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과 팔정도 소리 시리즈 7
활성 지음, 김용호 엮음 / 고요한소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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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참선과 팔정도

지은이활 성엮은이 김용호 /고요한 소리

   :  한 여름 밤의 꿈에서 깬 후 지르는 고요한 소리

 



교실의 뭔지 모를 적막감.

긴장감 오지게 흐르는 군대의 점호 시간.

나의 힘들었던 첫 직장 생활에서의 인간 군상들.  이곳에서 벗어 나야 돼.

밖은 컴컴하다. 길을 찾아 헤멘다. 가야 할 곳이 어딘지 모르겠다.

어딘지 모르지만 너무 덥다눈에 익은 곳인데... 어디지? 여기서 벗어 나야 돼.

, 어디로가?  안돼!



, 꿈. 꿈이 였구나다행이다.

그런데 나이  50먹고서도 이따위 꿈을 꾸다니.... 이거 악몽아닌가?

땀은 왜 이리 많이 흘렀냐? . 너무 덥다보니  이런 꿈도  꾸는 구나.

이제 다시 눈 감기가 두렵다. 또 꿈을 꾸면 어떻하지?

그저께 한의사가 몸에 열이 많고 내 몸 상태는 허한게 아니라 너무 실해서 문제라고 했는데, 복날이라고 몸 보신 한다고 삼계탕 먹지 말라고 했는데...

진짜 몸이 열이  많긴 많으가  보네.

안되겠다.

일어나야 겠다. 참선이라도 해야지.

지금 한 30분 정도 흩어진 마음을  좀 모아야 겠다.

그래, 30분만 마음을 지켜보자.

오른발위에 왼발 올리고, 허리 곧게 펴고, 양손 살며시 포개고, 턱 당겨 눈을 내리 깔고. ~.

 



그런데 왜, 그런 꿈을 꿨을까?

요즘 회사일이 잘 안풀려서 그런가?  지난주에 큰애가 고3 원서 냈다고 나도 고 3때로 돌아간 건가? 회사에서 속썩이는 애들 한테는 군대식으로 군기를 잡으란 뜻인가?

꿈에서 어떤 암시가 있나? 해몽이나 해 볼까?

아 참,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참선 한다고 자꾸 이런 생각이나 하면 어쩌나?

이런 저런 생각을 말자.

그래, 내 마음 중심을 지켜 봐야지.

...

() 한 곳으로 마음을 몰아서 지켜 봐야지.

, 그런데 지켜 보는 것을 요즘은 다른 말로 '마음 챙김'이라고 하던데.

, 얼마전에 본 <참선과 팔정도> 에서 참선이 바로 팔정도(八正道)의 정념(正念)에 해당 된다고 하네.

정념이 곧 바른 마음 챙김이 되는 거 였다구.

그럼 내가 지금 이렇게 관(: 볼 관)을 한다는 것은 팔정도의 정념과 같은 거 였구나.

부처님께서 초전법륜(初轉法輪: 깨달으신후 최초의 설법) 때 가장 먼저 설하신 것이 팔정도 였다고 하는데, 팔정도 너무 쉬운 법문 아닌가?

바르게 보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생각하고, 뭐든 바르게 하라는 건데.

그런데 이게 왜 대단한 거지?

아차여기서 또 내가 놓치는게 있었네.

뭐든지 안다고 생각 하는 순간 좀 쉽게 보는 경향이 생기지.

쉽게 보는 순간 이미 어긋나게 되는건데... 아직도 내 마음이 그렇네.

(: 계율), (: 선정),(: 지혜)  3()이 곧 팔정도라고 했어.

맞아, 계에 해당되는 것이 정어(正語: 바른 말), 정업(正業: 바른 행위), 정명(正命 바른 생계), 정정진 (正精進 바른 정진) 이고 정에 해당되는 것이 정념(正念: 바른 알아차림),  정정(正定: 바른 집중), 혜에 해당하는 것이 정견(正見: 바른 견해 ), 정사유(定思惟: 바른 생각)가 된다고 하던데.

부처님 께서 팔정도에 바로 불교 수행의 핵심이 다 담겨 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솔직히 나는 팔정도를 거의 무시 하지 않았나?

오직 참선과 관만 하면 된다고 생각 하지 않았나?

모든 도는 통하니까 참선과 관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어쩌면 고정된 생각 이었구나.

이제 보니 기본이 없이 바로 테크닉만 바로 추구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거였구나.

요새 '도인병(道人病)' 걸린 사람들이 많다더니만 어쩌면 내가 그중 한 명이 될 수도 있었겠구나.

공부 좀 하면 편안해지고 뭐든지 한번 보면 대략 스캔이 다 되어서 다 안다는 생각이 올라오지. 이런 현상이 어쩌면 아집 (我執: 나라는 집착), 아만(我慢: 나의 교만함 ),아상(我相: 나라는 고정 관념)의 시초인데 나도 모르게 또 빠질 뻔 했네.

맞아. 계를 뛰어 넘고 바로 정과 혜로 들어 가면 이런 병폐를 유발하게 되지.

계를 지키지 않는 기본도 안 된 상태에서 어떻게 수행이 더 깊어 지겠나?

결국 팔정도에서 도()'' 을 뜻하는 것 이고 길이 곧 ''인데  도라는 관념을 너무 거창하고 높게 잡고 있는 게 아니 였을까?

맞아. 어쩌면 중국어 중에서 '안다' 는 말을 '知道,不知道', (지도 zhi dao 쯔다오: 안다, 불지도 bu zhi dao 뿌쯔다오: 모른다) 라고 하는데.  얘네들은 노자의 후손 답게 '' 를 그냥 일상 생활어로 쓰고 있었구나.

도를 안다. 길을 안다 라... .

, 그런데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하면 도가 아니라 했는데...

도는 그냥 이름에 불과 한 것이란 뜻이겠지. 금강경에도 그런 비슷한 말이 나오지 않나?  

역시 도는 길이 맞나 보다. 노자와 부처가 서로 통하는 걸 보니....

결국 팔정도가 가장 기본이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수행인 것은 확실한데 나는 왜 그동안 너무 쉽게 생각했지?

아휴, 내가 또 망상을 피우고 있구나.

어쨓든 지금 부터 라도 다시 근본으로 돌아 가는거다.

바르게 지켜보기(정념) 를 하려면 먼저 지금 처럼  들떠 있는 마음을 놔야 겠다.

그래야 고요하게 하고 청정하고 맑아지도록 해야 겠지?

생각이 많다는 것은 내 지금 상태가 아직 고요하지 않다는 증거야.

그래, 다시 또 내 근본을 비추어 지켜봐야지.

그래서 이걸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하지 않았던가?

공부가 깊어지면 세밀해 진다고 하던데.... 현미경으로 보듯이 샅샅히 톺아 보는 경지까지 이르면 좋겠다.

, '좋겠다' 고 바라는 마음도 욕심이다. 이것도 놓아야지.

아직도 난 너무 놓치고 있어. 놓치는게 많다구.

에이? 또 이것도 놓지를 못하고 놓치고 있네.

것과 놓는 것. 한 글자 차인데 천지차이가 되어 버리네.

'털끝만치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사이 만큼 벌어지나니   

 (毫厘有差天地懸隔  호리유차,천지현격)'증도가(證道歌)에서 한 말이 이거 였구나.

, 이제 다리가 저려온다.  보통 20분 지나면 다리 저리는데 20분은 지나겠지?

그나저나 30분 다 된 거 아니야?

, 다시 주. . . 모으자.

아니, 벌써  40분이나 지났네?

30분만 앉아있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지?

, 망상만 피다가 시간 보낸 것 아닌가?

에휴,  오늘 공부도 또 헛 탕인가?

그나마 참선이라도 하니 잠깐 더위는 피한 것 같네.

, 이제 다시 자러 가야 겠다.

이제 악몽을 다시 꾸진 않겠지?

 



* 고요한 소리는 내면으로 지르는 치열한 소리다

   나 처럼 고요한 망언이 되어서는 안된다.

부처님은 교주가 아니셨고 불교 역시 교주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 P14

에베레스트에 남이 다 올라가니까 덩달아 도전장을 던지고 오르는 겁니다.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에베레스트 끝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도중에 엄청난 사고를 내고 심지어 조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눈 안보이는 이 공부길에서는 에베레스트보다 더 많은 조난자들이 속출하고 있어요 - P28

왜 계 공부를 먼저 해야 하는가? 계가 어느 정도라도 이루어져야 정에 들어가도 순조롭고 장애나 위험이 적기 때문입니다. 불교 공부를 하는 정신세계의 길은 물질세계의 길보다 더 위험천만합니다. - P38

소위 도인 바람 때문에 계를 안 지켜요. 전부 도인이 되어버려서 첫걸음부터 계를 초월해서 놀려고 합니다. ‘계 같은 것은 하근기 중생들이 닦는 것이지 우리 도인들은 그런 데 구애되면 안된다‘하는 식의 병이 있지요. 이 병은 단연 고쳐야 합니다. - P50

정신세계의 욕심은 일종의 확신이 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일단 확신이 자리 잡으면 고칠 방법이 없으니 그야말로 지옥에 가도 안 고쳐진단 말입니다. - P56

계를 통해 청정을 얻고, 그것을 바탕으로 바른 집중을 통해서 고요를 얻고, 그 청정과 고요가 기반이 되어서 참으로 찬란한 지혜의 밝음이 나옵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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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Philos 시리즈 27
사이토 고헤이 지음, 정성진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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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DAS KAPITAL 資本論)

지은이:  사이토 고헤이 지음/ 정성진 옮김

   :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힘 되찾기






마힐: 안녕하세요. 저는 마힐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자본론>이란 책을 펴낸 원작자 칼 마르크스(1818~1883)님을 모시고 가상 인터뷰를 진행 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는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을 쓴 사이토 고헤이 상()을 모셔 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원저자를 모시는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이토 고헤이 상한테는 아쉽겠지만 나중에 별도로 한번 모실 기회가 있으니 그때 까지 참아 주세요.



칼 마르크스: , 그렇지. 아무래도 원조가 가장 근본이 되는게 아닌가? 사이토 고헤이 군 보다야 내가 더 박식하지.



마힐:, 저도 선생님 처럼 생각 하는데요. 근데 마르크스님의 책을 접하기가 쉽지 않아요.  생각 보다 훨씬 진입장벽이 높아요. 특히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는 선생님 책은 거의 금서나 다름 없었어요.



칼 마르크스: 금서? . 나도 지하세계에서 대략 알고 있어. 그럴만도 하겠더구만. 그래도 지금은 많이들 읽잖아?  자네 같은 사람도 읽을 정도면 대중적인 책이 된거지..  



마힐: , 예전에 비해선 대중적이 된게 맞긴 하죠. 선생님이 자본론이란 책을 1867년에 쓰셨잖아요. 저희는 거의 100년이 지나서  1970년대가 되어서야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몰래 보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때는 독일 원서가 아닌, 미국이나 일본 이런데서 몰래 입수해서 봤데요.  지금은 선생님 책을 읽으라고 해도 않 읽는 시대가 됐었지만요... 먼저 선생님 소개 좀 간략히 부탁드려도 될 까요?



칼 마르크스: , 칼 마르크스라고 하네. 독일의 트리에르 지역  출생으로 8남매중에 셋째, 장남으로 태어났어. 원래 집안은 유대인이고 대대로 랍비 노릇을 했다고 해. 그런데 기독교로 개종 했지. 부모들도 먹고 살아야지. 유대인이란 사회 시선을 가지고 당시 유럽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쉬운게 아니야.



마힐: , 제가 보면 좀 천재적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많던데... 역시 선생님도 유대인 출신 이였군요.



칼 마르크스: 유대인은 우리 조상님 이였고, 난 독일인야.

내 아버지는 당시에 아주  잘 나가는 변호사 였어. 그래서 소싯적엔 돈 걱정 없이 살았지. 난 원래 시인이 되고 싶었어. 그런데 아버지가 법학를 전공해야 된다고 하는 바람에 마음에도 없는 법대에 들어갔지. 그땐  맨날 아버지 용돈으로 놀기만 하고 시()만 주구장창 써댔지.



마힐: , 원래 마르크스님은 시인이 되고 싶었군요. 시를 쓰셨다면 감수성이 되게 예민 하셨나봐요?  그런데  제가 궁금 한게 하나 있는데요. 선생님 초상화나 남겨진 사진을 보면요. , 아래 할 것 없이 전부 곱슬 머리,곱슬 수염으로 더부룩 하거든요.

그때도 그랬나요? 항상 늙은 노인의 이미지만 있어 가지고 서요.

같은 19세기를 살았던 찰스 다윈(1809~1882)  이나 레프 톨스토이(1828~1910) 도 보면 또 비슷하게 흰 수염을 엄청 길렀거든요. 그런 스타일이 그 시대에는 먹혔나 보죠?



칼 마르크스: 난 다윈이나 톨스토이 보다 머리 숱이 많아. 비교하지마. 나도 왜 사람들이 내 이미지를  배불뚝에 덥숙룩한 머리와 수염을 기른 모습만 상상하는지 이해가 안돼.

난 그 사람들 보다 훨씬 잘 생겼다고. 안 믿기나 보지?



마힐: 죄송합니다만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칼 마르크스: 이 친구 참 뭘 모르네. 내 외모와 나의 재능에 반한 사람이 내 와이프야.

내가 베를린 대학시절에 '제니 폰 베스트팔렌(1814~1881)' 양과 비밀 약혼을 했었지.



마힐: . 낭만이 넘치셨군요.  그런데 한가지 의문은 선생님은 남부럽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부인이 되신 제니 양의 집안도 명문가의 딸이라고 하는데요.

그냥 선생님 아버지가 원했던 변호사가 되거나 혹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데도 왜 굳이 힘든 삶을 사셨는지 이해가 안가는데요.

자본론도 따지고 보면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 하고 있지 않나요?



칼 마르크스: 난 말이야. 인류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어. 진짜로 말이야.

나는  편안한 삶을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내 성격을 아는지 모르겠지만 난 뭐든지 한 곳에 꽃히면 그것만 깊이 파고드는 경향이 있었지. 내가 학창시절에 결투도 여러번 하고, 나중엔 총 까지 들고 다녔었어. 죽는 것? 두렵지 않았어.  안 믿겨?

나의 투쟁적 성격은 본능이야. 전사의 피가 흘렀다고...



마힐:  ......... 마르크스님이 전사의 피가 흐른다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칼 마르크스: 아마도 내 자신도 몰랐지만 유대인들 피 속엔 저항이라는 DNA가 있을 꺼야. 비록 내 아버지가 기독교로 개종 했고 나도 무신론자라고 해도 말이야. 결국엔 본능이란 게 있단 말이지.

어릴적 난 유복하게 살았고, 난 내일은 생각지도 않았어, 늘 오늘만 있었지.

그런 내 성향 깊숙이  또 기존 체제의 불합리한 것들에 대한 반감이 자리 잡고 있었어.

특히 법을 공부 하면서 말이야. 법이란게 사실 보면  없는 사람들를 위한게 아니라 가진자를 변호하는게 무척이나 많았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한때 신문사의 저널리스리트로 활동 하면서 만났던 아래 계층의 사람들이 받는 부당한 처우에 대해서 분개 할 수 있었던 거야.

난 그들이 받는 불평등에 대해 그 원인을 사회 구조 문제라고 봤던 거지.



마힐: , 그럼 자본론은 불평등에 관한 내용 인가요? 제가 사이토 상의 책을 보면서 선생님 자본론의 핵심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노동과 상품, 가치로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 했거든요.



칼 마르크스: 그걸 이해라고 하면 안돼. 물론 틀리진 않아. 하지만 내 사상은 훨씬 심오해.

이봐. 공부 좀 더 해 보라구. 그건 너무 수박 겉핡기 식이야. 

자네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상품을 팔아야 돌아가는 구조야.

그 상품은 노동을 통해 만들어 지고, 그 상품은 가치가 있어야 팔 수 있는 거지.

난 이윤이란 말을 쓰지 않지. 이윤은 자본가들이 하는 말이고 나는 '잉여 가치' 라고 부르지. 

이 과정중에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아 즉,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해서 자본가에 파는 거지.

자본가는 정당하게 노동의 댓가로 임금을 줬다고 여기지만 노동자는 노동력을 통해 가치 있는 상품을 만들고 , 그 상품의 가치는 잉여 가치가 되어 자본가의 자산을 불리게 만들지.

여기서 노동자는 잉여 가치에 대한 어떤 지분도 얻지 못해.

자본가는 노동의 댓가로 얻어낸 잉여 가치를 노동자 한테서 착취를 한 거잖아.

노동을 한 노동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 되고 있는거야.

세상에 이런 불공평하고 불평등한 관계가 어디 있나?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모순 된 것이라고 본 거야.

난 그걸 면밀하게 관찰하고 또 파헤쳤지.

어떻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해결 할 수 있을 까?



마힐: ,  그래서 < 공산당 선언> 의 명 구절, "만국의 노동자들 이여 단결하라!", 고 하신 것 아닙니까? 불평등한 대우를 개인이 항의하는 것 보다 단체 행동을 통해 하는게 더 효과적이라서 단결하라고 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구절 때문에 우리나라는  파업이나 시위가 너무 많아서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질렸어요.

제가 어릴 때 80년대만 해도요. 근로자 아저씨들하고 전경 아저씨들 하고 화염병을 던지고, 최류탄을 쏘고 온 도시가 숙대밭이 된 게 한 두번이 아니었거든요.



칼 마르크스: 결국 그래서 노동자들은  자기들 권리를 챙취 했잖아.

그 당시 그들은 인간적으로 대우 받길 원했던 거야. 자네가 당시에 어려서 몰랐던 거고.

시위는 질린다고 생각 해선 안돼. 모두가 엄청난 댓가를 치루는 과정 이었던 거야.

자네 나라 얘기를 해 보자면 내 사후의 일인 셈인데... 나도 지하 뉴스를 보면서 알았지만.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노동 시간 준수 하라고 청년 전태일이 청계천에서 분신을 한 게 1970년이야. 자본가의  시각으로 노동자는 부려먹는 존재에 불과 했던 거야.

그런데  그전에 이미  18865 1일 미국에서는  8시간 근무시간을 요구하며 총 파업을 했었던 적이 있었지. 이때 시위중에 많은 사상자가 났었어.

그 뒤 1890 5 1일에도  프랑스에서는  노동자 단결의 날 로 정하고 8시간 노동 쟁취를 위한 시위를 했었지.

이후 5 1일은 메이데이MAY DAY로 불리고 우리나라, 중국, 유럽에서는 노동자의 날이라 정하게 되었던 거야.

내가 1848년에  '만국의 노동자들 이여 단결 하라' 고 했어도 실제로 근무시간 8시간 준수 되기 까지는 15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걸렸어.

내가 자본론에서 노동시간을 줄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을 하잖아?

그런데도 지금은 8시간 준수는 지킬지 몰라도 자본가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잉여 가치를 쌓고 있어.



 

마힐: 그렇군요. 전 무척 선동적인 문구라 금방 다 이루어 진게 아닌가 했는데 정말 많은 시간에 걸쳐 이뤄낸 거였군요.



칼 마르크스: 내가 프랑스 파리에서 내 친구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게 1848년 인데 그때 내 나이 30살이야. 한창 젊은 혈기 였지.

그땐 프롤레타리아 계층 즉, 무산계급, 노동자층의 주도로 사회를 변혁 시켜야 된다고 생각 했어. 

가진자들 즉, 자본가들은 순순히 자기들 기득권을 내놓지 않을 꺼라고 봤지.

그래서 공산당 선언에서는 무력으로 권력을 뺏앗자고 했었지.

아마도 이 부분 때문에 공산당은 과격하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킨거라고 봐.

그런데 나는 1849년 그 다음해에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망명하게 돼.

여기서 잠깐 나의 이력을 좀더 살펴 봤으면 해.

왜냐면 내 자본론이 그냥 나온 책이 아니거든.



마힐: 아마도 선생님의 마르크스 사상도 단계별로 이루어 지는가 보죠?



마르크스 : 그렇지. 일단 나의 시기는 크게 3단계로 나눠진다고 보면 돼.

독일 시절, 프랑스 시절, 영국 시절까지 이렇게 3개국을 거쳐 가며 살았어.

독일 시기때 당시에 유행했던 헤겔(1770~1831) 철학에 영향을 받았지. 헤겔의 변증법 알지?

정반합으로 유명하잖아. 그 당시  헤겔의 사상은 독일 젊은이들에게 크게 영향을 줬어. 나도 한때 헤겔의 사상에 심취했으나 그의 사상은 절대정신 이라는 관념론적 성향과 나의 유물론적 성향은 맞질 않아. 난 헤겔의 영향을 받았지만 난 철저한 유물론자야.

이후 프랑스 시절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면서 확고 해졌지.

그러다가 결국 영국으로 망명해.  그곳에서는 조용히 지내.  아니 홀로 도서관에서 수련했어. 나는 수도자들이 도를 닦는 심정으로 도서관에서 아침 저녁까지 앉아서 책을 보고 분석하고 나의 생각들을 정리하는 과정을 거쳤지. 사상을 숙성 시켰다고나 할까?

그렇게 완성 된 것이 1867년에 발표한 자본론 이야.

 



마힐: 선생님이 발표한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 사이에 19년의 시간의 갭이 있었군요.



마르크스: 나의 자본론은 공산당 선언과 같이 선동과 과격한 논리로 자본주의를 전복 시키자는 내용이 아니야. 나는 그 시간 동안 정말로 당시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구조를 면밀히 분석했어. 사회주의니 공산주의 같은 내용은 나오지도 않아.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오해를 하지.



마힐: 저도 그랬습니다. 사이토 상의 책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을 읽지 않았다면 저도 마르크스 사상은 공산주의 사상이다 라고 생각 하면서 평생을 살 뻔 했으니까요.

칼 마르크스: 난 자본론을 총 3권으로 구성 했었는데 1권은 1867년에 출판 됐지만 2권과 3권은 내 사후에 출판 됐어. 사실 엄밀히 따지면  미완성의  작품인거지.

친구 엥겔스가 내 원고를 정리 해서 2,3권을 모두 출판 시킨 거야.

사실 2권은 7번에 거친 수정을 거쳤기 때문에 거의 완성을 했다고 봐. 그런데 3권은 사실 내가 1권을 쓸 때 구상은 했지만 제대로 방향을 잡았다고 볼 순 없어.

엥겔스가 3권을 집필하면서 내 본래 사상은 희석 되었지만  오히려  자본론은 대중화가 된 셈이지.



마힐: . 그런 비하인드가 있었군요.... 그런데 선생님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사실 선생님과 여쭤 볼 께 많았거든요. 자본주의 사회와 코뮤니즘의 차이 같은거나 공산주의 사회의 문제점, 그리고 케인즈라는 경제 학자와 선생님 사상 비교 같은것 등등. 또 가쉽거리로 혼외자 사건 같은 이슈 같은 것도 좀 물어 볼까 했는데요. 또 강철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등가 교환의 법칙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  등등...

그런데 지면 관계상 더 진행 할 수 없게 되어 아쉽 습니다.

혹시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시면 간략하게 좀 부탁 드립니다.



칼 마르크스: 자네 지금 장난 하나?  좀 거창하게 물어 볼 것 처럼 하더니만 이렇게 끝내 버리자구?  에이... CX... 부루주아 돈 앂는 소리 하고 있네... 내 예전 성격 같으면 그냥 확...

,  한마디만 하고 가겠네.

내 사상의 유통기한이 끝났다고 지금 사람들은 말 하고 있지만 난 아직도 무덤에서 살아 있네.

난 예언자가 아니야. 난 내가 생각하고 숙고한 것을 저술 했을 뿐이야.

어쩌면 요즘 시대에서 말하는 시나리오중 하나를 말 한 거야.

그런데 나의 시나리오를 맹신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있어.

자신의 생각과 관점으로 보는건 자유지만 내 의도가 뭔지는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냥 봐. 내가 뭘 얘기 했는지.

사이토 상이 아주 좋은말을 했더군.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힘 되찾기 위해서라도 자본론을 읽어야 한다' .

일본인을 비롯한 동양인을 별로 내가 좋아 하진 않는데 난 이 말엔 박수를 쳐주고 싶네.

무덤으로 돌아가겠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죽지 않았네. (연기만 솔솔..)



마힐: 선생님 말씀 감사 합니다. (한마디가 아니 시군요.... 욕도 프롤레타리아식으로하시네요. )

저는 이번 인터뷰를 진행 하면서 저의 부족한 점을 많이 느꼈습니다.

다음번 다른 기회로 만난다면 선생님과 설전을 펼칠 수 있도록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무덤에 있는 사람 다시는 깨우지 말아야 할 텐데...)



자본주의는 인위적으로 ‘희소성‘을 만들어 사람들의 삶을 가난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33

국제 NGO옥스템에 따르면, 세계 부호 상위 26명의 자산 총액은 인구 절반에 해당하는 약 38억명의 자산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중략....
반면 서민들은 장시간 노동, 불안정 고용, 저임금 등을 강요 당하며 점점 가난해져만 갑니다. - P39

이 착취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자본론>의 목적이 아닙니다. 이 점은 종종 오해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우리가 오히려 물어야 할 것은 착취의 존재가 드러났는데도 왜 노동자들은 묵묵히 일을 계속하는가 하는 문제 입니다. - P70

노동 과정에서 극히 비열하고 혐오스러운 전체 지배에 노동자를 복종시키며, 그의 생활시간을 노동 시간으로 전환시키고 그의 처지를 자본이라는 저거너트의 수레바퀴에 던져 넣는다.
<저거너트: 사람들에게 절망적인 희생을 강요하는거대한 힘> - P122

우리는 코뮤니즘이라는 유토피아를 상상하기 위해 <자본론>을 읽어야 합니다. - P199

각자는 그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그의 필요에 따라!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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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7-19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답식으로 리뷰 써 주시니
머리에 쏙쏙 들어오기도 하고
재미도 있어요^^

마힐 2024-07-20 01:05   좋아요 1 | URL
실제 책의 내용은 광범위 한 것 같아요. 처음 봐서는 정말 수박 겉 핡기 밖에 이해가 안되는 것 같더라구요. 마르크스가 생전에 차라리 제자들을 길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어요.
마르크스는 글만 남겼는데 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들 멋대로 해석한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우리 조선은 사대부들이 유학을 받아들여 성리학의 나라로 600년을 지탱했는데 마르크스 사상으로 세운 나라들은 모두 한세기 만에 실패하는 걸 보면 사상의 문제라기 보다는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준 문제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어요.
 
우리 봄날에 다시 만나면 - 나는 죽음을 돌보는 수행자입니다
능행 지음 / 김영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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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우리 봄날에 다시 만나면(나는 죽음을 돌보는 수행자입니다.)

지은이:  능행 지음

   : 죽음, 일생에 단 한번 뿐인 소멸. 그러나 다시 또 생(生)으로




우리에게 탄생과 죽음은 일기일회(一期一會)이다.

즉 평생을 걸쳐 딱 한번만 맞이 하게 된다.

탄생도 딱 한번이고  죽음도 딱 한번 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에 읽은 <우리 봄날에 다시 만나면> 에서는 잘 살아야 잘 죽는다는 도리를 일깨워 주는 책이다.

당신의 수행의 길에서 인연으로 만났던 임종을 앞둔 사람들의 생의 마지막 자락 이야기가 담겨 있다.

책의 저자 능행 스님은 비구니 스님으로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최초로 호스피스 전문병원을 지으신 분이다.

능행스님은 충주 정토마을 호스피스 돌봄 센터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울산 언양에 호스피스 전문 자재병원을 건립하였다.




이책은 남들이 있는 곳에선 절대 읽어서는 안 될 책이다.

나는 읽는 내내 눈에서  눈물이 끊이지 않고 흘러 내렸다.

내 가족이 죽는 것도  아닌데도 책 속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의 임종 사연 하나하나에 눈물이 맺혔다.




한평생을 장사를 하며 바쁘게 살던 노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부인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게 되었다.

남편은 부인을 살리기 위해 항암 치료를 받게 하고 백방으로 몸에 좋다는 약을 구하는  노력을 했지만 그 모든 노력은 소용 없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정토 마을로 오게 되었는데 거기에서도 남편은 부인 곁에서 6개월 동안 아픈 부인 간호를 정성을 다해 했다.

남편은 그렇게 해서라도 부인을 곁에 두고 싶어 했지만 부인 입장에서는 아픈 몸이 괴로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부인은 얼른 몸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한 애착이 강한 착한 남편을 홀로 두고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은  살짝 잠이 들었다가 꿈을 꾸게 된다.

꿈에서 부인은 극락을 본 것이다. 그곳에서는 고통도 없고 자기 몸이 다시 젊은 소녀 시절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거기 남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남편에게 작별 인사를 안 했다는 생각이 났다.

그때 그녀는 남편에게 돌아가 마지막 인사를 하고 3일 뒤에 다시 오겠다며 다짐하고 꿈에서 깨어난다.

꿈을 깬 부인은 남편에게 꿈 얘길 했다. 자신이 가야 할 곳, 그 곳엔 아픔도 고통도 없는 곳이고 또한 다시 젊을 적 예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고, 그러자 남편이 그제서야 납득을 하기 시작 했다.

아픔과 고통이 없는 곳이라면 이제는 놔줘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는 3일 동안 부부는 함께 살아 왔던 순간 순간, 병으로 함께 힘들었던 순간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마지막 날 부인은 남편의 품 속에서 잠들듯 편하게 저 세상으로 건너 갔다고 한다.

남편은 그때 밖에 허드러지게 핀 진달래 꽃을 따와 부인 가슴에 안기며 말했다.

"잘 가, 아픔 없는 곳이라 하니 이렇게 보내준다. 난 이제 안 운다다시 꼭 그곳에서 만나자."

남편은 그렇게 아내의 죽음을 통해 죽음 다음에 대한 배움을 시작했다고 한다.

<죽음은  그 죽음을 딛고 더 아름다운 삶으로 떠나는 여행과 같다. p.25>





흔히들 목숨이란 목에 숨이 걸린 것이라고  말한다.

삶은 숨을 들여 마시고 내쉬는 순간에 있는데  목으로 숨이 들어가기만 하고 내 쉬어지지 않으면 숨은 목에 걸려 버린다. 즉, 숨 들여 마시고 내쉴 수 없는 상태.

그때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 부른다.

그러나 육신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 다음에 있는 문은 육체를 가지고 들어 갈 수 있는 문이 아니다.

그래서 생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사람들은 죽음의 문으로 들어 가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 들이지 못한다.

죽는 순간에도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며 떠난다.

그러나 죽음을 준비한 사람들이나 수행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염불 수행만 30년을 한 어느 보살님은 죽음의 순간에 아미타불을 염 하자 아미타불이 오시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만나서 손을 잡으려는 순간 엄마를 부르는 아들의 간절한 목소리에 그만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셨다던 보살님, 그 보살님은 아들에게 다시 돌아와 잘 있으라 하고 48시간 뒤에 다시 임종을 맞았다. 임종의 순간 몸에서 나는 향 내음이 온 병실에 퍼졌다고 한다.

보통 아픈 사람의 몸에서는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수행자의 몸에서는 향기가 난다고 하니 수행을 안 할 수가 없음을 다시 한번 여실히 느끼게 되는 일화다.





그리고 스님의 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자재병원을 짓게 되는 계기가 된 일화일 것이다.

30년 전쯤 스님께서 자신의 공부를 할 려고 호스피스 일을 접기로 마음 억었을 때 전에 호스피스일을 통해 알았던 어느 수녀님 한테서 연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수녀님이 돌봐주시는 환자 중에 아무래도 스님인 듯한 분이 계시는데 도통 말도 안하고 몸에 손도 못 대게 해 씻기지도 못하는 환자가 있다는 것이다.

머리가 길어서 스님인 줄은 겉으로 보고는 알 수 없지만 환자가 지닌 배낭이 스님들이 쓰는 바랑과 같은 것이라 스님이라 짐작하고 자신이 아는 능행 스님께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스님은 그 얘길 듣자 마자 곧 그 병원으로 갔다고 한다.

몸의 냄새 때문에 통풍이 되는 창가 쪽에 놓인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는 도저히 스님이라 볼 수 없는 몰골로 머리도 길고 씻지도 않은 모습이라 당황했다고 한다.

그런데 보는 순간 그냥 느낌으로 그냥 스님이라고 확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 하고 부르자 자신이 스님인 줄 어떻게 알았냐고 묻더란다.

스님이 맞다는 걸 확인하고 이후에 누워 계신 스님의 사연을 듣게 된다.

원래 그 스님은 선방에서 수행을 하시던 비구 스님이셨는데 어느 날 폐렴이 심해져 도저히 공부를 지속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 스님 도반들을 통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했는데 도반 스님들은 그 사이에 공부 하러 선방에 들어 가시고 그 스님 혼자만 병원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병은 심해지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마지막 카톨릭계가 운영하는 호스피스 병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자신이 스님이라는 것을 왜 안 밝혔냐고 하니 그 스님께서는 당신이 도저히 부끄러워서 말 할 수가 없 었단다.

공부를 잘해서 도통(道通)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병 때문에 공부하는 도반 스님들에게 누를 끼치면 안 되고 또 스님이 되어 가지고  타 종교의 도움을 받는 것이 너무나 창피한 일이라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는 것이다.

이때 능행 스님은 불교계에 제대로 된 병원 하나 없다는 현실을 자각 하게 된다.

능행 스님은 선방 스님의 목욕을 시키며 몸을 닦아 주는데 하염 없이 눈물이 나더란다.

수행자의 존엄이 지켜지지 않는 비참한 현실  때문인지, 비록 병든 몸이지만 수행자의 몸에서 느끼는 수행력에 감동해서 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눈물의 의미는 스님만이 알 것이다.

그리고 머리도 다시 삭발하고 승복을 구해와 스님에게 다시 입혀 드리니 온 몸에서 빛이 나더 란다.

그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고 씻지도 않아 알게 모르게 무례하게 대했던  병원 관계자 모두가 놀랐고 스님께 사과를 했더란다.

그리고 그전에 그 비구스님을 위해 기도를 올려 주었던 신부님과 수녀님들 까지 와서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비구스님은 임종을 앞두고 능행 스님에게 자신의 유언을 말한다.

불교계에서도 호스피스 전문 병원 하나만 지어 달라고, 능행 스님은 자신은 능력도 안되고 돈도 없는데 어떻게 짓냐고 못한다고 했단다.

<원만 세워, 원만 세우면 돼.p.96>





(: 원할 원), 불교의 원은 소원과는  차원이 다르다. 소원은 자신이 바라고 소망하는 일이 이루어 지게 바라는 것이다. 어쩌면 비는 것 같은 기복적인 성향이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 원은 세우는 것이라고 표현 한다.

원은 되게 해 달라고 비는 행위가 아닌 것이다.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근본 마음을 일으켜 세우라는 것이다.

아마도 원은 세우는 순간 무위법이 자동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육체가 지수화풍으로 점차 흩어져 가는 순간까지 선방 스님은 능행 스님에게 원만 세우라고 하셨다.




이 대목에서 그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 졌다. 원만 세우라는 말씀에 가슴을 때리고 눈은 더 이상 눈물을 담을 수 없게 했다.

능행 스님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이 어떻게 지을 수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비구스님은 자기가 죽어서 라도 스님  곁에서 도와 줄 테니 꼭 지어야 된다고 했단다.

수행자는 그렇게 마음을 내고 몸을 벗었다.

또한 스님이 세우라고 한 원은 실제로 능행스님이 세우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유튜브에서 조현 기자와 이때의 상황을 말씀 하시는 능행스님 인터뷰를 따로 보았다.

책에는 안 나오지만 그때 선방 스님은 자기가 죽어서 라도 곁에서 돕겠다며 자신은 병원을 지을때 까지 몸 받는 것을 미루겠다고 했단다.

나중에  병원을 세우게 되면 자신은 의사로 다시 태어나겠다고 했 단다.

자기가 비록 타종교의 병원에 있었지만 그 병원에서 만난 의사들이 너무나 훌륭해서 다음 생에는 꼭 의사로 태어나겠다고 발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꼭 의사가 되어서 다시 돌아오겠다고 능행 스님께 말 했다고 한다.

생과 사를 둘로 보지 않는 게 불교의 생사관 이지만 현실적으로 존엄한 죽음에 대해  불교계가 좀 더 고민해 봐야 하는 대목인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자재병원을 지으신 능행스님 원력에 두 손 모아 합장을 드리게 된다.





우리나라 불교는 선불교(禅佛教)가 대세라 공부하다 죽는 것을 최고로 삼는다.

그러나 이것도 치우쳐서는 안되는 것 같다. 고정된 게 없는데 수행자라고 해서 죽음을 다 초월해야 하는 것인가? 삶이 중요하듯 죽음을 대하는 것도 초월이란 말로 포장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여법(如法)하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한 게 맞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스님이 지켜 봤던 많은 죽음의 사례 중에서  일반인일 수록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해 놔야 된다는 것을 느꼈다.

스님들이야 수행자이니 죽음을 생과 더불어 하나의 관문으로 여기지만 일반인들은 그렇 질 못하다. 그러니 그럴수록 더욱 수행자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된 다는 것이 느껴졌다.

떠날 때 잘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사는 것도 잘 살아야 잘 떠날 수 있을 것이다.





탄생과 죽음을 한 단어로 표현 하면 삶이 된다.

삶이라 해서 사는 것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는 것이 곧 죽으러 가는 것이니  삶 속에 이미 죽음도 포함 된 것이다.

그래서 옛 선사들 께서는 생사는 하나라고 하신 것이다.

내 나이 50, 죽음이 언제 올지 어찌 알 겠 는가?

지금 당장 죽는다 하면 나는 여여(如如)하게 죽음을 맞이 할 수 있을까?

잘 죽을 수 있게 지금 이 순간, 잘 살아야 겠다.

아니 잘 살기 위해 잘  죽어야 겠다.

맞다. 원을 세워야지.

살고 죽는 것에 끄달리지 말자.

여여하게 살다 여여하게 돌아 가자.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일체 물질 세계는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응당 내가 있어서 상대가 있음이라. 용도에 따라 닥치는 대로 내면에 놓고 관 할 지어다.>

 

대행 스님의 뜻으로 푼 금강경 중에서 ...

 


내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생의 마지막을 맞게 될지 미리 생각해두어야 한다. - P100

우리는 이생에서 뜻을 가져야 한다. 열심히 수행하고 죽음에 대해 배우면서 지금 이 순간을 최고의 기회로 삼아야 할 뿐만 아니라 죽음 역시 최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 P105

죽음 앞에 당당하려면 자신의 삶 앞에 당당해야 한다.
어떤 이유로 죽는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는냐가 더욱 중요하다. - P126

용서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중략...
죽음 앞에서 하는 용서야 말로 진정한 자기 수용의 과정이다. - P149

윤회를 통한 재생의 삶은 선택이다.
다음생에 어떤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키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습기에 따라 그대로 이 세상에 재현 되는 것이다.

삶의 질이 곧 죽음의 질이며
죽음의 질이 곧 그 다음 생의 질적 기반 입니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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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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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문학의 숲을 거닐다

지은이:장영희 문학 에세이

   : 문학의 힘으로 일어서다

작년 9월 부터 시작한 독서 활동이 이제 곧 일년이 다 되어 간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책을 읽으며 책으로 많은  인물들을 만났다.

내  50평생 동안에 사회에서 직접 만나서 감흥을 받은 사람들 보다 책을 통해 알게 된 인물들이 앞으로는 내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 같다.

이번에 읽었던 <문학의 숲을 거닐다> 의 저자 장영희 교수님(1952~2009)도  그럴 것 같다.

책을 읽을 때는 너무나 좋아서 읽고 난 후 쉽게 독후감을 쓸 줄 알았는데 막상 글을 쓰려니  여러가지 생각이 일어나서  쉽게 쓰질 못하겠다.

왜 그런지, 상당히 당황 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후감을 써야 한다면  맘에 들었던 것 부터 시작 해야 겠다.

먼저 이 책은 장영희 교수가 2001년 부터 조선일보에  영문학  고전을 소개했던 칼럼들을 모아 출판을 한 양장본 책이다.

책은 고전이라 불리는 영문학 작품들과 장교수님이  겪었던 일상 들이 조화롭게 구성 되어 있고 중간중간 여백의 미처럼 사색하게 되는 그림들의 배치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여지껏 읽었던 다른 책들에 비해 이 책 만큼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조심스레 책을 넘기며 보게 되었다.

마치 책이 장영희 선생님의 분신이나 되는 듯  책을 아주 조심 스럽게 대하게 된다.

아마도 책을 읽는 내내 작가 장영희 교수님의  입장에 서서 감정 이입이 되었던 것 같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은 후 평생 목발에 의지한  채 살았지만 항상 밝은 모습으로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지도 했다는 장영희 교수.

그녀가 소개한 영문학 작품들 대부분은 내게는  생소 했지만 나중에 읽어 보고 싶을 만큼 사랑과 희망을 말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 작품들중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칼럼은  에밀리 디킨스 작품과 작가의 일생을 소개하는 구절이다.

사랑은- 생명 이전이고

죽음- 이후 이며-

천지창조의 시작이고

지구의 해석자             -p.78 중에서

이 시를 쓴 에밀리 디킨슨(1830~1886)  에 대하여 알고 싶다며 어느 청송 교도소의 재소자가 장영희 교수에서 편지를 보냈단다.

장교수는 영미 문학 전공자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미국의 어느 여류 시인을 청송 교도소 재소자가 언급했다는 것에 놀랐었다며 에밀리 디킨스의 일생을 간략히 소개한다.

1886 5 , 55 5개월 5일을 살고 나서 죽을 때 까지 표면적으로는 평범했지만 내면적으로는 가장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시인 이였다고  소개한다.

에밀리 디킨슨은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흰색 드레스만 고집해 입었고  30세 이후는 죽을 때 까지 자기집 밖으로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생전에  몇 편의 시가 그녀 몰래 발표가 되긴 했지만 디킨슨 사후에 그녀의 책상 서랍 속에서 그녀가 썼던  2천여점이 넘는 시가 발견 되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디킨슨 시에는 제목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시의 첫 구절을 제목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디킨슨의 시중에서 가장 알려진 시.

장교수가 생전 자신의 홈페이지 에 적어 놓았다는 시.

나에게는  어디선가 본 듯한 시. 그러나  꼭 외우고 싶은 시 하나가 생겼다.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주고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나는 이 시에서 장교수의 삶과 디킨슨의  삶이 서로 오버랩이 되는 것 같았다.

디킨슨은 한평생 은둔 생활을 했지만 그녀가  쓴 시 처럼 헛되이 살지 않으려고 내면으로 치열한 삶의 태도를 보여줬다.

그녀가 은둔을 했다고 해서 그녀의 삶의  철학 마저 감춰지진 않았던 것이다.

장교수 또한 신체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녀는 스승이 되어 자신의 제자들을 지도했고 희망을 주었다.

디킨슨과 장교수가 겪었던 외부적 육체의  속박은 그녀들에게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보다 정신적인 자유와 내면으로 성찰하는  삶의 태도가 그녀들의 삶을 더욱 가치있게 빛나게 한 것이 아니였을까?


이외에도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 소개와 장교수가 가르쳤던 멋진 제자들 과의 일화도 좋았지만 그녀의 스승인 브루닉 신부님(1917~1980)과의 일화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우리나라  70년대는 장애인은 대학에 입학 할 수가 없었단다.

이런 정책이 있었다는게 지금은 이해가 안 가지만 그때는 그랬단다.

그녀의 아버지 장왕록 교수가 혼자 대학들을 찾아 다니며 딸의 대학 입학 시험이라도 치루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모든 대학들이 거절했다고 한다. 그때의 절망감이 느껴졌다.

그런 부모의 절실한 마음이 결국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게 된다.

그후 찾아간 서강대 영문과 학과장이었던  브루닉 신부님은 "아니,  대학 시험은 머리로 치는 것이지 다리로 보는게 어디 있냐?" 면서 그녀의 대학 입학 시험을 승낙하게 된다.

열려있는 마음을 지닌 신부님의 감동적인  말씀이다.

만약 그 당시 브루닉 신부님께서 우리나라의 폐쇄적인 정책대로 처리 했다면 이후 장영희 교수는 '교수 장영희' 가 아닌 평생을 '장애인'이란  굴레를 벗어나지 못 했을 것이다.

아찔 하다.  한순간의 결정이 한 평생을 좌우 하게 된다는 게...

그렇게 그녀는 서강대 영문과에 진학을 하게 되고 후에 뉴욕 주립대 영문학 박사를  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엔 그녀는 자신을 받아준 서강대의  영문과 교수가 된다.

책의 마지막은 그녀가 척추암 진단을 받고  투병중에 쓴 칼럼인데 그냥 먹먹하다.

<뒤돌아 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번, 남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 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전에 미리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 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p.334> 는 그녀의 고백에서 눈물이 맻힌다.

그녀는 책의 말미에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나가는가를 가르친다>라고 했단 윌리엄 포크너말을 인용한다.

문학의 힘이 결코 허상이 아님을 보여주려고  넘어진 가운데 또 다시 일어나려는 그녀의 몸짓에서 진정 그녀의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각오와 의지로 살아가고자 했던 작가가 믿었던  문학의 힘에 압도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내가 아마도 이 때문에 독후감을  쓰기가 어려웠던게 아닐까?



장영희 교수의 삶을 생각하니 중국의 작가  한명이 떠오른다.

중국의 현대 작가중에 '모엔''위화'의 명성 보다는 못하지만  사철생(史铁生:1951~2010) 이란  작가가 있었다.

장영희(1952~2009) 교수와 비슷한 연령대로 같은 시간대에  비슷한 장애를 가지고 살다 갔던 작가이다.

사철생은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 때 뜻하지  않게 하반신 불수가 되어 버린다.

이때 부터 자신의 뜻하지 않은 운명을 원망하고  늘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늘 휠체어를 타고 자신의 집에서 가까운 지단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시절 그는 아무일도 없지만 늘 공원 구석 구석 돌며 관찰하고 사색 했다.

그의 대표작인 '나와  지단(地坛은 '디탄' 이라 발음,  지단은 청나라 시기 북경에서 토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을 말함. 참고로 천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말함 )(我与地坛) 에서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진심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또한 그와 같은 인내심과 사유의 방식으로 내가 왜 태어 났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몇 년을 생각한 후 마침내 깨달았다.

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 이것은 변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였던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주신 하나의 사실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생명을 주는 동시에 순리에 따른 그 결과까지도 보증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은 급하게 바래서 되는 일이 아니였던 것이다.  죽음은 반드시 오게 되는 명절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 졌다.  눈앞의 모든 것이 다시는 두렵지 않게 되었다.....>  나와 지단 중에서.



그는 그에게 닥친 시련과 운명을 거부 하지 않고 그 운명에 따른 삶을 선택한 셈이다.

그도 역시 어쩌면 장영희 교수가 생전에 가졌던 문학의 힘을 믿었으리라 짐작 되어진다.

장영희 교수의 목발과 사철생의 휠체어.

그들에게 있어 목발과 휠체어는 평생 동안 장애를 상징하는 도구 였지만 동시에  장애를 극복하는 용기와 희망의 상징이 아니였을까?


그래 문학의 힘, 나도 한번 믿어 보자


문학은 삶의 교통 순경이다. 문학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진정 사람답게 제대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지킨다. - P43

애지,욕기생(爱之,欲其生)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 - P71

애당초 글을 쓰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꼭 써야 한다면 무조건 써라.
재미없고 골치 아프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전혀 희망은 보이지 않고 남들은 다 온다는 그 ‘영감‘이라는 것이 오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기분이 좋든 나쁘든 책상에 가서 그 얼음같은 냉혹한 백지의 도전을 받아 들여라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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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7-04 2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라딘에서 첫 구매한 책이 장영희 교수의 이 책 입니다.
이 책, 너무 좋죠!
언젠가 재독할 책입니다^^

마힐 2024-07-05 11:31   좋아요 0 | URL
저도 두고두고 볼려고 책장 넘길때 조심조심 넘겼어요.
다른 책들은 온통 형광펜에 밑줄 끗고 난리도 아닌데...
 
삼국지 세트 - 전10권 삼국지 (민음사)
나관중 지음, 이문열 엮음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제목: 삼국지

지은이: 나관중 지음/ 이문열 평역

   : 불멸의 시간 동안 불려질 의()를 위한 노래

 

 

 

 

'마크  트웨인(1835~1910)' 이란 작가는  '고전은 누구나 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 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 비유에 들어 맞는 책중의  하나가   삼국지(三國志)가 아닌가 싶다.

삼국지 덕후들에게는  동의가  안되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삼국지는 너무나 잘  알지만 50이 다 되도록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는 책중의 하나였다.

 

 

 

나에게 삼국지는 살아오면서 인형극이나  만화 그리고  드라마, 영화 속의 장면들을 통해 머리통 속에 짜집기 된 이야기들이 전부였다.

그래서 책으로 굳이 읽지 않아도  삼국지의   거의 모든 내용을 대충 다 안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솔직히 책으로는  읽어볼 엄두가 안났다고 하는게 맞다.

왜냐면 책으로 읽기에는  삼국지는 진입 문턱이 너무나 높기 때문이다.

일단 요약본이 아닌 제대로 된 삼국지는  한 두권만으로 전 내용을 담아 내질 못한다.

이번에 읽은 <이문열 평역 삼국지>만 해도 10권이다.

제대로 편역, 번역한 다른 작가들의  책도 거의 10권 정도 수준이 기본이다.

내용이 방대하고 등장 인물도 일반적인 다른 소설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일단 주인공으로 치는 유비, 관우, 장비를 비롯해서 제갈량, 조조, 손권 같은 역사 속의 주인공 급 인물만 해도 수십명이나 된다.

게다가 매 에피소드 마다 등장하는 조연급   인물도 수십명이 훨씬 넘는다.

또한 잠깐 등장 하는 조연이라도 캐릭터의 서사 까지 있어서  정독하지 않으면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아마도 이런 높은 진입장벽 때문에 제대로  된 삼국지를 읽어 보려는 엄두가 안났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일단 삼국지를 제대로  한번 정독을 하게 되면 삼국지 덕후로 거듭 나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왜 삼국지 덕후들이 삼국지를 고정된 한가지   판본만 읽는게 아니라 여러 버젼으로 읽게 되는지 이해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이번에 어쩌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읽어 보니 '왜 이제서야 읽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삼국지의 가치가 새롭게 느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대부분 삼국지 하면   '삼국지'라고   부르지만 삼국지의 본토, 중국에서는 '삼국연의(三國演義)' 라고 부른다.  

'삼국' 뒤에 '' 를 빼고 '연의' 를 넣는 것이다.

원래 연의(: 멀리 흐를 , : 옳을 ) 란  말은 역사적 사실을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는 소설이란 뜻으로 썼다고 한다.

 

 

 

내가 25년 전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어느날  TV를   보는데 어느 한 프로에서 사람 혼자 나와서 삼국지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야기꾼 한명이 부채 하나를 들고 나와서  삼국지의 각각 에피소드를 마치 구연동화 (口演童話) 하듯이 들려주는 것 이었다.

이야기꾼은 삼국지의 모든 내용을 혼자서   상황 연기와 말빨로 풀어내는 것 이었다.

그때 그걸 보면서 '와  대단하다. 저걸  어떻게 다 외워서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식으로 연의란 뜻은 '어려운  역사적 사실을 쉽게 풀어서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공연(?) 해주는 데서 유래 된 것' 이라  이해하면 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연의' 라는 말이 들어 가게 됨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항우와 유방의 천하 쟁탈전인  '초한지(楚漢志)' 는 왜 '초한연의' 라고  부르지 않는 것 일까?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니 삼국지와 초한지는 서로 같은 류의 전쟁 소설이지만 초한지는 삼국지에 비해 역사적 사실의 비중이 더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마천(BC 145~86)이 사기(史記)에서 정사(正史)로 확실히 자세히 남겨 놨기 때문에 초한지를 소설적 허구라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결국 유방과 항우의 이야기는 '7푼 사실, 3푼 허구' 로 불리는 삼국지 보다 허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초한연의' 란 제목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중국에서는 삼국지 하면  '위나라 진수(233~297)'가 쓴 실제 역사 삼국지, 즉 정사(正史) 삼국지'를 가르키고 '나관중(1330~1400)'이   쓴 소설은 '삼국연의'라 구분하여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 이문열 삼국지 평전을 읽으면서 삼국연의를   쓴 작가 나관중이야 말로 진짜 천재라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이문열 작가가 평역이란 형식으로 잘 풀어냈고  1990년대 출간 이래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삼국지 판본들 중 가장 대중적으로 읽힌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내게는 약간의 아쉬운 점도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문열 작가가   평역을 하며 쓴 문장들은 그의 명성에 비해 너무 평범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예전에 읽었던 일본 소설가 '야마오카 소하치(1907~1978)' 가  쓴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대기인 <대망> 하고 자꾸 머리 속에서 비교가 되었다.

대망속의 일본 작가의 문장력에 감탄을 하며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물론 이문열 작가는 원본인 한문을 그대로   번역해야 하는 점 때문에 자신의 문장력을  표현 하려면 분명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그런식으로 두 작가의 비교  자체가 당연히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평역은  원문 번역을 작가적 역량으로 재해석 하는 것이라 작가 명성에 맞는 필력으로  독자의  마음을 파고 들 수 있는 구절이 눈에 띄지 않다는 것에 살짝 아쉽긴 했다.

어쩌면 그만큼  원전을 뛰어 넘는 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나관중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 것   같다.

아무리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썼다고 해도   어떻게 이런 방대한 내용을 소설이란 형식에 다 담아 낼 수 있었을까 하는 감탄만 들었다.

 

 

 

 

소설속에는 충()과  의()라는 대의명분과 전쟁를 이기기 위한 전술과 병법  그리고 그 과정중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온갖 권모술수가 등장한다.

인간 관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해관계가 얽히고 섥혀 있다.

이러한 내용을  어릴때 봐서는 이해가 안되는 것이 당연하다.

고전이 어렵다는게 고전을 읽을때 나이와   경험치에 따라 이해의 정도가 달라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국지 같은 고전을 제대로 이해 하려면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삼국지를 가장 간단히 시간적으로 정리한다면  한나라 말기 183년 부터 282년 까지 딱 100년의 역사를 담아낸 것이다.

전체 100년의  역사는 183년에 발생한 황건적의 난에서 부터 삼국지는 시작된다.

그로부터 50년의  시간안에 우리가 잘 아는 유비,조조,손권을 중심으로 소용돌이 처럼 휘몰아 치는 삼국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다가 232년에  제갈공명이 6번째 북벌중에 오장원에서 큰 별이 되어 지고 만다.

여기에서 삼국지 내용의  90프로가 끝이 나버린다.

이후  50년의 시간을 나머지 10퍼센트  이야기로 채운다.

그 나머지 내용은 제갈량이 죽은 시점 232년에서 30년 후 서촉(西蜀)이 망하고(262) 다시 2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북위(北魏)와   동오(東吳) 282년에 망하면서 삼국지의 100년  이야기는 끝이 난다.

어찌 보면 뒤의   50년은 앞의 50년과 비교하면 허탈하단 생각 마저 든다.

삼국지의  무대가 되는 실제 역사속 시간(183)은   지금으로 부터 약 1800년 전이다.

나관중이 소설로 쓴 시점(650년 경)은 실제 역사에서 이미 1200년이나  지난 시점이다.

1800년전의  역사적 사실과  그 이후 1200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민간의 설화가 나관중에 의해 첨부 삭제등의 과정을 거치며 연의가 완성이 된다.

결국 시간적 차이로 인해  실제 역사와 소설은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때문에 많은 삼국지 덕후들은   실제 역사 즉 진수의 정사와 나관중 소설의 차이를 비교 분석해 가며 읽는데 집착하게 되는 것같다.

 

 

 

이문열 평역에서도 차이가 있는 부분들에 대한  비교 설명이 되어 있다.

연의에서 말한 내용은 실제 역사에서는 있다, 없다 , 혹은 맞다, 틀리다로 비교 부연 설명을 한다.

바로 이 점이 바로 수많은 작가들이 삼국지를   번역하고 평역을 시도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 예로 유비의 촉한 정통론이란 시점에서는  한 황실의 정통을 잇는 유비는 좋은 편, 그에 반에 조조는 간웅으로 보는 편향된 시각이 대세 였었다.

그런데 현대 시대에는 시대의 가치관이 변하자   과거의 편협된 시각에서 벗어나 조조에 대한 재평가나 손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월이 지날 수록  수 많은 삼국지 덕후를 양산해 내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삼국지는 어쩌면 내용을 몰라서 읽는 책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더 큰 의미가 있는게 아닐까?

그 내용을 넘어선 어떤 가치, 즉 삼국지에 등장 하는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나 인간 관계 ,처세술, 전략 같은 것을 넘어서는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내가  조심스레 살펴보니 삼국지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의()가   아닌가 싶다.

삼국지가 1800년 동안 끊임없이 재생산 하는 이유는 에   대한 가치를 부여한 작품이란 것이다.

 

 

 

이에 대해 삼국지 보다 약 700년 앞선 2500년전에 나온 <논어>를 먼저 거론 해야 겠다.

논어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시 하는 사상은 '()과 의()' 사상 이다.

물론 충효예(忠孝)도   공자가 강조 했지만 그럼에도 유교의 핵심은  '인과   의'를 가장 중시한다.  '인과  의' 안에 충효예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말한 인은 수양(修養)을 통해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 어질 인)은 다분히 개인적으로 갈고 닦아야 하는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의( 옳을 의)는 개인의 영역 보다 남들과의  관계에서 더 중요시 된다.

우리가 만약 의리를 지킨다 한다면 그것은   남과의 신의를 지킨다는 뜻이고 , 의를 저버렸다는 것은 남을 배신  한다는 것을 뜻한다.  

나의 는   즉, 나의   옳음은 반드시 타인과의 관계에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는 관계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항상   옳은 것 끼리 뭉쳐서 집단을 형성 하는 경향이 있다.

각자의 옳음은 서로 비슷한 옳음끼리  뭉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비를 중심으로 모인 집단, 조조를 중심으로 모인 집단, 손권을  중심으로 모인 집단이 형성이 되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각자 옳음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국지의 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의리(義理)를 말한다는 것인가? 나는 그렇다고 본다.

 

 

 

내가 본 삼국지의 (옳을 의)는 즉 '옳다는 가치' 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 였던 것이다.

유비도 조조도 손권도 모두가 각자가 옳다는  를 가지고 천하를 다투었다.

아니 삼국지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옳음 , 즉  를 지니며 등장했다.

누구는 도원결의로 의를 지켰고 누군가는 의를 저버리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 했다.

관우는 유비에 대한 의리 때문에 조조를  떠나기도 했고, 조조와의 의리 때문에 죽여야 할 조조를 살려 줬다.

제갈량은 삼고초려한 유비와의 의리를 지키고자   여섯 번이나 북벌을 추진 했다.

조조 또한 자기 나름의 옳음()을 가지고 쓰러져 가는 한() 황실을   지키고자 했다.

 

 

 

이러한 관점으로  삼국지를 본다면 덕후들이 집착하는 삼국지 내용 중 어떠 부분은  사실이네, 지어낸 허구 였네 같은 비교 평가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의를 지키는가 지키지 못한 것인가의  시점으로 보면 좋은 놈, 나쁜 놈의 구분은 없어진다.

이는  각자의 신념에 따라 자신의 옳음 ()을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삼국지는 를 위한 노래와 다름 없다.

삼국지가 부르던 의()의   노래는  1800년전   과거에서 부터 현재를 거쳐 다시 미래에 까지 불려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지는 불멸의 작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演義연의, 멀리 흘러 가는 !

인걸은 이미 가고 없지만, 시간만이 멀리서 부터 끝 모르게 흘러 간다.

도도히 시간속에 함께 흐르던 는 노래가 되어 되돌아 흘려 부른다.

시공간을 하나로 잇는 演義 !

과연 어떤 영웅들이 새로 태어나 다시 이어 부를까?

 

 

조조는 일생을 남에 대한 의심으로 고통 당했지만 자신을 향한 믿음에는 결코 흔들림이 없던 사나이 였다. - P84

유비를 힘으로 이기고 말 재간으로 속이고 학식으로 억누른 뒤에도 항상 그 상대로 하여금 정말로 지고 속고 밀린 것은 자기자신 이라는 느낌에 젖게 하는 어떤 것이 유비의 크고 환한 정신에서 우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 P129

정의일지라도 지나치게 독선에 흐르면 화가 따른다. - P230

대저 가장 못한 치자는 주식과 재물을 탐내고, 그 윗 길은 땅을 탐하며 가장 나은 치자는 사람을 탐한다고 한다. - P290

대저 영웅이란 간교함(奸)과 흉폭함(凶)과 꾀많음(計) 과 표독스러움(毒)을 다 품어야 한다던가

사고 팔았던 사람들의 사이는 거래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나 주고 받았던 사람들의 사이는 그 주고 받음이 끝나도 이어지는 그 무엇이 있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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