로 울적한 마음을 한번 비틀어 밖으로 날려 보내는 것.
유득공은 주로 두 번째 방식을 썼다. 그의 성격이 워낙, 안 되는 일에 연연해 하기보다는 털어버리기를 좋아해서도 그렇고, 도무지 웃음기라고는 없는 우리 얼굴이 잠시나마 피어나는 것을 보고 싶어서도 그랬을 것이다.
"유득공의 마음속에는 우물 하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근심 걱정도 한 번 담갔다 하면 사뿐하게 걸러져 밝은 웃음으로 올라오게 하는 우물 말입니다."
p.88 유득공은 그때 일을 생각하니 다시 목이 메는지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왕 엎질러진 것, 어쩌겠느냐?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튿날 어머니는 바느질을 맡긴 지을 찾아가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옷감만큼의 대가를 바느질삯으로 갚기로 했다. 그때는 물론 , 그 뒤에도 그 일로 유득공을 나무라거나 꾸짖지 않으셨다 한다.
p.117 '자신을 보호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면 이에 맞서는 싸움이 벌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저 날렵한 동작과 함성 앞에, 감히 누가 어설프게 칼을 뽑아 덤벼들겠는가.'
p.122 그는 이런저런 포부를 들려주었다. 그저 우리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차근차근 준비를 해 나가다 보니 정작 자신은 그리 정말적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p.125 九書 - 책을 읽는 讀書, 책을 보는 看書, 책을 간직하는 藏書,
책의 내용을 뽑아 옮겨 쓰는 抄書, 책을 바로 잡는 校書,
책을 비평하는 評書 , 책을 쓰는 著書, 책을 빌리는 借書,
책을 햇볕에 쬐고 바람을 쏘이는 曝書를 말한다.
p.127 새로운 책을 구해 책상 위에 올려 놓으면 나는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 책장을 펼치면 바람결에 와삭거리는 아득한 풀밭이 그 속에는 들어 있을 것만 같다. 서늘한 풀냄새를 가슴깊이 들이마시며 나는 가보지 않은 길, 내발자국으로 인해 새로워지는 길을 떠나려 한다.
p.132 글귀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싶으면, 이서구는 주저없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전하가 강의하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다란 얼굴에, 조금도 어려워하거나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끝까지 할 이야기를 다하였다.강의 도중 오고 가는 이야기들을 옆에서 빠뜨림없이 기록하면서, 거침없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나지막이 혼자 감탄하였다.
나는 늘, 삶이 주는 무게에 짓눌려 가슴까지 차오른 말도 한번 더 굴려야 하는 자신이 답답하였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주저하지 않는 이서구는 당당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나는 솔직히 그가 부러웠다.
p.136 이서구는 특히 경제에 밝았다.조정에 들어와 나라의 재정을 맡아보는 호조에서 일할 때는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순조롭게 처리하여, 호조의 관리들이 이서구를 다른데로 보내기 싫어할 정도였다. 원칙에 따라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여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그의 기다른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뒷소리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p.141 스승의 한 마디로 머릿소게 엉킨 매듭 하나만이라도 풀리면, 그 다음은 술술 나아갈 것 같았다. 몹시 애태운 끝에 그 문제가 풀리기라도 하면, 또 그런대로 스승 생각이 간절히 났다. 내가 생각한 것을 스승께 말씀드리고, 확인받고 격려받고 싶어서였다. 아, 나에게도 스승이 계신다면.
p.144 "우리가 밟고 있는 땅,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네. 세상은 드넓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자연에도 저마다의 법칙이 있지. 자기 자신에대해 잘 알려면,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네." 담헌 선생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연암 선생도 옆에서 거드셨다. "그러자면 이제까지 지니고 있던 선입견을 버려야 할 게야. 특히 우리는작은 나라에 산다고 해서 너무 스스로를 낮추어 보는 버릇이 있어. 큰 나라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려 하지. 하지만우리는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게나. 조선 사람의 눈으로, 조선사람에게 이로운 것을 배워야 할 것이야."
p.174 장기판은 옛 중국의 한나라와 초나라의 싸움터를 그대로 축소한 것이다. 그러니 병졸은 물론 수레와 말, 대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는 코끼리의 등장은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레車'야 장기판 위에서도 거침없이 일직선으로 내달리겠고,
'대포包'야 포신을걸쳐 놓아야 하기에 뭔가를 넘어서 날아가겠고,
'말馬'이야 무릎 관절이 구부러져야 빨리 달리니 한 번은 방향을 틀어 나아가겠고,
'병졸'들이야 물러서지는 못하니 그저 걸음씩 앞으로 옆으로 맨 몸으로 움직일 뿐이다.
그런데 장기판 위의 '코끼리象'는 어째서 그처럼 성큼성큼 넓게 움직이는 걸까?
p.176 이렇게 코끼리를 처음 본 사람들처럼, 선생은 모든 것을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을 중심으로 보려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평소에도 선생은 나와 벗들에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자네들이 눈과 귀를 그대로 믿지 말게. 눈에 얼핏 보이고 귀에 언뜻 들린다고 해서, 모두 사물의 본모습은 아니라에."
선생이 탓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과 귀가 아니었다. 눈과 귀야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사람의 머리에 전해주는 감각 기관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느끼고 싶은대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사물을 받아들인다.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싶은 것, 인정하고 싶은 것을 미리 정해 두고, 그 밖의 것은 물리치고 거부한다. 그러한 마음에 기초다되는 것은 역시 지난날에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은 자신만의 감각이나 경험이다. 이것이 바로 선입견(先入見)이다.
선입견에 사로 잡힌 사람들은, 음식은 손이나 기껏해야 입으로 집는 것이며, 아래로 드리워진 것은 모두 다리여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동물인 코끼리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게 된다.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비좁은 틀에 거대한 코끼리의 몸을 구겨 넣으려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비단 코끼리에 대한 것뿐이겠는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난날의 선입견에 갇혀 있으면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게 된다. 세상은 늘 이대로 계속되어야 하고 학문도 옛사람의문장을 그대로외우는 것이 제일이라여기게 된다.
선입견을 버리라는 선생의 말씀에, 나와 벗들이 벅찬 마음으로 따른 것은 당연했다.우리들이야말로 이 세상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고루한 선입견의 가장 크 피해자가 아니었던가.
p.240 그러고 보면 옛 성현들의 말씀이 담겨있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도, 결국 한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려 백성들의 살림을 살 찌우고 사람으로서 아름다운 품위를 유지하며 살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나와 벗들은 책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생각한 것을,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최선을 다해 실천하고자 했다. 위로는 대궐의 임금님부터 아래로는 작은 지방의 수령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이 시대는 그렇게 새로운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p.244 아이들의 얼굴은, 그 무렵의 우리보다 한결 밝았다. 스무 살 이전의우리는, 헤어날 길 없는 그늘진 신세에 절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항하기도 하였다. 어쩌다 떠오른 웃음 오래가지 않았고, 서로 한 자리에 모여 있어도 쓸쓸함이 아주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우리 아이들이 웃음은 환했고, 앞날도 그만큼 열려 있었다. 날마다 책에 파묻혀 있는 아버지들을 보아서 그런지, 저마다 글공부도 열심이었다.
p.249 시간을 나눈다는 것은, 반드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만 할 수 있는 아니다. 옛사람들로부터 나는, 그들의 시간을 나누어받기도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을 겪을 수 있었을까. 나라면 그 순산 이런 마음이었을텐데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