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또 무슨 헛소리를 써볼까 - 책상생활자의 최신유행 아포칼립스
심너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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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너울 작가의 [오늘은 또 무슨 헛소리를 써볼까]를 읽었다. 저자의 이전 작품을 하나도 읽지 못했지만 제목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에세이만 써온 무명의 작가가 아니라 소설을 발표했던 아주 젊은 소설가가 스스로 이런 제목을 용납했다는 사실이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표지 그림은 꽤나 현실감 있게 절묘해 이야기 속 내용의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그런데 막상 읽다보니 글쓰기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처절한 자기 투쟁의 역사를 낱낱이 고백하고 있어서 조금 놀랍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 것인가란 우려의 마음 또한 들었다. 그런데 저자가 전해주는 꼰대의 나이에 이르러서는 쉽게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의 업데이트를 아주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설명하기에 오히려 저자의 솔직함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정기적으로, 규칙적으로 어딘가에 칼럼에나 에세이 혹은 발표문을 작성해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할 것 같은데, 바로 PC 화면에서 깜박거리는 커서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멍을 때리는 순간이다. 그러한 순간은 순백의 MS워드와 한글 프로그램의 화면에 글자로 가득 채워 프린터 명령어를 누르거나 첨부파일 메일을 보내는 시간이 닥쳐오기까지 나의 목을 죄어 오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게 해 준다. 더군다나 글을 쓰는 사람인 전업 작가로 생계를 이어가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아마도 소수의 천재적인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고뇌의 시간을 충분히 채웠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닥달하고 낭떠러지까지 몰아세워 한 방울의 수분까지 짜내어 나온 한 페이지가 쌓인 책이 어마어마한 부귀영화를 가져다 준다면 그렇게 고통스러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동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스스로 고백하듯이 연봉 2,500원 정도의 벌이를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그 정도의 연봉은 결코 높은 수준이 아니며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고 그저 월세로 자신의 한 몸을 돌볼 정도 되는 수준이다. 그러니 저자의 목표는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우리가 아무리 작가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 입에 발린 칭찬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삶은 너무나도 쉽게 궁핍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아마도 효율성을 따지고 좀 더 생산적인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될 게 아니라면 다른 일을 택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쉽게 말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오래 현인들의 가르침인 한 우물을 파야 한다는 전통적인 이론을 가볍게 건너 뛰고 멀티태스킹을 즐기며 글쓰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글쓰기는 약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성인 ADHD를 극복해나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글쓰기는 단지 생계의 수단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위해 수단으로만 용납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치유할 길로, 그리고 그 솔직한 고백을 읽는 이들에게 남들과는 다르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자신감을 갖을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특히나 저자가 전해주는 핫한 이슈거리들에 대한 해석은 좀처럼 포털뉴스 기사를 통해서도 접하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소재들을 재미있으면서도 분석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곽재식 작가가 추천의 말에서 언급했듯이 SNS의 알고리즘 광고에 대한 글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시선을 일깨워주었다. 


"시간이 갈수록 실력만 오르는 게 아니라 작품을 즐기는 식견, 감식안도 성장한다. 그 성장의 방시근 판이하게 다르다. 감식안은 전문적인 선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연속적으로 꾸준히 상승하는 듯하다. 반면에 실려근 불연속적인 계단형 그래프를 그리면서 늘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 앞에서 온갖 고뇌를 곱씹다 보면 갑자기 그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 5년에 한 번쯤은 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감식안과 실력의 차이, 그 면적이 오롯한 질투와 고통으로 화한다. 나는 정말 훌륭한 작품들을 즐길 수 있는데, 정작 그 작품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어! 물론 감식안은 항상 실력보다 더 높은 선을 유지하기 때문에 고통이 발생하지 않는 순간은 없다.(40-41)"


"'입은 재앙을 불러오는 문이고 혀는 몸을 토막 내는 칼'이라는 유명한 문구에서 틀린 구석을 찾아내기 쉽지 않았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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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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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의 [우리가 쓴 것]을 읽었다. ‘매화 나무 아래’, ‘오기’, ‘가출’, ‘미스 김은 알고 있다’, ‘현남 오빠에게’, ‘오로라의 밤’, ‘여자아이는 자라서’, ‘첫사랑 2020’ 이렇게 8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미 예전에 다른 단편집에 읽었던 소설이 몇 개 있었지만, 다시 읽어보니 새롭기도 하고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역시나 술술 잘 읽힌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마음을 꽝 울리는 부분들이 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을 당시만 해도 나중에 그렇게 큰 논쟁의 화두가 될지는 전혀 몰랐다. [82년생 김지영]에 나온 재미있는 부분을 강론 시간에 전해주었을 때에 중년의 어머니들은 격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사실 이 시대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 이래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통받아온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82년생 김지영] 뿐만 아니다. 이 소설이 인기를 누릴 무렵,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는 만화로 더욱 신랄하게 젠더 문제에 대해 비판한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을 때보다 [며느라기]를 읽을 때 더욱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맞이하는 명절에는 더 이상 방바닥에 본드를 붙인 것처럼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럼에도 ‘오기’에 나온 것처럼 [82년생 김지영]은 논쟁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사실 아주 오랜시간이 관습처럼 지속되어 온 행위들에 대한 옳고 그름은 쉽사리 판단내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옳지 않은 것임에도 당연한 것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양심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비인간적인 행동을 한 사람을 보고 ‘양심에 털이 났냐?’,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라는 비난을 던지기도 한다. 사실 그렇다. 우리가 아주 이상한 교육을 받지 않은 다음에야 양심을 갖고 있는 인간이 어째서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이 당연하고도 보편적인 질문에 대해서 생각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대단한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함께 고민해왔었다. 이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론]이라는 책에서 양심의 양성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 모두가 양심을 갖고 태어났지만 올바른 양심이 형성되도록 교육받지 못하다면 우리는 양심에 털난 행동을 하고도 뻔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기원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차별에 대한 저항을 근간으로 여성이 무산계급처럼 남성이라는 유산계급의 소유물처럼 인식된 헤게모니를 철폐하고자 시작된 것이다. 여성에게 투표권도 주지 않고, 계집아이라서 학교도 보내지 않고,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소박을 맞고 살아온 기나긴 시간의 종지부를 내자는 당연한 목소리가 역차별이라는 맞대응을 소환해내고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새로운 대립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첨예한 논쟁거리에 모두가 다른 생각을 갖고 각자의 색깔을 드러내는 발언을 할 수 있겠지만, 집으로 돌아간 우리는 서로 다른 성을 가진 누군가의 가족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인간이 모인 어느 공동체에서든 동성과 이성으로, 여러 세대를 걸치는 집단의 구성원으로 살아가야만 한다면 진심어린 환대만이 각 개개인의 존재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다리에 힘이 풀렸다. 눈 위에 풀썩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아예 엉엉 울었다. 어른이 된 후로 내가 이렇게 얼굴을 내놓고 울었던 적이 있었나. 소리 내서 울었던 적이 있었나. 억울함과 서운함, 고통과 후회로 사무친 눈물이 아니라 맑고 개운한 눈물. 몸과 마음 속 모든 낡은 것들이 빠져나갔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았구나.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구나.(246)”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준비하는 것, 완전히 절망해 버리지 않는 것, 실낱같은 운이 따라왔을 때 인정하고 감사하고 모두 내 노력인 듯 포장하는 않는 것. 눈물이 멈췄다.(250)”

“좋아하는 시인의 시에서 인중에 대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천사들이 배 속 아기에게 세상의 모든 지혜를 가르쳐 준 후 다 잊고 태어나라고 아기의 입술 위에 쉿, 손가락을 얹는데 그때 인중이 생긴다는 이야기. 손을 들어 인중을 더듬어 보았다. 분명 다른 세계에 다녀왔지만 기억이 없다. 하지만 내 안에 그 세계의 빛이 깃들었음을 안다.(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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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나의 나의 첫 외국어 수업
손미나 지음 / 토네이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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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나 작가의 [손미나의 나의 첫 외국어 수업]을 읽었다. 부제는 ‘언어적 자유를 위한 100일 프로젝트’이다. 그동안 저자가 써온 여행기를 모두 읽고 팬이 되었기에,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다국어를 사용할 줄 아는 저자가 어떻게 공부했는지 알고 싶어 읽어보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분명 학창시절부터 영어에 대한 엄청난 압박을 받고 지내왔기에 외국어를 능수능란하게 잘하는 사람은 무조건 부러웠던 것 같다. 더군다나 한 가지 외국어를 잘해도 놀라운데, 서너개의 다른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보면 도대체 저 사람은 나랑 뭐가 다를까 라는 자괴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작년에 전세계적으로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저자가 우리나라가 방역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스페인의 공영방송에서 인터뷰 하는 내용이 뉴스로 보도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 저자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그동안 저자가 남모르게 외국어를 익히느라 보냈을 오랜 시간들에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학원 다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몇 번의 경험 밖에 되지 않지만, 그 몇 번의 경험이 모두 외국어를 위한 학원이었다. 제대를 하고 자발적으로 새벽 같이 일어나서 영어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그런데 두 달 정도 다니다가 회화 시간만 되면 말을 걸까봐 두려워 그만 두게 되었다. 역시나 저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말하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 하는 부분인 것 같다. 오죽하면 예능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 중의 하나가 영어 울렁증일까. 그래서 그런지 저자의 책을 읽고 나니 나도 한 번 다시 도전해볼까라는 용기가 저 밑에서 조금씩 올라오는 기분이 든다. 

책 날개에는 “결국 외국어 능력자가 된 사람들의 마인드셋을 이렇게 규정한다. 
1. 외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겠다는 생각을 버린다. 
2. 외국어 공부에 필요한 연료는 폭발력이아니라 지속성임을 잊지 않는다.
3. 외국어를 배울 때 ‘듣기’와 ‘말하기’를 나중으로 미루지 않는다.
4. 외국어 능력자가 된 멋진 미래의 모습을 상상한다.
5. 슬럼프가 올 때마다 공부를 시작한 이유를 떠올린다. 

특히나 내가 공감했던 부분은 ‘피헤갈 수 없는 딜레마들’ 부분에 나온 외국어 공부에 대한 슬럼프에 대한 설명이다. “실력이 늘지 않고 제자리걸음인 느낌이다. 전과 다름없이 혹은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실력이 좋아진 상태에서 제자리걸음만 하거나 심지어 후퇴하고 있는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실력이 느는 것 같아 신이 날라 치면, 그 타이밍을 노렸다는 듯 인내심의 한계를 테스트 하는 일이 생긴다. 갑자기 실력이 제자리에 멈추어 선 느낌이 들고, 대개의 경우 그 답답한 느낌이 적지 않은 시간이 지속되다가 도리어 실력이 퇴보하는 것 같은 짧은 침체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희한한 일은 바로 이 시기에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버티면서 공부를 지속하면 거짓말처럼 눈에 띄게 실력이 급향상된다는 것이다.(84-85)”

무릎을 탁 칠 수 밖에 없는 명쾌한 설명이다. 유학 중에 수없이 선배들에게 들었던 조언들 중에 어쩌면 가장 중요한 언급이 아니었나 싶다. 그럼에도 아무리 좋은 선생님과 원어민 친구와 교재가 있다 하더라고 결국은 꾸준히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또 다른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저자 또한 가장 강조하고 있다. 외국어에 대한 로망이 나이가 들어도 사그러들지 않고, 작심삼일이 되어도 새로운 도전을 하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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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단어 - 생활견 키키와 반려인 진아의
임진아 지음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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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아 작가의 [오늘의 단어]를 읽었다. 제목 앞에 ‘생활견 키키와 반려인 진아의’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리고 견과 인자 위에 방점이 찍혀 있어 키키와 저자의 관계를 더욱 강조한다.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4개의 장으로 구분하여 계절마다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단어들을 중심으로 짧은 만화에 몇 가지 에피소드가 이어지고, 그 단어에 관련된 저자의 에세이로 마무리짓는 형식이다. 이렇게 만화와 에세이가 반복적으로 구성된 책은 많지 않아 색다른 매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 나왔듯이 저자에게 있어서 반려견 키키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고 보통은 사람이 반려견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째서 그런 반복된 행동을 하는지 궁금해하는데, 오히려 이 책에서는 키키가 사람의 시선으로 저자를 바라본다. 그래서 생활견 키키라는 이름과 반려인 진아라는 부제를 붙인 것 같다. 

만화에서 키키는 진아와 자연스럽게 대화도 하고 장도 보러 가고 음식도 먹고 취미생활도 즐긴다. 그리고 함께 잠들며 진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만화에 나온 대부분의 에피스도는 아마도 저자가 실제로 키키와 함께 살면서 겪은 일에 키키를 의인화해서 표현했을 것이다. 반려견이 키키처럼 대화가 가능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다면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개를 키우며 적잖은 위로를 받는 것 같은데 실제로 반려견이 말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만화에 나온 것처럼 함께사는 사람들은 반려견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히나 키키와 함께 서점을 가서 서로가 원하는 책을 고른다거나, 외출을 나가는 키키는 진아에게 뭘 사다줄까 물어보는 장면들은 왠지 모르게 포근하고 정답게 느껴졌다. 정말 그런 강아지가 있다면 나도 함께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계절에 대한 저자의 색다른 감각과 시선은 대부분 봄부터 계절이 시작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일요일부터 시작되는 달력이 아닌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달력을 반기는 사고의 전화의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우리나라는 봄부터 새학기가 시작되고 그러다보니 많은 직장들도 새해가 될 무렵에 신입사원을 뽑게 되고, 1월이라는 새해가 반드시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고착되어 있었던 듯 하다. 이러한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는데, 로마에서 공부를 하며 10월에 학기가 시작이 되어서 처음에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우리나라처럼 2021학년도가 아니라 2년에 걸쳐 한 학년이 이어지니 반드시 1월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4계절인 나라에서 어찌보면 가장 온화한 날씨가 지속되는 10월에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장소와 환경에 대한 두려움에서 조금은 덜 긴장된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려 몸과 마음이 경직된 3월이 아니라 뜨거운 여름을 견디고 결실을 맺는 계절에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도 좋은 것 같다. 

특히나 올해 1월 초에 이사를 하면서 겪은 혹한의 추위는 꽤나 긴 후유증을 남겼다. 이사짐을 꾸리고 나르고 풀고 하느라 손등이 너무 심하게 터서 보름 이상 피딱지를 안고 견뎌야했다. 혼자 짐싸고 푸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손등이 터서 피까지 나니까 짐을 다 집어던져 버리고만 싶어졌다. 왜 해마다 이 추운 겨울에 이동을 해야 하는 것인지, 좀 따뜻할 때 이동하면 안되나 라는 푸념도 터져나왔다. 갑자기 한 여름을 앞두고 왜 이런 한탄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름부터 시작된 저자의 생각에 나도 모르게 젖어든 것 같다. 매일 매일의 일상은 충실하게 하지만 삶의 커다란 테두리는 변화무쌍한 도전을 한다면 조금 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주변에 소중하고 친한 사람 몇 명만 두어도, 1년간 선물을 고르며 지내게 됩니다. 봄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일렁이는 설렘을, 여름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활기찬 기운을, 가을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잔잔한 마음을, 경ㄹ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따뜻한 온도를 선사하고 싶어집니다. 가끔씩 오래 알고 지낸 사람에게는 생일과 다른 계절의 물건을 골라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음 해가 되면 결국 계절에 맞는 선물을 고르게 됩니다. 계절에 맞춰서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게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느즈막이 듭니다. 일단 지금을 잘 보내자, 하루씩, 한 계절씩 잘 살자고 말하고 싶어집니다.(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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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살고 죽고 - 치열하고도 즐거운 번역 라이프, 개정판
권남희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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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희 작가의 [번역에 살고 죽고]를 읽었다. 부제는 ‘치열하고도 즐거운 번역 라이프’이다. 불과 두 달 전에 [혼자여서 좋은 직업]을 읽고 십년 전에 출판된 [번역에 살고 죽고]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에 개정판이 나와서 단숨에 읽게 되었다. 역시나 권남희 작가의 책은 잘 읽힌다. 이 책이 십년 전에 쓰인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생생함이 느껴진다. [혼자여서 좋은 직업]이 번역가로서의 완숙미를 보여주었다면, [번역에 살고 죽고]는 저자가 전문 번역가가 되기까지의 여정이 솔직담백하게 그려져 있기에, 그리고 정말 번역가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자상한 안내서가 될 법하기에 펄펄 튀어 오르는 활어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변변한 취미생활도 누리지 못한 채 치열하게 번역을 해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란 의문과 더불어 저자의 무서운 인내심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이 책에서 몇 번이 강조된 번역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가 결국은 그 실력을 갖추기까지 얼마나 긴 인고의 시간을 보낸 것인지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새로운 서문에 딸 정하의 새로운 일상을 전해주었는데, 그것 또한 저자가 갖고 있는 독특한 매력인 것 같다. 많은 이들 앞에서 말하거나 마주하는 것이 무척 힘든 소심한 성격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책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딸까지 그들과의 일상을 소소히 전해주는 솔직함이 많은 이들에게 큰 위로를 전해줄 것 같다. 엄마를 위로해주고 응원해주며 커가는 정하의 이야기들은 아마도 독자들이 저자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 중의 하나일 것이다. 결국 우리를 지탱해주고 전진하게 해주는 것은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좋아하는 일을 무던히도 잘 해내어 우리나라의 유명한 번역가의 위상을 갖게 된 큰 원동력은 분명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당위와 일종의 강요가 없다면 무엇인가의 마침표를 찍기란 여간해서 쉽지가 않다. 아마도 이렇게 번역에 대한 책을 당당히 쓸 수 있는 것은 죽을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며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해내어 생계를 이어나간 스스로에 대한 충만함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번역을 시작할 때의 이야기도 전해주는데, 우리나라에서 일본 문학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누리기 시작할 때라 그런지 아니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아직 저작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인지 판권 없이도 번역해서 책을 출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그리고 영화 ‘러브레터’의 이야기에서는 90년대 중반까지 일본 대중 문화가 수입되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지금 노노재팬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어둠의 경로로 영화 ‘러브레터’를 본 친구들이 극장에서 그 영화를 보지 못하는게 너무 한스러워하는 걸 몇 년 후에야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저자가 번역한 수많은 일본 작가들의 책이 나오는데, 몇명을 빼고는 모르는 이름이 많아서 그동안 일본 문학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한 것이 순전한 나의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저자의 이야기와 번역에 관련된 에피소드들도 재미있지만 꽤나 유명하고 베스트 셀러였음에도 접하지 못한 좋은 작품들을 소개해주는 부분이 특히 좋았다. 이렇게 저자가 번역한 작품이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새로운 독자가 생겨나는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검다, 까맣다, 꺼멓다, 새까맣다, 시꺼멓다, 시커멓다, 거무스름하다, 거무튀튀하다, 가무잡잡하다, 거뭇거뭇하다, 희다, 하얗다, 허옇다, 새하얗다, 희붐하다, 희뿌옇다, 허여멀건하다, 붉다, 빨갛다, 뻘겋다, 발갛다, 벌겋다, 발그스름하다, 불그죽죽하다, 푸르다, 파랗다, 퍼렇다, 새파랗다, 시퍼렇다, 푸르딩딩하다, 푸르죽죽하다, 파릇파릇하다, 파르스름하다(185)” 

타이핑 하기도 힘든 이런 단어들을 모조리 외울 정도의 노력이 있어야 뭐를 하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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