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96일차
패현에 돌아왔다.
사람들은 내가 천하를 얻어 드디어 금의환향을 했다고 말할 것이다.
사수의 정장 노릇이나 하던, 유씨 집 망나니 셋째 아들 유계가 나라의 황제가 되었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내 나이 마흔일곱, 내 고향 패현을 떠났다.
그때는 사실 사지로 가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 망할 놈의 진시황 노역에 죄수를 호송하던 길이 내 운명이 바뀔 줄이야.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죄수들은 도망갔고 나와 남아 있는 모두는 돌아가면 곧 죽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죄수들을 풀어주고, 나 또한 도망치어 숨어 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선택이 나의 운명을 뒤바꿔 놓았다. 그래서 운명이란 놈은 참으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도망자 신세에서 패현으로 돌아와 보니 어느 덧 내가 패공이 되었다.
그것도 잠시, 나와 형제들은 다시 패현을 떠나야 했다.
진을 멸하지 않고서는 패공이 되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패현을 떠나야만 새로운 나로 바뀌는 것 같다.
패현을 떠난 몇 년동안 우리 형제들은 끈질기게 살아 남아 진을 몰아 냈다.
진은 무너져야 했고, 관중은 먼저 들어가야 했었다.
천하는 어느 새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 하나를 잡으려고 서로 다투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내가 황룡이라면 청룡 한 마리가 먼저 여의주를 잡고 있었다. 난 그걸 뺏으려고 덤비고 또 덤볐다.
여의주를 움켜 쥔 청룡, 그가 바로 항우다. 우리가 서로 차지 하고자 했던 여의주는 진이었다. 우리에게 진은 천하였고 여의주 였다.
항우는 강했다. 그는 정말 인간이 아닌 듯 했다. 세상의 기운이 그 한 사람에게 모두 들어 있는 것같았다. 그 앞에 서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몸이 먼저 떨린다. 나 역시도 늘 그랬다.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난 늘 그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
사실 나는 그보다 뭐든 뒤 떨어졌다. 전장에서는 늘 얻어 터지고, 언제나 도망다녀야 했다.
팽성에서는 처참하게 무너졌고, 죽을 고비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넘겼다.
특히 홍문연에서의 술잔 앞에서는 정말이지 내 목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다.
겨우 장자방과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촉으로 밀려났다.
이때 사람들은 아마 내가 거기서 끝날 줄 알았을 것이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나는 늘 졌으나 아주 무너지지는 않을 만큼만 졌다. 그건 정말 신기했다.
항우가 한 번 이길 때 나는 두 번, 세 번 다시 일어섰다.
군사가 흩어지면 다시 모으고, 성을 잃으면 다시 취하고, 판이 깨지면 다시 어떻게든 짜버렸다.
한신, 장량, 소하가 있었고, 팽월과 영포 같은 자들도 그 판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항우처럼 천하를 혼자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항우는 전투를 이기는 사람이었고, 나는 전쟁을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었다.
쉰 넷이 되어 항우는 죽고 나는 비로소 황제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거기서 초한지가 끝났다고 생각한다.
해하의 노래가 끝났고, 오강의 칼이 떨어졌고, 한나라가 섰으니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때부터가 또 다른 시작이었다.
천하를 얻은 뒤, 다시 일곱 해가 지났지만 나는 쉬지 못했다.
한신은 죽었고,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고, 흉노를 치러 나갔다가 백등산에서 포위되어 하마터면 모든 것이 거기서 끝날 뻔했다.
팽월과 영포 같은 이름들이 여전히 그림자처럼 내 곁을 맴돌았다.
황제가 되었으나 갑옷을 벗지 못했고, 천하를 얻었으나 마음은 늘 칼집 위에 얹혀 있었다.
돌아보면 내 삶은 참 묘하다.
앞의 일곱 해는 천하를 얻는 시간이었다.
뒤의 일곱 해는 얻은 천하가 흩어지지 않게 붙드는 시간이었다.
나는 첫 번째 일곱 해 동안 패현의 유계에서 한나라 황제로 올라섰고, 두 번째 일곱 해 동안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무너질 수 있는 나라를 붙들고 있었다.
그러니 천하를 얻는 일과 나라를 세우는 일은 같은 일이 아니었다.
항우를 이기는 것과 한나라가 되는 것도 같은 일이 아니었다.
내 나이 예순 하나, 이제 다시 패현으로 돌아왔다.
이제서야 돌아와 보니, 젊은 날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항우만 넘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항우가 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천하를 위협하는 칼은 성밖에서만 번득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라를 세운 뒤에 칼 바람이 궁궐 안을 향해 불 것이다.
이제 술이 돌고, 옛 얼굴들이 보이고, 고향의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 앞에서 나는 마침내 노래를 부른다.
大風起兮雲飛揚(대풍기혜운비양) / 큰 바람이 일어나니 구름이 날아오르고
威加海內兮歸故鄕(위가해내혜귀고향) / 위엄이 천하에 미치니 고향으로 돌아왔노라
安得猛士兮守四方(안득맹사혜수사방) /어찌 맹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 것인가
- 대풍가(大風歌) , 유방
사람들은 이 노래를 승전가라 부를 것이다. 그 또한 맞다.
패현 출신의 비루했던 한 사내가 천하를 얻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승전가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정작 내 마음은 마지막 한 구절에서 걸린다.
어찌 맹사(용맹스런 신하) 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 것인가.
천하를 얻었으나 아직 지킬 일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흔히들 이걸 수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성은 눈에 보이는 바깥 성만이 아니다.
바깥의 적은 이미 죽었으나, 안의 싸움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
내가 평생 싸워온 것은 항우였으나, 내가 죽은 뒤 이 나라가 다시 마주할 것은 항우 같은 적이 아닐 것이다. 혈통과 총애와 후계와 공신과 외척, 웃는 얼굴 속에 감춰진 음울한 눈빛과 침묵 속에 숨겨진 칼들이 궁궐 안에서 다시 천하를 흔들 것이다.
항우의 <해하가>가 한 영웅의 마지막 노래였다면, 나의 <대풍가>는 이제 앞으로 불게 될 불안한 시작을 알리는 노래인지도 모른다.
나와 항우의 초한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또 다른 초한전쟁은 다시 시작될 것 같다.
나는 패현의 바람 앞에서 그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내가 세운 한나라는, 과연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나 또한 죽으면, 진시황 뒤의 천하처럼 다시 어지러워지는 것은 아닐까?
이제 내 남은 운명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내 뒤의 이야기는, 또 다른 살아남은 자가 들려 주게 될 것이다.

By Dharma & Mah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