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베이비
김의경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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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경 작가의 [헬로 베이비]를 읽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초면인 사람들과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어려워한다. 미국에서는 일명 스몰 토크라는 이름으로 연회와 모임 같은 곳에서 처음 만나는 이들과 이야길 나누는 것이 일상적이라고 하던데, 우리는 그런 문화가 거의 전무한 편이다. 그럼에도 경직된 분위기를 한 번에 누그러뜨리는 강력한 무기가 있으니, 바로 아기의 등장이다. 부모 품에 폭 안긴 아직 걸음마를 떼지 못한 아기를 볼 때면 주변 사람들의 긴장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아기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요리조리 고개를 돌리는 사람, 아기의 주목을 받기 위해 요상한 소리를 내는 사람 등등. 아기를 보면서 다들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아기가 까르르 웃기라도 한다면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가 또 있을까란 생각이 들며 천사가 따로 없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렇게 편하고 행복하기만 한 일이 아니다. 근래에 이르러 육아의 고충이 얼마나 큰지 너도 나도 토로하는 터라 이제서야 제대로 주목을 받게 되었지만. 사실 과거의 어머니들도 똑같은 어려움과 고통에 직면했을 것이다. 단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그리고 육아의 어려움이 커진 이유 중의 하나는 출산과 육아의 연령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20대에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과 30대, 40대에 육아를 하는 것은 엄청난 체력의 차이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20대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자세한 상황을 대입해보지 않아도 20대의 청년들은 거의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국가에서는 벌써 수년 째 출산장려를 위한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고 말하지만, 출생율이 점점 더 현저하게 줄어드는 걸 보면 아무 실효성이 없는 정책들만 난무하고 있는 듯 하다. 


아무리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고 해도 생식능력까지 무한히 길어지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어느 정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는 연령대는 이미 육아의 길에 들어서기에는 한참 늦어진 시간이다. 그래서 딩크족이 많아지기도 하고 의학의 힘을 빌어 자녀출산을 계획하기도 한다. TV에서 의학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갖게 된 부부들이 많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인공수정이 쉽고 간단하지 않을까란 착각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실제 인공수정을 준비하고 실행한 이들은 그 과정이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러운지 알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부가 얼마나 간절히 아이를 기다리는지 깨닫게 된다. 


이번 작품은 이렇게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 난임부부들의 이야기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난임병원에서 우연히 만나 알게 되었고 서로의 성공을 응원하며 헬로 베이비라는 단톡방을 만들어 모임을 유지해 나간다. 헬로 베이비 멤버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남편이 있는 여자이지만, 소설 속의 남편들은 한결같이 인공수정을 준비하는 아내의 고충을 외면하는 이기적인 존재들이다. 소설 속에서는 인공수정의 갈래 중 체외인공수정에 해당되는 시험관 수정을 시도하는 이들의 이야기이기에 남편과 아내 모두 정자와 난자를 인위적으로 채취해야만 한다. 남편의 정자 채취는 고환에서 직접 채취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자위행위를 통해 채취하기에 간단하지만, 소설 속의 남편들은 난임병원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수치심을 느끼며 아내와 동행하기를 꺼려한다. 반면의 아내의 난자 채취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배란을 자극하는 주사를 맞아야 하고 인위적으로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 또한 신체에 부담을 주는 시술이 병행된다. 그렇게 힘겹게 난자를 채취하고 시험관에서 수정을 한 후 다시 여성의 몸에 주입하여 착상되기를 기다리지만, 그것 또한 마음대로 되지 않아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하게 된다. 정상적인 임신 과정에도 입덧을 비롯한 많은 어려움이 동반되는데, 인위적인 착상이 여러차례 실패하게 될 경우 육체적인 고통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압박과 상실감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간절히 아기를 원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는 인공수정의 경우에도 실행 이전에 고민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시험관 수정을 통해서 생성된 배아에 대한 윤리적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배아에 대해서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만일 수정된 그 순간부터 모든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인정하게 된다면 낙태와 인공수정 시 발생된 배아를 처분하는 것은 모두 살인 행위에 해당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법적으로 배아는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기에 또 배아를 인간이 되기 위한 이전의 세포 단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낙태와 배아 처분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곤 한다. 체외인공수정의 경우 임신성공율을 높이기 위해 여러 개의 배아를 만들어 이식하기 때문에 이식에 부적합한 배아는 실험대상이 되기도 하고, 여러 개의 배아가 착상되었을 경우 인위적인 낙태를 권유받기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는 인간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자율적인 선택을 존중하는 의미에 원천을 두고 있다. 우리는 정말 우리 몸의 주인으로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해도 되는 것일까? 


여타의 문제를 배제하더라도, 소설 속에서 등장한 여러 난임여성들 중에 정효의 극단적인 행동은 난임병원을 다니는 이들의 심리적인 상태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얼마나 큰 심리적 압박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어찌보면 정효가 폐경에 이르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임에도 생리가 몇 달 간 멈추자 인공수정이 성공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난 후에 받은 폐경 판정은 그녀가 신생아 병동에서 모르는 사람의 아기를 데리고 나가는 이상 행동을 저지르도록 종용했을 것이다. 그 모든 정황을 알고 있던 헬로 베이비의 구성원들은 지난 1년 동안 소식이 없던 정효의 행동을 이해하며 함께 슬퍼하고 아파한다. 어쩌면 정효의 극단적인 행동은 단지 한 개인의 정신 이상이나 일탈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병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헬로베이비 #김의경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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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 - 배달 사고로 읽는 한국형 플랫폼노동
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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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님의 [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부제는 "배달 사고로 읽는 한국형 플랫폼노동"이다. 배달 음식이라고 하면 의례히 짜장면과 같은 중국 음식을 떠올렸다. 은색의 철가방을 싣고 도로를 활주하는 배달노동자를 볼 수 있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옛말이 되어버린 어느 중국집의 배달원이라는 말은 배달노동자가 더 이상 하나의 음식점에 귀속되지 않는 마치 프리랜서와 같은 위치로 변경되었다. 책에서도 수없이 언급되는 배달의 민족, 요기요, 쿠팡이츠는 우리의 스마트폰 속에 공통된 앱 카테고리에 담겨 있다. 끼니때가 되면 별 생각없이 주문 앱을 만지작 거리다가 땡기는 음식 후기를 살펴보고 배달비까지 헤아려본 후에 결제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팬데믹 이전에는 배달 앱을 사용해 본적이 거의 없었는데, 거리두기가 심화되면서 배달 앱을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음식을 고르고 주문을 하고 나면 조리 중이라는 단계 다음에 픽업 그리고 배달 상황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음에 신기해하곤 했다. 특히나 배달노동자의 위치가 귀여운 이모티콘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앱 지도 상의 오토바이가 엉뚱한 위치로 가면 갑자기 기분이 상하면서 음식맛이 떨어지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했고 배달노동자가 길을 헤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푸념을 하기도 했다. 날씨가 궂은 날에는 배달노동자가 조심히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운전을 하다가 요리조리 시야를 방해하거나 갑자기 끼어드는 배달노동자의 오토바이를 볼 때면 저절로 욕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짜장면 한 그릇도 무료로 배달을 해주던 때에는 배달료를 따로 지불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배달 앱 초창기에는 배달비가 어느 정도 지정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정말 그때 그때 다른 것 같다. 팬데믹 상황이 악화될수록 거리를 달리는 배달노동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배달비 또한 같이 오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배달노동자에게도 생계가 달린 일이기에 이왕 배달료가 오른다면 그들의 수입이 올라 과속이나 신호위반과도 같은 운전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마치 대부분의 배달 앱 사용자와 배달노동자를 호갱으로 여기는 것처럼 배달료가 상승한다는 것은 음식점 사장님도 배달노동자에게도 이득이 아닌 의문의 승자가 있다는 기사를 읽고 플랫폼 사업의 심각함게 눈을 뜨게 되었다. 


인터넷이 상용화되고 특히나 스마트폰과 SNS의 범람과 더불어 알고리즘이라는 개념이 우리 삶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에는 무수한 개인정보들이 들어가 있고 우리가 알게 모르게 노출된 개인정보들은 어딘가에서 무분별하게 이용되고 있어 별 생각없이 클릭한 상품을 줄기차게 나의 스마트폰으로 노출시킨다. 어찌보면 알고리즘은 AI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으로 마치 선택장애가 있는 나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AI의 알고리즘을 이용한 서비스는 의외로 많다. 우리나라의 전국민적인 채팅창인 카카오톡은 일상생활의 전방위적인 부분에서 카카오톡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극심한 불편함을 느끼도록 잠식해오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기능을 통해서 노동을 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AI의 지배를 받으며 노동을 영위하는 동안 그 서비스를 이용하던 사람들도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카카오톡 택시가 시작되었을 때, 앱으로 택시를 부르고 비용도 지불할 수 있다는 사실에 열광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덧 카카오 택시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각종 수수료가 포함된 다양해진 등급은 오히려 소비자의 부담을 가중시켰고 택시 기사님들 또한 알고리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배달노동자 또한 각종 배달앱을 켜고 AI가 지정해주는 배달콜을 받을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배달을 원하지 않는 곳을 거부할 경우 한 동안 콜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1시간에 적어도 2개 이상의 배달을 완료해야만 최저임금이 준하는 돈을 벌 수 있다는 압박을 가중시켜 AI의 콜에 얽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배달노동자들이 왜 그렇게 신호위반과 과속을 일삼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배달 오토바이가 인도를 오가고 골목에서 갑작스럽게 튀어 나올 때 신체의 위협을 받는 일반 시민들은 그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기에 무턱대고 화를 내거나 욕을 할 수 밖에 없다. 


저자가 말하듯이 배달노동자가 사고를 당했을 때 사람들은 그렇게 난폭하게 오토바이를 모니까 그런 사고가 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는 것처럼, AI의 통제를 받는 배달노동자가 처한 노동현장의 악순환은 쉽게 해결될 수 없다. 오토바이는 다른 교통 수단에 비해서 너무나도 사고에 취약하다. 가만히 서 있다 넘어지기만 해도 골절을 입을 수 있는데, 자동차와 비견한 속도로 달리다 사고가 날 경우에는 생명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플랫폼 구조는 배달노동자의 안위를 보장하기는 커녕 마치 악덕업주처럼 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 알아서 제 몸을 챙기라는 사고다. 플랫폼이라는 것은 거대한 프로그램으로 사람이 일일이 계산하고 통제할 필요가 없는 효율성을 극대화시킨 형태이지만, 결국 배달노동자에게 명령을 시키는 플랫폼을 만들고 조정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아닌가. 그 플랫폼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 요리조리 피해가는 형태의 사업들이 점점 더 많이 양산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의 소모품으로 전락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된다. 


"배달플랫폼기업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배달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배달노동자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였다면 배달플랫폼기업이 일감이 없어 노동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할 경우 휴업수당을 지금해야 하고, 대기하라고 지시하려 해도 최저임금 이상을 지불해야 해서 매출 하락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이 때문에 배달플랫폼 기업도 인력 구조조정과 노무관리를 중요한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기업들은 노사 갈등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배달플랫폼기업들은 해고로 인한 갈등도, 임금 삭감으로 인한 노사 갈등도 피할 수 있다. AI 알고리즘이 배달노동자들에게 일감을 주지 않고 ,배달료를 낮추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AI 알고리즘이 휘두르는 플랫폼기업식 구조 조정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이 구조조정의 결과는 언제 일을 시작할 수 없는 긴 대기 시간, 즉 초단기 실업시간의 확대와 장시간 노동이다. 하루 10시간 노동으로 하루 20만원을 벌었던 노동자는 이제 12-15시간씩 길바닥에서 대기하거나 일해야 한다. 실업과 취업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배달료가 올라가는 짧은 피크 시간대의 배달과 간간이 주어지는 미션 수행을 위해 무리한 운행을 감수해야 한다. AI 알고리즘은 배달을 빨리 배송하는 데는 최적화되어 있지만, 개별 노동자들의 안정적인 소득 보장과 안전 운행에는 관심이 없다.(186-187)"


"우리는 SPC 공장에 있는 소스 조리기가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큰 줄 몰랐고, 거기에 사람이 끼면 죽을 정도로 위험하지 몰랐다. 석탄발전소를 청소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사람이 혼자 일하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우리가 매일 보고 운전하는 도로 위도 마찬가지다. 내가 네 바퀴로 안전하게 지나가는 도로 위의 맨홀 뚜껑이 두 바퀴로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는 충격적인 일이다.(258-259)"


#플랫폼은안전을배달하지않는다 #박정훈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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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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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파니 D. 잭슨의 [그로운 GROWN]을 읽었다. 해마다 사순시기가 되면 다니엘 예언서에 나오는 수산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마도 1년 중에 가장 긴 미사 독서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은데, 욕정에 가득찬 두 늙은이가 수산나라는 남편이 있는 여인에게 음욕을 품고 그녀를 계략에 빠뜨려 자기들과 관계를 맺도록 협박하다가 다니엘이라는 지혜로운 이를 통하여 신문을 받고 자기 꾀에 빠져 죽음을 맞게 되는 내용이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에 쓰인 성경에도  당시에 나름대로 권력을 갖고 있던 이들이 음욕을 품고 어떤 비열한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여러 가지 윤리적인 교훈을 찾아낼 수 있도 있겠지만 이번 작품과 견주어 생각해보면 힘이 있는 자들이 약자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아마도 그루밍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게 된 것은 고양이가 혀로 제 몸을 핥는 모습을 뜻하는 말이었던 것 같다. 고양이처럼 털이 많은 동물들은 집사가 갈기가 달린 기구로 털을 빗겨주면 몹시 좋아한다고 한다. 하지만 요 몇 년 사이에 그루밍에 담긴 뜻은 그런 애정어린 행동을 뜻하지 않게 변질되어 버렸다. 그루밍 뒤에 성범죄라는 말이 붙지 않아도 가해자가 자신보다 어린 피해자와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난 후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서 저지르는 성적 학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루밍과 더불어 가스라이팅이라는 말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사실 이런 범죄심리학적 용어들을 일반적인 사람들이 접할 기회는 많지 않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알려진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유사한 형태의 성범죄의 피해자들이 이미 만신창이가 된 후에야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가해자로부터 벗어나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기사들이 보도될 때 사람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아니 왜 도대체 그렇게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느냐고, 혹시 자신도 동의한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이런 반응은 가스라이팅의 세계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나오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그루밍과 비슷한 형태로 가해자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에 스스로가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지경까지 세뇌된 경우가 많다고 한다. 


특히나 이 소설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가수를 꿈꾸는 17살의 소녀 인챈티드가 처한 상황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닷가의 어느 작은 마을에 살던 인챈티드의 가족들은 어쩌면 우리나라 부모님들과 마찬가지로 자식들 교육을 위해 비좁고 낡은 거주지를 선택하며 도시의 팍팍한 삶을 시작한다. 인챈티드는 맏딸로 같은 고등학생 동생인 셰이를 빼고는 나머지 3명의 동생들을 쪼꼬미라 부르며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돌보는 착한 딸이다. 할머니와 같이 살던 바닷가에서 당시 인챈티드 또래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비욘세의 노래가 아닌 휘트니 휴스턴의 오래된 노래를 부르며 막연히 가수를 꿈꾸게 된다. 어느 날 인챈티드는 흑인인 자신과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유일한 다른 유색인종이라고 생각하는 갭의 부추김으로 오디션을 보러 간다. 인챈티드는 그곳에서 엄청나게 유명한 28살의 코리 필즈라는 가수를 만나게 된다. 코리는 마치 인챈티드의 숨겨진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오디션에 떨어진 인챈티드에게 비밀스러운 만남을 제안하게 된다. 인챈티드는 흑인 소녀에 가정 형편은 넉넉치 않고 가수가 간절히 되고 싶지만 그럴 가능성이 거의 희박한 상황에서 코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해마다 미국의 인종 차별에 대한 심각한 사건들이 뉴스를 통해 보도되듯이 소설 속의 인챈티드 또한 그러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인챈티드를 비롯한 흑인 학생들의 미국 전역의 모임인 월앤드윌로우 라는 조직 안에서도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에 따라서 차등을 두려고 하는 내용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인챈티드가 처한 상황은 녹록치 않아 보인다. 소설 속에서 톱스타의 위치에 있는 코리가 내민 제안들과 그가 처음에 인챈티드에게 보인 상냥한 말투와 다정한 행동들은 인챈티드가 아닌 그 누구라도 너무나도 쉽게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심지어 인챈티드가 꿈꾸는 가수가 되도록 도와주겠다니, 천군만마를 얻은듯이 행복했을 인챈티드가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코리의 투어에 따라나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행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이후에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두 얼굴로 인챈티드에게 행한 감금, 폭력, 강간, 몰카촬영 등은 그루밍 성범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코리가 본색을 드러내며 인챈티드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할 때, 독자라면 응당 ‘지금이야, 어서 빨리 도망쳐’라고 외치게 된다. 하지만 인챈티드는 너무나도 순진하게 코리의 사랑을 믿고 그에게 사랑 받기 위해 호텔 방에 갇혀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가 얼음통에 소변을 보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이 정도면 가수고 나발이고 정신 차리고 집으로 가야할텐데, 인챈티드는 코리가 윽박지르며 내민 가족들까지 얽힌 조건들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행여나 자신이 코리를 떠나면 파업으로 인해 수입이 줄어든 가족들이 어려움에 처하지 않을까란 걱정과 더불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버텨내면 코리가 인챈티드의 음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한다. 인챈티드는 이미 코리가 던져놓은 덫에 걸려 헤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무명의 흑인인 십대 소녀와 엄청난 인기와 부를 가진 유명 가수가 어떤 사건에 대하여 서로 다른 말을 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누구 말을 믿게 될까? 저자는 인챈티드가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이런 성범죄가 벌어졌을 때 도움이 되기 보다는 약점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결국 우리 사회에게 필요한 것은 약자들이 궁지에 몰려 강자에게 어떤 선택을 종용 받았을 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특히나 몸만 어른이지 경험의 부족으로 손쉽게 판단을 내리는 10대들이 안전하게 그 시기를 보낼 수 있도록 책임있는 어른들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그로운 #티파니D잭슨 #한겨례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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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
하재영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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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영 작가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읽었다. 부제는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이다. 현재의 우리나라 사회에서 진지하게 논의하길 꺼려하는 주제들이 몇 가지 있다.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성향과 더불어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걸쳐 있는 차별금지법과 생명 보호와 존중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이 바로 그러하다. 사전적인 지식과 인간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느 순간에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런 주제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한 마디로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지금 당장 내 삶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제도 그렇게 비춰질 것이다. 개를 농장에서 키우고 팔고 죽이고 먹는 것이 대체 우리 삶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물을 것이다. 꽤 근래까지도 개를 먹는 것에 대해서 큰 거부감이 없던 관습 때문인지 반려견이라는 말이 일상화되었음에도 먹는 개와 키우는 개를 구분하거나, 개는 원래 집 밖에서 키우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나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서양의 어느 배우가 '개고기를 먹는 미개한 나라'라는 비난 섞인 말을 기사로 접했을 때, 나 또한 '지가 뭔데 개고기 하나로 우리나라를 싸잡아 욕하느냐'고 발끈하곤 했다. 개식용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한 나라가 오랫동안 답습해온 문화를 그렇게 쉽게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한 개인의 비아냥 거림으로만 여기고 넘어갔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생각해보니 개고기에 대한 문화 상대주의는 중동 어느 나라의 명예살인과 강제할례와 같은 인권 유린에 비판할 자격을 주지 않는다(230). 우리가 어떻게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비난한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니들이 뭔데 우리나라의 관습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문화 상대주의가 윤리적 상대주의와 맞물리게 될 경우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생명 존중에 대한 다양성을 토대로 지금까지 그래왔던 '사실'을 '진리'인 것처럼 여길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동물권이라는 단어를 듣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아직 인권에 대한 인식도 확실하게 자리잡지 못한 것 같은데, 동물권이라니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닐까 혹은 반려견을 키울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사치한 논쟁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동물권에 대한 수많은 사례 중에 유독 유기견, 번식견, 식용견에 대한 말이 많은 것 또한 단순하게 반려견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보신탕집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 또한 비슷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개고기를 먹는 사람을 혐오하거나 아예 고기를 먹지 않는 비거니스트가 되는 것은 조금 유난떠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 나라가 이렇게 되기까지 대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부끄러웠다. 


공장식 축산 산업에 대한 문제와 심각함은 다른 책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비건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작가들의 책에서 왜 그런 결정을 실천하기로 마음 먹었는지, 그들의 선택을 종요한 인식의 전환은 어떤 계기였는지 어렴풋이만 짐작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르포라는 부제가 달린 것처럼 그 어떤 설명보다 직설적으로 개농장의 실태를 보도하고 있다. 뜬장에 갇힌 개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느껴져 몸서리가 처진다. 그리고 그렇게 개들이 돈이 되는 물건 취급을 받으며 팔려나가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막지 못하는 법규에 분노가 차오른다. 세금을 내지 않는 불법을 저지르며 썩어가는 음식쓰레기를 사료로 먹이고 이득을 취하는 개농장 주인에게 던진 '개고기를 먹는냐'는 질문에 아무 대답이 없는 부분은 참담함의 늪에 빠지게 만든다. 그럼에도 해마다 10만 나리의 개들이 죽음을 당하는 현실에서도 단 한 마리의 개를 구조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분투를 읽으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저자의 질문을 가슴 깊숙이 되새기게 된다. 결국 동물권에 대한 자각과 성찰은 인간이 만물의 주인으로 창조되었다는 믿음이 피조물을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권리가 아니라, 인간과 종이 다른 동물이라 할지라도 고통과 아픔을 느끼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그 어떤 종보다도 앞서 기억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의 저촉을 받지 않음에도 가장 미약한 동물을 자발적으로 존중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출발점이 아닐까 싶다. 


"피터 씽어의 말처럼 동물 애호가라는 표현은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논의로부터 인간이 아닌 존재를 배제한다. 동물을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인식하고 연민을 확장하는 일은 사랑하고 좋아하는 감정과 별개의 것이다. 특정한 종의 동물을 좋아하는 것은 취향이더라도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취향과 아무 상관없다. 씽어가 비유했듯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을 유생인종 애호가라 부르지 않고 성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을 여성 애호가라 부르지 않는다면, 동물의 고통에 반대하는 사람을 동물 애호가라고 부르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49-50)"


"동물실험에 반대하는 국제 동물보호단체인 '크루얼티 프리 인터내셔널'이 공개한 영상에서는 드레이즈 테스트를 위해 상자에 갇히 토끼가 목을 돌려 옆에서 같은 일을 당하고 있는 친구의 눈을 정성스레 핥아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에 의문을 품게 만는다. 우리는 '짐승 같다'는 표현을 잔인함으로, '인간적'이라는 표현을 도덕적인 무엇으로 사용하지만 저 영상 속에서 인간적인 것은 누구인가?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같은 처지의 친구를 돌보는 토끼인가, 아니면 토끼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인간인가?

만약 담뱃갑에 붙어 있는 경고문처럼 식품에, 화장품에, 의류에, 침구에, 그 제품의 생산을 위해 희생된 동물의 사진이 붙어 있다면 우리는 매순간 동물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고문이 없으므로 기억은 의지의 문제가 된다. 저 동물들을 인간의 영역으로 데려온 이들이 다름 아닌 우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 우리의 시스템 안에서 동물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 이야기하는 일, 그들에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질문하는 일이 오로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동물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장도 왜곡도 없이 동물은 우리의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같은 종의 인간뿐 아니라 동물에 대한 책임도 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면 우리 또한 그들의 희생에 의무를 지니고 있다. 나는 그 책무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 인간다움, 내가 갔던 그 장소들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우리의 인간다움이라고 믿는다.(289-290)"


#아무도미워하지않는개의죽음 #하재영 #창비 #버려진개들에관한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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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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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 작가의 [중급 한국어]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42번째 작품이다. 오늘의 젊은 자가 시리즈 중에 한 작가의 책이 두 번이나 들어간 것은 이번에 처음인 듯 하다. 마치 전작인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가 2권으로 이어진 긴 장편인 것처럼 여겨졌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아니면 원래 가능한 것이었는지. 아무튼 소설에서 지혁의 아내 은혜가 말한 것처럼 초급이든 중급이든 소설의 제목이 꼭 한국어 교재 이름 같다는 말에 한 표를 던진다. 전작에서는 시간에 대한 설명 중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한 부분이 마음에 꽤 와닿았었는데, 이번에는 전작보다도 훨씬 더 풍요로운 성찰 거리는 가득 담고 있다. 


뉴욕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던 지혁은 엄마의 부고를 듣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지혁의 여동생인 지혜가 사귀는 미국인 라이언이 "왜 한국으로 돌아온거냐?"고 물었을 때, 선뜻 지혁이 대답하지 못한 것처럼 지혁의 귀환 이유는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사실 지혁이 왜 돌아왔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책을 두 권 내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등단하지 않은 작가라고 스스로를 칭할 수 있는지 의문인 지혁은 선배의 소개로 강릉의 바닷가를 마주한 대학에서 글쓰기 수업을 담당한 시간 강사로 일하게 된다. 요즘 대학에서 인문학 계열의 종말을 눈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 기초 인문학과들이 통폐합되고 오로지 실리와 자격을 위한 변종된 이상한 이름의 학부들만이 남게 되는 것을 보아 충분히 짐작이 된다. 소설의 배경과 우리의 현실이 다르지 않아 국문학과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수업에서도 지혁은 학생들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글쓰기 수업의 시작부터 합평을 거쳐 과제물을 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어느 글쓰기 교수의 수업계획서를 그대로 떼어와 붙여놓은 것처럼 지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지혁의 수업 내용을 귀가 아닌 활자를 읽는 눈으로 따라가고 있음에도 마치 오디오 서비스가 동시에 제공되는 것 같은 황홀감에 빠져들곤 했다. 너무나도 유명한 작가들, 제임스 조이스의 [애러비], 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와 같은 단편소설과 에세이를 토대로 나 또한 글쓰기 수업을 참석한 것 같은 상상에 빠져들곤 했다. 아마도 읽으려고 했다면 중간에 멈춰버렸을지도 모를 막연히 지루하고 어려울 것이라 예상되는 작품들을, 지혁 선생님은 간략하게 줄거리를 소개하며 소개된 작품들 속에서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지 고민하는 시간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들 속에 주제를 해석하기 위한 키워드를 제시하며, 그 단어와 사건들은 단지 소설속에서만 박제된 나와 무관한 일들이 아니라 저자와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나의 현실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일이다. 이제 나에게 맡겨진 것은 오늘의 삶을 나의 힘으로 해석해내는 것이다. 


소설의 왼편에서는 시간 강사 지혁의 글쓰기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면, 오른편에서는 지혁이 은혜를 만나 은채를 낳기까지의 지난한 과정과 은채를 낳아 키우며 작가로서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는 지혁은 대문호들의 작품을 친절히 소개하며 글을 쓰고, 읽고, 고치는 반복된 작업을 통해서 진실한 자기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는 무언가 통달한 자처럼 보이지만, 은혜와 결혼하고 은채를 갖기까지 여러 차례의 인공수정 시도를 통해 깊은 좌절의 늪을 경험한 지혁은 하루에 왕복 6시간 이상의 운전과 3시간 짜리 수업의 연강으로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경우를 감당해야 하는 가장이었다. 글쓰기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냉랭함과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위트가 담긴 말을 던지며 부단히 밀도높은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집으로 돌아와 은채를 돌보며 자신과는 다른 아내 은혜와의 관계를 곱씹는 지혁은 역시나 전혀 다른 성향임에도 무던히 가족이라는 틀을 유지한 이유는 부모님에게 있어 삼각형의 한 부분으로 자신이 존재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 속에서 진주처럼 빛나는 부분은 두 권의 소설을 출판했지만 작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언제든 잘릴 수 있는 시간 강사로서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일상을 가진 가정을 지키고 코로나 확진이라는 최고의 불안 속에서 한 편의 소설을 탄생시키는 지혁을 담담하게 그려낸 것이다. 내가 만약 지혁이었다면 그 모든 것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소설 속에서는 자세히 그려지지 않았지만 가족의 일상과 소설이라는 꿈을 지켜내기 위해서 견뎌야만 했던 소소히 고통들을 감내할 수 있었을까? 저자의 자전적인 요소가 얼마나 많이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저자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글쓰기 수업에서 마지막으로 예를 들었던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에 나오는 검은 빵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불의의 사고로 생일을 앞둔 어린 아들을 잃은 부부는 생일 케익을 찾으러 간 빵집 주인에게 분노를 쏟아내다가, 사정을 알게 된 주인이 내어 준 시나몬롤과 커피를 먹으며 기운을 되찾게 되고, 마지막에 빵이라고 할 수 없는 검은 빵 덩어리를 함께 나누며 아들을 잃은 재앙을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된다.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가 아닌 남겨진 자에게는 살아갈 날들이 있기에 말이다. 


"'뜯어 먹기 힘들지만, 맛은 풍부한' 인생 그 자체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 이 단계에서는 기쁨도 슬픔도 행운도 불운도 쾌락도 고통도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니까 '좋다, 싫다'가 아니라 '풍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냥 사는 것입니다. 일어난 일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부는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은 이 빵을 먹죠. 더 이상 먹지 못할 정도로 먹습니다. 먹는다는 건 그 걸 내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거잖아요? 이 검은 덩어리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건 바로....(220-221)"


소설 속에서 저자는 그게 바로 무엇인지 바로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답은 이미 앞서서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바로 에피파니, 곧 현현이다. "조이스의 주인공들은 거룩한 공간에서 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건을 통해 인생 전체를 뒤바꾸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32)" 아들을 잃은 부부는 검은 덩어리를 먹으며 그들이 겪은 상처와 고통을 살아내려고 할 때 그들 안에서는 에피파니가 이루어진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그 부분에게 검은 덩어리를 전해주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지혁이 그랬듯이 '먹이고 놀아 주고 치우고 재운다', '쓰고, 읽고, 고친다'가 되풀이 되는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되풀이하는 것만이 살아 있다.

되풀이만이 사랑할 만하다

되풀이만이 삶이다.(162)"


#중급한국어 #문지혁 #민음사 #오늘은젊은작가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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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 2023-03-23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입니다. 초급편을 읽고 중급을 이제 막 읽으려는데 리뷰 덕분에 기대가 샘솟네요

제코루 2023-03-24 09: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글쓰기 수업에 대한 내용 중에 위트 넘치는 곳이 몇 군데 있어서 혼자 웃게 됩니다. 즐거운 독서 되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