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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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작가의 [완전한 행복]을 읽었다. 출간 예고를 보고 양장본과 저자 싸인이 있는 초판본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며칠 늦게 사전 예약 주문을 했다. 출간일 다음 날 바로 도착한 책이 양장본이 아니라서 아쉬워하며 서지를 살펴보니 벌써 9쇄! 정유정 작가의 인기와 독자들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단숨에 느껴졌다. 아쉬움을 삼키고 다음에는 꼭 예고를 보자마자 주문 예약을 걸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역시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손에 땀이 흥건할 정도로 긴장의 연속과 신유나라는 새로운 유형의 사이코패스에게 휘말려 옴싹달싹 못하는 주변 인물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극도의 답답함이 밀려왔다. 이미 저자의 악의 연대기에서 등장한 주인공들의 보여준 인간 내면에 극악함이 신유나라는 30대의 여성을 통해 책의 제목처럼 완전한 행복을 위해서 불행을 가져올만한 요소들을 잔인하게 제거하는 모습으로 치환되었다. 신유나와 신재인 자매의 불행한 관계의 전개는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두 자매의 어머니는 왜 작은 딸의 서늘한 잔인함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일까? 란 문제의 근원을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신유나가 완전히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에서 행했던 기이한 행동들의 단초는 그가 어린 시절에 부모와 완전히 유폐된 채 할머니에게 감금되는 벌을 감수하며 지냈던 2년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면 영원히 부모에게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신유나의 맹목적인 행복을 향한 잔혹한 행동들을 정당화시켰다. 


작가의 말에 나왔듯이 전작에서는 악의 주인공들이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듯이 진행되었다면, 이번 작품의 악인 신유나는 신유나의 주변 인물들에 의해서 그려진다. 신유나의 언니 신재인, 신유나의 전남편 서준영, 현남편 차은호, 그리고 신유나의 딸 서지유 혹은 차지유의 관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이야기의 초반부에는 신유나가 딸 지유에 대한 태도나 준영과 은호의 대화에서 비춰지는 혹시나 이 여인이 범인일까 라는 의구심이 그렇게 강렬하게 들지는 않는다. 유나가 동거한 대학동기, 러시아의 애인, 아버지를 졸음 운전으로 죽게 만든 사람이 아니었을까에 대한 의심을 잠재울 만큼, 빈틈없는 알리바이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또한 독자로 하여금 딸 지유의 관점에서 엄마 유나를 바라봤을 때 유나는 집착이 강하고 감정 기복이 심하긴 하지만 설마 그렇게 잔인한 일을 저지를 정도로 이상한 사람은 아닐거라는 일말의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유나의 언니 재인과 서준영의 동생 민영의 만남과 은호가 대학동기 진우에게서 듣게 된 유나의 과거를 통해서 거대한 퍼즐이 맞춰지듯이 하나의 결론을 향하고 있었다. 재인과 은호는 자기들의 의심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며 아무런 자구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유나의 산재물이 되기를 자처한다. 소설의 말미에 유나의 악행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며 극의 절정부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지유는 꿈이라 착각했던 장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음이, 악몽을 꾸게 만들고 아빠 인형을 갖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각성하게 되어 문제의 해결사로 등장한다. 반달늪에서 벌어진 죽음을 앞둔 이들의 사투는 한 인간이 무책임하게 자신의 행복만을 꿈꾸며 타인의 불행을 망각한 채 저지른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낸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꾼다. 하지만 그 행복이라는 것이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해서 얻은 결과라면, 우리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얼음 속에서 얼굴을 밖으로 내밀 수 없어 숨쉬지 못하는 누군가를 외면하는 잔인한 인간이 되어버릴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한번 구체적으로 얘기해봐.

불시에 일격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처럼 근본적인 질문을 해올줄은 몰랐다. 사실을 말하자면 행복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한 적이 없었다. 고민한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니까. 그는 머뭇대다 대답했다. 

-행복한 순간을 하나씩 더해가면, 그 인생은 결국 행복한 거 아닌가.

-아니,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그녀는 베란다 유리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먼 지평선을 넘어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실제로 보이는 건 유리문에 반사된 실내풍경뿐일 텐데.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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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 맛, 향기, 빛깔에 스며든 인문주의의 역사
권은중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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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중 님의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를 읽었다. 부제는 ‘맛, 향기, 빛깔에 스며든 인문주의의 역사’이다. 신간 검색을 하다가 ‘볼로냐’라는 제목을 보고 오래전 그날이 떠올랐다. 이탈리아에 대한 여행 책자나 인문서적들은 대부분 우리가 잘 아는 로마,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 정도를 다루고 있고, 근래에는 토스카나 지역이나 이탈리아 남부 지역 또는 시칠리아 섬에 대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볼로냐’라니 정말 생소하지 않을 수 없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볼로냐는 딱 한 번 가봤는데, 제목에 붉은 길이 들어가 있고 표지 자체도 붉은 색으로 정한 것은 정말 볼로냐 도시의 첫 인상이 붉은 벽돌이 주는 강렬함 때문이다. 베로나에서 방학을 보내다 반복된 일상에 변주를 위해서 급 여행으로 결정한 곳이 유로스타를 타고 로마에서 베로나고 갈 때마다 지나쳤던 볼로냐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시간이 걸려도 가격이 저렴한 표를 구매하려고 했더니 하필이면 sciopero(파업)가 있는 날이라 울며겨자먹기로 가장 비싼 표를 사고 덕분에 금방 볼로냐에 도착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당시 로마에서는 한 여름 거리의 Bar, Bistro, Ristorante 어디에서도 주홍색 빛깔의 음료가 들어간 와인잔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베네토주의 부자도시 베로나의 여름이면 어디에서든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주홍색 빛깔의 음료가 든 와인잔들 들고 있는 사람들을 거의 매일 마주하게 된다. 그 음료의 이름은 Spritz aperol 인데 aperol 이라는 도수가 높은 술에 화이트 와인(이왕이면 탄산처럼 기포가 있는 spunmante-스파클링 와인)를 섞어 마시는 칵테일의 일종이었다. 주홍색 빛깔이 난 이유는 aperol 이라는 술 때문이고, 다른 도수가 높은 술을 섞으면 색깔이 달라진다. 그런데 아마도 그 조합이 가장 맛이 괜찮았는지, 아니며 주홍색이 너무 예뻐서인지 대부분 그 술만 마신다. 나도 한 번 맛보고 나서는 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그 빛깔과 맛이 주는 청량함에 푹 빠져 베로나에 오는 지인 누구에게나 권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볼로냐 도착한 날 저녁에 베로나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젊은 청년들이 광장에 여기저기 모여서 뭔가를 마시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Spritz aperol 이 맞기는 한데, 와인잔이 아니라 그냥 투명 플라스틱 잔에 마시고 있었다. 볼로냐가 대학의 도시라서 그런건가 싶어 나도 한 잔 주문하고 보니 역시나 평소에 마시던 가격보다 훨씬 더 저렴하고 맛도 좋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저자의 책에 자세히 언급된 볼로네제 파스타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었다. 라구 소스가 들어간 파스타를 평소에 자주 접했음에도 볼로네제는 스파게티 면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역시나 저자의 설명처럼 이탈리아에 속한 각 주는 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주마다 도시마다 너무나도 상이한 개성과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주의 도시의 가보지 않고서는 그 지방의 특산 음식을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저자의 에필로그에서 고백했듯이 주변의 지인들에게 그렇게 강력히 볼로냐를 추천했음에도 누군가는 볼게 없다든지, 볼로네제 파스타보다 미트볼 슼파게티가 더 맛있다는 혹평을 들었다는 말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한식에 길들어진 입맛이 처음부터 단박에 파스타나 피자, 치즈, 프로슈토에 적응할 수는 없다. 얼죽아처럼 아메리카노만 죽도록 마시던 사람이 Bar의 banco(진열대)에 기대어 한 입에 털어넣는 에스프레소를 즐기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저자의 책을 읽으며 천편일률적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대도시의 관광지를 소개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탈리아를 너머 유럽의 근대화에 큰 기여를 한 볼로냐라는 도시의 특색을 맛깔지게 소개한 책 덕분에 코로나에서 해방되면 첫 번째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식욕을 자극하는 구수한 향기의 정체인 프로슈토와 살루미를 맛보고 국물이 간절해지면 토르텔리니 만둣국을 한 사발 들이키고 볼로네제 파스타로 속을 든든하게 하여 뜨거운 햇살과 비를 가려줄 기나긴 회랑을 거쳐 산 위에 머문 성당에 가고 싶다. 해질녁이면 반드시 tagliere(도마) 한 상에 올려진 갖가지 햄과 올리브와 함께 람브루스코 와인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아침이든 오후든 Caffe terzi 에서 마로키노나 크레미노를 마셔봐야겠다는 굳은 결심이... 

“나는 볼로냐에서 이 수레바퀴의 무게를 잠시 잊어버릴 수 있었다. 볼로냐는 제멋대로인 역사에 맞설 줄 아는 들풀처럼 강인한 사람들이 사는 특이한 지역이었다. 그 비결은 하늘의 뜻도 아니었고, 영민한 천재 혹은 어느 위대한 집단의 영도력도 아니었다. 그저 여럿이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한 방향을 보고 달려왔던 덕분이었다. 
그들은 역시의 수레바퀴가 자신을 짓밝고 지나가게 숨죽이며 기다리는 무른 땅이 아니라 그 수레바퀴가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도록 궤도를 놓을 줄 알았다. 가끔은 그 궤도가 짓이겨지기도 했지만, 적어도 볼로냐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한 궤도의 방향은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놀라운 만큼 지혜로왔다. 
볼로냐는 강철된 된 무지개를 놓았다. 그 무지개는 볼로냐 대학과 에밀리아 모델로 부리는 협동조합뿐 아니라 람부르스코 와인, 파르미지아노-레지아노 치즈, 프로슈토와 모르타델라처럼 다채로운 색깔이 있다.(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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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공구로운 생활
정재영 지음 / Lik-it(라이킷)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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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 님의 [오늘부터 공구로운 생활]을 읽었다. Like-it 시리즈 9번째 책이다. 사실 공구하면 최근에 사용한 적이 별로 없기에 문외한이라는 말이 딱이다. 오히려 어릴때에는 못과 망치를 들고 뭔가를 만들어보겠다는 모험심도 있었는데 이제는 겁이 많아져인지, 아님 딱히 벽에 액자 걸때 외에는 딱히 쓸 일이 없어서인지 내 책상에 공구라면 십자와 일자 드라이버와 줄자 밖에 없는 상황이 조금은 한심하고, 조금은 참 편히 살았구나 싶다. 

그럼에도 복스알(소켓)과 깔깔이(래칫 렌치)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잊고 있었던 군생활이 떠올랐다. 포병으로 군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경험이 있을텐데, 조종수나 정비병이 아니어도 검열이 있는 날에는 전 장병이 포에 들러붙어 분해된 재료들을 기름과 구리스로 범벅이 되어 수입을 하게 된다. 이때 다시 원상태의 조립을 위해서 복스알과 깔깔이를 사용하곤 했는데, 깔깔이가 돌아갈때의 소리가 꽤나 리듬감있고 정확히 조여졌을 때 느껴지는 쾌감 같은게 있었다. 구리스는 얼마나 닦이지 않던지 비누칠을 열 번을 해도 손이 미끄덩 거렸고, 그 손으로 상추쌈에 고기를 싸고 먹었던 기억이 난다. 또 용접에 대한 저자의 예찬과 더불어 용접은 해본적도 없으면서도 알루미늄 용접을 구경하다가 아다리(용접 눈뽕)에 걸려서 하루종일 눈물을 질질 흘렸던 기억도 난다. 

1부에서는 ‘공구로운  일상’이라는 제목으로 저자가 어떻게 공구상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공구상으로 적응하고 일을 배워가며 겪은 에피소드를 전해준다. 그리고 2부에서는 ‘공구로운 사용 설명서’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간단한 공구에서부터 전문적인 산업용 공구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구체적인 상표의 이름까지 알려준다. 공알못인 나조차도 한 번 사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로 DIY에 대한 동기유발로 충분하다. 아마도 집안의 간단한 작업을 즐겨했던 이들이라면 이 책을 계기로 자기만의 공구함이나 작업공간을 갖고 싶은 소망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믹스커피에 대한 저자의 소회는 우리나라에 만연되어 있는 직업의 귀천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반성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학원 강사가 수학 가형 7등급은 결국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이럴 거면 지이잉~ 용접 기술 배워 호주로 가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10)”는 기사는 우리 사회에서 육체노동을 바라보는 시선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70년대에 화이트 칼라와 블루 칼라로 대변되던 사무직 노동자와 공장 및 산업 노동자들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본 시선은 아직도 건제하여 망언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누군가가 믹스커피 봉지에 담긴 커피와 설탕과 프림을 뜨거운 물에 넣고 봉지를 말아 휘휘 저으면 분명 안 좋은 성분이 녹아내릴 것을 알면서도 그 한 잔에 노고와 시름을 견뎌낼 수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음을 잊고 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동서식품의 믹스커피를 사랑하는 주변의 누군가에게 가끔은 다른 맛도 보시라고 베트남의 G7커피를 선물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그렇게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누군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공장과 아파트가 장난감처럼 쌓아 올려지던 옛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땀 흘리던 우리 부모님들에게 잠깐 숨 돌릴 틈을 만들어준 것이 이 믹스커피 한 잔 아니었을지, 그리고 기분 좋은 달달함과 더불어 적당한 각성으로 현장으로 되돌아가 움직이게 하는 동력의 원천이 아니었을지. 지금 나도 갑자기 믹스커피가 당긴다.(27)”

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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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 폴리스 - 홍준성 장편소설
홍준성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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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성 작가의 [카르마 폴리스]를 읽었다. 그야말로 어느 판타지 영화에서 그려볼법한 가시여왕이 지배하는 왕국의 모습이 소설의 커다란 배경이지만, 설정과 등장인물들의 허구성을 벗겨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부패와 딜레마를 그대로 적용시킬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야기의 전개는 기존 소설과는 다른 느낌으로 현실성과 비현실성을 오가며 독자들을 혼란시킨다. 실제에 있을 법한 등장인물이 나와서 스피드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갑작스럽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혼령들의 구슬픈 서사도 진행되고 고아 42번이 마주한 조각상의 시선도 특색있게 등장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고아 42번이 태어나게 된 경위이다. 관절염을 앓는 유리부인과 남편은 불임의 오랜 시간 끝에 아이를 갖게 되고 유리부인의 임신을 유지할 신체적 건강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가시여왕이 통치하는 왕국의 모습이다. 유리부인과 남편은 북쪽 마을에서 부르주아와 지배 계급의 사람들과 유리된 채 난쟁이와 노숙자, 가난한 노동자들이 사는 곳에서 거대한 댐 건설의 노동자로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었다. 가시여왕은 댐 공사에 터무니 없는 명령을 내리며 건축사의 말을 무시했고, 결국 만에 하나의 경우의 수가 실제로 벌어져 억수같이 퍼붓는 비에 거대한 볼더 댐은 무너지고 북쪽 마을 사람들은 수장되고 만다. 댐이 무너지며 유리부인과 남편은 아이를 살리기 위한 기적같은 행동으로 유리부인은 간신히 붙은 숨으로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부모를 잃은 유리부인과 남편의 간난 아기는 이미 교단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처한 P수사가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기 위한 고아원에 보내지게 된다. 볼더 댐의 수장으로 P수사를 기소하려던 모든 이가 죽게 되고 P수사는 하늘이 주신 기회라 여기며 위선적인 고아원장이 된다. P수사는 평소의 악한 성정을 다시 드러내며 어린 아이들을 추행하고 폭력을 행사하다 그만 21번의 고아를 죽게 만든다. 이후 쥐들의 기이한 행로를 지켜보던 난쟁이 무덤지기가 의로운 젤링거 박사에 투서를 넣게 되고 P수사의 악행은 드러나게 된다. 


이후 가시여왕의 과거사가 드러나게 되는데, 그녀가 그런 극악무도한 인물이 된 불우한 어린 시절이 그려진다. 아주 오래 전 만행을 거듭했던 어느 왕조의 이야기에서 들어봤을 법한 가시여왕의 선조왕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과연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의 전형을 보여주듯이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된다. 그리고 가시여왕은 왕가의 충실한 사냥개이자 잔혹한 집행관이 알도 파스칼리노와 그녀의 아버지와 똑같은 폭정을 이어오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복잡하고도 모든 연결되어 있는 중심에는 고아 42번이 있다. 42번은 박쥐를 닮은 얼굴로 태어나 P수사의 괴롭힘을 당할 위기를 천재적인 암기력으로 모면한 후 전전긍긍한 상태에서 가시여왕의 자폐증에 걸린 아들과의 도플갱어와 같은 얼굴로 궁전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가시여왕의 아들은 지하에 유폐된 채 지내오다가 마치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제정신을 차리게 되는데 그 이후의 전개는 그야말로 피의 복수가 넘쳐 흐르는 호러물을 방불케 하며 죄를 지은 이들은 언제일지 모르는 자신이 덫씌운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진실은 포유류이다. 보살핌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거짓은 버섯류이다. 한 번에 수천여 개의 홑씨를 뿌리며 포자번식을 하고, 그늘진 곳이라면 어디서든 자라나기 때문이다. 독버섯은 이따금 떨어져주는 빗물 외엔 그 어떠한 보살핌도 필요치 않았다.(275)"


"대관절 세상이 전혀 알기 쉽게 되어 있지 않은데, 거기에 대고 알기 쉬운 설명을 읊어댄다는 건 이미 그 자체로 사기극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손쉬운 설명에만 열광했으니, 이것만큼 그들이 바라는 것이 진리가 아님을 명약관화하게 증명해주는 증거도 없었다.(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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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죄의 궤적 1~2 - 전2권
오쿠다 히데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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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의 [죄의 궤적 1-2]을 읽었다. 그동안 저자의 이름을 많이 들어왔지만 작품은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명성 그대로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기존에 읽었던 추리나 범죄물의 형태와는 다르게 범인을 추정하고 구속하는 과정이 아주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전혀 지루하지 않고 지지부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무척 놀랍다. 실제로 일본에서 1963년도에 있었던 어린이 유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상당히 많은 경찰들이 등장하지만 주요 인물의 이름만 기억한다면 이야기의 흐름을 쫓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삿포로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섬나라이고 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면적이 그렇게 크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홋카이도 섬 하나가 우리나라 남한의 3분의 2정도에 해당된다고 하니, 교통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홋카이도의 주민과 오키나와의 주민은 거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홋카이도에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직항편이 신설되고 교통비가 상대적으로 내려가면서 홋카이도는 여름에는 시원한 곳으로 겨울에는 눈을 보러 가는 관광지가 되었다. 위도상 상당히 우리나라의 북한보다 높은 지역이 많기에 한 여름에 가도 그다지 덥지 않다. 이야기의 시작은 홋카이도의 최북단 왓카나이시에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전후 10년 배를 타고 3시간은 가야 도착하는 레분토 섬에서부터이다. 


1956년도 전까지만 해도 청어잡이가 만연했던 레분토 지역은 그 이후로 씨가 말라 다시마를 거둬올려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우노 간지는 물장사를 하는 어머니와 계부 밑에서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간지는 계부의 폭력으로 자해공갈 사고를 당해 순간 기절하거나 기억을 잃는 장애를 갖게 된다. 이후 간지는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며 빈집털이를 하다 레분토에서 다시마를 거둬들이는 어부일을 하게 된다. 간지는 이웃한 동네의 빈집털이를 해서 모아놓은 장물을 동료에게 걸리게 되고 얍샵한 동료의 꾐에 넘어가 다시마 일을 시키는 주인 집의 털어 레분토를 떠나 도쿄로 가려고 한다. 하지만 간지는 기름이 떨어진 배에서 바다 한가운데 놓이게 되고 구사일생으로 해안가에 도착하게 된다. 이후 빈집털이를 통해 여비를 마련하고 도쿄로 오게 되어 전시계상의 집을 털다가 전시계상의 살인의 혐의를 받게 된다. 


악역에 간지라면 그에 대적하는 선인의 역할은 오치아이라는 엘리트 대졸 형사이다. 일본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전후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인지, 형사들 사이에도 대학물을 먹은 사람은 눈엣가시로 여겨지는 듯 하다. 오치아이는 그러한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성실하고 집요하게 범인을 추적해 나간다. 오치아이의 수사에는 많은 유능한 선배 형사들이 등장하는데 오바와 닐은 풍부함 경험을 바탕으로 범인의 범주를 줄여나간다. 


그 외에 이야기의 한 축에는 미키코 라는 산야의 여관을 운영하는 딸이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미키코의 아버지는 재일교포 1세대로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미키코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한 배경이 그려진다. 미키코는 산야를 중심으로 한 좌익 단체와 경찰 및 야쿠자의 세계에 둘러싸여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은 온전한 세계관을 지키려고 한다. 미키코의 철없는 동생은 야쿠자 똘마니가 되어 간지를 만나게 되고 천성이 착해서인지 간지를 지켜주려다 엉뚱한 일을 겪기도 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경찰에 붙잡힌 간지는 요시오 어린이의 유괴와 애인이었던 여인의 살해를 부정하려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고 범죄 현장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탈출하여 계부를 죽이려 삿포로로 간다. 이를 알게 된 오치아이와 다른 형사들이 간지를 다시 붙잡게 되는 과정은 소설이 아니라 눈 앞에서 영화가 그대로 펼쳐지는 것처럼 긴장감 넘치게 잘 묘사되어 있다. 바로 눈 앞에서 간지가 엄지 손가락을 빼서 수갑을 풀고 숨이 멋을듯 헐떡이며 도망치는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간지가 오바와의 심문에서 자신의 불우한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하는 말은 죄를 지은 사람이 흔히 하는 자기 변명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책의 제목이 [죄의 궤적]이라는 것을 상기해 볼때, 간지의 말은 어느 누군가의 죄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그 한 사람에게 있는 것만이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을 사이코다 소시오패스라고 규정지으며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치부해버렸던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닌가 싶다. 


"- 예, 그래도. 적어도 태어날 때부터 바보는 아니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뭔가 구원받았다고 할까... 그리고 나는 어렸을 때 충분히 지독한 일을 당했고, 그렇다면 무슨 짓을 해도 다소는 용서받지 않을까 하는....

-그럴 리 없잖아. 도둑을 만난 사람은 남의 물건을 훔쳐도 용서받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유는 있어요.

-그런 게 이유가 돼?

-오바 씨는 몰라요. 나쁜 짓이라는 건 연결되어 있어요. 내가 훔치는 것은 내 탓만이 아니에요. 나를 만든 것은 아방이와 오마이니까요.(2권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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