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멜라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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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수록작에는 김멜라 ‘이응 이응’,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김기태 ‘보편 교양’, 김남숙 ‘파주’, 김지연 ‘반려빚’, 성해나 ‘혼모노’, 전지영 ‘언캐니 벨리’ 이렇게 일곱 작품이다.  젊은작가상 이라는 취지에 걸맞는 것처럼 수상작가들의 이름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저자소개란을 살펴보니 다른 작품집의 단편에서 만난적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마도 아직 장편소설에서 만난적이 없기에 낯선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일곱 편의 작품들이 각각 다른 소재를 다루고 있기에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니 어찌 이렇게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란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김기태 작가의 ‘보편 교양’에서는 입시 준비와는 전혀 무관하게 여겨지는 고전읽기 수업을 하는 곽이라는 선생님이 등장한다. 한때 인문학의 중요성이 부각되던 적도 있었으나 과학과 기술의 표면적인 가치 창출에 길들여진 한국 사회에서는 더 이상 문학의 자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세속화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고전문학이라니, 궁금하면 웹상의 어느 블로그에 잘 갈무리된 내용을 쓱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세태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는 학생이 등장한다. 문득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때에 본고사를 위한 특별 수업에서 한국의 단편 소설을 읽고 리뷰를 써오는 것을 과제로 내주곤 했었다. 정규 수업이 아니었기에 과제를 반드시 제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수업을 듣던 상당수의 학생들이 서울의 괜찮은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였기에 논술 고득점을 위해서는 필요한 과제라고 생각되었다. 매주 리뷰를 돌아가며 발표하곤 했는데, 몇 주가 지나자 대부분의 학생들이 과제 제출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독후감을 써오는 학생들이 별로 없어서 나는 꽤나 자주 리뷰 발표를 했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책을 읽고 줄거리를 갈무리하고 느낌을 쓰는 것을 즐겨했던 것  같다. 


김남숙 작가의 ‘파주’를 읽으면서 혹시나 나 또한 누군가에게 잊히지 않는 상처를 준 것은 아닌지 잠깐 동안 심각해졌다. 취사병 시절 현철을 구타하고 못살게 굴었던 정호의 뻔뻔함은 대중적 분노를 자아내지만 정호의 치사한 변명 중에 하나인 자신은 현철이 당한 것보다 심하면 심했던 덜하지는 않았다는 말이 완전히 100프로 뻥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염치가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고 타인에게 피해와 상처를 주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인정하며 부끄러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염치가 없는 사람들은 비슷한 아주 두터운 낯짝을 보여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왜 이제와서 이러는 거냐고? 나만 그러게 아니고 다들 그러지 않느냐고? 니가 나를 그렇게 만든 원인제공자라고.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바라는 것은 진심어린 사과와 정당한 처벌이다. 하지만 염치가 없는 사람들은 그 과정을 회피하고 싶은 겁쟁이가 대부분이라 또 다른 폭력을 선택하다. 돈이든 권력이든 무엇을 이용해서라도 과저에 저질렀던 잘못을 다시 반복한다. 가해자였던 정호의 애인이 현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것은 어쩌면 이미 염치가 소멸된 정호라는 인간이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을 예견했기 때문은 아닐까.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는 어린 나이에 신내림을 받은 후 30년 동안 박수무당으로 살아온 주인공이 더 이상 접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러 자신이 모시던 할머니신이 앞집으로 자리를 잡은 과거의 앳된 자신과 같은 어린 학생에게 옮겨간 것을 알게 된 이후의 이야기이다. TV에서 예전에 연예인으로 얼굴을 알린 이들이 한동안 자취를 감춘 후 신내림을 받아 용한 무당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곤 한다. 이미 대중적으로 많은 이들이 알고 이들이 굿을 하거나 점괘를 맞추는 모습 뿐만 아니라 갑자기 무속인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들려준다. 무병이라고도 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세는 신내림을 받아야만 말끔히 사라진다고 하니 샤머니즘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받음이라고 귀결짓지만, 미신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믿기 힘든 이상한 현상 중의 하나로 치부해버린다. 최근에 영화 ’파묘‘를 봐서 그런지 소설 속에 그려지는 굿하는 장면이 어렴풋이 그려지며 가짜 중의 진짜가 되기 위해 피갑칠을 하고도 서슬퍼런 작두에서 내려오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은 혼모노 라는 진짜는 과연 누가 판명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감정과 노동 사이, 어딘가에 절여진 듯한 이 미진하고 축축한 기운 가운데 ‘낙 없이 사는 사람’이라는 정현의 자기소개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무능을 적시한다. 쾌락을 얻지 못하는 무능이 아니라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쾌락뿐이라는 무능이다. 기만적인 쾌락이 정치를 대체하고 마는 이 상실에는 어떤 우울증적 고갈, 즉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불모가 숨어 있다. 레드콤보 한 마리의 화끈한 맛, 유튜브와 왓챠 등 OTT의 짜릿한 콘텐츠와 영구적인 릴스의 미로 속에서 우리의 패배감과 무기력은 짧고 강력한 경험에 밀려 무한히 지연된다.(238)”


“신분이나 계급, 인종이나 성별과 무관하게 오로지 개인의 능력만을 평가 준거로 삼겠다는 능력주의는 언뜻 계층 간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케 하는, 차별로부터 거리를 둔 공평한 체제로 보인다. 그러나, 노력한 자가 그 대가로 능력을 얻고 이를 인정받아 차등적으로 대우받게 된다는 이 접근법은 노력한다고 해서 누구나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은폐한다. 편향적으로 축적된 부와 권력이 세습되므로 동등한 출발선에서 시작하기 어려우며(유전 등 인간이 인위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요소를 제외하여도) 누구나 노력하여 재능을 얻고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지 않은 환경에서 노력은 능력과 직결되지 않는다.(287)”


#2024제15회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 #김멜라 #공현진 #김기태 #김남숙 #김지연 #성해나 #전지영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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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돈키호테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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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연 작가의 [나의 돈키호테]를 읽었다. [망원동 브라더스]와 [불편한 편의점]시리즈로 이미 페이지 터너로서의 명성을 얻은 저자의 새로운 신작이다. 이번 작품도 전작과 마찬가지로 소시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그리며 우리가 정말로 중요한 것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란 궁극적 질문에 도달하게 만든다. 소설의 가장 큰 모티브가 된 것은 지금처럼 인터넷이 상용화 되기 이전에 집집마다 브라운관 TV 밑에 연결된 VHS 비디오 플레이어를 통해 즐겼던 비디오 영화 대여점이다. 지금이야 OTT가 범람하여 친구나 지인을 만나도 공통된 화제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즐길거리가 많아졌지만, 비디오 테이프를 대여점에서 빌려 볼 때만 해도 즐길 수 있는 영상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TV 화면이 크지도 않았는데, 겨우 14인치나 16인치 정도 되는 사이즈의 화면에도 그렇게 열광할 수 있었다니 인간이 정말로 재미있어 하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의아해진다. 


정확히 언제부터 비디오 테이프가 사라진 것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2005년에도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 예약녹화 버튼을 누르고 외출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전에도 인터넷으로 영화를 다운 받아 공씨디에 구워서 돌려보곤 했었는데, TV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는 쉽게 구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미국에 이민이나 유학을 간 사람들은 한국 방송을 녹화한 비디오를 대여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하고, 그렇게 외국에 오랜 기간 머무는 이들을 위한 큰 선물 중의 하나는 아주 유명한 한국 드라마를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나 부피를 줄인 영화 씨디를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고 한다. 내가 외국에 머무는 기간에는 그나마 아주 느린 인터넷 덕분에 지금의 스마트폰 화면보다 작은 화면으로 재방송해주는 사이트를 통해 한국 방송을 즐겨보곤 했었다. 

사실 소설의 소재는 비디오 대여점이지만 주인공 진솔이 고향으로 내려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방문한 곳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돈키호테의 삶을 꿈꾸던 돈 아저씨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진솔을 비롯한 아이들의 아지트가 된 돈키호테 비디오 대여점은 단지 비디오를 빌려 가는 곳만이 아니라 돈 아저씨를 통해 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친목을 도모하는 특별한 장소였다. 방송계에서 피디로 일하던 진솔은 자신의 콘텐츠를 비열하게 뺏아가는 상사들의 욕심에 환멸을 느끼고 대전 엄마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막상 그곳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날들이 늘어가자 솔은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혼자 운영하는 치킨집을 물려받게 될까 전전긍긍하다 우연히 어린시절의 한 때를 장식한 돈키호테 비디오 대여점 자리를 지나게 된다. 돈키호테가 있던 곳은 이미 카페로 바뀌었고 진솔은 돈아저씨를 떠올리며 어디로 가신 것일까 궁금해한다. 

돈아저씨의 근황을 궁금해하던 진솔은 아저씨의 아들인 한빈을 만나게 되고 한빈조차도 아버지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김호연 작가의 소설을 읽다보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좌절하거나 실패한 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이 마주했을 처절한 현실을 자세하게 그리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분명히 많이 힘들었을 것 같은 등장 인물도 소설 속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힘을 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 어찌보면 그게 더 현실적인 것 같다. 우리는 나의 아주 가까운 사람의 불행한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조차도 어째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 자세히 묻지 않을 때가 많다. 어차피 알아봐야 마음만 아프고 내가 뭘 어떻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짜 진심은 그 일과 무관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없는 사람은 없다. 너무나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도 결국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구원을 받기 마련이기에 따뜻한 손의 온기 하나만으로도 죽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슬픈 속사정은 독자들로 하여금 알아서 헤아리기를 바라는 것만 같다. 이미 시궁창 속에서 한참이나 헤매었을 인물들의 사연을 낱낱이 파헤치기 보다 현대인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선을 지키는 한도에서 지켜봐주기를 바라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진솔의 유튜브 방송을 통해서 전하고 싶었던 것은 잊히는 사람들을 눈여겨 봐주는 것이다. 지하철 역사를 거닐다보면 벽을 보고 혼자 앉아 있는 분들을 지나치게 된다. 냄새도 나고 행여나 병이라도 옮을까봐 멀찌감치 떨어져 걷게 되지만 등을 보이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이들의 잔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어떤 이유 때문에 그렇게 춥고 더울 때도 한데에 혼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일까.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배우 변요한의 대사였던 ‘무용한 것들’에 대한 사랑이 더없이 하찮게 느껴지는 시대에도 정의와 자유와 사랑을 찾고자 수없이 단단한 벽을 두드린 돈아저씨와 진솔의 여정에서 잠시나마 행복했다. 


“방송 일을 하며 가장 괴로웠던 게 이런 경우였다. 안 보는 데선 미친 듯이 씹고, 보는 데선 살갑게 굴고, 그러다가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다신 안 볼 듯 싸우고, 그러고 나서도 서로 필요한 일이 생기면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또 같이 일하고. 일이란 게 다 그렇지, 라며 쿨한 척 뻔뻔하게 구는 사람들의 이합집산 생태계.(94)”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다민 그 고지식함이 아마 불편한 대목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아무래도 윗사람들은 어쨌거나 좀 아부도 떨고 응대도 잘하는 친구들을 선호하니까. 그게 어쩔 수 없는 권력의 속성이랍니다. 리더로 서 있다 보면 외롭거든. 외로우니 옆에 와 말 받아주고 알랑대는 놈들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어요.(136)”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해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지내는 특정 감정의 물고기는 어떤 낚시 같은 말에 걸려들어 수면 위로 끌려 나온다는 것을요.(174)”


#김호연 #나의돈키호테 #나무옆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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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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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진 작가의 [광인]을 읽었다. 몇 달 전 구입해 놓고 첫 장을 읽다가 위스키 얘기가 나와서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두깨도 만만치 않고 다른 책을 먼저 읽다보니 책장에 꽂힌채 검은색의 책머리가 두드러지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작가님의 짧은 단편 시리즈를 읽고 나니 다시 한 번 광인에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난 번에 읽었던 첫 장을 집중해서 넘기고 나니 그야말로 진짜 소설이 뭔지 보여주겠다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읽는 것을 멈출수가 없었다. 근래에 꽤 많은 책을 읽었지만 이렇게 한 인간의 내면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자세하고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작품이 있었던가, 이렇게 사랑에 대해서 낱낱이 해부한 것처럼 심연을 바라보게 해 준 작품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니 책이 주는 묵직한 무게 만큼이나 해원, 하진, 준연의 마음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저자의 전작인 [사랑의 이해]에서도 그랬지만 이혁진 작가님은 딱히 러브스토리를 소재로 삼은 것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랑이 어떠했는지, 우리가 옳다고 사랑하는 사랑의 관념적인 요소들이 과연 정말로 사랑함에 있어 적절히 녹아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혼자만의 착각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을 상대에게 덧씌우며 자기만족에 도취한 채 정의롭지 못한 가짜 인생을 살아온 것인지 철저한 통찰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만 같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진짜 제대로 된 사랑을 하기 위해서 포기하며 희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심도 있게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세상을 향해 호소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그런지 해원의 비극적인 마지막 모습이 그동안 사랑을 예사롭게 대한 우리 모두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만 같다. 


소설의 화자인 나로 등장하는 주인공 정해원은 마흔 한 살의 성공한 직장인이다. 아주 오랜시간 주식시장 관련된 재무 일을 통해 적지 않은 부를 쌓게 되었고 성공한 건설업 오너인 아버지의 뒷배경 덕분에 선자리에 들어온 여자의 적나라한 몸매 사진까지 첨부된 파일을 건넬 정도로 누구나 탐내는 신랑감이었다. 하지만 해원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밖에서는 그저 사람좋은 웃음을 건네는 위선적인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뿐 아버지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엮인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을 종용하는 어머니와 벌써 6개월 간 연락을 끊은 채 지내고 있던 차에 허름한 상가 건물의 교습소에서 준연에게 플룻 레슨을 받으며 그와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다. 나이가 들어 누군가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해원은 준연의 사랑과 일에 대한 명쾌하고도 분명한 말솜씨를 맘에 들어하며 그와 하는 레슨이 큰 활력소가 됨을 느끼게 된다. 더군다나 둘 다 위스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으니 해원의 고뇌와 외로움은 준연을 통해서 적절히 위로받게 된다. 


어찌보며 해원과는 정반대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에 있는 준연은 몹시 가난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이치와 흐름에 따라 적절히 꿈이나 희망과는 멀어진 선택을 하게 되고, 무릇 어른이라면 그런 것들을 내려놓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 책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준연은 그런 세상의 잣대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 음악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지내온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어머니와 벌써 6년 째 연락없이 지내고 있지만, 준연은 작곡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일념하에 경제적 어려움이 가져온 고통도 기꺼이 맞서고 있다. 하지만 준연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연락이 오고 어머니가 말기암에 걸렸다는 사실 때문에, 어머니가 치료를 거부한다는 사실 때문에 지난 6년이란 시간의 무게만큼 괴로워한다. 해원은 준연을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준연의 사연을 듣고 무작정 그에게 도움을 줄 정도로 준연을 응원하게 된다. 교습소에서 준연과 마신 이름없는 위스키가 더할 나위없을 만큼 좋았고 그 위스키를 만든 이가 준연과 가끔씩 연락하는 친구 하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슨을 받으러 교습소에 들른 해원은 하진과 준연의 합주를 듣게 되고 지난 번에 마셨던 위스키를 만든 이가 바로 하진임을 알아보며 그녀와의 사랑을 예감하게 된다. 해원은 하진과 준연은 어떤 관계일까 궁금해하며 행여나 오랜만에 마음을 여는 친구인 준연을 잃지 않기 위해 하진에게 점점 끌려가는 마음을 잡으려 한다. 해원의 짝사랑이 시작되고 이유없이 불쑥불쑥 올라는 준원에 대한 질투와 시기는 말랑말랑한 연애소설처럼 소소한 재미를 선사하지만 직업과 일에 있어 철두철미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해원은 풋내기 같은 20대의 사랑을 반복하지 않으려 이성의 끈을 되잡기만 한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비가 많이 오는 날 허름한 상가의 교습실에서 셋이 함께 술을 마시다 갑자기 꺼져버린 형광등의 불빛은 앞으로 이어질 세 사람의 인생이 어떤 파국을 맞이할 것인지 엿보인 복선이 아니었나 싶다. 


준연의 오랜 친구이자 한때는 기타 연주가를 꿈꾸며 유학까지 갔었던 하진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위스키를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가업인 증류소를 맡게 된다. 하진 가족의 비극적인 인생사는 하진이 증류소에 집착하며 토종 위스키가 전무하다시피한 우리나라 시장에서 인정받고 널리 보편화될 수 있는 위스키를 제조하는 증류소를 만들겠다는 엄청난 포부를 가진 인물이다. 해원이 첫눈에 반한 하진은 단지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추진력이 강한 일 잘하는 여성이 아니라 아버지의 비극적인 사고를 경험했음에도 그 상처에 짓눌리지 않고  그동안 오랜시간 준비해왔던 연주가로서의 삶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자신에게 진짜 만족감을 선사할 수 있는 일에 하나도 허투루 대하지 않는 진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진이라면 결혼과 가정에 냉소적인 해원의 마음에 진짜 사랑이라는 감정이 뿌리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엿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진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해원은 준연의 자리가 신경쓰이지 시작한다. 셋이 만나서 즐겁고 유쾌하게 대화하며 위스키를 나누는 시간도 좋지만 해원은 하진과의 오붓한 시간이 되기를 바라게 되고, 준연과의 우정은 위기를 맞게 된다. 해원과 하진의 연애에 속도감이 붙을 때면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듯이 준연의 사건이 터지고 해원의 사랑은 급브레이크를 밟게 된다. 해원의 감정은 하진을 만나기 전, 준연과 대화를 나눌 때에는 몹시도 이성적인 폭군인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선택과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처럼 그려지지만, 하진과의 만남 이후 준연에 대한 질투는 그의 광기어린 사랑에 폭주기관차를 달게 한다. 


준연이 자신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이후 삶의 의지를 잃게 된 후 하진의 권유에 따라 증류소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되는 장면과 그 이전에 교습실에서 어머니를 죽게 만든 자신에게 화를 내며 유리컵을 깨뜨려 상처난 후 하진의 간호를 받게 되는 장면은 독자로 하여금 해원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분노를 자아내게 된다. 대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무리 친구 사이라 해도 선선히 다른 남자를 간호하도록, 그와 24시간을 같이 일하도록 허락할 사람이 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해원의 분노와 설득에 동의하지 않는 하진의 대답은 우리가 왜 그토록 자주 사랑에 실패하고 상처받았는지를 알려준다. 

“나를 믿어 주지 못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할 수 없으니까. 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믿지 못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니까.(321)”


하진의 사랑과 믿음에 대한 확고한 대답은 해원에게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고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하진과 준연의 공존에 해원의 속은 타들어만 간다. 급기야 남녀 사이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의심이 잔디풀처럼 자라나 하진을 온전히 자신의 아내로 만들기 위해 증류소를 불태울 계획을 세우게 된다. 망상에 휩싸인 해원의 방화 계획을 읽을 때만 해도 설마 그가 이렇게 미친 짓을 할까란 의심과 더불어 차라리 하진과 헤어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란 답답함이 밀려왔다. 제목처럼 해원은 하진을 소유하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광인이 되어갔다. 증류소에 불을 내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엄청난 희열과 만족감을 맛본 해원은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 


해원의 방화 이후 이어지는 하진과 준연의 충격적인 상태의 연속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올곧이 누군가를 소유하려고 하는 욕구 그 자체가 얼마나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지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게 그려지고 있다. 점차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해원과 하진을 위해 해원을 용서한 준연의 비극적인 선택, 그리고 증류소가 불탄 후 생의 의지를 잃어버린 하진의 낙담한 하루는 해원의 선택이 어떤 지옥문을 열었는지, 열정과 의욕이 남들보다 몇 배나 넘치던 사람도 그의 심연을 건드리는 사건이 발생하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 너무나도 리얼하게 보여준다. 해원은 조금 어처구니없게도 방화범으로 발각되지 않고 하진과 결혼하게 되지만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하진을 바라보며 죄값을 치루지 않은 대가를 이렇게 자신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이 받게 된 현실의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된다. 


“이제서야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진의 말들, 행동들, 하진이 내게 했던 사랑을, 그리고 내가 하진에게 했던 사랑이 되지 못한 채 욕망에 불과했던 그 모든 짓들을. 사랑은 기꺼이 두 번째가 되어 주는 것이고 서로에게 최악이 되지 않는, 다만 최악을 지워 주는 사람이 되는 것, 그 시도와 노력이고 행위였다. 사랑이 그런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누가 시키거나 돈을 준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중심적인 마음만 따른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사랑은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아무리 가진 게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비좁은 마음에서, 작고 유약한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658)”


“이해할 수 없던 걸 이해하는 것이 이해였다. 믿을 수 없던 걸 믿는 게 믿음이었다. 사랑이 어려운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시작하는데는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이어 가기 위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믿을 수 없던 것까지 이해하고 믿어야 하니까, 그래서 결국엔 사랑하지 못했던 것까지 사랑해야 하니까. 사랑은 지독히 어렵고 힘든 것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재능과도 무관한, 의지와 노력, 헌신과 희생, 용기와 노력을 요구하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이해할 수 없던 것을 이해하고 믿을 수 없던 것을 믿게 해 주고 우리가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던 것을 해내게 해 주는 것이었다. 설령 사랑이 끝나더라도 그 경험과 능력은 우리가 새롭게 사랑할 것을 더욱 힘껏 사랑할 수 있게, 그래서 더욱 힘껏 살아있게 해 줄 수밖에 없었다.(659-660)”


해원의 마지막 선택에 앞서 몇 페이지에 걸친 뒤늦게 깨달은 사랑에 대한 담론은 비극적인 결론이 예상되기에 더욱 더 가슴저미게 다가왔다. 사랑은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이 아닌 지금 현재 나에게 없는 것을 깨닫고 앞으로 만들어가야만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조금만 더 일찍 알 수 있다면 그 많은 상흔을 짓무르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이혁진 #광인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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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쇄 위픽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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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의 [파쇄]를 읽었다. 위즈덤하우스 위픽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다. 표지에는 “일단 마음 먹고 칼을 집었으면 뜸들이지마”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어쩌면 구병모 작가를 알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는 [파과]를 읽고 나서 이렇게 다양한 어휘를 적재적소에 구사할 수 있다니 놀람을 금치 못했는데, 내용 또한 기존의 킬러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부셔버리는 신선함이 돋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몇 년이 지나 [파과]의 프리퀼이라고 할 수 있는 [파쇄]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어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게 벌써 1년이 지나버렸다니. 그리하여 위픽 시리즈는 벌써 50권째에 이르고, 한 손에 가볍게 들리는 무게와 분량으로 잠깐 이동하는 도중에 몰입할 수 있는 매력을 지닌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 아닌가 싶다. 


[파과]의 내용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조각이라는 이름의 노년에 이른 여성이 오랜 시간 킬러로 활동해 왔다는 내용이 파격적으로 다가왔었다. 그런데 조각이 어떻게 프로페셔널한 킬러가 되었는지 [파쇄]를 통해 극적인 한 장면을 엿볼 수 있었다. 영화든 드라마든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킬로로 다룬 경우는 꽤나 많다. 여리여리한 몸으로 장정 몇 명을 순식간에 때려눕히는 장면들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 코웃음이 쳐지기도 하지만 미적 관조의 충족감과 더불어 항상 남성보다 한계를 지닌 육체적 존재를 넘어서는 장면들이 진부하고 반복된 캐릭터임에도 비슷한 호응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늙고 지친 킬러를 다룬 영화들은 많지 않다. 젊은 킬러가 있다면 당연히 그들도 나이가 들어갈 텐데 말이다. 


이번 작품에서 조각은 산장 어딘가에서 탄탄한 끈에 묵힌 채 정신을 차리게 된다. 처음엔 조각을 훈련시키던 실장과 더불어 적의 공격을 받고 납치되었거나 고문을 받는 중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조각은 의식을 회복해가며 두 손을 묶은 끈을 풀기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비탈진 흙바닥에서 서서히 미끌어질 수 있다는 위협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실장과 산장에 올라와 받던 훈련의 시작이 그려진다. 아마도 영화나 드라마의 실사로 촬영되었다면 보는 이로 하여금 좀 더 실감나고 긴장감있게 그려졌을지 모르겠지만, 소설 속에 나온 조각의 훈련을 그대로 재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실장은 조각을 거칠게 다룬다. 산장에서 실장이 조각의 반응을 테스트 하기 위해 갑자기 칼을 휘두르며 공격을 가했을 때, 조각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면 그녀의 눈은 이미 예리한 칼에 도려내어졌을지도 모른다는 부분은 능숙한 킬러가 되기 이전의 풋내기 같은 조각의 긴장되고 흥분된 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실장의 훈련 강도는 점점 높아지고 두 나무 사이에 줄을 걸어 놓고 조각이 매달려 턱걸이를 하도록 하는 장면은 독자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 땀이 흥건해지며 기력이 다한 채 한 손으로 매달려 밑으로 떨어질 경우 다리 하나 정도는 가볍게 부러질 것이라는 조각의 시선에 긴장감을 최고조시켰다. 조각이 매달린 줄을 칼을 던져 한 가닥씩 끊을 정도의 무공은 어떻게 쌓을 수 있는 것일까? 조각을 훈련시키고 언젠가는 같은 팀이 되어 실행하게 될 지령과 임무는 또 다른 적대자의 그룹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어찌보면 세상 무용한 일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게 된 조각과  실장과 같은 인물들은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었는지의 사연이 궁금해지기만 한다. 


#구병모 #파쇄 #위즈덤하우스 #위픽1 #wef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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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 - 들키면 어떻게 되나요? 위픽
최진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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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작가의 [오로라]를 읽었다. 위즈덤하우스 위픽 시리즈 49번째 작품이다. 표지에는 "들키면 어떻게 되나요? 사랑을 감출 수 없어요"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최유진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제주도에서 한달살이를 위해 떠난다. 바쁘고 정신없이 보낸 직장생활 중에 주어진 잠깐 동안의 유예이거나 새로운 곳에서의 출발을 위해 맛보기로서의 정착도 아닌 오로지 타인에 대한 선의로 인해 조금은 어이없게 위탁받은 친구 오세정의 예약금을 날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지방의 한적한 곳에서 한달살이가 유행하고 있다. 특히나 제주도의 이국적인 자연경관은 도시의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확실한 기분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기에 여유가 있는 이들은 기꺼이 비용을 감내해가며 제주도의 원룸과도 같은 공간을 대여한다. 소설에서 나온 것처럼 주인공이 머문 숙소도 맨 윗층을 제외한 나머지 집들은 여느 집들처럼 오랜 시간 머무는 사람들이 사는 집이고, 유진이 머문 곳의 몇 개의 방만이 일시적인 대여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실제로 제주도에 게스트하우스나 렌털하우스를 지어놓고 수도권에 살면서 관리자를 고용하여 운영하고 있는 주인들이 꽤나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주인공이 머문 숙소도 일상생활을 위한 웬만한 도구들이 다 비치가 되어있는 짧은 기간 혼자 머무는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상태로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달살이를 위한 공간의 상태보다 그곳에 머물고자 하는 이의 마음일 것이다. 유진은 친구 오세정의 어이없고 심지어 적반하장의 태도로 돌변한 팔렴치하다고까지 치부할 수 있는 대응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에서의 시간을 받아들인다. 유진에게는 세정과의 소모적인 감정싸움보다 사랑하는 연인의 거짓말에 속아 보낸 시간에 대한 위로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유진은 제주도의 숙소에서 만난 관리인과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의 호의를 계기로 조금씩 이미 어긋나버린 사랑을 추억하며 또 다른 이름을 자신에게 붙인다. 안녕하세요. 오로라입니다. 


오로라라는 이름으로 제주도에서의 새로운 자신을 마주하게 된 유진은 상처만 남긴 상대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자신을 만나왔음을 드러낸다. 오로라라는 또 다른 이름의 제목은 작가가 선택한 주인공을 너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독특한 화법이 아니었다면 사기 연애에 이어 결혼까지 이르는 진부한 사연의 주인공이 될 법한 유진의 여행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공감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아무리 유부남이 자신을 속이고 사랑을 속삭였다고 해도 배신감에 치를 떨며 복수의 칼을 간다 하더라도 그와 만나며 미래를 기약했을 유진의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그의 폐부에 쌓여 숨을 쉴 때마다 그와 함께 시간의 감상을 토해내는 고통을 감내하게 만든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성가의 가사말처럼 사랑없는 믿음은 존재할 수 없지만, 믿음없는 사랑은 가능한 것이니, 유진이 보낸 사랑의 시간은 믿음은 처음부터 전제되지 않았음에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넘쳐나 누군가에게 들키게 된다면 여전히 그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음을 숨길 수 없기에 유진은 오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택하여 믿음과 사랑에 대해서 관조하는 시간을 갖는다. 


"네가 잊은 것들을 모조리 되살려 이어 붙인다면, 망각을 복원한다면, 그렇다면 타인을 사랑하듯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너는 네가 망각한 것들을 그리워한다. 망각은 돌에 가까운가 돌과 돌 사이 바람 통로에 가까운가. 망각과 기억 중 무엇에 기대어 아직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일까. 아니, 이미 어느 정도 허물어졌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와르르 무너지지 않았을 뿐 어쩌면 귀퉁이부터 조금씩...(31)"


"숙소로 돌아가는 길, 거센 바람에 취기를 식히면서 너는 중얼거린다.

내가 나로 살지 않아도 되는 두 달.

바람에 목소리가 묻히는 것만 같아서 너는 조금 더 큰소리로 말한다. 

내가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두 달. 

숙소의 공동 현관을 열며 다짐하듯 말한다. 

내가 나를 선택할 수 있는 두 달.(36)"


#최진영 #오로라 #위즈덤하우스 #위픽49 #wef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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