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12일차


<止動歸止/지동귀지 /움직임을 그치고 그침에 돌아가면

止更彌動 /지갱미진/그침이 다시 움직임이 되나니>

 

<이솝우화>에 여우는 포도나무에 매달린 포도를 보고 따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여우는 어떤 방법으로도 포도를 없었다.

그러자 여우는 포도 나무를 향해 마디 뱉는다.

포도는 분명히 아주 실꺼야.

 

<삼국지>의 조조는 행군 중에 물이 떨어져 병사들의 갈증은 극에 달했다.

그때 조조는 꾀를 내었다.

바로 앞에 매실 나무 숲이 보인다.

매실은 아주 시고도 달아 우리 목을 축이기에 충분하니 모두 참고 힘내라.

말에 병사들은 매실의 신맛을 생각하니 안에 침이 돌아 갈증을 잊었다.

 

포도와 매실

생각만 해도 입안에 신맛이 돌아 침이 생긴다.

여우는 포도를 먹지도 못했고, 조조의 병사들은 매실을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신맛을 느꼈다.

포도와 매실은 단지 이름일 뿐인데 그들은 신맛 이라는 관념에 빠지게 되었다.

관념이  우리의 의식에 굳어지게 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이제부터는 쉽게 떼어 버릴 수가 없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고정관념과 습에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살아간다.

 

일종평회(一種平懷)  가지를 바로 지니면

민연자진(泯然自津) 사라져 저절로 하리다

분별심, 간택심, 취사심이란 것도 사실은 이름에 지나지 않는가.

우리는 본체는 얻지 못하고 단지 이름에 걸려서 관념과 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

깨달음이나  역시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데 우리는 이름 걸렸다.

진정한 깨달음과 도는 이름에 있지 않다.

이름에 걸리지 않고 그저 본질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 여여함이라.

여여한 마음 앞에 어떤 관습과 관념도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지동귀지(止動歸止) 움직임을 그치고 그침에 돌아가면

지갱미진(止更彌動) 그침이 다시 움직임이 되나니

 

관념과 습이 사라진 자리에 모든 움직임은 그친다.

그러나 정지(停止) 끝이 아니다.

다시 움직인다. 그러나 움직이는 것도 사실 시작은 아니다.

움직이거나 정지하거나 하는 현상일 뿐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움직이는 자리이든, 그치는 자리이든 중요한 것은 거기에 관여하지 않는 것은 오직 근본 마음 뿐이다.

성품은 보이는 형상에, 들리는 소리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신맛이진 짠맛인지, 단맛인지는 맛을 봐야 함에도 남의 말이나 글에도 걸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 이름과 습관 같은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어떤 관습과 관념 그리고 이름에 걸리지도 말고,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 올라오는 생각들을 잠시 내려 놓자.

이제부터는 어떤 것에도 걸리지 말고, 관여하지 말고, 올라오는 그 자리에 다시 되돌릴 뿐이다.  

 

 

:止動: 그칠 , 움직일 동 : 움직임을 그쳐

歸止: 돌아갈 , 그칠 지: 그침으로 돌아가다

止更: 그칠 , 다시 갱: 다시 그치는 것이

彌動:두루 , 움직일 동:  두루 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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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11일차

<一種平懷/일종평회 /한가지를 바로 지니면

泯然自津 /민연자진/사라져 저절로 하리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간단하지 않다.

세간이냐, 출세간이냐, 본성이냐, 본능이냐, 창조이냐, 진화냐, 돈오냐, 돈수냐 같은 질문 구조로 우리는 구분을 단순화시킨다.

보다 빠르고 쉽게 판단하고 선택하기 위해서 이다.

그것이 우리가 여태 살아왔던 생각의 패턴이며 그것이 우리의 삶을 주도해왔다.

복잡한 것은 싫다. 단순한 게 좋다.

그래서 대상에 대한 질문을 최대한 단순하게 구별했다.

그러나 실제 삶은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질문의 구조는 단순하지만 선택하는 결정은 결코 쉽지 않다.

취하고 버린다는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여하지 못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양유취사(良由取捨) 취하고 버림을 말미암아

소이불여(所以不如) 그래서 여여치 못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신심명을 통해 여여함에 이르는 길을 발견했다.

그건 오직 간택하고 분별하고, 취하고 버리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에 걸리지 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본성과 본능이 따로 구분 되어진 것이 아니며

창조와 진화가 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돈오와 돈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순이 모순이 아니라 우리의 어떤 선택에도 걸리지 말라는 것이다.

본능은 본능대로 인정하고

본성은 본성대로 인정하며

창조와 진화가 둘이 아님을 들여다 보고

돈오와 돈수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라는 것이다.

구분이란 방편이고, 분별 또한 과정이다.

우리는 과정을 결론으로 오해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세상의 실체를 여전히 잘못 보는 것이 아닐까?

 

일종평회(一種平懷)  가지를 바로 지니면

민연자진(泯然自津) 사라져 저절로 하리다

 

가지란 여여(如如)한 마음자리를 뜻한다.

여여함에 이르면 구속 되는 것이 사라지는데 어찌 걸릴 것이 있을까?

분별함에도 걸리지 말고, 아는 것 모르다는 것에도 걸리지 않는 마음.

그것이 여여함이다

여여함이 전부가 되는데 그 외에는 전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이제 승찬스님이 본래 그물을 치지도 않았음을 알기에 이르렀다.

 

:一種:  , 씨 종 : 한 가지 씨

平懷: 평평할 , 품을 회: 평등하게 품다. 평등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담담한 마음을 내는 것이 아닐까?

泯然: 망할 , 그러할 연: ~ 그러하게 없어진다.

自津:스스로 , 다할 진:  스스로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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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8 20: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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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9 00: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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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10일차

<莫逐有緣/막출유연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勿住空忍 /물주공인/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어제 인간의 진화는 본능이 주도했는지, 아니면 본성이 주도 했는지 질문을 삼았다.

이제 그럼 과연 세상은 창조가 먼저 일까 아니면 진화가 먼저 일까?

이것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와 같은 구조의 문제가 아닐까?

또한 *돈오(頓悟) 점수(漸修) 논쟁도 이와 같다.

심신명은 이러한 구조에 대해 취하고 버리는 취사심과 간택심, 분별심으로 답하고 있다.

창조론과 진화론 어느 것이 맞냐, 틀리냐의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양유취사(良由取捨) 취하고 버림을 말미암아

소이불여(所以不如) 그래서 여여치 못하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

여여(如如) 마음을 얻기 위해서 취하고 버리는 간택심, 취사심, 분별심이 옳은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이 망설여진다면 결국 여여하지 못한 것이다.

옳다, 그르다  메여서는 마디도 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막출유연(莫逐有緣)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물주공인(勿住空忍)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모든 생명의 시작은 창조이면서 진화가 아닐까?

0과 1이 인공지능의 시작이며 진화인 것과 같은 도리다.

단박에 얻는 깨달음과 점진적 깨달음이 서로 다른 것인가?

무상하고 덧없는 , 깨달음을 통해 구원을 얻어야 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깨닫기 위해 속세를 벗어 나는 것이 바른 것인가?

깨달음이나 도를 얻기 위해서 세속의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하는 것인가?

반대로 먹고 살기도 팍팍한데 무슨 도며 깨달음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럼 물질적인 부의 축척과 명예를 얻는 것만이 세속의 성공인가?

*세간(世間) 출세간(出世間) 서로 다른 것인가?

신심명은 여전히 분별심, 간택심, 취사심의 변주(變奏) 들려주고 있다.

어느 것이 맞다고 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또 다른 그릇된 견해를 가지게 된다.

옴짝 달싹 못하게 하는 그물을 다신 , 승찬대사는 우리를 옭아매고 있다.

과연 어떻게 해야 빠져 나올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답은 과연 있기나 건가?

 

:莫逐: 없을 , 쫓을 축 : ~말미 암아

有緣: 있을 , 인연 연: 취하고 버림을 .

勿住:  , 머무를 주: ~ 에 머무르지 말라

空忍: , 참을 인:  공한 상태에 머물고자 안간 힘을 쓰며 참는 것. 즉 공함에 집착하는 것을 뜻함.

*頓悟: 단번에 , 깨달을 오, 漸修: 서서히 , 닦을 수: 깨달음에 대한 논쟁에 쓰이는 방식, 단박에 깨닫는가? 점차적으로 수행을 통해 깨닫는냐에 대한 논쟁에 빠지지 않는다.

*世間:세상 , 사이 간, 出世間: 나갈 , 세상 세, 사이 : 세간은 유위법 혹은 물직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 세상을 뜻하고, 출세간은 물질계가 아닌 무위법 즉 정신세계를 살아가는 세상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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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9일차

<良由取捨 /양유취사/취하고 버림을 말미암아

所以不如/소이불여/그래서 여여치 못하다>

 

虛心者福矣, 허심자는 복의라.

마음이 허함은 가난함이 아니요. 오히려 충만한 믿음의 밭이라.

믿음의 밭이 충만한 , 하늘 복이 영글어 지리니

복이란, 물질적인 행운이 아닌, 영생(永生) 얻음이라.

 

본래 (道) 나고 죽음도 없는 불생불사(不生不死)라고 한다.

영생이란 것도 남이 없으니(不生) 죽을 것도 없음(不死) 영생(永生)이라 것이다.

원동태허(圓同太虛) 둥글기가  허공과 같아

무흠무여(無欠無餘)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이를 믿고 따르는 신심자(信心 바로 허심자(虛心者) 아닐까?

신심명과 마태 복음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양유취사(良由取捨) 취하고 버림을 말미암아

소이불여(所以不如)그래서 여여치 못하다

취하고 버리는 취사심(取捨), 골라서 선택하는 간택심揀擇心), 구분하고 의심하는 분별심(分别心)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구분 짓고, 단정하고, 의심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분별하는 마음의 지배를 받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별, 취사, 간택하는 마음이 없다면 인류가 지금까지 진화를 거듭하며 생존 해왔을 수 있었을까?

원시시대부터 우리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조그만 흔적에도 긴장하고 놀라며 투쟁해왔다.

그것으로 생존해 왔고 당연히 우리의 뇌구조를 비롯한 몸의 기능까지 진화해 셈이다.

그러나 마음 또한 그렇게 진화해 왔을까?

마음은 뇌하고는 다른 진화의 여정이 아니었을까?

 

어느 순간 우리의 마음은 본능이 아닌 또한 분명 이성도 아닌 영역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여여한 자리가 마음의 본성이란 것을 마침내 알아낸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와 몸의 구속에서 벗어난 마음이란 다른 영역을 밝힌 .

사람이 바로 붓다였다.

그리고 그가 밝힌 마음의 불은 꺼지지 않고 시대를 거듭하며 아주 소수의 믿는 자들에 의해 전등(傳燈)되어져 왔다.

승찬대사가 전하는 신심명 또한 꺼지지 않는 불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본능과 본성이 엄연히 다르지만 또한 분별할 것인가?

본능(本能) 본성(本性), 어느 것이 진화의 주역일까?

 

*여여(如如) 마음 자리만 뿐이다.

:良由: 어질 , 말미 암을 유 : ~말미 암아

取捨: 취할 , 버릴 사: 취하고 버림을 .

所以:  , 써 이: ~ 까닭에 , 현대 중국어에서는 그래서 라는 뜻으로 쓰인다.

不如:아닐 , 같을 여:  같지 않다. 즉 여여(如如)하지 못하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만 못하다 라는 뜻으로 쓰인다.

*如如: 같을 , 같을 여: 같고 같다는 한결 같다는 뜻이 된다. 모든 것은 고정됨이 없이 변하는데 늘 한결 같다면 그것이 진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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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8일차

<圓同太虛 /원동태허/둥글기가  허공과 같아

無欠無餘/무흠무여/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고요함에 집착하면 현지(玄旨) 영원히 길이 없어진다.

즉심즉불(卽心卽佛) 이든,  비심비불(非心非佛) 이든

마음이 바로 부처이든,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든, 마조가 했던 말이든 , 법상이 했던 말이든

이제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불식현지(不識玄旨),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도로염정(徒勞念靜), 공연히 고요한 생각만 하는구나.

 

이제 도를 닦는 곳이 고요한 속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

안의 마음이 시끄럽다면 어떤 고요한 환경도 소용이 없다.

소음으로 넘치는 대중교통 속에서, 분주한 마트 안에서, 아이들의 울음 소리 속에서, 아내의 끊임없는 잔소리 속에서, 그리고 내 안의 멈출줄 모르는 소리 속에서도 걸리지 않는다.

어디에서든 걸리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수레를 끌려면 수레를 치는 것이 아니라 소를 쳐야 되기 때문이다.

안의 소에 코뚜레를 꿰어 끌고 가리라.

 

虛心者福矣(허심자복의).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의 한문 성경에서는 허심자복의 라로 쓴다.

허심(虛心) 이란 마음 아니고, 마음이 가난한   더욱 아니다.

()는 단순히 비어 있음이 아니다.

반야심경의 (空) 마찬가지로 단순히 비어 있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허와 공은 눈으로 없는 작용의 상징이다.

공이 고정됨이 없는 작용을 상징하는 기호라면, 허 역시 고정되지 않는 틀을 상징하는 기호였던 것이다.

(道) 도리를 표현할 길이 없어서 기호를 썼을 뿐이다.

만약 도를 눈으로 있다고 가정한다면

둥근 원의 모양이 가장 적합할 것이고 크기가 너무나 크다고 가정한 것이다.

그게 실제 도는 전혀 아니지만, 도를 알지 못하는 범부(凡夫)에게 표현할 길이 그와 같이 밖에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원은 360도로 그 어디에도 모자라거나 남음이 없는 완벽한 체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원동태허(圓同太虛) 둥글기가  허공과 같아

무흠무여(無欠無餘)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마음이 가난한 , 허심자(虛心者) 바로 道心(도의 마음 가진자다.

허심자는 마음이 물질적으로 가난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틀에도 고정되지 않는 마음을 지닌자.

그자가 바로 허심자 이다.

허심자에게 모자란 것이 있을 있겠는가?

허심자에게 남는 것이 있을 있겠는가?

너무나 완벽한 마음 자리에 넘치고 모자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신심명의 구절과 마태복음의 구절, 서로 다른 종교, 다른 배경이지만 같은 도리를 나타냈다고 보는 것은 나만의 비약일까?



:圓同: 둥글 , 같을 동 : 둥글기가 ~와 같다.  둥글다는 마음 자리, 깨달음, 도를 상징한다.

太虛:  , 빌 허: 태허는 단순히 크게 비어있다 뜻보다 깊다. 비어있으면서 크다. 비어 있기에 걸림이 없다.

無欠: 없을 , 하품 흠: 흠이 없음이란 영어의 perfet와 같다. 원래 ()은 하품하다와 빚을 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빚을 진 상태가 흠이란 것이다. 현대 중국어에서 欠(qian 치엔)은 빚지다 쓰인다.

無餘:없을 , 남을 여:  남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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