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고 앉아 있네 - 문지혁 작가의 창작 수업
문지혁 지음 / 해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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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 작가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를 읽었다. 제목부터가 왠지 모르게 스스로를 디스하는 비아냥의 뉘앙스가 담긴 재미와 더불어 '그래 말 그대로 글을 쓰려면 앉아 있어야 하지'라는 당연한 귀결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람마다 책을 고를 때의 취향은 각양각색이겠지만, 아마도 단연코 소설이 가장 많이 읽히는 장르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당근 제일 재미있으니까, 근데 재미만 있는 게 아니라 재미를 뛰어넘는 감동과 깨달음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소설은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이지만 심지어 SF소설의 등장인물도 우리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소설을 읽다보면 겉모습만 보고 지나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숨겨진 삶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때가 많다. 사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몇 배는 힘들다. 그러다보니 친한 사이라도 해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는 때가 많고, 그러다보니 나중에 시한폭탄이 터지듯 고름이 터져나오는 고통을 마주하고서야 왜 자기한테 자세히 말하지 않았느냐는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사람들의 속내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게 된다. 아무리 외향적인 사람들이라도 부턱대고 자신의 상처와 아픈 과거를 손쉽게 드러낼 수 없다. 뭔가 계기가 있어야 하고 적절한 타이밍과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을 만한 신뢰의 관계가 형성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데 쓸데 없는 소리를 늘어놓다가 기회를 놓치기가 일쑤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상상하며 내 주위의 사람들을 한 명씩 대입시켜 보곤 한다. 가끔씩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평소에 아예 재쳐놓았던 부류의 사람들이 갑자기 떠오르며 그런 황당한 행동은 어쩌면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사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란 미약한 이해의 마음이 동하기도 한다. 


엊그제 저녁 8시가 지난지 얼마되지 않아 평소 듣던 라디오에서 갑자기 한강 작가의 이름이 거론되며 축하드린다는 인사가 들려왔다. 설마하는 마음에 검색창을 열어보니 그야말로 오 마이 갓! 노벨문학상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싶어 줄줄이 이어지는 단신들을 살펴보았다. 이튿날부터 대서특필된 한강 작가님에 대한 기사는 메인 페이지를 도배하기 시작했고 서점가에서는 한강 작가의 책이 없어서 못팔 정도라고 한다. 어떤 분의 인터뷰 대답처럼 우울한 소식만 이어지던 우리나라의 요즘 현실에 가뭄에 단비가 내리듯 정말 오랜만에 흐믓해지는 소식이라는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인스타그램의 기성작가들은 거의 다 한강 작가의 사진을 올려 축하의 인사말을 전하고 노벨문학상을 원어로 이미 읽었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뿌듯해했다. 평소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책이 번역되어도 거의 읽지 않았는데, 나 또한 이미 읽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생경한 기분이다. 


노벨문학상을 계기로 독서의 붐이 일었으면 좋겠다. 요즘 MZ 세대에는 또 다른 유행으로 독서모임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골린이, 테린이처럼 단명하지 말고 책린이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면에서 [소설 쓰고 앉아 있네]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한 번쯤은 꿈꿔봤을 소설 쓰기에 대한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따끔하게 정석의 길을 보여주는 안내서처럼 다가왔다. 다 읽고 나니 다시 한 번 드는 생각은 정말 소설가들은 대단한 분들이구나, 애시당초 이렇게 긴 호흡의 글을 상상해서 쓴다는 것은 정말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구나 라는 처음의 결론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책머리를 읽을 때에는 아주 희미한 희망이 엿보였지만 책장을 덮으며 충실한 독자로 남기를 결심하게 된다. 이렇게 리뷰를 남기는 것으로 저자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한다. 


"그렇다면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처음부터, 단번에, 쉬지 않고 좋은 글을 쓴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에는 쓰레기와 다르지 않았던 우리의 글을 얼마나 어떻게 고쳐서 좋은 글로 만들 수 있느냐에 관한 일입니다. 

작가가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초고는 다 비슷하게 별로입니다. 이를 누가 더 많이, 오래, 될 때까지 끈질기게 고칠 수 있느냐가 우리를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로 나누는 기준입니다. 초고의 완성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고치기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글을 쓰는 작가는 천재나 괴짜나 돌연변이가 아닙니다. 좋은 작가란 긍정적인 의미에서 직장인과 같아요. 매일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에서 일정하게 쓰고, 일정하게 좌절하고, 일정하게 고치는 사람만이, 그 길고 건조한 무채색의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마침에 좋은 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29)"


이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천부적인 재능만으로는 숙련되고 노련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부단히 자신을 부수고 무척이나 지루한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자신을 감싸고 있는 두터운 위선의 탈을 벗고 나올 수 있다. '고치기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누군가 지적을 한다면 그건 더욱 견디기 힘든 모멸감을 가져온다. 때로는 분노에 이르고 이성을 잃어 비논리적으로 자신의 정당함을 고집한다. 그리고 결국 지금보다 한 걸음 뒤로 퇴보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은 퇴고가 원고를 '고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고친다는 건 때로 막막하고 불투명하고 추상적인 작업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퇴고라는 단어의 연원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 작업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밀 퇴와 두드를 고.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하는 것입니다.(251)"


#문지혁 #소설쓰고앉아있네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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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10-18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좋았습니다~
 
미래의 자리 소설Q
문진영 지음 / 창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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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진영 작가의 [미래의 자리]를 읽었다. 창비 소설Q 시리즈 작품이다. 요즘 MZ라는 말이 유행이다. 세대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과거에도 그래왔듯이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을 응근히 비꼬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어차피 시간은 흐르고 또 다른 세대 교체가 당연함에도 이미 익숙한 것에 길들여지면 새로운 변화는 낯설고 잘못된 것이라는 손쉬운 판단을 내리게 만든다. 90년대 생이라는 말과 결합된 MZ세대는 기존의 사회관습을 부정하는 몹시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것으로 단정짓는 결론이 많다. 기존의 가난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살아온 이들과는 전혀 다른 시대적 배경을 타고 살아왔기에 그들은 몹시 이기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먹거리가 풍부하고 교육열은 하늘을 찌르고 부로 계급이 편성되는 시대에 인터넷으로 노출된 형제가 없는 거의 대부분이 독자인 이들에게 과거의 세대조차 보편적으로 탑재하지 못한 아량과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기이한 기대가 아닐까. 


소설 속 주인공들의 연령이 96년생이라고 저자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아마도 지금의 대학생들은 4. 19와 5.18 기념식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을 기억하기 위한 행사에 참여해 본 적이 거의 없을 것 같다. 80년대의 젊은이들과 지금의 젊은이들이 겪은 시대의 상처를 저울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때의 상처와 고통이 크다고 말할 수 없다. 군부독재 치하에서 고문을 당하다 죽은 열사를 기억하며 전국의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분노할 수 있었던 공통의 목적이 있었다. 언제 어디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린치를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외면할 수 있는 정의로움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묵묵히 부끄러움을 삭힐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를 겪은 지금의 젊은이들은 분노할 수 없다. 그들의 죽음에 함께 아파하고 부당한 사회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몹쓸 말이 들려온다. 


분노와 정의로움이 당당히 받아들여지는 시대에는 육체적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정의는 사라지고 오로지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들의 팔렴치한 모습을 동조하며 이성이 마비된 뻔뻔한 이들의 냉혹한 말들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몸에 보이는 상처가 아니라서 어디에 약을 발라야 새살이 돋아날지 알 수가 없다. 더 이상 숨을 쉬게 만들지 못하는 유독 가스를 들이킨 것처럼 독약을 묻힌 것 같은 그들의 혓바닥에서 나오는 말들은 이 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을 쓰러뜨렸다. 


지해가, 자람이, 나래가 기억하는 미래가 그랬던 것 같다. 누구보다도 상대의 마음과 감정을 세밀히 잘 살필 줄 알았던 미래가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자신에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의아해한다. 


"그냥, 나는 가끔 너무 이상한 기분이 들어. 

언니. 나는 가끔 어떤 순간이 너무 아름답다고 느끼면, 어떤 열망에 사로잡힐 때면, 모르는 얼굴들이 떠올라. 왜 나는 여기 있고, 누구는 없지? 그런 게 이상해. 나는 왜 살아 있지? 

세상이 미쳐 날뛰는 것 같다가도, 근데 왜 이렇게 아름답지? 그런 생각이 들고, 웃다가도 갑자기 죄책감이 들고, 슬퍼할 만한 걸 슬퍼하다가도 나한테 그럴 자격이 없단 생각을 해. 

그렇게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걸 나도 알아. 그래서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싶다가도 내가 뭘 할 수 있지, 그런 생각으로 바뀌고. 내가 너무 먼지 같다가도 또 가끔은 우주만큼, 너무 커다랗게 느껴지는 거야. 그러다 아, 그 사람도 우주였는데, 그리고 또 누가 그 사람을 우주만큼 사랑했을 텐데. 그런 생각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야.(210-211)"


슬픔과 애도의 시간이 점점 짧아짐을 강요받는 것 같다.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거냐고 채근대는 시선에 몸과 마음을 어디론가 숨기고만 싶어진다. 미래가 떠나고 나서 지해가 그랬듯이 '뭐 해?'라는 자람의 물음에 '그냥 있어'라고 대답할 수 없는 마음을 헤아려주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시대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시간을 써야 하는 것인가?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그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닐텐데, 슬픔이 그칠 때까지, 그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냥 묵묵히 기다려주는 것이 우리가 보내야하는 시간이 아닐까. 


#문진영 #미래의자리 #창비 #소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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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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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작가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읽었다. 처음 제목만 봤을 때에는 식물 키우기의 일가견이 있는 저자가 [식물적 낙관]처럼 식물에 관련된 사건을 풀어나가는 미스터리가 아닐까 예상했었다. 하지만 첫 장을 읽으면서 [경애의 마음]에 이어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킬 빼어난 작품이 되지 않을까란 기대를 품게 되었다. 때마침 책을 읽기 며칠 전에 창덕궁 돌담벽 앞 건물에서 열린 북토크에 다녀왔던터라 그전까지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원서동이 어딘지도 몰랐던 처지에서 순식간에 영두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공간적 우연까지 겹치게 되었다. 


소설을 접할 때마다 자주 느끼는 바지만 특히나 김금희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세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을까'란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바쁘게 살다보면, 상처가 깊어지면 힘들고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을 자기자신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두렵기때문에, 시간을 거슬러 나를 힘들게 했던 장면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는 것 그 자체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로지 나의 머리와 마음 속에서만 재생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난이 섞인 재판정의 목소리가 멈추지를 않는다. 하지만 이번 작품 속에서도 영두의 마음과 영두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만들어주는 영두의 생각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쳐다보기도 싫은 과거의 나를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용기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주인공인 영두는 강화 석모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중등 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된다. 영두가 보낸 유년 시절은 시간적으로 아주 오래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석모도와 서울의 괴리감 때문인지 리사의 빽이 영두를 보고 촌에서 온 애라는 표현은 50년도 더 된 옛날을 배경으로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낯설었다. 어쩌면 지금도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방의 아이들을 촌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영두는 할머니와 친분이 있는 원서동에서 낙원하숙집을 운영 중인 문자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 하숙집에서 영두는 할머니의 손녀 리사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고, 리사가 문자 할머니와 피가 섞인 손녀가 아니라지만 지난치게 냉랭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리사의 성격은 언젠가는 영두와 큰 마찰을 빚게 될 것이라는 기시감은 대온실 수리 보고서 작성을 위해 원서동에 가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영두의 주저함의 원천적인 이유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영두는 석모도의 철새 흰꼬리수리와 흰죽지수리에 대한 홍보 자료를 쓴 덕분에 석모도 헤밍웨이라는 호칭으로 바위건축사무소에서 발주를 딴 내 창덕궁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작성하는 계약직을 제안받게 된다. 영두에게 큰 상처를 주고 학교를 중퇴하게 만든 원서동의 암울한 기억을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건축사무소에 만난 작도의 신 은세창과 제도의 신 제갈도희를 만나면서 서서히 일을 맡는 것으로 기울게 된다. 특히나 영두가 인간을 가장 좋아하는 새로 대표되는 곤줄박이에 견줄 만큼 성격이 좋은 제갈도희의 정의로움과 다정함은 읽는 내내 상쾌한 기분을 유지시켜 주었다. 왠지 모르게 바위건축사무소의 직원들은 하나같이 다 함께 일하면 참 좋을 것 같은 성정의 인물들로 비춰져서 동궐사무청 장과장의 비열한 모습과는 너무나도 상반되게 다가왔다. 


본격적인 대온실 수리가 시작되고 보고서 작성을 위해 문헌을 살펴보던 영두는 리사와의 뼈아픈 추억을 상기하며 문자 할머니의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어째서 문자 할머니의 집은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것일까란 의문과 더불어 일본 사람이었던 할머니는 왜 홀로 이곳에 잔류하게 된 것일까라는 궁금함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될 무렵에 지어지기 시작한 대온실의 역사과 맞물려 해방과 한국 전쟁이라는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과 나란히 숨겨진 사실들이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두가 제갈도회의 대온실 밑 지하에 배양실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과 더불어 대온실을 건축했던 후쿠다 노보루의 포도에 대한 열정이 담긴 이야기와 대온실을 담당했던 조선인 이창충과 박목주에 얽힌 사건들의 전개는 마치 땅 밑에 숨겨진 미스터리가 하나씩 풀리듯이 긴장감을 고조시켰는데, 영두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 작성을 위한 작업 중간에 삽입되는 영두와 리사의 낙원하숙 시절 이야기는 최고조로 올라간 긴장감을 완화시키며 영두가 비교적 집요하게 대온실의 역사를 샅샅이 살펴보는 이유를 짐작케 해준다. 


영두와 리사의 분노를 유발케 하는 억울한 사건은 영두를 병들게 하고 급기야 모든 것을 내려놓는 단계이 이르러 영두는 석모도로 돌아가게 된다.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 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왔지만 이 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년 남짓의 내 임시 일자리가 있었고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었고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 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이 있었다.(17)" 아직 아물지 않은 영두의 상처는 대온실과 하숙집을 마주하며 조금씩 치유되어 가고 대온실이 품고 있는 묵직한 비밀과 리사가 준 냉담한 상처로 내려간 온도가 석모도의 친구 은혜의 딸인 산아와의 대화 속에서 드러나는 본래의 정감으로 제자리를 찾게 된다. 


영두는 대온실과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다가 아랑 해설사의 도움으로 일본에 있는 당시의 자료를 구할 수 있게 되고 문자 할머니가 마리코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잡지에 대온실과 관련된 글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째서인지 마리코는 창씨개명한 양아버지인 기노시타 박목주와 동생과 함께 지내다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그때까지 조선말을 할 줄 몰랐던 마리코는 보모였던 두자의 도움으로 오로지 살기 위해 조선말을 배우게 되고 일본 이름을 버리고 박진리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해방과 더불어 왕실의 재산을 국유화하는 과정에서 여러 비양심적인 관리들의 부폐한 비리가 벌어지고 박목주의 상관이었던 이창충은 그 누군에게도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 주도면밀함으로 종국에는 박목주의 입을 닫기 위해 그를 죽이기까지 한다. 북한군의 남하로 피난을 가야하는 상황에도 상관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출장을 떠났던 박목주는 마리코가 보는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마리코는 열이 난 동생을 살리기 위해 혼심을 기울이다 동생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이창충에게 잿물이 담긴 주사를 눈에 찔러 복수를 감행하게 된다. 


문자 할머니의 죽음 이후 낙원하숙을 팔아 한 몫을 챙기려는 리사와 할머니가 보육원에 기증하려 했다는 도장이 찍힌 글로 인해 소송은 진행중이었고, 영두가 지난 날 일수를 받으러 갔을 때 문자 할머니가 사용했던 도장이 찍힌 수첩을 찾아내어 리사의 욕심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대온실의 지하를 장과장 부재 중에 파서 그곳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확인하려 했던 영두와 제갈도회는 그곳에서 사람뼈가 나오면서 무척이나 심각한 사안으로 변해버린다. 공사가 정지될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건축사사무소 소장과 장과장은 불같이 화를 내게 되고 영두는 대온실 수리 보고서의 담당자에서 제외된다. 영두는 혹시나 마리코의 동생 유진의 뼈가 아닐까 걱정하지만 보육원 원장님을 만나고 문자 할머니의 동생이 유진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게 기적일까! 영두는 기억이 가물해지는 유진 할아버지를 만나 누나를 기억하는 내용을 전해듣게 되고 어이없게도 아버지를 죽인 원수인 이창충이 죽는 날까지 호위호식을 누리며 살았고 유진 할아버지조차도 그를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연을 알게 된다. 


사실 영두에게는 리사가 낙원하숙을 상속받는지 못받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두에게는 리사와 빽이 준 상처로 인해 문자 할머니에게 조차 닫아두었던 마음의 문을 비로소 문자 할머니의 마리코 시절의 과거를 마주하면서 온전히 열수 있게 되었고 이해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두가 구원을 뜻을 수난이 그치는 것이라 설명하는 장면(158)과 낚시꾼 청년의 설화가 의미하는 바를 할머니에게 듣는 장면(402-403)은 시대와 사람을 거슬러 언젠가는 모질어진 마음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 저자의 말이 전해준 '이해한다'는 말에 담긴 무게가 더더욱 깊이 와닿는다. 


"인물의 동작과 옷차림, 말씨, 표정, 거리의 활기와 적막, 집 안 마루의 감촉과 대온실의 유리창과 대나무밭, 긴 잎의 바나나와 맹수사의 동물들, 풍랑에 흔들리는 상선과 눈 쌓인 피난길에 서로의 안전을 당부하는 불안한 얼굴들, 패전의 무게를 지고 남하하는 이들의 걸음걸이.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모색을 했는가를. 그래서일까. 작업을 하는 동안 어떤 소설보다 '이해한다'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는걸 깨달았다. 도서관과 공유 오피스와 카페를 전전하며 자료들을 읽다가 마침내 이해에 다다르면 슬픔이 차올라 자리를 박차고 나와 걷던 시간들이 이 건조한 목록에 담겨 있다. 내가 한 이해는 깨진 유리 파편처럼 그 시절을 자그맣게 비출 뿐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한참을 걸어야 감정이 식을 만큼 너무나 생생한 것이었다. 나는 자주 기도했다.(409-410)"


"아니란다. 영두야, 그건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들이 언제나 흐르고 있다는 얘기지.

세상 어딘가엔 지금이 아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403)"


#김금희 #대온실수리보고서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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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찰란 피크닉 오늘의 젊은 작가 45
오수완 지음 / 민음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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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완 작가의 [아찰란 피크닉]을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45번째 작품이다. 2100년이라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결코 볼 수 없는 시대를 배경으로 아찰라 공화국이라는 나라를 중심으로 십대 청소년들이 종평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피라미드 안으로 입성하기 위한 마지막 피날레인 피크닉을 향하는 내용이 펼쳐진다. 피라미드인 헤임에 들어가기 위한 '종합 적합도 평가'이라는 이름의 최종 시험은 마치 우리나라 현실의 입시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아 소설 속 배경과 설정은 모두 가상의 미래를 가정한 상상의 산물이지만 계속해서 읽다보면 이건 꾸며낸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우리 삶의 현실을 민낯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입시를 앞둔 시기에 학교에서 성적으로 우열을 매겨 특별반을 편성했던 기억이 난다. 전교 등수를 기준으로 소수의 학생들만을 모아 방과 후에 따로 수업을 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학교의 명예가 무엇보다고 중요하게 여겨졌기에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도록 특혜를 주었던 것이다. 아마도 지금은 공교육의 장에서 그런 차별적인 구분을 짓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이미 사교육 시장이 너무나도 확고하고 두드러져 쪽집게 도사가 있는 좋은 학원을 다니며 되는 일이기에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대학은 출세를 위한 아주 기초적인 스펙으로 인정되지만 안정되고 높은 보수를 보장하는 좋은 일자리는 소수에 불과하기에 대학 졸업 이후에도 거쳐야 할 과정은 피라미드처럼 높고 가파르기만 하다. 


아찰라 공화국은 이미 예견되고 있는 것처럼 전쟁과 환경오염과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적인 재편이 이루어진 나라의 형태이다. 아찰라 안에는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 헤임이라는 피라미드가 존재하고 헤임에 들어가진 못한 이들은 그나마 장벽의 보호를 받으며 언제 아찰이 될지 모르는 운명을 안은 채 살아간다. 아찰이 된다는 것은 몸에 생긴 종양이 늘어나 종국에는 몸의 크기가 커지고 살이 터지는 끔찍한 변화를 거듭하여 아찰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쫓겨나게 되고 경비대의 감시에 놓이게 된다. 아찰이 된 이후에는 인간과의 적절한 소통은 불가하며 인간에게 공격적일 수 없다. 아찰 중의 과거의 악한 일로 수라가 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수라는 경비대를 공격하는 폭력적 성향을 갖고 있기에 소설 속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아찰란 공화국에서 최종 종평을 앞둔 7명의 아이들이 한 명씩 소개된다. 마치 현실의 학교에서 등수를 매기는 것처럼 종평에서 1등을 한다면 꿈에 그리던 헤임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얻을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아이들은 목숨을 건 레이스에 돌입한다. 이미 종평 등수가 좋지 않아서 애초에 포기해버린 아이들도 있지만 7명의 아이들은 피라미드를 오르는 피크닉이 다가올때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아란, 요제, 네즈, 디본, 카렐, 히에, 이투 이렇게 7명의 소년 소녀들은 낯선 이름을 가진 먼 미래의 가상 인물처럼 들리지만 실상 이들 삶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고민하고 갈등하다 다투고 화해하는 과정은 지금 우리 아이들의 모습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7명의 사연과 사건들을 묘사한 내용을 따라가다보면 청소년 소설을 읽는듯한 기분이 들지만, 이들의 고민은 결국 경쟁사회에 길들어져 무엇인 문제인지 돌아볼 여유도 없이 옆을 가린 경주마처럼 무한 질주해온 기성세대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특히나 7명의 아이들의 가족 중에 누군가가 종양이 늘어나 갑자기 아찰이 된 이후의 변화는 점점  심각해지는 계급의식과 종적으로 나는 특별한 그룹에 속해 있다는 오만한 생각이 어떤 차별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마치 오래전에 나병에 걸린 사람들을 몹쓸 병에 걸린 멀리해야 할 천한 이들로 바라보았던 비열한 시선처럼 오늘날에 이르러 아이들의 시선에는 새로운 기준법이 생겨나고 있다.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여 아찰처럼 거리를 헤매는 이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몰아넣고 피라미드처럼 더러운 공기는 한 줌도 머물 수 없는 청결한 공간에서 고결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이들의 무한경쟁터가 더 이상 소설 속의 가공한 무대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피크닉이 시작되어 피라미드를 오르는 7명의 아이들은 서로를 앞지르기 위한 경쟁에 돌입하다가 갑작스레 경보가 울리며 수많은 아찰들이 나와 피라미드의 유리를 몸으로 닦는 모습을 보게 되고 공격적인 성향의 수라가 나타나 피크닉은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카렐과 이투는 수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달려들지만 수라의 엄청난 파워를 당해내지 못한다. 하지만 이렇게 아이들이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으로 인해 무조건 종평 1등을 받아 헤임에 들어가는 것을 인생의 최종 목적으로 생각했던 철옹성 같은 이기심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 피크닉을 통해 7명의 아이들은 반드시 누군가를 이기고 위에 올라서야만 성공한 삶으로 행복을 누리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지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헤임과 아찰라에 머무는 이들을 구분짓는 피라미드와 아직 종양이 나타나지 않아 일반 시민의 삶을 사는 이들과 아찰이 된 이들을 구분짓는 구역과 최종적으로 장벽이라는 울타리로 아찰라 공화국 모든 이들을 감싸고 있는 것은 함께 공존할 수 없다는 심각히 기울어진 편협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수완 #아찰란피크닉 #민음사 #오늘의젊은작가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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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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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작가의 [빛과 멜로디]를 읽었다. 세계는 지금 전쟁 중이다. 어딘가에선 폭탄이 떨어질까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차가운 습기가 내뿜는 지하 방공호의 시멘트 위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세우고 있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연휴를 잘 보냈냐는 살가운 인사만이 오갈뿐이다. 최근 개봉한 넷플릭스 신작 [무도실무관]에서 주인공이 전자발찌를 제거하고 도주하여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다 칼에 찔려 죽을 위기를 가까쓰로 넘기게 된다. 의당 아버지는 펄펄 뛰며 아들이 다시는 그럼 위험천만한 일에 가담하지 않기를 바라게 되고, 도망간 범죄자를 쫓으려는 아들을 막아선다. 


그때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3달 전의 나는 전자발찌가 뭔지도 몰랐어. 근데 이제 다 알아. 너무 많이 알아. 내가 배운걸 잊을 수 없잖아. 내가 그날 구해 줬던 그 애는 사람이 무서워서 아직 밖에도 못 나온데. 걔 10살이야 겨우. 근데 그 어린애가 너무 큰 상처를 받아서 이미 마음을 닫아버렸어. 그리고 오늘 내가 뭘 알게 됐는지 알아. 그 악마 같은 새끼가 또 다른 애를 다치게 했다는 거야. 모르면 상관없는데, 그걸 이제 내가 다 아는데 어떻게 가만있어?"


우리는 지금 지구 저편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간간히 전해오는 뉴스를 통해서 심각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과는 다르게 알면서도 가만히 있게 된다. 이건 너무 먼 나라의 일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생업을 때려치고 그곳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내가 지금 그곳에 간다고 해도 도움될 만한 것이 없을테니까. 너무나도 자명하고 현실적인 비겁한 이유들을 백만개 정도 만들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며 영화를 보며 약자를 보면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온전히 자신을 내던지는 이들을 생각하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인 권은과 승주는 다큐멘터리 인터뷰로 재회하게 된다. 권은은 한 눈에 승주를 알아보지만 승주는 권은을 기억하지 못한다. 학교에 며칠 째 결석한 권은을 찾아가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반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마지못해 마주한 권은의 현실은 이불 속에서 스노볼 빛과 멜로디에 의지해 떨고 있는 작은 소녀의 애처로움이었다. 이후 승주는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권은에게 이것 저것 먹거리와 필요한 것들을 가져다 주고 종국에는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와 장롱 속에 넣어둔 필름 카메라를 건네게 된다. 생의 의지를 서서히 소멸시키던 권은은 승주의 보살핌과 카메라로 인해 다시금 불을 붙일 수 있게 된다. 


권은을 기억한 승주는 인터뷰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 권은의 사고 소식을 접하게 되고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견디고 있는 나스차를 취재하게 된다. 나스차와의 화상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승주의 아내 민영은 어린 지유에게 행여나 불운이 끼칠까 두려운 마음에 남편 승주가 전쟁 지역의 여성과 인터뷰를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승주는 지유에게 좋은 것만을 보여주고 싶은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전쟁 중인 지역의 사람들을 외면하려고는 이기적인 민영에게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분쟁 지역을 활보하던 권은은 사고로 다리 한 쪽을 잃게 되고 사진가가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게리 앤더슨의 여동생인 애나 앤더슨의 초대로 영국에서 잠시 머물게 된다. 애나는 권은에게 아버지 콜린 앤더슨의 일생이 담긴 영상 제작을 부탁하게 되고, 권은은 파키슨병과 치매를 앓는 콜린과의 마지막 인터뷰를 진행하며 게리와 콜린과의 불화의 이유를 알게 된다. 콜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드레스덴 지역에 폭탄을 투하하는 전투기 조종사였기에 아들 게리는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무고한 민간인을 죽게 만든 것인지 인정하지 못하는 것에 분노하며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못한다. 하지만 게리와 콜린의 상처와 분노를 너무나도 잘 알았던 애나는 권은을 통해 시리아 난민인 살마를 딸처럼 보살펴 준다. 


게리 앤더슨이 만든 다큐멘터리 <사람, 사람들>에는 노먼 마이어라는 사람이 분쟁 지역에 구호품을 나르다 폭격을 맞아 죽게 되는 장면이 담기게 된다. 노먼 마이어의 어머니 알마 마이어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가게 되는데, 알마의 연인이었던 장 베른은 목숨을 걸고 그녀의 이주를 도와주지만 알마가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노먼이 사람을 살리는 일에 투신하게 된 것은 아버지 장 베른의 영향이었고, 노먼의 구호품 차량을 찍던 게리는 폐암 투병 중에도 분쟁 지역의 사진 촬형을 포기하지 않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분쟁 지역에 대한 관심과 염려가 아니었다면 결코 만날 일이 없었던 권은과 애나와 살마와 나스차의 만남은 우리 삶의 우연성에 대한 고찰을 불러일으킨다. 저자가 코멘터리북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번 작품을 마무리하기 위해 방문했던 런던을 떠나며 내 생에서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순간, 15년 전 [로기완을 만났다]를 위해 왔던 영국을 떠나며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고 말한다. "생에서 장담이란 정말이지 쓸모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은 순간이었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가지 지역은 아마도 절대로 갈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짓는다. 시리아의 난민들이 고국을 떠나 작은 보트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몸을 실고 서유럽의 작은 섬에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들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국민들을 선동하는 이들의 배타적인 마음은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우리가 절대로 만날 일이 없고, 절대로 엮일 일이 없다고 장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런 비극적인 일일 발생된 것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해도, 죽어가는 이들을 외면하는 것이 아무에게도 비난받지 않는다고 해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려 한다. 


결국 사람을 살리는 일은 사람의 몫이라는 것을 말이다. 승주의 작은 관심과 배려가 죽고 싶던 권은을 살리게 했고, 권은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의 선택은 시리아 난민 살마와 애나를 연결시켜주고 살마는 우크라이나 여성 나스차를 같은 방식으로 구해준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나와 무관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지 않을까.


"태엽이 멈추면 빛과 멜로디가 사라지고 눈도 그치겠죠.(45)"


"가령 미국의 폭격에 많은 국민을 잃은 이라크는 다른 곳에서는 쿠르드족을 죽였다. 삼백 년 넘게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를 받은 인도네시아는 약국의 슬픔을 어느 나라보다 잘 알 텐데도 동티모르를 공격했고 인구의 사분의 일 이상을 학살했다. 이십 세기 들어 가장 처절한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들은 테러리스트를 차단하고 솎아낸다는 명목을 내세워 그 위로 고압 전류가 흐르는 팔 미터 높이의 장벽을 세웠고 가자지구에 주기적으로 폭탄과 미사일, 로켓을 투하해왔다. 무기에는 테러리스트와 민간인을 식별할 능력이 없는데도,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을 한 명이라도 죽이는 게 꿈인, 고작 그런 것을 꿈이라고 믿는 소년과 소녀들을 키워낼 뿐인데도, 그들 중 일부는 몸에 폭탄을 두르고 이스라엘 군인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테러가 아니라 신앙이라고, 아니, 사랑의 경지라고, 자신의 몸이 신전이 되어 순교할 기회를 얻은 것뿐이라고,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176-177)"


#조해진 #빛과멜로디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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