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 어느 장례지도사가 말해주는 죽음과 삶에 관한 모든 것
강봉희 지음 / 사이드웨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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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나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지은이강봉희 

   :  죽음을 준비하라

 


8년전쯤에 중국 북경에서 내가 겪었던 일이다.

주말 오후에 집에서 쉬고 있는데  다급한 회사 사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북경에 있는 어느 병원으로 직원 몇 명을 데리고 빨리 오라는 사장의 지시로 영문도 모르게 급히 갔었다

병원에 도착 후 자초지종을 확인해 보니 사장의 아주 먼 친척 뻘 되는 4인 가족이 북경 자금성에  관광을  왔는데 그 가족의 아빠에게 갑자기 심장 마비가 온 것이었다.

자금성이란 장소도 문제 였지만 하필 시간대도 가장 붐비는 오후라서 구급차가 자금성 안으로 들어 오기 까지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

겨우 구급차가 들어오고 환자를 가까운 병원으로 다시 옮겨 심폐 소생술을 진행 했지만 결국엔 사망하고야 말았다집안 가장의 황당한 죽음을  객지에서 겪게 된  아내분과 두명의 딸들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병원에 대사관 직원이 뒤 늦게 도착했지만 별 다른 도움이 되 질 못했다

 

이때 중국 병원측은  응급실에서 사망을 하면 시신을 유족이 직접 영안실로 옮겨야 한다며 유족들에게 빨리 시신을 영안실로 옮기라고 했다영안실 안치와 영안실에서 화장장으로 이동하는 관()까지 유족이 손수 시신을 옮겨야 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당시 우리는 당연히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였다. (최근에 다시 안 사실이지만 당시에 우리는 외국인 신분이라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황당한 상황에 남겨진 유족들은 전부 여성 분들이고 중국어도 전혀 몰라서 우리가 직접 나서서 유족대신 뛰어 다녀야 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영안실에 가보게 되었고 또 시신을 꺼내서 이동용 침상에 옮기는 일을 해봤다.(중국 병원의 영안실은 정말로 음침했다)

시신은 중국식의 화려한 천에 감싸져 있긴 했지만 시체라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 생에 처음으로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한 셈인데  그 이후로 죽음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 올해 초 장인 어른의 장례를 치르면서 나는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얼마전에  읽었던 능행 스님의 <우리 봄날에 다시 만나면>을 읽으며  '나는 어떠한 죽음을 맞이 할 것인가'  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었다

이때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점차 자리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 이번에 비슷한 주제를 다룬 <나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입니다책을 통해서는 고독사와 우리나라 장례 문화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 강봉희님은 현재 장례 지도사이며 소위 '시체를 닦는 일을 하시는 분이다.

한자어로 염습(殮 염할 염襲 염습할 습)’ 이라고 하는데  웬만한 담력으로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늘날 무슨 상조 회사나 웬만한 장례식장에 들어 가는 비용은 대략 4~500만원 선으로 알고 있다그것도 최소한 이라고 하는데… 

저자 강봉희님은 이러한 염습과 장례를 돈을 받고 하는 처리하는 분이 아니다

스스로 자원 봉사단을 꾸려서 시청과 연계해서 관할 지역내의 기초 수급자 분들이나,가족이 없이 홀로 쓸쓸히 돌아가신 분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까지 무료로 해주고 있다즉 저자에게는 무연고로 고독사를 맞이한 사람들이 주고객이 되는 셈이다.

그 분들의 쓸쓸한 죽음을 마지막으로 외롭지 않게 지켜 드리는 일에 나름 자부심과 보람을 가지고 한다는 면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저자 강봉희님은 40대 중반방광암 진단을  받고 5년 이상의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원래 강인한 정신을 가진 그였지만 장기화 되는 병 치료에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그 당시  병실에 누워 바라본 창문엔 병원 장례식장이 눈에 들어 왔다고 한다

그때 떠오른 생각은 자신이 만약 살아서 저 장례식장 옆의 병실 밖을 걸어 나간다면 무언가 인간 답게 살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그 한 생각이 그를 죽음 문턱에서 벗어 나게 했고 결국엔 그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선택 하였던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 20  동안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 과정 중에서  코로나 초기 아무도 접근 조차 하지 않던 코로나로 돌아가신 환자분의 시신을 수습 했고그 외 수많은 고독사와 기초수급자들의 마지막을 돌봐 주었다.

현재 우리나라 고독사의 비율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2013년은 1280, 2017년은 2008, 2021년은 3603명을 기록 했다.

코로나 이후 2022년은 4822명이며  2023년은 이미 5천명을 훌쩍 넘어 버렸다

이미  사회 문제가 된 고독사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본다.

고독사를 맞이 한 사람들은 그들이  본래 가졌던 구성원의  관계가 무너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러한  무연고자들은 살아 있을 때부터 잊혀진 사람들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그들이 살아있을 때 그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쓸쓸히 죽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홀로 저승으로 가지 않도록 돌볼 수 있었다그런 의무를 내  팽개친 채 고독사를 입으로 떠드는 우리 사회가 원망 스럽다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독사에 대한 국가의 역할에 대해 많은 희망을 걸고 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베이비 붐세대의 나쁜 아빠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판적이다.

그는1950년대 중반과 1960년대 초반에 태어난  베이비 붐세대 남자들이야 말로 가장 나쁜 세대라고 규정 짓는다.

베이비 붐세대는 우리나라 경제 성장을 주도했던 세대이기도 하지만 그들 세대는 다른 세대에 비해 가정을 버리고 가장의 책임을 져버린 가장 나쁜 남자들의 세대 였다는 것이다.

베이비 붐세대가 지금의 나보다 윗 세대라 뭐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대략 내가 아는 이 세대 남자들을 떠올려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것 같다.

 

그 외  우리나라 장례 문화는 남에게 보여주는 관습이 많은데 이는 누군가의 돈벌이가 된다는 것이다.

죽을 때 입는 옷을 '수의(壽목숨 수 衣 옷 의)'라 한다원래 죄수들이 입는 '수의 (囚 가둘 수 衣 옷 의)'  에서 기인 된다고 보았다왜냐면 둘 다 삼베로 만든 옷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1890년대 에서 일제 강점기 때 죄수가 삼베 옷을 입는 것에서  부모가 죽으면 자식이 죄인이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 조선시대 같은 전통 장례에서는 삼배를 입질 않았다고 한다.즉 수의로 삼베 옷을 입는 것은 잘못된 전통이란 것이다또한 본래 삼베는 대마초에서 재배해야 하는데 대마는 알다시피 마약이다우리나라에서 대마초 재배는 불법이며 또한 지금 유통되는 삼베는 모두 합성 섬유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니 시신에 굳이 삼베 옷을 입히는 것은 장례 업체들의 장삿속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또한 장례식때 고급 리무진에 시신을 태우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산자와 죽은자에 대한 예의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망자와 유족에게 행해지는 불필요한 장례의식은 장례업자에게 돈벌이가 되는  수단밖에 되지 않는다는 저자의 따끔한 충고는 새겨 들을 만 하다 

 

8년전에 겪었던 남의 갑작스런 죽음과 서서히 다가 오는 죽음죽음의 형태는 모두 다르다하지만 '메멘토 모리(memento moli), 죽음을 기억하라고 하는 라틴어 구절 처럼 이제 나에게 죽음은 점차 기억할 무언가로  다가오고 있다

지금의 나에겐 여전히  많이 낯설지만 급하지 않게 천천히 받아들이고 싶다.

죽음, 준비해야 한다.

죽은 이들에게 우리가 갖추어야 할 어떤 예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이 있다고 믿고 있다. - P28

쓸쓸한 죽음을 마지막으로 외롭지 않게 지켜 드리는 일, 나는 그 일에서 조그만한 자부심을 느낄때가 있고 그럴때면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자랑하곤 했다. - P32

돌아가신 분들은 저마다의 고통을 몸안에 품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죽은 몸에 그 고통의 흔적들을 다 담고 있다. - P38

태어나면 죽는다는 것은 하나의 이치인데도, 우리는 항시 생과 사를 철저하게 끊어놓는다. - P84

죽음을 준비하라. 마음으로 준비하고 몸으로도 준비하라. - P134

핏줄은 우리 인간의 괄호안과 같다.
괄호안은 무조건 먼저 계산해야 한다. 핏줄의 의무다.
서로 자주 연락을 나누고, 서로 자주 얼굴을 볼 수 있는 계기를 계속 마련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배려의 시작이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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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의 꿈 - 완결판
리처드 바크 지음, 공경희 옮김, 러셀 먼슨 사진 / 나무옆의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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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갈매기의 꿈

지은이:  리처드 바크  / 공경희 옮김

   :  얼리 버드와 하이에나, 그리고 조나단과 킬리만자로의 표범

 


푸른 바다위를 날으는 갈매기는 넘실 넘실, 구름과 태양 사이를 날아 다닌다.

어릴때 나는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그림을 그리게 되면 항상 아라비아 숫자 '3' 을 뒤집어 쓴 모자 모양으로 갈매기를 그렸었다.

새중에 갈매기만 유독 편하게 그릴 수 있다.  '3' 만 넓게 휘휙 그리면 되니까... 

나 뿐만 아니라 다들 어릴 때 부터 미술 시간에 바다 위를 나르는 그림 속에 갈매기는 숫자 3으로 표현하는것 같다

그게  다른 새들에 비해 날아가는 갈매기를 표현하기가 가장 쉽기 때문이다

갈매기가 아닌 새들은 새에 대한 묘사를 대충이라도 해야 한다

새의 눈매부리날개발톱같은 부위 마다그리고 날아가는 모양 보다 그냥 땅이나 나무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그릴려면 갈매기 보단 어렵다.

나는 어릴때 부터 바닷가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갈매기는 많이 봐왔다.

하지만 그 갈매기들에 대한 특별한 감상이나 의미는 있는 것 같지 않다.

갈매기는 바다를 배경으로 사는 그냥 까치보다 좀 큰 회색빛 새 정도로만 생각했다.

왜 걔네들은 바다에서만 사는지 별로 궁금해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 보니 왜 얘네들은 바다가 주변에서만 날아 다녔을까?

산이나 도시에는 왜 없었을까?  과학적으로 새는 본래 바닷 속 물고기가 진화했다는 설이 있던데  갈매기들이 거쳐온  진화의 특성상 바다를 생활 터전으로 잡았을 수도 있겠다.

얘네들도 먹고 살기  위해서... 그렇게 얼리 버드가 되어  바다 위를 부지런히 맴돌았다.

 

이번에  <갈매기의 꿈을 읽으며 예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갈매기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은 청소년 권장 독서에 오를 만큼 참으로 유명한 책이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구절이 나오는 책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꿈과 이상을 추구하며 살아가라는 뜻으로 인용된다.

이와 더불어 '가장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잡는다는 얼리 버드(early bird)  와 함께 중고등  학생들의 책상 앞에 붙혀진 격언 문구들 중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하이 플라이 버드는 이상과 꿈을 쫓는 삶을, '얼리 버드는 현실성 있는 삶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상과 현실이라는 두가지 의미를 합쳐 놓으면  '리얼리스트가 되자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는 체 게바라의 명언 하고도 묘하게 통 하는 면이 있다.

이 책 <갈매기의 꿈은 리얼리스트 입장에서 보면 불가능한 꿈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정말 황당하지만 현실성 있는 꿈 이야기 이기도 하다.

먼저 이 책은 45년만에 새로운 번역으로 완결된 최종판이란 선전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원래 이 소설의 초판은 1970년에 미국에서 출판 되었다그 당시에는 지금 나온 책의 3장 까지 구성 되었던 것 같다우리나라에도 기존에 3장까지 출판이 되었는데 이번에 읽은 책은 4장이 추가 된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이 소설은 작가의 확장판 소설인셈이다

작가가 그려낸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우리 마음속의 잠재적 능력을 상징한다.

일반적인 갈매기들은 높이 날지 않는다바다에서 먹이를 잡는데 필요한 비행만 있으면 족 할 뿐이다그들에겐 오직 먹고 살기 위한 비행만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은 그렇질 않다. 2400미터에서 급하강에 시속 344키로로 비행하며 온갖 곡예비행을 연습한다

그에게 비행은 삶의 의미를 가진 숭고한 배움이자수행이었다.

1장에서 조나단은 자신이 속 했던 갈매기 무리에서 쫓겨난다

조나단은 먹이만 찾고 사는 얼리 버드가 되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조나단이 왜 비행에 집착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장에서 그는 완전한 비행에 가까워지고 결국 자신과 같은 성향을 가진 다른 차원의 무리와 함께 수행 하며 더 높은 경지에 이른다.  결국 그의 속도는 차원을 넘나들며 빛을 넘어서는 존재 (눈 깜짝할 새 ? )가 되어 버린다.

애초에 자기 계발류 같은 성장적인 우화로 생각하며 읽었던 내용이 갑자기 수행과 윤회를 의미하는 내용들로 이어져, ~ 이게 뭔가 싶다.

3장에서는 원래 쫓겨난 무리로 돌아온 조나단은 자신의 제자들을 양성한다.

자신과 같은 비행을 갈망하는  갈매기들에게 자신이 아는 바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조나단은 수제자 플레처를 이끌면서 후에 부활의 경지까지 보여준다.

이는 조나단이 마치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이 연상 될 정도로 묘사되는 장면이었다.

이후 4장은 추가가 된 장으로 수행 공동체에 대한 일화를 차지한다.

수행 공동체가 신격화가 되어 종교적 믿음으로 변질이 되는 순간원래 수행 공동체를 창시했던 창시자의 뜻과는 이미 멀어지게 됨을 알려준다.

다소 황당한 전개이긴 하나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대략 이해가 된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세지는 단순히 '우리 모두  얼리 버드가 되지 말고 높이 나는 새가 되자' 는 뜻은 아니다

꿈과 이상을 추구 하라는 뜻 보다는 자신의 잠재적 재능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 같다.

이 책엔 수행스승과 제자불교의 윤회기독교의 부활과 우상 경배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책에서 조나단의 비행술의 경지는 수행을 통한 득도(得道의 수준까지 보여준다.  

갈매기 조나단은 우리 안에 잠재된 힘을 뜻한다.

우리 안의 잠재된 힘은 본성이자진정한 참나를 뜻한다

왜냐면 책의 서두에 작가는 "모든 이의 내면에 깃든 진정한 갈매기 조나단에게 바칩니다." 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 <갈매기의 꿈>은 단순한 자기 계발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잠재된 능력에 대한 믿음즉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잠들고 있는 자성(自性), 자신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는 책이었다.

 

갑자기 조용필의 <킬로만자로의 표범>  가사 구절이 흥얼거려진다.

갈매기 조나단과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평범하게 먹고 사는 것을 거부한다는 면에서 서로 공통점이 있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 다니는 산 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서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나는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라는 사나이도 있었는데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어럼 타올라야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 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이 없으면 또 어떠리

이상과 현실, 둘은 서로 같이 공존 할 순 없는 모순적 관계일까?


형제 여러분! 의미를, 삶의 더 숭고한 목표를 찾고 추구하는 갈매기보다 더 책임있는 갈매기가 누구란 말입니까? 천년간 우리는 물고기 머리나 쫓아다녔지만, 이제는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배우고, 발견하고,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 P37

공간을 초월하면 ‘이곳‘ 만 남습니다.
시간을 초월하면 ‘지금‘ 만 남지요. 그러니 이곳과 지금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한두 번은 마주치지 않겠습니까? - P76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마라. 눈에 보여주는 것은 다 한계가 있을 뿐이란다. 너의 이해력으로 보고, 이미 아는 것을 찾아 내거라. 그러면 너는 나는 법을 알게 될 게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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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4-09-16 12: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갈매기의 꿈>을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마지막으로 언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네요. 110쪽 문장이 좋아요. 저는 눈에 보이는 책도 믿지 않거든요. ㅎㅎㅎ

마힐 2024-09-19 11:24   좋아요 2 | URL
맞네요... cyrus님에게 발각(?)되는 책들의 오타를 보면 그러실 것 같네요.. ㅎㅎ
 
오뒷세이아
호메로스 지음, 이준석 옮김 / 아카넷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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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오뒷세이아

지은이:  호메로스/ 이준석 옮김

   :  전능(全能)과 자유(自由),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지난달 8 20, 중국에서 PC PS5로 하는 게임 하나가 출시 되었다.

< WU KONG, BLACK MYTH: 悟空, 黑神话( 오공, 검은 신화)>  라는 중국 4대 기서중 하나인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을 모티브로 만든 액션 게임이다.

이게 지금 중국 대륙에서 대박이 났다고 관영 매체까지 호들갑을 떨길래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게임 동영상을 봤는데  ', 미쳤다' 는 한 마디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게임이라기 보다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 한편을 보는 것 같았다. 출시하자 마자 동시 접속 100만명, 출시 3일만에 1000만장이 팔리고, 게임 개발비 10배 이상의 수익을 냈다는게 이해가 됐다. (제작 기간 6년에 총 개발비 4억 위안(한화 750억원) 투입,현재 수익은 9000억원 이상)  나는 이런 표면적 흥행 보다 <검은 신화> 게임에서 손오공에 대한 서사(敍事)부분에 가장 큰 흥미를 느꼈다.



돌원숭이로 태어나 72개 도술을 익혀 천계(天界)를 혼란에 빠뜨리고그 벌로 오행산에 갇혔다가 삼장법사를 도와 천축으로 가서 불경을 가져오는 서유기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하지만 게임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새로 쓰고 있다.

기존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넘어선 새로운 신화(神話)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손오공의 천명 (天命)을  이어 받은 손오공의 후손, 천명자(天命者)가 게임의 주인공으로 손오공이 죽을때  흩어진 육근(六根: 불교에서 말하는 안이비설신의(눈귀코혀몸뜻) 를 뜻함)을 찾는 여정이 게임의 주요 내용이다.

가장 압권은 엔딩 부분이다. 손오공의  흩어진 육근을 모두 찾은 천명자가 손오공의 상징인 머리에 긴고아를 쓰게 된다면  또 다시 윤회를 하게 되는 설정이다.

천명(天命) 과 자유, <검은 신화, 오공>의 주제는 윤회를 거듭하는 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자유 의지로 윤회의 생을  벗어날 것인가 하는 철학적 해석을  하게 만든다.

윤회를 벗어나 대자유인이 된 다는 것, 아주 심오한 뜻을 담아낸  수작으로 느껴졌다.


때마침  읽기를 마친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오버랩 되면서  그리스 신화속의  주인공 오뒷세이의  모험 여정과  <검은 신화> 에서 오공이  자유를  위해 천명과 맞서는 장면이  서로 묘하게 겹쳐 보였다.

오뒷세우스가 귀향을 하는 과정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그의 여정은 크게 집으로 돌아오기 전의 방랑과 귀향 후 복수하는 걸로 나눠 볼 수 있다.

먼저 집으로 돌아오기 까지, 그의 모든 여정은 신들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었다.

키르케나 칼륍소 같은 여신들의 유혹에서 벗어 나야 했고, 식인 종족 퀴클롭스의 폴뤼페모스의 저주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저주를 몸소 겪어야만 했다.

이 과정 중에 트로이 전쟁 시절 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동료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한편  고향에서는 오뒷세우스가 20년이 되는 시간 동안 안 돌아오고 (사실 못 돌아오고 있었는데...)  행방조차 알 수 없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뒷세우스는 죽은 걸로 치부해버린다. 

오직  사랑하는 그의 아내  '페넬로페' 와 아버지 얼굴 조차 모르는 아들 '텔레 마코스' 만 오뒷세우스가 살아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패악스러운 구혼자들은 오뒷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를 차지 하기위해 오뒷세우스 집에서  구혼(求婚)이란 명목으로 날마다  행패 짓거리를 일삼았다.

결국 아들 텔레 마코스는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아버지와는 또 다른 모험을 시도 한다.


사실  나는 이 오뒷세우스의 이야기의 찐 주인공은 지혜의 여신 '아테네' 가 아닌가 싶다.

오뒷세우스가 겪는 모든 여정과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아들 테레 마코스, 인내로 기다리는 아내 페넬로페에 이르기 까지 여신 아테네는 보이는 현실 세계와 보이지 않는 신의 세계까지 모두 주도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호메로스는 이러한 여신 아테네의 개입을 절묘하게 그려 냈다.

지나가는 행인의 모습으로, 아는 사람의 모습으로 혹은 누군가의 마음 속에 들어 간다 던지, 필요한 사람의 눈에만 띄는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신의 개입을 현실 세계에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호메로스에게  있어서 신이란 우리  현실속에 늘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 것 같다.

어쩌면 올림푸스산에 사는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우리 인간들의 잠재된 무의식을 신이라는 모습으로 형상화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무의식은 육체를 조정한다. 내가 인식하는 것은 사실 무의식의 표면화다.

그래서 신화 속의 신은 인간의 모든 감정과 행동, 그리고 인간이 활동하는 모든 영역을 관여하고 갈등을 중재하며  함께 공존할 수 있었다고 본다.

신과 인간의 공존은 결코 신화가 아닌 것이다. 바로 현실속에서 공존하는 것이 된다.

무의식이 바로 신이고 그걸 의지화 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 볼 수 있다.

신화 속의 신들은 마법적인 전능자는  아니었다.  그들도 바라는 바를 한번에 성취시키거나 한 순간에 뚝딱해서 만들어 내지 못했다. 늘 인간이 직접 경험과 체험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곁에서 도와 주거나 또는 방해했다.   

신화 속의 신은 그 누구도 될 수 있고, 반대로  그 누구도 신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오뒷세우스는 포세이돈의 아들 폴뤼페모스에게서 빠져 나올 때 자신을 '노바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신들의 유혹과 시련을 '노바디' 가 된 오뒷세우스는 지혜롭게 빠져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운명을 따라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운명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어느것이 맞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인간은 그래서 방황하는 것이라. 

그에 비해  우리는 신은 자유로울 꺼라 생각 한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은 그게 자유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자신의 영역에만 매달린다.

풍요의 신은 풍요를, 바람의 신은 바람을, 바다의 신은 바다에, 지혜의 신은 지혜에, 전쟁의 신은 전쟁에 등등 모두 한 가지 영역에만 권능을 지녔다.

자신의 영역에서는 인간보다 말 할 수 없이 전능하지만 그 외의 영역은 관여가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면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전지전능과 자유는 같지 않다.

손오공이 72가지 둔갑술로 천계를 묵싸발로 만드는 난리를 치는 경지에 이르렀어도 여래에 의해 오행산에 500년이나 갇혔다.

신으로 숭배되는  지닌 그리스 신들 조차 자기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전능을 넘어선 자유를 향한 의지에 대해 신의 권능은 미치지 못하는게 아닐까?

<검은 신화>  오공이 윤회를 벗어나려고 투쟁 하는 것과  오뒷세우스가 죽음을 무릎쓰고서라도 집으로 돌아 가려는 의지와 무엇이 다른가?

나를 규정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하나의 깨달음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호메로스를 진정 존경했던 <그리스인 조르바> 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   자신의 묘비 명에 이렇게 새겨 넣은것이 아닌가 감히 추측해 본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진정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 무엇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유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그들은 결국 자유가 되었다.

그 어떤 신의 전지전능도 결국 인간의 자유를 향한 의지는 꺽지 못했다.


동양과 서양은 아주 오래전 부터 자유를 위한 투쟁 신화를 써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자유를 향한 마음은 계속 추구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 인간의 참된 본성이 아닐까?

호메로스의 속뜻은 그렇게 독자들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하도록 창의적으로 그 의미를 공유하려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의미를 캐내는 수고를 하면 호메로스의 속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P8

그녀는 그의 기백에 힘과 용기를 넣어 주었고, 이전보다 더더욱 아버지를 떠올리도록 하였다.
한편, 그는 심중에서 이를 알아차리고 기백으로 경악하였으니, 그가 신이라는 직감이 들었던 것이다. - P32

<오뒷세이아>는 오뒷세우스 대신 텔레마코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중략....
이제 우리는 그가 아버지의 귀향을 위해 어떻게 tele(멀리서) + machos(싸우는 이)가 될지 가만히 지켜볼 차례이다. - P59

그녀는 이렇게 기도하며 동시에 스스로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시작했다. - P64

모든 이방인과 거지들은 제우스에게서 오는 것이니, 보잘것없는 베풂이라 할지라도 사랑스러운 법이야. - P160

알키노오스의 궁전을 지키던, 황금과 은으로 맏는 개들과 달리 아르고스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오뒷세우스는 물론이고 페넬로페, 라에르테스도 신의 도움으로 젊어지기도 하고 아름다워지기도 한다. 아르고스는 이 시에서 유일하게 실제 시간의 흐름을 가르켜주는 존재이다. - P428

제우스께 태어난, 라에르테스의 아들아, 허다한 계책에 밝은 오뒷세우스야. 그만두어라. 크로노스의 아드님, 두루 살피시는 제우스께서 네게 노여워하시지 않도록 모두가 겪는 전투, 그 다툼을 멈춰어라 - P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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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글쓰기의 쓸모
김종원 지음 / 서사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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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지은이:  김종원

   :  삶과 글은 둘이 아니다.



작년 9월 중순 부터 알라딘 서재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이제 딱 일년이 되었다.

일년 동안 75권 정도 책을 읽었고 그중에서  독후감 69편을 올렸다.  (일주일에  평균 1.4권을 읽고 독후감을 쓴 꼴이 되네.)

애초에 중국에서 한국의 책을 어떻게 구매할 줄도 몰랐던 내가 이제는 알라딘을 통해 책을 주문하고 있다.

게다가 책을 읽고 또 서재에 글을 올릴 정도가 되었다면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다.

내 글 뿐만 아니라 친구로 청한 21명의 알라딘 선배님들의 서재 글을 통해 어떤 책을 읽고 어떻게 글을 쓰는지 눈여겨 보고 배운 일년 이었다.(지금까지 내가 오프라인에서 만났던  친구들 보다도 훨씬 많은 숫자다.)

대신에  책에 대한 금전적, 시간적 소비가 많아졌다.

한달에 한번,  DHL  배송되는  책에 대해 아내에게서 이제 그만 좀 주문하라는 잔소리 성화를 들어야 하지만 그래도 욕 먹더라도 꿋꿋하게 눈치를 보며 구매를 한다.

(중국에서 하는 알라딘 책 주문은 인민폐 1000위안(18만원)을 넘지 않게 주문해야 한다. 금액이 넘으면 반송이 된다고 해서 매번 아슬아슬 하게 금액을 맞춘다. 운비는 대략 한화로 4~5만원이 나온다. )



구매는 보통 10권 좌우로 하는데  읽기는  반도 채 못 읽는 경우도 많다.

예전에 독서 하지 않았던 시기와 비교 하면 일주일에 평균 1권 이상 읽는 것은  결코 느린 속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책 표지를 뜯지 않은 것도 수두룩 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부터 나는 여러 책들을 동시 다발로 읽기로 했다.  사무실에 10권 정도 쌓아 두고 조금씩 따로 따로 읽고, 집에서도 전혀 다른 책들을  조금씩 건드려 보는 것이다.

그렇게 읽다가 재미가 있는 것은 그대로 쭉 읽어 버리고, 흥미를 잃은 책들은 그냥  휴독(休讀)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식으로 장기휴독에 들어간 책도 꽤 된다.

언제 다시 집어들게 될 지 요원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읽게 되겠지'  하며 마음 편히 먹기로 했다.

그런데 읽어 내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사실 제일 어려운 것은 글쓰기라 생각 된다.

글쓰기는 독서보다 훨씬 신경이 많이 쓰인다.

알라딘 서재 선배 이웃님들의 잘 썼다고 생각 되는 글들을 보면서  감탄도 하고 공감도 한다. 그걸 보며 나도 어찌 되었든 일주일에 한편은 꼭 쓰자고 다짐한다.

하지만 역시 글쓰기는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글이란 원래 쉽게 써지지 않는게 맞다고 동의 해주는 책이 있다.

사실 오늘 리뷰하는 책<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은 나의 일년간 독서 활동중 '내가 꼽은 최고의 책' 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주고 싶다.

바로 이 책<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은 읽는 내내  나에게 많은 위로와 격려 그리고 용기를 주었다.

이 책은 작년 11월에 읽기 시작했는데 이제서야 다 읽었다.

책을 읽는 데만 거의 10개월이 소요가 된 셈인데 이는 나의 일년간의 독서 활동 내내 옆에 끼고 읽은 책이라 보면 된다.

하루에 천천히 몇 페이지만 읽거나 마음에 와닿은 부분을 포스트잇에 한자한자 또박또박 사경(寫經)하는 마음으로 읽고 새겼다.

농밀(濃密)한 글쓰기가 되야 한다는 저자 김종원 작가의 격언들은 독서와 글쓰기를 시작하는 내게 큰 지침이 되었다.



김종원 작가는 괴테(1749~1832)가 사용했던 글쓰기 방식을 적용하여 자신만의 글을 써야 함을 강조 한다.

그러한 글쓰기가 되려면  '글 하나에 심장을 이식 한다' 는 마음으로 쓰라고 한다.

글에다가 심장을 이식 시키라니?  글에다 심장을 달아 주라는 말인가?

전혀 생각 지도 못한 발상이다.

어떻게 글을 쓰면 글자 하나하나에 심장을 달아 주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또 심장이 파닥파닥 뛰는 글은 도대체 어떤 글인가?

참 멋지다. 글쓰기의 의미가 이처럼 멋있게 느껴지다니?

내가 쓰는 글 한자한자에 심장을 달아 놓는것과 같이  글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이는 글에다 생명을 부여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글쓰는 자들은 자신의 글에서 생명을 창조 하는 것과 같은 보람을 느낀다.

또한 자신이 잉태한 글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은 쓰면 쓸수록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게 되리라.

그러니 왜 많은 작가들이 고통속에서도 글을 쓰고, 또 그들이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지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러한 경지까지 이르려면 작가의 경험상으로는 최소한 30년의 시간이 걸리단다.

작가가 말하는 30년이라는 시간은 평범한 일상의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글쓰기의 시간을 뜻하는 것 같다.

일상속에서 글쓰기, 간절한 마음을 담은 글쓰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성장하는 글쓰기가 되는 과정의 시간의 총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일상의 순간순간을 놓치지 말고 보는 것을 그대로 쓸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고 한다.

화려한 문체나 근사한 주제가 아닌 나의 일상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어야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글쓰기에 대해 이러한 위안을 준다.

<쉽지 않지만 그래도 버거운 일은 아니다. 할 수 있다. 쓰다가 쓰다 보면 글에 어느덧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내가 품었던 마음이 글로 흘러나오는 순간, 그것은 단어가 되고 문장을 이루며 비로소 나의 글은 그렇게 써지는 것이란다.

남의 글을 보고 감탄하고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글을 쓰는 것이다.

이는  나의 글을 통해 내 삶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것을 인식 해야 한다.

내 삶 속의 주인공이 바로 나임을 자각할 때  바로 곧 내 삶이 되는 글쓰기가 되는 것이다.

삶과 글은 둘이 아니다.

이렇게 보니 글쓰기는 참나를 찾는 구도(求道)의 여정과 비슷하다.

지난 일년간 또 다른 세상을 열어준 독서와 글쓰기는 문해력을 높이고 몰입의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지금의 바램은 죽을 때 까지 이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그렇게 글은 내게 삶이 되고 나를 변화 시키고 있다.




질문은 오직 생각하고 그걸 글로도 쓸 수 있는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일상을 글로 남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서 시작한다. - P23

쓰는 일은 곧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일상에서 시작해야 한다. 잘 사는 사람이 잘 쓸 수 있다. ...중략....
그게 바로 글이 ‘마음을 쓰는 일‘인 이유다. - P35

당신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쓴 글을 굳게 믿어라.
그건 당신이 도움을 주기로 생각한 그 사람을 향한 사랑과도 같으니까. - P69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을 요청하는 것이 아닌, 생각이 넘쳐서 흘러내린 것을 언어로 변환해서 글로 쓴다. .....중략.....
늘 사람을 생각하며 억지로 쓰지 말고 흘러서 넘친 것이 곧 글이 되도록 한다면, 그 글은 세상을 빛낼 수 있을 것이다. - P79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나 수 많은 그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세상이 나를 몰라준다고 비난하지 말고, 내가 세상을 모른다는 사실에 아파하라. - P117

가족도 당신의 글은 읽지 않으니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쓰고 싶은 글은 다 써라.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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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9-04 18: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힐님,
알라딘 서재 입성 1주년 축하드려요.
아, 중국에 거주하고 계시는군요~~

글쓰기가 쉽지 않다는 걸 매번 느끼는데
그래도 읽고 쓰다보면 조금씩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글이 삶이 된다는 책 제목이 좋네요^^

마힐 2024-09-04 18:58   좋아요 2 | URL
네. 감사 합니다.
어쩌다 보니 중국에서 25년 째 살고 있네요....
네 저도 일주일에 꼭 한편 글을 쓰자고 다짐하고 있지만 쓰기는 정말 쉽지 않네요...
그래도 글이 삶이 되어 지리라는 희망을 품고 오늘도 책을 읽습니다.
페넬로페님께서 올려 주시는 좋은 글을 통해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요.
 
사리뿟따 이야기 법륜 14
냐나뽀나까 지음, 이준승 옮김 / 고요한소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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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사아리 뿟다 이야기

지은이:  냐나뽀니까 스님/ 이준승 옮김

   : 위대했던 제자 사리 붓다.



<세상의  주인이시여, 위대한 대각 세존이시여!

저는 곧 이 삶에서 풀려납니다.

다시는 오고 감이 없으리니 세존을 우러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제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레만 지나면 짐 다 벗고 이 몸을 누이게 될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들어주소서! 세존이시여! 허락하소서!

마침내 제가 열반할 때가 되었나이다.

이제 저는 삶의 의지를  놓았습니다.>



사아리 뿟다(번역에 따라서는 '사리 붓다' 라 하기도 하고 '사리불' 또는 '사리자' 로 표기 한다)는 스승이신 부처님을 찾아갔다.

상수(上首)제자인 사리 붓다는 스승 고타마 붓다 보다 먼저 열반에 들기를 청하였다.

"저는 세존 앞에 엎드려 경배할 수 있기 까지 무량겁에 걸쳐 십바라밀을 구족하게 닦아왔습니다. 제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졌습니다. 앞으로는 만날 일도 스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그 두텁던 인연도 다하였습니다. 저는 곧 늙음도 죽음도 없이 평화롭고 복되고  번뇌 없이 안온한 곳, 수만의 부처께서 들어가셨던 그곳, 열반으로 들어 갑니다.

저의 말이나 행동이 세존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점이 있다면, 세존이시여, 용서하소서! 이제 가야 할 시간 입니다. "



앞으로 다시는 만날 일이 없다는 것은 모든 인연이 다했다는 뜻이다.

인연이 다 했으므로 스승 곁을 떠난 다는 말이 내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스승보다 먼저 열반에 들어야 하는 상수제자의 숙명이란 어떤 것인지?

상수제자가 대체 무엇이길래?  왜 제자가  스승보다 먼저 떠나야 한다는 것인가?

거의 동시대 다른 공간이었던 중국에서는 공자의 수제자 안회 또한 공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 또한 상수제자의 숙명 이었을까?

상수제자, 우두머리 제자? 수 많은 제자들중 우두머리 였던 사리 붓다는 어떤 삶을 살았나?

이 책< 사아리 뿟다 이야기>는 부처님 당시 상수제자로 살았던 사리 붓다의 일생을 조명한 책이다.

불교 경전들 속에 등장하는 사리 붓다의 일화를 중심으로 스리랑카 승려인 냐나뽀니까스님이 재구성하여 저술 한 것이다.

그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리 불에 대한 일화들을 이 책을 통해 좀 더 선명하게 각인 시키게 되었다.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 새벽 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 후 자신의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는 사건을 불교용어로  초전법륜(初轉法輪)’ 이라고 부른다.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렸다는 뜻이다.

그 당시 붓다의 첫 제자들은 고타마 시절 함께  고행을 했었던 다섯명의 비구 수행자들 이었다.

초전법륜이후 다섯 제자를 비롯한 수 많은 제자들이 붓다의 가르침과 수행을 통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사리불은 그들보다 뒤늦게 제자가 되었음에도 그의 친구였던 목건련과 함께 교단의 상수 제자로  호명되어 졌다.


어떻게 사리불과 목건련은 먼저 제자가 된 다섯 비구 같은 장로 비구들을 제치고 우두머리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

붓다 당시 많은 제자들이 이처럼 의구심을 품었다.

이에 대하여 스승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여래는 어떤 제자도 편애하지 않고 각자 서원대로 성취하게 해준다.

예를 들어 안냐 꼰단냐의 서원은 누구보다 먼저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 하는 것이었고 결국 그리되었다. 그러나 여러 겁 전 아노마닷시 부처님 때에  사리불과 목건련은 상수 제자가 되고자 원을 세웠다. 이제 그 서원이 성취될 조건이 무르익은 것이다.

그러니 여래는 서원했던 바를 성취토록 한 것이지 편애심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스승 붓다는 의심을 품은 제자들에게 자신과 사리불 그리고 목건련이 얽힌 전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 준다.

그들은 과거 500생이 넘는 생애 동안 한 때는 거위, 토끼, 원숭이 코끼리 등의 동물로 살았던 적이 있었고 , 또 한 때는 고행자, ,  성자 등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수 많은 환생을 했다.

<본생경> 에는  마지막으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몸으로 태어나기 전550번의 전생에 대한 행적이 남겨져 있다.

오랜 과거생 전 부터 이어져 온 인연으로 사리불과 목건련은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길 서원을 세웠던 것이었다.


본래 사리 붓다와 목건련은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유행승 산자야의 제자 였으며 그의 교단을 이끌고 있는 상태였었다.

하지만 부처님의 초전법륜때의 첫 제자 오비구중의 한명인 앗사지의 모습을 보고 단박에 자신이 모셔야 할  참스승이 고타마 붓다임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스승이 누군인지를 아는 것은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게 사리붓다와 목건련은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어  수행 공동체를  훌륭히 이끌며 교단의 크고 작은 일을 처리 했으니 모든 수행자들은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사리 붓다는 지혜의 상징으로  목건련은 신통력의 상징으로 붓다를 협시하게 된다.

이는 부처의 법신(法身) 비로자나불 옆의 상수보살인 지혜의 상징인 문수 보살, 실천력의 상징인 보현 보살처럼  본존불을 협시(夾侍:끼고 모시는)하는 면에서 똑같이 짝을 이룬다.



사리 붓다는 우리나라 불자라면 모두 외우는 반야심경에도 등장한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  이는  “사리자여 물질과 마음이 다르지 않고 마음은 물질적 현상과 다르지 않나니, 색이 즉 공이요, 공이 즉 색이라는 뜻으로 풀이한다반야경의 핵심 사상을 260자로 압축한 반야심경에서는 관세음 보살의 깨달은 바를  사리 붓다에게 전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관세음 보살은 자비의 화신이다. 지혜의 상징인 사리 붓다는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 보살에게 가르침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참 신묘한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는 참다운 지혜는 자비로운 행에서 나온다는 수행의 도리와 일치하는 것이다.

 


열반에 이르기 전, 사리 붓다는 선정을 통해 자신의 친어머니를  자기 외에는 깨닫게 해 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스승보다  먼저 열반에 들기를 그리고 어머니의 은혜를 갚길 청하며 붓다의 허락을 받고 열반할 장소로 떠난다. 그곳은 어머니가 계신 곳이며 자신이 태어난 곳이다.

이는 사리 붓다에게는 태어난 곳이 곧 무여열반 자리 라는 것을 뜻한다.  

사리 붓다는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깨달음에 이르게 해준 후 자신의 이번 생의 은혜를 갚았다.

그는 지금까지  과거생으로 부터 이어온 세속의 모든 인연의 불꽃을 완전히 소멸 시켜 버리며  무여열반에 들어갔다.

넓은 지혜, 밝은 지혜, 민첩한 지혜, 꿰뚫어 보는 지혜를 가졌던 자, 사리 붓다는 그렇게 떠났다.



책을 읽으며  상수제자의 숙명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이해가 안가지만 그것이 전생의 오랜 인연에 의한 서원이었음에는 의심이 없이 느껴진다.

지금은 불교는 하나의 종교이지만 2600년 전 당시에는 수행 공동체에서 출발 했다.

교조 석가모니 부처는 자신을 섬기라고 하지 않았다. 그 분이 무여열반에 들때의 유훈은 법을 등불 삼아 의지하고 스스로 자신을 등불 삼아 의지하고 정진 하라고 하셨다.

이는 곧  자신의 불성(佛性)을 믿으라는 뜻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주체적이지 못한 나약한 태도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그래서 선()에서는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것 까지도  서슴없이 할() 을 외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바탕에는 자비심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혜를 가져야 한다.

사리 붓다의 이야기를 읽으며 다시금 나의 내면이 정화가 되는 것 같다.


사리 붓다. 그는 위대한 제자 였다.


세존이시여, 제가 일주일 내내 존경심으로 당신의 머리 위에 꽃의 차양을 받쳐드린 공덕이 있다면 신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힘도 대범천의 지위도 그 어떤 보답도 아니고 다만 미래에 정득각자의 상수제자가 되기를 서원할 뿐 입니다. - P33

제가 모르는 사이에라도 이 스님을 편치 않게 했다면 이 분도 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 P74

왜 어떤 사람은 사업에 실패하고 어떤 사람은 사업에 성공하며 어떤 사람은 기대한 것 보다 더 발전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비구들을 위한 보시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라고 말씀하신다. - P137

우리를 존재에 묶어두는 족쇄는 감각도 감각대상도 아니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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