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94일차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 기개세) /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덮을만 하나

時不利兮騅不逝(시불리혜 추불서) / 때가 불리하니 오추마마저 달리지 않는구나

騅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 가내하) /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나

虞兮虞兮奈若何(우혜우혜 내약하) / 우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 해야 하나!

- 해하가(垓下歌)/ 항우(項羽)

 

깊은 , 온 진영 곳곳에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 가락은 잠 못이루는 병사들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초나라 대장의 막사 안에서 술을 마시던 항우도 울적해지며 <해하가>를 읆조린다.

진의 마지막 명장 장한을 상대로 펼쳤던 거록 전투의 대승리, 팽성을 점령한 유방의 56만 대군을 3만 정예병으로 처참히 깨 부수었던 팽성 전투. 그리고 수 많은 고함과 비명 속의 전투 속에서 항우는 애마 오추마를 타고 피 바람 부는 전장의 흙 먼지를 뚫고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항우의 무용(武勇), 이제 우희의 볼에 흐르는 눈물처럼 서서히 지워질 차례가 되었다.

경극 <패왕별희>의 백미는 그 사랑하던 항우의 여인, 우희가 가날프게 항우의 장검으로 목을 긋는 장면이다. 서초패왕 항우와 우희의 마지막 이별, 이들은 이제 곧 저승에서 다시 만날 것이지만 애절함은 더욱 깊어진다.

 

今日固決死,願為諸君快戰,必三勝之(금일고결사, 원위제군쾌전, 필삼승지)

令諸君知天亡我,非戰之罪也 (영제군지천망아, 비전지죄야)

오늘은 죽기로 했다. 너희를 위해 통쾌하게 싸워 반드시 세 번 이겨 보이겠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것이지, 전투의 잘못이 아님을 너희가 알게 하겠다.

 - 사기. 항우본기 / 사마천 중에서

 

, 항우는 힘이 없어서 진 것이 아니다.

다만 하늘이 유방을 선택했을 !

지금부터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강했던 서초패왕, 스스로 봉황이 되어 하늘을 날아 올랐으나, 한 낱 참새떼 같은 유방의 패거리에게 쫓김을 당할지 어찌 알았으랴.

항우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을 배에 태워 떠나 보내고 홀로 유방의 백만 대군 앞에 섰다.

압도적인 수의 병사지만 아무도 감히 혼자인 항우를 대적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이미 충분히 자신을 하늘을 향해 증명했다.

이제 마지막 순간이 왔다.

항우는 유유히 흐르는 오강(烏江) 뒤로 , 자신을 맹렬하게 불 태웠던 운명의 불꽃을 스스로 소멸시켰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항우는 그날 이후 전설이 되었다.

 

사실 <초한지>의 이야기는 <삼국지> 보다 복잡하지 않고 비교적 단순하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 등장한 인물들의 입체적인 면은 훨씬 다양하다.

그들이 당시에 선택했던 사항들이 이후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역사적 사실을 통해 바로 확인할 있다.

등장 인물들의 교훈은 2천년이 훨씬 옛날 이야기 이지만 아직도 유용하다.

진시황의 야심, 이사의 공포, 조고의 술수, 장량의 도의, 소하의 분석, 유방의 똘기, 항우의 패기, 한신의 비루함 등은 우리 마음속의 감춰진 본성과 다르지 않다.

역사속 박제된 인물들을 현재로 소환하여 그들의 마음 속을 마음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한지는 인간에 대해 지칠 한번 씩 곁에 두고 읽어 보면 좋은 안내서가 되리라 본다.

 

초한지는 우리의 마음 이야기다.

우희여! 우히여!

마음을 나는 어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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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4-03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패왕 항우를 잊지 못함은 역발산기개세의 힘과 의지가 아니라 우희를 향한 순정 때문이지요.

마힐 2026-04-03 23:31   좋아요 0 | URL
송나라 때 이청조라는 중국 문학사 중에 최고로 치는 여성 시인이 있었어요.
아마 미국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스‘ 급 정도의 위상 될 겁니다.
그녀는 항우에 대해 <하일절구(夏日絕句)> 란 시를 남겼죠.

生當作人傑,(생당작인걸) / 살아서는 인간 중에 마땅히 인걸이 되고
死亦為鬼雄。(사역위귀웅) / 죽어서도 귀신 중에 영웅이 되어야 한다네.
至今思項羽,(지금사항우) / 내가 지금까지도 항우을 생각하는 이유는
不肯過江東。(불긍과강동) / 끝내 강동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라네.

그의 죽음에 대해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었지요.
그 중에 우희에 대한 순정도 있고요.
또 이청조 시인의 시처럼 구차하게 살아 남지 않은 영웅이라 잊지 못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영웅이 로맨티스트로 마지막을 선택했으니 어찌 전설이 되지 않을 수 있나요. ^^

 

- 다시, 100일 정진  93일차

 

장막 안의 팽팽한 기운을 가르는 줄기 빛은 차갑다.

쓱삭 하고 잘리는 허공의 소리는 어느새 빛을 쫓는다.

장막의 벽에 비춰진 춤추는 검은 그림자.

순간, 그림자의 손 끝은 날카로운 검이 되어 무섭게 한 곳으로 날아간다.

지켜보는 자에게 날아 오던 끝이 어느새 다시 돌아 나와 그림자 속으로 감춰진다.

다시 검과 그리고 몸이 하나에서 각각으로 돌고 돈다.  

어느덧 항장의 살기를 검무는 점점 빠르게 날아 오르고 있다. .

장막의 고요한 정적 속에 지켜보는 자는 싸늘함만 느낄 뿐이다.

 

항장이 휘두르는 날카로운 검무의 마지막은 목이 하늘로 치솟으며 것만 같았다.

살기등등한 패왕(覇王) 항우 앞의 패공(沛公) 유방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긴장을 감춘 웃음 밖에 없었다.

웃고 있지만 웃는 아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 넣고 있는 심정이다.

*홍문의 연(鴻門宴), 유방은 그날 밤 연회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범증은 항우에게 홍문의 연회가 시작되기 세가지 계책을 세워 신신당부를 했다.


상책은 패공이 도착하는 즉시 함양성 문을 열어 주지 않았던 그의 죄를 물어 목을 베어야 합니다.

만약 그게 안되면 연회 무장한 병사를 숨겼다가 제가 신호를 보내면 바로 병사를 보내 치십시요.

마지막, 하책으로는 유방이 술을 좋아하니 반드시 취하면 실수하게 될 테니 그때 가차없이 베십시요.

항우는 호방하게 웃으며 패공 유방의 목숨이 오늘 것을 지켜보라 장담했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는 속담이 바로 홍문의 연이라는 사지(死地) 들어간패공 유방에게 해당되지 않을까.

유방은 그날 , 결국  호랑이 굴에서 무사히 빠져 나오고야 말았다. 

 

어떻게 유방은 당대 최고의 책사 범증이 설계한 사지에서 살아 돌아올 있었을까.

항우의 숙부 항백의 도움 때문인가. 아니면 진평의 거짓으로 따른 술잔 때문인가. 아니면 번쾌의 목숨을 건 술 대작 덕분인가.

춤추는 끝에 자신의 목이 떨어져 나갈 있었던 홍문연에서 살아나온 유방은 과연 정말로 운이 억세게 좋았던 것일까.

 

사실 초한지에서 가장 긴장감을 드러낸 장면이 바로 홍문에서의 연회이다.

누가 봐도 유방이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기 좋은 조건을 가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방은 사지에서 살아 남아 천하쟁패의 승리자가 되었다.

유방이 이날 살아 남을 있었던 여러 조건 가운데 가장 밑 바탕이 조건이 있다면, 유방의 운도 아니고 어쩌면 나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당시 유방의 나이는 (여러 이설이 있지만) 약 50세이고 항우는 24세 정도 되었다고 한다.

둘이 진의 수도 함양을 치기 전에 의형제를 맺었는데 나이가 많은 유방이 형이 것이 아니라 항우가 형이 되었다. 나이 차이가 그렇게나 나는데 젊은 항우가 형이 되고, 나이 많은 유방이 동생을 자처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내세울 별로 없을 나이를 가지고 마지막에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일부 꼰대라고 부르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사실 내세울 별로 없으니 나이라는 계급을 내세운다.

사수의 정장이자 도망자 우두머리, 그리고 패공이 된 유방은 정말로 내세울 게 나이 밖에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16살이나 어린 항우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동생이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어떻게 유방은 내세울 나이 밖에 없는 사람이 오히려 나이를 초월할 있었을까.

 

사실 유방은 항우와 같은 세대가 아니다. 오히려 진을 통일한 진시황 보다 고작 3살 어린 나이였다.

유방은 진시황 같은 세대로 항우 같은 나이는 자신의 아들 뻘로 여겼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방은 항우보다 인생의 경험이 넓고 깊었다.

진시황의 굴기와 몰락을 지켜봤으며 스스로 마을 건달 노릇하며 인간 본성과 심리를 누구보다 파악했었다. 이건 나이가 젊다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경험치 인 것이다.

사람들은 유방이 사람을 쓰는 용인술이 항우보다 훨씬 좋아서 천하를 차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깊은 층엔 나이가 항우보다 많아서 였다고 하면 나만의 비약일까.

 

굽힐 장소에서는 굽힐 알며, 뻣뻣하게 곧을 장소에선 곧게 펼 줄 아는 자. 

그렇게 행 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유방이였다.

만약 유방이 항우와 같은 세대 였다면 의형제를 맺는 자리에서 은근히 자존심을 세웠을 것이다.

유방의 인생은 항우보다 세대를 넘는 경험치가 있었기 때문에 , 동생이란 허울은 아무런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나이가 많아 경험치가 많다는 것은 사지에서도 누구 보다  침착할 있었지 않았을까.

그는 그렇게 자신이란 틀을 부순 사람이다.

이미  라는 (我相)  없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사신도 범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였을까.

만약 유방이 젊었다면 결코 홍문연에서 살아 돌아올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점점 나이를 내세우는 꼰대가 되어 간다면 유방을 한번 떠올려 봄도 좋을 듯하다.

나이는 계급이 아니라 경험의 표식이다.

나의 홍문연은 아직 진행 중이다. 나는 살아 남을 수 있을까.

 

 

: *홍문의 연(鴻門宴):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먼저 차지한 사람이 관중 왕이 되는 조건을 초회양이 걸었다. 유방과 항우는 각각의 군사를 데리고 서쪽과 동쪽에서 출발했는데 결과적으로 유방이 먼저 함양을 점령했다. 후에 항우가 이 사실을 알고 함양에 진입하려 했지만 유방은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항우는 함양 근처 홍문이란 곳에서 유방을 불러 연을 베풀었다. 사실상 죽음의 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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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3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4-03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 다시, 100일 정진  92일차

 

<泰山不讓土壤(태산부양토양),故能成其大(고능성기대) 

河海不擇細流(하해불택세류),故能就其深 (고능취기심)

산은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기에 큼을 이루고,

바다는 가는 물줄기 하나도 가리지 않기에 깊음을 이룬다.> - 사기 <이사 열전> 중에서

 

문장은 (秦)나라의 재상 이사(李斯, 기원전 280~208) *축객령(逐客令) 거두어 달라며 진왕에게 올린 상소문의 구절이다. 진왕은 그의 상소를 받아들여 인재 등용에 있어 작은 것을 버리지 않고, 미미한 재능까지 품게 되었다. 이사의 조언대로 진왕은 마침내 6국을 통일하고 스스로 시황제가 되었다. 이사는 진이라는 변방의 나라를 거대한 제국으로 설계한 명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명성은 세세생생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사에게 예상치도 못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진시황이 전국 순시중에 급사하게 것이다. 진시황의 유언대로 장남 부소가 황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진시황의 또 다른 아들 호해의 스승인 환관 조고가 호해를 후계자 자리로 밀었다.

말도 안되는 상황이지만 조고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교묘한 말로 이사를 설득했다.

부소가 즉위하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 몽염이 권력을 잡으면 지금의 영광도 사라질 것이라는 말, 자손과 가문까지 흔들릴 것이라는 말 앞에서 이사는 흔들렸다.

결국 그는 조고의 대로 부소가 아닌 호해를 선택한다.

명재상이었던 이사가 어떻게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사실 이사는 옳고 그름을 전혀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알면서도 스스로 무너졌다.

그를 무너뜨린 것은 조고의 혀가 아니라, 그 혀에 반응한 자기 안의 공포였다.

선택의 순간 조고의 말은 조언이 아니라 유혹이 되었고, 유혹은 공포로 변하여 이성을 가려 버렸다.

천하를 설계하던 사람이 끝내 자기 자리, 자기 권력, 자기 안위부터 계산한 것이다.

 

한신도 또한 선택의 순간에 직면했다. 괴통은 그에게 여러 번 충고했다.

지금 제나라를 얻었으니, 더 이상 남의 장수가 아니라 스스로 한 축이 되라고 조언했고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자기 운명을 자기 손으로 붙들라고 간절히 설득했다.

그러나 한신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천하는 읽었으나, 자기 안의 결핍은 끝내 다 읽지 못한 것이다.

굴욕을 참는 법은 알았지만, 독립을 감당하는 법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괴통의 조언은 한신에게는 끝내 받아들일 없는 자유의 무게였는지도 모른다.

 

항우에게도 이러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범증은 여러 그에게 조언을 했다. 홍문연(鴻門宴)에서는 유방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항우는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 천하의 판을 굳히기 위해 팽성을 떠나지 말라고 했지만 떠났다. 초회왕을 옹립해야 했지만 결국 죽였다. 그러나 항우는 범증의 조언을 하나도 듣질 않았다.

과연 항우는 범증의 조언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일까.

사실 항우는 범증의  조언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영웅상이 너무 단단했다.

범증의 말은 옳았으나, 옳은 말이 언제나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항우처럼 자기 자신에게 이미 매혹 된 사람에게는 옳고 그름은 모두 자기상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영웅상에 압도되어 끝내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인물이 것이다.

그래서 죽어서 전설이 것일 수도 있지만...

결국 이사는 공포에 무너졌고, 한신은 결핍에 붙들렸고, 항우는 자기 자신에게 갇혀 버리고 말았다.

반면에  유방은 달랐다.

 

도망자의 무리에서 패현으로 돌아온 유계는 패공(沛公)이라는 호칭을 부르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오히려 소하가 그보다 정돈되어 있고, 더 믿음직해 보였다. 유계는 여전히 사수의 정장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소하는 물러섰고, 유방을 밀어 올렸다.

유계는 50평생 이렇게 까지 자신이 올라갈지 몰랐다. 그래서 사양했다.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실패하면 모두가 끝이라는 것도 알았기 때문이다.

유계는 결국 소하의 말을 받아들였다.

유계는 소하의 감언이설 같은 유혹에 넘어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유혹에 넘어간 것이 아니었다.

소하는 유계의 공포를 자극하지 않았다. 그에게 허영도 부추기지 않았다.

다만 지금 판에서는 당신이 아니면 된다고, 당신이 그 자리를 올라야 한다고 설득했다.

오히려 자기보다 책임의 자리로 걸음 올라간 것이었다.

순간부터 유계는 패공 유방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초한지의 인물들은 단순한 영웅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 안에 있는 여러 겹의 마음을 비추어 보여준다.

이사 안에는 공포 앞에서 무너지는 내가 있다.

한신 안에는 인정받고 싶어 끝내 독립하지 못하는 내가 있다.

항우 안에는 자기 확신이 너무 커서 남의 말을 듣지 못하는 내가 있다.

그리고 유방 안에는, 두렵고 누추하고 모자라 보이지만 그래도 자기보다 큰 책임의 자리로 한 걸음 올라가려는 내가 있다.

 

조언과 충고 그리고 유혹은 늘 비슷한 얼굴을 하고 내게 다가 온다. 둘 다 길을 제시하고, 둘 다 내 귀에 속삭인다. 문제는 그 말이 무엇이냐보다, 그 말을 듣는 내 안에 무엇이 있느냐이다.

안에 공포가 가득하면 유혹이 조언처럼 들리고, 내 안에 허영이 가득하면 독이 되는 말조차 격려처럼 들린다. 반대로 내 안에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으면, 쓰디쓴 말도 비로소 조언이 된다.

 

그러니 사람을 망치거나 살리는 것은 능력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결정적인 순간, 조언과 유혹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그리고 분별을 가로막는 자기 안의 공포와 허영과 결핍을 얼마나 아는가.

문제는 안에서 만들어 낸다.

 

초한지는 전쟁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선택의 이야기다.

정확히는, 선택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다.

똑똑한 이사도, 천재적 장수 한신도, 초패왕 항우도 선택 앞에서 무너졌다.

유방만이 결과적으로 자기보다 책임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움직여 천하를 얻었다.

 

 

선택의 순간에 먼저 보아야 것은 바깥의 혀가 아니라, 그 혀에 흔들리는 내 안의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사도, 한신도, 항우도, 유방도 결국은 내 안에 존재하는 여러 얼굴들 중의 하나 일 뿐이다.

오늘 나는 누구의 얼굴로 하루를 선택하고 있는가.

 

: *축객령(逐客令): 진나라에서 실시한 외국인 추방령이다. 당시 진에는 육국의 떠돌이 문사, 재사들이 모여 있어 간첩활동을 하기도 했으므로 그걸 방지하고자 나라 안의 외국인(진을 제외한 6국 사람들)을 모두 추방하고자 명을 내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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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4-01 1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고 나니 초한지의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다가옵니다.
项庄舞剑意在沛公
중국 외무부장 왕이가 한국에 사드배치될 때에 쓴 말이죠.
그 조언과 충고와 유혹이 나의 어디를 건드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해 보입니다.

마힐 2026-04-02 16:09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의 ‘항장의 검무속에 담겨진 폐공 유방을 향한 뜻‘ 의 글을 보고 오늘 쓴 홍문연에 대한 힌트를 얻었네요. ^^
정말로 고마워요 ㅎㅎ
정말 상대의 말이 조언, 충고, 유혹인지는 말을 듣지 말고 내 안의 어디를 건들고 있는지 요즘 초한지를 생각하며 곱앂어 보고 있네요.

호시우행 2026-04-02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한지는 선택의 이야기란 표현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마힐 2026-04-02 16:12   좋아요 0 | URL
네, 초한지는 인물들의 비극적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인물들이 선택의 순간에 담겨진 심리를 들여다 보면 더욱 재미있는 것 같더라구요.
초한지 속에 2000년전 박제가 된 인물들이 내 마음 속에서 아직도 살아 있는 것 같았어요.
호시우행님, 이번 한 주 봄의 기운을 많이 받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다시, 100일 정진  91일차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고, 때가 왔을 때에 단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게 됩니다. 걱정거리는 욕심이 많은데서 생기고, 사람의 마음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한왕의 신하로 있지만 군주를 벌벌 떨게 할 만한 위력이 있고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는데, 당신은 앞으로 위태로울 뿐입니다.

 

괴통은 한신에게 말했다.

유방과 항우가 다투는 천하에서, 이제는 한신이 제나라의 왕이 되어 천하를 셋으로 나누고 형세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이른바 천하삼분론이다.

그러나 한신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듭 거절했다.

흔히 한신의 비극은 괴통의 계책을 따르지 않은 데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한신이 여후에게 죽임을 당하며

“내가 괴통의 계책을 쓰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는 뜻의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한왕 유방을 떨게 하고, 초패왕 항우조차 두렵게 만들었던 한신이 어째서 괴통의 말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인의 손에 허망하게 죽어야 했을까.

그것이 단지 유방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을까.

나는 한신의 비극을 다른 곳에서 보게 된다.

 

한신은 어릴 때부터 가난했다.

굶주렸고, 사람들에게 기대어 밥을 얻어먹었다. 한때는 시골 정장 집에서 여러 날 밥을 얻어먹었으나, 그 집 부인이 그를 못마땅하게 여겨 끝내 밥을 주지 않게 되었다. 결국 한신은 그 집을 떠났다.

그러다 너무 배가 고파 괴로워하던 어느 , 빨래터의 한 아낙이 그를 보고 밥을 주었다.

뒤로도 여러 아낙에게 밥을 얻어먹은 한신은 기뻐하며 말했다.

반드시 은혜를 크게 갚겠소.

 

실제로 한신은 훗날 초왕이 , 자신에게 밥을 준 그 아낙을 찾아가 일반천금(一飯千金)의 고사대로 천금을 주어 보답했다. 자신에게 과하지욕(胯下之辱)의 굴욕을 준 건달도 찾아내어 죽이지 않고 장교로 삼았다. 옛날 밥을 주었던 정장 집에도 다시 찾아가 그 값을 치렀다.

 

그런데 시절 빨래터의 아낙은 한신의 보답 앞에서 오히려 화를 냈다.

대장부가 스스로 밥을 먹지 못하니, 내가 왕손을 불쌍히 여겨 밥을 주었을 뿐이오. 어찌 보답을 바랐겠소?

 

바로 말이 한신의 핵심을 찌른다.

한신은 스스로 대장부라 여겼고, 실제로도 세상은 그의 큰 뜻을 알지 못했다. 그의 재능은 분명했고, 포부 또한 컸다. 그러나 그에게는 치명적인 결핍이 하나 있었으니.

빌어는 먹어도 스스로 벌어먹지는 못한 것이다.

 

배가 고파 죽게 생겨도, 일을 해서 끼니를 해결하겠다는 태도보다는 누군가의 인정과 도움 속에서 버티는 쪽이 먼저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굶주림을 견디는 힘은 있었으나, 자기 삶을 자기 손으로 꾸리는 힘은 끝내 약했던 것 아닐까.

 

한신은 미래를 보았다. 큰 뜻도 품었다. 굴욕도 참았다.

마침내 자신의 재능으로 천하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배고프면 남에게 기대고, 굴욕이 와도 참으면 되고, 때가 오면 누군가가 나를 알아봐 줄 것이라는 습성이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닐까.

빌어먹는 것은 견뎠지만, 스스로 벌어먹는 독립은 끝내 완성하지 못한 셈이다.

 

그래서 그는 제나라를 얻고도 완전히 자기 길로 나아가지 못했다.

한신은 스스로 얻은 위에 서서도, 한왕 유방에게 자신을 가제왕(假齊王)으로 봉해 달라고 청한다.

제나라를 손에 넣은 사람이, 형식이나마 왕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유방은 요구에 크게 분노했다. 자신은 항우와의 싸움 속에서 목숨이 오가는 판에 서 있는데, 한신은 작위부터 요구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장량과 소하의 만류 끝에 유방은 한신을 제왕으로 세웠지만, 바로 그 순간 유방은 한신을 두려운 존재로 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한신의 비극은 괴통의 계책을 따르지 않은 데만 있지 않다.

어쩌면 깊은 ,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결핍과 의탁의 습성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정받기를 바라고, 남이 자리를 주기를 기다리고, 굴욕은 참고 견디면 된다고 여기는 태도.

그것이 결정적인 순간, 독립의 결단을 가로막은 것은 아닐까.

괴통의 계책도, 무섭의 충고도, 결국은 이제는 남의 밑에 서지 말고 스스로 한 축이 되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신은 끝내 자리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니 항우에게 몸을 의탁하기도 했고, 유방의 신하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유방과 항우는 전혀 달랐다.

유방은 비록 낮은 신분에 구차한 모습도 있었지만, 언제나 자기 무리를 모아 스스로 살아남았다.

건달 노릇을 하든, 사수의 정장을 하든, 도망자들의 우두머리가 되든, 늘 자기 식으로 판을 만들었다.

항우는 본래 귀족 출신이었고, 능력 또한 출중하여 스스로 중심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신은?

가장 뛰어난 전술과 능력을 지녔음에도, 스스로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한신의 비극은 천재적 재능이 아니라 스스로 밥을 먹지 못해서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 태사공 사마천이 한신의 비극을 안타까워 하지 말라고 것이 이해가 된다.

 

남이 주는 밥으로는 목숨을 이어갈 있어도,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는 어렵다.

결국 사람은 밥그릇을 스스로 책임 있어야 한다.

자기의 밥은 스스로 벌어 먹자.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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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31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3-31 2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 다시, 100일 정진  90일차

 

여기 사내가 있다.

곱상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언제나 장검을 차고 다녔지만 궁핍하게 살았다.

그는 오늘도 도박판에서 자신의 애인이 춤을 추며 돈을 전부 탕진했다.

아름다운 여인이 춤을 추고 노래해서 돈을 사내는 술과 도박으로 써버렸다.

사람들은 회음(淮陰: 지금의 강소성)지역 최고의 무희가 이런 기생오라비 같은 사내에게 빠진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날 회음의 건달 하나가 사내의 앞을 막았다. 그리고는 시비를 걸었다.

 

어이, 자네, 허리에 긴 칼은 왜 차고 다니나?

멀쩡하게 생긴 놈이 여자한테 빌어먹고 다니는 주제에 칼은 필요한가.

어울리지도 않는데, 차라리 그 칼을 내게 넘기지 그래? 내가 그 칼로 진나라 놈들을 썰어 버릴테니.

자네가 그러고도 남자인가? 자네의 그 꼴은 도저히 봐 줄 수가 없어.

이봐, 자네 용기가 있다면 그 칼로 날 베고 여길 지나가던가, 아니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라구.

 

사내는 자신을 모욕하며 도발하는 건달 앞에서 그저 고개를 숙인 듣고만 있다.

싸움이 일어날 기미에 주위의 사람들은 건달과 사내를 에워싸며 몰려 들었다.

사내는 천천히 자신의 장검에 손을 갖다 댔다. 뽑아서 단 칼에 베어 버리면 된다.

주위의 모든 이들이 긴장하고 사내를 주시했다.

사내의 손은 장검에서 바닥으로 짚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건달의 가랑이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사내의 이런 행동에 사람들은 실망했고, 곧 놀림꺼리가 되어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일을 두고 *과하지욕(跨下之辱)이라 불렀다.

 

내가 순간 모욕을 참지 않고 단칼에 상대를 베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필부의 용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봤자 난 사람을 죽인 죄인밖에 더 되지 않나? 그러나 그 순간의 굴욕을 참음으로써 난 더 큰 포부를 실현할 수 있었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사내가 이루어낸 성과를 당시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내가 바로 당대에 아무도 이길 없다고 여긴 패왕 (覇王項羽)를 꺽고 천하쟁패의 결전에 종지부를 찍은 파초대원수 (破楚大元帥), 한신(韓信)이었다.

 

초한지(楚漢志) 사실 초한대전이라는 전쟁의 무용담보다는 비극적 인물 역사에 가깝다.

유방을 제외한 항우 그리고 한신 모두 비극적 최후를 맞이 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항우의 천하쟁패의 실패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바로 한신의 마지막이다.

한신은 유방과 항우를 같이 비교하면 독특한 특징이 있다.

유방은 밑바닥의 감각으로 살아남은 사람이고, 항우는 귀족의 명예로 스스로가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한신은 둘의 성질을 묘하게 함께 지녔다.

바닥의 생활도 알았고, 귀족의 기개도 가졌다. 그래서 더 크게 떠올랐고, 그래서 더 위험해진 것이다.

 

유방, 항우, 한신 중에 자신의 개인적 능력으로 가장 자수성가를 이룬 인물이 바로 한신이다.

한신은 천하쟁패 시기에 항우와 유방의 편에 모두 서봤다.

그가 최종, 누구의 편에 섰느냐에 따라 천하를 쟁취하게 되는 주인이 달라지게 된다.

하지만 그의 출중한 개인적 능력과 전장에서의 화려한 공적도 결국 천하 통일 버려졌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 된 것이다.

한신에 대한 안타까움은 출중한 개인 능력에 비해 너무나 자기 자신에 대해 인식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한신의 재능을 두려워하는 유방 앞에서 자신을 낮춰야 했거나, 아니면 항우와 유방과의 경쟁에서 제 3의 위치로 스스로를 자립했어야 했다.

자신이 이루어낸 성과에 가려 자신의 처지를 살펴보지 못한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을 감추듯이 천하 통일 후에도 자신을 감춰야 했지만 유방을 너무 얕보았고, 너무 믿었다.

초한지의 가장 비극적 인물, 한신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한신은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강렬한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인물이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만이 아니라, 내려 놓음이 아니었을까.


By Dharma & Maheal  

 


*초한지 속에는 한신과 관련된 많은 사자성어를 접하게 된다.

방금 거론된 과하지욕, 토사구팽 말고도 *일반천금(一飯千金), *배수일전(背水一戰), *다다익선(多多益善), *사면초가(四面楚歌), *십면매복(十面埋伏) 등이 모두 한신과 연관된 고사 성어들이다.

이들 성어는 현대 일상에서도 많이 쓰인다.


:  *과하지욕(跨下之辱): 가랑이 아래의 굴욕, 한신이 더 큰 포부를 위해 잠시의 굴욕을 견뎠다는 고사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 사냥이 끝나면 개는 삶아 먹는다, 한신이 마지막 죽음에 이르게 된 고사

*일반천금(一飯千金): 밥 한끼에 천금을 갚는다. 한신이 가난했던 시절, 얻어먹은 끼니를 훗날 천금으로 보답했다는 고사

*배수일전(背水一戰): 등 뒤에 물을 두고 전투를 벌임,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곳에서 사생결전을 벌인다는 고사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 유방과의 군사능력 문답에서 한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고사

 *사면초가(四面楚歌): 사방에 초나라의 노래 소리, 한신에게 포위당한 초나라 병사들이 절망적 상황에서 고향 초나라의 노래를 부른다는 고사

 *십면매복(十面埋伏) : 십면이나 되는 매복을 깔아 놓음, 한신이 항우를 잡기 위해 곳곳에 매복을 숨겨 놓았다는 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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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3-30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한지를 읽으면 개인적으로 한신에게 몰입하게 됩니다. 유방이 한신을 두려워한 것이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평생 품고 있던 감정이었으니...말씀하신 것처럼 회음후로 봉해졌을때 제3 세력으로 자립했다면 중국의 역사는 또 얼마나 다이나믹하게 전개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마힐 2026-03-31 14:1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초한지에서 저도 가장 감정 이입이 되는 인물이 한신이였어요. 너무나 원통하고 억울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생각 안 하기로 했어요. ^^
한신을 통해 배울 점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역사 속 인물을 분석하는가 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