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리크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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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뮈소의 [안젤리크]를 읽었다. 해마가 겨울이 오는 길목에 기욤 뮈소의 신작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옮긴의 말에 나온 것처럼 바로 전 작품인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에 대해 쓴 올해 초의 리뷰를 보니 후속편에 대한 기대감을 느끼며 "라파엘이 베라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본다"라고 씌어 있는데, 아마도 그 후속편은 다음을 기약해야 하나보다. 이번에는 몇 년 간 지속된 작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리즈도 아닌 새로운 포맷의 형태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제목에 '안젤리크'라는 이름이 사용되어 그녀가 주인공인 것 같지만, 오히려 마티아스 타유페르 전직 강력계 형사를 주인공으로 봐야한다. 소설은 커다란 쳅터의 제목으로 주요 등장인물인 루이즈 콜랑주, 안젤리크 샤르베, 마티아스 타유페르 이렇게 3명의 인물 이름을 사용하며 각 인물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으로 각 쳅터의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전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포맷을 사용하며 등장인물들이 스텔라 페트렌코의 추락 사고로 접점을 만들어가며 진행되지만, 전작들이 비해 긴장감이 상당히 떨어지고 유기적 연결점이 미비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오히려 전적들에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들어갔음에도 납들할 만한 개연성이 느껴졌지만, 이번 소설에서는 지금의 사회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사실적인 사건들을 소재로 했음에도 등장인물들의 연결이 뭔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나 루이즈 콜랑주인 17세의 소녀가 전직 강력계 형사보다 앞서 정보를 수집하고 마티아스조차 모르던 숨겨진 사실을 알아내는 것은 조금은 황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한 몇 가지 미비한 구성요소들이 그동안 다른 소설에서 보여줬던 기욤 뮈소만의 촘촘한 설계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려서 그런지 뒤로 갈수록 반전을 꾀하는 내용들이 전개되어도 더 이상 신선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설의 재미는 반감되었지만 그럼에도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바는 아마도 어쩌면 자기 자신의 노력과 의지와 무관하게 삶의 자리가 정해진 범부들에게 그럼에도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소설의 시작은 루이즈라는 소녀가 심장이식 이후 다시 입원한 마티아스 전직 형사를 위문하는 장면부터이다. 첼로를 껴며 환자를 방문한 루이즈에게 마티아스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어서 나갈 것을 종용하지만 루이즈는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마티아스의 곁을 맴돌며 자신의 어머니가 사고사로 죽지 않았음을 확인해달라고 부탁한다. 마티아스는 루이즈의 수사 의뢰를 통해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하지만 루이즈의 엄마인 스텔라 페트렌코의 사고 기사를 수집한다. 책 표지에도 에투알 무용수의 죽음 뒤에 숨겨진 비밀이라는 문구가 있기에 제목나 나온 인물인 안젤리크가 이 무용수이거나 무용수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이라고 추측하며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전개된 내용에서는 에투알 무용수인 스텔라는 소설에서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안젤리크 또한 스텔라와 관련이 깊은 인물 또한 아니었다. 만약 안젤리크가 스텔라의 치료를 전담하던 간호사의 휴가로 인해 일주일 동안 치료 업무를 대체하지 않았다면, 또는 스텔라와 같은 곳에 살던 마르코 사바티니가 코로나 19에 걸려 쓰러지지 않았다면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최근 나온 소설들 중에 상당수가 3년째 지속중인 코로나 19 사태를 간간히 언급하고 있다. 기욤 뮈소도 전세계를 마비시킨 전염병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었는지, 아니면 그 전염병에 대한 인간 사회의 변화를 언급하고 싶었던 것인지,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마르코가 병원에 실려가고 응급처치를 도운 안젤리크가 자신의 구질구질한 삶을 한 번에 바꿔버리고 싶은 욕망을 가능케 만든 바이러스 역할을 하게 된다. 안젤리크는 마르코가 아쿠아알타라는 이탈리아의 전도유망한 대단한 기업의 창업주 가족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마르코의 연인 행세를 하게 된다. 아들의 위급한 상태를 안젤리크를 통해 연락받은 비앙카 사바티니는 안젤리크의 말을 그대로 믿고 동행하게 된다. 하지만 마르코의 상태가 서서히 안정되어 간다는 소식을 들은 안젤리크는 이미 시작된 사기극이 드러나지 않도록 마르코의 병실에 몰래 들어가 심장에 무리가 가도록 약물을 주입해 죽게 만든다. 그리고 안젤리크의 사기행각을 눈치챈 스텔라는 안젤리크를 위협하게 되고 안젤리크는 스텔라마져 사고사를 위장해서 죽이고 만다. 


전직 형사인 마티아스는 조사를 통해 안젤리크를 의심하게 되고 루이즈의 개입을 막기 위해 그녀를 포박한다. 하지만 여기서 마티아스의 과거가 드러나고 루이즈가 알아낸 마티아스의 헤어진 연인에 대한 정보를 통해 어이없게도 마티아스는 루이즈로 인해 포박당하게 된다. 아무리 불시의 타격이었다고 해도 40대 초반의 전직 강력계 형사가 17세 소녀의 공격으로 정신을 잃게 된다는 설정은 뭔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이어지는 내용들이 긴급하게 흘러가기에 일단 결론이 무엇일지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루이즈에 고백한 마티아스의 비밀은 명예 법정의 결정을 따라 판결을 내리는 집행자의 역할이었는데, 갑작스럽게 무슨 비밀결사대를 조종하는 어머어마한 귀족 집단이 있다는 설정 또한 무리수처럼 느껴졌다. 


인간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법 체계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헌법의 가장 중요한 내용도 실질적인 사건의 내막에 이르렀을 때에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법대로 처리할 경우 엄청난 피해를 당한 이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아주 오래 전의 법처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처럼 보복의 논리로 처벌이 가능하다면 완전한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세상의 어딘가에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집단이 명예 법정이라는 이름으로 죄를 판결하고 벌을 집행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한과 울분과 복수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집행으로 인해 명예와 존엄함이 되살아날 수는 없다. 그것은 폭력을 폭력으로 맞선 이들이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자구책에 불과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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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 방법은 모르지만 돈을 많이 벌 예정 띵 시리즈 21
신지민 지음 / 세미콜론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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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민 기자의 [와인: 방법은 모르지만 돈을 많이 벌 예정]을 읽었다. 세미콜론 띵 시리즈 21번째 책이다. 지난 여름 아이스크림 편까지 출간된 띵 시리즈는 겨울을 맞아 특히나 어쩌면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에 늘어나는 모임에 와인에 대한 시리즈를 발간한 것은 시기적으로나 분위기상으로나 딱 맞는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띵 시리즈는 음식에 대한 내용이지만 각 주제의 음식에 별다른 관심이 없더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쓰여진 것 같다. 이번 와인 편도 꽤나 즐겁고 유쾌하게 읽혀 몇 번인가 와인잔을 들고 모임을 갖은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나 부제가 시사하는 바는 역시나 와인을 즐기기 위해서는 다른 술도 비슷하긴 하겠지만 돈이 많이 든다는 사실이 함정이기에 미묘한 재미를 선사한다. 마치 '그건 난 모르겠구 일단 와인을 즐기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선언이라고나 할까. ㅋㅋ


어찌보면 우리나라 지방 곳곳도 제대로 여행해 본적이 없는 나에게, 이탈리아 베로나라는 생소한 지명은 뭔가 나만 대도시와 동떨어진 시골 마을로 버려진다는 낙담을 가져오게 했다. 하지만 막상 베로나에서 어학과정을 하다보니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집중된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들이 통일된 나라여서 그런지 각 도시들 마다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개성이 넘쳐났다. 그리고 베로나는 결코 후미진 시골 동네가 아니었다. 람보르기니와 같은 수십억에 이르는 스포츠카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이탈리아에서도 부자 도시에 해당된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해마다 전세계 와인이 전시되고 시음을 할 수 있는 '비니탈리'라는 와인대회가 열린다. 기회가 되어 한 번 참석해 본 적이 있는데, 예전에는 무한대로 시음을 할 수 있었지만 내가 갔을 때에는 3잔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석 잔으로도 충분히 만취 상태에 이를 만큼 충분한 양을 시음할 수 있게 해줘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진짜 와인에 대한 앎이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뭘 마셔도 그게 그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머물던 기숙사에서 매일 거의 무료로 제공되던 다양한 와인을 쳐다보지도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해 겨울 인스부룩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오스트리아의 시골 마을을 둘러보다가 성탄절이 막지나고 새해를 맞이하기 전이라 그런지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있는 곳을 구경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매서운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려오는 차에 우리나라 노점상처럼 생긴 작은 이동식 마켓에서 커다란 잔에 무엇인가를 담아 팔고 있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커다란 잔을 들고 호호 입김을 불며 마시고 있기에 마치 홀린듯이 나도 한 잔 사서 맛을 보니 그게 바로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알려진 뱅쇼였다. 독일어를 쓰는 지역에서는 글루바인이라고 불리는 끓인 와인은 여러가지 마른 향신료와 과일을 넣고 끓여 도수를 낮추고 달달함을 더해 그야말로 추위에 얼은 몸을 녹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와인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다니 놀람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로마로 내려와서 겨울을 지내게 되면 뱅쇼나 크리스마스 마켓과도 같은 낭만적인 모습을 전혀 볼 수 없게 되었다. 로마의 겨울은 너무 따뜻해서 그리고 비가 너무 자주와서 와인을 데워마실만큼 춥지가 않다. 그래서 그런지 바티칸이 있는 성탄절은 뭔가 더 대단할 것 같지만 생각보다는 쓸쓸하고 휑한 느낌이 들곤 한다. 아무튼 오랜만에 오래전 애증의 추억이 담긴 베로나를 다녀올 수 수 있게 되었고, 기대했던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할 수 있었다. 로마와 거의 7-8도 이상 차이 나는 베로나의 쌀쌀함은 뱅쇼를 마시기에 적절했고, 와인이라면 프랑스에 절대 굴복할 수 없어하던 이탈리아의 끓인 와인의 이름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Vin brule' 근데 이건 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아마도 대부분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끓인 와인을 마시지 않기에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북부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이름이라 더욱 생소하게 다가 온 것 같다. 아무튼 뱅쇼라는 알려진 이름이 편하기에 따뜻한 와인 한 잔에 티롤 지방의 소세지와 폴렌타를 함께 먹으니 비싼 기차 타고 온 값을 제대로 한 느낌이 들었다. 


저자의 책에도 몇 번 언급되는 [신의 물방]을 와인을 공부하겠다고 몇 권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대사도 너무 많지만 와인을 마시고 맛을 묘사하는 주인공의 터무니없어 보이는 감상에 닭살이 돋아 책장 한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그러다 또 시간이 지나 그 만화에서 언급된 유명한 와인이나 디켄팅이 필요한 고급 와인을 마주하게 되면 역시나 다시 [신의 물방울]을 완독해야 하는 것인가란 숙제를 다 하지 못한 떨떠름을 느끼게 된다. 이제는 예전과는 다르게 마트나 편의점에서 손쉽게 와인을 구매할 수 있기에 분위기 내고 싶은 날이나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을 먹게 될 때 와인을 권하며 친목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럴때마다 어슬프게 아는 와인 지식을 들먹이며 꽤나 아는 척을 했던 지난 날이 떠올라 밍망함이 재생되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덕분에 이번 책이 더 재미있고 유쾌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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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1~2 - 전2권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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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진 작가의 [백만 장자를 위한 공짜음식 1-2]을 읽었다. 이미 소설 [파친코]가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된 후 유명 작가가 되었지만, 그보다 더 먼저 이 소설이 발표되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파친코]의 대박이 아니었다면 접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지 않았을까? 다행스럽게 새로운 출판사의 새로운 번역으로 만나게 되어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의 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저자의 출발점을 엿볼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거의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장대한 스토리는 마치 주인공 케이시 한을 비롯한 주변인물들을 주위에 투명망토를 뒤집어 쓰고 지켜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생동감있게 다가왔다. 1990년 대의 미국 이민1세대와 2세대의 삶을 그리고 있는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동시대를 살아온 교포들의 삶을 그려볼 수 있었다. 


지금은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막연한 열망이 어느 정도 사그러든 상태이긴 하지만(그럼에도 여전히 미국을 선망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케이시 한의 아버지 조셉과 리아가 이민을 선택할 당시만 해도 미국은 그야말로 꿈의 땅이었다. 어느덧 한국에 사는 이주민 200만 명의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에 대한 어색한 시선이 남아 있는데, 전쟁 후 기아에 가까울 정도로 허덕이던 시대에는 미군 부대 인근을 제외하고는 외국인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조셉과 리아도 그들의 정주를 위한 보증을 서 준 친척이 있었기에 이민이 가능했다고 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땅에 정착하고 살겠다는 다짐은 좀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선택은 모국이라는 땅에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죽을 만큼 힘들 때나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더군다나 이민 2세대의 경우는 대부분 아주 어린 나이때 이주를 하기 때문에 쉽사리 그 나라의 언어를 익히고 문화에 젖어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부모인 이민 1세대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렵기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선택을 뒤집을 수 없기에 악착같이 일하며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고 조금씩 자리를 잡아나아갔으리라. 케이시 한의 집도 비슷한 유형이다. 이런 이민 1세대와 2세대의 경우에 자녀들이 하루빨리 영어를 익힐 수 있도록 집에서도 한국어를 쓰지 못한게 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어린 자녀들이 모국어를 금방 잊게 되고, 직업적 소통 외의 영어를 배우지 못한 부모 세대와 갈등을 겪게 될 때에 미묘한 감정 표현을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이민 세대의 경우 2중 언어를 하는 것이 오히려 사회적 진출의 다양한 길을 모색할 수 있기에 가급적이면 집에서는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누구나 비슷한 감정의 파고를 겪게 된다. 기분이 좋고 일이 잘 풀릴 때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데, 억울한 일을 겪거나 감정이 요동칠 때 모국어가 아닌 뒤늦게 배운 외국어로 상세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에 갑작스런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행여나 나의 피부색으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때면 한없이 무력해지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고, 그동안 켜켜이 쌓아온 타지에 대한 불만이 한 번에 올라와 당장 이 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비단 이런 감정을 외국에서만 겪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게 다가오는 것은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소설 속에서 케이시 한의 가족은 세탁소를 위탁받아 일하며 퀸스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아간다. 케이시 한은 부모님의 뒷받침과 성실함으로 프린스턴이라는 아이비리그의 대학에 들어가 미국 주류 사회의 다양한 클럽을 경험하게 되지만, 로스쿨 진학을 뒤로 미루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소설의 초반부에 나오는 아버지 조셉과 케이시의 격렬한 다툼과 폭행은 단순히 말 안듣는 딸과 고지식한 아버지의 논쟁이 아니라 타지에서 온갖 수모를 견디며 지켜온 아버지의 노동이 케이시의 주류 사회 진출로 해소되기를 바란 꿈이 무너져버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조셉은 케이시에게 다정하게 설명할 수 없다. 조셉이 겪은 부당함과 모멸과 차별은 단지 그가 이민자이고 세탁소를 운영하고 피부색이 다른 아시아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셉이 이민을 선택한 것은 그리고 당시에 조셉과 비슷한 선택을 한 이들은 한국에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자식들에게 가난과 비참함을 되물림해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미국에서 흑인 노예제가 사라졌듯이 우리나라도 양반과 천민이라는 계급이 사라졌지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미국 사회를 본따오기라도 하듯이 많은 부분을 선망해왔기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도 부와 권력을 쥔 이들이 과거의 양반들 못지 않게 높은 지위의 계급을 형성하고 있다. 가령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고를 때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가방을 들고, 어떤 구두를 신었느냐에 따라 판매원의 친절도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요즘은 그 어떤 명품으로도 구별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낯빛이다. 피부는 갑자기 돈이 많이 생겼다고 해서 좋아질 수 없다. 아주 오랜시간 공을 들여 관리를 받아야 하고 또 과로나 스트레스에 먼 여유 있는 지위를 누리고 있어야만 좋은 광채를 내뿜을 수 있다. 그래서 강남의 가게 점원들은 고객들의 얼굴빛을 보고 판매여부를 짐작한다고 하니, 이제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낯빛의 계급이 생겨난 것은 아니가 싶다. 


[파친코]에서는 어린 소녀가 할머니가 되는 시간 속에서 등장하는 여러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드라마처럼 펼쳐졌다면, 이번 작품은 대학을 졸업한 케이시가 사회에 적응하고자 분투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몇 년 동안의 일들을 그리고 있다. 특히 이번 작품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던 저자의 탁월함은 가족들의 서사를 너무나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집에나 하나 쯤은 있을 법한 사건과 갈등을 진부하지 않게 섞어내어 케이시가 마주한 인생 경로에 함께 울기도 웃기도 하며 위로를 받게 된다. 케이시와 엘라 그리고 케시이의 엄마 리아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헤어지기도 상처받기도 하며 그들은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고 자기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 주인공 케이시가 좌충우돌 자존심을 세우다가 출세가도를 달리는 이야기로 귀결되었다면 이 소설은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의 중후반부에 아버지 조셉과 이름이 같은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노인과의 만남이 조금은 작위적으로 다가오기는 하지만 서점 주인 조셉의 갑작스런 부고로 인해 조셉의 아내 헤이즐의 모자를 받게 된 케이시는 조셉의 추도식에 참석하는 결심을 통해 그녀의 선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방학 동안의 고된 인턴 시간을 통해 성실함과 능력을 인정받아 월스트리트의 직원으로 채용되어 승승장구 할 수 있는 기회를 고민해보겠다는 케이시의 대답은 그녀의 방황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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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엉 오늘의 젊은 작가 39
김홍 지음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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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 작가의 [엉엉]을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39번째 작품이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를 읽다보면 이번 작품처럼 쉽게 읽히지 않는 난해한 소설을 마주하게 된다. 화자인 '나'의 본체가 등장할 때만 해도 의식적인 부분의 상상력이 가미된 어떤 정신적인 세계를 그리다 현실로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본체와 '나'라는 몸뚱이의 결별은 정신과 육체의 구분이 아니라 그냥 나 말고도 나에게서 나온 또 다른 본체라는 내가 존재하는 사실을 기반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에, 그저 할 말을 잃고 과연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무서운 인내심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문학은 어떤 면에서 극사실주의적 고정된 형태를 벗어나 무한한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떠난 본체를 찾아 나서다 본체를 중심으로 모인 '우리들'이라는 기발한 공동체의 출현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시사하고자 설계된 것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은 소설을 다 읽고도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을 뒷편에 이어지는 짧은 평론을 통해서 도움을 받곤 했는데, 이번에는 평론을 읽고도 '그래서 대체 본체와 나는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가' 라는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래도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주인공의 눈물이 그치지 않는 것과 동시에 비가 멈추지 않는 국가적 재난 사태에 이르렀을 때, 그 원인을 주인공의 눈물 때문이라고 치부하며 그를 검거하기 위한 수사가 진행되고 남춘이를 기르던 슬사모 회원인 어느 성당 신부님의 도움으로 30만 키로미터나 뛴 경차 안에서 도피행각을 지속하다가 전국민의 주민등록이 저장된 기관의 불이 나며 모두가 주민등록을 재발급 받아야 하는 기이한 일이 발생되는 부분은 나름 속도감 있게 다가오면 적잖은 재미를 주었다. 소설 속에서는 실재하는 기업과 유명 인사의 실제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고 오해나 불명예를 안겨줄 수 있는 설정에서는 가명을 사용하며 사실과 공상을 넘나든다. 쿠팡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과 쿠팡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불공정한 처우와 노동력 착취에 대한 저자의 저항을 드러내고 싶은 것인지 결말에 이르러 새로이 주민등록을 받은 많은 이들이 쿠팡 사장의 이름을 선택하여 쿠팡의 불합리함을 개선하는 내용은 어쩌면 자본주의 시장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일은 이렇게 터무니없는 사건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밖에 없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사춘기 시절에 특히나 시험 기간에만 이르면 혼자만의 공상에 빠지곤 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라는 존재를 벗어나는 소설에 나온 것처럼 본체가 내 몸에서 빠져나가 시험과 공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상상을 하곤 했다. '나'는 책상에서 열심히 시험을 준비하고 본체인 또 다른 '나'는 그런 일정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든 고통스런 상황을 외면할 수 있는 그런 상상 말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나'와 본체가 마치 완전히 다른 타인이 된 것처럼 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언쟁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본체가 '나'의 여권을 가지고 가서 '나'를 행사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임을 증명할 수 없게 되었다. 타자와의 철학에서는 '나'라는 존재가 실재함을 증명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은 '나'를 인정하는 타자를 통해서임을 드러내지만, 이 소설에서 본체는 딱히 완전하 타자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러나 '나'의 주변 인물들을 나와 본체와의 관계를 인정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나'는 본체를 찾고자 끊임없는 여행을 지속할 것 같지만, '나' 대신 안거룩이 대신 구속되어 '나'인척 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나'로 존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완전히 다른 존재로 살아갈 것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다른 사람이 된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본체를 마주하게 되지만 더 이상 본체를 그리워하거나 되찾으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저자가 설정한 이런 황당한 세계의 '나'와 본체라는 등장 인물은 현실에서 마주한 고통과 어려움을 외면하고자 또는 이미 저질러 버린 실수와 잘못들을 바로잡을 용기가 부족해서 도피한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의 한마디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그런 이들을 실패자라고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지만 우리 모두는 실패자가 될 수 있고 누군가의 실패 덕분에 우위의 자리에 오르기도 하고 예전 같으면 절대하지 않았을 행동과 판단을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후에는 바보같이 행하기도 하기 때문에 본체를 마주한 '나'처럼 시간이 흐르면 엉엉 울 수 있을 때가 도리어 행복한 때임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자의로 계획된 고생은 갑자기 닥쳐오는 불의의 고생보다 견딜만하다는 근거 없는 환상이라든가, 자연 속에서 겪는 신진대사의 특정한 위기 상태가 기대치 못한 정신적 깨달음과 혼돈되는 착각 같은 것들이 무가치하게 느껴진다.(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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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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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작가의 [크리스마스 타일]을 읽었다. “은하의 밤”, “데이, 이브닝, 나이트”, “월계동 옥주”, “하바나 눈사람 클럽”, “첫눈으로”,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 “크리스마스에는” 이렇게 7편이 단편이 실린 연작소설집이다. 연작소설의 특징처럼 각 단편의 주인공의 주변인물로 등장한 조연들이 다른 단편에서는 주인공으로 나오는 마치 우리 인생을 한쪽의 시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명징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성시켜준다. 특히나 모든 이야기가 크리스마스라는 북반부의 겨울을 보내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맞이하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즌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뭔가 아쉽기도 서운하기도 정리도 해야 하기도 떠나보내야 하기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이 떠오르게도 한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도 크리스마스는 뭔가 축제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조금은 설레기도 하지만 도저히 그 축제의 한자락에도 마음을 기입할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도리어 우울과 짜증을 자아내기도 하는 딜레마의 시기이기도 할 것이다. 


“내 어릴적 친구들과 함께 한 시간들은 항상 내맘속에 남았는데~~”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이승환의 ‘크리스마스에는’이라는 노래는 마치 오래된 장독에서 진귀한 맛을 무한정 만들어내는 시원적 장맛의 기원처럼, 내게 있어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면 없어서는 안될 백뮤직이 되었다. 어릴때부터 성당을 다녀서 그런지 크리스마스는 곧 성탄절이고, 성탄절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밤늦게까지 평소보다 두 배 이상 긴 미사를 참여해야 하고, 그 긴 미사 이전에 주일학교 아이들의 재롱잔치가 있어 몇 주 전부터 성당에서 살다시피 연습에 매진해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학생이 되고 나서는 대놓고 외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성탄절 밤미사가 끝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갈 버스가 끊기고 자연스레 성당에서 걸어갈 수 있는 친구네 집에서 올나이트를 할 수 있었다. "Raro Unus, Nunquam Duo, Semper Tres"라는 라틴어 격언을 ‘Semper Duo, Raro tres’로 바꾸어 항상 붙어 다니던 죽마고우와 잦은 이사로 매번 함께하지 못했던 또 다른 친구까지 셋이 밤을 지새우며 추억을 쌓곤 했다. 


벌써 1년이 되어가는데, 작년 이맘때 연락이 끊겼던 그 다른 친구가 어찌어찌하여 나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이 있었다. 그 친구의 이름을 듣는 순간 혹시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십몇 년 만에 연결된 통화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음을 토하며 어머니의 부음을 전하며 멀지만 빈소에 꼭 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휑덩그렁한 빈소를 보니 나와 연락이 되지 않았던 긴 시간 동안의 고독이 느껴지 더욱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오랫만의 해후치고는 짧은 인사와 근황을 나누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때 그 시절 항상 함께 했지만 지금은 잘 연락하지 않는 죽마고우에게 부고를 전했다. 내일이면 항상 밤을 세우던 크리스마스 전날이기에 더욱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부고가 아니었다면 이렇데 다시 연결되어 얼굴을 마주하고 그간의 삶을 전해들을 수 있었을까? 그 때 그 시절 그렇게 1년에 하루라도 밤을 지세우며 별로 쓰잘머리 없는 얘기를 지쳐 잠들때까지 나눌 수 있었던 누군가가 있었기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사춘기의 격한 감정의 파고를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작업을 해나가면서 성당에 나가 주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마 이 도시에서 가장 규모가 작을 동네 성당에는 내가 그간 한번도 보지 못한 수의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분들의 나직한 기도와 읊조림과 느린 발걸음 속에서 계절을 보내는 동안 때로 나는 너무 젊게 느껴졌고 때로 마치 백지처럼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렇게 세상에 대해 채워나가야 할 아주 많은 수의 조각들을 알게 된 것이 다행스럽다.(308)"라는 작가의 말을 통해 마지막 두 단편을 묶은 소제목인 '하늘 높은 데서는'이라는 구절은 대영광송의 첫 기도말에서 착안하지 않았을까 싶다. 겨울에 필요한 마음을 되짚어보는 작가의 인사말처럼 눈이 내리고 손발이 꽁꽁 얼어붙고 어깨가 움추러드는 찬바람이 몰아치는 계절의 변화는 언젠가 맞이하게 될 생과 사의 종착점을 연상하게 만든다. '언젠가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다가올텐데' 라는 찰나의 고민은 분주한 일상 덕분에 연기처럼 흩어지지만, 어디선가 들려온 타인의 부고와 덕분에 피어오르는 더는 마주할 수 없는 그리운 사람과의 추억으로 인해 그동안 악착같이 손에 쥐려했던 모든 것들의 부질없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쉽게 가 닿을 수 없는 그 '하늘 높은 곳에는'는 지금은 온갖 자잘한 이유를 대며 해소하지 못한 아주 작은 갈등과 잘못과 실수까지도 상세히 소명하며 화해할 수 있도록 허락해줄 것이다. 


"현우는 집에 가면 환자를 돌봐야 한다며 내내 커피를 고집했다. 나는 아버지가 아픈가. 하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 당시 수원에서 간호사로 일한다는 누나가. 환자가 집안에 있는 건 슬픈 일이고 자기 자신의 삶에 근저당이 잡히는 셈이었다. 죽음이라는 채무자가 언제 들이닥쳐 일상을 뒤흔들지 몰랐다. 그게 자신의 죽음이라면 의식이 꺼졌을 때 자연스레 종료되겠지만, 타인이라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채무 상태에 놓이게 된다. 기억이 있으니까, 타인에 대한 기억이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채무로, 우리를 조여온다. 수년 전 엄마를 떠나보내며 느낀 것이었다.(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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