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적 낙관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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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작가의 [식물적 낙관]을 읽었다. 이전의 에세이를 통해서 그리고 SNS를 통해서 저자가 식물 집사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식물을 돌보는 이야기의 책까지 낼 정도로 매니아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식물이라는 명사에 형용사형인 접미어를 붙인 제목은 이 에세이에 담긴 식물의 생태를 통해 관조한 인간 삶의 낙관적 자세를 이끌어내고 있다. 지금 앉아 있는 책상의 한 귀퉁이에도 선물 받은지 1년이 넘은 그래서 이름도 까먹은 식물 하나가 물이 가득한 유리 화분에서 신기하게도 잘 견디고 있지만, 화초나 꽃을 키우는 데에는 영 관심이 없던 나에게 저자의 에세이는 새로운 환기를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장군이를 떠나보내고 저자의 어머니에 대한 심경을 토로한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 잠시 눈을 감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소중한 존재의 상실은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과 실제로 겪어 보는 거의 괴리가 너무나도 커서 아무리 설명하고 대체하려고 해도 불가능 하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닫게 되었다. 생각만 해도 갑자기 눈 주위의 열기가 느껴지며 시야가 흐릿해지며 요통치는 감정이 밀려올 때면 살아가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란 무력함과 더불어 염세적인 생각에만 머물게 만든다. 모든 게 다 부질없다고 느껴지는 시간의 연속은 그동안 부단히 쌓아왔던 일과 관계들의 모라또리움을 선언하며 자꾸만 빈 구석으로 나를 몰아가는 것만 같다. 시간이 흐르면 나아진다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겪을 수 밖에 없는 일이라지만 아주 짙은 슬픔의 물감에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지며 옅어지도록 만드는 희망과 낙관의 시간들이 과연 나에게도 올 것인지 아직은 두렵기만 하다. 마음이 몹시도 힘들고 울쩍한 밤을 보내다 애써 페이지를 넘기며 집중하던 차에 '우리들의 세컨드 스텝' 부분을 읽게 되었다. 


서울로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삼촌을 배웅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순간에 무슨 감정이 일었다 사라지는지, 완치가 어렵다는 사실을 의사로부터 매번 확인하고 내려가는 막냇동생을 바라보는 누나의 마음은 어떤 것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한없이 슬프고 아프기만 한지, 아니면 엄마가 살아온 세월 동안 반복된 그 무수한 내일들 덕분에 실버 라이닝 같은 희망과 낙관이 빛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엄마를 지켜보며 나 역시 맞게 될 몇십 년 후의 일상에 대해 어렴풋이 배워갈 뿐이다.(95-96)"

그리고 저자가 장군에게 씌워주고 싶은 작은 화관을 찾다가 뭐에 쓸거냐는 말에 주저하는 가운데 엄마는 망설이지 않고 정확히 의도를 설명한다. 

"내가 아는 한 식물들의 세컨드 스템은 아주 적절한 거리 속에 유지된다. 순 하나가 올라왔다고 원줄기가 도태되지 않고 원줄기가 새로 나온 순을 경계하여 고사시키는 일도 없다. 그렇게 조용히 각자의 다음 스텝에만 충실한 식물들은 때론 모든 생명의 궁극적인 진행 방향을 알고 있는 듯 느껴지곤 한다. 그다음에 대해 숙고하고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자 영역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자라난다. 

내일부터 엄마에 대한 걱정은 조금씩 덜기로 한다.(97)" 


상실의 경험은 마치 트라우마처럼 남아 또 다시 비슷한 일을 겪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공포를 자아낸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것을 내가 조율하고 싶은 전에 없던 욕구가 강렬히 밀려오고, 조금이라도 균형이 깨질 것 같은 위기가 감지될 때에는 불안함에 휩싸여 어서 빨리 안정을 찾기를 바라는 조바심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과 마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내가 아무리 바둥거려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깨다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의 세컨드 스텝'에 나온 내용들은 마치 하느님이 내 마음을 그동안 쉼없이 지켜보고 계심을 알려주는 것처럼 다가왔다. 우리가 삶에서 겪어내야 하는 수많은 시간들은 결국은 소멸이라는 귀결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에 각자가 짊어져야 할 몫과 영역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나의 세컨드 스텝은 소중한 나의 또 다른 줄기를 향해 지속적인 응원과 애정어린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러한 희망과 낙관으로 나의 슬픔은 어느덧 엿어지고 비슷한 일을 겪게 될 누군가에게 새로운 스텝을 밝을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힘이 생겨나지 않을까 기원하게 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기억이란 생활의 잔류물 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기억의 톤, 감정, 의미를 환기하며 글을 쓰는 게 내 일이고 그 환기의 힘으로 현재의 어려움들을 이겨나가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기억 모두가 정말 중요한 것일까. 혹시 어느 면에서는 그 역시 '호더적' 패턴이 아닐까. 마침내 기억과 추억은 구분해야 한다는 자각이 들었다. 추억하는 것은 좀더 주체적인, 단순한 환기에서 더 나아간 의지적 행위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식물을 보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147)"


"<내 정원의 붉은 열매>의 '나'는 서로에 대한 열정적 오해 속에 결국 사이가 멀어진 사람들에 대해 '무엇인가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203)"


#김금희 #식물적낙관 #문학동네 #0759번째저자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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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우다 1~3 세트 - 전3권
현기영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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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작가의 [제주도우다 1-3]를 읽었다. 띠지에 적힌 ‘필생을 건 대작’이라는 수식어를 누가 감히 쓸 수 있을까? 이제 1권을 읽었을 뿐인데도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읽는 것이 너무 힘든 것은 아닐까 선뜻 2권에 손이 가지 않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서사를 전개하기 위해 저자는 얼마나 많은 사료를 연구하고 인터뷰를 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커다란 줄기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면 한 사람, 한 사람 익명으로 존재했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의 시름과 아픔과 고통이 생생하게 펼쳐져 있을 것이다. 어차피 육신의 한계를 지닌 존재이기에 언젠가는 사멸했을 것이라는 결말로 지나온 공동체의 삶을 치부해버린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 또한 그 누구에게도 억울함과 같은 슬픔을 토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던 익명의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나의 이야기도 미래의 누군가에게 전해질 것이기에. 


코로나 사태가 발생되고 외국여행이 불가능해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차선책으로 제주도를 찾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우리나라에 제주도가 없었으면 어쩔뻔했냐?’ 는 조금은 뻔뻔한 말이다. 해외여행이 원활해지기 전까지는 신혼여행지로 그 이후에는 수학여행지로 그리고 이제는 그냥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잠깐 가서 쉬다 올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된 제주도는 어쩌면 내륙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평소에는 연락 한 번 없다고 필요할 때만 애교를 부리는 얄미운 상대처럼 ’외국 못가니까 제주도라도 가야지’ 라는 약간은 이기적인 마음을 가진 상대로 말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제2공항 건설, 비자림 2차 공사와 같은 찬반 논쟁을 방관자의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제주도우다]는 단지 제주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처절한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제대로 조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유사한 갈등과 대립이 발생되었을 때에 해결책을 찾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소설의 제주의 4.3사건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은 영미와 창근 부부가 4.3사건의 트라우마로 인해 그때의 일을 얘기하려하지 않는 영미의 할아버지 창세를 설득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창세는 손주 부부에게 왜 그 사건을 말하기를 거부하는지, 그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 지금도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도 자신은 4.3사건에 묶여 있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드디어 창세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이르기 전의 제주도의 설화와 조선 후기에 200년 동안 지속된 출륙 금지의 상황과 그로 인해 생겨난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민란들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준다. 영미 할아버지의 진술은 1부 부터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뀌어 일제강점기를 보내는 제주도민들의 팍팍한 삶을 영화처럼 보여준다. 이창동 영화감독의 추천사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분명 소설을 읽고 있음에도 눈앞에 스크린이 펼쳐진 것처럼 생생한 영상이 떠오른다”. 아마도 2권에서는 해방 후 미군정으로 인한 제주도민들의 고통이 자세히 묘사될 것 같은데, 1권에서는 일제치하의 제주처럼 고립된 지역에서 일본 순사와 지도층에 빌붙은 친일파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갔을지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나온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정쟁의 도구로 이용당하고 있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중요한 시기를 미군정으로 인해 놓쳐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어린 창세와 세 살 많은 동네 형이자 소학교 동기인 행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유쾌한 장면들로 배치해 마음이 너무 가라앉지 않고 이야기를 쫓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나 행필이 짝사랑하는 두 살의 연상인 해녀 숙희를 향한 순애보는 창세가 불턱에 모여 몸을 녹이는 해녀들의 무리에서 행필의 사랑고백이 담긴 편지를 대독하는 장면에서 일본의 압제로 경직된 분위기를 한 순간에 녹여버렸다. 억지스러운 공출과 공납으로 제대로 배를 채울수도 없고, 어린 아이들마저 학교에서 공부를 하지 못하고 비행장을 만드는 곳에 뗏장을 나르는 일로 차출되고, 언제 어디서든 쥐새끼 같은 밀정이 들을까 험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날들이 수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창세와 행필보다 나이가 많은 성인이 된 청년들은 일본 본토의 여러 지역과 전쟁 중인 인도차이나 반도의 어느 곳으로 강제 징용과 징병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들이 부지기수였고, 설상가상으로 제주와 일본을 왕래하던 커다란 여객선마저 미군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죽게 된다. 


분명 지옥같은 시간을 버텨낸 이들은 어느덧 해방을 맞이하게 되고, 지금처럼 연락이 자유롭지 못하던 때이기에 몇날 며칠이 지나서야 일본이 패망하였을 알고 조선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생각같아서는 천황의 항복 선언 이후에 쿠데타과 같은 폭동이 일어나 일본군과 친일을 일삼던 이들을 단숨에 처단하지 않았을까 예상했는데, 몇십년 동안 지속된 일제의 폭압의 공포에 짓눌린 많은 이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뜻 그들에게 대적하지 못한다. 그리고 아직 공식적인 정부가 세워지지 않았기에 당시에 지식인층이었던 이들이 일본군과 친일파를 처벌할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고 당시 지역의 관습법으로 추방하는 것에 그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당한 수모와 치욕에 비하면 너무나도 하찮은 징벌이지만 아마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제주도에 머물던 일본군이 칠만이나 되었다고 나오는데 패망 이후에도 미국이 올 때까지 그들이 계속해서 제주에 머물고 있었고, 결국은 미군에 의해 무기를 비롯한 모든 것을 폐기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해방의 기쁨과는 별개로 뭔가 개운치 않은 제대로 된 판정이 아닌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일본군이 패망으로 돌아가기 전에 미군의 명령이라는 핑계로 도민들에게 빼앗은 군량미를 놔두지 않고 다 태워버렸다는 내용에서는 불에 타는 곡식을 바라보는 이들의 분노와 허탈함이 얼마나 극심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해방 이후 동네 주민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이는 장면은 우리가 한 개인으로서의 성공에서만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성취가 더 큰 만족감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운동장에 모인 조천리 주민들은 항일 운동을 했던 청장년들의 감격스러운 인사말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이들에 대한 추모와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들을 기억하자는 말로 ‘조선 해방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게 된다. 몇 백 명이나 모인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한 목소리로 ‘조선 해방 만세’를 외치며 감격스러워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모습은 얼마나 감격적이었을까? 1권의 말미에 창세와 행필이 아무 이유 없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신나서 ‘조선 해방 만세’라는 말을 반복하고 들뜬 기분으로 노래를 부르며 마을을 다니는 행복한 장면은 그냥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창세 할아버지는 이후에 어떤 일을 겪게 되는 것일까? 


“그후부터 만옥은 그 웅변 내용 중에서 ‘압박과 착취와 기만과 강요 속에’ 대목만 빼내어 또래와 애기할 때 버릇처럼 /끼워넣곤 했다. ‘야, 염숙아, 압박과 착취와 기만과 강요 속에 물때가 되었져! 어서 바당에 가자.’ ‘야, 따알리아야, 오늘 밤 우리 집에 안 올래? 압박과 착취와 기만과 강요 속에 나와 같이 뜨개질하기 어떠냐?’ 하는 식이었다.(62)”


근래에 들어 페이지를 넘기는 게 이렇게 힘든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활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4.3으로 희생된 분들의 발자취를 하얗게 내린 눈을 시린 손을 호호 불며 거둬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 한없는 무력함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제주도의 4.3사건을 알게 된 후 정치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과 당시의 상황이 담긴 몇 권의 소설을 읽었었다. 잔혹한 처형이 벌어진 역사적 장소를 방문하고 그들의 얼마나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는지 어렴풋이나마 헤아려보려 했었다. 그리고 이번 작품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서청이라는 불한당 같은 단체와 미군정의 용인을 받기 위한 이기적인 정치인들의 욕심으로 벌어진 참혹한 일의 결과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 서술된 조천리 주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양민 학살의 전모를 따라가다보니 악마와도 같았던 친일파의 무리들과 서북청년단의 모습은 인간 본성에 담긴 추악한 면모를 단 하나의 얇은 장막도 없이 완전히 드러낸 것이기에, 언제든 나 또한 그런 부류의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몸서리쳐졌다.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더 잔인해질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염치와 양심을 내버린 채 얼마나 더 이기적일 수 있을 것인가? 이번 작품은 비단 우리나라 역사의 가장 뼈아픈 사건에 대한 재조명과 더불어 우리 삶에서 언제든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기에 인간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독자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다.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 발생되면 단순히 군인들이 총과 칼로 서로를 죽이는 결과만을 초래하지 않는다. 군인들의 죽음은 물론이요, 민간인들의 희생도 만만치 않은데 그것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쟁을 치루는 군인들의 광기가 극에 달한다는 점이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팔렴치한 짓을 서슴치 않고 저지르는데, 바로 점령한 곳의 주민들을 잔혹하게 처형해 본을 보이거나 여성과 아이들을 전리품처럼 다룬다는 것이다. 점령을 당한 이들은 아내와 자식들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영원히 잊지 못할 복수심에 불타오르게 되고 시간이 아무리 흐린다 해도 그때의 모욕과 치욕스러운 과거는 지워지지 않고 또 다른 재앙의 사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제주도의 4.3 사건을 들여다보면 무엇보다도 먼저 미군정에 대한 분노가 치솟는다. 아니 지들이 뭔데 남에 나라에 와서 3.8선을 마음대로 그어놓고 이래라 저래라 하며 심지어 일제치하에 부역했던 기회주의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혼란을 가중시키며 무고한 이들이 희생되도록 방치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 소설을 읽기 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일제치하와 동일한 강제공출과 양과자 강매와도 같은 사건들은 자유 민주주의를 토대로 공산주의를 토벌하기 위한 대의 명분을 삼았던 미국에게 우리나라는 그저 힘없고 수탈하기 좋은 대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아직도 앞으로도 지속될 심각한 사안이라고 생각되는데, 친일파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이 내려지지 않은 일이다. 지금도 웹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보면 4.3 사건과 관련된 당시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설명 첫 줄에 독립운동가라는 설명이 부제처럼 붙어있다. 제주도의 양민을 폭도로, 빨갱이로 치부하고 무조건 척결할 것을 명령한 이들이 어떻게 독립운동가이고 후손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란 말인가? 


읽는 내내 가장 크게 의문이 들었던 것은 서북청년단과 내륙에서 파견된 경찰들이 제주도민들을 학살하고 난 이후에 어떻게 살았을까란 점이다. 어쩌면 처음에는 북에서 공산주의의 핍박을 받다 고향 땅을 떠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이들이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상에 물든 이들이 제주도에 가득하다는 말에 넘어가 그들을 숙청해야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을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바보가 아니고서는 막상 마주한 제주도의 그 수많은 양민들을 빨갱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을까? 이미 광기에 물든 이들은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서 약탈과 살인을 일삼게 되고 자기들이 무슨 절대권력을 가진 판관이라도 된 것처럼 도취되어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내버린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도 묘사되지만 양민학살에 가담했던 토벌대 중의 한 명은 학살의 참혹함에 몸서리치다 결국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4.3 사건을 계기로 학살된 수많은 제주도의 젊은 청년들과 그의 가족들과 관련된 많은 이들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끔찍한 상황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혹시 가해자에 해당되는 토벌대의 이들 중에도 자신의 과오를 자책하며 불우한 삶을 살아가지는 않았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좌우로 나뉘어 나중에는 생과 사를 결정짓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서로를 잔혹하게 죽이는 야만성을 드러냈던 순간 때문에 괴로워하다 삶을 마감했을까? 


전세계의 제노사이드가 벌어졌던 장소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역사관을 조성하고 후손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시간이 많이 흐르게 되면 당시의 일을 겪고도 살아남은 이들조차 생을 마감하고 그저 과거 역사의 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망각의 동물인 인간은 철저한 교육과 반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다시금 그런 과오를 반복하기 쉬운 나약한 존재이다. 요즘 들어 다크 투어리즘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인다. 사실 전세계의 유명한 고적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마냥 태평성대를 이룬 곳은 단 한 곳도 없을 것이다. 어딜 가던지 인간이 머물던 장소에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오는 나약하고 이기적인 본성의 사건들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과거의 사건들을 다시금 조명하고 가슴 아프게 재생시키며 떠올려 보는 것이다. 얼마전 제주를 방문했을 때 함덕 해수욕장의 한가로운 풍경이 떠오르며 소설의 주인공 창세가 레포로서 산군의 지도부에 비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달래게 뛰었을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그렇게 견뎌낸 이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이렇게 제주의 비경을 즐길 수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어떤 진실도 영원히 묻을 수는 없다. 드러나지 않은 진실은 누군가의 한숨이 되고 슬픔이 되고 한이 되어 대대손손 이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활화산처럼 분출한다. 제주 사람 현기영은 제주의 입이다. 제주의 말이다. 1978년, 그의 소설을 통해 누구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4.3의 한순간이 세상에 드러났다. 서슬 퍼렇던 군사독재 시절,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할 줄, 그는 짐작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목구멍까지 차오른 제주의 한을 더는 참을 수 없었으리라. 제주 인구 십 분의 일 이상이 죽음을 당한 4.3 사건의 토벌대 최고 지휘관 로스웰 브라운은 말했다. ‘사태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뿐이다.’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혹은 지나간 일이라는 이유로, 귀 막고 입 닫은 우리가 그와 무엇이 다른가? 죽은 자의 아우성이 바람이 되어 휩쓸고 다니는 제주에서 살아남았어도 이미 죽은 제주 사람들의 무거운 침묵을 여행자의 들뜬 웃음으로 짓밟았던 우리가 그와 무엇이 다른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3권 표지 뒷면-정지아 소설가)”


#현기영 #제주도우다1-3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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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우다 1
현기영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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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작가의 [제주도우다1]을 읽었다. 띠지에 적힌 ‘필생을 건 대작’이라는 수식어를 누가 감히 쓸 수 있을까? 이제 1권을 읽었을 뿐인데도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읽는 것이 너무 힘든 것은 아닐까 선뜻 2권에 손이 가지 않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서사를 전개하기 위해 저자는 얼마나 많은 사료를 연구하고 인터뷰를 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커다란 줄기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면 한 사람, 한 사람 익명으로 존재했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의 시름과 아픔과 고통이 생생하게 펼쳐져 있을 것이다. 어차피 육신의 한계를 지닌 존재이기에 언젠가는 사멸했을 것이라는 결말로 지나온 공동체의 삶을 치부해버린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 또한 그 누구에게도 억울함과 같은 슬픔을 토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던 익명의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나의 이야기도 미래의 누군가에게 전해질 것이기에. 


코로나 사태가 발생되고 외국여행이 불가능해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차선책으로 제주도를 찾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우리나라에 제주도가 없었으면 어쩔뻔했냐?’ 는 조금은 뻔뻔한 말이다. 해외여행이 원활해지기 전까지는 신혼여행지로 그 이후에는 수학여행지로 그리고 이제는 그냥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잠깐 가서 쉬다 올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된 제주도는 어쩌면 내륙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평소에는 연락 한 번 없다고 필요할 때만 애교를 부리는 얄미운 상대처럼 ’외국 못가니까 제주도라도 가야지’ 라는 약간은 이기적인 마음을 가진 상대로 말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제2공항 건설, 비자림 2차 공사와 같은 찬반 논쟁을 방관자의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제주도우다]는 단지 제주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처절한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제대로 조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유사한 갈등과 대립이 발생되었을 때에 해결책을 찾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소설의 제주의 4.3사건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은 영미와 창근 부부가 4.3사건의 트라우마로 인해 그때의 일을 얘기하려하지 않는 영미의 할아버지 창세를 설득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창세는 손주 부부에게 왜 그 사건을 말하기를 거부하는지, 그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 지금도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도 자신은 4.3사건에 묶여 있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드디어 창세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이르기 전의 제주도의 설화와 조선 후기에 200년 동안 지속된 출륙 금지의 상황과 그로 인해 생겨난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민란들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준다. 영미 할아버지의 진술은 1부 부터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뀌어 일제강점기를 보내는 제주도민들의 팍팍한 삶을 영화처럼 보여준다. 이창동 영화감독의 추천사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분명 소설을 읽고 있음에도 눈앞에 스크린이 펼쳐진 것처럼 생생한 영상이 떠오른다”. 아마도 2권에서는 해방 후 미군정으로 인한 제주도민들의 고통이 자세히 묘사될 것 같은데, 1권에서는 일제치하의 제주처럼 고립된 지역에서 일본 순사와 지도층에 빌붙은 친일파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갔을지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나온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정쟁의 도구로 이용당하고 있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중요한 시기를 미군정으로 인해 놓쳐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어린 창세와 세 살 많은 동네 형이자 소학교 동기인 행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유쾌한 장면들로 배치해 마음이 너무 가라앉지 않고 이야기를 쫓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나 행필이 짝사랑하는 두 살의 연상인 해녀 숙희를 향한 순애보는 창세가 불턱에 모여 몸을 녹이는 해녀들의 무리에서 행필의 사랑고백이 담긴 편지를 대독하는 장면에서 일본의 압제로 경직된 분위기를 한 순간에 녹여버렸다. 억지스러운 공출과 공납으로 제대로 배를 채울수도 없고, 어린 아이들마저 학교에서 공부를 하지 못하고 비행장을 만드는 곳에 뗏장을 나르는 일로 차출되고, 언제 어디서든 쥐새끼 같은 밀정이 들을까 험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날들이 수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창세와 행필보다 나이가 많은 성인이 된 청년들은 일본 본토의 여러 지역과 전쟁 중인 인도차이나 반도의 어느 곳으로 강제 징용과 징병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들이 부지기수였고, 설상가상으로 제주와 일본을 왕래하던 커다란 여객선마저 미군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죽게 된다. 


분명 지옥같은 시간을 버텨낸 이들은 어느덧 해방을 맞이하게 되고, 지금처럼 연락이 자유롭지 못하던 때이기에 몇날 며칠이 지나서야 일본이 패망하였을 알고 조선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생각같아서는 천황의 항복 선언 이후에 쿠데타과 같은 폭동이 일어나 일본군과 친일을 일삼던 이들을 단숨에 처단하지 않았을까 예상했는데, 몇십년 동안 지속된 일제의 폭압의 공포에 짓눌린 많은 이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뜻 그들에게 대적하지 못한다. 그리고 아직 공식적인 정부가 세워지지 않았기에 당시에 지식인층이었던 이들이 일본군과 친일파를 처벌할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고 당시 지역의 관습법으로 추방하는 것에 그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당한 수모와 치욕에 비하면 너무나도 하찮은 징벌이지만 아마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제주도에 머물던 일본군이 칠만이나 되었다고 나오는데 패망 이후에도 미국이 올 때까지 그들이 계속해서 제주에 머물고 있었고, 결국은 미군에 의해 무기를 비롯한 모든 것을 폐기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해방의 기쁨과는 별개로 뭔가 개운치 않은 제대로 된 판정이 아닌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일본군이 패망으로 돌아가기 전에 미군의 명령이라는 핑계로 도민들에게 빼앗은 군량미를 놔두지 않고 다 태워버렸다는 내용에서는 불에 타는 곡식을 바라보는 이들의 분노와 허탈함이 얼마나 극심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해방 이후 동네 주민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이는 장면은 우리가 한 개인으로서의 성공에서만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성취가 더 큰 만족감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운동장에 모인 조천리 주민들은 항일 운동을 했던 청장년들의 감격스러운 인사말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이들에 대한 추모와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들을 기억하자는 말로 ‘조선 해방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게 된다. 몇 백 명이나 모인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한 목소리로 ‘조선 해방 만세’를 외치며 감격스러워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모습은 얼마나 감격적이었을까? 1권의 말미에 창세와 행필이 아무 이유 없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신나서 ‘조선 해방 만세’라는 말을 반복하고 들뜬 기분으로 노래를 부르며 마을을 다니는 행복한 장면은 그냥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창세 할아버지는 이후에 어떤 일을 겪게 되는 것일까? 


“그후부터 만옥은 그 웅변 내용 중에서 ‘압박과 착취와 기만과 강요 속에’ 대목만 빼내어 또래와 애기할 때 버릇처럼 /끼워넣곤 했다. ‘야, 염숙아, 압박과 착취와 기만과 강요 속에 물때가 되었져! 어서 바당에 가자.’ ‘야, 따알리아야, 오늘 밤 우리 집에 안 올래? 압박과 착취와 기만과 강요 속에 나와 같이 뜨개질하기 어떠냐?’ 하는 식이었다.(62)”


#현기영 #제주도우다1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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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40
박상연 지음 / 민음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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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연 작가의 [DMZ]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40번째 작품이다. 이 소설이 처음 나왔던 97년은 김일성이 죽은지 몇 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리고 뒷편에 담긴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저자가 이 소설을 썼을 때는 김일성이 죽은 직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도 어릴 때에는 김일성이 죽으면 통일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어진 혈육에 의한 세습은 너무나도 막강하여 김씨 일가의 통치를 위해 얼마나 많은 북한 주민들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인지 답을 찾기 힘든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밀레니엄에 개봉된 <공동경비구역 JSA>는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은 아마도 거의 다 봤을 만큼 대박이 났다. 분단된 지 50년이 지난 2000년에도 남북의 긴장된 대치 상황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고,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정쟁의 도구로 써먹는 것이 여전히 유요한 시기였다. 분단 상황지 지속되면서 비무장지대의 시간이 멈춘 듯한 생태계의 자연 경관이 다큐 형태로 방송되기도 했지만, 일반인들은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었기에 특히나 판문점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워낙에 명배우들이 주연을 맡았기에 재미 없을리가 없었지만 판문점의 남북 초소에서 근무를 서던 병사들이 서로 교류를 하고 친분을 갖게 된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이미 영화를 오래전에 봤음에도 소설 속의 주인공들의 모습이 영화 속 배역과 오버랩되어 펼쳐졌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의 큰 차이점이라면 영화에서는 온전히 남한군 병사 김수혁 상병 중심으로 스토리가 펼쳐진다는 것이고, 원작소설에서는 영화에서 여군으로 변경된 스위스 중립국 소령이 원래 남자였으며 지미 베르사미 ,에르네스또 리, 이강민 이렇게 3가지 이름을 가진 기구한 사연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는 별로 강조되지 않은 스위스 장교인 강민의 아버지의 사연 또한 중요한 화두로 작용한다. 영화 속에서는 수혁과 북한국 병사들 간의 케미를 부각시켜 지루한 군생활 중에 새로운 활력소를 얻는 유쾌한 장면들을 그리다가 갑작스러운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데, 소설에서는 수혁이 북한국을 죽이게 된 이유를 납득시키기 위해 소설의 화자인 강민의 아버지가 피폐해진 이유와 수혁이 맡아서 키우던 군견 마루의 사연을 극적으로 연결시킨다. 


사실 베르사미이자 강민의 아버지의 기구한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 후 우리나라의 갈라진 정치적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월드컵 축구가 열리면 붉은색 경기복을 입은 축구 선수들 뿐만 아니라 전국민이 붉은 악마가 되는 것을 자청하듯 중국 못지 않게 빨간색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스포치가 아닌 이념적인 빨간색은 저주를 넘어서 학을 떼는 마치 트라우마와 같은 단어를 양산시켰다. 바로 빨갱이라는 말! 우리가 질색하는 북한의 공산주의와 냉전시대를 알리던 사회주의 국가들의 탄생 기반이 되었던 이념은 사실 큰 차이를 보인다. 단순하게 이상과 현실의 차이라고 할까. 어렵사리 해방을 맞이한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대한민국의 정치적 이념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 여러 갈래로 나뉘어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미 미국과 소련에 의해 이념적 분단이 자리잡기 시작하던 시기라 서로가 꿈꾸는 이상의 차이가 커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고, 일제치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로 친일파의 부류가 다시 권력을 잡게 되면서 수많은 양민이 학살되기도 했다. 


강민의 아버지는 아마도 해방 후 사회주의 이념에 빠져 공산당에 들어가게 되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으로 남하하다 포로가 되어 거제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그곳에서 반군포로로 잡힌 친동생과 마주하게 된다. 친형제가 서로 다른 정치적 이념으로 맞딱드리게 되었고, 미군에 대한 엄청난 거부감을 갖고 있던 그가 조건반사처럼 미군이 온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칼을 휘둘러 동생을 죽이게 된다. 인간이 의식하고 있을 때에는 도저히 벌어질 수 없는 일이 강민의 아버지 안에 가득채워진 미국에 대한 증오로 인해 반사적인 몸의 움직임을 만들어 낸 것이다. 


강민의 아버지가 벌인 동물적인 반사작용에 대해 저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파블로프 효과가 적용된 김수혁이 맡아 키운 군견 마루를 등장시킨다. 수혁의 선임은 마루에게 먹이를 주기 전에 랜턴으로 빛을 비춘 후에 먹이를 주어 먹도록 했고, 랜턴을 비추지 않을 때 먹이를 먹으려 하면 몽둥이질을 하여 마루가 무조건 랜턴에 빛을 비출 때만 먹을 수 있도록 길들였다. 수혁의 사건 이후 마루가 주인을 만나지 못해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얘기를 전해듯지만, 강민은 우연히 마루에게 랜턴을 비추자 힘이 없던 마루가 몹시 험악해지는 것을 보게 되고 마루가 랜턴으로 조건반사에 적응된 미친 개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루는 랜턴을 비추고도 먹이를 주지 않으면 침을 흘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도 포악한 성질을 드러내며 공격적으로 변하게 된다. 


강민의 아버지와 군견 마루처럼 수혁은 어릴 때부터 철저한 반공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다. 저자의 연배 때에는 의례히 그래왔듯이 통일에 관련된 노래를 부르고 반공 포스터와 표어를 제작하며 북한공산당을 무찌르는 것이 온 국민의 사명인 것으로 교육되었다. 수혁 또한 운동권 대학생들에 대한 응근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기에 판문점 경비대의 근무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영화와 소설 속에서 가장 큰 변곡점의 장면으로 그려진 지뢰를 밟은 수혁을 도와 생명의 은인이 된 북한군과의 만남은 이념과 사상이 다른 채 수십년을 살아와 이제는 결코 하나의 나라가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구상에 유일하게 같은 말과 글을 사용하는 민족적 유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북한군 상등병 오경필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한 수혁은 북한군 초소에 몰래 놀러가서 그들과 은밀한 교류를 나눈다. 영화 속에서는 이 장면이 마치 이산가족 상봉처럼 애틋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긴장된 상태가 지속되던 때에 마지막 인사를 하러 북한군 초소에 간 수혁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인근에서 들린 총소리에 조건반사되어 자신의 어딘가에 깊숙이 새겨져 있는 반공의식의 발로처럼 잽싸게 권총을 들이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형이라 부르며 좋아하던 오경필에게 친히 사다준 지포라이터의 반짝임을 칼을 꺼내는 것으로 오인하여 한때 친구였던 북한국 전사 우진을 처참하게 죽이게 된다. 


강민은 평생동안 미워하며 받아들일 수 없는 기이한 행동을 일삼었던 아버지를 수혁의 취조를 통해서 그리고 남겨진 아버지의 일기를 통해서 이해하게 된다. 강민의 아버지가 동생을 죽이고 수혁이 북한군 친구 우진을 죽인 것은 결국 분단이라는 오랜 긴장된 상황 속에서 극도의 공포가 만들어낸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우발적 행동이었음을 말이다. 결국 강민의 아버지와 수혁의 삶을 비극적으로 만든 것은 그들의 선택에 의한 결과라기 보다는 체제와 이념을 지키기 위해 강요된 시스템의 의한 희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희생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오랜시간 지속될 것이기에 분단의 상황은 여전히 아프게만 다가온다. 


"꼭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같았다. 소리가 시작될 때 인식하는 것은 어렵다. 소리가 끝날 때 밀려오는 고요로 냉장고 소리를 인식한다. 대남 방송 대북 방송이라는 것도 처음 이곳에 부임했을 때는 못 견딜 정도로 시끄러웠는데 어느새 그 존재를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고 나서는 마치 냉장고 소리처럼 그 소리가 끝날 때 알아차린다. 소리가 날 때는 모르는데 소리가 없어지고 나면 그제서야 그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알게 되는 이상한 현상. 예전부터 궁금해하고 고민했다. 그건 내가 고민하고 있던 인식의 어떤 문제에 중요한 열쇠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147)"


"하지만 이 소설에도 나오는 냉장고 소리의 비유는 아직도 유효하다고 믿고 있다. 냉장고 소리가 사라진 다음 밀려오는 고요로 비로소 그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웠는지를 알게 되듯이, 분단 상황이 해소되면 우리가 잊었던, 또한 잃었던 것들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실감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2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변함이 없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이 믿음을 갖길 바란다.(330-331)"


#박상연 #DMZ #민음사 #공동경비구역JSA원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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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박상영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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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 작가의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을 읽었다. 술술 잘 읽히고, 중간에 빵빵 터져주시고, 갑작스럽게 삶에 대해 몰입하게 만드는 매력으로 충만한 이번 에세이는 읽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휴식이라는 공간에 머문 듯한 생각이 들게 만든다. [대도시의 사랑법] 이후 공중파와 케이블에서도 종종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역시나 책을 통해서 만나는게 제일 반갑다. 언제부터인가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말이 마치 유행어처럼 번져 혹시나 나도 이미 일에 치어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것조차 모르고 지내온 것은 아닐까란 의문을 갖게 만든다.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에 그와 짝을 이루는 말처럼 느껴지는 ‘워크홀릭’이라는 말이 먼저 퍼졌었다. 세상에 노는 것보다 일하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있겠냐마는, 마냥 일평생 놀면서만 지낼 수도 없기에 우리 삶에는 일과 휴식의 균형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워라벨’이라는 말도 더불어 유행하고 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세대와 가장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목표는 휴식은 사치스러운 단어였다. 휴식이라는 말은 그저 새로운 노동을 위한 잠시의 쉼에 불과했고 여가를 즐긴다는 말은 일부 여유로운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었다. 이제는 그러한 맹목적인 노동의 시대를 지나 좀 더 의미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노동 만큼이나 휴식의 질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책의 제목처럼 ‘순도 100퍼센트의 완벽한 휴식’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연결되었고,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자연스러워진 재택 근무와도 같은 형태로 인하여 휴가를 간다고 해도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는 쉽지 않다. 


저자도 이미 이야기의 서두와 말미에서 친구 K와의 대화에서 드러났듯이 하나의 일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조차도 노트북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대체 하루라도 공부 안한 날이 있기는 하냐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대체 하루라도 글쓰기에서 완벽히 자유로워진 날이 있기는 하냐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다. 그럼에도 쉼의 기회를 포기하지 않고 우연과 운명을 가장한 친구들과의 만남을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는 저자의 추억록이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부분에서 공감과 웃음과 눈물을 자아내게 만든다. 첫 배낭 여행을 가서 미술관마다 개의 그림을 찾아내는 친구와의 추억과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친구를 따라 함께 한 시간들은 독자로 하여금 각자가 갖고 있는 고유한 추억의 기록들을 다시 들춰내게 만들고 그 순간 함께 했던 이들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나이가 들수록 연락이 끊긴 사람들이나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람들이 떠오를 때면 혹시나 그때 내가 그런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연락하고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란 자책을 하게 된다. 어떤 인연과 만남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끊어져 버리고 그렇게 된 관계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지만, 자꾸만 나의 실수와 잘못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란 후회를 하게 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참으로 더딘 것 같지만 어마어마한 아픔과 슬픔도 옅게 만들고 못보면 죽을 것 같이 가까웠던 사람의 얼굴도 희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시간의 흐름에 빠져 표류하지 말라고 영원히 잊지 못할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을 선물로 내려주는 것 같다. 그러한 기억들이 점처럼 쌓이고 쌓여 우리의 만남을 가느다란 실처럼 이어주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내게 있어 여행은 ‘휴식’의 동의어나 유의어가 아니라, 일상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또 다른 자극이나 더 큰 고통에 가까운 행위가 아닐까? 환부를 꿰뚫어 통증을 잊게 하는 침구술처럼 일상 한중간을 꿰뚫어, 지리멸렬한 일상도 실은 살 만한 것이라는 걸 체감하게 하는 과정일수도, 써놓고 보니(피학의 민족 한국인답게 몹시) 변태적인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 또한 나에게 가까운 진실인 것만 같다.(15)”


“감정의 경제성.

그것은 내가 이금희 선생님을 보면서 가장 자주 떠올렸던 키워드이기도 하다. 선생님은 모든 종류의 자극에 쉬이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다. 선생님의 삶은 지나온 과거나 먼 미래에 있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난간 일에 머무르지 않는다. 감정의 괴물인 나라면 족히 몇 달을 잡고 늘어질 만한 사건이 닥쳐도 이금희 선생님은 금세 훌훌 털어버리고 앞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다. 지금 좋으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러다 인연이 다 되면 또 후회 없이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삶. 미움과 슬픔뿐만 아니라 후회, 비뚤어진 애착과 같은 감정들도 선생님의 사전 속에는 들어갈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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