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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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쪽 눈을 치켜뜨고 무엇인가 불만 섞인 표정을 짓는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오베... 프레드릭 배크만의 '오베라는 남자'는 저자의 블로거가 인기를 얻으면서 탄생한 책이다. 깐깐하고 까칠하며 자신이 정한 원칙에 위반되는 행동은 절대하지 않는 뚝심 있는 이 남자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항상 정해진 시간에 알람이 없어도 일어나는 중년의 남자 오베... 그는 매일 같은 패턴의 일과를 시작한다. 커피 여과기를 사용해 커피가 우러나는 시간 동안 자신이 사는 마을 시찰을 나선다. 주차 구역과 쓰레기 처리장, 자전거 보관소까지 다 둘러본 후에 집에 돌아온다. 자신의 집, 마을, 직장을 사랑하고 누구보다 성실했던 오베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물러나게 된다. 안 그래도 타인과의 교류가 거의 없이 지내는 오베는 아내 소냐가 죽은 이후로 빨리 아내의 곁으로 가고 싶어 한다. 어느 날 트레일러 한 대가 오베의 화단에 침입하는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러 안에는 오베의 집 건너편에 새로 이사 온 일가족이 타고 있다. 트레일러 후진을 못하는 그들을 도와준 것이 오베의 중대한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원인이 된다.


더 이상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지 않기에 평화롭게 죽으려고 준비의 마무리 단계인 그 때 초인종이 울린다. 자신에게 도움을 받은 트레일러의 부부다. 아내는 이란 여성으로 임산부에 멀대인 남편의 방문이 반갑지 않다. 오베에게 과자를 건네며 먹히지 않는 농담을 하는 그들은 오베에게 사다리를 빌려 달라고 하고 오래도록 외면하고 지낸 이웃 루네의 아내 역시 오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냥 외면하면 끝이지만 오베는 그들을 도와준다.


조용히 삶을 정리하고 싶었던 오베 앞에 한 가족이 등장하며 이런저런 요소들이 결합하여 그의 죽음이 죽음 계획은 자꾸만 미루어진다.


너무나 까칠하고 고집불통이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오베는 결코 좋은 인상을 주기 힘들다. 허나 이런 오베의 모습에서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올 곧은 진실한 모습을 그의 아내 소냐는 찾아내고 그와 함께 한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그들의 결혼... 이들의 만남과 잔잔한 행복, 버스 여행이 가져 온 엄청난 결과와 그럼에도 여전히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은 오베란 남자를 이해하고 그의 사랑에 나도 모르게 울컥하게 만든다.


오베란 인물과 그의 아내, 아버지, 트레일러 일가족, 가장 친한 친구로 지냈지만 어긋난 버린 관계, 고양이 등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궁금증을 유발하며 책 속에 빠져들게 한다. 누구나 버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 오베란 남자는 특히나 말이 없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살면서 필요한 말만 하고 행동하며, 정직과 원칙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왔지만 자신의 원칙을 벗어난 것에 대한 융통성은 제로에 가깝다.


겉모습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말한다. 허나 우리는 겉모습에서 8,90%를 판단하는 경향이 많다. 내 이웃에 오베란 남자가 살게 된다면... 그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것은 생각보다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 허나 일단 알게 되면 그에게 다가가고 싶을 거 같다. 재밌는 요소들도 꽤 있지만 안타깝고 코끝이 찡해지는 장면도 많아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전해준 책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하니 책에서 느낀 감동을 영화로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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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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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한 권씩 다시 읽으면서 예전에 몰랐던 즐거움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어릴 때 세계문학전집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는 작품이다. 만화로도 만들어지고 워낙에 유명해져서 커서는 읽지는 않았다. 무인도에 살게 된 로빈슨 크루소가 주인공이 아니고 아라우칸 족 원주민이 로빈슨 크루소와 만난 금요일의 이름으로 지어주며 그의 이름 '방드르디 (금요일)를 전면에 내세운 책 제목이 독특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스물 두 살의 로빈슨 크루소는 '버지니아호'의 선장과 어쩔 수 없이 타로 카드를 앞에 두고 있다. 자신이 뽑은 카드를 보고 선장이 떠드는 소리에 집중하지 못하고 밖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가 열린다. 갑자기 거센 파도가 몰아치면서 선체를 흔들리고 순식간에 사람과 배의 모든 것이 휩싸인다.


눈을 뜬 로빈슨은 자신이 낯선 장소에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장소에서 그는 할 말을 잃는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지만 무엇인가를 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섬에서 살기 위해 버지니아호에 갔다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찾아 돌아온 로빈슨은 살기 위해 이 섬의 이름을 '스페란차'라고 짓고 진흙에서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함을 느낀다.


젊은 로빈슨이 스페란차에 가진 애정은 사랑이다. 그가 이 섬에 자신의 전부를 쏟아 붓는다. 농사를 짓고 염소를 기르며 생활하던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이 생길 때도 있었지만 스페렌차가 어머니처럼 품어주었기에 그는 견디어 낼 수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남자를 향한 총구가 기르던 개로 인해 생각지도 못하게 남자를 구하게 된다. 섬에 살고 있는 아라우칸 족 원주민인 그에게 프랑스어로 금요일이란 '방그르디'란 이름을 지어주고 그를 노예처럼 부린다. 방그르디를 구해줄 때부터 그들의 관계는 주종관계가 되어 버렸다. 절대복종을 하는 방그르디... 로빈슨은 우연히 방그르디가 어머니의 자궁인 스페렌차를 더럽힌다고 여겨 무차별 폭행을 자행한다. 머리로는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화를 참지 못하는 로빈슨... 헌데 두 사람의 관계가 한 순간에 동등해지는 일이 발생한다. 모든 것을 잃고 대등한 관계가 되면서 방그르디는 자신의 힘과 목소리를 낸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인간대 인간으로서 동질감을 느끼며 친구처럼, 연인처럼 잘 지낼 수 있었다. '화이트버드호'이란 이름의 가진 배가 28년 만에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스페렌차에 살지 않았다면, 방그르디를 만나지 않았다면 로빈슨 크루소도 '화이트버드호' 사람들의 모습처럼 노예를 부리며 타인에 대한 배려심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권리를 행사하며 살았을 것이다. 허나 스페렌타에서 28년이 넘는 시간과 방그르디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 세상은 변화했고 사람들이 악취 나고 타락했다고 느낀다. 로빈슨은 스물두 살의 그가 아니기에, 돌아갈 고향에 자신을 기다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방그르디가 있는 스페렌차에 남기로 한다. 기쁜 마음으로 방그르디의 해먹을 본 그는 망연자실해진다. 방그르디가 사라진 것이다. 그는 친구이며 동료인 방그르디를 찾아다니지만 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로빈슨의 앞에 나타난 인물은 화이트버드호의 어린 노예 소년이다. 다시 새로운 인연이 시작된다. 그에게 목요일이란 '죄디'라 정한다.  


산다는 것은 오직 그 값진 과거의 자산을 늘리기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죽음이 오는 것이다. 죽음은 그 축적된 금광을 향유할 수 있는 순간에만 진정한 죽음이었다. 우리가 소란스러운 현재 속에서 보다 더 깊이 있게, 주의 깊게, 현명하게, 감각적으로 삶을 음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것이 주어진 것이다.   -p50-


그가 달려간 것은 그의 영혼을 다시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영혼은 백인의 손아귀 속에 있었다. 그 후 방그르디는 몸과 넋이 다 백인의 소유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나 선이요. 그가 금지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악이다. 까다롭고도 의미 없는 조직이 기능을 발휘하도록 밤낮 할 것 없이 일을 하는 것은 선이요. 주인이 정해 준 몫보다 더 많이 먹는 것은 악이다.     -p182-


야생의 상태로 되돌아간 염소들은 이제 인간들에게 강제로 사육되는 동안 강요받았던 무질서 속에 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가장 힘세고 똑똑한 숫염소들이 지배하는, 계통과 서열이 확실한 무리로 나누어졌다.   -p241-


로빈슨은 자기도 과거에는 그들과 다를 바 없이 탐욕, 긍지, 폭력 따위의 똑같은 동기로 움직이는 존재였으며, 지금도 어느 커다란 부분에 있어서는 그들과 같은 무리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p297-


그는, 그 내부에 부패와 쇠퇴를 향한 어떤 충동을 내포한 생리학적 젊음으로 젊은 것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이 그에게는 최초의 시작이었으며 세계사의 절대적인 시작이었다. 하나님이신 태양 아래서 스페렌차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원한 현재 속에 진동하고 있었다.                  -p307-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소설과 철학이 결합되어 있어 쉽게 느껴지는 소설은 아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이란 것은 누리는 사람에게는 분명 혜택이지만 아닌 사람에게는 지옥일 수 있다. 로빈슨이 가진 백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인간에 대한 차별, 종교에 대한 맹신과 믿음을 가진 인물이지만 방그르디와 스페렌차에 살게 되면서 그는 자연과 사람을 존중하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로빈슨이 문명의 세계로 돌아갔다면 어떤 모습이 될지 모른다.


철학적인 이야기로 되어 있어 어렵게 느끼게 되는 면이 있지만 로빈슨이 느끼는 감정들이 독특하면서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버지니아호'의 선장이 로빈슨이 뽑은 타로카드를 풀어주는 대로 로빈슨의 인생이 흘러간다는 것도 재밌게 느껴졌으며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장들이 많아 조금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읽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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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토어 밀리언셀러 클럽 138
벤틀리 리틀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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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작은 상점들이 어려움을 겪는 이야기는 이제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된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시설도 좋고 한꺼번에 몰아서 쇼핑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해 대형마트에는 사람들이 몰리고 있어 재래시장이나 소규모의 슈퍼 등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나마 지역 상권을 보호하고자 대형마트에 한 달에 두 번 정기휴일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지역 상권은 어렵다. 나 역시도 소소하게 한두 가지 물건이 필요할 때는 집근처의 슈퍼, 상점을 이용하지만 대량으로 물건을 구입하거나 다양한 물건을 구입해야 할 때는 대형마트로 향한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편하게 되어 있고 요즘처럼 갑자기 더워진 날씨로 인해 시원한 대형마트를 찾게 된다.


'더 스토어'는 조용한 작은 도시 주니퍼에 대형체인점인 '더 스토어'가 들어서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지역상권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대형체인점 '더 스토어'를 자신들의 생활 안에 들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단순하게 지역상권을 죽이고 살리는 문제가 아니라 대형체인점이 가진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가 사람들의 의식을 좀 먹는 섬뜩한 공포를 보여주는 호러소설이다.


주인공 빌 데이비스는 너무나 사랑하는 마을의 모습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에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다. 오래된 나무들은 물론이고 동물들이 죽는 것에 그냥 지나치기에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다.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하나뿐이다. 조그마한 지역에 불필요하게 거대한 '더 스토어'란 대형마트의 입점이다.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불법적인 방법을 행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더 스토어가 처음에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까지도 흡수하며 점차 사람들 생활 속 깊숙이 자리 잡게 된다. 빌의 고등학생 딸들도 마찬가지로 더 스토어에서 직장을 얻기 원한다. 첫째 딸이 먼저 더 스토어에 취직을 하는데 그녀의 취직 과정에서 보여주는 단계가 일반적인 모습을 넘어 수상쩍다.


한 번 들어가면 자기 맘대로 퇴사도 못하는 직장이 '더 스토어'다. 처음에 굴육적으로 느낀 취직도 빌의 첫째 딸은 어느새 적응하고 이제 동생마저 취직하려고하자 자신이 나서 도와주기까지 한다. 빌의 둘째 딸은 자신의 남자친구가 더 스토어에 취직하면서 생각지도 못하게 결별을 통보 받은 것에 놀랐지만 더 스토어에 취직하면 다시 옛남자친구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허나 남자친구는 새로운 근무지인 밤의 매니저로 발령이 나는데...


작은 도시를 중심으로 일반적인 거대 기업과 소상인들 간의 갈등,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질 거란 예상을 넘어 더 스토어란 대형마트가 보여주는 모습은 섬뜩하고 소름이 끼치는 공포를 자아낸다. 자신이 어느 것에 중독되어 간다는 것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더 스토어와 맺은 계약대로 점차 물들어가는 직원들과 자신들이 믿고 다녔던 상점이 아닌 커다란 대형마트의 상품들 속에 빠져드는 지역사람들의 관계 맺음이 흥미롭다. 처음에 지역 사람들을 현혹하기 위해 보여주었던 것과는 다르게 필요에 의해서 더 스토어를 찾게 되자 점차 다른 모습을 보인다.


우리 생활 깊숙이 대형마트가 자리 잡고 있어 더 스토어를 읽는 내내 거대 상권에 침몰하는 지역상권의 붕괴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지역상권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휴일제도 도입하고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여전히 지역상권의 상당부분은 어려움을 넘어 폐업하는 일이 잦다.


경찰서, 소방서, 학교, 도서관, 읍의 노래와 사람들까지 전부 통제하는 호러와 공포스런 모습들을 가진 더 스토어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가속성이 뛰어나 단숨에 읽게 된다. 읽으면서도 지역상권을 좀 더 보호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자신과 가족에게 커다란 상처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털어 놓는 주인공의 빌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조금 과한 느낌이 드는 설정이나 거북스러운 면이 있지만 그가 보여주는 비장의 카드는 분명 통쾌함을 안겨준다.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대형마트와 지역상권을 중심으로 한 현실적인 문제가 흥미롭게 담겨져 있는 스토리를 나는 나름 재밌게 읽었는데 다른 분의 평가는 어떨지... 호러, 공포소설이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우리 사회현상을 담고 있기에 충분히 읽을 만하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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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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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을 입은 말라버린 나뭇가지가 표지라 이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이끌어내는 박범신 작가의 '주름' 이 책은 이미 나온  '침묵의 집'을 두 번에 걸쳐 전면 개작하여 나온 작품이라고 한다. 저자의 작품은 몇 권 읽었다.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사회적 이슈를 몰고 온 '은교'를 인상 깊게 읽었는데 사실 영화에서는 노시인의 모습이 조금 변태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책에서는 노시인의 느끼는 젊음에 대한 동경, 갈망이 충분히 이해가 되어 좋았는데 이번 작품 '주름'은 솔직히 뭐라고 평가하기 나로서는 어렵다.


나이, 국가, 인종에 상관없이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가진 사회규범이나 개인의 기준을 벗어나 사랑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히 아름답다. '주름'의 주인공인 50대의 남자 김진영은 분명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금지된 사랑을 누구보다 치열하고 정열적으로 쏟아낸 남자다. 허나 이 사랑을 읽는 나는 솔직히 불편했다. 내가 누구를 평가할 입장이 아니기에 김진영과 시인이며 화가인 천예린이란 여성과의 사랑이 그 나이에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멋지다는 말로 간단히 할 수가 없다.


부부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준다고 한다. 첫 눈에 반해 콩껍질이 쓰인 연인이라도 부부가 되고 생활의 때가 묻어가며 시간이 흐르면 그 콩꺼풀이 벗겨지고 익숙한 생활에 적응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의리를 지키며 살아가게 된다. 김진영과 그의 아내 역시 시간이 흐르고 생활에 묻혀 우리나라 대부분의 부부들처럼 살고 있다.


갑자기 아내, 자식을 버리고 한 여자만을 쫓아 집을 나간 아버지로 인해 남겨진 가족은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는다. 아버지는 IMF 한파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 주류 제조 회사의 자금 담당 이사로 매일 막아야 하는 어음, 당좌를 해결하기 위해 온 신경을 다 쓰고 있기에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이런 아버지가 회사자금을 횡령해 자취를 감춘 것이다. 남겨진 가족들은 살고 있던 집까지 팔며 아버지가 벌인 일을 수습한다. 군대를 제대한 아들과 한 살 어린 딸은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당장 먹고 살아야하는 생활을 걱정해야 한다. 복학 대신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하며 아버지를 잊어가던 남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며 이야기가 시작한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짜증이 날 때가 있다. 평소에는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가는 일도 왜 화가 솟구쳤는지 나중에 생각하면 본인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데 김진영이란 남자도 그러하다. 어느 날 출근을 하기 위해 와이셔츠를 입다가 단추 하나가 늘어져 있는 것에 짜증이 몰려온다. 이 일로 아내에게 화를 내며 집을 나선 남자는 퇴근길에 미처 챙겨오지 못한 우산을 여직원이 씌어준다. 노란색의 우산... 이 우산이 그의 가슴 저 밑에 잠자고 있던 감수성을 자극한다. 지하철역에서 노란색의 우비를 입은 여자를 보고 무작정 따라가는 남자가 도착한 곳은 미술학원... 학창시절의 꿈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다. 그곳에서 우비 속 여인이 천예린 임을 알게 된다. 자신보다 네 살이나 많은 여자... 그녀를 향한 남자의 사랑은 10대의 서투르고 20대의 맹목적인 사랑의 모습을 갖고 있다.


돌이켜 보면, 얼마나 뻔한 관계로 살아왔던가. 오래전부터 아내와 나는 너무도 뻔한, 기계로 찍어낸 싸구려 공산품 같은, 황폐하고 부식된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는 자각을 뚜렷이 한 것도 그날부터였다. 아무런 긴장과 감흥이 없는 소위 무난한 부부 관계. 광 속에 버려져 있는 묵은 그릇처럼 세월과 일상의 더께에 묻혀 그 형상조차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은, 그리하여 관심과 관행만이 느린 운행을 거듭할 뿐 서로의 자아조차 붙잡을 수 없는, 텅 빈 허깨비 같은 죽은 삶의 의례적 형식, 무난한 부부 관계. 부부 관계는 물론 나의 모든 지난 인생이 무채색의 흐릿한 휘장에 덮여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도, 생각하면 바로 그날이었다.                        -p77-


세상의 모든 부부가 열정적인 사랑 속에 살고 있지 못하다. 시간이 흐르고 무난한 부부 관계가 남자에게 다른 여자에게 빠지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보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아내는 남편의 모습에 만족하며 살았을까? 시간이 흐르면 감정이란 것도 자연스럽게 순화하고 서로에게 맞추며 살아야 한다고 본다. 의례적인 가족 관계가 죽은 삶이란 표현은 과하다.  


원래부터 아이들은 제 엄마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도 내가 들어가면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 제 방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그것이 뭘 말하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천예린을 만나기 오래전부터, 나는 이 집에서 단지 돈이나 벌어오는 로봇 취급을 받아왔다는 것을. 가족 모두가 나에게 희로애락이 있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나에게 억압된 옛꿈의 유령이 깃들어 있을 수 있다는 걸 상상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p125-


TV 영향으로 지금은 가정적이고 아이들에게 잘 하는 슈퍼맨 같은 아버지들이 늘어나고 있다. 허나 주인공 김진영처럼 50대의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이라 집보다는 회사가 자신의 삶의 터전에 가깝다.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기에 열심히 달리는 아버지들... 그들은 돈을 버는 기계란 말을 하면서 남편, 아버지로서의 자신들의 모습은 들여다보지 못한다. 권위적이고 무서운 아버지가 아닌 자식에게 조금 더 다가가려는 아버지의 모습을 남자는 얼마나 보여 주었는지... 남자가 옛꿈의 유령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의 아내 역시 자신의 오랜 꿈을 떠올리는 시간이 없었을까? 싶은 생각이 살짝 든다.


내겐 두 아이와 평생 나만 의지해 살아온 아내가 있습니다. 한 여자에 홀려 그들을 버리고 떠나왔지요. 머리핀을 무의식적으로 갈 때, 의식하지 못했지만 분명히 나를 죽이고 싶어 했다는 것을. 지금도 천예린보다 더 빨리, 더 고통스럽게, 더 완벽하게 나 자신의 명줄을 끊고 싶어 하는 내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p235-


남자가 끝까지 천예린 곁에 머무르고 싶어 한 마음을 조금은 이해가 되지만 공감하기는 어렵다. 솔직히 시인이자 화가인 그녀가 남자에게 상당 금액의 돈을 꾸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물론 나중에라도 갚는다고 그녀는 말한다. 허나 그녀는 죽을 때까지 그의 맹목적인 사랑에 의존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남자가 더 처절하게 자신에게 굴복하고 자신만을 갈구하게 만들기 위해 남자가 그녀를 쫓아 모르코에 가서 그곳에서 어린 소년에게 가방을 도둑맞고 소녀의 형에게 죽기 직전까지 구타당하는 것을 보고도 단지 고생 좀 하겠다는 표현으로 나서지 않고 그냥 떠난 모습은 설령 사랑의 감정이 있거나 한 순간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고해도 이건 아니다 싶다. 좋게 말하면 자신에게 미친 남자의 사랑을 이용하여 돈과 그의 모든 것을 파괴한 팜므파탈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사랑은 세상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사랑이다. 한 쪽은 무한정 받고 한 쪽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껍데기가 되어서도 사랑을 하는... 한 사람으로부터의 이런 사랑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저절로 들게 하는 지독한 사랑이다.


박범신 작가의 책을 읽고 나면 느끼지만 난 저자의 책들이 마냥 어렵게 느껴진다. 단순히 선정적이고 과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를 떠나 작가가 말하고 싶은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버거울 때가 많다. 나름 흥미롭게 느껴지는 책이지만 결코 천예린, 김진영의 사랑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김진영의 아들은 같은 남자라 아버지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최종적으로 알고 싶은 것은, 아버지가 텅 빈...... 생의 중심에서 다시 날아오르고자 했을 때, 마지막에 행복했을까,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점이었다. 아버지의 주검으로는 그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눈감고 누워 있는 아버지의 얼굴은, 수천 년을 살아온 사람처럼 주름살이 유난히 많아 그로테스크한 하회탈 같은 느낌을 내게 주었다.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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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긴 개자식 뷰티풀 시리즈
크리스티나 로런 지음, 김지현 옮김 / 르누아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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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긴 개자식'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은 제목에서 끌렸다. 터놓고 욕을 제목으로 쓴 이유가 무엇인지 내심 궁금했던 로맨스소설인데 읽다보니 영화로 만들어져 북유럽에서는 높은 인기를 누렸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흥행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생각이 났다. 달달한 밀당 같은 로맨스소설을 나 같은 독자에게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에로틱 영화나 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관심을 갖고 읽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턴사원으로 근무하는 클로에 밀스는 MBA 학위를 4개월 앞두고 있다. 인턴사원이지만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그녀는 경영자에 곧 오를 베넷 라이언 이사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클로에는 완벽하게 잘 생기고 일에 있어서도 뛰어난 라이언 이사를 '잘 생긴 개자식'라 부른다.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들고 라이언 이사의 사무실에 들어간 클로에는 노골적인 그의 손길을 받게 된다. 머리로는 거부하고 싶은데 몸은 먼저 반응을 보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대범하고 노골적으로 탐하게 된다. 만나면 으르렁 거리지만 헤어지면 서로를 생각하는 두 사람... 클로에와 라이언이 상대에 대한 생각을 통해 스토리를 풀어가고 있으며 시간, 장소불문 두 사람은 역정적인 욕구에 서로를 맡긴다.


라이언의 집안사람들은 클로에를 좋아한다. 그녀를 아끼기에 좋은 사람을 소개해 줄 생각까지 한다. 상대는 라이언의 친구...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아도 좋은 인물이다. 클로에가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라이언은 피가 거꾸로 쏟는데...


솔직히 잔잔한 로맨스소설을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성인용 로맨스를 보여주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재밌다기 보다는 능력 있고 잘 생긴 남자가 한 여자만을 사랑해주는 여자들의 로망을 충족시켜 주는 소설이란 생각이 든다. 성인 에로영화와 별로 다르지 않는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으며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와 비교해 비슷한 느낌이랄까? 우리나라 독자보다는 외국 여성독자들이 더 좋아할 책이 아닌가 싶다. 남녀의 진한 사랑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이 책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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