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 간토대학살, 침묵을 깨라
민병래 지음,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 기획 / 원더박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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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학살 100주기를 맞아 1923년에 벌어진 사건의 진실과 현재 우리가 마주해야 할 과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를 포함한 간토 지방에 7.9도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사망자만 10만 명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인은 지진의 직접적인 피해와 별개로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 경찰과 자경단에게 무차별 학살을 당했다.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수가 6700여 명에 달했다(중국인은 700여 명이 사망). 물론 일본은 지금까지 진상 규명조차 거부하고 있고, 그동안 우리 정부 역시 간토 학실의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단독 조사도 외면했다. 심지어 추도문조차 발표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간토 조선인 대학살'은 잊힌 사건이 되었다.  


재일사학자 강덕상의 연구는 두 가지 쟁점을 언급한다. 진도 7.9의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에 일본 정부는 왜 계엄령을 발동했는가? 조선인 학살을 조장한 유언비어는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전파되었는가? 진실을 밝히려는 그의 오랜 여정 끝에 도달한 결론은, 간토 조선인 대학살은 자경단의 예상치 못한 범죄가 아니며 수백만 이재민의 반정부투쟁을 우려한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이 직접 '조선인 습격설'을 퍼트리고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위기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것이다.  


(중략)






 
이 책에는 국적을 떠나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간토대학살'의 사실 여부를 밝혀 과거사를 청산하고자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조선인 유골을 발굴하여 추도하는 모임'을 만든 기누타 유키에, 극우단체의 비난과 직업을 포기하는 것을 감수하면서 간토대학살을 조사했고 추모비를 세우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니시자키 마사오, 일본인 목격자와 생존한 조선인의 생생한 증언이 담긴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해 조선인 대학살의 진실을 밝힌 오충공 감독, 1923역사관을 세운 김종수을 비롯해 자이니치 래퍼 FUNI, 사진작가 천승환 등 예술가와 젊은 세대들이 간토대학살 사건을 알리는 데에 연대하며 애쓰고 있다.


오충공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인 <1923 제노사이드, 조선인 대 학살 100년의 역사 부정>(가제)이 올해 개봉될 예정이고, 9월에는 천승환 사진작가의 간토 조선인 대학살 관련 사적지 사진 전시회가 열린다고 한다.  



아베 정권 이후 득세한 극우 세력으로 인해 급기야 1923년 간토의 불령선인은 2013년 도쿄에서 다시 등장했었다. 역사를 부정하는 극우 세력에 맞서는 활동을 하고 있는 가토 나오키는 과거의 학살을 사죄해야 미래에 평화가 온다고 믿는다. 그리고 역사를 기억하는 데에 있어서 앞선 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증언의 '기억을 이어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니시자키 마사오는 자신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말하는 야마모토 스미코는 사죄가 없다면 불행은 반복되고, 자신의 활동이 조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923 간토대학살은 자서전, 일기장 등 기록으로 남은 수많은 증거와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그대로 살아있기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도 이제 직.간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적어도 역사를 바로 아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이 막연하게 알고 있는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실을 바로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람한다. 


책의 마지막에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다크투어 안내서가 링크의 QR 코드와 함께 부록으로 실려있다. 여행자들에게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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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들 페이지터너스
에마뉘엘 보브 지음, 최정은 옮김 / 빛소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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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사뮈엘 베게트와 페터 한트케가 왜 찬사를 보냈는지 알 것 같다. 독자는 독백을 하듯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하는 화자의 뒤를 좇아 파리 곳곳을 부유한다. 






 
그의 이름은 빅토르 바통. PTSD를 앓고 있으며 몽루주의 오래된 낡은 아파트의 옥탑방에 살고 있다. 그는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은 후 전쟁 공로 훈장까지 받았고, 현재는 상이군인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전쟁 영웅이지만, 전쟁이 끝난 후 그의 현실은 처량하기만 하다. 하지만 비록 낡고 볼품 없는 양복을 입고 있음에도 카페테리아 손님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한껏 멋을 내고 화려한 사교계를 누비며 여배우 애인과 데이트를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빅토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이웃들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고, 골목에 줄지어 있는 상점과 주인들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꿰고 있으며, 파리의 부둣가와 리옹역이라면 손바닥 보듯 전부 알고 있다. 또한 그곳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표정을 흥미진진해하며 관찰한다.  


빅토르는 전쟁 미망인인 뤼시와의 하룻밤 잠자리에 마치 그녀가 애인이라도 된 듯 사랑을 말하고, 거리에서 우연찮게 대화 한마디를 나눈 비야르에게 우정을 기대하고, 사업가의 단순한 호의를 과대포장하며,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모르는 남자의 뒤를 따라가고, 생면부지의 남자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신경쓰는 사람이다.  


빅토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사랑과 관심이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빅토르의 희망은, 그 사람이 원하는 바를 전부 들어주는 것뿐이다(그 반대가 아니고). 웃음, 기쁨, 눈물, 슬픔, 그 모든 것들을 함께 나눌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 손톱만큼의 우정과 사랑이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것을 위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것이라는 말에서 빅토르의 처절한 심정이 느껴진다. 


ㅡ 


그런데 빅토르가 원한 건 정말 관심과 사랑뿐이었을까?
순수하게 빅토르의 말을 믿어주기에 뭔가 불편한 구석들이 있다. 빅토르는 대화보다는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원한다. 상대의 이야기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가 필요로하는 친구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불행하고 가난하고 착한 사람. 빅토르는 부자가 되어 관심을 한몸에 받는 사람이기를 꿈꾸지만, 애초에 그는 자신이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함께 불행해질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으로 보여진다. 불행에 익숙해져 행복은 자기의 몫이 아닌 그저 동경의 대상이라고 치부한다. 그래서 행복에 겨운 인간의 방을 함부로 방문할 용기조차 없다. 


또한 살면서 가져보지 못한 권력에 대한 로망도 크다. 50프랑을 빌려달라는 비야르의 부탁에 빅토르는 비로소 그와의 사이에 있는 벽이 허물어졌다고 생각하면서 흔쾌히 돈을 빌려주겠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돈을 주기 전까지 비야르의 애를 태우는 것을 즐긴다. 이와 비슷한 모습은 느뇌를 비롯해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빅토르가 간절하게 원했던 것이 진심을 나누는 친구가 맞는지 의심이 든다. 어쩌면 그는 상황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싶었던 건 아닐까? 모르는 남자의 자살을 만류하기 위해 그에게 돈 10프랑을 건네고 저녁밥까지 사먹이는 행동도 인간애적인 측면보다는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빅토르는 몇 년 동안 살아왔던 옥탑방을 빼야할 처지에 놓인다. 그의 판단은 이렇다. 그가 사는 아파트는 주로 노동자들이 산다. 그들에게 노동은 신성하다. 그래서 이유야 어떻든 빅토르처럼 연금을 받으며 무위도식 하는 사람을 미워한다. 하지만 빅토르는 그들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 고기, 유흥, 고가의 옷을 단념한 그를 마주칠 때마다 자신들의 구속된 생활을 자각해야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유와 가난에 구애받지 않는 빅토르 자신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빅토르의 얼토당토 않은 이 말에, 나는 현재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본다.


소설 후반부에 흥미로운 부분이 두 군데에서 발견된다. 하나는 빅토르가 분노에 찬 라카즈 씨한테 모욕을 당하고 경고를 받은 뒤 오열을 터뜨린 후 자신이 억지로 계속해서 울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은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무명 가수인 블량셰와 밤을 보낸 후 새벽이 되자 두 사람의 흔적이 가득한 그 방을 빨리 떠나고 싶어하며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어쩌면 빅토르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비관적 상황으로 몰아넣고 그 고통을 통해 살아있음과 희열을 느끼는 건 아닐까. 늘 동경해왔던 관심 혹은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그는 이상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한 건 아닐런지. 특히 자조하듯 말하는 마지막 문단은 역설적으로 읽힌다. 우리는, 적어도 얼마만큼씩은 약한 존재이지 않은가.  


아는 사람이 없으니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거리로 나갈 수 밖에 없었던 빅토르가 관심을 구걸하는 자신의 처지를 거지에 비유하는 대목에서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 동정할 수 밖에 없다(빅토르는 얼마나 타인의 동정을 바랐는가). 


ㅡ 


인간이 살아있는 한 절대 떨쳐낼 수 없는 고독, 자유와 구속, 삶의 이유와 존재 가치 등을 망상증 환자에 가까운 한 남자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소설은 1924년에 발간됐다. 어쩌면 빅토르의 모습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는하나 큰 피해와 정치 상황을 봤을 때 전후 직후 상실감을 안고 살아갔을 모든 젊은이들의 초상이 아닐까.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간절하게 친구를 찾는 빅토르의 모습은 희망과 미래를 찾고자하는 (당시의) 젊은 세대들의 모습을 투영한 건 아닐지. 


다 읽고나니 책의 표지가 이해된다. 
친구보다는 동료라는 단어가 더 익숙해지고 거울 속에 보이는 자신만이 친구가 되어버린 표지 속 남자의 모습에서 나는 밖을 바라보고 일렬로 늘어서 있는 편의점 의자가 떠올랐다. 언제부터 우리는 외로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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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하는 인류 - 인구의 대이동과 그들이 써내려간 역동의 세계사
샘 밀러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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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역사를 다루는 이 책은 선사시대 네안데르탈인을 시작으로 바빌론과 성경, 서유럽과 지중해, 로마 제국, 바이킹, 중앙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동(남)아시아, 유대인(시온주의), 유럽 난민 및 민족 분리, 국외 거주자 또는 이주노동자로 이어지는 인류의 대이동을 다룬다.  






이주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서 국가, 국경, 여권, 이민 쿼터, 장벽, 비자 등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깊고 근원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오늘날 이민은 첨예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다. 이 주제를 다른 사람들, 특히 우리와 다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현재 우리는 고정된 국적과 주거지를 갖고 있는 것이 당연하게, 혹은 인간의 한 조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지만 인류는 지난 역사에서 아주 많이 이주를 반복해왔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주를 인류 역사의 중심으로 복귀시키고 이주민들에 대한 현대적 논의를 재설정할 수 있게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동시에 인류 역사의 중요한 시기들을 정착 사회, 이주, 민족 이동, 유동적 사회의 프리즘을 통해 관찰한다.  


ㅡ  


이주는 선사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대부분 현대인들의 DNA 중 1~4퍼센트는 네안데르탈인에게서 온 것이다. 서로 완전히 다르다고 여겨지는 민족들이 사실은 사피엔스뿐 아니라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도 공유하고 있는 혈연관계인 것이다. 유일한 예외로 네안데르탈 유전자를 갖지 않은 민족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같은 혈통을 계속 이어 온 종의 후손들로, 이들은 인류가 별도 종으로 등장한 아프리카 대륙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네안데르탈인, 사피엔스, 그리고 선사시대의 알려지지 않은 기타 아종을 포함한 전 인류의 출발점은 아프리카였고, 선사시대 인류의 이동은 엄청났다.  


인류는 왜 이토록 엄청난 이주를 했을까? 기후 변화, 자원 부족, 영토 분쟁 등 여러 지역적 이유들이 결합되어 있을 테지만, 그런 이유만을 적용하기에는 육지 포유류 중 쥐를 제외하면 다른 어떤 동물도 그렇게 온 지구를 돌아다니지 않는다. 저자는 사람들에게는 본능적이거나 유전적으로 이동 욕구가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더불어 우리는 어느 민족의 순수 혈통을 잃는 것 아닌 그 민족의 문화를 잃는 것에 대해 슬퍼해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이 기억에 남는다.  


기원전 5세기에 쓰여진 문헌들을 보면 아테네에서의 외국인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현대 사회에서 난민이나 외국인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특정 장소에 속해 있는 고대 세계를 지어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결국 유목민의 후손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우리 모두의 단 하나뿐인 진정한 본향은 아프리카 대륙이다.  



20세기부터 심화되기 시작한 이주 노동자에 대한 편견은 세계대전을 거친 후 점차 커져 현재에 이른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이 1950년대 이전에는 백인 일색이었고 단일 문화였다는 주장을 아무렇지 않게 펼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정착주의, 인종적 순수성, 민족국가라는 세 가지를 미화시키면서 1950년대 이전의 유럽 역사가 개작되었고 유색인종을 위한 역사는 거의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며 수십 년이 지난 이제서야 점차 복원되고 있다.  


이주에 관련된 언어들은 국가와 국경 개념, 인종과 인종차별주의와 연관 되고, 이주민이 떠나온 나라 혹은 처한 상황에 따라 그들에 대한 태도나 관점이 달라지고, 태도에도 전혀 일관성이 없다. 거주민들과의 동화와 그들만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을 동시에 주문한다. 또한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떠나온 국적과 인종뿐임에도 찬사 혹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이민은 정치, 경제에 적극적이면서 제멋대로 이용된다. 이민은 여러 국가에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역삼각형으로 바뀌어가는 인구 분포, 인구 노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 전쟁(내전) 및 기후 난민 발생 등 이주는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정주주의를 추구함으로써 과거와의 연속성, 이주의 정상성과 상호 연결성에 대한 인식을 잃어버리게 됐다고 지적하는데, 이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이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짚는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인류는 이주를 반복해왔다.길가메시의 신화에서 보여지듯 이주는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삶의 선택이었다. 이주의 역사를 되짚음으로써 인종, 성별, 민족, 종교 등 현재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폭력적 갈등과 혼란에 대한 왜곡된 사실을 찾아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이때까지 잘 알려지고 지배적인 방식에서의 이주가 아닌, 이주가 정상적인 활동이며 인간 조건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프리즘을 제공하고자 한다.  


정체성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저자의 말처럼 단 하나의 정체성을 고집하는 것은 때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 이주민으로서의 역사와 공동 혈통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복수의 정체성을 인정하며 같은 인간 종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떠할지, 저자는 조심스럽게 전한다. 


이주는 매우 복잡한 개념으로 명확한 경계가 있는 단순한 정의에 맞춰지지 않는다. 거리, 기간, 목적 등에 따라 용어가 달라지고, 무엇보다 특정 개인이 이민자가 된 정확한 시점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과거의 역사에 의문을 표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찾고, 그것들에 대해 말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세심히 살펴야한다고 전한다. 기록물은 대체로 정주한 사람들이 정주한 사람들을 위해 저술했으며 과거에 대한 특정 관점을 제공했는데, 여기에서 대다수의 이주민들은 그러지 못했으니 그 공백에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이주의 역사를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인종주의를 시작으로 각 분야에 파생된 차별과 불평등, 그리고 혐오가 생성되는 과정까지 자연스럽게 서술하는데, 이 책의 재밌는 점은 각 장마다 끝에 따라오는 '저자 노트'에 있다. 저자는 자신과 딸의 침을 DNA 검사를 신청해 그에 대한 결과를 공유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의 계획과 서술 방향, 구성, 사료를 접할수록 생기는 딜레마, 글쓰기에 대한 그의 생각이나 의견 등을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했는데, 노트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선사시대부터 20세기까지의 역사를 '이주'라는 관점으로 들여다본 역사서로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채우지 않은 현재의 '이주'에 대한 담론은 독자인 우리가 채워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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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쳐 있는 - 실비아 플라스에서 리베카 솔닛까지, 미국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즘의 상상력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류경희 옮김 / 북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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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다루어진 내용 이후 1950년대 페미니스트의 태동부터 196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항쟁 시기, 1970년대를 거쳐 1980~90년대 페미니스트 사상가들과 예술가들의 각성,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술한다. 여성 작가 및 예술가들 중에서도 북미 지역에 집중하고 있으며, 여전히 미쳐있는 상태인 지금, 페미니즘의 기저를 이루는 문화사를 논한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와는 다르게 문학 작가만을 다루지 않는다. 문학뿐 아니라 고전 및 대중 예술 분야, 저널리스트,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운동가, 페미니스트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여성들의 문헌과 이력도 서술한다.   





 
(중략)  



케이트 밀릿의 <성 정치학>의 핵심 주장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여성이라는 종을 종속시키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1970년대 페미니즘의 본질을 말해준다. 1960년대의 운동이 여성을 위한 성 해방론자들의 투쟁이었다면, 1970년대 말과 그 이후의 운동은 '여성'들을 위한 페미니스트들의 싸움이 되었다.


밀릿에 의하면 군사, 정치, 금융 등 여러 분야에서 여성을 남성의 독점 행위에 굴복시키는 제도가 보편화되었다고 강조하는데, 이런 구조를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남성적 특성과 여성적 특성을 만들어내는 제도가 바로 가족이라고 짚는다. 가족(엄밀히 말하면 가족제도)가 해부학적 성과 구분되는 심리학적 젠더 역할을 만들어낸다는 것. 생존을 위해 자신을 부양하는 사람에게 의존하며 사는 여성들을 자기들끼기 서로 적대하는 관계에 놓이게끔 만든다. 아버지를 신과 같은 위치에 놓고 문제 발생 원인의 책임을 여성에게 지우며 그들을 남성의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내면화' 과정이 가족을 통해 성취된다고 분석하는 것이다.   


(중략)


젠더, 인종, 동성애 편견 문제를 언급한 로레인 핸스베리와 오드리 로드, 페미니스트들에게 흑인의 권리가 곧 여성의 권리라고 알리려 노력한 토니 모리슨. 이들을 보면서 페미니즘, 즉 여성주의 시각으로 차별적 사회 문제(식민지주의, 인종주의, 성소수 및 동성애, 장애)를 접근할 때 근본적 해법에 훨씬 더 근접할 수 있다는 정희진 님의 말이 떠올랐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부터 이 책에 이르기까지 길고 긴 이야기를 읽으면서 느꼈던 점은 여성들의 투쟁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됐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N. K. 제미신, 퍼트리샤 록우드, 리베카 솔닛의 등장, 그리고 흰색 옷을 입고 페미니즘 운동 한가운데에 서 있는 수많은 여성들. 나는 그들이 자랑스럽다.  


21세기 페미니즘 운동은 퀴어, 다국적주의, 트랜스 이슈와 인종 차별에 대한 항의 시위, 환경 운동, 미투 운동 등을 모두 아우른다. 성性 역시 양분화되어 있지 않고, 민권과 생명권 등 추구해야할 가치들이 복잡하게 맞물려있는 작금에, 위에서 언급했던 우리가 왜 여성주의 시각에서 세상을 봐야하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현대사에서 페미니스트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책을 추천하라면 이 책을 추천한다. 북미라는 지역적 한계가 있지만, 특히 계보를 알고 싶다면 쉽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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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시대, 중세 - 폭력과 아름다움, 문명과 종교가 교차하던 중세 이야기
매슈 게이브리얼.데이비드 M. 페리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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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중세 유럽을 연구하는 역사가 두 명이 공저한 책으로서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시대 들여다보고 중세에 대한 고정관념과 이해하는 방식을 해체하고자 한다. 그들이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중세가 '암흑시대'였다는 수 세기에 걸친 신화에서 벗어나 있으며, 시각을 바꾸어 소외된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음을 전한다. 


콘티탄티누스 1세 사망 무렵의 고대 후기부터 비잔티움과 페르시아, 예루살렘과 메카, 이슬람의 팽창,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중세 초기의 브리타니아, 이후 카롤루스 왕조, 광범위했던 바이킹의 흔적, 프랑크 왕국과 십자군 전쟁,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의 다문화주의, 다채로운 마법으로 장식됐던 12세기의 유럽, 제4차 십자군 원정에서 자행된 폭력과 학살, 황제와 교황의 권력 다툼, 13세기 왕권의 중심지로 부상한 파리와 가장 기독교적인 왕 루이 9세의 치세, 프란치스코회와 몽골 제국, 유럽을 비롯해 흑사병이 휨쓸고 간 14세기, 그리고 중세 시대를 관통하고 지배했던 종교를 서술한다. 







 
다른 관점과 시각을 강조하는 이 책의 시작이 남성 중심의 역사에서 갈라 플라키디아라는 여성의 서사로 시작하는 점이 인상적인데, 이 여성을 통해 대대로 로마의 멸망이 암흑시대의 시작이라는 판단이 무 자르듯 단순하지 않고 좀더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5세기 초 내내 로마의 연속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인물로 갈라 플라키디아를 꼽는다. 또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아내 테오도라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 권력자들에 대한 묘사와 가부장적의 질긴 힘을 읽어낼 수 있음을 얘기한다. 더하여 성적 능력을 여성의 출세와 연결하는 관행이 문학과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 오히려 남성들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증거라고 말하는데 이 부분 역시 남성중심의 역사관에서 드러나는 시대의 한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6세기 후반과 이후 바이킹까지, 당시의 제한적인 위치에도 불구하고 여성 권력자들이 가졌던 주체성은 이 책의 곳곳에서 언급된다. 그리고 '암흑시대'는 폭력적인 남자들과 순종적인 여자들의 세계,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세계를 상상하지만, 사료에 주목하는(이면에 숨겨져 있는) 중세는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한 것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벨리사리우스가 라벤나에서 황제가 될 수 있는 유혹을 물리치고, 황제와 로마 제국에 충성을 한 이유를 6세기 초 로마 세계의 정치적 현실과 권력 지형의 중심에 있다고 판단했다. 3개 대륙 출신의 사람들이 모인 콘스탄티노폴리스야말로 다양성의 측면에서도 전형적인 로마 도시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근거지로 통치하는 로마인들은 스스로를 결코 '비잔티움인'이라 칭하지 않았고, '로마인'으로 자처함으로써 변화가 아닌 연속성에 의의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중세 내내 로마가 복수형으로 존재했다고 생각하며 전형적인 제국의 유일하고 진정한 후손을 가려내는 데에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연관성과 정통성을 주장한 사람들의 방식과 그 동기를 분석해야함을 짚는다.  


공존은 쉽지 않고 어제나 불평등하지만, 최소한 이슬람교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도처에서 빨리 전파될 수 있었던 비결이 되었다. 이슬람교가 도래하면서 개종을 강요하는 압력이 초래된 것은 분명하나 로마와의 지적 연속성도 잃지 않았다.   


알다시피 중세 세계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현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정치가 종교였고, 종교가 정치였다. 사회 범죄들은 국왕의 사법권에 의해서 처리되어야하지만, 11세기에는 신으로부터 버림받는 처벌을 받았다. 12세기는 유럽사에서 의미심장한 세기다. 문학이 번성했고, 학교가 급성장했으며, 중앙집권 국가가 부활했다. 이 때는 십자군의 시기, 황제와 교황의 시기, 철학과 학술 논문의 시기였다(스콜라 철학이 본격적으로 번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모든 순간들 중에 중세의 끝이라는 자격을 완비한 것은 없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처럼 역사에는 명확하게 구분지을 수 있는 출발점이나 종착점이 없다. 그럼에도 천 년에 이르는 역사의 한 부분을 하나의 명제로 단순화했다. 그러나 저자는 암흑, 그리고 한편으로는 빛의 시대는 인간성에 내재된 온갖 가능성을 담고 있기에 인류 역사에서 중추적인 장소이자 시간이라고 말한다. 빛의 시대 내내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경계를 넘어 다녔다. 정치적.종교적.언어적.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중세 시대의 모든 지역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연속성'과 '복잡성'이다. 온갖 요소들이 담겨 있는 중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한층 더 복잡하다.  


세상은 정체하지 않고 끊임없이 돌고 돈다. 유럽 최대의 도시 주거지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정치, 경제, 농업이 발전했다. 잉여 식량과 잉여 인구가 증가했고 지역 경제들이 싹텄다. 시민들은 다양한 형태의 중첩된 공동체에 참여했고, 길드 같은 여러 기능을 겸비한 공동체들이 활동했다. 또한 이를 같이해 여러 정치 체제들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변화해갔다. 그렇다고해서 이 책은 중세 시대가 그야말로 '빛의 시대'라고만 얘기하지 않는다. 단지 '암흑시대'라고만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서사들을 통해 시각을 바꿔보자면 '빛'이 공존했던 시대였다는 것일테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여전한 차별과 유리 천장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등급과 계급이 존재하고, 보통의 사람은 미처 생각지도 못할 온갖 프레임들이 난무하며 부지불식간에 이를 당연하게 여기게끔 되는 현재는 암흑인가, 빛인가. 아마도 '암흑시대'는 인류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지속될 것이고,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빛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우리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인들에 대해 서술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에 역사를 예정된 결론을 향해서 필연적으로 돌진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음을 짚으면서 역사는 절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음을 강조하는데, 이에 대해 공감하는 바다.  


개인적으로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그 지점에 대한 가려운 부분들을 읽을 수 있어서 만족스러운 읽기였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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