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밤
엘리자베스 하드윅 지음, 임슬애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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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6월이다. 당분간 무엇을 하며 살지 정했다. 바뀌어버린, 심지어 뒤틀려버린 기억을 과제로 삼아 이 삶을, 지금 살고 있는 삶을 계속 살아갈 생각이다.
(첫문장)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기억을 더듬으며 마치 의식의 흐름처럼 편지, 독백, 유추 등의 형식으로 써내려간다. 화자는 1인칭 시점의 '나'인데, 작가 엘레자베스 본인을 소환한 듯 보인다.  


소설은 엘리자베스의 가족, 동료, 친구 외에 지인들 혹은 직접 관계를 맺은 적은 없지만 건너건너 말로만 들었던 이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직업, 인종 및 국적, 사회 계층도 저마다 다 다르고, 화자가 추억하는 기억의 장소 역시 여러 곳이 등장한다.  


소중한 친구 M을 시작으로 후아니타, J, 주디스, 미스 크레이머, 알렉스, 라일, 마리, 루이자, 닥터 Z와 시모너, 조젯, 아이다, 안젤라, 마이클, 미스 라보어 등등. 


보스턴, 뉴욕, 암스테르담, 또다시 뉴욕. 
1940년대 뉴욕, 52번가의 비밀스런 재즈 클럽, 재즈와 트럼펫, 그리고 진심어린 허무주의, 할렘의 거리.  



소녀 시절 성인 남성과의 교제를 통해 터득한 기브 앤 테이크의 이치, 지역 교사 자격증 취득, '타락'이라는 단어조차 달콤했던 소녀 시절, 어린 시절의 유원지 댄스장, 학창시절의 댄스파티, 경마장의 기억, 장난스런 포옹과 댄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불면의 밤, 이혼, 권태, 질투, 상실과 아픔, 흔들리고 슬프고 격렬한 중년의 나날들, 그리고 뉴욕의 서재. 


가정 살림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매춘을 하고 결국 성병으로 죽은 아가씨, 과거의 방탕한 생활을 숨기고 살아가는 교사들, 파도와 같았던 어머니의 여성성, 스스로를 좋아하지 않았던 알렉스의 삶의 목적, 가정 폭력과 근친 강간과 난치병이라는 불우함 속에서도 지켜내야하는 것들을 지켜내려 하는 조젯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  


화자는 자신이 살아온 경험, 오랜 시간 지켜봐온 사람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자기만의 상상을 통해 인생을 고찰하고 사유한다. 


냉철한 지식, 삶의 미완성, 사라지는 희망, 독신과 결혼, 홀로 살아가는 삶, 여행, 도시, 예술, 노동, 관능, 청춘, 부모와 가족, 무심과 무감, 인내, 삶의 결핍, 부부 간의 사랑과 헌신, 불륜, 지옥에서의 생존과 그 이후의 삶, 가족의 죽음, 은퇴, 새로운 삶의 시작. 


우리네 삶에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수많은 파도들을 하나하나 맞닥뜨리며 실망하고 체념하며 상실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지만, 다시 사랑하며 손을 맞잡고 춤을 출 수 있는 것이 인생임을, 그러니 서로를 연민하며 살아가야함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1916년에 태어나 이 소설을 예순세 살에 출판했고, 91세에 별세한 작가. 아흔의 작가는 삼십여 년 전의 자신의 사유를 어떻게 생각할지 무척 궁금해졌다. 책을 읽다보면 간혹 만나고 싶은 작가가 있는데 이 분이 그랬다. 


문장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불현듯 떠올랐다는 듯이 툭툭 내뱉는 문장들 하나하나 공감하지 않은 문장이 없었다. 필립 로스는 '이 소설에서는 문장 하나가 사진 천 장을 대신한다'라고 평했는데, 개인적으로 책의 표지처럼 문장들이 별가루 같았다.



p186.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은 고통. 거기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위장할 뿐, 형용사의 날개를 달고 도망칠 뿐. 문단의 끝에서 단검에 찔리는 것은 달콤하지. (...) 다 잊어버리고, 나는 아끼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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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정원
홍준성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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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늙은 식물학자 얀코가 일곱 살때인 1092년을 시작으로 병을 앓으면서 죽음을 기다리기까지 그녀가 기록한 천 장의 메모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미스터리한 사건을 추적한다.    



무차별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빈민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구는가? 마치 인구수를 줄여서 식량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처럼, 여느 때처럼 늘 있어왔던 흔하디흔한 식량 폭동일 뿐인데. 그날의 진압은 확실히 이상했다. 빈민들 대다수는 곡물관리청을 점거하고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 중이었는데, 정작 계엄군이 향한 곳은 서쪽 골목에 있는 로벨토 가街였다. 똬리나무가 발견됐던 지하철 공사 현장. 그리고 수 년이 흐르는 동안  똬리나무와 관련된 사람들은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면 죽음을 맞았다.  








프롤로그부터 무척 흥미진진한데, 이 소설의 재밌는 점은 시간적 배경이다. '기적이 사라진 해'로부터 약 천 년이 지난 뒤다. 그런데 기적이 사라진 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배경이 11~12세기 무렵으로 나타나지만, 현실에서 봤을 때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인지, 미래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즉 시.공간적 배경이 모두 허구라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전작인 <카르마 폴리스>의 대홍수를 기점으로 천 년여가 흐른 뒤의 비뫼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아님 말고). <카르마 폴리스>의 고아 소년 '42' 역시 몬세라토 수도원 부속 고아원 출신이다.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만의 논리와 방식은 작금의 현실을 꼬집고 있음은 아닌지.  



하인학교에 들어간 얀코가 애정을 갈구하며 칭찬받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다른 고아 하인후보생들과는 달리 우등과 낙제 사이의 회색지대에 머물며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으로 행운을 거머 쥔 죄책감을 달래는 모습은 흡사 우리의 모습같다. 적당한 위선과 위악 사이에서 누구나 그렇다는 것을 핑계 삼으며 타인의 고통에 슬그머니 한 발 물러나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고.   


그러한 얀코를 조건없이 지켜주는 두 사람이 있다. 고아원 친구 난쟁이 참토, 그리고 연인 비나드. 고아원에서부터 남방한계선까지 얀코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나타나 헌신적으로 얀코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던 참토와 동료들의 참혹한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연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던 비나드를 통해 얀코는 생각했다. 억울하고 비참하기만 했다고 여겼던 자신은 과분한 삶을 산 것이라고.  


얀코가 그토록 지하의 똬리나무에 집착했던 이유는 복수였다. 복수가 아니라면 살 명분이 없었고, 어쩌면 살기 위해서 명분을 만들어야만 했을테니까. 얀코는 수시로 자문한다. "나는 왜 살려고 하는가." 



사랑과 비극, 분노와 복수, 고독과 회한, 기억과 망각, 후회와 미련, 연민과 우정, 삶과 죽음에 대해 통찰하면서 우리 사회가 여전히 안고 있는 수많은 부조리와 모순들을 짚어낸다. 산업재해, 우생학, 농업의 붕괴와 그에 대한 여파, 국제 경제의 모순, 공기업의 부패, 빈민 구역의 건물 붕괴 및 화재 사고, 시대의 변화에 따른 산업의 흥망성쇠, 이슈를 이슈로 덮는 정치 프레임과 언론 조작, 여론몰이 등 그야말로 정치, 경제, 산업 등 전반적 현대사를 아우르며 한국뿐 아니라 현재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들을 절묘하게 엮어내면서 우리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얀코는 젊은 시절 문득, 자신이 이 저주받은 도시에서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필사적으로 병마와 죽음에 저항하면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는, 노쇠한 얀코가 남기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ㅡ 


올리버 트위스트, 레 미제라블, 고골의 페테르부르크가 존 르카레의 형식을 띠며 철학적 사유를 하는 소설,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의 그림이 그려지려나? 구성도 얄미울 정도로 극적이다. 매 장章이 연이어 서술되지 않다보니 대충 읽을 수가 없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진실을 향해 달려간다. 그런데 마지막, 비나드의 편지는 너무나 부드럽고 사랑스러우며 희망적이라서 더 슬프다. 책을 읽는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엇갈리고 작가의 철학적 사유에 나의 생각을 실어보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화룡정점은 얀코에게 쓴 비나드의 편지다. 


얀코와 함께 떠날 수 있었던 비나드. 그랬다면 두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비나드의 편지는 왜이렇게 애달픈지, 이 편지를 읽었을 얀코는 어떤 심경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기에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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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에서 온 언어
미즈바야시 아키라 지음, 윤정임 옮김 / 1984Books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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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시작부터 저자는 왜 그토록 프랑스어의 세계로 들어서고 싶어 했던걸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본인이 자문자답한다. 1970년대 일본 대학가는 여전히 정치가 큰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고, 68사태의 후유증은 대학에 잔혹한 모습들로 남아 있었다. 대학생인 저자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말들의 공허함이었다. 생기 잃은 단어들, 속 빈 문장들, 실체 없는 말들이 번식하며 안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었다. 온갖 매체를 통해 쏟아지는 말들, 대형 광고판에 쓰인 어휘들, 전단지에 인쇄된 담론들, 이러한 것들이 일상의 언어를 구성했고, 저자는 그 모든 것에서 불쾌감을 느꼈다. 이 부분이 책의 초반부에 서술되는데, 개인적으로 상당히 공감했다. 








그는 보편화된 언어 인플레의 느낌에 쫓기고 있었고, 도피의 선택지이자 유일한 타계책이 프랑스어였다. 저자가 프랑스어를 좇게 된 결정적 사건은 일본의 철학자이자 에세이스트 모리 아리마사의 저서 <노트르담 멀리에서> 나오는 '경험'에 대한 글이었다. 진정한 말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에 대해 얘기하는 글이 그에게 격동을 일으켰다는데, 사실 이 부분이나 이후에 서술되는 언어와 음악에 대한 얘기들을 읽으면서 저자의 기질적인 면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싶다.  



어린 시절 내내 들어왔던 형의 음악은 저자를 그에게 있어서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어로 이끌었다. 형에게 음악이 그렇듯, 프랑스어는 저자에게 부성父性의 언어다. 인내심을 요구하는 훈련의 대상이자 작업의 대상, 자신과 혼연일체가 된다는 점에서 저자에게 프랑스어는 음악이었다.  


십대 후반,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듣고 또 들었던 저자. 그의 프랑스어에 대한 사랑은 모차르트에 대해 지녀 왔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한 그 사랑에 의해 부양된 것이다. 그가 모차르트, 특히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매혹되었던 것은 무엇일까? 모차르트의 중간적 위치, 그리고 모짜르트가 존재와 외양 사이에 가식없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며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하녀이면서도 귀족과 성직자를 상대로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수산나에게서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아니나 다를까 글의 후반부에 수산나에게 매료됐음을 고백한다.  


서문을 시작으로 2부에 접어들기 전까지 불현듯 떠오르는 음악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이었다. 듣는 것으로나 연주하는 것으로나 베토벤 소나타 중 가장 아끼는 곡인데, 덕분에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함께 했다. <피가로의 결혼>을 들으면 좋았으련만 독서 중에는 가사 있는 음악은 사양이라... .  


ㅡ 


일본 - 프랑스 - 일본 - 프랑스 - 일본으로 이어지는 언어적 이방인이 쓴 이 에세이는 조금 독특하다. 저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한 것도 아니고, 이중 언어 환경에 내몰린 것도 아니다. 모국어에서 느껴지는 한계를 타파하고자 스스로 앞으로 살아갈 언어를 선택했다. 저자는 장 자크 루소와 장 스타로뱅스키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을까? 



오늘날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려 하지 않는다. 사회적 거래에 속하는 온갖 가치들은 인간 존재의 진정한 개인성을 은폐한다는 이유로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현대 사회의 만연한 언어 인플레 속에서 기만당하는 인간의 고통을 얘기한다. 정지된 단정적 사유나 분명한 관념들이 아니라, 사유에 대한 노력, 이탈과 유배의 노력이 중요하며 틀에 박힌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저자가 지향하는 바다. 


저자는 중도, 중개적 상태, 불완전한 중간을 좋아한다.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상태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상태의 온갖 구성적 특징도 아직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뿐 아니라 그가 일본과 프랑스라는 중간에 있는 실질적 위치와도 연관있어 보인다.  


저자에게 프랑스어는 구어口語일 뿐만 아니라 문어文語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구어체 프랑스어에는 뭔가 자연스러운 면이 결여되어 구어의 차원으로 적절하게 흘러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꾸준한 의식의 경계 태세를 유지했고, 서른다섯 해 만에 자연스러워졌음에도 자기 검열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책으로 만난 저자는 모국어 정체성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듯 하다. 오히려 언어를 선택해 가족 공동체의 언어로 정립해가는 과정을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다.  



쉰여덟 살, 그의 인생의 삼분의 이를 프랑어로 살아 온 저자는 더 이상 민족지적인 의미에서 일본 공동체에 있지 않다고 느끼고, 국적의 소속에 따라 그가 규정되어지길 바라지 않는다. 한편으로 존재 깊숙한 곳에서 태생적 언어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도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긍정한다. 물론 그는 프랑스인이 아니고, 프랑스에 머문 기간은 고작 7,8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원적 영토에서 벗어나 있다는 데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저자는 스스로 일본인도 프랑스인도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자신에게 이방인의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타자의 관점으로 관조하는 언어로 인해 프랑스어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어에 대한 애착도 느낀다. 그에게서 프랑스어가 사멸할 때 스스로를 죽은 사람으로 여길 것이라는 말에서 저자의 프랑스어에 대한 애착과 자신이 부여한 정체성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유년의 형상인 일본어, 분신의 형상인 프랑스어. 말, 그리고 언어가 갖는 힘에 대한 찬사. 언어는 단순한 말을 넘어서 삶의 장소를 만들어내는 일임을 이 책을 통해 느끼고 저자의 감정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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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입문 - 데리다, 들뢰즈, 푸코에서 메이야수, 하먼, 라뤼엘까지 인생을 바꾸는 철학 Philos 시리즈 19
지바 마사야 지음, 김상운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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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제목 그대로 입문서다. 저자는 현대 사상의 사조와 사상가별로 분류해 처음 입문하는 독자를 위해 난이도를 구분해 학자들의 저작을 소개하고, 가장 기본적이며 최소한의 것만 쉬운 문장으로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입문자들이 잘 따라갈 수 있도록 현대사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책에서 말하는 '현대사상'이란 1960년대부터 1990년대를 중심으로 주로 프랑스에서 전개된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을 가리킨다. 그 대표자로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미셸 푸코를 꼽는다. 그 외의 철학자들도 사이사이 다루지만, 이 책은 앞서 언급한 세 사람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데리다의 '개념의 탈구축', 들뢰즈의 '존재의 탈구축', 푸코의 '사회의 탈구축'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현대사상을 배운다면 복잡한 것은 단순화하지 않고 생각할 수 있으며, 단순화 할 수 없는 현실의 어려움을 전보다 '높은 해상도'로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는 갈수록 질서화, 청정화로 향하고 있고, 문제 해결에 있어서 예외성이나 복잡성은 무시한 채 천편일률적으로 규제를 늘리는 단순한 해법만 찾고 있다. 이처럼 작금의 사회는 복종에 가까운 단순화되고 있음을 우려한다. 그래서 현대사상을 배울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현대사상은 질서를 강화하는 데에 경계심을 갖고 질서로부터 거리를 두는 '차이'에 주목하면서 불필요한 것을 창조적인 것으로 긍정했다. 그 시작은 일탈의 에너지를 창조적인 것으로 긍정했던 니체다.  


저자의 글을 정리해 보면 프랑스 현대사상을 크게 포착하는 데에는 '차이'가 가장 중요한 핵심어이다. 현대사상이란 차이의 철학이다. '차이'는 동일성과 대립한다. 차이의 철학이란 반드시 정의에 들어맞는 것은 아닌 어긋남이나 변화를 중시하는 사고다.  


ㅡ 


저자는 현대사상적인 문장을 읽는 요령과 현대사상을 읽기 위한 네 가지 포인트를 알려준다. 일단 읽기 위한 장애물을 낮추는 것이 최우선이다. 세세한 부분은 건너 뛰고, 한 권을 끝까지 통독하지 않아도 된다. '빠짐'이 있는 읽기를 여러번 행하여 이해를 켜켜이 쌓으라고 조언한다.  


지식 나열이 아닌 강의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현대사상을 어려워하는 독자가 읽기에 훨씬 부담이 적다. 개인적으로 데리다, 들뢰즈, 푸코, 라캉은 기본서라 하더라도 끝까지 한번에 읽어내지 못했던 철학자들이기도 하다. 이후 그들의 저작을 펼치고 접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어찌어찌 끝까지 읽기는 했으나 사실 그 내용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지경이었다.  


저자는 어떤 철학서든 '보통으로 읽는다'라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철학책은 모두 암호화된 파일 같은 것으로, 어떻게 풀고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하게 하느냐에 따라 연구자들이 다양한 읽기의 접근법을 시도하고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 말이 얼마나 공감이 되던지.  


탐구할수록 오히려 수수께끼가 깊어진다는 저자의 말. 저자가 짚는 새로운 무한성과는 별개로 지구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제각각의 삶의 모양과 색깔을 갖고 있으니 삶의 결은 그야말로 인간의 지문과 같으므로 탐구할수록 수수께끼가 깊어지는 철학적 사유야말로 당연한 것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 고단하다는 비관주의, 하지만 그것을 통과해야 삶이 다시 긍정된다고 보는 쇼펜하우어의 역설이 나는 나쁘지 않다(맹목적 의지는 별로지만). 같은 맥락으로 어렵사리 읽은 이 한 권이 또다른 철학서 읽기의 계기가 된다면 나의 독서 한 면은 긍정되는 것일테다.  


현대사상에 관심은 있으나 접근이 어렵다면 가벼운 마음을 읽어볼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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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 샤우트
P. 젤리 클라크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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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짐 크로법과 금주령이 한창이던 1920년대를 배경으로 실제 존재했던 큐 클럭스 클랜(KKK단)에 대항하는 괴물 사냥꾼인 세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판타지 소설이다. 


소설은 실제했던 것들을 소설에 그대로 녹여내고 있는데 KKK단 외에 대표적인 인종주의의 다큐멘터리 영화 <국가의 탄생>도 등장한다. 소설에서는 영화 내용 중 백인 처녀를 흑인에게서 구출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살하는 장면을 서술하면서 클랜이 진정한 영웅이며 유색인은 괴물이라고 믿게 됐다는 데에 더 나아가 인종주의는 물론 여성 혐오까지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에는 샤우터를 인터뷰한 내용 일부를 주석으로 시작하는 장章이 있다. 3장 주석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가장 지독한 시절에도 우리는 즐길 줄 알았어. 안 그러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행복하기 때문에 노래와 춤과 웃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견뎌내는 한 방편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생각해 본 짦은 글을 읽으면서 우리의 전통 예술과 또 다른 저항 예술이 떠올라져 다른 몇 권의 책들을 뒤적여 봤다. 







 
마리즈는 어린시절, 느닷없이 들이닥친 클랜과 쿠 클럭스에 의해 부모님과 오빠까지 모두 몰살당했고, 가족의 시체는 헛간 대들보에 매달렸다. 오빠가 마리즈를 해치 속에 밀어 넣어 그녀만 겨우 살아남았다. 마리즈에게 남은 건 상실에 대한 슬픔,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부끄러움, 너무나 큰 분노였다.  


도살자 클라이드가 마리즈에게 요구하는 것은 순도 100%의 증오다. 학대와 폭력을 당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지독하게 고통당한 민족이 갖는 너무나 확실하고 강한 증오. 클라이드는 마리즈야말로 최고의 증오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위대한 키클롭스는 마리즈에게 제안한다. 복수할 힘, 동족의 생사를 좌우하고 그들을 지킬 힘과 권력을 줄테니 너의 증오를 달라고. 마리즈는 갈등한다. 유색인들이 이런 제안을 받아 본 적이 있을까? 유색인에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언제 있었을까? 유색인은 내내 인간의 꼴을 한 괴물(백인)의 손에 고통당하고 죽어나가지 않았는가. 이 계약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유색인만을 경멸하고 괴롭힌 이 세상을 위해 다른 인종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을까? 세상이 유색인을 구하려고 무엇 하나 해준 것 없는데, 어째서 유색인인 마리즈는 그 세상을 구해야 할까?  


생각해 보면 이러한 마리즈의 고민은 우리 주변에서 크고 작은 모습으로 늘 존재한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차별과 불공정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러한 부조리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마리즈가 적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얻는 것은 투쟁을 계속할 기회, 언젠가는 승리를 보리라는 희망, 그것뿐이다. 권력을 가진 꼭두각시로 살 것인가, 저항하는 약자로 남을 것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키워드는 증오(의 근원)이다. 소설에서는 증오가 누군가에게는 감정의 하나이지만, 증오를 먹고 사는 클랜에게는 그 자체가 힘이라고 말했다. 마리즈가 대항해 싸우는 괴물은 백인우월주의자, 인종주의자, 학살자다. 그런데 21세기에는 너무나 다양하고 많은 괴물들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사회 곳곳에 숨어 있다. 악은 늘 형태를 달리해 이어간다. 인종주의를 비롯한 혐오, 증오, 폭력, 학살을 자양분 삼아서. 


마리즈는 키클롭스를 대면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마리즈와 그녀의 동족이 갖는 것은 슬픔, 상실, 응당한 분노, 정의를 부르는 외침이지 증오가 아니었음을. 마리즈가 저항을 포기하지 않듯이 우리 역시 현실의 쿠 클럭스 클랜들로부터 지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가독성이 좋다. 무엇보다 실제 사건과 실존 인물들을 허구와 잘 버무려 놓아서 1920년대 미국 역사를 잘 알지 못해도 읽는데 무리가 없으며 민담과 신화, 그리고 판타지 요소까지 더해져 상당히 흥미롭다.  


종반에 클라이드의 제안이 그야말로 통쾌한 반전이다.
마리즈가 키클롭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상상만으로도 재미진 일이 벌어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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