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루스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지음, 승주연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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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약제사이자 치료사에서 시작해 순례자였다가 성자가 된 아르세니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인생에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평생을 속죄하며 구원을 갈구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는 환상적이면서도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아름답게 서술하면서 언어, 역사, 신앙과 종교, 시간의 영원성, 존재의 가치, 우주의 질서 등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고찰한다 







순전했던 아르세니가 처절한 고통을 마주하는 순간은 우스티나의 죽음이다.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환자를 치료하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 이후 그가 고단한 여정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일평생 감내하며 삶을 이어가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우스티나와 죽은 아기의 구원이다. 


소설에서 아르세니는 마치 예수가 다시 현현한 것처럼 읽힌다. 그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 기적을 일으킨다. 가난한 자에게 자신의 빵을 나누어 주고 몸에 걸친 옷 한 장부터 그의 사랑과 헌신, 동정과 연민, 심지어 신체의 손상을 무릅쓰면서까지 바닥까지 긁어내어 전부를 준다. 아픈 사람에게는 할 수 있는 모든 헌신을 통해 생명을 구원하고, 죽음에 이른 사람의 영혼은 안식처로 인도한다. 그가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구원의 길이 된다. 그것이 비록 삶의 길이 아닐지라도. 아르세니의 헌신은 우스티나와 죽은 아기를 향한 사랑과 동일 선상에 있다. 아내와 자식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지우고, 영혼의 안녕과 구원을 위해 방랑을 하는 아르세니의 어깨에 얹혀진 짐은 너무나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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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중반에 접어들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재미있는 가정이 나오는데, 콜롬보와 아메리고 베푸스치의 신대륙의 발견과 루시에서 예견되는 세상 종말론의 연관성이다. 만약 신대륙 발견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진행될 세상 종말의 시작인지를 묻는 것, 그리고 만약 정말 그렇다면 이렇게 발견한 대륙에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냐는 물음은 무엇을 겨냥했는지 생각해볼만하다.  


또다른 부분은 아르세니와 예지몽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예언자 역할을 하는 암브로조가 함께 여정에 오르면서 소설은 중세와 근현대를 넘나든다. 더하여 이 두 인물의 배치 역시 인상적인데 아르세니가 예수에 가까운 성자라면, 암브로조는 보통의 인간이 갖고 있는 모습을 대변한다. 세상의 종말보다는 나 자신의 죽음이 더 두렵다는, 그리고 이 생이 아니면 다음 세상에서라도 살고 싶다는 암브로조의 고백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작가가 소설에서 외로움을 다루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타인과 교감이 가능할 때의 고독은 그 자체로 충만할 수 있지만 신뢰와 교감이 사라져 정서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의 외로움은 두려움을 불러온다. 소설은 내내 아르세니가 인간 세상을 초월한 성자로 그려지지만 세상이 그를 외면하고 있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데에서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을 드러낸다.  


아르세니가 베네치아 도착해 산마르코 광장에서 성당 기둥 사이에 지쳐서 앉아 있는 라우라라는 여인과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을 대화하듯 말하지만, 사실 서로의 언어가 달라 그들은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런데 마치 두 사람은 알아듣는다는 듯이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간다. 이 대화의 본질이 언어를 넘어선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사랑임을 말하는, 그래서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한 부분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의미 있는 숫자 '7'. 아르세니와 관련한 대부분의 날들은 7일이라는 기간을 거친다. 소설이 러시아 정교회를 바탕으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싶다.  


ㅡ 


처음 길을 떠난 순간부터 아르세니는 수시로 죽은 우스티나에게 말을 한다. 두 사람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기에 자신의 내면에 우스티나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이 곧 두 사람의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아르세니의 진정한 대화 상대는 죽은 아내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라우루스가 명예를 훼손 당하고 모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켜내려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희생이 전부였을까. 나는 그가 아나스타시야에게서 우스티나를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저어해 아내와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한, 한평생 그의 족쇄가 되었던 죄책감.  


치료사이자 순례자요 성자였던 라우루스의 울음은 슬픔, 기쁨, 안타까움, 후회, 연민, 그리고 감사를 나타내는데, 인간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고 있다. 행복뿐 아니라 시련과 고통까지 감사와 희망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평안해지려나. 
(그렇게 하기에 우리는 너무나 욕망덩어리들이지.) 



아르세니는 이와 벼룩이 득실거리는 더럽고 지저분한 옷을 입고서야 자신이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그들의 통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통증이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다. 누구도 세상에 일어난 모든 일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라우루스가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세상의 종말이 언제 도래하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게 아닐까. 




※ 출판사 지원도서
 

"움직임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라 옳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어렵지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알 수는 없을 테니까요. 내 생각에 시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우리가 혼돈에 빠지지 않기 위함인데, 인간의 의식은 모든 사건을 동시에 기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나약함으로 인해 시간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 P345

저는 아르세니였고, 우스틴이었고, 암브로시우스였으며, 이제는 라우루스가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제 기억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저는 서로 다른 시대에 저였던 사람들과 저를 더 이상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삶은 모자이크와 유사해서 여러 조각으로 흩어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P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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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애덤스의 비밀스러운 삶
부스 타킹턴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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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이자 세계대공황이 일어나기 전, 경기 호황과 풍요가 절정에 이르고 있는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물질만능의 세태를 애덤스 집안 사람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버질 애덤스는 애사심으로 똘똘 뭉쳐진 스스로 잉여 인력이 아니라는 자부심으로 회사와 사주에 충성하고, 애덤스 부인은 집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모든 원인을 가난으로 돌리고 자식들만큼은 그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며 남편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를 닥달한다. 애덤스 부부는 계급 사다리를 타고 상류층으로 진입하고자 발버둥치는 당시 서민층 중년 세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그들의 아들 월터는 가식적인 상류층 사교계를 혐오하고, 어머니나 누나와 달리 아버지를 고용한 사람(과 그의 가족들 및 주변 인물들)을 단 한 번도 친구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그들을 '냉동 인간'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적대시한다. 하지만 월터 역시 돈 문제에 있어서 다른 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혐오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와 욕망의 다른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인물은 주인공 앨리스 애덤스다. 소설 초반, 스물두 살 앨리스가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는 무례하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만나는 사람을 다 제 입맛대로 움직일 수 있으며, 자신이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머니와 동생을 폄하하고 모욕을 주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또한 아버지는 그저 잘 달래야하는 병자 정도로 치부한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책장을 넘길수록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앨리스의 다양한 모습이 드러난다.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족함 없는 집안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린 여자'라는 가면을 쓰고, 뭇남성들로부터 인기가 많은 것처럼 허세를 부리며 연기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을 자책하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위로하고, 아버지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제 인생을 우선하는 월터의 이기적인(사실 정당한 거지만) 태도에도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이 밑바탕에는 자신이 우월한 사람으로 베푸는 아량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또한 서슴없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러한 행위에 자괴감을 느끼고, 순간순간 스스로 자아감에 대해 고민한다. 앨리스는 당시 상류층 진입을 욕망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기를 갈망하는 여성의 여러 측면을 보여주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소설에서 한 축을 이루는 요소는 '윤리'다. 가난으로 인해 비참한 처지에 내몰린 가족과 회사 기밀 사이에서 버질 애덤스는 갈등한다. 거짓말로 시작된 러셀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갈수록 정교한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에 대한 앨리스의 때늦은 후회. 자식의 삶을 명분으로 삼으며 돈 앞에서는 도덕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는듯 남편을 닥달한 애덤스 부인. 자유로운 삶을 주장하고 상류층 사람들을 혐오하지만 결국 돈이 갖는 허영과 욕망의 덫에 무릎을 꿇고 마는 월터. 이들의 모습은 어쩌면 지금까지도 다른 형태로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코미디같으면서도 한없이 서글픈 것은 앨리스와 버질 애덤스의 불안이다. 버질은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벌이는 것에 대해 램브 사장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집착하면서 늙고 위엄있는 사장과 마주치는 것을 병적으로 두려워한다. 앨리스는 러셀이 사교계에서 험담이든 칭찬이든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을 들었는지 묻지만 사실 그녀를 언급한 사람은 없었고, 따라서 앨리스와 애덤스가에 대해 들은 얘기도 전혀 없다. 앨리스는 사람들이 러셀에게 자신과 자신의 집안에 대해 이런저런 험담을 할까봐 전전긍긍하지만 정작 그녀가 동경하는 그들의 세계에서 앨리스는 안중에도 없다. 더구나 앨리스가 아서에게 자기의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 관해 하는 말은 듣지도 말라고 했던 당부가 오히려 앨리스의 발목을 잡은 꼴이 되어버렸다.


안타까운 것은 애덤스 집안의 식구들은 타인뿐 아니라 가족에게조차 어떻게 보일까를 우선하고, 상대에 대한 자신의 짐작과 생각을 사실로 단정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진솔하게 나누거나 이해하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원망을, 누군가는 의미없는 동정을 토해낸다.   



많은 일들을 겪고난 앨리스는 비로소 자신을 진솔하게 들여보고, 보여주기식 삶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용한 일인지를 깨닫는다. 나는 이 부분도 서글프게 느껴졌는데, 결국 돈으로 결정지어져 고착된 '계급'에서 개인의 노력은 허망할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앨리스의 그동안 '노력'을 더 나은 삶을 향한 노력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애덤스 남매가 기실 지금의 많은 젊은 세대와 다르지 않다는 것 때문이다.  


소설은 불행한 인생을 대변하는 곳으로 여기며 그토록 끔찍하게 여겼던 곳의 계단을 오르는 앨리스가 삶을 긍정하는 전환점이 될지, 불행의 나락으로 스스로를 내몰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더 이상 누군가의 눈에 비춰지는 삶에는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적어도 그녀는 더 이상 인형으로서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ㅡ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의 두 작품('앨리스 애덤스의 비밀스러운 삶', '위대한 앰버슨가')을 읽어보면 1920년대의 미국 사회의 전반을 그려내는 데에 있어서 그야말로 탁월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전 세계의 경제적 파탄이 일어나기 전의 풍요로운 사회에서 일어나는 폐해와 부작용을 지독하게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동시에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는 무엇인지를 짚어보게 한다.  


그의 소설이 매력적인 것은 어쩌면 원론적이고 뻔한 스토리가 돌 수 있음에도 무척 재밌다는 것이다. 소설의 중반으로 넘어가면 주인공이 맞이할 결말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부스 타킹턴은 당연한 결말을 닫아놓지 않는다. 반성하고 다른 삶을 살겠다는 그들의 다짐과 변화된 행동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장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자는 씁쓸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는 묘한 감정에 이른다. 1920년대 당시에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라는 수식어가 납득이 되는 작품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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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
페터 슈탐 지음, 임호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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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시간을 보내고 출판한 첫 책이 성공을 거둔 크리스토프는 고향 마을의 작은 서점에서 낭독회를 갖는다. 예정과 다르게 하룻밤 묵어가기로 하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늦은 밤에 호텔의 초인종을 눌러 야간도어맨을 불러낸다. 그런데 문을 열어주는 젊은 청년은 다름 아닌 크리스토프, 그 자신이었다. 





 
 


이 소설, 뭐라 한마디로 단정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소설은 크리스토프 관점에서 20년 전 연인 막달레나와 함께 했던 삶과 현재 크리스토프와 레나의 대화를 통해 같은 궤적의 삶을 살아가는 두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운명을 추적한다.  


감성적인 제목과는 다르게 시종일관 미스터리한 여정으로 독자는 그들을 좇아 진실이 무엇인지 추리한다. 20년의 간극을 두고 똑같은 삶의 과정을 밟아가는 크리스토프와 크리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두 사람은 다른 선택을 한다. 레나와 크리스토프는 이것을 작은 오류 혹은 편차라고 말하지만, 먼 미래를 내다본다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차이였다. 자기확신과 혼란 사이에서 갈등하는 크리스토프. 크리스는 정말 크리스토프의 도플갱어일까, 아니면 크리스토프 상상의 산물일까? 


사실, 이 소설은 애틋한 사랑이야기이자 존재에 대한 텍스트다. 운명의 진실을 찾고자 레나와 대화하고, 과거를 회상하며, 20년 전을 되짚어 현재와의 차이를 추적하는 과정에 안에는 늘 막달레나가 있었다. 크리스토프가 알고 있는 막달레나와의 마지막, 하지만 현재 막달레나의 삶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 이 기가막힌 반전에서 화자 크리스토프도, 그를 좇던 독자도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억의 오류인가, 아니면 그가 이때까지 사실이라고 믿었던 모든 일들은 그의 망상인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자신의 미래를 어느 누군가를 통해 엿본 적이 있었던가?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독자를 모순과 혼란의 구덩이에서 건져내지 않는다. 이러한 극적인 구성에도 정작 주인공 크리스토프는 담담하기만 하다. 마지막에 이르면 제목이 왜 '다정스러운 무관심'인지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 장章을 읽으면서 동시에 두 사람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나도 모르게 그들이 애잔해진다.


처음 읽은 작가였는데, 간결하지만 독자를 은근히 끌어들이는 문체다. 몇 작품 더 읽어봐야겠다.  




※ 출판사 지원도서



 

젊은 파토스에 휩싸여 나는 그녀와 글쓰기 중 하나를, 사랑과 자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제 비로소 나는 사랑과 자유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공존의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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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쟁의 모든 것 2 세상을 바꾼 전쟁의 모든 것 2
토머스 도드먼 외 엮음, 이정은 옮김, 브뤼노 카반 기획 / 열린책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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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은 1권보다 좀더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면서 여러 나라에서 벌어졌던 각각의 전쟁(분쟁)이 인류에 미친 여파와 문제점, 참혹하고 비참한 폐해, 그리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 및 재건과 애도에 집중한다. 








군인 관점에서의 전쟁 경험은 죽음, 시신 훼손 및 시신의 도구화, 관료적 효율성에 따른 전사자 관리, 사각지대에 놓인 비전투원의 시신, 점령지 국민에 대한 가혹 행위와 전시 강간, 전략 폭격이나 핵무기로 인한 대규모 희생자 등 민간인 피해, 증언과 전쟁을 소재로 하는 문학, 반복되는 제국주의 전쟁을 통한 식민화 폭력에 대한 모순적 담론을 서술한다.  


그리고 시민이 속수무책으로 감당해야 했던 일방적인 (성)폭력과 대학살, 전쟁 피해의 참혹함을 드러낸 예술 작품들과 다른 한편에서 독재정권과 제국주의 선전에 동참했던 문화예술가, 근대 전쟁의 무기가 된 굶주림과 강간과 성 노예화, 제노사이드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자행된 극단적이고 집단적인 (성)폭력과 공동체 분열 , (강제) 집단 이주와 대규모 난민 등에 대해 쓰고, 전쟁 이후 재향 및 상이 군인의 실태와 처우, 그들이 겪는 사회적 정체성과 혼란, 전쟁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에게 남겨진 정신적 후유증,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이 갖는 역사적 가치까지 아우른다.  


ㅡ 


​19세기부터 20세기 상반기 사이에 서구에서 전쟁 폭력이 가속화되고 늘어났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점점 더 많은 사회 주체가 전투 참여 여부에 관계없이 전쟁을 체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기술의 발달이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 그 이상으로 전투를 넘어서 전쟁 자체가 변화했다. 


스테판 오두앵루조는 근대 전쟁의 고유한 특징이 무기를 들지 않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는 데에 있음을 짚는다. 분쟁이 국가 공동체의 생존 자체를 결정하는 쟁점으로 인식되어 적국의 모든 민간인은 전쟁의 정당한 표적이 되었다. 배고픔과 잔혹함의 경험, 장소와 시간의 경험은 모든 신체적·정신적 충격을 포함한다. 비인격화된 익명의 전쟁은 개인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충격적인 집단 경험이다.  



인상적인 부분은 라파엘 브랑슈의 주장이다. 권력 획득의 시작이 언어 사용으로 시작되는데, 자신의 용어를 강요한다는 것은 자신의 해석을 강요하고 장기간에 걸쳐 어떤 정치적 질서를 정당화하면서 권력을 취하는 일이라고 썼다. 즉 전쟁을 어떻게 정의ㅡ지하트, 혁명, 독립전쟁, 군사 반란 등ㅡ하느냐에 따라 목적하는 바가 결정되며 집단을 묶는 데에도 용이할 것이다. 필자는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전쟁의 다양한 형태와 정치적 계획에 연결된 조직적인 무장 폭력들이 발생한 서로 다른 맥락을 간과하지 않고 서술한다. 1914~1918년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으로 적의 국내 전선을 공습하는 일이 사실상 합법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부터 베트남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민간인을 표적으로 한 폭격은 모든 주요 분쟁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확인시킨다.   


'총력전' 개념이 강화되면서 시민이 곧 군인이고, 입대에 따른 다양한 방식으로 인해 민간인과 병사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전쟁의 직접적인 경험은 더 이상 전장에 있는 군인에서 끝나지 않는다.   



몇 가지 씁슬한 점은, 헤더 존스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기아 봉쇄'를 정당화한 것에 대한 윤리적 문제가 제기됐던 점을 언급하는데, 전쟁 자체가 이미 비윤리적이고 반인륜적이며, 더하여 20세기 초에 지적한 윤리적 문제가 그 시점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시대에 따라 용어를 바꿔가며 변화했다는 것이 더 맞을 듯하지만)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 남북 전쟁에서 물리적으로 승리를 거둔 쪽은 북부 연방군이었지만 내전 발발의 계기가 된 갈등을 끝내지 못했고, 결국 국가적 상상력에서 승리한 것은 남부 연합군이라는 지적이다. 현재까지 그 갈등 해소가 여전히 이루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차별과 선민의식이 잔존한다는 건 여전히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냉전의 종결로 평화가 아닌 저강도 전쟁 시대가 시작됐음을 말하는  레너드 스미스의 지적도 인상적이다. 소위 '테러와의 전쟁'. 필자는 국가가 비국가 무장집단이 사용하는 전술에 맞서 전쟁을 할 수 있겠냐며 독자를 향해 되묻는다. 이 대치 상태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방법이란 국가가 그 집단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거나 파괴하는 것, 둘 중 하나다. 그러나 둘 다 거의 불가능하다. 전자는 집단이 거부하고, 후자는 해결할 능력이 없음이 수차례 증명됐다. 따라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전지구적 전쟁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앙리 루소는 신체적·정신적 후유증 형태로 지속되는 전쟁 폭력, 실질적 보상 문제 , 독재 및 폭력적 정책의 종결, 애도의 경험 등을 언급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잔혹한 시기에 동참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어떻게 '문명화 과정'을 되찾을 수 있었는지를 묻는다. 그는 전쟁에서 벗어나는 것은 고향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열렬한 욕망을 뜻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답이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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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6
잭 케루악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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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삶을 찾는 두 젊은이의 이야기다. 샐 파라다이스를 1인칭 화자로 두고 있는 소설은 십대 시절부터 이미 밑바닥 인생을 경험한 거칠고 광기어린 딘 모리아티와 그를 동경하는 샐이 거의 무일푼에 가까운 여비로 미 대륙을 종횡하는 한편의 로드무비같은 작품이다. 


책임감이나 신뢰, 이타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딘 모리아티의 인생의 목표는 오직 '재미'가 전부다. 인생에 있어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고 필요하면 취하고 소용이 없어지면 버린다. 이런 딘을 샐은 '성스러운 바보'라고 부른다. 그게 바로 딘이라면서. 


그들에게는 어디로 간다는 종착지만 정해져 있을 뿐, 목적은 없다. 주유소에서 몰래 주유하고, 담배를 훔치고, 돈을 갈취하고, 외도쯤이야 예사로우며,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고, 마약을 하고, 고작 40달러로 미국 일주를 하겠다는 그들. 그 와중에 샐이 사이사이 보았던 것은 산, 아름다운 해돋이, 이슬, 계곡의 풀밭, 강, 보랏빛 공기,  시시각각 변하는 황금빛 구름, 해질녘 노을이었다.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는 샐. 그는 하룻밤 같이 보내는 리타에게 인생에서 바라는 건 뭐냐고 묻는다. 그녀는 잘 모르겠다고, 그냥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살아가려고 애쓰는 거라고 대답한다. 샐은 인간이 삶을 이렇게 슬프게 만들 때 신은 도대체 뭘하고 있었던 걸까 생각했다. 누군가 딘과 샐에게 왜 대륙 횡단 여행을 하는 건지 물었다. 그런데 딘은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샐 역시 언제 돌아갈 예정이라는 대답만 할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답하지 못했다. 스스로 명확한 이유를 몰랐으니까. 불현듯, 샐과 딘은 답을 찾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답을 찾기가 두려웠던 걸까.



샐이 딘에게 그토록 끌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이 규정해 놓은 '좋은 삶', '올바른 삶'이라는 시스템에 함몰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일까? 어쩌면 이러한 해석조차도 내가 만든 그럴듯한 포장일 수도 있다. 그들은 그냥 그렇게 살고 싶었고,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샐은 길 위에서 달리며 생각한다. "내가 지금 월 하고 있는 거지? 어디로 가는 거야?"라고. 길 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때때로 이와같은 생각을 하곤 하니까(나만 그런가?). 성별과 나이와 직업을 떠나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확신하고 사는 이가 얼마나 되겠나. 살아가며 차근차근 하나하나 해결할 밖에. 


길이 곧 삶이라고 여겼던 딘에게 있어 늙어서 부랑아가 되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진짜 두려움은 자유를 잃은 속박된 삶일 것이다. 다른 이들이 붤 바라든 상관하지 않고 계속 자기만의 길을 나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딘이 진정 바라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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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들을 자꾸만 길 위에 서게 했을까?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위치, 사회 조직원으로서 가져야할 최소한의 의무, 연령에 맞춰 요구되는 규범 등 타의든 자의든 우리를 구속하는 것들은 수없이 많다. 누군들 한 번쯤은 예정없이 훌쩍 떠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법과 관습의 틀에서 벗어나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지 않을까. 그래서 아주 조금은 딘의 광기와 샐의 부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지치지도 않고 도로에서 폭주하고 마리화나를 즐기고, 길 위에서 만나는 여성들과 정사를 벌이며, 동거와 이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광란의 시간을 보내는 그들에게서 사실 나는 젊음의 열정을 느끼지 못했다(내가 너무 마음을 닫고 읽으서 그럴수도 있지만). 마치 이 길이 아니면 숨을 쉬지 못하고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였다. 



여행을 좋아하고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데에 거부감이 없지만 말 잘 듣는 착한 딸로 살아온 나로서는 어떤... 감정적 한계를 느끼면서 읽었다. 두 여자에게서 네 아이를 낳고도 결국엔 문을 박차고 나가는 딘이 대단하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커밀을 보면서 모험을 떠나겠다고 모아놓은 돈을 다 털어서 자동차를 산 뒤 자식조차 나 몰라라하고 나가버린 사람이 만약 여자였다면 이 소설이 과연 비트감 넘치는 청춘의 방황과 폭발적인 열정을 그린 소설로 평가 받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누군가는 그들(특히 딘)을 전쟁 직후의 혼란스러운 세태에 자유를 욕망하는 젊음의 초상이라는 말 대신 사회부적응자의 방종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아마 딘은 이러한 비난도 가치 없는 일이라며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겠지.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쓰지 마."라고.  


이 소설의 매력은 딘과 샐이 길 위에서 스치듯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각자의 역사와 그들 삶의 풍경, 그리고 다채로운 도시의 모습이다. 두 사람의 여정에 구글 지도를 열어놓고 따라갔는데, 그 거리가 어마무시하다. 넉넉한 여비로 편안함을 추구하며 다녀도 힘든 여정이다. 그걸 무일푼으로 해내네... . 


모든 길은 이어지고 펼쳐져 있으며, 그 길 위를 걷는 모든 사람들이 꿈을 꾸기를, 샐은 바람한다. 하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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