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이 함께 풀어야 할 역사, 관동대학살
유영승 지음, 무라야마 도시오 옮김, 시민모임 독립 기획 / 푸른역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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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의 역사든 민족의 역사든 인류가 존재하는 한 시공간을 넘나들며 쉼 없이 기록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2391일 오전 1158분 대지진이 관동 지역을 덮쳤다. 진도 7.9의 대지진으로 바람을 탄 화염은 도시 전체를 불태우며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대지진으로 목숨을 잃은 천재(天災) 이면에는 육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학살된 잔혹한 살육 현장을 목격한 증언이 쏟아졌다. 산술적인 계산에 포함되지 않은 조선인의 수습되지 않은 유골뿐 아니라 피해자의 신원 확인조차 되지 않은 어두운 역사를 재조명한 필자를 중심으로 한 관동대학살은 역사의 그림자로 남아 있다.


  일본당국은 대지진으로 혼란에 빠진 상황에 폐허를 방불케 하는 삶의 터전을 복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조선인 폭동 등의 유언비어를 살포하며 조선인들을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살육하였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는 날조된 유언비어는 바람을 타는 불길처럼 삽시간에 퍼졌다. 조선인 탄압을 위하여 군대와 경찰이 동원되었고, 자경단이란 조직이 결성되어 조선인 대학살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반봉건ㆍ반외세를 외친 동학농민군과 항일 운동에 참여한 이들, 의병 등을 상대로 총칼을 겨눴던 재향군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자경단이었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참혹한 살육행위를 자행하였고, 조선인을 죽인 일을 무용담처럼 말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작가는 글 쓰는 일을 숙명으로 알고 근대 일본이 겪은 대지진을 진재 문학이라는 새로운 문학 양식을 만들어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작가의 일기와 수기에는 지진의 경험과 보고 들은 학살의 기록을 주로 드러냈다. 대지진에서 살아남아 학살을 피한 조선인은 재난 현장을 떠나 피신하였지만, 그들이 머문 피신처에서도 유언비어는 난무하여 조선인의 박해는 극심하였다. 작가들은 표현의 규제와 검열 문제로 작가들이 일본 당국을 경계한 탓에 도쿄에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당국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은 한계를 보였다. 보도 규제가 해제된 후에도 언론에서는 학살은 불령조선인의 폭동에 대한 자위적 행동이었다는 아전인수식 해석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의 가해와 학살을 피해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조선인들이 연락선을 타기 위하여 시모노세키로 몰려들자 학살 사건이 조선에 알려지는 것을 우려한 총독부는 부산에 구호사무소를 설치했다. 총독부는 구호사무소에 귀환한 조선인들을 수용하여 학살 사건을 발설하는 것을 막았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아이들이 뛰어가는 소리만 들어도 공포에 시달리며 학살의 기억에 갇혀 일상이 쉽지 않음을 절감한다.


  ‘일 엔 오십 전. 십 엔 오십 전이라며 죽창에 찔려 죽어간 조선인들의 참혹한 주검을 목격한 이들은 환각에 시달리며 정신적 피해를 호소한다. 존엄한 생명을 살육하기 위하여 유언비어를 살포하고, 날조된 의견을 들어 폭력과 살인을 정당화하는 일은 근절되어야 한다. 인류의 평화를 위하고 공존하는 세상을 위하여 한일 양국은 100년 전 관동에서 일어난 일본의 조선인 학살 이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역사적 소명을 다해야 한다. 지금은 가해 사실을 은폐하여 기억 저편으로 사장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진실과 마주하는 용기를 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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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코리아 2024 - 청룡을 타고 비상하는 2024를 기원하며!
김난도 외 지음 / 미래의창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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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갈무리하는 즈음 한 권의 책을 꾸준히 읽어왔다. 왠지 모를 불안감을 상쇄하기 위하여 읽기 시작한 <<트렌드 코리아 2024>>는 읽을수록 합성어로 된 신조어가 눈에 띈다. 영문으로도 번역돼 출간된다니 외래어 같은 외국어 사용이 늘어난 것은 아닌지 회의하며 화룡점정에 맞춤한 열 개의 핵심을 좇는다. 인공지능의 총아로 급부상한 챗GPT는 다양한 쓰임을 드러내며 인간의 영역으로 여겼던 분야까지 들어와 진가를발휘하고 있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그에 따라 새로운 흐름을 잇는 시대를 슬기롭게 살아가야 할 운명에 놓였음을 실감한다. 고물가, 고금리 시대에 소비를 하더라도 만족도가 크면서 타인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물꼬를 트는 현명함을 갖추고 싶어진다. 예상치 못한 일들에 발목이 잡혀 불운한 삶을 살고 있다고 지청구를 늘어놓기보다는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갈 힘을 스스로 불어넣는다.

청룡의 해 2024년에는 한국에 상서로운 빛이 함께하길 바라며 트렌드코리아 10개의 소비트렌드 두 가지 큰 동향을 본다.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메타인지를 갖춘 인간으로 생존하기 위한 통찰과 사색은 화두처럼 전제되어야 한다. 고착화된 태도를 버리기 위하여 변화를 마주하는 마음가짐, 변화를 마주한 경험 속에서 학습하려는 마음가짐은 유연함을 지탱하는 근간으로 작용한다.

흐르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자주 있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임이 자명하다. 급변하는 다변화된 세상에 시간은 자산으로 대신하여 쓰이기도 한다. 시간의 가성비를 중요시하며 사용 시간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분초사회’는 소유 경제에서 경험 경제로 경제의 패러다임이 이행해 왔다. 분초를 다투며 시간 효율성을 따지며 실패 없는 시도를 추구한다. 분초 사회를 숨 가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돌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배려 돌봄,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돌보는 정서 돌봄,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는 관계 돌봄이 ‘돌봄 경제’로 대두된다.

산업화 시대를 살았던 부모 세대와는 달리 30대 초반인 딸 부부는 가정생활에서 성 역할에 대한 기치관의 변화가 역력하다. 딸 부부는 임신 계획을 세우고 출산 후 어떤 일들을 분담하여 효율적으로 처리할 것인지 사전에 논의하여 에너지 소모를 덜하겠다는 입장을 보인다. 믿을 만한 이들이 추천하는 가전제품을 혼수로 마련하는 ‘디토 소비’는 짧은 시간에 경험을 따라 소비하는 행태로 떠오른다. 어려운 결혼을 감행한 ‘요즘 남편’은 육아 휴직을 자처하며 살림까지 도맡는 ‘없던 아빠’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생각이 팽배한 시대에 결혼한 부부의 결혼 준비에서부터 결혼, 자녀 출산, 육아에 이르는 과정이 범상치 않음은 고난도의 결혼과 출산을 감행한 부부로 함께하는 육아에 적극적이다.

벽촌에서 나고 자라 농사일을 도우면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하여 졸음을 쫓으며 공부를 열심히 하는 길만이 열악한 환경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그 중에는 개천에서 난 용으로 불리며 지난한 시절을 회고하던 친구들이 있어 희망을 논할 수 있지만 지금은 태어나면서부터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이들이 있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때가 있다. 외모ㆍ학력ㆍ자산ㆍ직업ㆍ성격ㆍ특기 등에서 약점 없는 ‘육각형 인간’을 지향하며 계층 고착화에 대한 울분을 터뜨리기도 한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못하는 것이 없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육각형 인간을 꿈꾸며 나다움을 잃어가는 듯해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스마트폰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해졌듯이 인공지능의 혜택 없이는 살아가기 불편한 시대에 직면하였다. 코딩 교육에 이어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 당연시되는 때에 인공지능 생태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활용하는 ‘호모 프롬포트’ 역량이 요구된다. 인공지능의 기술적 결과물에 매몰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성찰하는 메타인지 능력을 갖추는 인간만이 AI시대를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구 절벽 시대에 지역민으로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을 소통 창구를 마련하고, 지역 공동화 현상을 막기 위해 해당 지역만의 콘텐츠를 계발하는 일이 절실하다. 현대의 도시와 지역이 액체처럼 서로를 연결하는 유연성으로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는 ‘리퀴드폴리탄’으로의 변모를 그린다.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는 시 구절을 떠올리며 이 세상에 놀러 왔다 때가 되면 죽음의 세계로 향하겠다는 시인의 마음을 떠올린다. 놀이하는 인간으로 유한한 삶을 즐기다 편안한 죽음을 맞고 싶은 바람을 품고 지낸다. 친구들과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사는 이야기를 나눌 때면 도파민은 분출되다 시간이 흐를수록 겉도는 이야기로 빠져들 때면 스트레스가 치솟기도 한다. 이 때, 세로토닌은 도파민이 이끄는 삶을 제어하며 삶이 균형을 잡아준다.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도파민이 분출되는 행동이라면 다양하게 시도하는 ‘도파밍’으로 이끄는 행태를 제어함으로써 일상의 균형을 찾을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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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어루만지면 창비청소년문학 123
박영란 지음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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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 보면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틀어 낯선 환경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가 있다. 19829월 부산으로 전학을 가 이모 집에서 공부를 해야 했던 순간이 정서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숫기 없이 당하고 사는 남동생을 혼자 보낼 수 없으니 덤으로 누나까지 엎어 부산으로 학적을 옮겨야 했다. 십 리를 걸어 통학하며 정들었던 친구, 교정, 개울, 가로수, 동네 어른들을 품고 도회로 나가 생활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학교를 오가며 적응하느라 힘든 생활도 그럭저럭 시간 따라 흘러가고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친구들과 만나 우정을 두텁게 하는 사이 조금씩 하동에서의 시공간도 아련한 추억 속에 남게 되었다.


  “집은 잘 있어.”

   준이 장원으로 내려가 누나와 통화할 때마다 묻는 말이다. 얼마나 오래 그곳에 머물렀던가보다는 누구와 함께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따라 한 공간은 서사적 의미로 다가온다. 나의 가족은 성실하게 살면서 서울의 중산층을 꿈꾸며 무탈하게 지냈다.

  '지금까지 세상에 속았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그동안의 일상이 무너져 내린 아빠는 그동안의 생활에 매몰되어 지나왔음을 깨달았다. 지금껏 살아온 서울 생활을 접고 장원으로 내려간다는 가장의 말에 다른 식구들은 선뜻 함께한다는 말은 못하여도 아빠의 생각을 저지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생활에 익숙해진 엄마는 남편의 뜻을 선뜻 따를 수가 없어 큰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대학 갈 때까지는 서울에서 지내려 한다. 가장의 수입이 불투명해지자 대출이 절반인 아파트를 정리하고 그동안 집안 살림을 주로 하던 엄마는 취업을 하였다. 준과 누이, 엄마는 오래된 2층 주택으로 이사해 그동안 느끼지 못하였던 감각의 문이 열리는 경험들을 공유한다.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1층 정원에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아이들이 그네를 타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다급하게 뛰어가는 모습도 눈에 띈다. 마당 뒤편에는 장작더미가 가지런히 쟁여져 있고, 텃밭에는 식물이 자라고 있다. 숲에서 들리는 소쩍새 울음소리, 댓잎들이 소리 내어 우는 소리, 계절 따라 숲을 드나드는 짐승들의 소리 등이 자연의 울림으로 노래한다. 동생인 준이 목격한 바로는 1층에는 백발 할머니와 두 아이가 살고 있다고 하였다.


    며칠 후 마주친 할머니는 자신이 집주인이라 하지만 뭔가 숨기고 싶은 이력이 있어 보인다. 불도 들어오지 않고 수돗물도 끊어진 집에서 이들이 숨죽여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떠나야 할 상황에서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뭔가가 있을 것이라 남매는 생각했다. 자작과 종려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면을 튼 덕분에 서로 왕래하는 사이 남매는 할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어절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집을 거처로 삼아 지내는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함께 살지 않았던 시공간의 흐름을 감지한다.


    엄마가 쌍화탕을 들고 퇴근한 날에는 엄마를 푹 쉬게 하는 남매의 배려가 돋보인다. 엄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남매의 성숙함은 살고 싶은 집을 팔고 떠나버린 아들을 원망하지 않는 할머니의 넉넉한 마음과도 닿아 있다. 의지 가지 없는 손자들을 돌보며 손닿는 대로 움직이는 할머니의 정성은 비밀의 숲으로 불릴 만한 산삼 밭으로 가는 길을 준에게도 동행케 하였다. 집주인으로부터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명이 떨어지면 비밀 통로로 가기 힘든 산삼 밭을 2층 식구들에게 알려주었다는 점은 조금은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믿음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철조망 너머 산삼 밭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꿩들의 안내는 무의식의 흐름에서나 있을 법한 환상이어도 좋다. 자연 만물이 씨앗을 틔우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섭리에서 만나기 드문 흰 꿩을 본 일은 포용력 있는 사랑의 발로라는 생각이다. 먼저 장원으로 내려 간 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떠난 뒤로는 숨어 들지 않은 1층 식구들, 곧 장원으로 내려갈 것 같은 준의 엄마, 여전히 도시에서 살아갈 누나의 행방에 새로운 감각의 문이 열릴 때마다 어느 한 공간에서의 시간을 추억하며 또 다른 인연을 맺고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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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창비청소년문학 122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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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어도 온전히 살아있는 것이라 말하기 곤란한 일상을 보내는 오십 대 후반, 무탈한 나날을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복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늘어난다. 한 달에도 서너 차례 부고 문자가 들어와 장례식장으로 조문을 가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고인을 추모하고 애도하면서 살아남은 자는 고인의 명복을 빌 뿐이다. 여러 유형의 죽음이 있지만 뜻밖의 사고로 사랑하는 혈육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을 때, 회한은 깊어진다. 이전의 시간으로 돌릴 수 있다면 돌연한 죽음으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세계로 디지털 사후세계, 메타버스에서 죽은 개인의 아바타를 만들고 그들을 부활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인간과 기계 사이에 새로운 문명이 등장한 것이다.


  예민한 촉수로 여러 감각에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이 겪는 일상의 고통은 곳곳에서 머리를 내민다. 부모나 형제자매 혹은 자식을 여의고 망자를 그리워하며 비탄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일상은 피폐해진다. 가족은 다시는 볼 수 없는 세계로 가버린 이를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숙명을 끌어안는다. 공부하다 잠깐 바람을 쐬러 간 아들이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 일을 겪은 부모 마음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부모는 열여덟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 첫아들 진을 가슴에 묻고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참척의 아픔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첫째아들 진과는 열세 살이나 벌어지는 둘째아들 혁을 보며 자식 잃은 비통함을 견뎌왔는지도 모른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운명의 시간 속에 스스로를 욱여넣고는 평상심을 찾으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메타버스 플랫폼 난달의 피싱랜드에서 낚시 게임을 즐기는 혁과 도운은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눈비가 내리거나 거센 바람이 불어도 가상 세계에서는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캐시로 낚시 장비를 마련하고 먹잇감을 사 물고기를 낚는 시간은 공부하기 싫어도 책상 앞에 버텨야 하는 의무감에서 자유롭다. 각자 나름의 아바타로 변신하여 현실 세계를 빠져나와 가상 세계에서 유영한다.

  혁은 형이 다니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가족이 모르는 형의 흔적을 좇는다. 형의 고2 담임인 교감 선생님이 혁을 불러 안부를 전한 일은 물음표로 싸인 형에 대한 의문을 푸는 열쇠로 작용했다. 진의 방은 그가 세상에 머물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이라도 하듯 정지된 채 머물러 있다. 혁은 안 봐도 될 형의 세상인 메타버스 ‘가우디’ 속 현실을 엿보게 되면서 아바타 진의 집을 가꾸어 온 공유 친구 곰솔의 정체를 밝히고 싶은 마음에 휘감긴다.

  대부분은 보고 싶은 대로 보려는 경향이 있어 특정인을 겪어 보지 않고는 평가를 제대로 내릴 수 없음을 알아차린다. 형 친구는 진이 무던한 성격이라고 했고, 엄마는 형을 애교 많은 수다쟁이 아들로 평가했다. 조용하고 책임감 강한 학생으로 형을 기억하는 교감 선생님과는 거리가 있는 평가라 짧은 생을 살다 간 사람일수록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각기 다를 수 있음을 알면서도 혁은 간과해 온 형의 본질을 찾고자 한다.

  조별 과제로 미술관을 찾아 작품을 관람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발표수업으로 진과 곰솔은 마음이 통해 서로에게 끌려 좋아한 듯하다. 곰솔이 좋아하는 귤을 검정 봉지에 담아 현관 문고리에 걸어두고 간 진의 행동은 영락없이 곰솔을 좋아하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가우디 공간에서 마음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아갈 무렵 진은 세상을 떴고, 곰솔은 진의 정원을 돌보며 그의 마음이 들어 있는 공간에서 그에게 전하는 편지를 가슴에 새겼다.

  XR 헤드셋 착용 후 만나는 세상을 통해 혁은 기억에도 없는 형의 일면이자 전부인 학창시절의 우정과 사랑을 가늠하며 꿈속에서 형을 만났다. 도서관 서가의 책에 적힌 형의 생일, 선생님으로 진을 그리워하며 지내는 곰솔, 학창시절 아들이 쓰던 물건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부모 등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영면한 사람을 그리워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삶 곁에 바투 서 있는 죽음을 떠올리며 회한을 남기기보다는 상대를 배려하는 사랑의 표현으로 짧은 생을 다채롭게 채우면 좋을 듯하다. 가슴 속 깊숙이 자리한 슬픔을 어루만지며 살아 있어 감사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지낼 수 있는 감각이 있어 고마운 일상이다. 톡 쏘는 신맛으로 감각의 반전을 맛보게 하는 귤의 새콤함이 온몸으로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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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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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도구와 AI의 도움으로 혼자서도 일들을 해내는 지능화의 결과 개인이 발휘하는 힘의 강도는 세지고 있다. 평균 수명 증가와 초고령화 사회 진입으로 예전의 생애주기 모델을 표준으로 삼던 시대를 벗어나 개인이 역량을 발휘하며 어떻게 생존할 것인지 물음을 던지며 지내야 하는 때이다. 관행대로 살아도 되는지 의문을 품고 물음에 답하는 여정에 삶의 궤도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50대 중반 남은 인생 2막을 위해서라도 사회구조적 변화의 맥락 속에서 개인이 힘을 발휘하며 살아갈 역량을 기르는 자기관리 능력이 요구된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던 은혜를 잊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며 지내던 때와는 달리 자식에게는 더 이상 효도를 받지 못하는 노년을 미리 대비해야 하는 과제를 해결하며 살아야 할 운명에 맞닥뜨렸다.

나라의 경계를 넘어 세계로 확장된 영역에서 활동하는 일이 늘어나는 때에 세상 보는 눈을 키울 필요가 있다. ‘K-대한민국’이라는 말은 대한민국이라는 물리적 ‧ 법률적 공간을 넘어 확장하고 있어 미래 국가는 도시국가가 될 것이라는 학자들의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개개인이 다양한 특성을 갖고 오롯한 자신으로 정체성을 드러내는 성향이 뚜렷한 때, 수직적 능력주의가 갖는 한계가 있다. 상사가 대화를 독점하기보다는 대화 순서의 평등성이 보장되는 친화적 분위기에서 부원들은 각자의 특기와 장점을 활용할 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 중에서도 새로운 개인으로 불리는 핵개인 시대에 학력은 사회적 성취 단계에서 준비해야 할 것이지 그 자체의 성취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회식 자리 술잔을 들고 건배사를 할 때,

“우리가 남이가?”

라고 물으면 남이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으로 무장한 연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디지털 유목민이 늘어나는 때, 조직 중심에서 개인 중심의 플랫폼 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은 명약관화해졌다. 세계적인 감염병인 코로나19를 겪으며 바이러스와 함께 지내는 동안 인공지능의 힘을 빌리는 일이 흔해졌다. 온라인 공개수업, 원격수업, 화상 회의 등이 보편화되며 답이 있는 문제는 AI로 대체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글로벌 전문 교육은 디지털 환경을 기반으로 어디에서든 교육이 가능해 인간은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를 고민하며 자신의 서사를 갖출 필요가 있다.

새로운 기술이 시대적 이슈로 대두되는 시대에 시대의 큰 흐름을 읽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된 환경에 맞게 갱신하는 과정은 문제해결을 위하여 선행해야 할 과제이다. 유튜브 스승을 만나 자체 역량 강화가 가능한 시대에 집합적으로 축적된 지혜와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 고민하며 스스로 권위를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잇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시도하며 삶의 다양성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질 필요가 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평준화된 기준에 발목 잡혀 살던 평균적 일상을 벗어나 자신만의 권위를 찾아가는 과정은 인공지능이 활약하는 시대에 거쳐야 할 단계이다. 자신만의 트랙을 설계하고 독립된 목표를 설정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시간을 뒤로 하고 이제는 경쟁 구도에서 이탈해 개인의 서사를 만드는 일에 주력해야 할 때이다.

핏줄을 중심으로 한 친족 중심의 전통적 사회의 균열이 가속화되면서 가정은 있지만 일가가 사라지는 현상이 뚜렷해졌다. 전통적 시대의 효와 돌봄이 퇴색한 돌봄 과도기에 나이 듦을 부정적인 단어로만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 나만의 서사를 이뤄가는 일은 진정한 자립으로 나아갈 통로이다. 세상의 눈높이에 나를 맞추지 않고 나만의 권위를 이뤄가는 과정은 핵개인 시대를 사는 지혜로 여겨진다.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며 안도하기보다는 좌절을 겪더라도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도하며 누구도 쉽게 넘보지 못할 권위를 찾을 때, 고유성 있는 개인으로 진정성 있는 삶을 이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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