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63일차

<十方智者/십방지자/시방에 지혜로운 이들은

皆入此宗/개입차종/모두 종취로 들어옴이라>

 

이제 신심명은 불이(不二) 도리를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불이는 단순히 '둘이 아님' 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별 이전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분별하기 이전, 그 근원을 지칭하는 것이 바로 불이이다.

그래서 불이를 한다는 것은 도의 근원을 말하는 것이다.

도는 포용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시방의 도를 구하는 지혜로운 자들은 종취에 들어온다고 했다.

 

불이개동(不二皆同)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무불포용(無不包容)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십방지자(十方智者) 시방에 지혜로운 이들은

개입차종(皆入此宗) 모두 종취로 들어옴이라

종취(宗趣) 무엇인가.

원래 ( ) 지붕 아래에 보일 (示) 써서  집안에서 제사를 모실때의 제단을 형상화한 모습이라고 한다.

선에서 종은 마음 도리의 근본을 뜻한다.

따라서 둘아닌 도리를 알고, 모두를 포용하는 자비심을 갖게 되면, 자연히 지혜가 생기고 그것이 바로 근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으로 풀이 있다.

불이가 세상을 포용하는 것인지, 원래 불이가 자비심을 갖게 하는지, 선후 관계는 알 수 없지만 불이는 곧 자비심의 다른 말로 읽힌다.

그러니 자비가 있으니 지혜도 생기는 것이라.

결국 불이는 지혜와 자비를 모두 구족하니 과연 () 부처님 마음임은 틀림없다.

 

 

: 十方:  , 방향 방: 열 가지 방향, 동서남북과 동남, 동북, 서남, 서북 그리고 다시 상하를 포함하면  열개의 방향이 된다. 읽을 때는 십방이라 하지 않고 시방이라 읽음.

智者: 지혜로울 , 사람 자:  지혜로운 사람

皆入: 모두 , 들어올 입: 모두 들어오다.

此宗: 이를 , 마루 종: 이 종문에 즉, 선종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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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61, 62일차

<要急相應/요급상응/재빨리 상응코자 하거든

唯言不二/유언불이/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不二皆同/불이개동/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無不包容/무불포용/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오늘 정진에서 신심명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만났다.

신심명의 구절,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오직 간택하는 마음만 꺼리면 된다는 첫 구절을 뒷 받침하는 구절이 오늘 등장한 것이다.

오늘 구절에서 상응(相應) 불이(不二) 신심명 사상의 뿌리가 아닐까 싶다.

분별하지 말라, 간택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불이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이 이기 때문에 서로 상응되는 것이다.

상응은 서로 ()하는 것을 말한다.

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인연. 연기이다.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다.

이것과 저것은 개이지만 인연에 의해 상응하므로 불이가 된다.


 

요급상응(要急相應) 재빨리 상응코자 하거든

유언불이(唯言不二)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불이개동(不二皆同)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무불포용(無不包容)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응한다는 표현을 현대적으로 풀이한다면 눈 깜짝할 변화하는 인연에 의한 관계라 보면 된다.

가족 가운데 아버지가 되고, 회사에서 부장이 되며, 부모님 아래에서 아들이 되는 나의 관계는 늘 고정 되지 않았다.

물건을 사면 손님이 되고, 차를 타면 승객이 된다.

인연에 따라 나도 모르게 순간 순간 우리는 많은 상응을 하고 있다.

그럼 아버지인 나와 아들인 그리고 부장인 나는 각각 다른 사람인가.

이름은 달라질언정, 나라는 인물은 변함과 변하지 않음의 둘이 아니다.

도리를 안다면 신심명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 것이다.

 

 

: 要急: 중요할 , 급할 급: 중요하고 급하다면, 즉 아주 급하다면

相應: 서로 , 응할 응:  서로 응하다.

 唯言: 오직 , 말씀 언: 오직 말할 뿐이다.

不二: 아닐 , 둘 이: 둘이 아니다. * 분별 이전을 뜻한다.

皆同: 모두 , 같을 동: 모두 같아서

無不: 없을 , 아닐 불: 아님이 없다.

包容: 쌓을 , 얼굴 용: 포용은 감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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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60일차

<眞如法界/진여법계/바로 깨친 진여의 법계에는  

無他無自/무타무자/남도 없고 나도 없음이라>

 

우주의 광활한 공간에서 지구라는 행성은 아주 보잘것없어 보인다.

태양계에 속한 지구는 은하계에서 중심도 아닌 변두리 쪽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우리가 속한 은하계 조차도 수많은 은하 하나에 불과하다.

우주는 우리의 인식이 상상하는 범위를 뛰어넘을 만큼 넓다.

가운데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상의 주인을 자처 하지만 과연 우주와 비교하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주 탄생의 파노라마에서 지구에 사는 인간이라는 종은 겨우 초짜리 시간에 불과 하다.

인간에게 탄생과 죽음은 대단히 중요한 같지만 우주의 생멸에 비하면 티끌도 안되는 같다.

우리는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히지도 못한 100년도 안되는 한 생을 마치고야 만다.

우리는 살아야 하는 것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신이 있다면 인간을 만들었을까.

신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이란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비사량처(非思量處) 생각으로 헤아릴곳 아님이라

식정난측(識情難測) 의식과 뜻으론 측량키 어렵도다

진여법계(眞如法界) 바로 깨친 진여의 법계에는  

무타무자(無他無自) 남도 없고 나도 없음이라

 

깨달음의 세계는 생각으로 짐작할 있는 곳이 아니다.

우리의 현상 세계는 너나가 있지만 진여법계에는 너나가 없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하지만 깨달음은 우리가 사는 현상계와 떨어진 이상 세계도 아니다.

깨달은 세계는 우리가 사는 지금 물질적 세계를 떠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사는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가 다르다면 그건 진실이 아니다.

진여법계란 진리의 근원적 세계이지만 또한 현실과 전혀 다른 세계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현상계는 그래서 신비하다.

우리의 존재가 신비한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 眞如:  , 같을 여: 참됨과 같다. 즉 진여란 바로 진리의 자리를 뜻함

法界:  , 경계 계: 법계는 우주를 비롯한 현상 세계 와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포함한 세계를 뜻함

 無他: 없을 , 다를 타: 다를 타는 즉 남을 뜻함. 남이 없고

無自: 없을 , 스스로 자: 스스로 자는 곧 나, 즉 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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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이름 2026-02-27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보고갑니다
 

- 다시, 100일 정진,  59일차

<非思量處/비사량처/생각으로 헤아릴  아님이라

識情難測/식정난측/의식과 뜻으론 측량키 어렵도다>

 

 (空)  (虛) 단순히 비어있는 상태가 아닌, 비움이라는 상징을 보여주는 문자이다.

공이 고정될 없는 인연의 변화를 비움의 역동성을 포함했다면,

허는 보이지 않는 도심으로 비어 있지만 충만함의 근원을 표현했다.

비어있는 도는 만물의 기원이며 움직이지 않는 부동함이다.

부동한 자리를 허라고 한다면 움직이는 변화의 역동성은 바로 공이 아닐까.

() 허가 되고, 용() 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공의 뜻처럼 고정되지 않았다.

도는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체용불이(體用不二) 다.

그렇기에 공과 허는 같은 비움을 표현하지만, 상태가 아닌 상징이 되는 것이라고 본다.

 

허명자조(虛明自照)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불로심력(不勞心力) 애써 마음  일이 아니로다

비사량처(非思量處) 생각으로 헤아릴곳 아님이라

식정난측(識情難測) 의식과 뜻으론 측량키 어렵도다

 

이것은 나의 얕은 생각으론 알려고 해도 헤아릴 없는 경지다.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법성게(法 性 偈)  이러한 경지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 깨우친 지혜로만 알 수 있을 뿐 다른 경계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찍이 선지식들 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르겠다면 그냥 믿어라.

근본이 있음을 믿고 거기에 전부 맡기라고.

사실 의심은 믿음으로 가는 문과 다름 없는 것이 아닌가.

크게 의심해야 크게 깨닫는다는 것은 바로 뜻이 아닐까.

그러니 의심은 분별이지만 분별 또한 버릴 것은 아니다.

또한 깨달음으로 가는 통로가 되니까.

이제는 공이 굴러 간다.

 

 


: 非思: 아닐 , 생각 사: 생각은 ~ 아니다.

量處: 헤아릴 , 곳 처: 헤아릴 곳

識情:  , 뜻 정: 안다는 것과 뜻으로는 즉 의식과 뜻으로는

難測: 어려울 , 잴 측: 재기 어렵다. 즉 측정하기가 어렵다.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신라 시대 원효대사와 더불어 신라불교의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침.

원효대사가 해골물 사건으로 당나라 행을 접어 신라에 남았으나 의상대사는 끝까지 당나라에 가서 화엄경을 완전히 체득하고 돌아옴. 그때 남긴 화엄경의 정수를 단지 210글자로 표현한 것이 법성게 임.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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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58일차

<虛明自照/허명자조/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不勞心力/불로심력/애써 마음쓸일이 아니로다>

 

(虚) (空) 다르지 않다.

비었다  뜻이다.

하지만 차이는 있다.

불교에서 공은 단순히 비어 있다는 상태가 아닌 비움이라는 상징  가깝다.

굴러가는 자동차 바퀴처럼, 공은 멈춰있는 비움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안에서 공은 쉴 사이 없이 돌아간다.

멈춤이 있는 비움이 아니라, 늘 고정되지 않고 돌아가는 비움이 공이다.

우리가 인연에 의해 모였다가 흩어지는 순간에 발생하는 고정됨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내가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되고, 부장이 되고, 손님이 되고, 승객이 되는 모습은 고정되지 않는다.

찰나의 순간인 동시에 인연에 의해 바뀌어지는 순간을 (空)이라는 글자의 상징인 것이다.

(虚)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마태복음의 구절 마음이 가난한 복이 있나니  중국어 성경에는 허심자유복(虚心者有福) 이라고 쓴다.

한글판 성경에서 허심(虚心)라는 의미를 마음이 가난한 , 혹은 심령이 가난한 자로 해석한다.

허를 '가난' 혹은 '없다' 는 의미에서 뽑아내 썼다.

그러나 중국어 성경은 도교에서 나오는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허는 단순히 비어 있음을 넘어선다.

허심은 마음에 사심이 없어 거리낌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티끌 같은 잡념이 없는 비어 있으나 도심(道心)으로 가득 있다.

그래서 도덕경의 허는 텅 빈 충만함 으로 의미를 두었다.

비었지만 충만하다는 뜻이 무엇일까.


우리가 사는 물리적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로 가득 차 있다.

공기를 마시고, 물을 마시고, 숨을 쉬지만, 그 입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물질 세계는 눈에 보이는 것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조화로 이루어졌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연결이 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충만함 이라고 표현할 있는 것이다.

 


허명자조(虛明自照)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불로심력(不勞心力) 애써 마음  일이 아니로다

 

우리의 본체는 비어 있으나 밝아 있다.

그래서 스스로 비춰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충만함 속에 있다면 따로 애써서 마음 일은 없을 것이다.

허심한 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 虛明: , 밝은 명: 비어 있으나 밝은 즉, 허는 텅 빈 충만을 뜻함.

自照:  스스로 , 비출 조: 스스로를 비추고

不勞: 아닐 , 애쓸 로: 애 쓰지 아니한다.

心力: 마음 , 힘 력: 마음을  쓰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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