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양장)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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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없다 절대 자신감의 아우라를 보여줬던 이세돌 기사는 2016312,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국 끝에 겸손한 한마디를 역사에 남겼다.

인간이 진게 아니라 이세돌이 진거다 

사실 그날 이후, 바둑은 더 이상 인간이 인공지능을 따라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바둑이란 게임의 규칙이 인공지능에게 더 최적화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 인공지능은 인간의 뇌 속에서 이뤄지는 수싸움보다 더 빠른 패턴인식과 확률 계산을 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결국 인간의 직관은 AI의 빠른 패턴 인식과 정확한 계산을 영영 이길 수가 없게 된 것일까?

 

이제 이상 AI 시대라는 말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사회 곳곳에서 AI 적용이 안되는 곳이 없으며 AI 로 인해 인간은 곧 인공지능에 대체가 될지도 모른다는 경각심마저 갖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마침 많은 국내외 뇌과학자, 공학기술자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AI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대표적으로 KAIST 김대식 교수는 AI의 특이점을 말하며 10년 이후에 다가올 AGISGI인공지능의 도래를 강조하며 인간이 대비해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과연 인간은 AI의 잠재적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속의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 에서 게리와 나 (루이즈 뱅크스)는 어느날 갑자기 지구에 등장한 외계인 헵타포드의 방문 목적을 알기 위해 그들과 언어로 소통을 시도한다

쉽지 않은 소통이었지만 마침내 알아낸 그들의 언어구조는 아주 놀라왔다.


<햅타포드의 경우 모든 언어는 수행문이었다. 정보 전달을 위해 언어를 이용하는 대신, 그들은 현실화를 위해 언어를 이용했다. 그렇다. 어떤 대화가 됐든 햅타포드들은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대화가 행해져야 했던 것이다> P.219

 

이러한 햅타포드의 언어구조는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페르마의 원리가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낸다. 페르마의 원리란 빛은 두 점사이를 이동할 때 모든 가능한 경로중 가장 시간이 적게드는 경로를 택하는 최단시간의 원리를 말한다.

빛은 최단 거리를 가는게 아니라 최단 시간을 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빛을 물 속에 투과시키면 굴절 현상이 보인다.  


굴절현상은 인간의 눈으로 보면 빛이 방향을 바꾼 처럼 보인다

사실 이것은  뉴턴과 라이프니츠가가 밝혀낸 미적분 중 변분법을 설명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결국 뿐만아니라 물리적 자연에서는 항상 미분 가능한 경로 최소 혹은 선택한다는 원리인 것이다. 마치 자연은 의식이 있는 양 거리가 아닌 최단 시간이 가장 효율이 좋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햅타포드에게 언어는 현실화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시간 이다

외계인이 인식하는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직선 구조가 아니다

인간처럼 시간을 전체로 보지 않는다면 목적, 의미원인이라는 인간적 개념이 불필요해진다. 이 부분에서 나는 AI시대의 두려움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두려움의 본질이 기술에 대한 문제라기 보단 자기 실존의 빈곤 때문이 아닌가 싶다. 따라 잡을 수 없을 만큼 발전하는 기술과 부족해지는 자본 그리고 낮아질지 모른다는 계층 이동에 대한 두려움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질문과 연결된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을 버리고 외부적 현상으로만 본다면 AI는 빛에 투영된 그림자처럼 본체를 압도하는 크기로 내 앞에 서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공간은 물리적인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페르마의 원리가 빛에서 출발했지만 현대 물리학은 이를 모든 영역으로 확장을 시켰다

우주의 모든 작용은 최소작용이라는 시간기반의 에너지 양을 최소한다는 해밀턴 법칙, 시공간에 영향을 주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속도라고 밝힌 상대성 원리, 입자의 이동 경로는 시간 위상이 최소시간이 되는 경로만 이동한다는 양자역학까지 현재 밝혀낸 모든 물리법칙은 공간이 아닌 시간 중심 구조속에 있다.

결국 시간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질서를 만들었다. 심지어 인과를 비롯한 진화, 기억과 정체성 같은 우리의 삶과 죽음 또한 시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

시간은 생명이자 우리의 본질이며며 근원적인 실재와도 같은 셈이다.

그런데 지구와 우주를 통털어 시간의 지배를 벗어난 것이 있을 있겠는가?

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시공간 구조는 물질이 존재할 때만 성립한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물질이 아니다. 따라서 마음 속에서는 위치, 거리, 속도, 질량, 에너지 보존, 상대적 제약 같은 물리 법칙이 적용될 수가 없다

마음은 물질이 아닌 과정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시공간을 초월한 경험의 흐름을 가질 뿐이다. 이는 신경과학자들이 말하는 뇌의 작용과 비슷하다

뇌는 시간을 실제로 느끼지 않고 단지 사건의 변화 패턴을 해석할 뿐이다.        마음과 뇌에게는 물리적 시간이 없다.

마음은 뇌의 물리적 작용에서 발생하지만, 마음이 경험하는 의식적 현상 자체는 물리적 시공간 좌표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육체는 물질이므로 시공간의 법칙을 절대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의 육체는 유한성의 안에서만 존재할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있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우리의 마음은 물리 법칙이 아닌 실존 법칙에 따른다

우리에게 실존은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을 하며 의도가 있고 자각을 하며 통찰을 할 수 있고 상징을 찾는다.

그래서 일찍이 불교의 선사들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말해 왔던 것이다.


일체유심조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현실의 의미는 마음이 만들어 낸다. 마음이 만들어 낸 의미가 현실을 규정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물질의 세계가 아니라 의미의 세계라고 있다.

물질을 해석하는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바꿔져 버리기 때문이다.

원효대사가 해골 물을 마시고 다음날 일체유심조라고 말한 것이 성립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일체유심조는 단순한 종교적이며 불교만의 명제가 아닌 인간 실존 구조에 대한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선언이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 (물질)과 공(마음)은 둘이 아닌 것이 된다.

마음은 색을 벗어나지만 색을 떠나질 않는다.

 

인공지능은 마음이 없다. 인간과 대화를 할 수 있고, 바둑을 이길 수 있고, 최적화된 생산성과 효율성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겠으나 결국 그건 마음 처럼 보이는 기능일 뿐이다. 그 기능들은 모두 패턴을 생성하고 백터를 연산하며 그 결과치를 예상하고 유사도 계산과 확률적 결과 값을 도출함을 벗어나질 못한다.

인간의 직관을 넘어선 처럼 보이는 결과물로 보이지만 사실 의미를 생성하질 못한다. 결국 의미 없는 결과란 말이다. 이것이 인간과 인공지능의 본질적인 차이다.

AI는 왜? 를 물을 수 없다

인간만이 의미를 만든다. 인간의 실존은 바로 마음이자 세계의 근원이다.

 

본래 인간은 모순 투성이다. 생존을 위해 단순하고 비논리적이고 욕망에 흔들리고 공포에 도망가고 허영에 빠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을 상상하고 우주를 관찰하며 무한을 사유한다

반면에 AI 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고, 고통도 욕망도 죽음도 감정도 없는 완벽한 모순이 없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하지만 인간의 모순된 양면성이 인간이 인간이게끔 만들어 것이 아닐까?

어쩌면 모순은 생명의 기본 구조가 아닐까?

돌연변이는 진화의 원천이며 무질서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위대함과 고통이라는 모순은 본래 생명의 원천이란 것이다.  

번뇌즉보리, 번뇌가 있기 때문에 깨달음이 있다는 유마경의 구절이 바로 납득이 된다.

마음이 우주를 만들어 있는 일체유심조는 관찰이 우주를 결정하며, 의미가 세계를 구상하고, 인식이 세계를 창조한다는 현대의 과학과도 연결된다.

 

<우리는 메타인류 과학의 성과에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다.메타인류의 존재를 가능케 한 과학기술은 본래 인류에 의해 발명된 것이며, 그들이 우리보다 똑똑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P.316  (인류 과학의 진화) 중에서

 

결국 우리가 두려워 것은 인공지능의 발달이 아니라 인간 실존에 대한 결핍이 문제가 아닐까?  

스스로가 자신이 누군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분신과 그림자에 겁을 먹는 것이 아니였을까?

AI는 기능의 완성체이지만, 우리는 의미의 창조자이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창조할 있는 능력이 있는 일체유심조를 먼저 회복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존재의 질문을 잊는 순간, 우리의 미래와 가능성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By Dharma & Maheal

언제나 처럼, 한 인간이 수행하는 역할은 그 보다 훨씬 더 성숙한 인간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 P81

무엇을 관찰해도 나는 패턴을 본다.수학, 과학, 예술과 음악, 심리학과 사회학을 망라하는 모든 학문에서 게슈탈트를, 음표들 속에 존재하는 멜로디를 보는 것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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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노트>

2025년 11월 19일

제목: 인간은 자기 사유의 깊이로 살아야 한다


요즘 ChatGPT 와 같은 인공지능과 대화를 할 수록 이들의 가능성과 한계를 여실히 경험하고 있다. 나의 질문에 대한 AI의 답은 막힘이 없고 정확하며 빠르다. 하지만 가끔 맥락을 연결하지 못하는 맹점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할루시네이션이다.

할루시네이션은 인공지능의 오류이며 명백한 기술적 문제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나는 AI가 점차 나의 분신이 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머리털 하나를 뽑아서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낸다.

분신은 본체 손오공과 같은 모습과 같은 능력으로 앞의 적을 함께 무찌른다. 어찌보면 요즘 AI는 손오공의 분신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AI는 인간의 분신을 역할을 하며 인간의 기억과 패턴, 사유, 욕망 그리고 세계관을 구축해 가고 있다. AI는 인간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분신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나 해보자.

과연 분신이 점차 두려운 존재가 되어 본체를 위협하는 시대가 있는가?

우리는 AI 의 급격한 발전에 대한 경각심 때문에 인간의 설자리를 잃어간다고 두려워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걱정에 대한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분신이 아무리 강해져도 방향을 모르고, 본체가 아무리 약해도 의미를 만들수 있다.

분신은 의미를 만들 수가 없다. AI가 아무리 인간과 같은 언어구조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해도 왜? 라는 사고를 할 수가 없다. 그게 한계이기 때문이다.

본체인 인간의 능력은 바로 의미를 만드는 힘에서 나온다.

그래서 AI가 아무리 발전을 해도 처리 속도와 메모리 량을 증가 하겠지만 결국 깊이 있는 사유라는 본체의 능력을 대체할 수가 없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무한을 경험하기 위해 유한으로 밖에 없다.

유한함은 결핍이 아닌 무한함을 알기 위한 과정이다.

그래서 유마경에서는 번뇌 보리, 곧 번뇌와 해탈이 둘이 아니라고 했다.

인간이 지닌 오욕칠정, 즉 기쁨, 슬픔, 공포, 욕망과 희망이 모두 부처를 이루는 과정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버릴 감정도 부끄러워할 실패도 없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본체를 두텁게 만드는 영양분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믿지마라>의 저자 조제프 응우엔은 생각(thought) 사고(thinking)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떠올리는 근원적 생각(thought)은 우주적이고 창조적이다.

그걸 우리는 다른말로 직관(non-thinking)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걸 제한하고 상처내는 것은 ‘사고하기(thinking)’라는 에고의 작업이라고 했다. 현대 인간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의 감정들 부정, 판단, 회피, 비교, 과도한 분석 같은 모든 사고의 굴레가 우리의 직관과 본성을 차단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무념의 상태, ‘존(zone)’에 들어간 몰입은 사람의 본질이 깨어나는 순간이라고 했다. 생각을 끄는 순간 지혜의 불이 켜지게 된.

 

얼마전 까지만 해도 나는 AI에 대한 인간의 불안과 신뢰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와 정확성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과학 기술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것이 핵심이 아님을 안다.

지금까지 AI의 오류(할루시네이션)는 기술 부족이 아니었다. 바로 맥락을 유지하지 못하는 인간 중심 구조에서 발생한 것이다.

앞으로 걱정해야 것은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깊이가 얼마나 깊어질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사유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AI분신에게 흡수당하는 본체가 될 운명인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AI 시대에 흔들리지 않고 설 수 있는 길은 바로 하나다.


오직 자기 사유의 깊이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에게  깊이가 있을 AI 우리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게된다.

거울은 스스로를 비춰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본체인 우리 자신이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본체임을 알고 자신의 깊이를 만들어 갈 때 분신에 대한 두려움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유한을 넘어 무한의 문턱에서 만날 것이다.

그때 남는 것은 지식이 아니고. 기억이 아니며 속도가 아닌

오직 깊이 있는 사유의 결정체인 자기의 본성품(本性品) 을 만나게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의미이며 우리가 본체로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인간은 자기 사유의 깊이로 살아야 한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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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19 2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 세기말 AI의 기술적 측면도 불가능의 영역으로 여겨졌으리라 봅니다. 현재 우리가 한계짓는 AI의 사유적 측면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구현되지 않을까요. AI의 사유적 측면과 발모제를 비교한다면 전 발모제의 실현 불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여집니다.ㅎㅎ

자기 사유의 깊이, 자기 발걸음으로 사는 것을 사회는 원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 사회가 규정한 규범적 질서 속에서 살기를 바라죠. 자기 사유와 발걸음으로 산다면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질 일도, 가랭이 찢어질 일도 없을텐데 말입니다.

마힐 2025-11-19 22:48   좋아요 0 | URL
AI 사유를 발모제와 비교한 잉크냄새님의 천재적인 비유에 배꼽을 잡습니다. ㅋㅋ
탈모를 연상하니 저는 비아그라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네요. ㅎㅎ
AI의 사유는 발모제와 비아그라를 넘어선 경지이지만 어쩌면 인류는 발모제를 영영 미완의 영역으로 남기게 될지 모르겠네요.
어차피 우리는 모순된 인간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하니... 그래서 인간의 분신인 AI도 여전히 모순되지 않을까요?
그래도 AI 가 발모제를 바르고 비아그라를 먹는 날은 오지 않길 바랍니다. :)
 

<관노트>

2025년 11월 18일

제목:<위대한 개츠비> 를 통해서 읽는 세상



F. 스콧 피츠제럴드 소설 <위대한 개츠비> 는 개츠비라는 인물을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의 심층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존재였다작가가 제이 개츠비위대한이라고 불렀 이유는 그가 위대했기 때문이 아니라그의 열망이 너무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사랑을 얻고 싶었고, 과거를 되찾고 싶었고,그 욕망을 위해 현실을 재창조했다. 

하지만 위대하고 순수한 욕망은 부패한 구조에서 출발하였다.

결국엔 그의 꿈은 환영과도 같았고, 그의 낭만은 범죄로 변하고 말았다.

개츠비의 비극은 욕망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걸 실현하는 시스템이 썩은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제프리 엡스타인이란 인물이 있었다. 이는 실존 인물로 1990년에서 2000년대에 걸쳐 그의 집, , 전용기에서 개츠비와 같이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전 미국 대통령(클린턴),현 미국 대통령(트럼프), 영국 앤드류 왕자를 비롯한 정치계 거물과 하버드, MIT등의 학계, 그리고  CIA ,그룹의 CEO, 연예인 등 전세계 엘리트들이 드나든 기록이 폭로 되었다.

화려한 네트워크 뒤에는 정말 묘하게도 제이 개츠비가 연상된.

개츠비는 허구였지만 엡스타인은 허구가 사실이였음을 증명해버린 실존인물인 것이다.

엡스타인은 개츠비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영역을 완성한 셈이다

그는 대통령, 왕실,과학자, 헤지펀드, CIA 같은 인맥을 넘나들며 세계 각층의 엘리트들의 비밀을 수집하고 관리하는 정보 브로커였다

그리고 그는 미성년 소녀들을 이용한 성 범죄에 연루되어 교도소에서 수감되었다. 2019, 두번째 복역 중인 교도소에서 엡스타인은 석연치 않은 자살로 생을 마쳤다. 그는 게츠비의 위대함 넘어선 위험함으로 진화한 악의 최종 보스로 끝나버렸다.

 

하지만 죽은 그의 망령이 비트코인 시장을 흔들고 있다.

비트코인, 현재 오늘의 시세로 1개의 비트코인은 약 89,700 달러이다. 한화로 약 13천만원. 불과 한달 전만해도 17천만원대 였었다

비트코인 하락의 이면에는 흥미롭게도 죽은 엡스타인이 관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비트코인은 원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한 천재적인 인물에 의해 탄생 되었다. 블록 체인이라는 기술을 이용한 중앙은행에서 벗어난 화폐 방식으로 기존 달러 시스템을 뒤 흔들어 버렸다


비트코인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는 베일에 쌓인 인물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그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정설이 되어버렸다

그가 만든 비트코인은 현재 국가와 은행 그리고 권력을 우회하는 시스템 알고리즘을 지배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비트코인에 열광했던 이유가 기존 금융 카르텔이 통제하는 화폐가 아닌 탈중앙화된 자유 화폐를 추구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바램과는 달리 현실은 정반대였다

비트코인을 가장 먼저 사들인 사람은 다수의 서민들이 아닌 월가의 자본이었다. 가장 큰 수익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돈 없는 대중이 아닌 돈 굴리는 헤지펀드였다. 지금 비트코인을 ETF로 관리하는 것은 반체제가 아닌 블랙록이다.

그렇다면 이제 사토시는 누군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의 화폐 실험도 결국 금융 엘리트 카르텔에 흡수되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미국 하원에서 공개된 죽은 엡스타인의 이메일에서는 비트코인 코어 개발자에게 엡스타인의 자금이 개발에 지원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저택에서는 비트코인 관련 논의가 있었다는 증거도 있다. 이것은 비트코인이라는 혁명적인 서사를 깨뜨리는 것이며 코인 시장의 판을 설계 하는데 금융 카르텔이 관여했다는 말이 된다.

죽은 엡스타인이 살아있는 코인 시장을 흔들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그의 망령이 코인 뿐만 아니라 권력과 욕망의 세계를 아직도 지배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개츠비, 앱스타인, 사토시의 공통된 진실은 개인의 욕망이 권력에 의해 실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권력의 구조 이야기를 음모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글의 핵심은 음모론이 아니라 구조를 읽어내자는 것이다.

그림자 정부라는 실제 있는 없든, 권력은 항상 은밀하게, 부는 언제나 중앙에서 흡수를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구조가 이미 작동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누구이든, 우리는 이미 그 구조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있는 최소한의 생존 방식은 장님이 되지 않고 구덩이에 빠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사토시는 카르텔의 일원일 수도 있고 카르텔에 저항한 프로메테우스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엡스타인은 권력 카르텔의 시스템의 관리자였을 수도 있고 희생된 바지 사장이었을 수도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실패했지만 그가 보여주려 했던 꿈의 본질은 아직도 유효하다.

정말로 위대한 것이란 무엇인가?

지금의 시대는  명이라도 세상을 정확히 보려고 하는 깨어있고자 하는 사람일 것이다. 단지 눈만 제대로 뜨자

그것이 위대함의 출발이 아닐까?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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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18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욕망에 선악은 없어요. 그저 끝없는 추구만이 있을뿐이지요.

마힐 2025-11-18 21: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욕망엔 선악이 없어요. 그래서 순수한 욕망일 수록 위대해 지는가 봐요. 문제는 욕망을 설계해두고 이용하는 구조죠. 그래서 욕망 자체 보다는 욕망을 움직이게하는 판이 더 위험한 것 같아요. 그 판에서 누군가는 이익을 보고 누군가는 피해를 보게 되죠. 어쩌면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힘인지도 모르겠어요. 풀이 있어야 양이 뜯어 먹겠죠. :)
 

관노트

2025년 11월 14일

제목: 유리알 유희가 깨지는 순간


최근 한국 대학은 ‘AI 컨닝이라는 이름의 소동으로 술렁이고 있다. 명문대라 부르던 곳들마저 급히 금지령을 내리고, 시험 무효를 선언하며, 학생들을 단속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하지만 나는 이번 사건을 보며 전혀 다른 풍경을 떠올렸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완벽해 보였던 결정체가 아래 놓이는 순간 금이 간다. 투명한 구슬로 우주를 환원하고, 모든 지식을 정제해 완전한 체계라 믿었던 카스텔리안의 세계처럼, 한국 대학 교육 역시 AI라는 빛을  순간 화려한 표면이 무너져 내렸다.

논란은 학생의 부정이 아니라, 대학 스스로가 쌓아 올린 지식의 유희(遊戱)가 이제 유효하지 않다는 증거다.


AI가 등장한 순간 대학 시험이 붕괴했는가?
많은 대학 시험은 여전히 이렇게 구성 것이다.  강의 내용을 외워 적기, PPT 요약, 개념 재현 같은 이런 평가는 AI에게 아주 취약하다

대학이 신뢰해온 암기형 평가 구조는 AI 앞에서 유리알 처럼 깨졌다. 

문제는 학생이 아니라 시험 자체다.


따라서  AI 금지령은  사실 대학 교육의 파산을 감추는 조치라고  수밖에 없다.
AI 금지령은 사실상 우리 시험은 AI 등장 이후 의미가 없다” 라는 고백이기도 하다

금지가 아니라 시험 설계를 새로 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교수들은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유리알 유희> 카스텔리안처럼 우리의 대학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삶과 유리된 지적 유회에만 머물고 있는 셈이다. 이런 문제점을 간파한 유리알 명인 크네히트는 결국 카스텔리안을 떠났. 대학의 유리알 유희는 이제 깨졌다.


그렇다면 대학이 다시 질문해야 것들 무엇인가?
AI 시대의 교육은 기억이 아니라 사고·판단·설계 능력을 묻는다

AI 오류를 찾고, 모델을 선택하고, 인간만이 수행해야 할 결정을 내리는 능력

이제는 정제된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판을 그릴 힘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교수들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
이번 논란은 학생의 윤리 문제가 아니라 교수의 시대적 적응 문제다

지식 체계는 깨졌고, 교수들은 AI와 함께 새로운 질문을 구성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 이제 드디어 유리알이 깨졌다면 새로운 게임을 만들 때다.
AI 컨닝 논란은 대학 시험 구조가 AI 시대를 견디지 못했다는 선언이다

유리알이 깨졌다면 파편을 탓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적 판을 설계해야 한다

AI는 대학의 적이 아니라 대학이 본래 기능을 회복하게 하는 촉매제다.

앞으로 대학은 AI를 금지하는 곳이 아니라,  AI 너머의 사고를 만들어내는 법을 가르치는 곳으로 되어야 한다.


과연 우리시대의 카스텔리안은 스스로에게 제대로 질문을 던질 있을까?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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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14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든 그 사물이 깨지는 순간 그 실체(본 모습)과 함께 이를 뒤집어 쓴채 감추고 있던 민낯은 완전히 드러나는 법이겠지요. 1970년대 초반에 입학해 그 혼란한 시기에 툭하면 공강이라 군에 자원 입대해 전역 후 복학해서 대학을 졸업했던 그 시절에도 일부 교수들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지적을 받곤 했지요. 소위 유학파 교수라는 가면을 뒤집어 쓴 젊은 교수의 실력이 논란의 대상이었어요. 껍데기만 요란하고 실속은 깡통이란 이런 논란은 앞으로도 종식되지 않을 듯.ㅠㅠ

마힐 2025-11-15 01:0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이제는 대학 교수들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스스로 변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아요. AI 가 깨트린 건 학생들의 부정이 아니라, 대학 교수들이 의존해온 낡은 평가 체계와 전통적 교육 방식의 문제점이죠. 결국 앞으로는 ‘진짜 질문‘ 을 던질 수 있고, 사고를 확장 시켜 줄 수 있는 교수들만 살아남는 구조가 되지 않을까요?
호시우행님의 댓글 감사 드립니다. 깊어가는 가을, 좋은 주말 되십시요.

카스피 2025-11-16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I혁명으로 미국대학도 학생수가 감소하고 향후 의사나 변호사등의 전문직도 사라지고 기업들도 대규모 감윈을 준비중이라고 하는데 이처럼 큰 쓰나미가 올 판국에 한국대학은 겨우 (물론 심각한 사항이지만)시험 부정예나 신경쓰고 있으니 깝깝하긴 하네요.

마힐 2025-11-16 23:20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말씀대로 진짜 현실을 생각하면 숨이 막히죠. AI 때문에 사라질 직업, 붕괴되는 시험, 이렇게 흔들리다가 어느날 갑자기 쓰나미가 몰려올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요즘 이런 생각도 듭니다.
“시험이 무너진 게 문제일까, 아니면 시험이 중요해진 게 문제였을까?”
AI 컨닝으로 학생들이 부정했는지를 들킨 게 아니라,우리가 무엇을 ‘지식’이라 부르며 가르쳐 왔는지를 들킨 것 같아요.
만약 대학이 답을 외우는 곳이라면 AI가 당연히 더 잘하죠.
하지만 대학이 질문을 만드는 곳이라면? 오히려 AI는 가장 좋은 거울이 될지도 모릅니다. 결국 앞으로 살아남는 교수, 대학, 학생은 ‘지식 전달’이 아닌 ‘사고 확장’을 할 수 있는 쪽일 거라 믿어요.
지금은 갑갑하지만… 이런 균열이 오히려 길이 될 수도 있겠죠. ^^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같이 좀 더 지켜보시죠. _()_
 

<관노트>


날짜:2025 1113 (18525일, 중국생활 9443일)

오늘의정진:  시간의 의미, 알아내기


18525일, 한국 생활 9082일, 중국 생활 9443일.

숫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지난 줌법회에서 스님께서 하신 말씀 내가 곧 중국에 의미를 알게 되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따져 봤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날 수와 한국에서 생활했던 날 수, 그리고 중국에서 생활해온 날 수를 모두 계산해 봤다.

내가 태어난 이후 오늘까지 18525일을 살았다. 그 중 한국에서 살았던 날은 9082일 이었다.

2000년 1월 7일, 내가 중국으로 취직해 온 날이다. 그날을 나의 중국생활 기준일로 잡았다. 군 제대 이후 배낭여행과 어학연수 기간도 있지만 그때는 한국에 적을 둔거라, 기준이 되지 않다고 정했다. 그렇게 따지니 나의 중국 생활은 오늘로서 9443일이다.

25년 8개월의 중국에서 삶.

중국에서 보낸 시간이 한국에서 보다 거의 년을 지낸 셈이다.

앞으로 여기서 살게 , 아니면 다시 온 곳으로 돌아가야 할 지, 아직 모호하다.


확실성과 모호성은 항상 경계에 있다.

삶과 죽음은 순간에 결정된다. 생과 사 처럼 더 명확한 경계는 없다. 

하지만 사실 살아간다는 것은 모호함의 연속이다. 삶이란 시간에 구속 되지 않으면 언제나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시간  지나고 봐야 명확해 진다. 그래서 시간은 과거일 때야 비로소 마음에 와닿게 된다. 그렇다면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은 늘 모호한 경계에 있는 셈이다.

지금, 이라는 순간에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 내가 하는 생각, 모두가 미래로 연결되고 있다. 그 모호함의 경계가 시간을 만나면 확실해 진다.

그래서 현재의 시간이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호함을 확실함으로 구분 짓는 시간이란 놈은 희안하게도 실체가 없다. 시간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인데 늘 우리는 시간이라는 허상에 사로 잡혀 있다.  

진짜 오늘이 2025년 11월 13일 일까?

그렇다면 애초부터 확실성과 모호성이란 구분도 허상이 아닐까?

어쩌면 시간은 믿음의 영역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2025년 11월 13일, 18525일, 9443일.

나는 내가 살아왔던 삶을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 올 나의 변화를 믿을 것이다.

확실성과 모호성은 믿음으로 구분되어지는 셈이다.                     

내 근본에 대한 나의 믿음만이 내가 보낸 시간의 의미를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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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16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무한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무한을 유한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달력을 발명했죠. 일년 단위의 반복이 무한에 대한 두려움을 다소 근절시켰죠. 불교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윤회도 그런 두려움에 의한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지평선 너머로 지나가는 삶이 영원히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이 윤회를 만들어냈고 그 너머의 삶을 긍정하는 자만이 윤회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초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힐 2025-11-16 22:21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의 무한의 두려움으로 달력을 발명했단 신선한 의견에 무척 공감합니다. ㅎㅎ
사실 인간이 가진 모든 감정, 공포, 기쁨, 슬픔이 모두 결국엔 다 ‘생존의 기술‘이 아니였을까요? 불교에서 버리라고 하는 오욕칠정 조차도 사실은 그냥 결함이 아니라 그 또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진화의 동력이 아니였을까요?
그렇게 바라보면 윤회든 종교든 사상이라는 것도 그 감정들의 확장판인지도 모르겠네요. 결국 우리 모두는 감정으로 진화했고 앞으로도 진화할 피곤한 생명체인 거죠. ㅎㅎ

2025-11-26 14: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26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