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대 오늘의 젊은 작가 48
박대겸 지음 / 민음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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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겸 작가의 [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대]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48번째 작품이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작가와 내용과 상관 없이 무조건 구입하기는 하지만, 처음 제목을 봤을 때에는 완독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이전 몇 개의 작품에서도 독서 성향과 맞지 않아서인지 간신히 다 읽은 적이 몇 번 있었기에 이번 작품도 그런 류가 아닐까 싶었다. 어릴 때와는 다르게 SF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에 설마 진짜 외계인이 나오는 얘기일까, 아니겠지, 아니길 바랬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정말로 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다는 내용이 주된 골자였다. 헐 근데 왜 이렇게 재미있지? 술술 읽히고 터무니 없는 얘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그럴듯 한데, 종국에는 진짜로 이런 일이 과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란 상상까지 확대되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명제를 못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막연히 이 말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현재의 삶을 게속 살아나가야 한다는 희망적인 말로 해석했었는데, 이번 작품을 다 읽고 나니 다분히 쿨함과 시니컬함을 오가는 방관주의적인 태도가 아닌가라는 해석이 오히려 마음에 와 닿았다. 특히나 민주화 항쟁을 거친 세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한국 사회에서는 어느 세대보다 부유하게 자란 이들이 마치 자랑하듯 쿨함과 시니컬함을 표방할 때 좀처럼 반기를 들지 못했던 답답함이 소설의 주인공 지민의 불호령 같은 말을 통해서 해소되는 듯 했다. 


"나는 이틀 뒤에 정말로 인류가 절멸하면 어쩌나,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심각하게 고심하고 고민하고 있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최소한 지금은 그래. 그게 당연한 거 아니야? 내 인생이잖아! 어떻게든 방법을 찾기 위해 아등바등해야지. 물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겠지. 행동으로 옮긴다고 한들 바뀐다는 보장도 없고. 바뀌지 않을 확률이 더 클 수도 있겠지만, 아니, 바뀌지 않은 확률이 압도적으로 크지만, 그래도 해 봐야지. 그래도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 그래서 어른들이 사는 게 어렵다거나 인생은 알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거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 모든 일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약간은 방관하는 태도로, 자신은 거기에 속한 사람은 아니라는 듯, 그 일이 어떻게 되든 본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쿨하고 시니컬하게 말하고 행동해. ~~ 제발 남아 있는 이틀만이라도 적극적으로 부딪치며 지내 봐.(123-125)"


몇 년 째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 그리고 이어진 이란의 핵시설 무력화를 위한 공격 등으로 제3차 대전이 발발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우려가 지속되는 가운데, 이러다 전세계가 전쟁의 망국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란 공포와 두려움이 양상된다. 하지만 인간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다른 지향을 두게 된다. 현재의 삶이 지옥처럼 극심한 고통의 연속이라면 차라리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엄청난 일이 생겨나 모두가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고약한 심보를 품게 된다. 반면에 현재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럽다면 행여나 이 행복이 갑자기 끝나버릴까 두려워 부디 모든 일이 평화롭게 잘 해결되기를 바라게 된다. 나 또한 뜬금없이 사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내 의지가 아닌 어떤 절대적 힘에 의해 지금의 고통이 단숨에 사라졌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얼마나 지독하게 이기적인 발상이란 말인가. 내가 하루하루 사는게 별 의미없이 느껴질 때에도 분명 누군가는 매 시간을 충만하게 느끼며 감사하고 있을테니 말이다. 


지독히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빠져 살게 되면 필연적으로 반복되는 행복과 불행의 순간이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확대되어 보이거나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해석하게 된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조금만 돌이켜봐도 한 인간이 보내는 100년도 안 되는 시간은 그저 하나의 점에 불과한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상의 삶을 살아가며 남기게 될 그 작은 점 하나가 수없이 모여 제대로 된 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내 삶의 점이 곧은 선을 만들어내는 데에 오점이 되지 않도록 항상 의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외계인의 침공으로 인류가 멸망하게 될지 모른다는 믿지 못할 소식을 접하게 되었을 때, 그러거나 말거나 난 그냥 일상을 살아가다 다 함께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죽겠다는 쿨함과 시니커함을 소신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 내란 사태 이후 눈이 내리던 어느 날 밤에 은박 보호 담요를 덮은 이들의 몸에 소복히 쌓인 눈이 마치 초콜렛 모형처럼 보여 키세스 시위대라는 별칭이 붙어졌다. 영하의 날씨에 차디찬 바닥에 앉아 한 목소리를 내던 이들의 사진을 보면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며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대체 어디서 저런 인내와 저항의 힘이 나오는 것일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누구나 하지 않는 그 일을 자발적으로 나서서 수많은 익명의 동조자들을 만들어내는 용기 있는 선택을 감행한 이들은 바로 소설 속 지민처럼 보인다. 이제 인류의 멸망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평소처럼 하던 알바를 하다가 가까운 이들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소중한 가족들의 얼굴을 한 번 보는 선택할 수도 있지만, 지민은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선택이 아닌 작은 영웅이 되고자 한다. 어떻게 어디서 미약한 자신이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전혀 알 수는 없지만 마냥 손놓고 있지 않기로 결심한다. 


"만약 어제 루리코와의 우연한 만남이 실은 우연이 아니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맥락과 필연으로 인해 만나게 되었다면. 그리하여 오늘 오전에 받은 아빠의 메시지 내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해석을 내리게 되었다면. 거창하게 인류를 위해서, 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어쨌거나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엔가 분명히 존재한다면.

~~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신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라고, 나의 의지라고(102-103)"


물리학과 우주와 관련된 과학적 설명이 많이 나와서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이 되어 그럭저럭 맥락을 따라갈 수 있었다. 소설의 말미에 지민이 갑작스러운 삿포로 행을 받아들여 인류를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담긴 구형 핸드폰이 가득한 배낭을 메고 육체적 죽음을 맞아 소입자로서의 자신을 인지하게 되는 장면은 과연 SF라 할만한 상상력을 가중시켰지만, 언제 어디일지 모를 작은 영웅으로서의 선택의 기로에 초대받게 된다면 지민처럼 미약하나마 기적을 위해 나의 의지를 불태우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어쩌면 소설의 말처럼 "아마 인류는 한때 인간이었던 존재들이 파동-입자가 되어 자신들을 구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할 것이다. 외계 생명체 소동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역사에 기록될 뿐이겠지. 상관없다. 우리가 훨씬 더 넓은 곳에서 훨씬 더 오래도록 살 테니까. 무엇보다 우리가 전부 기억할 테니까.(227)"


#박대겸 #외계인이인류를멸망시킨대 #민음사 #오늘의젊은작가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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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빛
강화길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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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 작가의 [치유의 빛]을 읽었다.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다이어리앱을 열면 무심코 작년, 제작년 그리고 그 이전의 같은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아무런 일정이 표시되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거나 아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과 만남의 기록이 단출하게 저장되어 있을 뿐이다. 대부분은 그렇지만 어떤 특정한 날은 다이어리를 살펴보지 않아도, 아니 그 부근의 날력만 봐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아직은 언제가는 좀 더 여유롭게 대면할 수 있지 않을까란 막연한 기대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막연한 두려움의 감정을 지금껏 모르고 살았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도 있다. 어쩌면 내가 마주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 각자의 직면하기 두려운 과거의 기억을 감춘 채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나와 이야기하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내가 그동안 억세게 운이 좋았거나 아님 무지하게 나 밖에 모르는 삶을 살아왔거나 둘 중의 하나였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자꾸만 지나온 시간들을 되짚어 보며 그때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란 부질없는 복기를 반복하게 된다. 어떤 판타지 같은 영화가 아니고서야 과거의 시간을 바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일텐데 왜 자꾸만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반복하는 것일까? 미련인가, 아쉬움인가, 후회인가, 아님 안심인가. 나이든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게 된다. 한 눈에 봐도 부럽고 멋지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가 있는 반면에, 참 힘들거 같아 보여 상대적인 위안을 주는 이도 있다. 그런데도 그들의 나의 생각이나 예견과는 무관하게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나의 추측은 사실 그들 각자의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반대로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바라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겉으로 보여지는 어떤 기준과는 상관없이 주어진 삶을 묵묵히 헤쳐나가는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봤자 아등바등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절대로 쉽게 삶을 단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수치와 번지르르한 겉치장에 중독된 시대에 살면서도 어떻게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죽는 그 순간까지 추구하는 것일까? 


소설의 주인공 박지수와 그녀의 학창시절 친구인 해리아, 신아, 지연과의 최초의 기억에 대한 초대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 밖에 없는 통증의 순간들을 치유하기 위한 빛을 찾아나서는 길을 안내한다. 중3이 되면서 갑작스럽게 몸이 커진 지수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아주 오래된 역사인 것 같다. 여성의 신체적 특징이 두드러지면서 그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사람들의 시선에 지수는 엄청난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느끼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변해버린 몸을 마냥 탓을 수 많은 없다. 이제는 커진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지수가 성인이 되어 태인과 연애를 하면서도 폭식과 단식을 오가는 극도의 다이어트를 지속해왔다는 사실을 알릴 수 없는 지독한 고통의 서막은 비단 지수 혼자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외모지상주의와 SNS를 통한 자기PR의 시대에 살면서 몸을 가꾸지 않는 것은 인생을 포기한 것과 동일시되어가고 있기에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과의 전쟁을 치루고 있다. 


살과의 전쟁을 치루던 지수는 어느 순간부터 날개뼈 아래 부근에서 밀려오는 지독한 통증을 느끼게 되고 통증의 이유를 찾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게 된다. 이것 또한 지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은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자기결정권을 지지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내 몸을 내 마음으로 하고 싶다는 데 남이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저변에 깔린 주장은 어이없지만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세세하게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만 같다. 아주 간단한 감기 몸살이 아니라면 좀 더 복잡한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몸의 이상을 느낄 때 아픈 것 이상으로 마음이 답답해진다. 병원에 가더라도 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설명하기 힘들 때에는 아니 지금껏 수십년간 갈고 닦은 나의 몸의 이상을 이렇게 알아채기 힘들다는 사실에 무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지수는 우연히 엄마를 통해 잊고 살아왔던 중학교 동창생들의 근황을 전해듣게 된다. 지수의 몸이 커졌을 때 지수를 알아본 전교생의 우상이었던 해리아와 지수처럼 해리아를 동경했던 신아가 채수회관이라는 이유를 찾지 못하는 통증에 시달리는 이들을 치유하는 수련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지수는 해리아를 만나기 위해서인지, 극심한 통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채수회관에 입소하게 되고 그곳에서 과거의 수영장 사건을 다시금 조우하게 된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해리아가 지수에게 수영을 배우고 해리아를 질투하던 안지연과의 수영 대결에서 머리를 부딪혀 크게 다치는 사건을 계기로 지수는 다시는 해리아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지수가 회상하는 수영장 사고는 마치 자신이 동경해왔던 해리아가 수영을 배운 이후 자신을 외면하는 것에 대한 분노로 사고를 당한 해리아에게 왜 죽지 않았냐는 섬뜩한 말을 건네는 장면으로 긴장감을 드높인다. 


마치 해리아의 시녀처럼 다른 누구의 관심과 사랑도 허락하지 않으려 했던 신아 또한 지수를 매몰차게 내치며 해리아와 신아의 가족이 소속되었던 사이비 종교 집단에 대한 접근도 거부한다. 해리아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영원히 지속되는 통증을 갖게 된 것이 사이비 종교 집단에 매몰된 무지한 이들과 결속된 이상한 병원 의사와의 의심스러운 잇속 관계 때문인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모든 것에서 뛰어나 보였던 해리아 마저도 사실은 지수처럼 그곳을 벗어나 진짜 자유로운 몸을 갖고 싶었다는 것은 소설의 말미에 드러나게 된다. 


지수가 채수회관에서 머물며 지우의 케어를 받는 도중에 환시를 보는 듯한 장면들은 마치 지수가 영원히 통증에서 벗어날 수 없어 결국은 몰래 준비해 온 약에 의지하며 무력하게 무너지는 듯한 결말을 가져오는 듯 했으나,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벗과 심우의 베일에 싸인 비밀이 지수가 수영장에서 보았던 빛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지수가 지우의 마음을 돌리고 심우인 신아와의 대화에 이어 해리아를 마주하는 장면들은 마치 한 편의 스릴러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들고 으스한 느낌을 넘어 결국은 비극으로 치닫는 것이 아닐까란 섣부른 결론에 다다르게 만든다. 하지만 지수가 해리아를 만나고 치유의 빛에 해당되는 처음의 기억은 다름 아닌 지수와 해리아와 신아가 사이좋게 수영을 배우고 대결을 치루다 외톨이였던 지연을 불러내며 나름의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지수가 보았던 치유의 빛은 무엇이었을까? 최초의 기억을 떠올리다 과거를 비틀어버리는 것일까? 아님 후회와 아쉬움을 곱씹으며 안타까워했던 기억을 마음대로 재해석해버리는 것일까? 어느쪽이든 지나온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면 과거에 하지 못했던 용기 있는 결단을 이제는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나의 삶이 새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재생될 수 있기 때문에....


#강화길 #치유의빛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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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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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의 [단 한 번의 삶]을 읽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에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글쎄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대체로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불행이 생겨난 원인을 공유하다보면 겉으로는 참담한 척 애써 연민의 눈빛을 드러내지만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불행에서 자신이 처한 현재 상황을 안도하게 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불행의 이유를 낱낱이 기억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조금은 삐딱한 시선이고 타인을 경계하는 태도를 자아낼 수 있겠으나, 불행의 이유를 곱씹게 되는 시간을 통해서 불행이 남겨둔 숙제인 고통이 제시하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기인 고등학생 때에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이들 앞에서 진지한 주제에 대한 나의 견해를 늘어놓기를 서슴치 않았던 것 같다. 특히나 성당 주일학교 교리 시간에 그런 일이 잦았는데, 교리 선생님은 상당히 만족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아마도 다른 친구들은 상당히 재수없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는 애써 참석한 교리시간을 허투로 보내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아님 옮긴 성당에서 아직 친구를 제대로 사귀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어떤 주제에 대해서 한 마디씩 하는 시간이 오면 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나의 생각을 날 것 그대로 내뱉은 것 같다. 그래서 당시에 유행했던 문집을 만들 때 너무나도 거창하게 제목을 '삶의 의미'라고 붙이고 나만의 철학을 써내려갔다. 원본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어떤 내용을 썼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제목만큼은 확실히 생각난다. 세상에 스무살도 안된 나이에 '삶의 의미'라니, 대체 뭘 알고 그런 제목을 붙인걸까?


이번 책에서 김영하 작가님은 조금 놀랄만큼 상세하게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어쩌면 치부가 될 수도 있는 일을 가감없이 서술할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그런지 부모님과의 일화는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했던 이들에게 남다른 위로를 전해주지 않았을까 싶다. 비록 나와는 전혀 다른 이유였지만,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훨씬 나았거나 나빴거나 하는 우위를 가늠할 수 있다 해도 세상을 떠난 두 분을 기리며 전하는 진심은 우리가 겪는 고통의 순간을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구세주의 탄생은 그렇다고 쳐도 평범한 인간의 생일은 왜 축하하는 것일까? 그것은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일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환대의 의례일 것이다.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좋은 곳에 온 사람들끼리 환대하는 것은 쉽다. 원치 않았지만 오게 된 곳, 막막하고 두려운 곳에 도착한 이들에게 보내는 환대야말로 값진 것이다. 생일 축하는 고난의 삶을 살아온 인류가 고안해낸, 생의 실존적 부조리를 잠시 잊고, 네 주변에 너와 같은 문제를 겪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말 것을 부드럽게 환기하는 의식이 아닌가 싶다.(31)"


'테세우스의 배'에 대한 내용은 그동안 고정관념처럼 박혀 있던 생각에 유연함을 가져왔다. 내가 알던 어떤 이름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한 번 뇌리에 박힌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지속적으로 적용해 왔던 삶의 습관이 때로는 얼마나 옹졸해 질 수 있는 것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흔히들 하지만 사람은 평생 많이 변한다. 노력으로 달라지기도 하고 환경에 적응하기도 한다. 생물학적 수준에서는 인간의 몸이란 테세우스의 배와 마찬가지다. 세포들이 끊임없이 죽고 다시 생성되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세포는 거의 없을 것이다. 행동도, 마음도, 습관도, 조금씩 달라지다가 그 변화가 누적되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되어버린다.(76)" 


<왕좌의 게임> 미드로 더욱 유명해진 조지 R. R. 마틴 작가에 대한 내용에서는 전업 독자라는 생경한 직업의 탄생을 알게 되었고,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가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다음 권을 기다리는 독자들의 애타는 비난은 실로 이야기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놀람을 금치 못할 뿐이다. 나도 한 때 '얼음과 불의 노래' 독자 정도는 아니었지만, 김영하 작가님이 '알쓸신잡'에 출현하느라 바빠서 새로운 작품을 못 쓰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마치 어떤 작가의 애독자라면 작가를 향한 채찍질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가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떤 위안'에 나온 내용을 통해서 누구에게나 단 한 번 주어진 삶의 양태를 스스로 선택하고 완성해 나가는 것에 그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음을, 그리고 저자가 말하듯이 어쩌면 다시는 쓸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는 단 한 번만 허용된 솔직 담백한 인생 사용법을 독자들에게 들려주기에, 기다림은 우리 삶에서 뜻밖의 기쁨과 행복을 전해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시도 때도 없이 작동하는 상상력 덕분에, 삼십대에 영화계로 넘어갔다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냥 대학에 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뉴욕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방송인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를 아주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상상 끝에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럴 때, 내 눈앞의 세계는 단순한 현실이 아니라 내가 하마터면 살 수 있었을 n개의 인생 중 하나로 보인다. 지금 이 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것과 스스로 결정한 것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유일무이한 칵테일이며 내가 바로 이 인생 칵테일의 제조자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삶을 잘 완성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살지 않은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미래에 나쁜 결과와 마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갈망은 그 어떤 전략적 고려보다 우선하고, 살지 않은 삶에 대한 고찰은 그런 의미를 만들어내거나 찾는 매우 효과적이 방법이다.<우연한 생>- (187-188)"


나이가 들수록 그때 그 선택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이라는 가정을 자주 하게 된다. 저자의 말처럼 내가 가지 않은 길을 간 것을 상상하며 그 이후의 삶을 그려보다보면 아쉬움과 더불어 안도감이 들기도 하지만 결국은 지금의 나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비슷한 형태의 잘못을 했을 것이고, 엇비슷한 실수와 상처를 주고받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삶을 잘 완성해가며 오래전 사춘기 시절에 끄적거린 '삶의 의미'를 재현해 내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김영하 #단한번의삶 #복복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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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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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티스트 앙드레아의 [그녀를 지키다: Veiller sur elle: Vegliare su di lei]를 읽었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가면 우측 한 편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그림 앞에 빽빽히 사람이 들이차서 그녀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는 깨끔발을 들거나 손에 들린 카메라를 통해서나 슬쩍 감상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넓은 성당 안에서도 유독 두터운 방탄 유리 속에 감춰진 피에타상을 보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군중들 틈에 기꺼이 끼어들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원래 피에타상이 지금처럼 두터운 유리관으로 가려져 있지 않았다고 들었었는데, 지금처럼 유리에 반사된 빛으로 인해 제대로 살펴볼 수 없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소설 속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안타깝지만 기이한 광기로 인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 중의 하나가 손상되었다면 아마 누구라도 지금처럼 보호재를 사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그의 삶의 생애에 따라 피에타상의 모습도 확연히 달라짐을 확인할 수 있지만 바티칸 안에 천지창조부터 지옥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를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십자가 상의 죽음을 맞이한 아들 그리스도를 껴안고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조각한 피에타상의 공존은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될 예술품의 가치를 더욱 드높이게 된다. 이번 소설은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의 거장 중의 한 명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피에타상을 모티브 삼아 20세기 초 세계대전으로 인해 파시즘이 득세했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또 다른 피에타상을 제작한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라는 인물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미모 비탈리아니가 숨겨진 피에타상과 함께 하고자 했던 비올라 오르시니와의 숭고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시기에 해당되는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부유하고 안락했던 유럽 사람들에게도 혹독한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오죽하면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을 '벨 에포크' 라고 칭하며 경제 문화가 발전하며 태평성대를 이뤘던 그 시기를 간절히 그리워했을 정도니 말이다. 물론 그 행복한 시기는 일부 귀족들과 상류층 사람들에게만 해당되었을 것이고 여전히 굶주림과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생존의 위협을 받았겠지만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 또한 그런 가난한 이들 중의 하나였으며 심지어 왜소증으로 인해 일평생 난쟁이라는 무시를 당했으며 일거리를 찾아 프랑스에서 머물던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유로 일 프란체제라는 비아냥 거림을 듣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는 미모를 돌보기에 힘이 부쳤는지 어린 아들을 이탈리아 북부의 '피에트라달바'라는 곳의 알베르토에게 보낸다. 조각가였던 아버지에게서 어릴때부터 대리석 조각에 대해서 배웠던 미모는 알베르토의 공방의 도제로 머물게 되지만, 미모의 천재적 재능을 알아본 알베르토는 미모의 능력을 야비하게 이용만 할 뿐 구타와 폭력으로 미모를 학대한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미모가 보낸 끔찍한 유년시절을 단지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지 않는다. 미모는 왜소증이라는 신체적 한계와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와 자신을 무시하고 폭력을 휘두리는 공방 주인의 위협 속에서도 꾿꾿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나간다. 어쩌면 미모가 오르시니 가문의 대저택에서 우연히 같은 또래의 비올라를 만나고 밤마다 재연된 무덤가에서의 대화가 없었더라면 수도원의 지하에 꽁꽁 숨겨둘 만큼 화재를 일으킬 피에타상을 조각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미모 비탈리아니의 천부적인 재능은 대리석 안에 그가 조각하고자 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투시력과 같은 통찰력을 드러냈으며, 비올라 오르시니는 당대의 여성에게 국한된 지위를 벗어나 특히 귀족 집안의 자제로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만남을 거부한 깨어 있는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모의 집안과 그의 친구들은 그냥 별볼일 없는 일상을 견뎌내는 서민이었지만, 비올라는 가족은 오리시니 가문으로 첫째 오빠 비르질리오는 어이없게도 전쟁에 참전하여 기차 사고로 죽게 되지만, 둘째 오빠 스테파노는 파시즘 정권에 빌붙어 승승장구하게 되고, 셋째 오빠 프란체스코는 성직의 길로 나아가 교황의 오른팔에 오르게 되는 극소수의 부류 중의 하나였다. 이런 미모와 비올라의 만남 자체가 파격적이었지만 비올라의 범상치 않는 행동들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당시 여성들에게는 권고되지 않던 엄청난 독서를 통해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모는 비올라를 통해서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그들이 지속한 무덤가에서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통해 미모는 위대한 조각가가 될 것임을 비올라는 하늘을 나는 원대한 꿈을 이룰 것임을 서약하게 된다. 


하지만 미모와 비올라의 행복했던 만남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비올라와 정략혼인을 약속하는 파티에서 벌어진 비올라의 기막힌 선택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비올라는 지붕에서 몸을 날리며 그동안 미모와 그의 친구들과 준비한 비행의 실패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고 미모는 비올라의 소식을 들을 수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알베르토의 속임수로 인해 피렌체의 공방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후 미모는 피렌체의 공방에서 또 다른 천적과도 같은 네리의 훼방으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다시 피에트라달라로 돌아가려던 찰나 네리 일당의 린치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어이없게도 피렌체 뒷역에 머물던 서커스단의 일원이 된다. 어쩌면 조각가라는 일을 다시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가 지속되지 않을까 하는 시기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왜소증을 가진 서커스 단장과 그의 누이 사라를 만나면서 서서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바티칸의 고위직으로 수직상승하는 프란체스코의 제안으로 미모는 내적 고향인 피에트라달바로 돌아오게 되고 그때부터 조각가로서의 삶은 꽃을 피우게 된다. 미모는 로마와 피에트라달바의 공방을 오가며 수많은 고관대작의 요청에 밀당을 하며 조각품의 가치를 드높이게 되고, 파시즘 정권을 상징하는 조각품을 수탁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미모의 공방의 직원과 제자들은 늘어나고 수입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상류층의 삶을 살기에 충분해진다. 우여곡절 끝에 재회한 미모와 비올라는 미모가 파시즘 정권의 상징물을 만든다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이며 사이가 멀어지는 듯 하지만 미모는 비올라에 대한 우정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비올라의 방황과 괴로움은 그의 남편이 보란듯이 벌이는 외도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부분에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를 무시하며 비올라가 사춘기 시기에 쓴 시를 비웃으며 낭송하는 남편을 식사용 나이프로 찌른 일로 인해 비올라는 남편과 헤어지게 되고,미모는 끔찍해보이는 수녀원의 요양 프로그램을 단번에 무시한 채 비올라를 데리고 떠나 그녀를 지켜준다. 


시간은 흘러 미모가 그토록 바라는 것처럼 보이던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자격을 부여받게 되고 그동안 미모의 삶은 녹록치 않았음을 단숨에 보상받듯이 앞으로의 시간은 꽃길만 펼져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 영광의 정점에서 미모는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의 시나리오를 써내려간다. 그동안 비올라의 간청과 조언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듯 했던 미모는 수용소에 갇혔던 사라를 빼내오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비겁함을 깨닫게 되었고 양심의 소리를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미모는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자격을 받고 이어진 소감에서 앞으로는 더 이상 정권의 개가 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다. 미모는 그 일로 인해 감옥에 갇히게 되고 비올라는 미모의 놀라운 선택을 지지하게 된다. 이때까지는 중간 중간에 짧은 쳅터로 그려지는 임종을 앞둔 고령의 노인이 된 미모를 지키는 파드레 빈첸초의 피에타상과 관련된 비밀스러운 서류를 확인하는 모습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미모가 만든 피에타상은 어째서 전대미문의 문제를 일으켰으며 바티칸에서 조차 미모의 피에타상을 숨기기를 바라고 아무도 모르는 수도원의 지하에 놓여진 것일까? 미모의 피에타상을 본 수많은 사람들 중의 상당수가 이상 반응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나 미모가 형기를 마치고 나온 후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프란체스코의 권유를 마다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더 이상 대리석 안의 모습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조각가의 천부적인 능력을 상실한 것 같아 피에타상을 조각할 수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 소설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에 일어난 끔찍한 반전인 천재지변 때문에 벌어진 영원한 이별이 아닐까 싶다. 스포일러에 해당되겠지만 미모가 아주 잠시 피에트라달바를 떠난 사이 엄청난 지진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오르시니 일가는 추기경이 된 프란체스코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참극의 사상자가 되고 만다. 넋이 나간 미모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올라를 찾기 위해 무너진 오르시니 저택의 일부를 헤짚게 되고, 어쩌면 오르시니 일가에게 주어진 죽음과의 이상한 협약처럼 오빠 비르질리오가 열차 사고에도 아무런 외상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비올라 역시 외양에는 큰 상처가 없었다. 소설 속에서는 미모가 어떤 울부짖음으로 비올라의 죽음을 애통해 했는지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그가 잠도 자지 않고 피렌체의 공방으로 내려가 다시금 조각을 시작하여 피에타상의 제작에 몰입했다는 것만으로 미모에게 있어서 비올라가 어떤 의미였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미모에게 죽어버린 대리석 너머의 아른거렸던 작품의 모습이 비올라의 죽음으로 부활하였고, 미모는 피에타상의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이 아니라 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의 상에 비올라의 모습을 대입시킨다. 교황청을 비롯한 여러 미술 관계자들은 비탈리아니의 피에타상을 본 상당수의 이들이 기이함을 느끼고 혼란스러웠던 이유는 예수의 상에서 기존의 비올라의 여성성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혼란을 자아내는 피에타상을 감춘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미모의 피에타상은 수도원의 지하에 유폐되고 미모는 비올라를 그리는 피에타상 제작 이후 그녀를 지키며 수도자와 같은 형제라 불리며 삶을 마감하게 된다. 


"극악한 사건들은 시간을 늘어뜨린다. 비올라가 시간에 관해 아무 말이나 했던 게 아니라는 증거. 정신이 조금 전의 순간에서 굳어 버리고 믿기지 않는 마음이 시간의 톱니바퀴에 들러붙어 운행을 늦추는 바람에 초대객 중 그 누구도 반응하지 못했다.(496)"

이번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뛰어난 비유와 묘사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는데, 바로 이 문장처럼 한 마디로 뜨악한 순간을 맞이했을 때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 수 없을 때를 마치 시간의 운행이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으로 인하여 늦춰지게 만들었다는 표현력은 정말 감탄해마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네 양심이 네 손목에 찬 그 시계보다 더 값이 나갈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네 전 재산을 동원해도 되살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거고.(527)"

미모를 미행하던 비차로의 마지막 말이 미모의 양심선언과도 같은 결과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미모는 비올라에게 다시금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음을.


"우리가 추구하던 것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무것도 없음을, 추구하던 그것은 슬며시 빠져나가 저만치 앞에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면 그것 역시 한 걸음 내딛습니다. 언젠가는 그것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계속 품어 보려고, 그저 그 것의 보폭이 우리 걸음보다 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538)"


"털고 일어설 수 없는 부재들이 있지.(613)"

이 마지막 한 문장이 또르르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일상을 영위하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부재의 순간 비탈리아니의 피에타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비탈리아니의 피에타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진짜 이유는 예수의 모습이 비올라라는 여성성을 지녀서가 아니라 그렇게 삶의 소중한 이들의 부재를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리라. 


#장바티스트앙드레아 #그녀를지키다 #Veillersurelle #정혜용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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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 프란치스코 교황 공식 자서전
프란치스코 교황.카를로 무쏘 지음, 이재협 외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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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자서전 [희망]을 읽었다. 최근 포탈 기사에 연이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병세에 대한 정보가 전해지고 있다. 두 개의 커다란 전쟁에 대한 기사도 자주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어쩌면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라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을지도 모를 종교의 수장에 대한 건강보도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교황님의 정치 사회 문화적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바티칸과 관련된 내용을 평론하는 이들의 기사에 의하면 냉전시대에 비해 교황님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작아졌음을 지적하며, 교황님의 직접적인 중재에도 분쟁을 일으킨 각국의 지도자들은 예전만큼 그분의 비판과 지적을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교황님에 대한 전세계적인 관심과 기대는 여전한 것은 아마도 불가지론자든 다른 종교인이든 점점 망국으로 치닫는 것 같은 불우한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분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이번 교황님의 자서전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변화는 어떤 특정한 한 개인의 놀랍고 신비로운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각 개개인이 불의와 거짓이 주는 이익에 편승하지 않고 정의와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들이 모여 가능하기에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2013년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스스로 교황좌에서 물러나겠다는 보도로 전세계 사람들이 깜짝 놀랐었다. 그 이전까지 물론 600년 전에도 생전에 같은 일이 있었지만 대체로 종신직에 해당했던 교황좌에서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아직 외적으로 봐서는 건강에 큰 무리가 없어보였던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사임 소식은 가톨릭 교회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 문화가 지배적인 서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그분의 사임 소식 못지 않게 새로운 교황님의 탄생과 그 이후 이어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소박하지만 혁신적인 행보는 마치 새포도주를 새부대에 넣은 것과 같은 싱그러움을 안겨주었다. 


최근 전세계의 80세 미만의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들이 모여 새로운 교황님을 선출하는 과정을 그린 <콘클라베>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생애 역작에 해당되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아래 100여명의 추기경들이 모여 가톨릭 교회를 이끌어갈 새로운 인물을 뽑는 과정이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마치 실제 상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만 같았다. 원래 사제들이 입는 검은 수단(열혈사제에서 김남길 배우가 입고 나오니 더 멋져보였지만) 자체가 허리라인이 들어간 디자인으로 길게 뻗어 그 자체로 맵시가 나는 옷인데, 주교 이상의 직분을 가진 이들이 영화 속에 등장인물 다수로 나오다보니, 대주교의 자색 수단과 추기경의 홍색 수단 그리고 교황님의 흰색 수단이 시스티나 성당의 빨간색 카펫과 어우려져 그야말로 영원히 힙할 수 밖에 없는 장면을 뽑아냈다. 


아무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그렇게 콘클라베를 거쳐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서 첫 인사를 건네실 때부터 이전의 정형화된 관례를 깨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자서전에도 나오듯이 원래 첫 인사는 정해진 라틴말의 축복을 해야 함에도 'Bounasera'라는 이탈리아 인사말을 친근하게 건네시며 자신의 첫 인사를 기다리는 수많은 군중에게 기도를 먼저 부탁하셨다. 이후 교황을 상징하는 의복의 화려함을 거부하고 사도궁전이 아닌 마르타의 집에서 거주와 고급 리무진이 아닌 피앗 같은 소형차를 타는 소박함을 보여주어 많이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런데 이런 교황님의 파격적인 어쩌면 전임자들과 상대적으로 비교가 될 수 밖에 없는 놀라운 선택의 과정들은 단순히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정말로 그분이 불편했기 때문임을 자서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어째서 그분이 이주민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많으신지, 어떻게 가난한 이들과 약자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었는지, 시원치 않은 무릎을 굽혀 독재자들의 발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라도 그들의 마음이 돌아서 분쟁이 멈추기를 기원했는지, 그분이 살아온 삶의 흔적들을 고백하는 내용을 통해서 놀라운 용기와 결단과 실행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서전에는 조부모님 세대가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자리를 잡아 교황님이 태어나는 과정부터 시작하여 어릴 때의 철없던 행동에 대한 반성과 서서히 사제 성소를 갖게 된 경험들을 전해준다. 단순히 교황된 한 개인의 개별적인 고백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교황님이 겪었던 실제의 일들과 견주어 교황님의 가르침이 덧붙여져 교황의 이름으로 발표된 권고와 회칙 그리고 교회의 문헌들을 조금 더 쉽게 설명해주는 종합판을 아우르는 것 같았다. 특히나 교황님의 두 번째 회칙에 해당하는 <찬미받으소서>는 환경오염과 생태보존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환경보호에 대한 중요성이 단지 지구위기에 대한 심각성을 부각시키기 위함만이 아니라 너무나도 손쉽게 만들어 쓰고 버리는 문화가 비단 물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소비의 행태가 종국에는 가난한 지역의 이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함을 경각시키기 위함임을 말한다. 


더불어 제3차 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지금의 상황을 개탄하며 전쟁으로 인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악에 받친 분노와 복수의 비극이 지속될 뿐임을 일깨워준다. 지금도 뉴스를 통해서 끊임없이 보도되는 부모를 잃고 눈물을 흘리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교황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세상의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치부하며 일상을 살아간다. 


"공포와 억압, 비참과 타락의 언어, 인간이 빠져드는 가장 어두운 골짜기의 언어는 늘 한결같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이 쓰이는 것은 침묵의 언어입니다. 무관심은 말조차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건 내 일이 아니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모른 척하면 그만이야...' 이런 속삭임들이 가장 무서운 말이 되어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습니다.(376)"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고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가 사는 곳에서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행되는 비극적인 만행들을 손쉽게 눈감아 버리고 모른 척하는 것은 언젠가 부메랑처럼 불행을 가져올 것이기에 교황님의 말씀처럼 모두가 눈을 뜨고 현실을 바라봐야 함을 일깨워 주신다. 자서전의 말미에 이어지는 희망에 대한 권고와 용기를 불어넣어주시는 예화들은 시시 때때로 포기와 좌절을 낳는 일상의 권태로움과 나태의 유혹을 벗어나 한 걸음씩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무엇보다도 요한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에 해당하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가장 좋은 포도주가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를 빗대어 독자들에게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언제나 간직하기를 바라신다. 


"혹시 언젠가 두려움과 근심이 밀려올 때면, 요한 복음에 나오는 카나의 혼인 잔치를 떠올려 봅시다(요한 2,1-12). 그리고 스스로 말해 보세요. '가장 좋은 포도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라고 말입니다. 농민의 후속인 제게는 이 비유가 특별히 가슴에 와닿습니다.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가장 깊고 기쁘며 아름다운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비록 통계가 다른 말을 하고, 지친 몸은 힘이 빠져도, 결코 꺽이지 않을 이 희망만은 잃지 마십시오. 이 말을 기도처럼 되뇌어 보세요. 기도가 어렵다면 마음속으로 작게 속삭여도 좋습니다. 믿음이 약하더라도, 진심으로 믿을 때까지 계속해서 속삭여 보세요.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도, 사랑이 메말랐다고 느끼는 이들에게도 이 말을 전해 주세요. '가장 좋은 포도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라고 말입니다.(496)"


#프란치스코교황 #카를로무쏘 #희망 #SPERA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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