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평점 :
장바티스트 앙드레아의 [그녀를 지키다: Veiller sur elle: Vegliare su di lei]를 읽었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가면 우측 한 편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그림 앞에 빽빽히 사람이 들이차서 그녀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는 깨끔발을 들거나 손에 들린 카메라를 통해서나 슬쩍 감상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넓은 성당 안에서도 유독 두터운 방탄 유리 속에 감춰진 피에타상을 보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군중들 틈에 기꺼이 끼어들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원래 피에타상이 지금처럼 두터운 유리관으로 가려져 있지 않았다고 들었었는데, 지금처럼 유리에 반사된 빛으로 인해 제대로 살펴볼 수 없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소설 속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안타깝지만 기이한 광기로 인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 중의 하나가 손상되었다면 아마 누구라도 지금처럼 보호재를 사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그의 삶의 생애에 따라 피에타상의 모습도 확연히 달라짐을 확인할 수 있지만 바티칸 안에 천지창조부터 지옥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를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십자가 상의 죽음을 맞이한 아들 그리스도를 껴안고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조각한 피에타상의 공존은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될 예술품의 가치를 더욱 드높이게 된다. 이번 소설은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의 거장 중의 한 명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피에타상을 모티브 삼아 20세기 초 세계대전으로 인해 파시즘이 득세했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또 다른 피에타상을 제작한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라는 인물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미모 비탈리아니가 숨겨진 피에타상과 함께 하고자 했던 비올라 오르시니와의 숭고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시기에 해당되는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부유하고 안락했던 유럽 사람들에게도 혹독한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오죽하면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을 '벨 에포크' 라고 칭하며 경제 문화가 발전하며 태평성대를 이뤘던 그 시기를 간절히 그리워했을 정도니 말이다. 물론 그 행복한 시기는 일부 귀족들과 상류층 사람들에게만 해당되었을 것이고 여전히 굶주림과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생존의 위협을 받았겠지만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 또한 그런 가난한 이들 중의 하나였으며 심지어 왜소증으로 인해 일평생 난쟁이라는 무시를 당했으며 일거리를 찾아 프랑스에서 머물던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유로 일 프란체제라는 비아냥 거림을 듣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는 미모를 돌보기에 힘이 부쳤는지 어린 아들을 이탈리아 북부의 '피에트라달바'라는 곳의 알베르토에게 보낸다. 조각가였던 아버지에게서 어릴때부터 대리석 조각에 대해서 배웠던 미모는 알베르토의 공방의 도제로 머물게 되지만, 미모의 천재적 재능을 알아본 알베르토는 미모의 능력을 야비하게 이용만 할 뿐 구타와 폭력으로 미모를 학대한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미모가 보낸 끔찍한 유년시절을 단지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지 않는다. 미모는 왜소증이라는 신체적 한계와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와 자신을 무시하고 폭력을 휘두리는 공방 주인의 위협 속에서도 꾿꾿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나간다. 어쩌면 미모가 오르시니 가문의 대저택에서 우연히 같은 또래의 비올라를 만나고 밤마다 재연된 무덤가에서의 대화가 없었더라면 수도원의 지하에 꽁꽁 숨겨둘 만큼 화재를 일으킬 피에타상을 조각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미모 비탈리아니의 천부적인 재능은 대리석 안에 그가 조각하고자 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투시력과 같은 통찰력을 드러냈으며, 비올라 오르시니는 당대의 여성에게 국한된 지위를 벗어나 특히 귀족 집안의 자제로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만남을 거부한 깨어 있는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모의 집안과 그의 친구들은 그냥 별볼일 없는 일상을 견뎌내는 서민이었지만, 비올라는 가족은 오리시니 가문으로 첫째 오빠 비르질리오는 어이없게도 전쟁에 참전하여 기차 사고로 죽게 되지만, 둘째 오빠 스테파노는 파시즘 정권에 빌붙어 승승장구하게 되고, 셋째 오빠 프란체스코는 성직의 길로 나아가 교황의 오른팔에 오르게 되는 극소수의 부류 중의 하나였다. 이런 미모와 비올라의 만남 자체가 파격적이었지만 비올라의 범상치 않는 행동들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당시 여성들에게는 권고되지 않던 엄청난 독서를 통해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모는 비올라를 통해서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그들이 지속한 무덤가에서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통해 미모는 위대한 조각가가 될 것임을 비올라는 하늘을 나는 원대한 꿈을 이룰 것임을 서약하게 된다.
하지만 미모와 비올라의 행복했던 만남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비올라와 정략혼인을 약속하는 파티에서 벌어진 비올라의 기막힌 선택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비올라는 지붕에서 몸을 날리며 그동안 미모와 그의 친구들과 준비한 비행의 실패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고 미모는 비올라의 소식을 들을 수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알베르토의 속임수로 인해 피렌체의 공방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후 미모는 피렌체의 공방에서 또 다른 천적과도 같은 네리의 훼방으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다시 피에트라달라로 돌아가려던 찰나 네리 일당의 린치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어이없게도 피렌체 뒷역에 머물던 서커스단의 일원이 된다. 어쩌면 조각가라는 일을 다시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가 지속되지 않을까 하는 시기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왜소증을 가진 서커스 단장과 그의 누이 사라를 만나면서 서서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바티칸의 고위직으로 수직상승하는 프란체스코의 제안으로 미모는 내적 고향인 피에트라달바로 돌아오게 되고 그때부터 조각가로서의 삶은 꽃을 피우게 된다. 미모는 로마와 피에트라달바의 공방을 오가며 수많은 고관대작의 요청에 밀당을 하며 조각품의 가치를 드높이게 되고, 파시즘 정권을 상징하는 조각품을 수탁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미모의 공방의 직원과 제자들은 늘어나고 수입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상류층의 삶을 살기에 충분해진다. 우여곡절 끝에 재회한 미모와 비올라는 미모가 파시즘 정권의 상징물을 만든다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이며 사이가 멀어지는 듯 하지만 미모는 비올라에 대한 우정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비올라의 방황과 괴로움은 그의 남편이 보란듯이 벌이는 외도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부분에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를 무시하며 비올라가 사춘기 시기에 쓴 시를 비웃으며 낭송하는 남편을 식사용 나이프로 찌른 일로 인해 비올라는 남편과 헤어지게 되고,미모는 끔찍해보이는 수녀원의 요양 프로그램을 단번에 무시한 채 비올라를 데리고 떠나 그녀를 지켜준다.
시간은 흘러 미모가 그토록 바라는 것처럼 보이던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자격을 부여받게 되고 그동안 미모의 삶은 녹록치 않았음을 단숨에 보상받듯이 앞으로의 시간은 꽃길만 펼져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 영광의 정점에서 미모는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의 시나리오를 써내려간다. 그동안 비올라의 간청과 조언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듯 했던 미모는 수용소에 갇혔던 사라를 빼내오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비겁함을 깨닫게 되었고 양심의 소리를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미모는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자격을 받고 이어진 소감에서 앞으로는 더 이상 정권의 개가 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다. 미모는 그 일로 인해 감옥에 갇히게 되고 비올라는 미모의 놀라운 선택을 지지하게 된다. 이때까지는 중간 중간에 짧은 쳅터로 그려지는 임종을 앞둔 고령의 노인이 된 미모를 지키는 파드레 빈첸초의 피에타상과 관련된 비밀스러운 서류를 확인하는 모습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미모가 만든 피에타상은 어째서 전대미문의 문제를 일으켰으며 바티칸에서 조차 미모의 피에타상을 숨기기를 바라고 아무도 모르는 수도원의 지하에 놓여진 것일까? 미모의 피에타상을 본 수많은 사람들 중의 상당수가 이상 반응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나 미모가 형기를 마치고 나온 후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프란체스코의 권유를 마다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더 이상 대리석 안의 모습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조각가의 천부적인 능력을 상실한 것 같아 피에타상을 조각할 수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 소설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에 일어난 끔찍한 반전인 천재지변 때문에 벌어진 영원한 이별이 아닐까 싶다. 스포일러에 해당되겠지만 미모가 아주 잠시 피에트라달바를 떠난 사이 엄청난 지진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오르시니 일가는 추기경이 된 프란체스코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참극의 사상자가 되고 만다. 넋이 나간 미모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올라를 찾기 위해 무너진 오르시니 저택의 일부를 헤짚게 되고, 어쩌면 오르시니 일가에게 주어진 죽음과의 이상한 협약처럼 오빠 비르질리오가 열차 사고에도 아무런 외상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비올라 역시 외양에는 큰 상처가 없었다. 소설 속에서는 미모가 어떤 울부짖음으로 비올라의 죽음을 애통해 했는지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그가 잠도 자지 않고 피렌체의 공방으로 내려가 다시금 조각을 시작하여 피에타상의 제작에 몰입했다는 것만으로 미모에게 있어서 비올라가 어떤 의미였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미모에게 죽어버린 대리석 너머의 아른거렸던 작품의 모습이 비올라의 죽음으로 부활하였고, 미모는 피에타상의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이 아니라 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의 상에 비올라의 모습을 대입시킨다. 교황청을 비롯한 여러 미술 관계자들은 비탈리아니의 피에타상을 본 상당수의 이들이 기이함을 느끼고 혼란스러웠던 이유는 예수의 상에서 기존의 비올라의 여성성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혼란을 자아내는 피에타상을 감춘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미모의 피에타상은 수도원의 지하에 유폐되고 미모는 비올라를 그리는 피에타상 제작 이후 그녀를 지키며 수도자와 같은 형제라 불리며 삶을 마감하게 된다.
"극악한 사건들은 시간을 늘어뜨린다. 비올라가 시간에 관해 아무 말이나 했던 게 아니라는 증거. 정신이 조금 전의 순간에서 굳어 버리고 믿기지 않는 마음이 시간의 톱니바퀴에 들러붙어 운행을 늦추는 바람에 초대객 중 그 누구도 반응하지 못했다.(496)"
이번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뛰어난 비유와 묘사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는데, 바로 이 문장처럼 한 마디로 뜨악한 순간을 맞이했을 때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 수 없을 때를 마치 시간의 운행이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으로 인하여 늦춰지게 만들었다는 표현력은 정말 감탄해마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네 양심이 네 손목에 찬 그 시계보다 더 값이 나갈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네 전 재산을 동원해도 되살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거고.(527)"
미모를 미행하던 비차로의 마지막 말이 미모의 양심선언과도 같은 결과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미모는 비올라에게 다시금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음을.
"우리가 추구하던 것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무것도 없음을, 추구하던 그것은 슬며시 빠져나가 저만치 앞에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면 그것 역시 한 걸음 내딛습니다. 언젠가는 그것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계속 품어 보려고, 그저 그 것의 보폭이 우리 걸음보다 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538)"
"털고 일어설 수 없는 부재들이 있지.(613)"
이 마지막 한 문장이 또르르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일상을 영위하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부재의 순간 비탈리아니의 피에타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비탈리아니의 피에타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진짜 이유는 예수의 모습이 비올라라는 여성성을 지녀서가 아니라 그렇게 삶의 소중한 이들의 부재를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리라.
#장바티스트앙드레아 #그녀를지키다 #Veillersurelle #정혜용역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