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이 어지러울 거라고 한 말이 바로 이것임을 연상하자 반드시 프릭스에 대한 비밀을 지키자고 결심했다. 만약 그 말이 입 밖으로 나가려 한다면 혀를 깨물거나 기절하는 편이 낳다. 그가 뱀파이어 정부에 잡혀가 온갖 실험의 지원자가 되고 만신창이로 변하는 건 볼 수 없다.

이런저런 결심을 하는 사이에 아까 본 주사를 팔에 꽂았다. 뭔가 차고 아린 액체가 팔에서 어깨, 목, 가슴, 다리로 퍼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몇 분 후, 머리 속이 빙글빙글 돌며 입이 스스로 열렸다가 닫혔다. 근육질의 남자가 내 눈을 살펴본 후 준비되었다고 보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망자를 본 날이 몇 월 며칠입니까?]
[3월..4일]

그의 질문을 듣자마자 저절로 말이 나왔다. 내 머리 속은 검은 안개가 소낙비처럼 뇌 곳곳을 푹 적시는 느낌만 가득해, 똑바르게 생각을 할 수 없는데도 인형처럼 대답을 한다.

[발견 당시의 상황은?]
[피를 흘리고 있었어요. 목에 두 개의 구멍이 나있고..피가 계속 나왔어요]

그를 보았을 때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마치 내 정신이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조용히 관람하는 것 같았다. 동시에 눈은 천장을 바라보며 나에게 질문을 하는 남자가 깍지를 끼고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있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그에게 다가갔는데..누군가 이미 피를 빨아서 죽어가고 있었죠. 나는..조금만 먹으려고..아주 조금만..]
[민시영씨, 그 남자를 해친 건 당신 아닙니까?]
[내가 아니에요!]

나는 거칠게 대답했다. 이제 내 정신은 약물에 조정당해 내가 대답할 문장을 미리 스크린에 올렸다. 머리 속에 정답을 떠올리지 말라고 한 말이 기억나지만, 이미 뇌는 제어할 수 없게 앞서가고 있었다. 이 약물은 뇌의 기억중추를 헤집어 질문에 맞는 답을 떠올리도록 하는 게 틀림없었다.

[우리가 발견했을 때, 당신은 그의 목에 입을 대고 있었습니다. 민시영씨가 피의자라는 정황 증거가 확실합니다.]
[저는 1급 장애를 지녔어요. 피를 마실 송곳니가 없어요. 그날은..입술로 핥으려고 한 거에요]

나의 말에 근육질의 남자가 다가와 입술을 열어 위아래로 살폈다.

[송곳니가 없습니다]

그의 말에 질문을 하던 남자는 이마를 찡그렸다.

[민시영씨가 아니라면, 누가 그 남자를 죽였을까요?]
[모르겠어요]
[두 번째 발견에서는 시체가 없었지만, 남아있는 혈흔을 보아 첫 번째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후로 그 사건과 관련해서 피해자나 가해자를 보았습니까?]
[네. 봤어요]

스크린을 관람하던 내 정신이 갑자기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프릭스에 대한 말이 나갈 것이고 그건 막아야 한다는 마음이 약물을 거부하려고 노력했다. 근육이 긴장되면서 다리가 뒤틀렸다. 내가 헐떡이며 떨자, 근육질의 남자가 다가와 다리를 꽉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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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늦었다는 핀잔의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따라오십시오]

스승님의 옆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뒷짐을 풀고 스승님보다 두 발자국 정도 앞에 서서 걸어가는데, 그는 아주 조금씩 발을 절었다. 우리가 걸어가는 복도는 좀 전의 밝고 매력적인 광장과는 사뭇 달랐다. 불빛이 20분의 1로 줄어들어 복도 곳곳에 어둠이 기어 다니며,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엔 우리의 발자국 소리만 크게 울려 퍼졌다. 만약 이 복도가 경찰서의 시작 지점이라면 건물의 외곽만큼 아주 탁월한 인테리어다. 광장은 사람을 들뜨게 하고 에이..별거 아니네 라는 배포를 키워준다면, 이 복도는 걸어가면서 점점 주늑들게하고, 자신의 잘못을 낱낱이 떠오르게 만드는 그런 공포가 가득했다. 나 역시도 짧은 뱀파이어 생활 동안 잘못한 게 없는지 되짚어볼 정도였으니..

검은 양복의 남자는 복도 제일 끝에서 멈췄다. 정면의 대형 유리는 특이하게도 밖은 보이지만 달빛은 통과하지 못해 첫 번째 문을 열 때까지도 주변은 상당히 침침했다.

[민시영씨는 이 곳으로..]

문이 열리며 양쪽으로 보이는 방 중 왼 쪽으로 나를 인도하는데, 동시에 방문을 통해 뿜어져 나온 환한 빛 때문에 눈을 찌푸렸다. 여기는 어쩌면 이리도 극과 극인가! 이게 지도자의 취향이면 변태 아니야?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지러워지면 말하기 전에 머릿속으로 정답을 떠올리지 마라]

스승님은 겁에 질려 손을 잡는 내게 귓속말을 했다. 매우 낮은 속삭임이라 긴장하고 듣지 않으면 정확히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고 작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한 후 목소리가 들린 방으로 들어갔다. 티비에서 보는 것처럼 탁자와 의자만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 매우 푹신해 보이는 침대와 소파가 나를 반겼다.

[또 만나네요]

부드러운 목소리는 스승님께 깍듯이 인사하던 근육질의 남자였다. 그는 내가 겁먹었음을 알고 천천히 웃으며 손짓했다.

[신발을 벗고 침대에 편히 누우세요, 잡아먹지 않으니까 걱정 말고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침대와 그를 바라보니 또다시 밝고 맑게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스승님은 사라지고 방문은 닫혀 그와 나 뿐이다.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웠다. 손의 위치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어 배 위에 포개놓았다가 다시 풀어 옆구리에 붙였다. 머리 속에 드는 생각은 앞으로 닥쳐올 일이 무엇이든 스승님의 당부를 잊지 말자..였다. 천장은 유리 같은 구조로 근육질의 남자가 옆에 놓인 은색 통의 뚜껑을 여는 게 비쳤다. 그 안에는 주사기가 한 개 놓여있어 두려움이 머리를 쭈뼛하게 만들었다. 1분 쯤 지나자 나를 이곳으로 안내해 온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침대 옆에 놓인 소파에 앉아 나를 쳐다보았다.

[시작할까요?]
근육질의 남자가 물어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시영씨, 지금부터 사망자에 대한 진술을 받을 예정입니다. 과거에 이런 경험을 해보신 적 있습니까?]

나는 도리질을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민시영씨의 경우, 참고인이면서 동시에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바, 진실한 답변을 얻기 위해 약물을 투여합니다. 뱀파이어 평화조약 제 23조 1항에 의거하여 1단계 약물을 사용합니다. 약간의 어지러움이 있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편한 마음으로 임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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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려주세요]
[늦겠다고 말 한거 잊었니? 니가 꾸물대는 통에 차도 못 타게됐어. 꽉 잡아라]

창문에서 바닥으로 뛰는 게 아니라 반대편에 있는 100년쯤 된 은행나무 가지쪽으로 점프했다. 오른발이 닿는 가 싶더니 바로 다음 나무로, 또 다음 나무와 지붕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흐린 달빛 때문에 우리가 뛰는 걸 제대로 볼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스승님의 속도가 무섭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행복해졌다. 옷이야 이래도 스승님이 나를 꼭 안고 (어깨에 둘러맨 것도 안은 거라고 쳐준다면) 바람을 가르며 제트기처럼 뛰니, 없던 봄바람이 내 귀와 머리카락을 흔들어놓고 사라진다. 나로서는 잘 매달려있는 것 이외는 딱히 할 일이 없어 하늘의 구름이나 세며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점점 속력이 줄어들었다. 한강 둔치를 지나고, 뱀파이어 주민자치센터 건물을 넘어 북서울숲 공원으로 들어서면서 보통 사람들이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수준이 되었다. 마침내 공원 동쪽에서 멈췄는데 그곳에 바로 음침하고 보기 싫은 뱀파이어 경찰서가 있었다.  



**********************
 


[저 혹시 고문당하는 거 아닌가요?]

내 말에 스승님이 큰 소리로 웃었다. 나에게 이 건물은 무겁고 딱딱한 느낌이고, 검정 페인트 덕분에 질 나쁜 뱀파이어들의 소굴로 보였다. 문득 꿈에서 본 끔찍한 장면들이 생각나 조심스럽게 물어본 것이다.

[혹시나 니가 걱정하는 문제가 발생하면 구해주마]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약속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1분쯤 지나 스승님에게서 떨어진 후, 계단 앞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뱀파이어 경찰서는 주민자치센터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2층 건물이지만,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는 면에서는 제 역할을 다 했다. 온통 시커먼 검정에 군데군데 붉은 기운과 경찰서라는 글씨는 이 곳에 오는 모든 뱀파이어들을 겁먹게 만들어 손만 들어도 죄를 불어버리게 할 태세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스승님을 따라갔다. 주민자치센터와 마찬가지로 현관문 손잡이는 뱀파이어 확인용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었다. 그 문을 자연스럽게 통과하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여기가 경찰서 맞아요? 이건 백화점 보다 더 커요]
[연구소가 함께 있어서 그래. 지도자가 돈을 쏟아 부었지]

대한민국에서 제일 호화롭다는 강남백화점보다도 더 큰 광장과 천사상의 분수, 2층으로 연결된 은색 에스컬레이터까지 별게 다 있었다. 밖에서 본 건물은 한 층에 상가 5-6개 정도 가 들어가면 끝날 크기로 보였는데 어찌된 셈인지 안은 공설 운동장이었다. 뱀파이어가 마법도 부릴 줄 아나? 그건 영화에 나오는 허구 아니었나?.. 라고 중얼거렸다.

[약간의 환각이야. 실제는 이 크기인데 밖에서 볼 때는 극히 일부만 보이고 나머지는 숲인 줄 알게 하는]
[아..여긴 북서울숲이니까요]

스승님은 빠르게 광장을 가로질러가면서 내 의문을 풀어주셨다.

[호화롭게 만들 재정이 있으면 굶어죽는 뱀파이어들을 좀 도와주지..]

광장을 가로지른 후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나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세계의 명화로 도배를 해놓은 계단 벽을 둘러보느라 앞에 장애물이 있음을 모르고 걸어가다가 이마를 박았다.

[늦으셨습니다]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더니 나를 두들겨 팼던 검은 양복의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키며 뒤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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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쌓여 멍하니 따라가다 보니 스승님이 멈춘 줄 몰랐다. 그 바람에 쿵 소리를 내며 등에 머리를 부딪쳤다. 스승님이 돌아보며 나를 붙잡아주었다. 그의 손은 내 것 만큼이나 차지만, 이상하게도 나를 만지거나 스칠 때는 불 같이 뜨겁다는 생각이 든다.

[별 거 아니니까 놔 주세요]

스승님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나는 용광로에 뛰어든 기분이 들어 몸을 비틀었다. 그 바람에 왼 쪽 하이힐이 삐꺽거리며 꺾였다. 다리가 삐딱하게 구부러진다는 건 몸이 확 쏠려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머리에 그려지는 가운데 스승님이 손을 놓아주는 순간 삐끗한 왼 쪽으로 몸이 미끄러져 흙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엉덩이에서 뇌로 전달되는 둔탁한 아픔보다는 맘먹고 입은 치마와 하이힐이 망가졌다는 게 속상해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스승님이 갑자기 서니까 이렇게 된거잖아요]

흙이 묻은 치마를 잡아당기며 엉뚱하게 짜증을 부리자, 스승님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두 팔로 허리를 잡아 벌떡 일으켰다. 서고 싶어도 왼 쪽 하이힐이 부러져 설 수 없음을 아는지, 나를 어깨에 둘러맸다. 그리고는 부러진 하이힐을 내 손에 들려주셨다.

[세상이 흔들려요. 그냥 신발 벗고 걸어갈게요, 내려주세요]
[맨 발로 다니면 다쳐서 안 돼]
[그럼..백화점에라도 가요. 치마 다시 사야죠]
[집이 더 가까워. 그리고 우리 늦겠다]

스승님은 현관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베고니아가 가득한 정원으로 걸어갔다. 내 방이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한 번 몰아쉰 뒤, 나를 어깨에 얹은 채로 점프를 시도했다.

[어..어..]

내 몸이 앞뒤로 흔들리며 바람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자 깜짝 놀라 입이 벌어졌다. 뱀파이어가 2-3층까지 점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40킬로가 훌쩍 넘는 여자를 들쳐 매고 뛰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스승님은 마치 시냇가에 놓인 돌다리를 팔짝팔짝 건너듯이 가볍게 2층 창문가에 착지했다.

[이거 입어라]
[싫어요]
[그럼 이거?]
[절대로 안 입어요]

방 안에 들어가서야 나를 바닥에 내려주신 뒤, 침대에 가득 펼쳐놓은 옷 중에서 긴 정장 바지를 건네주셨다. 그건 겨울용으로 두껍고 묵직하며 지금 입은 갈색 정장용 웃옷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 그 다음에 건네준 건 발목까지 오는 치마.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모두 거절했다.

[지금 니 치마는 너무 짧아. 속이 다 보이겠다]

팔짱을 끼고 말하는 폼이 흙이 묻긴 했지만 상당히 매력적이고 폼 나는 갈색정장을 폄하하며 승낙할 수 없다는 무언의 압력을 전달했다. 나는 경찰서든, 지옥이든 스승님과 함께 간다는 기쁨에 머리카락과 싸움하며 올림머리를 했는데, 부딪히고, 넘어지며 하늘을 날아오다 보니 여기저기 삐죽삐죽 튀어나오고 몇 가닥은 아예 목까지 내려와버렸다. 아마도 지금 나는 결혼식을 치루느라 고생한 신부가 다리 펴고 누웠다가 일어난 몰골일 것이다.

[차라리 추리닝을 입으라고 하시죠?]
[음...그게 나을까?]
[스승님!]

진지하게 고민하는 말투에 그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스승님은 재빠르게 다가와 입을 막았다.

[도둑든 줄 알겠다, 조용히 말해]

입이 한가득 나와 스승님이 골라줬던 옷을 바라보다가 보라색 추리닝 세트를 들고 일어났다. 스승님이 뒤돌아 있는 사이에 갈아입고 거울을 보니 한심 그 자체다. 풀어진 머리에, 고등학생 같은 옷이랑 스타킹을 신은 발이라니..정말 어느 남자도 관심 없어질 만한 모습이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가자]

내 모습을 훑어보는 스승님의 미소가 세상에서 제일 얄밉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나를 어깨에 다시 들쳐 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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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사람 2010-07-21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곳에 오면 글이 올라왔나 찾아봅니다. 없으면 언제 올라오나...실망감과 함께 조금만 더 빨리..라는 조바심이..

세레스 2010-09-17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게 읽게 된 자의 여유... 하지만 그것도 곧 끝나가는군요. ㅠㅠ
 

 

 

[헤이~일어나라]

눈을 뜨자 고양이 상태의 프릭스가 얼굴을 핥고 있었다. 비라고 생각했던 게 고양이의 침이다. 나는 그를 밀어내며 짜증을 부렸다. 그러나 그는 빙글빙글 미소를 머금고 생각을 보내왔다.

[잘 잤어?]
[잘 자긴..니 꿈꾸느라 고생했다]
[내 꿈?]

순간 고양이의 입이 이 이상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벌어지며 야옹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는 앞발로 내 머리카락을 긁으며 팔짝팔짝 뛰었다.

[아야! 너 왜이래?]
[니가 꿈에서조차 나를 생각해준다니 기뻐서!]
[미안하지만..니가 창고에서 도망치던 순간이라서 악몽이었어]
고양이의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정확히 들었다고 장담할 순 없지만, 그 비슷한 행동을 한 것 같았다.
[난..너에게 그런 거 보낸 적 없는데..]
[자면서 꾼거 아닐까?]

그는 앞발을 혀로 핥으며 고개를 베게에 박았다. 자세히 보니 푸른색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너랑 나랑은 좀 이상해. 프릭스니까 고양이일 때의 생각은 주고받을 수 있다고 쳐도, 니가 말해주지 않은 부분이 어떻게 나에게 전달되는 거지? 혹시 우리는..무의식까지 연결되어 있나?]

내가 계속 이런저런 말을 중얼거리는데 프릭스는 갑자기 깜깜한 어둠의 장막을 보내더니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슬쩍 보니, 그는 잠이 들었다. 이제 막 밤이 시작되어 창가에서 들어오는 가녀린 달빛은 베개를 베고 잠들어버린 프릭스의 흰색 털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나도 모르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분홍색 가슴에 손을 올려보았다. 뱀파이어에게는 없는 따뜻한 온기. 살아있다는 증거. 나는 그의 부드러운 털을 만지며 한숨을 쉈다.   


********************


스승님은 아침을 먹자마자 나에게 외출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셨다. 나는 가지고 있는 옷을 모두 꺼내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경찰서에 출두하는 일이라 데이트와는 무관하지만, 스승님과 함께 나간다는 게 기뻐 어른스럽게 보일 수 있는 갈색 정장을 골라 입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스타킹도 신었다. 구두와 백을 손에 들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아래를 보니 스승님과 아줌마, 사람으로 변신한 프릭스가 함께 거실에 있었다.

[예쁘네~모델 같아]

프릭스는 손뼉을 치며 칭찬 했고, 아줌마는 흐뭇한 미소로 엄지손가락을 들어주었으나 스승님의 표정은 별 차이가 없었다.

[신발을 왜 들고 있니?]

현관문을 열고 나설 때도 내가 신발을 그대로 가지고 있자, 스승님이 물었다. 나는 스타킹만 신은 발로 바닥에 내려섰다.

[뛰어갈 때 높은 힐은 불편해요. 삐끗하거나 넘어지면 꼴볼견이잖아요]
[차로 갈꺼니까 신어]

스승님은 팔짱을 낀 채 내가 구두를 신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겠다는 뜻을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쭈뼛쭈뼛 바닥에 구두를 내려놓고 발을 넣으면서 올려다보았다. 말없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재촉하니 결국 두 발을 모두 높은 힐 위에 얹었다. 그 즉시 세상이 10센티만큼 낮아졌고, 대신 나는 스승님의 어깨 근처까지 키가 커졌다.

[가자]

나는 기우뚱거리며 앞장 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꼭 새끼 오리 같아요. 엄마 뒤를 따라가는..]

오늘은 구름이 많아 달빛이 매우 흐리다. 몇 걸음쯤 앞에 있는 스승님의 그림자 역시 경계선이 무너질 정도로 약해 왠지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스승님이 저 그림자처럼 내 앞에서 서서히 사라지면 어쩌지..하는 기분과 왠지 자꾸만 가라앉는 마음에 외출이 영 내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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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읽기 2010-07-2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전히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때로는 좀더 빨리 이야기가 올라왔으면 할만큼요.. 하지만 글쓰는 분은 힘드시겠지요?... 더운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건필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