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3 월12

 

 

 

제목:  움직이는것은 그대의 마음이다. (仁者心動_ 육조단경 중에서)

두번째 사색

육조혜능이 오조홍인에게서 의발과 법을 전수받고 남방에서 숨어 살다가 어느덧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느낀후 세상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광주의 법성사란 사찰에서 열반경 법회가 열렸는데 혜능은 그 법회에 청중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사찰에 세워진 깃발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는 것을 보고 스님들 의견이 분분했다.

'저건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아니야! 저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바람이 움직이니 깃발이 움직이니 대중들은 설왕설해를 하며 논쟁을 하던중,

그때 혜능이 홀연히 답한다.

'움직이는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그럼 뭔데?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라고 하자 청중은 놀랐다고 한다.(一衆駭然: 일중해연)

그렇게 5조의 법을 이은 6조가 세상 밖으로 드러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

당시의 대중은 어떻게 혜능이 단지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는 것이다.'

라는 대답에 심상치 않음을 알고 놀랐을까?

무시 할 수도 있는 답이 아닌가?

어떻게 대중들은 혜능의 대답에 탄복할 수 있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혜능의 대답보다 그당시 대중들이 답을 알아보는 안목이 대단하지 않은가?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 이란 답을 아는 인식을 대중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즉, 혜능이 당시에 깨달음을 지녔다고 하지만  그 깨달음을 아는 대중의 안목 또한 대단한게 아닌가 싶다.

 

쇼펜하우어가 천재는 자신의 경지를 보통일반 사람들도 직관적으로 알수 있게 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한바가 있다.

즉 천재성을 깨달음으로 바꿔 표현한다면 진정한 각자(覺者)의 위대함은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지만 발현 되지 않은 불성을 자각(自覺)하게 해주는데 있다.

그래서 선지식(善知識)은 각자(覺者) 이여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것이 아닐까?

어쩌면 천재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발현시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 보통 사람들 가운데 한두명 특출난 천재성을 발현한 사람, 혹은 깨달은 사람이 나타나면 이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숨겨진 천재성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타인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보거나 깨달음의 경지를 단박에 알수 있다면 그건 이미 본인 내면에 본래 갖추고 있던 천재성이나 불성을 비추어 본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성본래불(自性本來佛)

이렇게 본다면 우리 모두는 이미 거의 완성형이 아닌가?

다만 아직 알이 깨지기 전 상태, 어미 새가 밖에서 한번 쪼아 주는게 부족한 상태.

선지식의 할과 방의 한방이 필요한 상태가 아닐까?

 

석가모니 부처님과 큰스님을 비롯한 모든 선지식은 지금도 우리에게 줄 한방을 준비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단지 우리 스스로가 알 껍질 안에서 좀 더 쪼아 놓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결국 성장과 완성은 어쩌면 한껍질 벗겨내는가에 달려 있는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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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3 월11

 

 

제목:  원죄는 없다.

첫번째 사색.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성경속의 하나님은 완성형 신은 아닌것 같다.

아마도 성장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창세기때의 하나님은 분명 신이 되신지 얼마 안된것 같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인 아담과 이브를 자신과 같은 외모로 만들어 냈다고 했다.

그런데 인간을 만들어 놓고 그들을 에덴동산에 가두고 길렀다.

마치 우리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물들이 자식을 낳고 기를때는 부모 품안에 두고 키우듯이 하나님도 그랬던것 같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품안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찾아온다.

이 시기에는 부모가 아이 때문에 속을 태운다. 아마도 에덴동산에서도 그런일이 발생한것 같다.

마치 우리가 부모말 안듣고 친구 잘못 사귀어서 꿰임에 빠지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하나님도 아담과 이브를 끝까지 에덴 동산에 가둬두고 기를 수 없었다.

그건 마치 우리 인간이 자식을 낳아 길러도 어느정도 장성하면 독립시켜야 되는것 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싶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추방' 되었다고 해석한다.

또한 종교 연구자들은 성경 내용을 곧이 곧대로 이해하거나 해석하지 말고 맥락속에서 상징적으로 살펴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이 부모의 입장에서 아담과 이브를 바라 본다면...

그렇다면 이것은 이건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독립한것이라 봐야 되지 않을까?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자신이 가둬두고 함께 살수 없다는것을 깨닫게 된것은 아닐까?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아니라 독립 시키는것이 그당시 신이 인간에 대한 최선의 사랑이 아니였을까?

그렇게 하나님도 신과 동시에 부모로서 성장을 하게 되는것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도 난생 처음 부모 역할을 맡은셈인데 어찌 우여곡절이 없으셨을까?

자식이 부모에게서 자립하는것이 죄가 되는것인가?

그러니 원죄는 없다.

결국 성경속의 하나님도 결국 우리 인간처럼 신으로,부모로서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건 신 만이 알겠지.

나도 우리 부모님 속 몰랐고, 우리 애들도 내속을 모르듯이. 지금은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다 이해 할 날이 올것이란것은 안다.

그때 되면 나도 아이들도 철이 들겠지.

하나님도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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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이라는 착각 -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필리프 슈테르처 지음, 유영미 옮김 / 김영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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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제정신이라는 착각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필리프 슈테르처 지음/ 유영미 옮김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COW BEBOP)' 에서 오프닝 음악 (TANK!) 은 사람을 신나게 한다.

이 신나는 째즈음악은 현실의 혼잡한 상황을 좌충우돌 하는 가운데 경쾌한 리듬으로 헤쳐나가는 중독성 강한 매력을 지녔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운전을 하면 내가 차를 모는게 아니라 우주 전투 비행기를 몰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마치 내가 카우보이 비밥의 주인공 '스파이크' 가 된 듯하다.

나는 카우보이 비밥이 20세기 최고의 걸작중 하나라고 확신 하지만 어느 누군가는 그저그런 유치한 만화라고 할 것이다.

이제 나이 50이 다된 내가 이런 '중2병' 같은 착각에 빠지는데 과연 나는 제정신일까?

 

 

 

이책<제정신이라는 착각>은 우리의 인식과 확신에 관한 책이다.

세계적인 신경과학자이자 정신의학자인 저자 필리프 슈테르처는 '우리가 인식하는 이 현실은 사실 우리 머리속에서 만들어 내는 즉, 뇌가 만들어 내는 세상' 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뇌가 만들어 내는 세상이다' 는 저자의 생각은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이라 새로운 정보는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뼈로 이루어진 딱딱한 공간속의 뇌가 외부세계를 직접 맞딱드리지 않고 어떻게 지각을 만들어 내는지에 주목한다.

즉 뇌는 어떻게 지각을 만들어 낼까?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거듭된 연구를 진행 하면서 지각의 변화 증상은 심리질환과 연관이 되어있음을 알게 된다.

 

 

 

뇌가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상을 만들어 내면 타인이 볼때는 미쳤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조현병 같은 정신 질환에 주목하게 된다.

 

연구가 깊어짐에 따라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아 보이는 환각증상, 망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겪는 확신을 통해 저자는 한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저자는 확언한다. (저자는 이또한 또다른 확신이라고 양해를 구한다.)

'망상'과 '정상' 의 경계가 확실하지 않고 구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한다.

책에서는 여러 예시를 들며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는 거의 한끗 차이라고 말한다.

데이터와 사실을 토대로 하는 과학자들 마저 자신의 열의에 빠져서 말도 안되는 이론을 제시하게 된다던가 음모론 신봉자나 열성적인 종교주의자를 다 미쳤다거나 조현병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탈진실의 시대'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세상은 보이는 현상뒤에 감춰진 근본적인 원인을 파헤치고자 하는 음모론 신봉주의자들, 서로 자신이 걷는 길이 정도(正道)라고 믿는 신념주의자들로만 이루어 진것 같다.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고 자신의 신념만이 옳다는 확신으로 꽉 찬 세상속에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정도(正道)인지를 두고 충돌하고 있다.

 

사실과 근거를 무시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것만 보고, 듣고 싶은것만 듣고, 믿고 싶은것만 믿는 것이 우리 인간이란 동물의 기본 설정값 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전부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해결이 어려워 보이는 문제와 갈등들에 대한 저자가 제안하는 바는 주목할 만하다.

우리가 확신하는 '모든것은 단지 가설' 일뿐임을 인정하라고 한다.

우리의 확신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었다.

원시시대 부터 우리의 감각기관이 뇌에 제공하는 이해할 수 없고, 불확실하고 종종 모순이 되는 신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이든 망상이든 확신을 우선적으로 내려야만 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뇌는 예측 기제도 함께 발달 되어졌다.

즉 확신은 살아남기 위해서 형성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의 형성에는 정신질환이나 정상이나 별차이가 없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달리 이해한다면 결국 우리 사피엔스 종은 태초에서 부터 함께한 불안으로 인해 오히려 확신을 강화 시켰다는 뜻이 되는것 아닌가?

불확실한 현실과 미래는 현재 확신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게 되는 셈이다.

이제 확신이 현실에 부합이 되든지 되지 않던 모두 중요한게 아닌것이다.

오히려 불확실할 수록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더욱 더 확신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모든 갈등을 야기하는 서로 다른 확신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과학적 시각 조차도 우리가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저자는 과학적 시각을 버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우리의 확신은 단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고 언제나 수정 될 수 있으니 불확실한 세상을 대함에 언제나 열린 태도로 세상을 대하길 권한다.

 

자기 확신으로 점점 분열되어 가는 듯한 세상을 향한 저자의 통찰에 깊이 공감하고 내 자신이 확신하는 모든것들에 대해 다시금 점검이 필요함을 절실히 일깨워준다.

 

 

 

카우보이 비밥에서 '비밥( BEBOP)' 의 뜻은 재쯔 음악에서 즉흥연주를 말한다.

정해진 악보 없이 뮤지션들이 각자 개성에 맞게, 상황에 맞게, 각자의 연주가 하나의 화음으로 연주 되는 것이다.

우리의 문학이나 영화 장르를 보면 단순하게 하나의 장르로 비교적 쉽게 규정한다.

로맨스, 액션, 스릴러, 공상, 코믹, 비극, 공포, 전쟁 등등 하지만 실제 우리가 사는 현실은 어느 장르 하나로 규정 할 수 없다.

삶은 모든 장르를 포함하고 있으며 세상은 각자의 다른 장르가 공존한다.

 

나에게 세상은 코믹이지만  내 동생에게 세상은 액션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건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보면 세상 전체는 영원한 한가지 장르만으로 존재 하질 않는다.

세상은 언제나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며 모든 장르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즉 우리는 삶의 무대에서 각자의 악기로 고정되지 않은 리듬과 박자로 째즈를 연주하는 비밥 뮤지션과 무척 닮지 않았나?

우리가 어떠한 신념을 가졌거나, 도저히 변할수 없는 확신을 가졌다 하더라도 세상은 언제나 고정되지 않은 째즈연주 '비밥' 과 다르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겠다.

 

 

 

카우보이 비밥 마지막 에피소드.

스파이크가 숙명의 라이벌 비샤스와 대결을 마치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다.

스파이크는 이미 달관한 모습으로 멍때리고 쳐다보는 조직의 잔당들을 향해 손가락 권총을  겨눈다. 입으로 빵 소리 내고 스파이크는 쓰러져 버린다.

화면은 스파이크의 쓰러진 모습에서 하늘로 점점 클로즈업을 시키며 올라간다.

푸른 하늘, 구름, 그리고 계속 올라가며 별들이 보이는 어두운 하늘로 향한다.

결국 한참을 올라 우주까지 올라가 버린다.

우주 공간속에는 방금전 까지 격렬했던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지구안에서 우리가 가진 신념과 확신으로 죽기 살기로 싸우고 투쟁하던 그 모든것은 우주의 입장에서 아무것도 아닌것이 된다.

애니메이션 이였지만 삶을 관조하는 이런 연출은 나에게 깊은 여운을 남겨 주었다.

 

이래도 카우보이 비밥이 그렇고 그런 만화영화 였을까?

 

 

 

불교의 선지식들 께서는 '나' 를 제대로 깨닫는것이 우주를 아는것 이라고 하셨다.

법성계 구절에 '일중일체 다중일, 일즉일체 다즉일(一中一切 多中一, 一卽一切 多卽一) 하나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가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 고 했다.

내가 우주 그자체요, 우주가 곧 내가 되는 것이라.

제정신이든 제정신이 아니든 '나' 부터 제대로 깨어나야 한다.

바뤼흐 스피노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돌아가거나 행운이 그들에게 언제나 호의를 베풀어준다면, 그들은 미신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 P285

진화의 명령은 ‘현실과 일치하는 세계를 구성하라!‘는 것이 아니라, ‘생존과 번식 가능성이 극대화되도록 세계를 구성하라!‘는 것이다. - P296

우리는 세계에 대한 완전한 진실을 알 수 없다. 우리의 확신은 이런 불확실함에 대처하기 위한 우리 뇌의 중요한 전략이다. 확산은 우리에게 불확실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옳은 것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주관적 확실함에 오도된 채 자신의 확신만이 옳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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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쿠에 자기암시 - 긍정적인 자기암시가 우리 몸과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에밀 쿠에 지음, 윤지영 옮김 / 연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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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에밀 쿠에 자기암시

( 긍정적인 자기암시가 우리 몸과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에밀 쿠에 지음/ 윤지영 옮김

 

이책 <에밀 쿠에 자기암시>는 뭔가 독특하다.

보통 책을 읽고 나서 독후감을 쓰려면 뭔가 써야할 내용이나 감상등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책은 별다른 감상이 없다.

그저 떠오르는 구절,

'나는 모든면에서 날마다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 '

이 한 구절이 책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다.

 

 

상상의 힘은 의지를 이기니까 자기암시로 상상을 현실화 시키라는게 주요 핵심이다.

즉 무의식의 힘은 어마어마해서 의식을 눌러버린다는 전제 조건을 깔아 놓고 항상 이 주문을 외우면 내게 닥친 그 어떤 병이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암시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선행 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자신을 위한 믿음에 관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에밀 쿠에의 자기암시 구절은 나는 작년  여름에 처음 접했었다.

그당시 좌절의 밑바닥에서 몸부림치는 나의 배드민턴 실력을 올리기 위해 구매했던 책(동호인 배드민턴: 지은이 이종인)을 읽다가 발견한 구절이 자기암시법 이었다.

배드민턴을 정말 잘 하고 싶은데 몸으로 하는 노력만으로는 한계를 느꼈다.

하다보니 자기암시까지 동원을 해야 하는 나의 상황에 어이가 없지만 물에 빠진 사람이 된 심정으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나는 모든면에서 날마다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

'상상은 의지를 언제나 이긴다.'

 

그렇게 열심히 자기암시를 걸었다.

지금도 매일 자기암시를 건다.

자기암시의 효과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배드민턴 실력은 진짜로 쫴금, 아주 쫴금  손톱만큼 나아지고 있다.

그렇게 라도 믿고 싶다.

A조가 되는날 까지.

 

<나는 모든면에서 날마다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

Day by day, in every way, I am getting better and better.>

 

 

 

사기에 나오는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泰山不让土壤,故能成其大。태산부양토랑, 고능성기대

大河不择细流,故能就其深。 대하불택세류, 고능취기심

태산은 한줌의 흙도 마다 하지 않아, 그처럼 크게 이루었고

대하는 한줄기 시내물도 마다하지 않아, 그처럼 깊이 있었다.

 

 

또 성경에는 <진실로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태복음중)  구절이 있다.

 

모든 위대함의 출발은 아주 작은 믿음에서 시작하는 셈이다.

결국 자기암시는 자기신뢰를 말한다.

자기신뢰, 그것이 곧 나를 태산 만큼 높이 만들고 바다 처럼 깊게 만든다.

또한 산을 옮길수도 있다.

자신을 믿자.

당신을 낫게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병의 치료는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중략.... 당신안에 자신을 치유할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기만 하면 됩니다. - P168

핵심은 이 말을 할 때 아이가 말하듯 단순하게 단조로운 어조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중요한 것은 노력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 조건 입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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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삶이 불쾌한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박은미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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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삶이 불편한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박은미 지음

 

236년전의 오늘, 1788년 2월 22일은 쇼펜하우어의 탄생날 이다.

 

 

쇼펜하우어(1788~1860)는 지금은 폴란드 영토, 당시에는 독일 영토였던 '단치히' 라는 곳에서 부유한 사업가인 아버지와 여류 문학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마디로 쇼펜하우어의 삶을 요약하자면 아빠, 엄마 찬스를 잘 사용했던 철학자?

물론 쇼펜하우어 자신의 의지는 아니였겠지만 요즘 세대의 시각으로 보면 금수저나 엄친아 정도 아니였을까?

아버지가 남겨준 물질적 유산으로 평생 돈 걱정 없이 살았고 또 정신적으로는 어머니의 문학적 재능과 인맥을 이용한 교육을 아주 그것도 잘 받았다.

 

 

어릴때는 유럽 여행을 하다가 아버지 친구가 있는 프랑스에서 2년을 살며 프랑스어를 배웠고, 이후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의 권유로 라틴어와 그리스어 공부를 하게된다.

이때 학교교장에게 직접 개인 교습을 받았다 하니 쇼펜하우어는 부모님 찬스를 아주 잘 쓰며 자란셈이다.

그렇지만 찬스를 잘 썼다고 쇼펜하우어 전반적인 인생은 순조롭고 또 화려하게 살았던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는 부모님 찬스와는 별도로 당대에 손꼽는 천재중의 한명임은 분명한 것같다.

30세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세상에 내놓았고, 일찍이 당대의 최고 문학가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색채론 연구에 동참하라고 권유를 했다고 한다.

또 훗날 베를린 대학에서 강사를 하며 정반합 변증법으로 유명한 당시 철학계의 거두 이자 이성 철학의 최고봉인 헤겔보다 자신이 한수 위라고 생각 했다고 한다.

그만큼 자신의 천재성에 대해서 자부심이 대단한 양반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종종 말하는 시대를 앞서간 천재들중 쇼펜하우어도 그들중에 한명이었던것 같다.

당시의 명성은 헤겔에 비해 인지도가 거의 없었다고 하니...

늘 철학계의 비주류로 치부 되었지만 말년이 되서야 자신이 30세때 내었던 책들을 쉽게 대중적으로 다시 써내자 많은 사람들이 알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년에서야 비로서 주목을 받게 되고 사후엔 톨스토이, 바그너, 니체에 이르기까지 쇼펜하우어의 천재성에 탄복하게 된다.

 

 

이책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삶이 불쾌한가> 에는 쇼펜하우어가 정의한 '천재' 에 관한 고찰이 나온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직관한 이념을 예술 작품에 구현해 놓는 사람이 천재라 정의 한다.

또한 천재는 천재가 아닌 사람들도 직관을 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천재는 자신의 천재성을 눈앞으로 내보여 준다는 것이다.

대상이 문학이든, 미술 작품이든 혹은 음악이든 또 몸으로 하는 운동이든간에 그걸 사람들 앞에 내놓으면 일반 사람들은 천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놓은 결과물에 대해 공감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천재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통찰해서 전달함으로써 일반인들도 천재가 느끼는것을 그대로 느끼게끔 해준다는 뜻이다.

그래서 천재는 항상 통찰을 해야 하는 시간을 허비하느라 일반 세속적인 삶을 잘 영위하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이 말은 쇼펜하우어 본인이 천재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위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은 어찌보면 바보 같은 면이 있다고 하질 않던가?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천재라기 보다는 뭔가 항상 불쾌함에 찌든 괴짜 철학자 같은 분위기가 물씬 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라고 소개하는 사진을 보면 앞머리는 대머리이고 양옆의 부슬부슬 흰머리는 어릴때 로봇 만화영화을 보면 악당의 편에서 일하는 박사 같은 이미지.

염세주의자로 세간에 알려진 철학자라 나에게는 어쩌면 이번생에 그냥 영원히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철학자중의 한사람이였다.

최근 들어서야 이 사람 철학이 단순히 염세주의 철학이 아니란것을 알게 되었다.

이책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삶이 불쾌한가> 는 쇼펜하우어에 대해 이해 하기 좋은 책이다..

지은이 박은미님은 쇼펜하우어 철학의 입문자들이 쉽게 들어올수 있도록 구성을 잘 한것 같다. (그래 맞다. 달리 EBS 이겠나?)

책의 앞부분은 쇼펜하우어의 전반적인 사상과 철학에 대해 비교적 쉽게 설명되어 있고 뒷 부분의 원래 책을 보는데 참고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철학의 이정표' 란 제목으로 친절히 소개하고 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는 세계의 본질이며 이것은 이성으로 어떻게 해 볼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세계는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며 의지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한다.

또한 의지는 고통을 유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지의 세계는 고통의 세계.

뭔가 비슷 하지 않는가?

 

 

불교의 일체개고(一切皆苦), 즉 일체가 다 고통이다.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자라는 소리를 듣는게 다 이것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불교가 허무주의 종교라는 오해를 듣는것 처럼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염세주의라는것 또한 잘못 이해된 면이 많다고 생각되는 지점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에 종속되지 말고 의지를 극복하는것으로 '동고(同苦)' 를 설파한다. 동고란 남의 고통을 남 아픔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이것도 불교의 자타불이(自他) , 나와 남은 둘이 아니다. 라는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즉 나와 남을 둘로 나눌때, 나와 상대를 분별할 때 그것은 의지의 작용으로 고통을 유발하지만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는 동고일 경우, 본래 하나라는 인식을 한다면 의지로 부터 자유로와 진다는 것이다.

 

즉 불교에서 뜻하는 보살의 경지를 말하고 있다.

 

이는 이책의 지은이 박은미님도 이와 같은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듭남' 의 상태와 불교에서의 '반야바라밀' 의 경지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척 공감이 가는 내용이라 그동안 세간에 오해 되어져 왔던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 철학자라는 오명을 씻을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특히 이책에서 동고(同苦)라는 개념을 접했을때 '토리노의 말' 로 유명한 일화를 남긴 니체(1844~1900)가 떠올랐다.

1889년, 니체가 죽기 10년전에, 니체가 토리노 라는 광장을 지나다가 채찍으로 주인에게 얻어 맞는 말을 보게 되었다.

주인의 모진 채찍질에도 꿈쩍도 안하는 말을 보고서 니체는 온몸으로 말을 끌어안고 울었다고 한다.

말이 채찍으로 맞는것이 마치 니체 자신이 맞는것 처럼 느꼈다는 것이다.

즉 니체는 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물론 니체가 당신 정신병을 앓아서 그랬다느니 택도 없는 소리라 무시할 수도 있지만.

니체는 젊은 시절에 쇼펜하우어 추종자중의 한사람 이었다.

지금은 니체가 쇼펜하우어보다 훨씬 대중적으로 유명하고 현대 철학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 하지만 당시의 니체의 정신적 스승들 중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지대했으리라 짐작된다.

 

내가 볼때 어쩌면 진정한 쇼펜하우어 철학의 완성자는 니체가 아닐까 싶다.

망치 철학자 니체에게 망치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스승.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헌책방에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만났다고 한다.

스승과 제자가 직접 만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책을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크나큰 영감을 받고 자신의 철학을 만들게 되는 동기가 되는 셈이다.

니체는 본래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단지 고전문헌학 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바로 교수로 임용된것이라고 한다.

그런 그가 철학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쇼펜하우어의 책 때문이다.

니체가 헌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책을 만나지 않았다면, 현대 철학에서 니체는 없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니체의 영역은 철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현대 종교, 문학,예술에 이르기 까지 니체의 철학은 세계를 뒤덥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다.

 

'청출어람이청어람(靑出於藍而靑於藍) '청색은 남색에서 나왔지만 남색보다 더 푸르다.

이렇게 이어지는 이 두사람의 인연도 참 아름답지 않는가?

같은 시대에 접접은 있었지만 둘은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인연.

 

니체를 오늘날 니체로 만들어준 인물.

그게 바로 쇼펜하우어가 아니었나 싶다.

 

 

쇼펜하우어는 그때나 지금이나 제대로 된 평가나 인정을 받지 못한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 더욱 쇼펜하우어에게 빠지게 되는것 같다.  

 

우울할 땐 쇼펜하우어를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벽에 붙은 서가에서
나는 쇼펜하우어를 꺼내본다
그는 이세상살이를 일컬어 ‘슬픔으로 가득찬 감옥‘이라 했다.
그의 말이 맞는다 해도 나는 아무것도 잃은것이 없다.
감옥의 고독 속에서
그 옛날 달리보처럼 행복하게
나 나의 영혼의 현을 깨우니까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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