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31일차

<大道體寬/대도체관/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無易無難/무이무난/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도다>

 

선종(禪宗)에는 혹독한 수행법 가운데 무문관(無門關) 수행이란 불리는 길이 있다.

수행자가 사방이 벽으로 막힌 방에 들어가면 밖에서 문을 자물쇠로 걸어 잠가 버린다.

정확히 다시 말하면 문을 없애 버린다.

무문관에 들어간 수행자는 근기에 따라 달에서 수년까지 문없는 방에서 정진을 한다.

오직 무문의 관문을 통과할 까지 수행자는 목숨을 놓을 각오로 용맹정진하는 수행이다.

혹독한 수행의 목적은 오직 하나.

깨닫기 위해서다.

무엇을?

도(道).

그러나 수행을 한다고 반드시 도를 깨닫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순간에도 소수의 수행자들은 무문관에서 수행 중이다.

그들은 대체 지독한 수행을 하는 것일까.

 

<대도무문(大道無門)  도에는 문이 없다. 다만 천차유로(千差有路) 천 개의 다른 길이 있.

투득차관(透得此關) 이 관문을 꿰뚫을 수 있다면 , 건곤독보(乾坤獨步) : 하늘과 땅을 홀로 걸으리.>

 도는 문이 없다고 하는데 길은 개나 있을까.

도와 길은 서로 다른 것인가.

길이 도라면 수행자는 문을 없애서 길마저 끊어 버리는가.

모순처럼 보이는 질문, 이 수수께기가 곧 화두이다.

대도는 문이 없는데 길은 갈래로 나뉘는가?

 

대도체관(大道體寬)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무이무난(無易無難)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도다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도를 알기 위해 수행자는 다시 무문으로 들어간다.

이제부터는 말의 영역이 아니다.

설명도 이해도 이상 소용이 없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 없는 문으로 직접 들어가야 한다.

하늘과 땅을 홀로 걷는 날을 기리며.

 

 

 

 

: 大道:  , 길 도: 

體寬:  , 넓을 관:  본체가 넓음

無易:없을 , 쉬울 이 : 쉬움이 없다. 즉, 쉽지 않다.

無難: 없을 , 어려울 난:  어려움이 없다. 즉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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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30일차

<不見精麤/불견정추/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寧有偏黨/영유편당/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중도(中道)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

그러나 중도는 종종 양극단의 중간 지점으로 오해된다.

중도는 위치가 아니다.

중도는 지점이 아니라 무게에 가깝다.

중도는 양극단의 중심을 고정하는 점이 아니라, 양극단이 흔들릴 때마다 균형을 다시 맞추는 추에 가깝다.

그러나 무게의 추는 고정되지 않는다.

양극단의 무게가 달라지면, 중도의 자리 또한 함께  이동한다.

양극단은 고정되지 않으며 중도 역시 고정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중도란 변화하는 양극단의 무게에 따라 그때그때 평형을 이루는 자리다.

지점에서 중도에 대한 오해가 생긴다.

중도는 중간이 아니다.

중도는 양극단 사이의 절충점이 아니라, 양극단 모두를 넘어뜨리지 않기 위해 감당하는 무게다.

그래서 중도는 어렵다.

공이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을 모두 포함하듯, 중도 또한 양극단 어느 한쪽을 버리지 않고 양쪽을 모두 감당한다.

 

일공동양(一空同兩)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제함만상(齊含萬像) 삼라만상을 함께 포함하며

불견정추(不見精麤)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영유편당(寧有偏黨)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사람들은 중도를 서라  하지 않고, 지켜라  말했다.

이는 중도가 있을 있는 지점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하는 자리였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에게 생존은 본능이다.

살기 위해 우리 조상들은 진화를 거쳐 왔고 결과 사회적 동물이 되었다.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못하면 생존할 없었기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편을 가른다.

편과 , 속해야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능이 양극단을 만들고 결과 중도의 자리는 본래부터 존재하기 어렵다.

그러나 양극단의 끝은 공멸( )이다.

공멸을 경험하고도 살아 남은 소수의 인간들은 공멸하지 않는 도리를 찾아낸다.

그것이 중도다.

그래서 중도는 자연스런 선택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야 하는 자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중도는 소수에 속하기에 여전히 양극단에 가려진다.

만약 그렇다면 중도 또한 하나의 생존 본능의 변형이 아닐까.

공멸이 아닌 공생(共生) 위해서 우리에게 중도가 필요하다면,

깨달음 이전에 먼저 살아남는 길이 있어야 한다.

오늘도 중도는 조용히 무거워지고 있다.

 

: 不見: 아닐 , 볼 견: 보지 못함.

精麤: 세밀할 , 거칠 추:  세밀하고 거칠다. 거칠 추() 사슴 (鹿)이 3개가 합쳐진 글자다. 사슴은 놀라면 쉽게 날뛴다. 즉 사슴 세 마리가 놀라서 거칠게 뛰는 것이 연상 된다. 현대 중국어 에서는 粗(:) 로 쓴다.

寧有: 어찌 , 있을 유: 어찌 ~있겠는가.

偏黨: 치우칠 , 무리 당:  무리가 있으니 치우침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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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1-28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도를 ‘서라‘ 고 하지 않고, ‘지켜라‘ 고 말했다.
空,常 ...의 자리도 비슷하지 않나 싶군요.

마힐 2026-01-29 00:43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중도도, 공도, 상도 서 있는 자리가 아니라 인연과 조건에 따라 드러날 뿐,
서로 고정됨이 없이 흐른다는 점에서 같은 결인 것 같아요.
역시 잉크냄새님의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_()_
 

- 다시, 100일 정진,  29일차

<一空同兩/일공동양/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齊含萬像/제함만상/삼라만상을 함께 포함하며>

 

우리는 보통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혹독한 고행과 수행을 통해야만 얻을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행위와 깨달음은 어쩌면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향엄스님이 무심코 던진 돌멩이가 대나무 가지에 맞아  하고 소리가 났다.

소리는 향엄스님이 그동안 품었던 의심 덩어리를 완전히 녹여 버렸다.

그럼 깨달음은 어디서 것일까?

마당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깨우쳐 것인가?

아니면 때마침 향엄스님 뒤에 있던 대나무가 깨우치게 것인가?

만약에 돌멩이가 눈에 띄지 않았다면?

돌멩이를 던졌는데 뒤에 대나무가 없었거나, 대나무에 맞지 않았다면.

향엄 스님은 과연 깨달을 있었을까?

스님의 깨달음에는 돌멩이, 던지기, 대나무, 맟추기, 그리고 딱 소리가 나기까지 모든 조건이 하나도 빠짐없이 있어야 했다.

이것을 불교에선 *시절인연(時節因緣) 무르 익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깨달음의 시절 인연은 사람마다 같지 않다.

 

6조 혜능은 나무꾼 시절, 이웃의 금강경 독송 소리에 깨우침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사명대사의 스승인 서산대사휴정(西⼭⼤師休靜 1520 - 1604)은 새벽 닭이 우는 소리에 깨우침을 얻었다고 하며 구한말 경허 선사(鏡虛禪師, 1846~1912) 소의 코에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  소리에 깨우쳤다고 한다.

독경소리, 닭 울음 소리, 지나가는 말 소리에 깨달음을 얻었다니...

어쩌면 깨달음은 알고자 수록 더욱 없는 것이 아닐까.

 

욕지양단(欲知兩段) 양단을 알고자 할 진대

원시일공(元是一空) 원래 하나의 공이어라

일공동양(一空同兩)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제함만상(齊含萬像) 삼라만상을 함께 포함하며

 

깨달음은 어느 하나 고정되어 없는 성질의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 안에는 세상 만물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보고, 듣고, 말하는 그 가운데 분명 소위 깨달음 이라는 것이 숨어 있는 듯 하다.

깨달음이란 내가 얻으려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깨달음은 다가오는 것이다.

깨달음은 드러나는 것이다.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쉬어야 한다.

밖으로 구하는 마음을 나도 모르게 한번 쉬게 되는 .

시절인연이란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시절인연은 그렇게 만들어 진다.


: 一空: 하나 , 빌 공: 하나의 , 즉 근본 자리를 뜻함

同兩: 같을 , 둘 양:  양극단이 같다.

齊含: 모두 , 머금을 함: 모두 다 같이 머금고, 즉 모두 포함한다.

萬像: 일만 , 형상 상:  만 가지 형상, 즉 만물만상을 뜻함

*시절인연(時節因緣): 특정한 시기와 상황에 맞추어 이루어지는 특별한 인연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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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1-27 1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절인연‘은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인간관계가 복잡하고 어려워질수록 깊이 되새겨 봐야 할 말입니다.
두보가 봄 밤에 들었던 빗소리도 시절인연의 한 모습일 수 있을까요?

마힐 2026-01-28 01:07   좋아요 1 | URL
두보의 <春夜喜雨> 시의 구절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좋은 비는 시절을 알고 내리지만,
그 비를 알아차리는 것 또한 인연이겠지요.

두보가 봄밤에 들은 빗소리도
결국은 지나고 나서야
‘아, 그게 시절이었구나’ 하고 알게 된 것이 아닐까요.

시절인연은
늘 그 순간에는 소리로만 오고,
뒤늦게 의미가 됩니다.
 

- 다시, 100일 정진,  28일차

<欲知兩段/욕지양단/양단을 알고자 할 진대

元是一空/원시일공/원래 하나의 공이어라>

 

그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 대해 일러보시오.

질문을 받은 스님은 총명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무척 당황한 모습이었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父母未生前) 지녔던 나의 모습(本來面目) 어떻게 안단 말인가.

지금 내가 어머니 속에서 있던 10달 기간도 기억이 없는데, 태어나기 전을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젊은 스님은 도무지 답을 길이 없었다.

스님, 도무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스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니오, 그건 그대 자신이 풀어야 하오. 내가 만약 답을 알려 준다면 그건 그대의 답이 아니게 되오.

젊은 스님은 낙담한 나머지, 결국 스승인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 스님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유랑길에 오른다.

도대체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을 어찌 있단 말인가.

아무리 책을 찾아봐도, 부처님 앞에서 기도를 해도 그 답은 모르겠다.

총명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했던 젊은 스님, 향엄은 커다란 절망감을 앉게 되었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 이 구절은 향엄에게 화두가 되어 가슴에 박힌다.

 

능수경멸(能隨境滅)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경축능침(境逐能沈)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경유능경(能境)객관은 주관을 말미암아 개관이요

능유경능(境能)주관은 객관을 말미암아 주관이다

 

무엇이 주관이고 무엇이 객관인가.

향엄의 머리 속은 화두가 떠나질 않는다. .

부모에게서 태어 나기 , 나는 어디에 있었나.

그럼 부모가 나기 전에는, 나는 어디에 있었나.

나와 부모는 어떤 관계인가.

주관과 객관은 서로 다른 것인가?

길을 가면서도, 누군가를 만나면서도, 공양을 하면서도, 예불을 모시면 서도.

심지어는 잠을 자면서도 화두는 향엄에게 달라 붙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암자에 들렀는데 무척이나 낡았다.

암자를 깨끗하게 치우기로 마음 먹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싸리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는데 돌맹이가 눈에 거슬린다.

무심코 돌을 집어 들어 마당 뒤쪽 대나무 숲으로 던졌다.

던져진 돌맹이는 어느 대나무 가지에 부딪혔다.

 소리가 들렸다.

순간, 딱 소리에 향엄의 전신은 전율을 느꼈다.

향엄에게 붙어있던 의심의 덩어리가 소리에 떨어져 나가 버린 것이다.

 

향엄은 이때, 부모의 몸을 빌려 내가 나기 전의 참 모습을, 그 순간 맞이 했다.

알고자 부림 쳤던 부모미생전의 본래면목이 드디어 드러난 것이었다.

 

욕지양단(欲知兩段) 양단을 알고자 할 진대

원시일공(元是一空) 원래 하나의 공이어라

 

내가 태어 나기 전과 내가 태어난 , 나의 본래 면목은 달라졌는가.

본래 라고 부르는 것이 따로 있었던가.

향엄지한(香嚴智閑, ?~898)  순간을 이렇게 남겼다.

 

한번 던져 부딪히는 소리에 아는 전부 잊었다.

다시 닦고 수행하며 지킬 것도 없도다. <오도송 중에서>

 

보이는 만물이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가 묘음이라.

깨달음은 보이는 , 들리는 것 밖에 있지 않다.

그대여,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맞는가?


: 欲知: 바랄 , 알 지: ~ 알고자 하다

兩段:  , 조각 단:  양단 즉 양 끝단을 뜻하므로 양면이라 해도 무방.

元是: 으뜸 , 바를 시: 원은 최초, 처음 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원래라는 뜻으로 쓰임. 즉 원래~ 하다

一空:  , 빌 공:  하나의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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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27일차

<能境/경유능경/객관은 주관을 말미암아 객관이요

境能/능유경능/주관은 객관을 말미암아 주관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너무나 유명한 게송이다.

그러나 처음 듣는 이들이라면 번쯤은 의구심을 가질 하다.

당연히 산은 산이지, 산이 물이겠는가.

이게 유명한 구절인지 의아스럽다.

그런데 이걸 대중에게 각인 시키신 분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선사인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이기 때문이다.

성철스님 하면 바로 연상되는 게송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곧바로 연상 될 정도로 지금은 상징이 되어 버렸다.

원래 게송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時會大衆) 알겠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게송은 1981, 성철 스님이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고 난 후 내놓은 게송으로 알려졌다.

깨달음은 본래 둥글게 널리 비추고 있고, 고요함과 멸함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보이는 만물이 관음 보살이고, 들리는 소리가 묘음 보살이라.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진리인데, 세상 사람들은 그걸 아느냐  물으신 것이다.

그리고는 바로 답을 주셨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후 사람들은 앞의 게송은 모두 잊고,  마지막 게송만 기억에 남게 된 것이다.

 

능수경멸(能隨境滅)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경축능침(境逐能沈)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경유능경(能境)객관은 주관을 말미암아 객관이요

능유경능(境能)주관은 객관을 말미암아 주관이다

 

본래 깨달음이란 혹은 진리는 멀리 있지 않은 곳에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고 하신 것이다.

둘이 아닌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보아도 보지 못한 것이 되고

들어도 듣지 못한 것이 된다.

산이 산이 아닌 도리, 물이 물이 아닌 도리와 산이 산인 도리, 물이 물인 도리가 모두 다른 것인가?

보고 듣는 가운데 도리를 참구해야 한다.

성철 스님의 장군 죽비 소리가 어깨로 떨어진다.

 

: : 지경 , 말미암을 유: 객관은 (주관을) 말미암아

能境: 능할 , 지경 경: 객관이 되다.

: 능할 , 말미암을 유 : 주관은 (객관을) 말미암아

境能: 지경 , 능할 능:  객관이 되다.

*관음(觀音): 관세음 보살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관세음 보살이란 뜻도 있지만 본래 관이란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음이란 소리를 뜻한다. 소리를 보는 것, 언듯 소리를 어떻게 볼 수 있냐고 하겠지만 , 관세음 보살은 1000개의 눈과 1000개의 손으로 가지고 자신을 부르는 중생들의 어려운 상황을 모두 빠짐없이 지켜 보고 구제해 주신다고 알려졌다. 성철 스님의 게송에서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이 둘이 아님을 표현하신 것 같다. (죽비 빵 따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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