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황석희 - 번역가의 영화적 일상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달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황석희 번역가의 [번역: 황석희]를 읽었다. 부제는 “번역가의 영화적 일상 에세이”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이름. 더군다나 아무리 본인의 책이라 하더라도 제목에 자신의 이름을 걸 수 있다는 것은 웬만큼 업계에서 인정받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저자도 언급했듯이 책 제목에 떡하니 이름이 드어가는 걸 몹시도 민망해 했을 것 같은데, 번역 콜론 황석희라는 제목을 주장했을 편집자 측은 이보다도 더 이 책이 가진 매력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게 없다는 지론에서 결국 쾅쾅 낙점되지 않았을까 싶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점점 나이가 들수록 자막을 읽기 귀찮아서 그런지 외화보다 우리나라 영화를 즐겨보게 되었다. 집에서 TV로 볼때는 외화도 상관없지만 극장에서 거대한 스크린으로 자막을 쫓다보면 화려한 장면이 주는 효과를 제대로 만끽하지 못할 때가 있다. 설상가상으로 자막을 읽기 불편한 자리에 앉게 되면 영화를 다 보고 나와서 멀미도 나고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입장이 되고 나니 이태리에 머물 때 거의 모든 외국 영화를 더빙하는 그 나라의 영화 문화를 도통 이해하지 못하고 투덜거렸던 모습이 떠오른다. 가뜩이나 외국어를 듣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아 차라리 자막을 보면 영화를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태리의 거의 모든 극장에서 더빙을 한다는 것을 알고 실소를 금치 못했었다. 아니 대체 왜? 아마 지금처럼 우리나라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상을 받아도 이태리에서는 우리나라 배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문맹률과도 연관이 있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이태리 사람들은 자막 읽는 것조차 귀찮은 게으름뱅이가 틀림없다고 나만의 결론을 내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와 다시 생각해보면 더빙으로 인해 조금 어색한 감이 있어도 자막을 읽지 않고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은 더 많은 이들에게 편안함을 주었을 것이다. 아무튼 워낙에 오페라와 연극 등 영화 말고도 극적 문화가 발달한 나라라 그런지 전세계 배우들의 목소리가 몇 명으로 압축된다는 웃픈 결론에.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영상 번역가라는 특이한 직업의 특성을 자세히 엿볼 수 있었다. 번역이라는 작업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기에 섣불리 덤빌 일도 아니지만,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수많은 관객들의 피드백을 순식간에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조금은 무서운 일이 아닐까 싶다. 특히나 저자가 언급했듯이 아무리 숙련된 프로 번역가라 하더라도 영화마다 5개 이내의 오역이 생길 수 밖에 없다니, 오역을 낱낱이 지적하며 힐난하는 메시지를 받게 되었을 때에는 꽤나 큰 심리적 충격을 받지 않을까 싶다. 사실 그 몇 개 안되는 영화를 이해하는 데 별 무리가 없는 오역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닐텐데도 익명의 그림자에 숨어 오역을 찾아냈다는 우월감을 비하의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저자처럼 유명해진 번역가도 이런 DM을 수없이 받는다고 하니 대중 매체에 얼굴과 이름이 알려지는 대중문화와 관련된 일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내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진실을 호도하고 의도된 곡해와 자의적 해석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정말로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번역가가 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혼란스럽지 않을텐데, 영화와 같은 우리 삶에서 극적 반전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런 무용담이 곱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엉뚱한 환상을 심어준다는 데 있다. 그 직업을 하기 위해선, 정확히 말하면 그 직업에서 성취를 이루기 위해선 영웅적이고 운명적인 서사가 필연적이라는 인상을 남기는 거다. 성공한 사람의 부풀려진 사연이 미디어에서 한번 더 가공되어 환상을 심고 그걸 본 사람들의 기를 죽인다. 너무 꼰대 같고 재미없는 소리지만 일정한 성취에 기본이 되는 건 따분하고 지루하고 고된 반복을 묵묵히 견디는 무던함, 그리고 제 살길을 어떻게든 찾아내 지속할 줄 아는 현실감이다. 대개는 그런 것들이 쌓여 성취가 된다.(88-89)”


“원복을 훼손한 번역자를 비판하거나, 반대로 번역을 상찬하며 원작을 절하하는 과정에서, 때로 문학적인 담론의 지점을 넘어 이 책의 ‘영광’이 과연 누구의 것인가를 질문하며 어느 한쪽을 선택해 공격하거나 배제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는데요. 실은 모두가 알다시피 문학은 성공과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문학은 사업이 아니고, 문학 작품은 사업적 결과물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덧없는 것이고, 그 덧없음의 힘으로 진실과 직면하는 것이고, 세계와 싸우며 동시에 말을 거는 것입니다. -연합뉴스 <한강, 채식주의자 오역 60여 개 수정… 결정적 장애물 아냐> 2018.01.29 (148-149)”


#황석희 #번역황석희 #달 #번역가의영화적일상에세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 - 나를 살리러 떠난 곳에서 환자를 살리며 깨달은 것들
김준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준일 님의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를 읽었다. 응급이라는 말만 들어도 갑자기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며 손에 응근한 땀에 베어드는 느낌이 든다. 요란한 비상벨소리를 울리며 황급히 움직이는 구급차를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도 어디선가 누군가가 위급한 상황을 맞이했구나 라는 찰나의 연민의 마음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멀쩡히 하루를 보내고 있음을 감사하는 이기적인 안도의 한숨 또한 뱉어낸다. 예전에는 그렇게 엠블런스를 탈 정도로 위급한 일은 마치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딴 나라의 얘기처럼 생각하고 지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지금까지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굉장한 기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는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의 글을 읽으며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여러번 느꼈다. 저자가 응급구조사로서 맞이했던 상황의 묘사가 너무나도 상세해서 마치 눈앞에 그 끔찍한 장면들이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더이상 이어지는 장면을 따라갈 용기가 나지 않고, 그냥 예전의 어리숙한 생각처럼 그런 일은 나와는 무관하다고 외면하고만 싶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글로 읽는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을 자신의 온 몸으로 체험한 저자와 그의 동료들은 어떻게 하루 하루를 견디며 자신만의 삶을 일구어 갈 수 있는지 궁금했고, 그들의 삶에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저자가 들려주는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만 하는 의무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곧 트라우마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높아졌다. 그러다보니 응급구조사들이 현장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충격과 스트레스는 아마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사고로 처참하게 일그러진 사람의 형체와 피로 범벅된 현장에서 느꼈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아마도 시시때때로 불현듯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재생될 것이다. 아마도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자주 심각한 충격에 자주 노출되는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응급구조사를 선택하고 자신의 온 삶을 타인의 위급한 상황을 위해서 헌신하는 이들에게는 아마도 아주 특별한 은총이 주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믿음의 유무를 떠나서 신의 손길이 머물다 간 것이라 생각되는 장면이 묘사가 있다. 도저히 어떤 절대적 힘의 개입이 없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사람들은 억세가 운이 좋았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혹자는 강철멘탈을 소유한 이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라는 부연 설명이 붙을지 모르겠지만 한 인간의 마지막 순간에 절대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에게는 분명 특별한 힘을 하느님께서 주셨을 것이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캐나다라는 복지 국가에 대한 시선이 많이 바뀌었다. 분명 우리보다 경제적 형편이 넉넉하고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그곳 또한 삶의 터전을 일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던 과거의 인물들이 있었고 여전히 생계를 꾸리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이들이 있음을. 특히나 저자가 가족들과 이민을 떠나 제대로 된 직장을 갖지 못해 가슴 졸인 시간들에 대한 회상은 그가 얼마나 큰 두려움을 갖은 채 차 안에서 혼자 눈물을 삼켰을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결국은 수많은 응급 호출에 익숙해지며 능숙한 파라메딕이 되어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은 우리가 삶의 마지막을 잘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마주했던 수많은 노년의 병을 앓고 있던 이들의 집에는 그들의 과거를 떠올 수 있는 지난날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액자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시절을 누렸던 그 누구도 언젠가는 내 몸 하나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며,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모든 배설물을 뒤짚어 쓴 채 전혀 모르는 응급구조사의 손길에 자신의 몸을 맡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삶의 마지막이 너무나도 비참하고 쓸쓸하게 느껴지지만 결국 먼지에 불과한 존재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함을 하루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여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살아간다면 죽음 또한 잘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돈이 없을 때는 돈이 많아지면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픈 환자를 자주 접하다 보니 건강하게 살면 잘 사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돈이 많아도, 몸이 건강해도 결국 삶의 종착점이 그런 모습이어야 한다면 잘 사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했다. 나는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이 제일 중요한 생활인인지라 그런 일로 마냥 우울해할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그 생각이 문득문득 치밀어 올라올 때면 답도 안 나오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고, 다시 잠깐 잊었다가 묻기를 되풀이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질문 하나. '내 삶의 끝을 알게 되면 지금이, 그리고 앞으로의 삶이 더 행복해질까?'(229)"


"우리는 저마다 중요하다고 믿는 것들을 갖기 위해, 혹은 더 갖거나 뺏기지 않기 위해 애쓰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분명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인정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저 열심히 살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짜 중요한 것들을 챙기며 사는 법은 잊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지만 결국 우리는 다 똑같이 죽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까닭에 쉽게 느끼지 못할 뿐 죽음은 삶과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오히려 우리 인생길 바로 옆에서 함께 조용히 걷고 있을 뿐이지요. 따라서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며, 잘 죽는 것은 우리 삶의 마침표를 잘 찍는 것과 같습니다.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돌아보면서,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들을 잘 가꾸어 살다 보면 언젠가 다가올 죽음 또한 잘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도 애쓰며 사는 우리들의 수고를 더 가치 있게, 그리고 지금 살아 있는 이 순간을 더 풍성하게 해줄 것이며, 그런 것들이 모여 결국 죽음까지 포함한 우리의 삶을 더 의미 있게 해줄 것이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251-252)"


#김준일 #나는캐나다의한국인응급구조사 #한겨레출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퀴즈에서 만난 사람들 - 모든 사람은 한 편의 드라마다
이언주 지음 / 비채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언주 작가의 [유퀴즈에서 만난 사람들]을 읽었다. 부제는 “모든 사람은 한 편의 드라마다”이다. 하루종일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편하게 얘기할 대상이 생기면 방언이 터진 것처럼 폭풍 수다를 떨게 되는 때가 늘어가는 것만 같다. 샤워기에 떨어지는 물에 머리를 적실 때면 내가 왜 그렇게 주저리 주저리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을까 이불킥 같은 후회가 밀려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인생의 경험의 장고를 떠나서 떠나서 사람은 자기 얘기를 누군가 들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가끔은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만으로도 어떤 특별한 치료제를 찾은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하고, 상대방이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직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기도 한다. 


유퀴즈라는 TV프로그램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갑작스러운 인터뷰에 응한 일반시민들이 처음에는 장난치듯이 말하며 어색해하다가도 어느 순간 내면의 가장 깊은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털어놓는다는 사실이다. 이게 촬영이 되고 편집이 되어 어느 날에 방송이 된다면 그 이야기를 온 국민이 다 알게 될 수도 있을텐데, 그리고 그 방송을 본 지인이 바로 연락을 할 수 있을텐데도 사람들은 용기내어 이야기를 한다. 아니 어쩌면 용기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지금까지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지. 생각해보면 정말 진중하게 나의 삶에 대한 질문을 받아보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그런걸까. 별로 특별하지 않은 질문에 응답한 솔직한 답변은 엄청난 감동을 선사한다. 존재의 우연성을 여실히 드러내듯이 지금까지 내가 듣고 싶어하던 말을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길을 걷다 만난 MC에게 낱낱이 털어놓는다. 


지금은 물론 코로나 사태 이후로 실내에서 진행되기에 프로그램의 초기처럼 우연히 마주치는 만남이 가져오는 감동을 엿볼수는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쉽기는 하다. 하지만 이후 섭외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우연한 만남과는 다른 무게의 감동과 놀라움이 전해지는 듯 하다. 유퀴즈의 전편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가끔씩 본방을, 어쩌다 재방을 보다보면 하던 일을 멈추고 출연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매번 공통적으로 느끼는 부분은 세상이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타인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놀라움이다. 종교의 세속화와 신자유주의가 뿌리내린 개인화로 탈바꿈된 사회에서 더 이상 따듯한 온정과 다정함을 찾기 어렵지 않을까란 단정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는 출연자들의 인내와 꾸준함의 발자취는 매 순간 감격스럽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다른 토크 프로그램보다 눈물 흘리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출연자도 아마 예상치 못한 감정의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MC들 또한 경청하는 가운데 감동받지 않을 재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눈물의 발로에는 바로 이런 의아함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 그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뎌왔을까” 세상에서 사람들을 가장 많이 놀래키고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천재적인 재능이나 현란한 말쏨씨나 눈이 부실 정도의 멋진 외모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거저받은 것이 아니라, 아무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장구한 시간을 묵묵히 견뎌온 발자국을 우연히 누군가가 발견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견뎌온 시간을 추앙하게 된다. 그 발자국을 뒤따라 가면 나에게도 그런 힘이 생겨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이다. 


“외환위기로 모든 힘들던 1998년, 아빠가 20년을 다닌 증권회사에서 명예퇴직을 했다. 살림밖에 안 해본 아내와 대학생 딸 둘을 감당해야 했던 아빠는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꼬박 한 달이나 숨겼다. 엄마에게 들키기 전까지 매일 아침 출근하듯 집을 나서서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퇴근 시간에 돌아왔다. 당시 아빠 나이는 지금 나보다 적었다. 아빠는 어디에 머물렀을까. 끼니는 잘 챙겨 먹었을까. 해가 뜨고 질 때까지의 기나긴 시간을 무슨 생각을 하며 보냈을까. 시공간을 초월해 어딘가로 갈 수 있다면, 나보다 어린 아빠가 시간을 보내던 집도 회사도 아닌 어딘가로 가고 싶다. 그곳에 가서 아빠를 찾으면 손을 잡고 말할 거다. 나중에 작은딸이 다 호강시켜드릴테니, 걱정 말고 함께 집에 돌아가자고.(178)”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꺼내놓는 그의 눈에 순수한 슬픔이 드러났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슬픔을 고스란히 느끼는 순수한 동정심. ‘동정’, 그러니까 그는 부모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자신이 살아있는 한 아이를 찾겠다는 부모의 마음을 고스란히 함께 느끼기에 포기할 수 없던 것이다. 슬프게도 생은 빠르고 현실은 메말라 있기에, 망각은 편리하고 외면은 간편하기에, 기억하려는 사람은 외롭다.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를, 상처를, 슬픔을 잊고 일상을 살아간다. 실종자 가족과 이건수처럼 기억하는 쪽은 더욱 외로워진다. 그들의 시간은, 아무것도 지우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 있기 때문이다.(290)”


#이언주 #유퀴즈에서만난사람들 #모든사람은한편의드라마다 #비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두 소설Q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주혜 작가의 [자두]를 읽었다. 다른 과일과 다르게 정말 맛있는 자두를 먹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겉으로는 아주 탐스러워 보이는데 막상 한 입 베어물면 나도 모르게 눈가에 주름이 지는 강렬한 신맛에 아주 작은 크기인데도 이걸 어떻게 참고 먹나 라는 후회가 앞설 때가 많다. 하지만 섬망이 온 시아버지의 회상 속에 등장한 기순네 자두는 절대 그런 후회를 가져올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침이 고인다. 새콤하고 달큼한 자두. 한알만 먹어도 배가 부른 큼직한 자두. 겉도 붉고 속도 붉은 피자두. 한입 베어 물면 입가로 주르륵 붉은 물이 흐리는 기순네 자두.(82)”


원고지 2,000매가 넘는 분량의 번역을 마치고 역자 후기 원고를 보내달라는 청을 받은 화자인 은아는 지난 4개월의 시간을 돌이켜보다가 미국의 시인 엘리자베스 비숍과 에이드리언 리치의 사연을 떠올린다. 그들이 우연히 함께한 짧은 시간은 비극적인 공통된 삶의 배경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강렬한 만남이었다. 이후 은아는 역자 후기를 쓰기 어려운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독자인 나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지만 끝내 실패했던 어느 여름의 이야기입니다.(20)”라는 말로 1994년의 여름을 소환하는 무더운 여름날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시골에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기순네 딸 순이를 납치하다시피 고향에서 도망친 시아버지 안병일은 담도암의 염증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은아가 세진과 결혼했을 당시에는 여느 홀로된 시아버지들과는 다르게 언제나 깔끔하고 단정한 생활을 유지하는 시부가 로맨스그레이의 현신이라고 할 정도로 충분한 만족감을 선사했다. 이런 시부의 입원생활이 시작되자 은아는 남편 세진과 2교대로 병간호를 맡기 시작했고, 병원에서도 짬을 내서 번역일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시아버지의 염증이 나아지지 않고 섬망 증세까지 드러나게 되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힘겨워지기 시작했다. 


“시아버지의 극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오늘이 어제보다 더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때로부터 10년도 되지 않아 그중 한 사람이 암 환자가 되어 병상에 누울 것이며 나머지 두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지쳐갈 것을 티끌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던 오만한 나날이기도 했습니다.(31)”


도저히 은아와 세진 부부가 시부의 병간호를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세진은 동료를 통해 간병인 영옥을 소개받게 된다. 은아는 간병인에게 지불해야 할 금액이 상당함을 헤아리게 되지만, 이내 영옥의 숙련된 도움을 받아 쉴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됨에 안도한다. 은아는 섬망 증세가 심해져 영옥에게 도둑년 이라는 욕까지 서슴치 않고 내뱉는 시부의 포악한 모습에 몹시 당황하지만, 영옥은 이미 그런 일에 익숙해진 것처럼 시부의 간병을 능숙하게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옆 침대 보호자를 통해 영옥이 시부에게 ‘죽어라. 죽어라’라는 말을 소근 소근 내뱉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설마 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산책을 나간 사이에 영옥이 시부에게 하는 말을 실제로 듣게 된다.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영옥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길래 시부에게 그런 저주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것일까. 


은아의 독백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간병인 영옥이 던지는 저주의 말에 대한 의심에 이르러 섬망에 빠진 시아버지 병일의 시선에서 영옥과 은아를 바라보는 속마음을 그려낸다. 그리고 시부가 영옥에게 하는 줄 알았던 도둑년 이라는 욕은 시부에게 있어서 보물과도 같은 귀한 박사 아들을 뺏어간 며느리 은아에게 하는 말임이 드러나게 된다. 은아는 로맨스그레이의 현신인 줄 알았던 시부가 사실은 자신의 소중한 보물을 뺏아간 은아가 손주를 낳지 못하자 응근한 패배감과 죄책감을 부과해온 지난날을 도둑년 이라는 욕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후 영옥이 간병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유와 시부에게 아무렇지 않게 저주의 말을 퍼붓을 수 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과거가 회상 장면처럼 그려진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픈 엄마를 돌봐야만 했던 영옥은 한 달에 한 번씩 먹을 거리만 놓고 무책임하게 사라지는 아빠를 대신하게 된다. 등교 전에 엄마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상을 차려놓고 가는 영옥이 설거지가 되지 않은 그릇을 볼 때마다 느꼈을 상실감과 무력함이 얼마나 컸을지, 평소와는 다른 악취를 풍기는 엄마를 하루종일 그대로 놔둔 채 영원한 이별을 가늠했을 그 어린 소녀의 슬픔을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보게 된다. 그때의 상처와 아픔이 너무나도 컸기에 영옥은 죽음을 앞둔 시부에게 모진 말을 내뱉은 것이리라. 


“어르신, 죽으려거든 날 좋을 때 죽어요. 이런 염천에는 죽지 말아요. 이런 날 죽으면 자식들 고생합니다. 부디 볕도 좋고 바람도 좋은 날 죽어요. 그래야 자식들이 덜 서럽습니다. 알았지요? 꼭 좋은 날에 죽어요. 우리 어머니처럼 염천에 죽어 자식 가슴에 한을 심지 말아요.(77)”


#이주혜 #자두 #소설Q #창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분지의 두 여자
강영숙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영숙 작가의 [분지의 두 여자]를 읽었다. 십여년 전 쯤 생명윤리 강의를 준비하면서 ‘체외발생’이라는 낯선 용어를 접하게 되었다. 인공수정이라는 포괄적 개념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 좀 더 세분하게 구분되는 수정 방법과 왜 다른 방법들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어떤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그야 당연히 인공수정을 고려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외발생은 정말 낯설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체외인공수정을 위해 정자와 난자를 인위적으로 체취하고 수정란을 만들어 아기의 모태가 되는 자궁에 착상을 시켜야 하지만 체외발생에서는 인공자궁과 고도로 발달된 인큐베어터로 아예 여성이 몸이 아닌 인공적인 기구로 아기를 탄생시킨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SF 장르소설에나 나올 법하 얘기인가 싶은데, 전문적인 학술서적에 버젓이 향후 인큐베이터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언젠가는 체외발생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물론 당연히 윤리적인 문제와 결부된 법적인 합의가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체외발생에 대한 설명을 읽는 순간 더 오래전에 보았던 ‘아일랜드’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생명 연장을 위해서 장기를 이식받고자 하는 소수의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을 위해 비밀리에 인간 복제가 이루어지고 있던 공장과도 같은 거대한 실험실에 체외발생의 이론을 현실화시킨듯한 수많은 인큐베이터에서 아기들이 탄생되고 양육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인공수정으로 인해 발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점 중에서 일반적으로 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다양한 경우의 수가 발생된다. 임신이 불가능한 불임부부들의 위한 획기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가장 먼저 정자와 난자를 인위적으로 체취함으로서 여성의 몸에 위해를 가하게 된다. 가장 첨예한 대립은 대체 언제부터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할 것인기에 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순간부터 인격체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순간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모든 인공수정은 불법을 넘어 살인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전세계의 인공수정기술이 가능한 나라에서도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상태를 인간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법률을 적용시키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이러한 첨예한 논쟁은 정자와 난자를 수정시킬 과학적 방법이 생겨나기 전에는 논의할 필요조차 없던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고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윤리적인 문제들이 계속해서 발생될 것이다. 


저자의 소설에서 체외인공수정으로 발생될 문제 중에 대리모와 관련된 일들을 소재로 삼고 있다. 체외인공수정은 배우자 간에 이루어진다고 해도 예상치 못한 변수와 문제들이 발생되지만, 배우자가 아닌 비배우자의 정자와 난자를 이용하거나 그 가운데 대리모를 이용해 출산을 하게 될 경우에는 상당히 복잡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불임의 원인이 남자이냐, 여자이냐에 따라서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익명의 누군가의 정자와 난자를 증여받아 체외인공수정을 하게 될 경우에 태어날 아기에게는 생물학적 아버지와 사회적 아버지 혹은 생물학적 어머니와 사회적 어머니 이렇게 다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발생된다. 아버지의 경우에는 두 가지 수에 불과하지만, 어머니의 경우에는 소설에 나온 것처럼 희우가 익명의 난자를 공여받아 남편의 정자와 수정하고 진영의 몸을 통해 출산을 하려고 계획했기에, 그렇게 태어난 아기에게는 생물학적 어머니인 익명의 누군가, 출산을 한 어머니 진영, 그리고 사회적 어머니인 희우까지 세 명의 어머니가 생겨나게 된다. 나중에 아기가 성인이 되어 자신의 기원을 알고자 했을 때 생겨나는 혼란을 대체 누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답은 아무도 알려주지 못한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샤우와 진영은 서로 다른 계기로 대리모가 되기로 결심을 했지만 결국 둘 다 아이를 낳는데에 실패하게 되고, 코디네이터를 통해 철저한 계약에 합의한 이들은 의뢰자가 원하는 충분한 조건을 이루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태어날 아기를 차갑게 외면하게 되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된다. 애초에 시작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렇게 아기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차라리 몰랐더라면, 과학의 발달은 과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언젠가는 아니 어쩌면 벌써 우리나라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될 소지가 충분한 대리모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대리모라는 선택을 하게 된 샤오와 진영의 기구한 사연은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고, 그러한 삶의 사연이 남의 이야기 일때와 나의 이야기 일때가 얼마나 다를 것인지 아주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 주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선 애끓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누군가는 온전히 그 아픔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시간들이 벌처럼 남아있기 마련인데, 나의 삶 만큼은 무탈하게 지속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너무나도 이기적인 것일까. 아마도 오민준이 쓰레기 수거를 하다가 발견한 바구니에 담긴 갓난아기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집으로 데려간 것은 그렇게 아기를 버려도 되는 것처럼 여겨온 누군가의 오만함을 대신 속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쓰레기산이 생겨 오물과 악취의 한 가운데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존재함에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이유는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 터무니없는 비율로 아주 소수의 누군가가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생은 기껏해야 70년, 근력이 좋아서야 80년이라고 시편 저자가 노래했는데 나는 그 중에 몇 시간이나 고통의 짐을 나눠지었을까 생각해본다. 


“진영은 죽은 딸 때문에 대리모가 되는 사람이다. 아침에 집을 나간 아이가 저녁이 되어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실제로 누군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떨까.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는 것과는 다르다. 살면서 도저히 겪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40)”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이규도 잘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억울함도 애틋함도 결국은 시간이 다 잔인하게 뭉개버린다는 것을. 윤재는 돌아올 수 없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다. 자는 동안만큼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납처럼 무거운 눈을 뜨는 순간부터 기억은 작동하기 시작한다.(147)”


“민준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어디서 왔든 어디로 가든,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다. 우리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고 우리가 태어난 이 자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우리는 늘 우리가 태어난 자리의 상식과 인식의 틀 안에 존재할 뿐이다.(222)”


#강영숙 #분지의두여자 #은행나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