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81일차

 

애가 넘어지지 않으려고 몸에 안간힘을 쓴다.

아이의 표정은 굳었고 볼은 빨개지고 이마엔 땀이 맺혔다.

아이 바로 뒤에서 두 손으로 잡아 쓰러지지 않으려는 아이와 함께 나도 어느새 소리를 쳤다.

멈추지 말고, 계속 페달 밟아.

내가 손만 놓으면 아이의 자전거는 얼마 못가서 바로 쓰려져 버린다.

덩달아 아이도 같이 자전거 핸들을 놓쳐 버린다.

도대체 시간을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 초등 2학년때는 몸이 살이 많았다. 아니 그냥 또래 보다 확실히 뚱뚱했다.

운동 신경도 나를 닮아 별로 없는 같았는데, 자전거 타기를 연습 시키면서 확실히 운동 신경이 없음을 깨달았다.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으려면 무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발바닥으로 페달을 계속 밟고 돌려야 한다.

몸의 무게 중심을 페달에 맞추어 계속 이동 시켜야 한다.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서있지를 못한다.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페달, 그리고 핸들을 잡은 양손의 균형이 모두 고정되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자전거와 몸은 기울어지고 급기야는 쓰러진다.

자전거에게 움직임은 세우는 것이다.

무게 중심을 옮긴다는 의식도 없이 그저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가야 넘어지지 않는다.

결국 끊임없는 중심 이동이 바로 자전거가 달리는 원리이다.

이건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어릴 때의 자전거 타기는 한번 배우면 평생을 간다.

 

정식 해고 통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회사 차를 반납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회사는 경찰에

신고를 했다.  

회사와의 소송이 매듭 지어지면 반납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결국 이번 주에 차량을 반납했다.

뒤로 나는 자전거를 다시 타기로 했다.

아이들처럼 어릴 배웠던 자전거 타기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아이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우고, 다시 뒤에서 잡아주고, 페달을 밟게 하고, 뒤쫓아 가길 무수히 반복해서야, 어느덧 아이의 자전거는 넘어질 듯 안 넘어가며 갈팡지팡을 오고 갔다.

그렇게 비틀거리던 자전거는 서서히 중심이 잡히고 안정적으로 힘차게 달린다.

아이의 동년의 자전거 타기는 이제 내게 다시 이어져 노동 분쟁이란 자전거 타기로 투영되어졌다.

아이가 이제는 성인이 되어 자기 삶을 달려나가 , 나 역시도 이제 넘어지면서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정되지 말고 끊임없이 굴리자

그래야 넘어지지 않고 세워진다.



By Dharma & Maheal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페넬로페 2026-03-21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전거는 보통 어릴 때 아버지가 뒤에서 잡아주고 넘어지면 일으켜 격려하며 아이가 잘 탈 때까지 가르쳐 주잖아요.
저의 아버지는 병약하시기도 했고 직장일로 바쁘셔서 그랬는지 자식들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직까지 저는 자전거를 잘 못 타요. 언니는 자전거를 탈 줄 아는데 물어보니 친구에게 배웠다고 하더라고요. 전에 남편이 저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잘 타게 되지는 않더라고요
마지막 지브리풍 사진 모습이 넘 정겨워요. <고정되지 말고 끊임없이 굴리자>
그것이 인생인 것 같습니다.

마힐 2026-03-21 21:21   좋아요 1 | URL
네, 페넬로페님 말씀처럼 그것이 바로 인생인 것 같아요.
제가 아들이 두 명인데 큰 애는 자전거 배우는데 제 기억으로 3시간이 걸렸다면, 작은 애는 30분 만에 혼자 쌩쌩 달리더라구요.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전거 타기를 배우고 있는 중이겠죠?
그렇다고 모두가 자전거를 다 잘 탈 필요는 없겠죠? ^^
페넬로페님의 댓글 공유에 감사드리고, 다가온 봄을 느낄 수 있는 주말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_()_

yamoo 2026-03-21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아버지는 어렸을 때 자전거 타는 걸 잡아주기는 커녕 같이 놀아준 적도 없습니다. 항상 공부하라고만 닥달하고 공부 한자 안 가르쳐주면서 성적표 못 받아오면 때리기만 했지요. 그런 아버지가 나이 들어서는 대접안해준다고 화만 냅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아이 자전거 타는 걸 잡아주는 아버지...요즘 들어 생각해 보니 참 부러운 아버지입니다.

마힐 2026-03-21 21:12   좋아요 0 | URL
저는 우리 엄마한테 자전거를 배운 것 같아요.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우리 아버지가 자전거 타기를 가르쳐 준 적이 없었요. 우리 엄마가 70이 넘으셨는데 작년 까지도 자전거 타고 다니셨어요. 그러다 공사중인 길에서 넘어지셔서 크게 멍드신 이후 지금은 안 타신다고 하세요. 이제는 나이가 드셔서 몸이 예전 같지 않으신 거죠.
아버지는 몸보다 기억이 점점 떨어지고 계세요. 부모님 두 분이 점점 예전의 모습과 기억이 희미해지고 계시네요. 그 희미함이 다하는 날이 이제는 점차 다가오는 것 같아 한편으론 먹먹하기도 하네요. 우리 애들은 생생해지고 나는 먹먹해지고, 부모님은 희미 해집니다. 그게 삶이겠죠?
야무님, 항상 즐거운 일만 생기시길 기원드릴께요.

잉크냄새 2026-03-21 2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전거의 두 바퀴를 이분법의 한 축으로 대치시키면 자전거 타기야말로 중도의 또 다른 비유가 아닐까 합니다. 이상과 현실, 진보와 보수, 희망과 절망, 빛과 어둠, 이성과 감성....어는 것 하나 잘났다고 먼저 나서려는 순간 자전거는 넘어집니다.

운동장에서 해가 저물도록 넘어지고 넘어지며 배우던 풍경이 떠오릅니다. ˝춘짜이지토우이스펀˝ㅎㅎ 이번주부터 다시 사이클링을 시작했어요.

마힐 2026-03-21 21:01   좋아요 0 | URL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사이클링의 속도가 느껴집니다. 페이창 하오!
잉크냄새님의 전성기 몸매가 이제 다시 복원이 되는 건가요? ^^
지아요!
 

- 다시, 100일 정진  80일차

새벽에 꿈을 꾸었다.

 

두 개가 서로 이웃으로 나란히 붙어 있다.

양쪽 모두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다니던 절에서 *천도재(薦度齋) 준비했다.

그런데 나의 천도재는 원래 다니던 절이 아닌 이웃에 있는 절에 가서 지내야 한단다.

원래 절에서 나의 위패와 , 초, 그리고 물을 챙겨 준다.

그걸 쟁반에 담아 이웃 절로 가지고 가는데 가만히 보니 초도 작고, 향도 단지 하나 뿐이다.

이웃 상단에 놓다가 그만 잘못하여 초를 넘어뜨려 불이 꺼지고 물에 빠져 버려 다시 없게 되었다.

, 잘 됐다. 다시 돌아가 얻어오자.

절로 돌아가니 내가 다니던 민턴 클럽에 가입한지 얼마 안된 여성회원이 초와 향들을 챙겨주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꿈에서는 이것 저것 챙겨주는 것이다.

헝겁 가방에 담아 이웃 법당에 들어가니, 내 위패를 놔둔 곳에 이미 초도 켜져 있고 향도 사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곳 스님께서 이미 독경까지 마친 상태였다.

스님 바로 뒤에 앉아 있던 절의 어느 청년법우가 나를 향해 옆에 앉으라고 한다.

내가 평소에 앉는 좌복보다 이웃 절의 좌복이 너무 커서 다시 돌아가 좌복을 가져 올까 하고 망설였다.

순간, 천도재가 끝났단다.

공양주 분께서 오늘의 재주분이 누구냐면서 *공양(供養)하고 가라고 모시러 왔다.

아니, 그 공양주분은 내 어린시절 친한 친구 어머니가 아니신가.

서로 너무 반가워 얼싸안고 기뻐했다.

이제는 아까 향과 초를 챙겨줬던 여성 회원까지 나타나 같이 공양간으로 가면서 꿈에서 깼다.

 

꿈은 아마도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무의식에서 만들어 같다.

천도재는 바로 현재 내가 치르고 있는 회사와의 분쟁을 해소하는 의식일 같다.

그리고 익숙한 절은 나의 기존 익숙한 상황이며 이웃 절은 새로운 환경에 처한다는 의미 같다.

향과 그리고 물은 실제 천도재에서 중요한 도구들이다.

아마도 분쟁에서 쓰일 법적인 자료나 증거를 상징할 지도 모르겠다.

여성 회원등장은 조력자 것이다. 익숙한 사람이 아닌 사람이 뜻 밖에도 도움을 줄 것 같다.

이웃 절에서 천도재를 이미 마쳤다는 것은 분쟁의 해소를 뜻한다.

그리고 좌복이 커서 망설였다는 것은 자리가  분명 크게 있지만 아직은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무의식이 꿈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미 분쟁은 내가 어떻게 보는 단계가 아닌 같다.

이미 절차대로 진행 되어질 것이고, 이 과정 중에 여러 어려운 점이 분명 생기겠지만 다행이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게 되리라는 암시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말고 가는데 까지 가보자.

이런게 자화자찬 아니겠는가?

 

 



*천도재(薦度齋): 불교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 즉 영가(靈駕)들이 더 좋은 곳으로 가시라고 마음을 모아 정성을 드리는행사이다. 단순히 극락왕생을 비는 의식이 아니라 내가 전생에 알게 모르게 지었던 업들을 녹여내고 부처님의 법에 따라 수행하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공양(供養): 시주할 물건을 부처님전에 올리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공양의 뜻은 아주 폭이 넓다. 수행적인 면에서 부터 배고픈 중생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주는 의미까지 두루 넚다. 여기서는 공양간 즉 절의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를 공양이라고 한다.


By Dharma & Mahea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날짜:20260317      (출생18649일 중국생활 9567일)

오늘의정진: , 그 기원에 대해서


- 다시, 100일 정진  78, 79일차

 

기원전 2100년, 수메르의 우르남무 법전은  사람 사이의 충돌을 벌금으로 조정했다.  

기원전 1754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징벌을 내렸다.

법을 통해 복수를 하는 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복수가 아니라 복수를 멈추기 위한 기준이 되었다.  

법의 형태는 달랐지만 목적은 같았다.  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목적은 고대 법이든 현대의 법이든 다르지 않다.

 

법은 처음부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충돌을 일정한 안에 가두기 위해 만들어 것이다.

우리는  진실을 찾아 것이라고 믿지만 그건 어쩌면 우리의 순진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현대의 법은 입증 가능한 것만을 루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법은 정의를 완성하지 않는다.  현실의 법은 판단 가능한 기준 안에서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法)은    상징하는 삼수변      합쳐진 글자이다.

물이 간다는 것은 흐른다는 뜻이다. 즉 물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른다. 어디에도 치우침 없이 적용되는 기준, 그리고 어긋난 것을 가르고 제거하는 질서 담았다. 

이때의 법은 순응 냉정한 기준 서로 섞여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후 도가(道家) 사유가 더해지면서 인간은 법을 따르는 것보다 흐름에 따르는 삶을 높은 경지로  시작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노자가 말한 최상의  물과 같다  말은 법의 기준을 넘어 존재의 방식으로 확장된 선언이었다.  

불교 또한 흐름 위에 였다. 

집착을 내려놓고, 인연에 따라 흐르는 삶.  

지점에서 동양은 위에 도를 얹는다.  

법은 기준으로 겼지만,  도는 그 기준마저 초월하 경지로 들어선 것이다.

 

서양  law  ‘놓여진 것’에서 어원을 찾는다.  

정해지고 고정된 규칙이며 법은 하나의 (),  라인(Line)이 되었다.

 넘으면 처벌되는 경계 가지게 되었다.  

동양이 기준 위에 흐름  얹었다면,  서양은 기준 자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동양이든, 서양이든 흐르든, 고정되든 결국 법은 인간이 만든 가장 강력한 장치가 되었다.

특히 권력이 강할 수록 법은 권력자에 따라 이용되었다.

 

고대에는 계급에 따라 처벌이 달랐고,  현대에도 정보와 자원, 경험을 가진 쪽이  법을 더 정교하게 이해하고 활용한다.  

그래서 법은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이지만 사실은 강한 자에게 유리하게 작동할 있는 구조를 가지게된 불편한 진실이 있다.

평등과 공정은 이미 실현된 상태가 아니라  법이 끊임없이 지향하는 방향에 가깝다.  

 

법이 무너지면 정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질서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 지금도 유지되고 믿게 된다.

결국 법이 원하는 것은 사회질서 유지와 분쟁의 해결이다.

해결을 합의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강제력이 동원된다.

 과정에서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법의 판결에 동의하지 못한다.

법은 그저 수용 가능한 수준에서 유지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법은 그러한 불편한 진실위에 정의와 공정이라는 언어 덧씌우게 되는 것은 아닐까.

 

냉정하게 보면 법은 정의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  

단지 법은  정의와 진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최소한의 형식이다.  

결국 법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지 모든 분쟁을 해결하는 만능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법을 믿고 싶어한다.

어떤 신앙보다도 법이 공정하게 판단해주길 믿는다.

그래서 인간은 모순이다. 법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에게 만큼은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믿음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중국 생활 9567일이면 26년이 넘은 시간이다. 26년을 중국에서 살고 있지만, 회사와 분쟁에 휩싸였다.

법까지 동원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자 26년의 살았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또한 업보일까?

미련한 생각이지만 미련하게 생각해본다.

 

 

By Dharma & Mahea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다시, 100일 정진  77일차

 

探春 (탐춘) 봄을 찾아서

盡日尋春不見春 (진일심춘불견춘) 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녀도 봄은 보지 못하고
芒鞋遍踏朧頭雲 (망혜편답롱두운) 신이 닳도록 언덕 구름까지 따라 갔다.

歸來偶過梅花下 (귀래우과매화하) 허탕치고 돌아 오다 우연히 매화나무 밑을 지나다

春在枝頭已十分 (춘재지두이십분) 어느덧 봄은 이미 매화가지 끝에  있었네

 

북경에도 봄이 왔다.

불과 2주전에 눈이 펑펑 쏟아졌었는데...

어느덧 아파트 단지의 나무 가지에는 파릇한 발아 싹들에게 조금씩 물이 오르고 있다.

그중에는 아주 이르게 꽃이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게도 봄은 이미 있었다.

 

<탐춘> 은 '봄' 하면 항상 빠지지 않고 소개되는 송나라 때 시이다.

작자는 미상으로 알려졌으나 비구니 스님이 지었다고도 전해진다.

수행자가 도를 찾는 구도의 여정을 봄을 찾는 것에 비유했다.

봄도, 사랑도, 깨달음도 내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항상 쫓기듯 밖으로 대상을 구하는 습성이 있다.

구하는 대상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늘 밖으로 향한다.

그렇게 내가 있는 자리가 바로 구하는 것의 시작임을 잊는다.

밖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자.

어쩌면 구한다는 조차 필요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봄은 때가 되면 스스로 찾아온다.

사랑도, 깨달음도 스스로 찾아 올 것이다.

 


By Dharma & Maheal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26-03-17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구와 4구를 외우고 있습니다. 나이 들수록 다 외우기 귀찮아 좋은 구절 몇 구만 외우는 게으름을 피웁니다. 당시는 중국어로 음송해야 제 맛이지요. ㅎㅎ
 

날짜:20260314      (출생18646일 중국생활 9564일)

오늘의정진: 신심명, 그 이후


- 다시, 100일 정진  76일차

 

무엇이 부처 입니까?

앞의 빛이 맒은 어린 사미승(沙彌僧) 부처에 대해 물었다.

그대의 마음은 무엇인가?

이제 부처에 대해 묻는 사미승의 마음을 보고 싶어 졌다.

저의 마음은 무심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무심임을 안다면 어찌 부처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그대 마음이 무심이라면 부처님은 무슨 마음인가?

사미승의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이 드러난다.

부처와 나의 마음이 둘이 아님을 아직 모르는가?

화상이시여, 자비를 베푸셔서 해탈하는 법문을 내려주시옵소서.

사미승이 합장을 하며 간절한 마음을 내보였다.

누가 그대를 속박 했는가?

사미승은 잠시 멈칫하다가 답한다.

아무도 속박한 자가 없습니다.

사미승은 아직 순수하고 진실하다.

옳다. 아무도 속박한 자가 없다면 그대는 무엇에서 벗어나려는가?

본래 벗어날 것이 없거늘 어찌 다시 해탈에 이르려 하는가?

사미승의 맑은 눈이 커지며 빛이 나기 시작한다.

그대는 곁에 머물라.

사미승은 스승의 예를 올린다.

 

14세의 어린 사미승은 그날 이후 승찬 (僧璨, ?~606)대사 곁에서 9년간 머물게 된다.

그가 바로 훗날, 승찬의 법을 이은 4조 도신(道信: 580~651) 이다.

 

해가 지기 , 하늘은 어느 순간 다시 한번 불 타오르듯 밝아진다.

회광반조(回光返照), 빛을 돌이켜 다시 한번 비추어 본다는 뜻이다.

어린 도신의 마음은 스승과의 문답에서 회광반조를 얻은 것이다.

승찬의 신심명은 도신에게 회광반조를 일으켰다.

나의 어두운 순간에도 어쩌면 다시 한번 밝아질 순간이 찾아오게 됨을 잊지 말아야겠다.

진흙탕 정진은 계속 된다.



By Dharma & Mahea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