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23일차

<纔有是非/재유시비/잠시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紛然失心/분연실심/어지러히 본마음을 잃으리라> 

 

세상의 종교는 믿음을 근본으로 한다.

누군가 종교가 있다고 한다면 종교를 믿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또한 각각의 종교를 상징하는 혹은 인물을 믿는다고 것이다.

어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어떤 이는 예수를 믿으며, 어떤 이는 부처를 믿는다고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알라를 믿는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믿음이다.

종교를 믿는 이유는 각각의 종교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이유도 다르다.

누군가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누군가는 죽어서 천당에 가기 위해서, 누군가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종교가 없는 이유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종교가 없는 무교 또한 자신의 신념을 믿는 셈이다.

그래서 무교 또한 종교의 방식이 된다. 신념을 믿는 셈이니까.

과연 우리는 종교를 믿는 이유가 자신의 무엇을 위해서 믿는 것인가.

그런데 만약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이 든다면.

마치 스스로 죄를 지은 처럼 여길 것이다.

종교에서 의심은 죄악에 가깝다고 여긴다.

과연 그럴까?

 

()에서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는 믿음의 자리가 아니다.

선은 깨닫기 위해 믿음 보다 화두에 대한 의심이 먼저다.

선은 불교의 수행 전통에 있지만, 믿음을 요구한 교리 체계 이전에 체험을 요구한다.

따라서 선에서의 의심은 죄악이 아니다.

오히려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의심은 깨달음의 열쇠이다.

선에서는 그러한 의심을 *대의단(大疑團)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의심과 믿음은 사실 둘이 아니다.

가지 견해는  진리에 이르는 서로 다른 길인 셈이다.

 

이견부주(二見不住) 견해에 머물지 말고

신막추심(愼莫追尋)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이제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는 승찬 스님의 말이 무슨 뜻인지 대략 감이 온다.

서로 다른 견해는 얼핏보면 전혀 다른 같지만 근본은 하나 수도 있다.

믿음과 의심은 전혀 다른 개념이지만  깨닫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그러니 어느 것을 쫓고 어느 것을 버릴 것인가.

 

재유시비(纔有是非)잠시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분연실심(紛然失心)어지러히 본마음을 잃으리라


중요한 것은 현상이 아니라 본질이다.

본마음을 지켜야 한다.

본마음이 바로 신성이며, 불성이라면 믿을 것인가? 아니면 의심할 것인가?

아니면 질문 자체가 이미 시비인 셈인가?

오직 방하착 뿐이다.

 

: 纔有: 겨우 , 있을 유: 조금이라도 있다면

是非: 바를 , 아닐 비 : 옳다 그르다 즉, 시비를 뜻함

紛然: 어지로울 , 그러할 연 : 어지럽게 되어지다.

失心: 잃을 , 마음 심:  마음을 잃게 되다

*대의단(大疑團): 큰 의심 덩어리, 즉 선에서는 크게 의심할 수록 크게 깨닫는다고 여긴다. 그러나 께달음에 이르기 위해  대의단은 대신심(大信心: 크게 믿는 마음) 대분심(大憤心: 크게 분개하는 마음) 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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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22일차

<二見不住/이견부주/ 견해에 머물지 말고

 愼莫追尋/신막추심/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우리는 항상 옳다는 것에 집착한다.

내가 하는 선택이 항상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최소한의 틀릴 가능성을 염두해 두지만 내가 선택이라는 당위성으로 나의 틀림도 항상 옳다.

진리를 찾는 길에서도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

내가 가는 길이 옳다는 것에 집착한다.

내가 알았다. 내가 깨달았다. 나만의 수행 방식이 옳다고 무의식으로 확신에 찬다.

역시 내가 옳다는 *아집(我執) 빠지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길이 옳다는 확신이 들때 가장 망견에 가까울 때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내가 옳다는 생각은 어떻게 쉬어야 하는가?

 

불용구진(不用求眞)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유수식견(唯須息見)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내가 하는 생각이 망견임을 어찌 아는가.

내가 옳다는 생각이 강할 수록 견해가 틀렸다고 인정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우리는 진화 구조상 틀린 선택은 죽음이라는 댓가를 얻어야 했으므로 항상 최악은 피하려 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극도로 모호성을 불안해 한다.

우리에게 선택은 옳아야 하며, 모호함은 곧 불안이다.

그러나 그런 구조 자체가 바로 망견임을 알아야 한다.

 

이견부주(二見不住) 견해에 머물지 말고

신막추심(愼莫追尋)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이제 다시 진퇴양난이다.

견해에도 머물지 말고, 옳다는 진리를 쫓아가 찾지도 말란다.

어쩌란 말인가?

망견임을 걱정하고, 진리가 아님을 걱정하고, 혹은 진리가 맞다고 확신하고, 내 선택이 옳다고 확신한다.

승찬대사는 다시 그물 하나를 던졌다.

의심과 믿음, 과연 두 견해는 서로 다른 것인가?

의심해야 것인가?

믿어야 것인가?

나는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말에 걸리고야 마는가?

 

 

: 二見:  , 볼 견: 둘로 본다. 즉 양 극단으로 혹은 분별해서 본다.

不住: 아닐 , 머물 주 : 머물지 아니한다.

愼莫: 삼가할 , 없을 막 : 삼가 ~ 말라

追尋: 쫓을 , 찾을 심:  쫓아서 찾다

*아집(我執): 자기 생각이나 의견이 옳다고 믿고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  고집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굳건히 믿고 밀고 나가는 의지라의 상태라면 아집은 타인의 의견은 배제하고 자기 중심적 사고에 빠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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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계 -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동서고금의 통합적 접근
켄 윌버 지음, 김철수 옮김 / 정신세계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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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차: 통합의 그늘 ― 이론과 체험 사이에서

 

윌버의 통합 모델은 참으로 아름답고 정교하다.

처음 접했을 때는 “여기까지 그려낼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이 먼저 나왔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모델의 빛 만큼이나 그늘 또한 분명히 보게 된다.

 

윌버가 『의식의 스펙트럼』을 것은 1977년, 그의 나이 스물 셋이었다.

동서양의 철학, 심리학, 종교, 영성을 하나의 틀로 통합하려 한 이 시도는 지금 보아도 경이롭다.

다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스물 셋의 체험으로 모든 것을 말할 있었을까?

그가 말한 무경계의 이론은 깨달음의 경지였을까? 혹시 알음알이는 아니였을까?

48세였던 내가 2년 전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이런 의심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

의심은 비판이 아닌, 그의 이론과 체험 사이의 간극을 보기 위한 것이다.

 

윌버의 모델은 의식이 점점 넓은 정체성을 포괄해 가는 ‘확장’의 구조를 설명한다.

자아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인류로, 인류에서 우주로. 확장하는 이 흐름은 분명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의식을 확장하는 일이라기 보다, 의식이 일어나는 근본 자리를 꿰뚫어 보는 일에 가깝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어진다.

의식의 확장과 깨달음은 같은 것인가?

전자가 내용물을 늘리는 일이라면, 후자는 그 내용물이 나타나는 바탕 자체를 보는 일이다.

방이 커지는 것과 방이 처음 생겨나는 자리’  아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윌버는 아주 훌륭한 지도를 그렸다.

의식이라는 복잡한 지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지도다.

하지만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지도를 아무리 오래 들여다본다 해도 산을 오르는 체험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이는 신심명이 말하는 ‘유증내지(唯證乃知)’ , 즉 오직 깨쳐야만 안다 말이 점을 정확히 짚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용하려는 통합 모델은 관대해 보이지만, 자칫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미묘한 오만으로 기울 수 있다.

실제 삶은 어떤 이론보다 거칠고, 어떤 모델보다 복잡하다.

그래서 신심명은 이렇게 경계한다.

막축유연(莫逐有緣)세간을 좇지도 말고

물주공인(勿住空忍)공함에 머물지도 말라.

 

어떤 체계에도, 어떤 설명에도 머물지 말라는 말로 읽힌다.

 

2년 전의 나는 <무경계> 를 통해 의식의 스펙트럼, 그리고 대극성에 대한 이론, 마지막 통합의 시도에 감탄했다.

“아, 이렇게 보면 다 하나구나.”

하지만 50세가 넘어 버린 지금은 조금 다르다.

모든 것을 하나로 보려는 시선 또한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진정한 통합은 모든 모델을 존중하되 어느 모델에도 갇히지 않는 자유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 모두 대자유인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역시 하나의 지도일 , 머물곳은 아니다.

누구든 길을 직접 걸어봐야 지도가 맞는지 틀린 지 있지 않을까.

 

내일은 <무경계> 다시 사유하기 여정을 마무리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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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계 -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동서고금의 통합적 접근
켄 윌버 지음, 김철수 옮김 / 정신세계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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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차: 모든 대립은 둘이 아니다 ― 무경계(No Boundary)의 핵심

 

의식의 스펙트럼에 이어 윌버는 근본적인 통찰을 제시한다.

모든 대립은 사실 선불교 식으로 풀이 하면 불이(不二)  둘이 아니다.

선과 , 삶과 죽음, 나와 너, 심지어 신과 인간까지 우리가 서로 분리된 것으로 여기는 것들은 실은 하나의 동전의 양면에 가깝다고 그는 말한다.

대극(對極)은 대립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만든다

우리는 (善)을 추구하면서 악(惡)을 제거하려 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선이 없다면 악이 무엇인지 없고, 악이 없다면 선 역시 정의될 수 없다.

둘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드러내는 관계다.


파도가 없다면 바다는 개념이 되지 않고, 바다가 없다면 파도 역시 존재할 수 없듯 대극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윌버는 이것을 ‘대극의 동일성’이라 부른다.

말은 철학적이지만, 실은 아주 일상적인 감각에 가깝다.

삶과 죽음은 정말 반대일까?

가장 극단적인 예는 삶과 죽음이다.

우리는 삶은 긍정하고 죽음은 부정한다.

하지만 윌버는 묻는다.

죽음 없는 삶이 과연 삶일까?

 

우리 몸의 세포는 순간 죽고 다시 태어난다. 생각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감정도 잠시 머물다 흘러간다. 심지어 ‘나’라는 정체성조차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죽고 다시 만들어진다.

이렇게 보면 삶과 죽음은 대립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의 다른 국면일 뿐이다.

윌버는 이를 심리학과 철학의 언어로 설명했고, 불교는 체험의 언어로 말했을 뿐, 가리키는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2년 후의 나는 이 대목을 다시 읽으며 신심명과 연관지어 떠올려 본다.

견유몰유 (遣有沒有) 있음에 집착하면 있음에 빠지고

중공배공 (從空背空) 공함에 집착하면 공함을 등진다.

 

있음과 공함은 서로 싸우는 대상이 아니다. 둘 다 집착의 대상이 될 뿐이다.

윌버가 말한 ‘무경계’ 역시 이 지점을 향하고 있다.

지난 편에서 사용한 빨대의 비유를 다시 떠올려 본다.

빨대의 끝은 서로 반대처럼 보인다.

하지만 끝은 하나의 공기 흐름을 위한 입구와 출구일 뿐이다.

 

우리가 “이쪽 끝이 옳다”,,“저쪽 끝이 틀렸다”고 다투는 동안 정작 그 흐름 전체는 보지 못한다.

<무경계> 란 양 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 전체를 보는 시선에 가깝다.

그런데 여기서 피할 없는 질문이 하나 생긴다.

이렇게 완성도 높은 통합 이론에도 한계는 없을까?

 

23살의 켄 윌버가 그린 지도와  50살이 넘은 내가 실제로 걸어본 길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음 편에서는 이론이 아닌 거리의 문제, 지도와 발바닥 사이의 간극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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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21일차

<不用求眞/불용구진/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唯須息見/유수식견/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마음을 쉰다는 것은 끊임없이 올라오는 생각들로부터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머리 , 혹은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무수한 생각들.

그런 생각의 찌거기들은 항상 속에 존재하다가 내가 제어 없는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나도 모르게 전면으로 부상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잡념은 그대로 생각의 찌거기들 이다.

결코 실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생각과 마음 속에서는 곧 실재할 것 같은 불안감을 동반하게 된다.

이때 부터 찌거기들은 불안한 마음을 양분 삼아 점차 형상을 갖추어 지기 시작한다.

이제 망념은 망견으로 변했다.

공한 생각에 불과한 것이지만 어느새 의식 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나는 헛된 망상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바로 *전도몽상(顚倒夢想), 즉 뒤바뀐 꿈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전도몽상에서 바르게 깨어 있을까?

 

전공전변(前空轉變) 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개유망견(皆由妄見) 모두 망견 때문이니

불용구진(不用求眞)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유수식견(唯須息見)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승찬스님은 참됨도 구하지 말라고 했다.

진리를 추구 한다면서 공함을 쫓고, 진리가 아님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내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들을 쉬어야 한다.

유위법이 작위적인 생각이라면, 그 작위적이며 인위적인 모든 생각과 행동을 쉬어야 한다.

쉼이 바로 유위법에서 무위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된다.

쉼이란 놓는 것이다.

선가(禪家) 에서는 이를 가르켜 *방하착(放下着) 이라고 했다.

 

엄양이란 스님이 *조주(趙州:778~897) 선사를 찾아가 물었다.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하착!

이미 물건도 없는데 무엇을 내려 놓습니까?

그럼 그냥 짊어지고 가거라.

이에 엄양은 깨달았다.

 

깨달음이란 것도 어쩌면 망견일 수도 있다.

그러니 오직 내려 놓을 뿐이다. 방하착!


: 不用: 아닐 , 쓸 용:  ~ 쓰지 마라

求眞: 구할 . 참 진 : 참됨을 구하다.

唯須: 오직 , 모름지기 수 : 모름지기 오직

息見:  , 볼 견:  보는 것을 쉰다. 즉 헛되게 보는 (망견) 것을 쉰다.

*전도몽상(顚倒夢想) : <반야 심경> 의 구절 중에서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구절에서 나온 것으로, 뒤바뀐 헛된 꿈에서 멀리 떠나야 구경열반에 이른다는 뜻임.

*방하착(放下着):  마음 속의 집착,원망,갈등 같은 번뇌를 내려 놓으라는 뜻.  나를 괴롭게 하는 그 마음을 내려 놓고 쉬라는 말이다.

*조주(趙州:778~897): 육조 혜능이후 남종선을 이은 당나라 중기 대표 선사. 앞의 잣나무, 차나 마시게 같은 선문답 일화로 유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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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1-19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직장 초년생 시절 대형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다가 방하착이란 말에 이끌려 선문답에 관한 여러 책들을 읽어오던 게 인연이었는지 불심 가득한 아내를 만났고 이후 나 또한 천주교에서 불교로 갈아타서 정진 중입니다. 요즘 마힐님의 리뷰가 기다려지기도 해요. 감사합니다.

마힐 2026-01-19 01:37   좋아요 1 | URL
저도 감사합니다.
호시우행님의 인연이라는 말이 제게는 더 와닿습니다.
인연...
이렇게 더불어 정진하는 것도 인연입니다.
함께 쉬어가듯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