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파란, 나폴리 작가의 작업 여행 1
정대건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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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건 작가의 [나의 파란, 나폴리]를 읽었다. 안온북스 작가의 작업 여행 01 이다. 제주도의 서쪽 끝에 사는 사람이 정반대에 있는 성산일출봉을 가 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조금 과장된 얘기일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자기가 사는 곳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을 가지 않고 일평생 살아간 사람들도 있다. 여행과 새로운 만남, 해보지 않은 것을 도전하는 경험이 필수적인 삶의 요소로 등장하는 시대이지만 그런걸 하지 않았다고 삶이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 저기 해외 여행을 많이 다녀온 사람들이 자랑이랍시고 떠벌이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나도 모르게 속에서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반발심이 솟구친다. 그리고 위선자처럼 '지금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여행 따위를 다녀왔다고 자랑을 하다니 한심하다 한심해'라는 비열한 사고를 작동시킨다. 아마도 나는 지금 어딘가 무척이나 가고 싶은가보다. 


포지타노의 레몬, 쏘렌토의 아기자기한 기념품 숍, 아말피 해안도로의 깍아지는 절벽도로, 폼페이의 흙색 유적들을 지나쳤음에도 나폴리는 인연이 없었다. 나폴리에서 출발한 유로스타를 수없이 탔음에도 언제나 돌아오는 종착지는 로마였다. 로마 밑으로는 가고 싶지도 않았고, 아는 사람도 없었으며, 가야 할 일도 없었다. 아마도 나에게 있어 제2의 고향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은 북부의 베로나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저자의 나폴리 찬사를 읽다보니 나폴리를 다녀가지 않은게 무척이나 아쉽고 후회스러웠다. 그때는 왜 그렇게 편견을 가지고 남부 이탈리아를 바라봤을까, 사실 개똥과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건 이탈리아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직업이 작가이지만, 작가라고 해서 아무 때나 쉴세없이 영감이 떠오르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작가들이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낯선 곳에 머물며 스스로의 몸을 조금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글쓰기의 예리한 감각을 되살리기 위한 시도이지 않을까란 나의 예상은 이번 책을 읽으며 완전히 빗나갔다. 작가에게 있어서 글감을 찾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리라. 나폴리에서 석달 간 지낸 저자는 마치 운명적인 피정의 시간을 보낸 것처럼 집돌이로 지내며 외부의 만남을 주저한 이유를 깨닫게 된다. 나폴리를 떠나기 전날 전망대에 올라 갑작스런 울음을 토해내며 응어리진 무언가가 풀어지는 경험을 전해준다. 어릴 때 친구로부터 외면당한 작은 상처 이후 거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저자의 마음을 오랜시간 지배해 왔기에, 나폴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보여준 환대의 순간들은 나폴리가 언제나 그립고 정겨운 고향의 맛과 향기를 지니게 해주었다. 


안부가 궁금한 사람에게 잘 연락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에,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끝없이 외롭고 쓸쓸했다는 말에 뜻밖의 위로를 얻게 된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덜컥 나의 몸을 내어놓을 수 있다는 점에 박수를 보내드리게 된다. 그리고 그 용기로 인하여 어딘가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무상의 환대를 충만히 받고 왔음을 읽게 되어 기쁘다. 


"예전에는 이야기가 그저 도피처와 위안이 되어주는 정도만 되어도 훌륭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훌륭한 이야기는 단순한 도피 이상이다. 앞이 깜깜해 행복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행복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력을 줄 수 있다. 그 상상력은 정말로 사람의 선택을 바꿀 수 있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 내가 사랑한 이야기들은 내 인생이 긍정적인 쪽으로 헤엄치도록 경로를 바꿨다. 나는 이야기의 세계에 큰 빚을 졌다.(178)"


#정대건 #나의파란나폴리 #안온북스 #작가의작업여행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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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해로외전
박민정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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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정 작가의 [백년해로외전]을 읽었다. 80년대면 그렇게 오랜 옛날도 아닌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군부독재의 시절이라 검열을 당했으며, 같은 여자임에도 아들만 우선시하는 남아선호사상이 만연한 때였고, 버려진 아이들이 여전히 무수하게 입양되던 때였다. 불과 40여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일상을 살아온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있고, 급변하는 시대의 속도를 도저히 맞출 수 없는 터라 갈등은 봉합되지 못한 채 여생이 마무리되곤 한다. 차라리 일제강점기 이전이나 한국 전쟁 후 폐허가 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면 조금은 나와는 무관한 일로 치부하며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와 비슷한 시기의 유년기를 보낸 누군가는 가족들에게 버림받을까 전전긍긍하다 결국은 홀로 이탈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못내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도 당연하게 생각한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주현은 소설가로 대학교수로 임용되지만 비슷한 경력을 가진 남성 작가 교수와 학생들의 부정적인 평가에 휘말리며 우울증을 앓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주현의 큰아버지가 가족과 관련된 내용을 바탕으로 쓴 '백년해로' 단편 소설을 소설집에 싣지 않았음에도 사촌 동생 예리의 남편의 취미생활로 인해 가족들의 치부가 드러나 명예가 실추되었다며 갈등을 겪게 된다. 물론 소설 속의 가정이지만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완전한 창작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공상과학 소설을 쓴다 하더라도 그 소설 속에 등장한 인물들의 대화와 갈등은 어쩔 수 없이 과거를 지나 현재를 살아가는 나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길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지 만일 내가 나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잠깐 상상해보았다. 아마도 누군가는 깊은 상처를 받을 것이고 주현의 경우처럼 친척들이 벌때처럼 들고 일어나 가족의 치부를 드러낸 사실에 불같이 화를 내며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분노와 공격이 두렵기도 하지만 과연 소설을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에게는 그리 떳떳할 수 없는 하지만 이제와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드러내는 것은 분명 상처를 주는 것이기에 정당화될 수 있는지 의문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주현의 사촌 언니인 야엘(장선)의 경우 아버지의 재가를 위해 할머니가 입양을 주선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현이 그 사실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작품에는 참 다양한 어른의 모습이 그려진다. 삼남매를 둔 아들이 이혼하자 재혼에 걸림돌이 될 것 같은 두 딸을 강제로 입양보내려는 할머니의 모습은 용서라는 결론과 연결될 수 있는지조차 연상하기 힘들다. 원래 인성에 문제가 있는 집안인지, 두 딸을 버리고 재혼하여 또 다시 두 딸을 갖게 된 큰아버지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큰아버지 댁에 얹혀 살게 된 어린 주현에게 큰어머니는 새큰어머니라는 그러니까 장훈과 예리, 예은은 이복형제라는 말할 필요 없는 사실을 알리며 쾌감을 맛보는 극도로 이기적인 어른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다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어린 나이에 임신해서 싱글맘이 된 작은 어머니와 그녀의 딸 수진 언니는 큰아버지의 집에서 부엌옆에 붙은 식모방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천덕구러기와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하지만, 수진의 굳은 심지를 기반으로 예리의 독사 같은 괴롭힘을 이겨내며 사회적 성공을 이루고 엄마와 함께 큰아버지집을 벗어나는 사이다를 안겨주기도 한다. 유명 로펌의 변호사가 된 수진 언니는 엄마의 고생스러운 삶을 보상하기 위해 결혼도 마다하고 엄마와 단 둘이 살아가는데, 자신이 누리려고 하는 모든 사치스러운 행동을 하려 할 때마다 엄마의 고생스러운 시간이 떠오른다는 묘사에서 마음이 많이 먹먹해졌다. 


피를 나눈 형제이기에 치고 받고 싸우더라도 화해해야 하는 거라고, 치를 떨 정도로 상처를 주고 받아도 다시 같이 밥상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통념은 반대로 이 소설 속에 나온 사랑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한 이들에게 제대로된 사과와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핏줄을 강조하면서도 어째서 장선과 장희를 버리며 입양보냈는지, 2층에 남는 방이 있음에도 어째서 자신의 딸과 손녀 수진을 부엌대기처럼 대했는지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프랑스로 입양된 야엘은 정형외과 전문의가 되어 동생 장훈의 딸인 수아와 메시지를 주고 받다가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어찌보면 이 모든 문제의 원흉인 큰아버지는 야엘에게 있어서 아예 제외된 인물로 그려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큰아버지에게 중요한 아들이었던 장훈은 소심한 인물로 학교 친구들과 간 해외여행에서 물이 무서워 제대로 놀지도 못하는 유약한 모습을 보이다 그곳에서 만난 수아 엄마와 결혼을 하게 된다. 속물의 대명사라 할수 있는 큰아버지는 못난 아들에게서 자랑거리를 찾아내지 못하자, 아마도 분명 탐탁치 않았을 동남아 며느리가 좋은 집안의 자녀이고 공부도 많이 했다는 식으로 유세를 떤다. 주현이 바닷가 언니라 칭한 수아 엄마는 아마도 점점 늘어가는 이주민들을 위한 한국어 강사로 채용된 것을 계기로 만남을 갖게 되지만, 주현이 비열한 협잡에 지쳐 학교를 그만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닷가 언니는 이사회의 반대로 교수임용이 취소되게 된다. 


주현이 처한 상황을 살펴보면 소수라 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읽고 감상을 나누며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무리에 속한 이들조차도 그들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인정받고자,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비열한 짓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주현이 속한 글을 다루는 사람들의 공동체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한다고 인정받거나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추종하는 이들이 모인 종교 공동체도 비단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째서 인간은 어딜가나 타인의 잘남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삐져나오는 질투와 시기를 교묘한 방법으로 상처내기를 일삼는 것인지. 어떤 수학과 과학 공식으로 한 사람의 삐뚤어진 마음을 계산하여 명명백백한 잘못을 가려낼 수 있다면 우리 삶이 조금은 여유로워질 수 있을까? 저자는 주현과 야엘의 만남을 통해서 그리고 주현이 낸 단편 소설로 가족들이 혼란을 겪었던 두려움을 반복할 것 같은 야엘의 연재와 단행본에 대한 떳떳함을 계기로 이 모든 인간이 이기적인 나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 밖에 없음을 피력한다. 그리고 그 용서는 나를 힘들게 한, 나를 괴롭게 한, 나를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한 한 누구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용서를 선택한 나는 나를 버린 가족들을 재회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나는 것임을 알려준다. 


"알아봐야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과거, 그저 누군가의 추문으로만 남은 기억을 큰고모는 왜 들추었을까.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애써 노력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할 때 눈을 빛내던 여자의 비열한 표정을 떠올리면서. 그저 그녀는 지독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발설하는 게 재미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걸 나는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154-155)"


#박민정 #백년해로외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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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그림자
최유안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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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안 작가의 [새벽의 그림자]를 읽었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 외신에는 전쟁위험국으로 분류될 수 있는 현 상황, 탈북자에 대한 무관심, 통일을 바라지 않는 젊은 세대 등등. 한 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던 시대를 지나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안보의 위협은 단지 정권 탈취를 위한 수단으로 남용되는 것처럼 변질된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이산가족 찾기 방송으로 전국민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당시만 해도 통일에 대한 의식은 꽤나 고취되어 있었고, 한민족이라는 핏줄에 대한 감성도 고무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북한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거나, 국방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탈북자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통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모멘트]를 읽고 독일로 통일되기 이전의 삼엄했던 서독과 동독의 관계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비무장지대라는 몇 키로에 달하는 중립지대가 있어 남한이든 북한이든 그 누구도 원한다고 해서 건너갈 수 없는 상황이 수십년 째 지속중이지만, 서독과 동독의 경우 출입국관리소와 같은 사무실의 통제하에 필요시 서독에서 동독으로 반나절 정도 건너 갔다올 수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비밀경찰들의 활약은 대단했고 스파이로 오인되어 고문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방송으로 보게 되는 날이 왔고, 막연하게 역시 우리나라의 분단상황과는 다르구나 라는 체념섞인 한탄을 내뱉지 않았나 싶다.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상황과 유사한 경험을 하고 통일된 유일한 나라이기에 롤모델로 삼고 그 뒤를 쫒아 우리도 통일을 염두한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당연할텐데도, 우리는 독일의 통일과정에 대해서 심각할 정도로 잘 모른다. 


소설의 주인공 해주가 용준에게 그랬던 것처럼 "통일도 그런 거야. 그게 뭐 대수냐? 여기 지나가는 사람들 봐라. 하루가 힘든 사람들이다."는 일반적인 생각에 용준은 일침을 가한다. "그따위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 전 세계 인류가 되면 뭐 해."(176)


탈북자인 용준이 여동생 준휘가 중국에서 북한으로 강제북송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하며 통일부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어떤 남자가 내뱉는 몹쓸 말이 가상의 세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강제 북송을 멈춰라. 탈북자들 다 죽는다.(194)"

"북한에 돈 퍼주는 짓을 막아라, 그딴 식으로 예산 낭비를 하지 말라!"

"너희 같은 애들이 대한민국에 기어들어와서 국민 혈세 다 갖다 쓰는 거야.(195)"


유럽의 리더와 같았던 독일마저 난민 수용에 있어서 회의적인 반응들이 나오고, 독일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의 극우정당들이 난민 수용 거부를 필두로 국민들의 호응을 얻고 정권을 쟁취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해주가 용준을 통해서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선한 선택은 점점 동력을 잃어가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해진다. 


경찰이었던 해주가 우연히 심폐소생술로 쓰러진 사람을 살리는 탈북자 용준을 만나면서 북한의 실상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북송된 여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망가져가는 용준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독일의 통일과정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해주는 독일의 통일과정에 대한 논문을 쓴 뵐러 박사를 통해 베르크라는 마을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윤송이라는 북한 청년의 사연을 헤집게 된다. 해주는 윤송이가 머물던 집과 그가 자살한 건물을 차례로 방문하며 영국 북한대사관의 자녀였던 윤송이가 부모와 함께 탈북을 시도하다가 부모만 붙잡혀 북송된 채 홀로 독일에 남게 된 사연을 알게 되고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이유가 없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윤송이에게는 이든이라는 갓난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로 윤송이를 지키려 했었던 파독 간호사 장춘자를 요양원에서 만나게 된다. 해주는 장춘자를 통해 베르크라는 마을 사람들이 윤송이의 죽음을 애도하며 진실을 밝히려 하지는 않는 이유를 알게 되고, 이 소설의 핵심을 가로지르는 그동안 용준의 죽음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며 자책해왔던 근원적인 이유를 깨닫게 된다. 


"슐레히테스 게비쎈 Schelchtes Gewissen

죄책감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148)"


칸트의 선에 대한 용준의 해박한 지식을 기억하던 해주는 장춘자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독일에 머물며 베르크의 한인 공동체를 유지하고 탈북자들을 지켜주려 했던 단 하나의 이유가 바로 Schelchtes Gewissen 이었음을 알게 된다. 


"누가 나의 선한 행동에 박수쳐주지 않아도 나는 선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양심이고, 죄책감이며, 선함이다.

인간은 선한 방식으로 진화한다. 책임지지 않는 나를 비난하는 것조차 결국 선함이다.(210)"


우리가 난민을 외면하고 통일에 대해서 무관심하며 탈북자의 생존에 대해서 세금 낭비라고 폭언을 퍼붓는 것은 선함을 포기하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인류가 되고, 먹을 것이 넘쳐나고, 백세 시대가 도래해 장수를 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선을 멀리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 자신을 인간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욕망은 행위를 위한 나침반 같아서, 인간은 대체로 이유 없이 그것에 휘둘린다.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고, 그보다 더 참담한 건 그걸 인지한다고 해봐야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이다.(11)"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모르면 편하다. 해주는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이미 안다. 용준이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갑자기 벌어지는 일들은 원치 않는 타이밍에 끼어드는 경우가 더 많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의지와는 별개로 어떤 사건이 나를 이미 점찍어 두었다는 듯이, 우아하고 갑작스러운 밀물처럼 나에게 몰려온다.(93)"


"우리는 많은 사실을 잘 모른다. 한 사람의 경험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의 경험은 그 한계를 늘 뛰어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록을 읽는다. 그것을 읽으면서 경계 바깥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추론할 수 있다. 인간의 유일한 무기는 다른 사람의 일을 내 일처럼 느낄 수 있는 공감성이 발달해 있다는 것. 그들의 슬픔의 둘레에 잠깐 닿아볼 수 있다는 것.(206)"


#최유안 #새벽의그림자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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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집 - 그러나 여전히 가끔은 울 것 같은 마음으로 아무튼 시리즈 62
김미리 지음 / 코난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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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리 작가의 [아무튼, 집]을 읽었다. 부제는 "그러나 여전히 가끔은 울 것 같은 마음으로"이다. 아무튼 시리즈 62번째 책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게 집이 아닐까 싶다. 내 집만 마련되면 다른 어떤 어려움은 뭐든지 다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무형의 교육을 받은 것 같다. 하지만 도시에 살고자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집 마련이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부동산 투기를 근절해야 한다는 얘기를 경제가 뭔지도 모를 나이때부터 들은 것 같은데 여전히 영끌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유효하다. 연예 기사의 가십거리에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모 연예인이 건물을 사고 팔아 수십억의 차익을 남겼다는 내용을 볼 때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딴 세상 얘기처럼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집도 화장실이 없었다. 아주 어릴때니까 밤 중에는 부엌의 작은 플라스틱 대야에 큰 것도 보았는데, 평소에 주인집 퍼세식 화장실을 이용할 때에는 항상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나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내가 화장실에 힘을 주고 있다는 걸 그렇게 노래로 표시했었나보다. 아마도 퍼세식 화장실의 각종 괴담으로 인해 무서워서 그랬을 것이다. 아니면 그때부터 화장실의 천연에코를 즐겨했을지도. 나도 꽤 오랜 시간 내 방이 없었다. 사춘기의 시작을 알리는 첫 장면으로 기억되는 게 엄마, 아빠 옆에서 나름대로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처럼 그때 처음 내것이 된 포터블카세트플레이어에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유행가를 듣는 것이었다.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서도 벌써부터 어른 흉내 낸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응근 신경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 아파트에 살 때에는 성당에 걸어갈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였기에 걸어서 다니기에는 조금 멀었다. 내 유년 시절의 거의 모든 추억이 담긴 성당에 다니는 동년배의 친구들은 대부분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당시에는 꽤 괜찮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다 걸어서 성당에 다니는데, 나와 몇몇 애들만 버스를 타고 다녀서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었고 버스를 타고 성당을 다니는 건 마치 가난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지금 초딩들도 아파트 이름을 보고 집안 형편을 파악한다고 하는데, 그건 오래전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신축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난생 처음 내 방도 생기고 드디어 성당도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내 방이 생기고 침대와 책상도 있다는 게 너무나도 좋았는데 더 이상 친한 친구들을 만날 수 없었다. 삶의 낙이었던 성당 주일학교를 다니기 싫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살짝 우울감이 엄습해왔던 것 같다. 뭔가 환경적으로는 훨씬 윤택해졌는데 정서적으로는 견디기 힘들만큼 노잼 그 자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본격적인 입시경쟁에 돌입하면서 그따위 고민으로 시간을 허비 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이사를 가지 않고 오래전 그 성당에서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과 함께 어른이 되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공부는 분명 덜 했겠지만 더 많이 웃었을 것이고 더 많은 크리스마스의 추억이 생겼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니 저자가 살아왔던 과거의 집들에 대한 회상에서 자연스럽게 내가 살았던 집이 오버랩되며 정말로 인간에게 집 곧 거주지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꼭대기집과 수풀집의 5도 2촌의 삶을 실행하는 저자의 결단력과 의지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며 몹시 부럽기도 하다. 번잡한 도시의 삶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는 태생적 도시인들에게는 어쩌면 더욱 더 간절히 고요한 집이 주는 안정감이 필요한 것 같다. 


할머니와 함께 안방을 쓰며 지냈던 저자의 유년시절에 대한 내용을 통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뜨끈한 아랫목에 놓은 두툼한 담요와 같은 사랑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인 택배기사에 대한 내용의 고찰이 가능했던 것은 저자가 할머니에게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타인에게 나눠줄 수 있는 추억의 집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제 그들을 선명하게 떠올린다. 나의 다정하고 안온한 세계를 소리 없이 지탱하는 사람들을. 나의 집을 집답게 해주는 사람들을.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사람들을.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을.(129)"


"살다 보면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 곳에 가게 될 때가 있다. 심지어 그곳에서 힘껏 버텨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실은 나를 원치 않았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못 들은 척 어떤 연극을 해내야 하는 시절이 온다. 괜찮아질 거라고 마냥 낙관할 수도, 될 대로 돼라 체념할 수도 없는 때, 그때마다 나는 집을 떠올렸다. 여전한 표정으로 나를 품어주는 익숙한 공간을. 그 속에서 울고 웃으며 살아낸 시간을. 집에서 환대받았던 힘으로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소망할 수 있었다. 집에 단단히 뿌리내릴수록 나는 삶의 더 멀리까지 안전히 갈 수 있었다. 내가 모르는 세계로 건너가서 가끔 타인의 안부를 물을 수도 있게 되었다.(149)"


#김미리 #아무튼집 #그러나여전히가끔은울것같은마음으로 #코난북스 #아무튼시리즈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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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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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작가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읽었다. '세상의 모든 바다', '롤링 선더 러브', '전조등',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보편 교양', '로나, 우리의 별', '태엽은 12와 1/2바퀴', '무겁고 높은', '팍스 아토미카' 이렇게 9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이미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과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보편 교양', '세상의 모든 바다', '팍스 아토미카'를 읽었던 터라 다른 단편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궁금했다. 소설집의 제목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만 봐도 이 정도의 제목을 붙일 만한 깜냥이 되어야 소설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힙하다. 말미에 붙은 평론가의 설명에도 나오지만 여느 소설가와는 다르게 지금 현재 유행 중인 인터넷 짤이나 OTT 프로그램의 예시와 아이돌 문화를 가감없이 차용하고 있다. 더불어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꽤나 인기 있었던 대중 문화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노래 가사나 드라마 대사도 진부하지 않게 잘 녹여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소설이 가진 힘이 대중 문화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비되고 페기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성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저자의 통속적인 유행 재료들을 거침없이 소비하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색다른 시도이자 유행은 결국 돌고 돈다는 일반적인 담론을 기반삼아 시간이 흘러도 언젠가는 다시금 회자될 수 밖에 없는 매력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뭔가 다른 단편소설집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는데, 몇 편의 소설에서 이야기를 극대화시키고 갈등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을 응근히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란 의심이다. 특히 '전조등'에서는 어찌보면 성공한 인생처럼 보이는 주인공이 뒤늦게나마 청혼하고픈 마음이 드는 애인을 만나 괜찮은 팬션을 향해 가는 도중에 털신 한 켤레로 전조등 한 쪽이 망가지는 부분에서 어떤 불길한 조짐이 느껴졌지만, 계획된 프로포즈가 아닌 어이없이 정차된 순간에 반지를 넣어둔 자켓에 손을 넣은 애인으로 인해 발각되며 조금은 싱겁게 끝이난다. 대부분의 단편이 장편과는 다르게 열린 결말이나 확실한 결론을 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김기태 작가의 단편들은 유독 뭔가 더 이야기가 이어지길 것 같은 순간에 끝났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젠가 나올 장편 소설이 더욱 기대가 된다. 


'롤링 선더 러브'에서 주인공 맹희는 처음엔 절친 리아와 여가를 즐기며 간간이 SNS로 일상을 공유하는 조금은 무료한 일상에 무기력해진 인물처럼 그려지는 것 같았지만, 갑자기 지금 각종 방송에서 가장 유행하는 예능 포맷인 짝짓기 프로그램에 지원하며 급변하게 된다. 워낙에 채널이 많아져서 서로가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공통되기를 바라는 것이 어려운 시대가 되었지만, 유독 '나는 솔로'와 같은 유사한 짝짓기 예능이 대세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과거에도 비슷한 포맷이 있었지만 요즘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 일반인들이 나와서 마치 연예인이 되어가는 팬덤을 형성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포털사이트에도 거의 매번 다른 기수의 동일한 예명인 영숙이나 영호의 이름이 언급되는 걸 보면 사람들이 꽤나 많이 보면서 회자가 되는 것 같다. 아무튼 소설 속에서의 맹희는 그런 유사한 프로그램에 지원하여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캐릭터를 맡게 되지만, 이내 마지막에 냄새 나는 거름을 옮기는 과정에서 최종 스페셜 데이트권을 획득하는 반전을 선사하며 막을 내리게 된다. 마치 지금 방송되는 어느 기수의 인물들에 대한 댓글과 반응을 모아놓은 것처럼 생동감 넘치는 전개에 이어 솔로 농장 참가자들의 후기 모임에서 시비를 거는 불량배들에게 "사랑할 용기도 없는 놈들"이라고 멋지게 일침을 놓는 맹희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게 만든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는 막상 학교를 다닐 때는 서로 얼굴만 알았던 동창인 진주와 니콜라이가 성인이 되어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 내용이다. 진주와 니콜라이는 서로 친하지 않았지만 학교행정실에서 드러나지 않게 흰봉투를 받는 공통점이 있었고 자세한 설명이 첨부되지 않아도 둘 다 사회적 배려를 받는 대상임을 짐직할 수 있다. 진주에 대해서는 엄마의 새 애인을 소개받았다는 장면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듯이, 니콜라이는 러시아인 부모에 대한 사정이 설명되지 않아도 이름만으로도 그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짐작 가능하다. 진주는 대학을 가고 니콜라이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거쳐 여러 자격증을 갖게 되지만 사회에서 다시 마주한 진주와 니콜라이는 둘 다 고만고만한 상태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고 있었다. 우연한 재회를 계기로 그들은 연인이 아닌 그냥 친한 사이라는 미명하에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경제적 공동체라고도 명명할 수 있는 그들의 불안정한 동거는 비단 진주와 니콜라이만 겪는 처참한 현실은 아닐 것이다. 


"잠들지도 않고 이야기하지도 않고 그저 누운 채로 숨을 쉬다보면 방안으로 노을이 스며들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사라진 뒤 조용히 일렁거리는 커튼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남 얘기 같았다. 예쁘고 멋있고 촉감 좋은 물건들이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자이실현 같은 건 모르겠지만 견딜 만한 일을 하고, 지글지글 보글보글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삶. 가끔은 나란히 누워서 햇볕을 쬘 사람이 있는 삶. 이 정도면 괜찮다고 여기면서도 어두운 골목을 걸어 다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 불안해졌다. 어느 날 흰 봉투가 날아와 계약 종료 통지서나 처음 들어보는 병명의 진단서를 덜컥 내놓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133)"


사랑만 가득하다면, 진심으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라면 조금 배고프고 불편한 것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이상적인 담론이 대세를 이루던 때가 오래 지속되었다. 지금의 청년들 중에 그런 말을 받아들이는, 아니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깊이 있게 고민해본 이들은 얼마나 될까? 소설 속 진주의 고백처럼 그럭저럭 견딘말한 일을 하고 함께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핫한 OTT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냥 옅어져 가는 오후의 햇살을 함께 느끼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에 빠질 수는 있겠지만, 노후와 주거가 아무런 보장이 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도 그 행복감이 지속될 수 있을까란 불안함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희우 평론가의 말대로 우리는 이제 인터넷을 단순히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 줄 좋은 도구를 찾아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인터넷을 모르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아무리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만족하고 받아들이려고 해도 단 몇 초만의 스크롤로 굳건히 다잡았더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지기 십상이다. 몇 번의 클릭과 염탐으로 도저히 가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환상적인 삶을 사는 것 같은 이들의 노출에 피로감을 느끼며 비현실적인 허상에 불과하다가 단정짓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금 그들이 보여주는 과시에 몸과 마음을 뺏앗기기 일쑤다. 그럴때면 진주와 니콜라이가 인터넷 밈을 따라한 것처럼 당장 웹사이트와 SNS를 덮고 이렇게 외쳐야 하지 않을까.


"기립하시오! 기립하시오 당신도! 이것이 인터내셔널이오!(135)"


#김기태 #두사람의인터내셔널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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