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을 걷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1
김솔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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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졸중 이후 자신이 왼쪽과 오른쪽, 절반으로 나뉘었다고 말하는 화자는 사라진 자신의 오른쪽 절반을 '그'라는 3인칭으로 혹은 '너'라는 2인칭으로 지칭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쉥거'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소설은 '금고'와 '하천'을 중심축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서른 살 차이나는 젊은 아내를 대상로 한 유언장과 이혼 서류가 들어있는 금고는 누구도 쉽게 열 수 없는 폐쇄된 공간이며, 하천은 수십 년의 세월을 이어온 그야말로 역사의 현장으로서 열린 공간이다. 특히 해방 무렵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빗대어 정리한 십여쪽의 내용은 더할나위 없이 깔끔하다. 



'금고'는 불의, 부정, 황금, 욕망, 부끄러움 등 치부를 숨기는 장소라면, '하천'은 공개적으로 치부가 드러나는 곳이다. 결국 '금고'와 '하천'은 보기에는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얘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두 공간은 곧  화자 '나'와 또다른 자아 '쉥거'이기도 한데, 이러한 이중성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하천을 중심으로 펼쳐진 인간군상과 세상사를 마치 스냅사진처럼 찍어놓는다. 도시 난개발, 권력자의 부정부패, 본질을 상실한 일회성 제도 남발, 환경 문제, 젠트리피케이션, 외국인 이주 노동자 차별, 노인과 장애인 혐오, 근친 살해, 안전 부재 등 현대 사회의 문제점들을 관통하면서 소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진을 꽂아놓은 앨범처럼 읽힌다. 우리를 늘 딜레마로 빠뜨리는 시대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소설 속 '하천(변)'은 화자의 죽어버린 한쪽과 아직은 살아있는 다른 한쪽이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의기투합하는 것처럼 인간의 모순과 양면성을 대변하고 있다. 뇌졸중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둔 화자의 자아가 둘로 쪼개진 이유는 자신의 죄악을 각성함과 동시에 지난 과오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아와 그렇지 않은 자아의 갈등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천을 중심으로 무수한 이슈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끊임없이 사고가 이어진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체자들은 계속해서 바뀌어가고, 욕망만이 소비될 뿐이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이상과 현실, 선의와 위선, 폭력과 저항, 실리와 명분, 속죄와 용서, 모순과 이중성, 빛과 어둠. 근본적인 문제는 회피한 채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보다는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세태와 신뢰와 사랑은 사라지고 이기적인 욕망만 남은 모습은 화자가 금고에 부착한 기폭 장치와 같다.  


사람마다 손에 새겨진 지문이 제각각 다르듯 비슷하게 보이지만 저마다 삶의 지문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역사의 궤도에서 모든 사람이 생의 흔적을 남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해서 존재 사실마저 부정할 순 없다. 그것이 아름답든 추악하든. 읽으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제목에서 보여지듯 독자는 소설에서 보이는 내용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화자와 쉥거에 대해, 소설에서 드러나지 않은 숨은 얘기에 대해, 더 생각해야할 것만 같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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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다섯 밤의 기록, 개정판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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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첫 출간됐을 당시 나는 사사키 아타루에 대해 몰랐다. 서점을 서성거리다 다소 자극적인 제목이 눈에 들어와 처음 몇 장을 읽어보고 산 책이었다. 한 번 읽고 얼마 안 있어 빌려간 친구가 책을 잊어버려 재독의 다짐도 덩달아 어영부영 잊혀졌는데 개정판 출간 덕분에 다시 읽는다. 







이 책의 핵심은 '책을 읽는 것'이다. '읽는 것'이야말로 혁명이라고 말한다. 이 혁명은 정치, 법, 종교, 문학, 예술, 교육, 과학에 이르기까지 인류사 대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폭력인 아닌 문학으로 이뤄낸 혁명은 아이, 여성 등 약자들을 수호한다.  


'요즘의 독서는 과연 읽는 것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는 저자는 정보를 모은다는 것은 명령을 모으는 일이며 미디어의 익명성 아래에 감추어진 누군가의 부하로서 영락해가는 것이고, 정보에 매물되면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고 일갈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연장선으로 비평가와 전문가를 예로 드는데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려는 비평가,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려는 전문가는 그들 모두 자신을 '완벽한 전체성'을 가진 만능인으로 내세우려고 한다면서 이것은 전체주의적 환상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텍스트란 마주 보는 것, 마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며 무의식으로 접속한다는 것이라고 고, 또한 책은 되풀이해서 읽어야하고 어떠한 목적 없이 그 자체가 즐거워서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독서라고 썼다.  


이 책의 초반에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읽고 쓰는 모든 것'을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 지점이다. 언어예술, 즉 미적인 것에만 관련지으면 문학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굉장히 좁게 한정된 용법이라는 점이다. 또한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는 것까지 포함했던 오래 전 과거를 떠올려볼 때 오늘날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예전에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했던 것에 비하면 오늘날에는 상당히 좁아졌음을 지적한 부분이다. 저자는 반反 정보로서의 문학, 회태로서의 문학, 세계를 변혁하는 것으로서 문학의 의미 범위를 더 넓혀야 한다고 강조라는데 책 전반에 걸쳐 이에 대해 서술한다.  


ㅡ 


저자는 시종일관 문학은 혁명의 근원이라고 반복하며 강조한다.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니라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고, 반복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혁명이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문학은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 이후의 내용은 니체, 라캉, 푸코, 들뢰즈 등을 통한 철학적 사유와 제임스 조이스, 사무엘 베케트를 인용한 삶의 연속성과 공생이 문학이 갖는 저항의 증명이라고 이해했다. 


인문학이 위기를 맞고 과학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의견을 거부하는 저자는 특히 문학자이면서 문학과 철학에 종말을 고하는 자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읽을 수 있으면서 읽을 수 없게 된, 혹은 읽으려 하지 않는 자들과 문맹이지만 처절하게 읽기 위해 고투하는 자들을 대비시킨다. 전자는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면 후자야말로 혁명가다.   
문맹률이 90퍼센트인 시대에도 수많은 학자와 사상가와 작가들은 글을 쓰고 출판했음을 상기하면서 현재에 문학이 위기라거나 끝났다는 말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문학과 예술과 혁명이 살아남아야만 인류가 살아남는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루터, 무함마드, 도스토옙스키, 베케트, 버지니아 울프 같은 사람들은 계속 등장할테니, 들뢰즈의 말을 빌어 부흥기와 침체기가 있을 뿐 문학(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문학은 '미적 문학(저자의 표현)'의 범위를 넘어선)은 사라지지 않음을 말한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이 읽고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그들 각각의 인생은 무의미하지 않으며 그러한 삶 자체가 의미인 것임을 전한다. 결국 매일 읽고 쓰는 것을 놓지 않을 때에 우리 일상의 소소한 삶이 곧 혁명이라는 것일테다. 


책의 제목은 저자 본인이 밝혔듯 파울 첼란의 시에서 가져온 것인데, 아마도 기도만 하지 말고 그 손으로 읽고 쓰라는 게 아닐까싶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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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 양장본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지 옮김 / 푸른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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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접하는 작가다. 제목에 이끌러 검색을 하고, 미리보기가 제공되지 않아 이런!하면서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책소개를 읽던 중에 생각보다 빠르게 읽을 기회가 닿았다. 198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시, 에세이, 편지, 인터뷰, 연설문, 기고문 등을 모은 책이다. 일단 서문만으로도 저자의 필력에 감탄한다. 
 







이 책은 저자 본인을 포함한 수많은 여성들, 차별과 학대에 노출된 서사를 갖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는 학살이 자행된 많은 장소와 공간, 그 안에서 폭력을 고스란히 감당한 사람들을 방문해 만났다.  


여성 노숙 쉼터를 시작으로 마누스섬 난민 임시수용소, 자그레브, 콩고 부카부, 테레지엔슈타트, 파키스탄 라왈핀디에 위치한 보스니아 난민 캠프를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전한다. 노숙자와 난민 실태, 난민 수용소 내 강간 및 살인, 에이즈 환자에 대한 혐오, 근친 강간, 가정 내 (성적) 학대와 구타, 가스라이팅, 전쟁 강간, 집단 성폭행 및 성고문, 성노예(위안부), 임신 중지권, 재난 가부장제(재난으로 인한 단절과 고립으로 가정(성)폭력이 강화)와 여성 실업 등 벼랑 끝에서 가까스로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라고 호소한다.  


분쟁 지역에서 강간의 잔혹함은 상상을 불허한다. 강간을 전쟁 무기로 사용하다보니 가해자는 일말의 가책조차 없다(이 부분은 크리스티나 램의 『관통당한 몸』에서도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피해자임에도 존재를 거부당하고, 용서의 주체가 되지도 못한다.가부장제는 시대에 뒤떨어진 용어라고 여기지만, 완전히 해체되지 않은 채 여건만 되면 언제든 수면으로 기어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점은 지난 코로나19 사태가 불러온 불행은 우리가 아는 것, 그 이상이라는 사실. 유례없는 감염속도로 대부분 사회 시스템이 단절되면서 여성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감금, 경제적 불안과 질병의 공포, 알코올 남용이라는 완벽한 조건에서 발생한 가정 내 학대와 (성)폭력, 극단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학교로 돌아오지 못하는 여자 아이들, 교육의 중단과 부재는 인류의 퇴보를 불러왔다.   


저자는 사회 시스템이 바뀌어야 하며, 사회를 이루는 근본 신념, 가치 중심이 되는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부장제를 어떻게 다룰지 질문해야하고, 가해자를 억압하기보다는 반성하기를 촉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가부장제가 약자뿐 아니라 승자에게도 해롭다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이는 정희진, 리베카 솔닛 등 여러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했던 내용들과 일치한다. 



특히 실린 내용 중 <만질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지?> 는 가장 공감한 글이었는데, 저자의 글에서처럼 초를 켜놓고 명상의 시간을 갖게 했다. 현재는 종식됐지만 불과 몇 년 전에 팬데믹을 관통하던 시기에 쓴 글인데, 그때를 기점으로 확연하게 달라진 지금에 맞춰봐도 충분히 동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두려움처럼 실체가 불분명한 것, 혼란에 글복한다. 실질적으로 윤리적으로 더 나은 것을 선택하기에는 과정에서 오는 혼란이 불편해 진실이나 미래의 안녕보다는 당장의 안락을 택한다. 결국 세상을 바꿀 열쇠를 쥐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우리' 다.    



이 책은 저자도 언급했듯 사유에 관한 이야기이며, 상실과 모순, 슬픔, 트라우마에 관한 사유이기도 하고, 글쓰기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글쓰기에 얼마나 진정성을 담았는지 모든 페이지에서 느껴진다. 저자는, 글이 친구였고, 힘이었고, 창窓이었고, 저항이었고, 자신의 생존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작가가 일흔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온 열정을 담아 글을 쓰는 이유는 글이 곧 삶이자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하는 사명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문 전체를 필사한 책은 처음이다.



※ 도서지원
 
​ 
 

우리가 간절히 원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우리가 진짜인 것에, 작은 것에 뿌리내리고 그 누구도 전쟁과 탐욕과 기후 재난으로 자신의 장소에서 쫓겨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일회성으로 사용되고 폐기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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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라이프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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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낚여서 뒤통수 제대로 얻어맞았다! 
냉철함과 다정함을 오가면서 우리 사회의 불편한 부분을 가감없이 끌어내는 작가 마루야마 마사키의 신작이다. 





 



네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소설은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진행된다.
8년째 직장도 그만두고 경수 손상으로 인한 전신마비 중증 장애인 아내를 돌보는 남편, 섹스리스 딩크족 부부, 직장 동료이자 내연 관계에 있는 두 남녀, 온라인 상에서는 더없이 멋진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 남성.   


소설은 미스터리라는 장치를 통해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하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장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날카롭고 면밀하게 짚어내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비장애인 위주의 시설물들과 사회 제도를 넘어서 장애인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장애 차별이 임신과 출산, 입양, 존엄사까지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얘기한다. 


암담한 미래를 비관해 동반 자살을 시도하는 장애인 가족에 대한 기사는 지금도 심심치 않게 보도된다. 소설은 장애인 본인뿐 아니라 중증 장애인 가족이 안고 있는 경제적 불안정, 심리적·정서적 단절과 고립은 물론이며 대중이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의도적인 취약계층에 대한 차별, 복지 시스템의 허점, 이동권을 비롯한 사회 인프라 개선에 대한 인식 부족을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우선 물리적인 것들만 해결이 되면 장애인 차별과 그들의 생활 환경은 달라질 수 있을까?
작가는 근본적으로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공동체 일원으로서 생활할 수 있도록 물리적·심리적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애에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답한다. 개인적으로 이 문구가 가장 와닿았다.  


소설 속 인물 중 한 사람인 '아내'는 동일본 대지진 때문에 중증 장애인이 됐다. 선천적으로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앞선 경우처럼 재난이나 사고에 의해 장애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잠재적 장애인이다. 세상은 하루가 멀다하고 재난과 인재가 발생하고, 예기치 못한 사고는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불과 몇 년 전에는 전지구적 팬데믹이 극단적 단절과 고림으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런 지경에 나는, 나의 가족은, 죽을 때까지 안전하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굳이 이러한 이유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하기에 장애에 익숙해져야 한다. 


ㅡ 


이 소설은 작가의 기존 작품에서 보여진 따뜻함에 추리적 요소가 강하게 보태졌다. 후반부로 가면서 독자가 예상했던 반전 장치는 결말에서 예상치 못한 형태로 나타난다. 어쩌면 작가는 이것이 반전이 아닌 당연한 전개라고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많은 취약 계층의 사람들이 똑같이, 반복적으로 차별과 고통을 호소했음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장애를 다룬 그 어떤 소설보다 더 비극적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일은 없어야하지 않겠나.  





※ 도서 지원

그래, 내가 있어. 내가 널 돌봐줄게. 설령 나아지지 않더라도 계속 네 곁에 있을게. 네 손과 발이 되어 평생 널 지탱해 줄게.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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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은 여자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5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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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점차 이 소설이 세 사람의 '사랑'에 한정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인칭으로 쓰여 있지만 몇 개의 장章을 제외하면 프랑수아즈의 관점에서 서술되는데 그녀의 고민과 혼란은 독자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 반드시 사랑이 아니더라도 본질적 자아, 자아의 실존 등 타인과의 관계를 포함해 삶에 있어서 우리는 얼마나 나로서 존재하고 있는지를 짚어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가장 의문이 들었던 부분은, 프랑수아즈는 지나치다싶을만큼 그자비에르의 모든 말에 하나하나 예민하게 반응하고 혼자 짐작하고 판단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냐는 거다. 때로는 타당하고 때로는 즉흥적이고 때로는 감정적이고 때로는 유순하고 수시로 모순적인 언행을 보이는 그자비에르는 프랑수아즈, 즉 보부아르가 스스로에게 던져왔던 실존, 그리고 사회적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에 대한 물음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피에르와 그자비에르가 서로 사랑한다고 선언한 이후에도 프랑수아즈는 여전히 그들 곁에 남아 있는다. 그들을 떠나기에는 피에르와 결속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자비에르에게는 매순간 이중적 감정을 가지면서도 그녀에 대한 애정을 접지 못한다. 또한 피에르와 단둘이 있을 때에야 안정감을 찾는데, 이런 불편하고도 애매한 관계를 지속하는 프랑수아즈의 모호한 태도는 실제로 늘상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는 우리를 보는 것 같다.


피에르와 그자비에르 곁에서 느끼는 프랑수아즈의 감정은 행복과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몇 마디에서 그녀의 심경이 그대로 드러난다. '비참하다' '구차하다' '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는 그 누구도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일까?' 등. 그러면서 결국 마지막에 내뱉는 말은 "소중한 그자비에르."다. 그자비에르가 변덕스럽다면 프랑수아즈는 모순적이며 피에르는 이중적이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이 불편한 까닭은 그들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프랑수아즈가 문제와 갈등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았듯 우리가 세 사람의 관계가 거북한 것은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우리의 모순과 이중성을 맞닥뜨리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독자로서 답답한 부분은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도 두 사람을 대하는 프랑수아즈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녀는 여전히 그자비에르를 받아주고, 피에르가 자신만을 사랑한다고 믿고 싶다.  


사실 세 사람다 개인적으로 마뜩치 않지만, 가장 거슬리는 사람은 피에르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상황을 해석하고, 자신이 내린 결론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아집덩어리다. 심지어 두 여성이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신뢰하기를 바란다(사이비 교주냐!). 거기다 자신은 프랑수아즈와 그자비에르를 둘 다 사랑한다며 당당하게 삼각관계를 이어가야한다고 우기기까지 하는데, 정작 본인은 그자비에르가 잠시도 제르베르와 같이 있는 꼴을 못본다.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피에르는 점점 더 꼴사나워지는데 눈뜨고 못 볼 지경이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프랑수아즈는 안타까워하는데,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자신과 하나이자 존경해온 영혼의 반려자가 어린 연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 따지고 들고 그릇된 질투심으로 아끼는 제자를 경멸하며 추태를 부리니 참담한 심경이지 않겠나.  


프랑수아즈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피에르에게 끌려다닌 셈인데, 그자비에르의 등장이 프랑수아즈로 하여금 자립적 현존에 대해 각성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즉 피에르와 그자비에르의 관계를 제3자의 입장에서 목도하면서 과거 피에르와 자신의 관계를 반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프랑수아즈가 피에르에게 정서적 구속을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내오면서 순종의 형태로 이끌려 다녔다면 그자비에르가 담뱃불로 자신의 살갗을 지지는 행위는 프랑수아즈와는 다르게 반항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싶다.  


ㅡ 


시간이 흐를수록 그자비에르는 갈수록 피에르를 닮아가고 있다. 누군가를 독점하려 들고, 독점한 대상을 제 소유라고 여긴다. 그래서 전쟁이 발발하고 피에르가 입대한 상황에도 그자비에르는 프랑수아즈를 향해 끊임없이 빈정거리고 질투가 가득한 경멸어린 말투와 공격적인 말을 쏟아내는데, 프랑수아즈는 왜 받아주고 있는 걸까? 


어쩌면 보부아르는 그야말로 현실에서는 이루기 힘든 자유를 바탕으로 한 공존에 대한 바람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얽히고설킨 그들의 관계에서 그나마 보부아르가 이상적으로 그린 관계는 프랑수아즈와 제르베르인 듯 하다. 동료이자 사제관계라고 할 수 있고, 우정을 바탕으로 서로를 사랑하지만 상대를 구속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들이 진짜 사랑한다면 그럴 수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예상치 못한 비극적 결말이 보부아르가 말하고자 했던 실존의 한 방식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 리딩투데이를 통한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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