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27일차

<能境/경유능경/객관은 주관을 말미암아 객관이요

境能/능유경능/주관은 객관을 말미암아 주관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너무나 유명한 게송이다.

그러나 처음 듣는 이들이라면 번쯤은 의구심을 가질 하다.

당연히 산은 산이지, 산이 물이겠는가.

이게 유명한 구절인지 의아스럽다.

그런데 이걸 대중에게 각인 시키신 분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선사인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이기 때문이다.

성철스님 하면 바로 연상되는 게송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곧바로 연상 될 정도로 지금은 상징이 되어 버렸다.

원래 게송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時會大衆) 알겠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게송은 1981, 성철 스님이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고 난 후 내놓은 게송으로 알려졌다.

깨달음은 본래 둥글게 널리 비추고 있고, 고요함과 멸함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보이는 만물이 관음 보살이고, 들리는 소리가 묘음 보살이라.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진리인데, 세상 사람들은 그걸 아느냐  물으신 것이다.

그리고는 바로 답을 주셨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후 사람들은 앞의 게송은 모두 잊고,  마지막 게송만 기억에 남게 된 것이다.

 

능수경멸(能隨境滅)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경축능침(境逐能沈)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경유능경(能境)객관은 주관을 말미암아 객관이요

능유경능(境能)주관은 객관을 말미암아 주관이다

 

본래 깨달음이란 혹은 진리는 멀리 있지 않은 곳에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고 하신 것이다.

둘이 아닌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보아도 보지 못한 것이 되고

들어도 듣지 못한 것이 된다.

산이 산이 아닌 도리, 물이 물이 아닌 도리와 산이 산인 도리, 물이 물인 도리가 모두 다른 것인가?

보고 듣는 가운데 도리를 참구해야 한다.

성철 스님의 장군 죽비 소리가 어깨로 떨어진다.

 

: : 지경 , 말미암을 유: 객관은 (주관을) 말미암아

能境: 능할 , 지경 경: 객관이 되다.

: 능할 , 말미암을 유 : 주관은 (객관을) 말미암아

境能: 지경 , 능할 능:  객관이 되다.

*관음(觀音): 관세음 보살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관세음 보살이란 뜻도 있지만 본래 관이란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음이란 소리를 뜻한다. 소리를 보는 것, 언듯 소리를 어떻게 볼 수 있냐고 하겠지만 , 관세음 보살은 1000개의 눈과 1000개의 손으로 가지고 자신을 부르는 중생들의 어려운 상황을 모두 빠짐없이 지켜 보고 구제해 주신다고 알려졌다. 성철 스님의 게송에서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이 둘이 아님을 표현하신 것 같다. (죽비 빵 따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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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00일 정진,  26일차

<能隨境滅/능수경멸/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境逐能沈/경축능침/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우리나라의 전통 사찰에 가게 되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이 세개가 있다.

문을 *삼문(三門)이라고 한다. 그 삼문의 마지막은 바로 불이문(不二門)이다.

불이문을 통과하기 전에 제일 먼저 통과하는 문이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은 기둥이 하나로 되어 있으며 사찰에 들어설 첫 번째 관문이다.

속세를 떠나 마음을 하나로 모아 깨달음을 향해 들어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금강문 혹은 사천왕문을 지나게 된다.

금강역사와 사천왕은 눈을 부라리며 험상 궂은 모습이지만 가람과 불법을 수호하는 신들이다.

악귀를 몰아내고 청정한 도량을 유지하는 역할로 우리 마음 속의 번뇌나 마장을 몰아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지막 관문이 바로 해탈문이라 불리는 불이문이다.

불이는 둘이 아니다라고 일반적으로 해석한다.

둘이 아니라면 하나인가? 아니다.

둘이 아님은 하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둘이 아니라고 한다면 하나가 아닌가?

 

빛에 비춘 그림자는 나와 하나 인가?

그림자는 그림자이고, 나는 나다.

내가 그림자는 아니다. 또한 그림자가 나는 아니다.

하지만 그림자는 나로 인해 나타났다.

이때 하나라고 수는 없지만 둘이 아니다라고 말할 있다.

둘이 아님은 그런 것이다.

둘이 아님은 명확하게 하나라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둘은 하나의 바탕을 공유한다.

파도와 바다가 둘인가?

부처와 중생이 둘인가?

깨달음과 번뇌는 둘인가?

이때 선에서는 '둘이 아니다(不二)' 라고 답한다.

부처가 들은 연꽃과 가섭이 답한 미소는 둘이 아니다.

 

일심불생(一心不生)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무구(萬法無咎)만법은 허물이 없느니라

 

본래 둘이 아님을 알게 되면 생각이 랄 것도 없어진다.

그러니 만법은 허물이 없게 된다.

 

능수경멸(能隨境滅)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경축능침(境逐能沈)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주관이든 객관이든 결국 이름이 다를 , 그 바탕은 둘이 아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일주문을 지나, 마음 속 번뇌를 다스리면

마침내 모든 과정들이 둘이 아니었음을 되는 .

그곳이 바로 마음의 고향이며, 우리는 그곳을 가람 혹은 절이라고 부른다.

 

 

: 能隨: 능할 , 따를 수: 능함을 따르면, 여기서 능함이란 주관적인 작용을 뜻함.

境滅: 지경 , 멸할 명: 경계가 멸한다 즉, 경계는 객관적인 상태로 여기서는 객관을 뜻함

境逐: 지경 , 쫓을 축 : 경계를 쫓으면, 즉 객관을 쫓게 되면

能沈: 능할 , 잠길 침:  능함이 잠긴다. 즉 주관은 잠긴다.

*삼문(三門): 일주문, 금강문 혹은 천왕문, 불이문을 합쳐서 삼문이라고 한다. 절으로 들어가는 문이라하여 산문(山門)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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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1-24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찰문에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불이문의 정의가 맘에 듭니다.

마힐 2026-01-24 23:37   좋아요 0 | URL
절에 가는 것은 사실 둘이 아님을 깨닫기 위해 가는 거라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편하십니다.
절에 절하러 가는 분도 있지만... ㅎㅎ
그러나 그 절도 부처를 높이 보는 절이 아닌, 절하는 중생과 절 받는 부처가 둘이 아님을 알기 위해서 라면 절이 그냥 절이 아닌 것이 된다고 어느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데요.
잉크냄새님의 불이문은 벌써 열리셨겠지요? ㅎㅎ
 

- 다시, 100일 정진,  25일차

<一心不生/일심불생/ 생각 조차 일어 나지 않으면

萬法無咎/만법무구/만법은 허물이 없느니라> 

 

맑은 하늘에서 연꽃이 나풀 거리며 떨어져 내린다.

부처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손을 뻗어 연꽃의 가지를 살며시 잡았다.

부처는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인 대중을 향해 연꽃을 서서히 들어 보였다.

대중들은 부처가 무슨 말이라도 하실지 기대하며 지켜 보았다.

그러나 부처는 연꽃 잎만 대중을 향해 보일 잠자코 계실 뿐이었다.

대중들의 마음이 살짝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뭐지? 왜 아무 말도 안 하실까?

연꽃의 의미가 뭘까? 왜 우리를 향해 보여주시는 거지?

대중들은 부처가 아무 말 없이 연꽃만 들은 것 만으로도 의아스럽다.

평소와 다르게 침묵만 하시는 부처를 향해 감히 아무도 소리를 수가 없다.

그때 부처의 눈이 가섭존자에게 갔다.

가섭존자는 이미 부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처 역시 가섭을 향해 미소를 짓고 계셨다.

대중은 다시 한번 동요가 일어난다.

마하가섭이 미소를 짓고 있다. 부처 또한 미소를 짓고 계시다.

부처의 미소와 가섭의 미소는 서로 닮았다.

이건 무슨 뜻인가?

이때 침묵 속의 생각들은 부처의 마디로 끊어져 버린다.

오늘 설법은 오직 마하가섭만 이해를 했구나.

 

이유일유(二由一有)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일역막수(一亦莫守)하나 마저도 지키지 말라

 

연꽃을  부처의 손짓에 가섭은 미소로 답했다.

부처와 가섭은 스승과 제자였으나 미소 안에서 스승과 제자는 없었다.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고 이어지는 경지의 이야기다.

누가 먼저 미소를 지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소의 의미는 오직 짓는 사람만 뿐이다.

이제 미소 짓는 사람도 사라진다.

 

일심불생(一心不生)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무구(萬法無咎)만법은 허물이 없느니라

 

본래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는

오직 마음으로 전하는 미소만 흐를 뿐이다.


: 一心:  , 마음 심: 이 구절에서는 하나의 마음 이라기 보다는 생각 맞다 고

不生: 아닐 , 날 생 : 나지 않는다

萬法: 일만 , 법 법 : 만가지 법

無咎: 없을 , 허물 구:  허물이 없다

*염화미소(拈華微笑): 꽃을 들어 보이자 미소로 답하다. 혹은 염화시중(拈花示衆), 즉 대중에게 꽃을 들어 보이다는 뜻으로 선종에서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대표적인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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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24일차

<二由一有/이유일유/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一亦莫守/일역막수/하나 마저도 지키지 말라>

 

디지털 세상에서 존재하는 수는 0 과 1 뿐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를 디지털은 0과 1로 다시 번역하여 소통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지식과 정보가 늘어 수록 디지털에서는 연산 속도와 메모리 저장 능력이 발달할 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그래서 CPU 니 GPU , HBM 같은 용어를 쓰는 반도체 칩들이 기술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디지털은 세상의 거의 모든 영역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일상 생활에서 부터 우주로 뻗는 외장화 영역까지 디지털은 현실 세계와 미래를 잇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아니 이제 디지털이 없이는 세상이 무너질 수도 있는 구조가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하나였다.

하나는 둘이 되었고, 둘은 이제 숫자를 거론하기에 무의미한 확장을 일으킨 것이다.

이제 0과 1이 단순한 숫자인가?


이제 선도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라고 해서 선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선은 단순히 구시대 유물이며 종교적 수행법이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 시대에 선은 더욱 체계화가 되고 의미가 명료해 것이다.

물론 디지털이 마음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처럼 빠른 속도로 비슷하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는 자리는 언어가 필요 없다.

디지털 시대에서 인간의 언어는 이상 필수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은 바로 디지털 시대의 언어처럼 보다 빨리, 그리고 수 많은 정보를 한 순간에 전달시킨다.

순간 마음으로 우리는 태양계를 넘어 우주 바퀴를 돌고 있을 있다.

다만 그것을 현실로 체감하지 못할 뿐이다.

본마음 자리를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마음 자리에 어떤 시비의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재유시비(纔有是非)잠시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분연실심(紛然失心)어지러히 본마음을 잃으리라

이유일유(二由一有)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일역막수(一亦莫守)하나 마저도 지키지 말라

 

본마음이 하나라면 현상은 둘이 있고 이상도 있다.

하지만 본래 하나마저도 붙잡지 말아야 한다.

붙잡음 조차 집착이 되기 때문이다.

디지털에서 0과 1를 빠르게 놓고 가듯이 우리 마음도 하나라도 붙잡아서는 안된다.

뜻을 머리로 이해해서는 절대 없다.

그저 알고자 하는 마음조차 생각을 일으키면 안되기 때문이다.


: 二由:  , 말미암을 유: 둘은 ~로 말미암아

一有: 하나 , 있을 유 : 하나로 있다.

一亦: 하나 , 또 역 : 한 가지 또한

莫守: 없을 , 지킬 수:  지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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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계 -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동서고금의 통합적 접근
켄 윌버 지음, 김철수 옮김 / 정신세계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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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차: 각자도생에서 각자각성의 시대로

 

1969년, 인류는 드디어 달에 발을 디뎠다.

인류가 지구라는 조그만 행성에서 벗어나 하늘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달에 것이다.

동서양을 떠나 인류에게 달은 문장 하나로 표현 있는 곳이 아니다.

신화의 세계에서 부터 현실 사회에 이르기 까지 달은 우리의 상상과 물리적 현실을 동시에 관련 곳이다. 어쩌면 인간의 달 상륙은 우리 인류의 사고와 물리적 영향력을 지구 행성에서 우주로 확장 시킨 최초의 사건이다.

상륙을 이루어낸 국가 미국은 지구상의 다른 국가를 앞도하며 기술의 정점에서 물질적으로는 세계 최강이었다. 그렇게 미국은 인류의 오랜 신화 속 주인공 달의 여신을 찾으러 떠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당시 미국은 달에 상륙한 기세로 이제 곧 우주의 모든 행성을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은 지구의 중심이었고 스스로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처했다.

마치 헐리 블록버스터 영화의 아이언 맨이었다.

 

하지만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미국이 흔들리기 시작 했다.

70년대 초기, 중국과 수교를 하며 냉전을 종식시키고 이념보다 전략을 선택했다.

하지만 닉슨대통령의 워터 게이터 사건으로 사람들은 점차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트남전 같은 명분 없는 전쟁에서 세계 경찰의 피로도는 극도로 쌓이게 되었다.

또한 경제에서는 금본위제가 종료되어 달러가 더이상 고정환율이 되지 못했다.

오일 쇼크와 스태크플레이션으로 경제는 항상 성장한다는 이론이 이상 작동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점차 기존 가치관에 대한 불신이 쌓였고, 물질과 기술의 발전에서 간극을 보였던 정신적 성장을 추구하기 시작 했다.

사람들은 이상 “잘 사는 법”이 아니라 “왜 사는가”를 묻기 시작했다.

 

동양이 ‘대안’으로 보이던 순간, 이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동양으로 향했다.

요가, 선, 명상, 불교는 종교라기보다 의식의 기술로서 동양 사상을 대안으로 삼기 시작했다.

흐름의 한가운데에 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스즈키 다이세쓰(1870~1966) 선사는  ‘Zen’이라는 단어를 서구 지성계에 정착시킨 일본인 승려로 미국 사회에 선을 철학이자 체험의 언어로 번역했다.

그의 제자 스즈키 순류(1904~1971)는<선심초심> 을 통해 수행을 “대단한 경지”가 아니라 “초심을 잃지 않는 삶의 태도”로 보여주었다.  그는 스티브 잡스의 정신적 스승이기도 하다.

한국의 숭산 스님(1927~2004)은 197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 선불교를 본격적으로 전한 선사이다.

“오직 모를 뿐 (Don’t know mind)” 이라는 한마디로 미국의 젊은이들의 머리를 정면으로 흔들었다.

홍콩 배우 이소룡(브루스 리1940~1973) 은 영화와 무술에서 미국을 매료 시켰다. 미국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 “Be water” 라는 말 하나로 선의 감각을 몸으로 증명해 보였다.

이때 부터 동양인은 이상 ‘신비한 타자’가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철학이 되었다.

이후 스티브 잡스(1955~2011)는  젠(Zen)과 명상을 통해 기술과 미학, 직관을 결합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기술은 의식의 확장”임을 산업 세계에서 실험한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인물들이 시대에 겹쳤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윌버는 <무경계>를 세상에 내 놓았다.

그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동서양의 언어를 하나의 지도 위에 펼쳐 보이려 했다.

윌버가 『의식의 스펙트럼』을 발표한 것은 1977년, 그의 나이 23세였다.

윌버는 시대의 신세대 ‘의식의 지도 제작자’였다

그는 불교, 심리학, 철학, 영성, 과학. 각기 다른 언어들이 가리키는 방향이 사실은 어긋나 있지 않다는 것을 ‘이론’이라는 형태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깨달음의 체험이라기보다 깨달음들이 놓인 지형도에 가깝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사상의 통합 시도는 개인의 천재성만으로는 설명 없는 지도를 그리게 만든 시대의 절박함이 크게 보인다.

그리고 동시에 지도의 한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아무리 정교한 지도라도 걷는 발걸음을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불교는 믿음 보다 체험을 중시 한다.

오직 깨쳐야 뿐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의 시기를 각자도생(各自圖生) 시대라고 한다.

수록 어려운 상황에서 각자 스스로 생존을 꾀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각자각성(各自覺醒) 시대를 준비해야 된다고 본다.

각자 스스로가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야 나아가 각자공생(覺者共生) 시대가 완성 되기를 희망한다.

다시 말해서 깨달은 자들이 모두 함께 어울려 살게 되는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 전체의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 것이 되며, 바로 그것이 불국토가 이 땅에서 현실로 되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달을 정복하고 화성에 텔레포트하는 현실에서 불국토가 웬말인가 싶겠지만 ...

물론 지금 현실에서는 너무나 요원해 보인다.

일론머스크가 우주로 확장에 희망을 걸었듯, 나는 불국토 건설에 조금이라도 희망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5일간의 무경계의 사유의 여정을 마치겠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이 이제는 나를 벗어나 스스로 사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2년 전, 나의 독후감에 대해 단 한 사람만이 좋아요 눌러 주셨다.

아마도 분의 좋아요 없었다면 그때 이미 나는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글은 그분에게 감사함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지금은 나의 엉성한 사유를 읽고 좋아요’ 를 눌러 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

그래서 친구로 인연을 맺은 블로그님들 한 분, 한 분께 더욱 감사하다.


우리는 이미 공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에게 마침표는 아직 없다.  

오직 쉼표만 채워지고 있는 중이다.

No Boundary.

본래 경계는 없다.

사유는 계속 된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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