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20 세트 - 전20권 (반 고흐 에디션) - 박경리 대하소설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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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부터 토지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만 앞설 뿐 과연 내가 그 장구한 이야기를 따갈 수 있을까란 생각에 미루었는데, 이제 박경리 작가님이 초대하신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장으로 기꺼이 들어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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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의 가게
이서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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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수 작가의 [마은의 가게]를 읽었다. '마은'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제목을 보았을 때 불혹의 나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우후죽순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카페를 바라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커피를 진짜 많이 마시는 것 같아도 커피를 팔아 가게를 운영하고 이익을 남기기란 쉽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종 프랜차이즈 카페와 식물원과 같은 대형 카페의 등장 그리고 아주 저렴한 가격의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는 카페의 등장으로 웬만큼 특징을 갖지 않고서는 개인 카페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인 공마은이 카페를 차리고 운영하는 내용을 살펴보니 여성이 혼자서 자영업을 운영하는 데 그동안 알지 못했던 꽤나 심한 난처함과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학원 강사와 연극 배우의 일을 하다가 모은 얼마간의 돈으로 권리금이 없는 낡은 장소를 택한 마은은 빚을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덜컥 계약을 하게 된다. 최소의 비용으로 인테리어를 마치고자 이곳 저곳 업자를 만나 카페를 꾸미기 시작하지만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단계를 마주하게 되고 똥파리처럼 꼬여 어슬렁 거리며 이것 저것 참견하기 시작한 동네 남자들로 인해 위기감이 고조된다. 개업떡을 돌리라는 엄마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상벨을 꼭 달아야 한다는 정미 언니와 작은 숲 카페 사장의 조언에도 마은은 비용 때문인지, 아니면 그런 두려움에 떨지 않겠다는 다짐 때문인지 아무런 안정 장치를 추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전세계 어느 나라보다 밤길을 걷기에 안전한 나라라고 하지만, 마은이 처한 상황에 몰입하다보니 결코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나의 친족인 젊은 여자가 혼자 카페를 운영하며 밤에는 그곳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데, 한 밤중에 누군가가 카페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면 얼마나 걱정되고 불안할까. 고시원 월세를 아까기 위해서 선택한 카페 안의 기숙은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마은이 왜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하는가? 카페 바닥은 보일러가 들어와서 한 겨울에도 따뜻하게 누울 공간이 있고 화장실도 있어서 샤워까지 가능하다면 구태여 좁디 좁고 그 또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리빙텔과 같은 곳에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될 것이다. 그러나 복병은 마은처럼 여자 혼자 머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빌런들의 출몰이다. 특히나 마은의 가게 근처에 자영업을 하는 중년 남성들은 마은에게 선 넘는 질문을 던지며 치근덕 거린다. 카페에 들어와 사적인 질문을 하거나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마은이 사근사근하지 않다고 대놓고 불평을 한다. 혹시나 그들이 사람들이 시선이 사라진 시간에 이상한 짓을 하면 어떻게 할까? 그들을 대적해서 나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을까? 


소설 속에서는 마은 말고도 작은 숲 카페를 운영하는 솔이와 옆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채영 그리고 마은의 엄마 지화씨가 울산에서 반찬 가게를 운영하는 1인 여성 자영업자들이 등장한다. 마은은 이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마은이 알지 못했던 여성 자영업자의 위태로움을 전해듣고 공감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시답잖은 농담에 상처를 받고 가게의 존폐를 결정지을 손님과의 실랑이를 견디고 있는지. 소설의 말미에 마은은 이모와 함께 울산으로 내려가 엄마를 만나서 전 남자친구에게 협박까지 하며 딸을 지키려 했던 엄마의 강단있는 고백을 듣게 된다. 엄마는 마은이 생각했던 것처럼 착하고 순하지 않으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딸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강인한 여성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마은과 카페를 통해 연결점을 갖는 보영은 재경관리 부서의 사원이다. 90년대 생 답고 야근을 거부하고 철저한 워라벨을 꿈꾸지만 보영이 류팀장처럼 헌신하지 못하는 데에는 여성으로서 팀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보영에게는 확실한 미래를 그리지 않고 일용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호라는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그들의 관계를 안정적이지 못하고 주호가 마은의 가게에 설치한 CCTV 카메라를 확인하는 앱을 지우지 않은 것을 확인하면서 결별을 맞이한다. 보영은 류팀장의 지시로 여성을 제외한 신입사원 입사원서를 가려내고 자신보다 3년이나 후배가 절대로 자신의 자리를 넘볼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신입사원 조현수는 입에 발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잘하고 야근도 거부하지 않는 영악한 인물로 비춰지며 보영의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마은의 가게에 들어와서 치근덕 거리는 21세기의 건달이나 마은을 위협했던 술취한 어떤 남성의 모습을 생각했을 때, 한국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는 여성이 혼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선택인가라는 비관적 생각에 몰입된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된 것일까? 이런 위협과 두려움의 해결책은 결국 여자에게는 남자가 있어야 한다는 구시대적 유물로만 가능할 것일까? 개인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민주주의적 사회를 지향하는 시대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법과 규칙들은 한 개인의 안위를 보장하기에 충분치 않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보복 범죄와 데이트 폭력으로 숨지거나 다친 이들의 소식을 주기적으로 전해듣는다. 그럼에도 그치지 않는다. 보호 요청을 해도 경고에만 그칠 뿐 위협을 느낀 당사자가 비참한 죽음을 당한 이후에야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만 말한다. 어쩌면 소설 속 마은 또한 그런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 마은이 그런 피해자가 되었다면 아마도 사람들이 하는 말 중의 하나는 '그러길래 왜 여자가 혼자 가게에서 숙식을 하고 그래' 혹은 '그러니까 비상벨과 같은 안전장치를 잘 해놨어야지.' 등이 아닐까. 


절대적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이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불필요한 비용을 지불하거나 억지스레 도움을 요청해야만 하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면 우리 사회는 뭔가 심각한 위협에 놓인 것이 아닐까. 약육강식의 원시시대도 아니고 이렇게 첨단 과학의 문명을 누리고 살면서도 원초적인 욕구하나 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나약한 이들이 난립하는 시대를 견뎌내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무상의 연대를 제시한다. 비록 마은이 폐업을 고민하며 견디고 견뎌 얻어낸 성과이기에 더욱 안쓰럽지만, 마은의 가게에 방문하는 엄마와 아기들의 존재가 불의한 마음을 품고 있는 이들을 항상 각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경고라니 조금은 씁쓸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내 감정의 색채에 대한 재후의 짐작이 두려웠다. 내가 모르는 나의 마음을 자신은 알고 있다고 말했을 때 나는 맨발로 압정을 밟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십대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감정을 내가 정의 내릴 수 없었던 순간들이 압정처럼 내 발에 박혀 있었다.(121)"


"서로에게 의존하는 관계가 아니라 적당히 선을 긋되 필요할 땐 확실히 돕는 관계. 그리고 다시 물러서서 자신의 삶 속으로 기꺼이 돌아가는 관계. 우리는 자기 원의 한쪽 끝이 상대의 원과 겹쳐지는 지점을 매일 바라보면서 오롯이 남아 있는 나머지 원 안에서만 살아간다.(229)"


#이서수 #마은의가게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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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닌 -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하승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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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민 작가의 [멜라닌]을 읽었다. 제29회 한겨례문학상 수상작이다. '심사위원 전원 압도적 지지'라는 띠지의 문구 내용과 더불어 제목에서부터 풍겨오는 현실적 감각이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역시나 읽는 내내 엄청난 몰입감과 더불어 주인공 재일에게 공감이입이 되어 순식간에 한국와 베트남과 미국의 소도시를 오가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나 재일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어 소설이 출간되기 바로 전까지의 현 시대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에 소설이 아니라 차별과 배제가 만연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분투해온 한 청년의 성장기를 그대로 바라보는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릴 때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담긴 단어였다. 그때에는 그 단일민족이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자긍심을 갖게 해 주었고 소위 국뽕에 빠지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점차 발전하면서 단일민족이란 존재할 수 없고, DNA 검사를 통해 나온 유전자 검사를 해 보면 우리나라 사람의 피 속에도 저 먼 유럽대륙의 피가 섞여 있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우리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나의 조상의 조상의 조상은 어디에선가 이 땅이 아닌 곳에서 살아온 이와 피를 섞게 되었지만 겉으로 보아 동북아시아 황인종의 피부색을 갖고 있기에 '단일민족'이라는 허상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근자감 때문인지, 아니면 인간은 원래 계급적 의식을 타고나 차별과 배제에 익숙한 것인지, 낯선 피부색을 가진 이들을 만나게 되면 거부감을 느끼며 그들을 폄하하는 별명을 만들어 왔다. 코쟁이, 튀기, 때놈, 쪽바리 등등, 역사와 얽힌 부정적 감정이 담긴 단어들이기도 하지만 그때의 언어적 습관은 꽤나 오랜 시간 우리 삶 안에서 지속되어 왔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군정의 지배를 받은 이후 지금까지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기에 전후 초기에는 경제, 문화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고 미국 주둔 지역에서 생계를 이어갔던 이들 중 상당수가 미군과 혼인하여 거주지를 옮기기도 했었다. 그때 태어난 아이들은 당연히 생김새와 피부색이 달랐기에 튀기라는 단어로 뭉뚱그려졌다. 이후 배우자인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한 이들에게는 양공주라는 또 다른 폄하하는 단어가 생겨났고, 이런 모진 말들은 당사자들에게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주 소수에 불과했고 일반적인 사회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에 외국인과 결혼한 이들과 그들의 자녀가 받는 집요한 시선은 감당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었다. 당사자를 제외한 아무도 그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었다.


어느덧 우리나라도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저개발국가에서 노동자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농촌의 나이든 총각들의 국제 결혼이 빈번해지면서 소위 이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이제는 이주민 노동자들이 많은 어느 소도시에 가면 여기가 우리나라가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낯선 언어로 쓰인 간판과 다수 인종이 모여 살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니 어쩌면 이제 시작에 불과한 차별과 혐오가 곳곳에 놓인 덫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놓고 있다. 이주민 노동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나 국제 결혼을 통해서 태어난 아이들은 대부분 경제적 형편이 넉넉치 않다. 마치 순혈주의에 심취하여 자기들이 거져 얻은 좋은 환경과 기회를 특권인 것처럼 착각하며 거대한 장벽을 쌓는 모습들은 트럼프가 멕시코 이민자를 막기 위해 사막에 벽을 쌓는 것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들을 몰아넣으며 쌓은 장벽과 다를게 없지 않나. 


언젠가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에서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려냈는데, 특별히 인종 차별 의식을 갖지 않고 있던 평범한 백인 남성이 운동을 하다가 아시아계 여성을 만나 스몰 토크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둘 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기에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는데, 백인 남성은 아시아계 여성에서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여성은 약간의 의아함을 가지며 자신은 미국인이라고 말한다. 남성은 아니 그거 말고 너의 원래 출신이 어디냐고 물었고 여성은 약간의 찜찜함을 느끼며 자신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는 아시아의 어느 나라 사람이었다고 대답한다. 백인 남성은 그제서야 '아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구나'라는 반응을 보인다. 이제 여성은 반대로 남성에게 묻는다. 너는 어디에서 왔어? 남성은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질문이냐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너의 부모가 인디언이 아니고서야 조상들 또한 이주민이 아니냐고 묻는다. 백인 남성은 그때서야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화를 마친다. 


지금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갈등의 여러 양상들의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특정한 인종과 민족적 정서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에 무차별적인 폭력의 결과로 얻누리게 된 지배 계층이 자기들만 선택되었다고 믿는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피부색과 인종을 바탕으로 아파르트헤이트와 제노사이드를 서슴치 않고 자행했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해진 현대에 이르러서도 자국민의 보호와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이주민의 정착과 난민의 유입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이주민과 난민을 배타적으로 생각하는 극우세력이 득세하여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상황이 가속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재일이 만난 많은 이들이 그렇다. 베트남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동생 재우와는 다르게 재일은 파란 피부를 갖게 되었다. 어찌 보면 소수 중의 아주 희박한 소수 인종으로 살아가야하는, 언제 어디서든 지나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때로는 가짜 뉴스와 이상한 사건의 주인공과 단지 같은 피부색을 지녔다는 이유로 경계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약자로서의 삶이 예약되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재일의 아버지 또한 공장의 이주 노동자들에게 군림하며 재일의 피부색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하고 베트남 아내를 존중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이었다. 재일에 대한 배려라기 보다는 뜬금없는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미국 이민을 준비한 한 재일의 아버지는 결국 아내와의 불화로 아들 재일만 데리고 떠나게 된다.  


이후 재일은 학교를 다니며 지난한 적응과정을 거치게 된다. 당연히 유색인종이라는 시선과 더불어 파란 피부를 가졌다는 가시성은 파란 피부를 가진 누군가가 과거에 저질렀던 총기 난사와 같은 끔찍한 사건들을 연상시키며 재일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각시킨다. 소설의 말미에서 호수에 빠진 루크의 엄마를 구해주었을 때 루크의 부모가 재일을 찾아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는 부분에서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재일의 대답은 루크의 부모와 같은 관념을 가진 이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재일은 이렇게 반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째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인가? 어째서 당신들은 백인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유색 인종들보다 높은 계급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인종과 피부색을 구분하여 종적으로 나열하는 사고방식에서 헤어나지 않는다면 차별과 혐오는 우리 삶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인종주의는 사람들을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어.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멸시하고 억악하면서 지배 계층이라는 우월감을 느끼는 거야. 정작 본인이 계급의 아래에 놓여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면서 말이야. 가난한 백인 노동자가 흑인을 멸시하는 모습을 상상해봐. 그런데 한때는 이 나라에서 백인도 차별받았다는 거 아니? 하얀 흑인으로 불리던 아일랜드계 이민자가 있었지. 비숙련 노동자였고 가톨릭 신자였던 사람들.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슬라브계 사람들이 노예였고, 노예(slave)라는 단어의 어원이 슬라브(slav)지. 그러니까 이건 흑인과 백인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야. 모든 인종이 이 구조의 영향을 받고 있으니까. 명예 백인으로 불리는 아시아인을 봐. 성공한 소수 민족 신화 덕에 이 계급사회에 저항하지 않고 섞여들었잖아. 백인이 던져준 먹잇감이지. 백인이 아시아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을 때 옆에서는 굶주린 흑인이 으르렁거리는 거야. 자기들이 체스판 위에 있다는 걸 아무도 몰라. 이 시스템은 열등한 타자를 등장시켜 차별을 합리화하고 있는데, 서로를 공격하느라 진짜 적이 누군지 생각하지 않아. 분리 정복 전략의 효과를 다시 한번 입증한 셈이지. 효과가 있다니까. 언제나.(111)"


"차별은 그 시스템의 피해자만 인지할 수 있는 독가스 같은 거니까. 수십 번의 경험이 필요한 게 아니야. 몇 번, 어쩌면 딱 한 번의 끔찍한 경험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폐에 남기는 거야. 그리고 숨을 쉴 때마다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거지. 사람들은 그걸 몰라. 차별이 강물처럼 흘러야지만 차별인 줄 안단 말이야. 사실 차별은 곳곳에 놓인 지뢰밭 같은 거야. 딱 한 번의 폭발에도 우린 불구가 된다고.(185)"


#하승민 #멜라닌 #한겨레출판 #제29회한겨레문학상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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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걸
마이아로즈 크레이그 지음, 신혜빈 옮김, 최순규 감수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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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아로즈 크레이그의 [버드걸]을 읽었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다보면 매일 듣게 되는 새 울음 소리가 있다. 나무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옅은 청록색의 깃털이 꼬리까지 이어져 순간 파랑새인가 싶었지만, 또 그렇게 강렬한 파란색은 아니었다. 울음소리가 그다지 듣기 좋은 편이 아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 새 이름을 아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몰랐다. 그 새가 둥지를 틀고 나서부터는 비둘기도 까치도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얘기만 들었다. 주변에 새를 잘 아는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다. 그저 흔하디 흔한 참새, 비둘기, 까치, 까마귀 정도만 구분할 정도로 무심하게 살아왔는데, 이번 책을 읽고 전세계에 1만 여종이 넘는 새가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그런데 저자가 그 반에 해당되는 5천 종의 새를 직관했다니 그것도 스물 살도 안되는 나이에 말이다. 


탐조인이라는 말 또한 들어 본 적은 있으나 이렇게 생생하게 다가오기는 처음이다. 세상에 다양한 취미와 전문성을 가진 이들이 많겠지만 새를 보기 위해 전세계를 누빈다는 것은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책에도 나와 있듯이 희귀한 새들을 보기 위해서는 사람이 편히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길이 아닌 길을 뚫고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며 오랜 시간 기다림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꽤 오래전 무슨 연유인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부엉이가 학교 기숙사 앞에 떨어져 있는 것을 학생들이 발견하고 신고해서 구조대가 오기를 기다린 적이 있다. 부엉이를 놓을 데가 없어서 우산꽂이에 임시로 놓아두었는데, 크기를 실제로 보고 너무 놀라서 부엉이가 이렇게 컸다니 순간 무슨 모형을 갖다 놓은 줄만 알았다. 어떤 종류의 부엉이인지, 아니 부엉이가 맞는지조차 모르겠지만 하늘에 나는 새가 실제로 가까이 보면 이렇게 거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난다. 


저자가 아주 어린시절부터 탐조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마이아로즈의 아빠와 엄마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열렬한 탐조인이었기 때문이다. 크레이그 탐조대라고도 명명할 수 있는 탐조인 가족들은 새를 향한 어마어마한 사랑으로 전세계 7대륙 40개국을 누비게 된다. 이 가족의 이동 목적은 단 하나, 새로운 새를 탐조하기 위한 불편하고도 복잡한 여정을 멈추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열정적으로 몸을 불사르는 이들이 부럽고 신기하게 여겨졌다.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어느 정도의 단념과 포기가 수반되기 마련인데, 크레이그 가족 같은 이들은 그런 장애물을 보란듯이 거둬내고 무조건 앞으로 진격한다. 새로운 새를 보기 위한 미친듯한 열정에 존경심이 들 정도이지만, 저자의 책이 더욱 큰 감동과 놀라움을 선사하는 것은 이 책이 단지 새로운 새를 보고 난 이후의 보고서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주 어린시절부터 새를 탐조해온 마이아로즈는 자연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 자체가 아예 없는 사람처럼 인간과 공생해온 수많은 생물의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탐조를 다니며 멸종 위기에 처한 새를 확인하게 되고, 희귀종이 점차 늘어나는 이유는 새의 거처가 줄어들게 만드는 인간의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 때문임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자연을 탐사한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인데,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문적인 탐조인과 멸종 위기에 처한 새를 구조하고 보호하기 위한 활동을 하는 이들이 거의 대부분 백인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다양한 종류의 새를 보호하기 위해서 더 먼저 확립되어야 할 것은 탐조인의 구성에서부터 가시적 소수 인종이 배제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천명하게 된다. 새는 백인 남성의 거주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전세계 어느 곳에든 퍼져 있기에 새가 살아가는 모든 곳에 거주하는 소수 인종 또한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당한 창구가 개설되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저자가 언급한 가시적 소수 인종이라는 말 속에 담긴 유색 인종에 대한 극심한 차별과 이슬람교도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성 또한 포함되어 있기에 마이아로즈의 탐조인으로서의 한 걸음 한 걸음은 단지 아직 보지 못한 새를 보고 기록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경제적 지위와는 무관하게 지구상의 모든 이들이 자연에 대한 공통된 책임이 있음을 공표하고 있다. 


마이아로즈가 그레타 툰베리, 말랄라 유사프자이 등과 더불어 기후 위기에 대한 운동과 성명을 발표하는 운동가로서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크레이그 부부의 무한한 응원과 지원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책을 읽는 내내 안쓰럽게만 다가오는 마이아로즈의 엄마인 헬레나의 양극성 장애는 가족이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인 탐조 여행을 통해 가족의 끈끈한 사랑을 이어갈 수 있다는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조증과 우울증을 오가며 자살 충동을 느끼며 시도하려는 의도조차 마이아로즈와 아빠의 헌신적인 관심과 사랑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새에 대한 엄청난 열정을 가진 저자임에도 엄마가 완전히 병이 나을 수만 있다면 단숨에 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고백은 묵직한 감동과 더불어 크레이그 가족의 탐조 여행은 단지 새를 보는 과정이 아니라 정신분열증을 앓는 엄마를 포기하지 않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는 시간이었다. 얼마나 많은 갈등과 슬픔의 시간을 보낸 것인지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견뎌낸 고통의 시간은 기다리던 새를 마주했을 때의 희열로 충분히 보상되는 것 같았다.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 저자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무척 짧은 것 같지만 저자가 새를 만나며 엄마를 돌본 시간을 따라가보니 우리 삶은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감동받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충분한 시간을 충만한 시간으로 바꾸기 위해 때로는 침묵하고 기다리며 반가운 만남이 남길 여운을 고대해본다. 


"나는 여러 활동과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가시적 소수 인종'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했는데, 이 개념이 자연을 다루는 분야에서 특히나 유용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가시적 소수 인종은 간단히 말해 자기 자신을 비백인으로 간주하는 인종 집단을 일컫는다. 흑인, 아시아인,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BAME라는 용어가 더 일반적이지만, 이 분야에서는 그다지 유용한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야외로 나가 자연을 즐기는 데 있어선, '소수민족'일지라도 백인일 경우 현실에 존재하는 장벽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피부색이 달라서, 다른 모든 이들과 다르게 생겨서 존재하는 장벽이다.(268)"


#마이아로즈크레이그 #버드걸 #문학동네 #MyaRoseGraig #Bird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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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파란, 나폴리 작가의 작업 여행 1
정대건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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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건 작가의 [나의 파란, 나폴리]를 읽었다. 안온북스 작가의 작업 여행 01 이다. 제주도의 서쪽 끝에 사는 사람이 정반대에 있는 성산일출봉을 가 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조금 과장된 얘기일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자기가 사는 곳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을 가지 않고 일평생 살아간 사람들도 있다. 여행과 새로운 만남, 해보지 않은 것을 도전하는 경험이 필수적인 삶의 요소로 등장하는 시대이지만 그런걸 하지 않았다고 삶이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 저기 해외 여행을 많이 다녀온 사람들이 자랑이랍시고 떠벌이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나도 모르게 속에서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반발심이 솟구친다. 그리고 위선자처럼 '지금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여행 따위를 다녀왔다고 자랑을 하다니 한심하다 한심해'라는 비열한 사고를 작동시킨다. 아마도 나는 지금 어딘가 무척이나 가고 싶은가보다. 


포지타노의 레몬, 쏘렌토의 아기자기한 기념품 숍, 아말피 해안도로의 깍아지는 절벽도로, 폼페이의 흙색 유적들을 지나쳤음에도 나폴리는 인연이 없었다. 나폴리에서 출발한 유로스타를 수없이 탔음에도 언제나 돌아오는 종착지는 로마였다. 로마 밑으로는 가고 싶지도 않았고, 아는 사람도 없었으며, 가야 할 일도 없었다. 아마도 나에게 있어 제2의 고향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은 북부의 베로나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저자의 나폴리 찬사를 읽다보니 나폴리를 다녀가지 않은게 무척이나 아쉽고 후회스러웠다. 그때는 왜 그렇게 편견을 가지고 남부 이탈리아를 바라봤을까, 사실 개똥과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건 이탈리아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직업이 작가이지만, 작가라고 해서 아무 때나 쉴세없이 영감이 떠오르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작가들이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낯선 곳에 머물며 스스로의 몸을 조금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글쓰기의 예리한 감각을 되살리기 위한 시도이지 않을까란 나의 예상은 이번 책을 읽으며 완전히 빗나갔다. 작가에게 있어서 글감을 찾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리라. 나폴리에서 석달 간 지낸 저자는 마치 운명적인 피정의 시간을 보낸 것처럼 집돌이로 지내며 외부의 만남을 주저한 이유를 깨닫게 된다. 나폴리를 떠나기 전날 전망대에 올라 갑작스런 울음을 토해내며 응어리진 무언가가 풀어지는 경험을 전해준다. 어릴 때 친구로부터 외면당한 작은 상처 이후 거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저자의 마음을 오랜시간 지배해 왔기에, 나폴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보여준 환대의 순간들은 나폴리가 언제나 그립고 정겨운 고향의 맛과 향기를 지니게 해주었다. 


안부가 궁금한 사람에게 잘 연락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에,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끝없이 외롭고 쓸쓸했다는 말에 뜻밖의 위로를 얻게 된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덜컥 나의 몸을 내어놓을 수 있다는 점에 박수를 보내드리게 된다. 그리고 그 용기로 인하여 어딘가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무상의 환대를 충만히 받고 왔음을 읽게 되어 기쁘다. 


"예전에는 이야기가 그저 도피처와 위안이 되어주는 정도만 되어도 훌륭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훌륭한 이야기는 단순한 도피 이상이다. 앞이 깜깜해 행복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행복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력을 줄 수 있다. 그 상상력은 정말로 사람의 선택을 바꿀 수 있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 내가 사랑한 이야기들은 내 인생이 긍정적인 쪽으로 헤엄치도록 경로를 바꿨다. 나는 이야기의 세계에 큰 빚을 졌다.(178)"


#정대건 #나의파란나폴리 #안온북스 #작가의작업여행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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