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급 한국어 ㅣ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3월
평점 :
문지혁 작가의 [중급 한국어]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42번째 작품이다. 오늘의 젊은 자가 시리즈 중에 한 작가의 책이 두 번이나 들어간 것은 이번에 처음인 듯 하다. 마치 전작인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가 2권으로 이어진 긴 장편인 것처럼 여겨졌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아니면 원래 가능한 것이었는지. 아무튼 소설에서 지혁의 아내 은혜가 말한 것처럼 초급이든 중급이든 소설의 제목이 꼭 한국어 교재 이름 같다는 말에 한 표를 던진다. 전작에서는 시간에 대한 설명 중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한 부분이 마음에 꽤 와닿았었는데, 이번에는 전작보다도 훨씬 더 풍요로운 성찰 거리는 가득 담고 있다.
뉴욕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던 지혁은 엄마의 부고를 듣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지혁의 여동생인 지혜가 사귀는 미국인 라이언이 "왜 한국으로 돌아온거냐?"고 물었을 때, 선뜻 지혁이 대답하지 못한 것처럼 지혁의 귀환 이유는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사실 지혁이 왜 돌아왔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책을 두 권 내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등단하지 않은 작가라고 스스로를 칭할 수 있는지 의문인 지혁은 선배의 소개로 강릉의 바닷가를 마주한 대학에서 글쓰기 수업을 담당한 시간 강사로 일하게 된다. 요즘 대학에서 인문학 계열의 종말을 눈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 기초 인문학과들이 통폐합되고 오로지 실리와 자격을 위한 변종된 이상한 이름의 학부들만이 남게 되는 것을 보아 충분히 짐작이 된다. 소설의 배경과 우리의 현실이 다르지 않아 국문학과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수업에서도 지혁은 학생들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글쓰기 수업의 시작부터 합평을 거쳐 과제물을 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어느 글쓰기 교수의 수업계획서를 그대로 떼어와 붙여놓은 것처럼 지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지혁의 수업 내용을 귀가 아닌 활자를 읽는 눈으로 따라가고 있음에도 마치 오디오 서비스가 동시에 제공되는 것 같은 황홀감에 빠져들곤 했다. 너무나도 유명한 작가들, 제임스 조이스의 [애러비], 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와 같은 단편소설과 에세이를 토대로 나 또한 글쓰기 수업을 참석한 것 같은 상상에 빠져들곤 했다. 아마도 읽으려고 했다면 중간에 멈춰버렸을지도 모를 막연히 지루하고 어려울 것이라 예상되는 작품들을, 지혁 선생님은 간략하게 줄거리를 소개하며 소개된 작품들 속에서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지 고민하는 시간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들 속에 주제를 해석하기 위한 키워드를 제시하며, 그 단어와 사건들은 단지 소설속에서만 박제된 나와 무관한 일들이 아니라 저자와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나의 현실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일이다. 이제 나에게 맡겨진 것은 오늘의 삶을 나의 힘으로 해석해내는 것이다.
소설의 왼편에서는 시간 강사 지혁의 글쓰기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면, 오른편에서는 지혁이 은혜를 만나 은채를 낳기까지의 지난한 과정과 은채를 낳아 키우며 작가로서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는 지혁은 대문호들의 작품을 친절히 소개하며 글을 쓰고, 읽고, 고치는 반복된 작업을 통해서 진실한 자기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는 무언가 통달한 자처럼 보이지만, 은혜와 결혼하고 은채를 갖기까지 여러 차례의 인공수정 시도를 통해 깊은 좌절의 늪을 경험한 지혁은 하루에 왕복 6시간 이상의 운전과 3시간 짜리 수업의 연강으로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경우를 감당해야 하는 가장이었다. 글쓰기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냉랭함과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위트가 담긴 말을 던지며 부단히 밀도높은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집으로 돌아와 은채를 돌보며 자신과는 다른 아내 은혜와의 관계를 곱씹는 지혁은 역시나 전혀 다른 성향임에도 무던히 가족이라는 틀을 유지한 이유는 부모님에게 있어 삼각형의 한 부분으로 자신이 존재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 속에서 진주처럼 빛나는 부분은 두 권의 소설을 출판했지만 작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언제든 잘릴 수 있는 시간 강사로서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일상을 가진 가정을 지키고 코로나 확진이라는 최고의 불안 속에서 한 편의 소설을 탄생시키는 지혁을 담담하게 그려낸 것이다. 내가 만약 지혁이었다면 그 모든 것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소설 속에서는 자세히 그려지지 않았지만 가족의 일상과 소설이라는 꿈을 지켜내기 위해서 견뎌야만 했던 소소히 고통들을 감내할 수 있었을까? 저자의 자전적인 요소가 얼마나 많이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저자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글쓰기 수업에서 마지막으로 예를 들었던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에 나오는 검은 빵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불의의 사고로 생일을 앞둔 어린 아들을 잃은 부부는 생일 케익을 찾으러 간 빵집 주인에게 분노를 쏟아내다가, 사정을 알게 된 주인이 내어 준 시나몬롤과 커피를 먹으며 기운을 되찾게 되고, 마지막에 빵이라고 할 수 없는 검은 빵 덩어리를 함께 나누며 아들을 잃은 재앙을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된다.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가 아닌 남겨진 자에게는 살아갈 날들이 있기에 말이다.
"'뜯어 먹기 힘들지만, 맛은 풍부한' 인생 그 자체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 이 단계에서는 기쁨도 슬픔도 행운도 불운도 쾌락도 고통도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니까 '좋다, 싫다'가 아니라 '풍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냥 사는 것입니다. 일어난 일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부는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은 이 빵을 먹죠. 더 이상 먹지 못할 정도로 먹습니다. 먹는다는 건 그 걸 내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거잖아요? 이 검은 덩어리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건 바로....(220-221)"
소설 속에서 저자는 그게 바로 무엇인지 바로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답은 이미 앞서서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바로 에피파니, 곧 현현이다. "조이스의 주인공들은 거룩한 공간에서 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건을 통해 인생 전체를 뒤바꾸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32)" 아들을 잃은 부부는 검은 덩어리를 먹으며 그들이 겪은 상처와 고통을 살아내려고 할 때 그들 안에서는 에피파니가 이루어진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그 부분에게 검은 덩어리를 전해주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지혁이 그랬듯이 '먹이고 놀아 주고 치우고 재운다', '쓰고, 읽고, 고친다'가 되풀이 되는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되풀이하는 것만이 살아 있다.
되풀이만이 사랑할 만하다
되풀이만이 삶이다.(162)"
#중급한국어 #문지혁 #민음사 #오늘은젊은작가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