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끝낸 전쟁 - 1914년으로 향한 길
마거릿 맥밀런 지음, 허승철 옮김 / 책과함께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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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0월 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병합을 선언한다. 그 때만 해도 이 결정이 역사를 바꾸어놓게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878년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 뒤 지난 30여년 동안 이곳의 통치자는 오스트리아였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병자라고 불리던 오스만 제국은 잃어버린 고토를 찾으려고 와신상담은 커녕 여기저기서 균열을 일으키는 제국을 지탱하고 발칸의 꼬꼬마 국가들의 거센 도전에 맞서기에도 벅찬 판국이었다. 이 와중에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던 불가리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최대 걸림돌이었던 러시아와도 밀실 야합하여 동의를 얻어낸 것을 기회삼아 오스트리아는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공식 병합한 것이었다. 그 대가로 오스만 제국에는 220만 리라의 보상금을 지급키로 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익숙했던 현지 주민들은 순응했고 열강들 역시 묵인했다. 꼭 30년 뒤 벌어질 히틀러의 주데텐란트 병합과는 사정이 달랐다.

딴지를 건 쪽은 따로 있었다. 남쪽의 세르비아였다.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한 뒤 거의 5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이 소국은 마치 중세에서 타임머신 타고 미래로 슬립한 듯 마냥 국뽕 가득하면서 야심만만한 나라였고 주변국들을 상대로 영토를 확장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세르비아인들이 많이 산다는 이유로 마땅히 자신들이 차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럼으로서 大세르비아를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훨씬 덩치 큰 대국에게도 겁없이 덤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치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발칸판이랄까. 그리고 6년 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 중이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부부가 백주대낮에 세르비아 극우파의 테러로 암살당했다.

하지만 이 순간까지도 세계대전이 폭발할 가능성은 없었다. 황태자의 죽음에 충격받은 오스트리아인들이 피의 보복을 외치면서 들고 일어나지도 않았고 다이애나 왕세자비마냥 국제사회의 동정을 얻지도 못했다. 심지어 삼촌이자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조차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자신의 뜻을 거역하고 신분 낮은 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유였다. 사라예보 사건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어이없게도 제1차 세계대전의 첫 전투가 벌어진 쪽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프랑스와 독일 국경이었다. 그렇다고 프랑스와 독일이 흑막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1870년 보불전쟁 이후 40여년 동안 두 나라가 철천지 원수이기는 했지만 리벤지전의 제물로서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죽이라고 뒤에서 선동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히틀러에 의해 유럽에 전운이 감돌던 1939년에 비하면 1914년은 훨씬 평화로웠다. 전쟁이 끝난 뒤 승전국들은 모든 전쟁의 책임을 패전 독일에게 떠넘겼지만 독일 카이저 빌헬름 2세는 히틀러도, 알렉산더 대왕도, 칭기즈칸도, 하물며 푸틴도 아니었다. 그는 위대한 정복자를 꿈꾸기에는 유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전쟁 내내 군부에 휘둘리다가 전쟁 말기에는 성난 국민들을 피해서 네덜란드로 달아나야 했다.

물건너 애니 <종말의 이제타>에서 독일 제2제국을 모티브로 한 가상국가 게르메니아의 오토 황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아 독일 제국이 폭망하지 않았다는 설정이지만 이쪽은 빌헬름 2세보다는 히틀러가 미대 지망하는 대신 옥좌에 앉았다고 해야 할지.


전쟁이 일어나기까지는 단계가 있다. 국경에서 무력 충돌의 반복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협상과 중재가 실패로 끝나면 동원령이 선언된다. 최종적으로 병력 배치의 완료와 함께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된다.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이 그러했고 6.25가 그러했으며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그러했다. 우발적인 싸움이 사생결단의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일은 흔치 않다. 철저히 준비해도 이길까 말까한데 서로 준비도 없이 싸워봐야 에너지 낭비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도-파키스탄 분쟁을 보더라도 대부분은 첫번째 단계에서 적당히 봉합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제1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가장 기묘한 전쟁이었다.

어느 쪽도 원치 않았고 준비되지 않은 싸움이었다. 사라예보 사건부터 오스트리아가 최종적으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고 독일군이 저지대국가를 침공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폭발하기까지 5주 동안 각국 지도부는 서로의 의중을 살피고 동맹과 참전의 이해득실을 놓고 주판 두들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부는 별일 아닌 양 여름 휴가를 떠나기도 했다. 빌헬름 2세만 해도 베를린을 비운 채 북해 항해에 나섰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불감증이 인류 최악의 전쟁을 초래하지 않았을까 싶다. 더 중요한 점은 여태껏 본 적 없는 무자비한 살육전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협상도 중재의 노력도 없었다. 한 세대가 완전히 파멸하고 어느 한쪽이 굴복한 뒤에야 비로소 총성은 멈추었다. 패배자는 있었지만 승자는 없었다. 유럽 열강들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도대체 우리가 왜 그토록 죽기 살기로 싸웠던 것인지 그들 자신도 궁금하지 않았을까.

인문 역사 전문 출판사인 책과 함께 출판사에서 역덕이라면 주목할 책이 나왔다. <평화를 끝낸 전쟁>은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과 바바라 터크만 여사의 <8월의 포성>에 이어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상황을 파헤친 또다른 대작이다. 저자인 마그릿 맥밀런 여사는 캐나다 출신의 여류 역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외할머니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전시 총리였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딸이라고. 금수저일세.

마그릿 맥밀런 여사. 이 바닥에서는 보기 드문 여류 역사 학자. 예전에 <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접한 기억이 있다.

이 책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시작한다. 새로운 세기 첫해에 열린 이 만국박람회는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말마따나 산업혁명이 한 세기 동안 이룩한 유럽 문명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한 귀퉁이에는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던 대한제국 코너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인들이 아니라 고종의 의뢰를 받은 프랑스인들의 작품이었지만 말이다. 유럽인들에게는 영원하게 이어질 것 같았던 번영과 풍요의 시절이었다. 적어도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겠다고 전쟁이 한창이었던 1800년과는 대조적이었다. 그 평화가 불과 10년 뒤에 끝나고 한 세기 전체가 그토록 파란만장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국박람회는 혁명과 전쟁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진보와 평화, 번영을 상징하는 한 세기의 종결을 기념하는 적절한 행사로 보였다. 유럽은 19세기에 전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오랜 투쟁이 이어진 18세기나 프랑스 혁명 전쟁과 이후 거의 모든 유럽 국가가 끌려 들어간 나폴레옹 전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9세기에 벌어진 전쟁들은 일반적으로 아주 짧았고 아니면 유럽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식민지 전쟁이었다. - p.43

돌아보면 파리만국박람회는 유럽 문명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긴장 국면을 경고하고 있었다. 식민지 전시와 민족적 전시의 과시는 강대국 사이의 경쟁을 암시했다. 독일의 유명한 예술 비평가는 유럽 문명을 선도하는 척 하는 프랑스를 조롱했다. 박람회를 방문한 그는 "프랑스는 다른 나라, 특히 늘 위험한 이웃 나라 영국과 독일에서 상업과 산업이 만들어낸 거대한 변화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 p.65

20세기 초반의 유럽은 지난 수백년을 통틀어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우면서 협력적이었다. 기근도 없었고 정복자도 없었으며 체제 싸움이나 이념 갈등도 없었다. 강대국들은 경쟁과 갈등을 벌이면서도 대화를 중단하지 않았다. 프랑스와 독일조차 점진적으로 관계가 개선되었고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리자 독일 기업들은 자신들의 발명품을 전시했다. 올림픽조차 보이콧했던 미소 냉전 시절에 비하면 훨씬 화기애애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결국 평화를 포기하고 세계대전이 벌어지기까지의 복잡한 여정을 저자는 서사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에는 아무도 원치 않던 전쟁을 초래한 수많은 필연과 우연의 사건들이 톱니바퀴처럼 엮어 있었다. 심지어 비만에 고혈압이었던 베오그라드 주재 러시아 대사가 오스트리아 측과의 회견을 우호적으로 끝내고 일어서려다 급성 심장병으로 사망하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그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를 중재하여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한 바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는 프로이센에서 아들을 낳았다. 자부심에 찬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손자가 장치 독일 빌헬름 2세가 되고 독일과 영국의 우호 관계가 실현되길 희망했다. 영국과 독일의 협력은 상식에 들어맞았다. 독일은 거대한 육상 강국이고 영국은 해상 강국이었다. 프랑스라는 공동의 적이 있고 프랑스의 야망을 함께 우려한 것도 양국 관계에 도움이 되었다. - p.111

프랑스인들은 영국이 1882년 큰 소요가 일어난 이집트를 차지한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이 단독으로 행동에 나선 것은 프랑스 정부의 무능과 주저 때문이었다. 영국의 잊비트 점령은 일시적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집트에 들어가는 것보다 빠져나오는 것이 더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연장되는 영국의 지배는 프랑스인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 p.225


빌헬름 2세는 니콜라이 2세를 프랑스와의 동맹에서 끌어내려는 집요한 시도를 다시 했다. 두 통치자는 핀란드 비외르케 섬 앞에 정박한 요트에서 만났다. 빌헬름 2세는 곤경에 빠진 러시아에 대해 니콜라이 2세에게 동정을 보이고 프랑스와 영국의 배신을 같이 비난했다. 7월 23일 뷜로는 빌헬롬 2세로부터 러시아와 독일이 차르의 요트에서 조약을 체결했다는 기쁨에 가득한 전문을 받았다. - p.307

프란츠 요제프와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강대국 지위를 유지하는데 주력했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제국의 정치가들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외교정책에 대한 접근에서 보수적이었고 전쟁보다 평화를 원했다. 1860년대 전쟁에서 패배한 후 몇십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가장 큰 이웃 국가인 서쪽의 독일, 동쪽의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게를 유지했다. 세 제국 모두 프랑스혁명전쟁과 1815년 빈 회의, 1830년, 그리고 1848년에 다시 혁명을 반대한 보수적 군주정이라는 점도 도움이 되었다. - p.353

1911년 새로 불가리아 대사로 임명된 사람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차르는 러시아가 아무리 일러도 1917년까지 전쟁 준비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만일 러시아의 핵심 이익과 명예가 걸린 상황에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1915년에도 도전을 받아들일 것이다." - p.377

산업혁명 덕분에 더 큰 군대를 보유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유럽의 인구 증가는 인력풀을 확대시켰다. 프로이센이 인력풀을 최대한 이용한 첫번째 국가였다. 프로이센은 징병제를 실시해 민간 사회에서 병사를 충당하고 몇 년 간 이들을 훈련시켰다. 그런 다음 훈련된 병사들을 민간으로 돌려보냈지만 그들은 예비군으로 편성되어 주기적으로 훈련받으며 전투 기술을 유지했다. - p.465

1914년 위기 때 독일군은 단 하나의 계획만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독일군은 러시아의 동원에 위협받으면 프랑스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동쪽에서 시작된 전쟁은 결과에 상관없이 거의 불가피하게 서쪽으로 확대될 수 밖에 없었다. - p.499

총참모부의 군사작전국 책임자인 루이 드 그랑메종 대령은 프랑스를 구한다는 자신의 처방으로 젊은 장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방어전은 겁쟁이들의 전쟁이었다. 오직 공세만이 생명력 넘치는 민족에 걸맞았다. 전투는 가장 중요한 면에서 의지와 에너지가 핵심 요인이 되는 사기의 시험장이었다. 프랑스 병사들은 애국심에 고무되어 조상들이 싸웠던 것처럼 싸워야 하고 적을 제압하기 위해 전장으로 밀려들어가야 했다. 1913년 프랑스군의 새로운 전술 교범을 작성한 장교들은 그랑메종의 의견을 받아들여 "오직 공세만이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다른 강국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군부 역시 전쟁이 짧을 것으로 예상했다. - p.535

좋은 날씨와 많은 볼거리 때문에 찾아온 외국인들을 이탈리아를 바고 코웃음을 터뜨렸다. 이탈리아인들은 매력적이지만 혼란스러우며 어린애 같았고 진지하게 대우받을 국민으로 보이지 않았다. 국제 문제에서 다른 강국, 심지어 3국 동맹 파트너들도 이탈리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보스니아 위기 때 이탈리아의 타협 요구는 무시되었고 강국들은 발칸 지역에서 이탈리아에게 조금이라도 보상할 생각이 없었다. - p.657

1914년 초 대부분의 유럽인은 10년 전과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익숙한 긴장이 지속되고 있었다. 영국과 독일은 해군력 경쟁을 계속 이어나갔고 프랑스와 독일 관계도 우호적으로 개선되지 않았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여전히 발칸 지역에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동맹 안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발칸전쟁 후 독일-오스트리아 관계는 악화되었다. - p.743

흔히 교과서에서는 소위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이 서로 대치하면서 1차대전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냉전 시절 나토와 바르사뱌 조약 사이에서 벌어졌던 일촉즉발의 긴장에 비하면 훨씬 느슨했다. 이들의 동맹은 이념이 아니라 국익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유럽 왕실들은 오랜 결혼 동맹으로 서로 엮여 있었고 설령 적대적이라고 해도 오늘날 남북한처럼 아예 대화의 문을 꽁꽁 걸어 닫고 불구대천의 원수마냥 배척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관계는 한시적이면서 조건부였으며 언제라도 편을 바뀔 수 있었다. 실제로 삼국동맹의 일원인 이탈리아는 전쟁이 터지자 연합군에 서서 어제의 우군에게 총부리를 돌렸다.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라고 했던 영국 총리 팔머스톤 경의 유명한 격언마냥 유럽 외교의 오랜 방식이기도 했다. 저자는 사라예보 사건이 터졌을 때 강대국들이 상대를 때려눕히고 유럽 패권을 차지할 호기로 여기기보다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했음을 지적한다. 이들에게는 그런 일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오스트리아조차 세르비아를 상대로 무력 응징할 지를 놓고 마지막까지 고민했을 정도였다.

7월 1일 그는 카이저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약소국 세르비아가 유죄라고 전 세계를 설득할 만큼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썼다. 이중제국의 국제적 입지도 이미 약해져 있었다. 루마니아는 비밀조약에도 불구하고 방관하지 않을테고 불가리아의 지원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티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와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p.784

독일 지도부는 일단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하되 유럽의 여론이 아직 동정적일 때 동맹국이 빨리 움직이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빈 당국을 서두르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소화불량에 걸린 거대한 해파리처럼 이중제국은 나름의 웅장하고 복잡한 속도로 움직였다. 군대는 많은 병사들을 추수 휴가에 내보냈고 그들은 7월 25일에야 복귀해 군복을 입을 수 있었다. 그 정책을 편 콘라트는 독일 무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농업 국가다. 추수한 결과물로 1년을 살아야 한다." - p.797

푸앵카레같은 민족주의자들조차 알자스와 로렌의 상실을 받아들였고 그 지방을 되찾기 위해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았다. 프랑스-러시아 동맹으로 독일이 포위되었다고 느꼈지만 프랑스와 러시아 관점에서 본다면 이 조약은 독일이 선제 공격할 때에만 작동될 방어적 조약이었다. - p.882

그러나 개전 며칠을 앞두고 상황은 급변한다. 며칠 전만 해도 태평스럽게 여름 휴가를 보냈던 지도자들은 어느 순간 전쟁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음을 깨달았다. 기세등등한 군부 강경파들, 전임자 시절부터 오직 전면전만을 상정한 전쟁 계획, 실타레마냥 복잡하게 얽혀 있는 동맹관계가 속박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처럼 헛된 야심이 아니라 상황에 등을 떠밀렸고 이것이 생각지도 못한 전쟁에 나서야 했던 이유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사라예보 사건이 없었더라도 1차대전은 폭발했을까. 1차대전은 단순히 어느 한 사건이 아니라 유럽 강대국들의 오랜 모순이 폭발한 결과이지만 그게 전쟁의 방아쇠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순간에 기다렸다는 듯이 몇가지 우연한 사건들이 겹쳤고 그럼으로서 지난 수십년 동안 유럽의 평화를 보장하던 안전수단이 마비되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라예보 사건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었으며 1차대전은 일어났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역사란 참 미묘하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1차대전이 일어난 원인을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로 그런 전쟁이 얼마나 파괴적으로 치달을지 상상하지 못했고, 둘째로 전쟁 돌입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히 맞설 용기가 부족했다고. 그 시절 지도자들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사내다운 것이라고. 마초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에 나약함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죄악이었을테니 말이다. 하긴 트럼프나 푸틴이 귀 틀어막고 허세 부리는 꼴을 보면 요즘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같다.

<몽유병자들>이 유럽의 화약고였던 발칸에 포커스를 맞추고 <8월의 포성>이 사라예보 사건부터 전쟁이 폭발하기까지 약 한달의 시간 동안 벌어진 긴박한 상황을 묘사했다면 이 책은 보다 거시적이면서 20세기 초 유럽의 정치와 외교, 군사, 사회, 문화 전반을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다. 저자의 식견과 필력이 놀랍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케네디 대통령은 <8월의 포성>을 읽고 군부의 압박에 굴복하는 대신 소련과의 협상을 선택함으로서 제3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신냉전'이라는 오늘날, 푸틴은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굴복을 강요하고 있고 태평양에서는 트럼프와 시진핑이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고 있으며 인도-파키스탄의 충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 등 세계 곳곳이 화약고이다. 제2의 히틀러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사소한 불장난이 어느 순간 통제 불능의 큰 불로 번지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과연 그 때 트럼프나 푸틴, 시진핑이 케네디처럼 책임감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입만 열면 정쟁 벌이기에만 급급할 뿐 비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제발 이런 책 좀 읽으라고 충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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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에 담긴 문화사, 끽다점에서 카페까지 - 이길상 교수가 내려주는 커피 이야기
이길상 지음 / 싱긋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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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피가 좋다. 흔히 인간의 3대 욕구를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하나를 더하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커피욕이다. 매일 1리터 두 병을 갖다놓고 물처럼 마시는 중. 그렇다고 직접 커피 갈고 로스팅해서 맛과 향을 음미하는 커피 덕후는 아니지만 어쨌든 커피 없이는 못 버티는 몸이 되었다. 조선 시대 틈만 나면 장죽대 물고 있던 우리 조상님들은 담배를 가리켜 '식후 제일미(食後第一味)'라고 했다던가. 담배 안 피는 나로서는 그딴 풀 태운 연기를 들이마시는 것보다 더운 여름에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잔이야말로 나른한 오후를 맨정신으로 버티게 하는 진정한 식후제일미요, 현대인들을 위해 신이 내린 선물이다. 이 천상의 음료를 맛보지 못하던 시절의 인류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살았을까 싶다.


심지어 이런 생각도 든다. 그 옛날 마리 앙투아네트는 "커피 없으면 콜라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가 혁명으로 목이 몸과 분리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이유는 커피 대신 치커리 따위나 우려먹었기에 사기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고 동독 사람들은 커피도 마음껏 마시지 못하는 이 따위 체제 타도하자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라고. 미국 독립전쟁의 서막이었던 보스턴 차 사건도 사실은 차가 아니라 커피였을지도. 어디 차 따위를 피같은 커피에.

커피는 사실 과일이람서.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는 과일이요, 땅에서 나면 야채라던가. 흔히 커피콩이라지만 콩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브라질 커피이니 자바 커피이니 세상에는 다양한 커피가 있지만 원래 커피의 발원지는 에티오피아라고 한다. 그런데 저 뻘건 열매를 볶고 물에 끓여서 우려먹는다는 발상을 어떻게 했을까. 에티오피아에서 전해 내려오는 도시 전설에 따르면 옛날 옛적 칼디라는 이름의 한 목동이 염소를 풀어놓았는데 염소 한마리가 정체불명의 붉은 열매를 먹더니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밤에 잠도 안 자길래 자기도 시험삼아 먹어보니 온 몸에 에너지가 넘치더라, 그때부터 사람들이 커피의 효능을 알게 되었다는 것. 카페인은 어쨌든 생으로 먹을 만한 맛은 아닐 것인데 말이다. 칼디가 실존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되었건 그것을 맛볼 생각을 했던 놈이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인간의 호기심은 실로 놀랍다. 하긴 복어를 요리하겠다고 덤빈 것에 비하기야 하겠냐만.

그것이 중동을 거쳐서 유럽으로 전파되고 '악마의 열매'라는 둥 온갖 음해와 모함에도 불구하고 대항해 시대를 통해서 신대륙과 전세계로 퍼져나갔으며 19세기 지식인들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혁명을 논했다고. 그리고 그 마수는 어느듯 은둔의 나라 조선에까지 닿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에게 커피는 한낱 기호품이 아니라 생활 필수품이자 커피 덕분에 하루가 길어지고 수많은 혁신이 탄생할 수 있었으니 인류 문명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셈. 커피가 없었으면 어쩔 뻔. 특히 나부터. 그렇다고 사탕수수처럼 한때 귀하신 몸에서 이제와서 비만의 적으로 취급받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진화하신 기특한 존재인듯.

오늘도 커피 없이 못 버티는 커피당이라면 주목할 책이 나왔다. 커피가 처음 조선 땅을 밟았던 구한말부터 치킨집보다도 더 많은 커피숍이 동네 구석구석마다 차지한 채 식후의 우리 직장인들을 유혹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커피 100년사이다. 굵직굵직한 정치사부터 소시민들의 애환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저자인 이길상 교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이면서 커피 작가이자 <커피 히스토리>라는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라고 한다. 실로 커피에 죽고 못 사는 이땅의 진정한 커피 덕후인 듯.

일명 대한민국 커피 인문학자라는 저자. 커피와는 별개로 한국학 교수로서 외국에서 잘못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앞장서기도.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커피가 처음 소개된 것은 구한말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절정이던 1852년, 윤종의라는 사람이 쓴 <벽위신편>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책의 목적은 정약용처럼 신문물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위정척사와 서양 세력을 배척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물며 그 시절 뇌 굳은 사대부가 직접 커피를 어디서 구해다가 맛 봤을 리도 없고 중국쪽 책 어느 대목에서 "양놈들은 커피라는 것을 마신다카더라."라는 것. 어쨌든 변방의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커피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우리나라에 커피라는 음료가 처음 기록된 시기는 1852년으로 인문지리서 <벽위신편>에 언급되어 있다. <벽위신편>은 1848년 윤종의가 서양의 위력과 종교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한 방책 제시 목적으로 쓴 책으로 4년 뒤 중국의 <해국도지>와 <영환지략>을 참고하여 개정하면서 커피를 소개했다. 이들 책에 "필리핀에서는 커피라고 하는 편두(까치콩)과 비슷하고 청흑색인 열매를 볶아 끓여 마시는데 맛은 쓰고 향은 차와 비슷하다"라고 기술된 커피 생두의 모양과 만드는 법, 맛에 대한 내용을 <벽위신편>에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 p.16

그리고 국내에 밀입국한 프랑스 선교사였던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신부가 선교를 하면서 조선인 신도들에게 커피를 맛보게 하면서 이 땅도 커피에 물들게 되었다. 한 마디로 커피로 사람을 낚은 셈. 실제로 베르뇌는 대량의 커피를 끊임없이 주문했을 만큼 효과 작렬이었다고. 군대 시절 초코파이 하나에 주말을 헌납했던 나같은 나이롱 신도들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지. 하지만 뽀록나는 바람에 박해가 시작되었고 결국 병인양요로 이어졌다. 흥선대원군부터 커피의 마수에 빠뜨렸어야. 정작 아들인 고종은 둘도 없는 커피 애호가가 되었지만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집쟁이 아버지를 향한 반항심의 발호였는지도.

조선인 소년이 미군 장교가 되어 금의환향한다는 판타지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에서 커피를 즐기는 고종. 겉은 개화되었으나 알맹이가 그대로다보니. 이 양반도 따지고 보면 불같은 아버지와 드센 마눌님 사이에 끼어서 눈치 보느라 어지간히 마음 고생했을 듯.


하지만 중세 시절 커피를 이교도의 음료라면서 교황이 직접 커피 나무 화형식까지 했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커피는 온갖 박해와 수난을 당해야 했다. 그것도 불과 십수년 전까지 말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외화 한푼이 아쉬운 판국에 주식도 아닌 커피를 수입한답시고 막대한 돈을 허비한다는 이유였다. 커피는 사치와 낭비의 대명사였고 퇴폐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고보면 내가 학창 시절에만 해도 동네 다방에는 레지라고 불리는 짧은 핫팬츠 입은 언니야들이 점심 때만 되면 스쿠터타고 커피 심부름을 했었던. 물론 요즘은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어차피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있는 것인데. 1997년 IMF가 터지자 애꿎은 커피가 외화낭비의 주범인양 여론의 몰매를 맞고 관공서에서는 커피 안마시기 운동이 벌어졌다고. 전문 커피숍인 스타벅스가 처음 생겨나자 점심값보다 비싼 커피를 마신다고 모 신문에서 질타하던 언제인가 싶다. 지금 생각하면 실소 나올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이 책은 이런 얘기를 담고 있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어떻게 찾아냈나 싶을 정도.

고종은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마신 첫번째 임금일 뿐만 아니라 커피를 꽤 즐겼던 인물이었다. 그에게 커피의 즐거움을 알려진 이는 아마도 초기의 의료 선교사, 서양 외교관, 마리 앙투아네트 손타크나 파울 묄렌도르프같은 서울 거주 외국인이었다. 고종은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는 것이 일상일 정도로 커피를 늘 가까이 했다. 힘든 시기를 살아야 했던 고종에게 커피는 위로의 음료였다. - p.38

일본식 카페 문화 유입으로 조선 카페에 등장한 흥미로운 서비스 중 하나는 광학적으로 성적 도발을 유도하는 것, 당시 용어로 '광학 서비스'였다. 홍등과 청등, 즉 현란한 불빛으로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서비스였다. 실내조명을 가능한 어둡게 하여 여급과 고객을 편리하게 해 주는 서비스였다. 단속 대상이었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931년 10월 17일 <매일신보>에 따르면 본정 경찰서는 연락정에 있는 카페 '미쓰와'에서의 흐릇하고 컴컴한 광선 사용을 문제 삼아 주인을 호출한 후 과태료 처분을 내렸다. - p.112

1947년 2월 26일 <조선일보>는 "전 이왕가의 최근 소식, 동경서 다방 경영"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마이니치 신문> 보도를 인용한 이 기사에 따르면 이왕가 일족은 도쿄 시부야에 카페를 차렸다. 종래의 생명선이던 일본 국고의 보조금이 끊기자 선택한 길은 커피를 파는 일이었다. 상궁과 나인이 웨이트리스가 되었다. 먹고 살기 어려울 때 카페를 차리는 일, 그때나 지금이나, 왕후장성이나 서인이나 차이가 없음을 실감케 했다. 스스로 막지 못한 불행한 국망, 스스로 이루지 못한 불완전한 광복이 초래한 아픔이었다. - p.192

5.16군사 정변이 일어난지 2주일 후인 5월 29일 아침을 기해 다방에서 커피가 일제히 자취를 감추었다. 다방업자들이 자진하여 커피 판매를 중단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쿠데타 세력이 취한 강제 조치였다. 강제 조치가 아니었음을 강변했지만 믿는 사람은 없었다. 치안 국장은 "어제 28일 다방업자들을 불러서 막대한 외화를 소비하는 커피를 되도록 팔지 말고 생강차나 기타를 대용하여 팔도록 함이 어떻겠는가라고 권장했다."라고 발표했다. 강제로 커피를 팔지 말라는 말이 아니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 p.243

검찰에 따르면 장안다방 박군은 커피 1파운드에 보통 100잔 정도 나오는 양을 담배 가루와 소금을 넣어 250잔 내지 300잔을 만들어 하루 600여잔 씩, 유리다방 김씨는 하루 700여잔씩 팔아왔다는 것이다. 커피 가루 4파운드를 사면 2파운드에 담배 가루를 섞어 4파운드 분량의 커피를 만들고 나머지 커피 가루를 빼돌리는 수법을 쓴 것이다. 이들은 손님들이 피다 버린 담배꽁초를 연탄 화덕에 올려 말린 후 가루로 만들어 커피에 섞는 수법을 썼다. 니코틴 맛이 느끼지지 않도록 달걀 껍데기와 소금을 함께 타기도 했고 손님들이 맛에 둔감한 시각인 오후 늦은 시간에만 꽁초커피를 내놓은 주도면밀함도 보여주었다. - p.325

1980년대 중반에 퍼지기 시작한 가라오케 문화나 노래방 문화는 다방의 입지를 더욱 좁혔다. 식사 모임 후 가는 장소로 다방보다는 노래방이 선호되었다. 새로 등장한 아파트의 신식 주방시설 덕분에 집에서 손쉽게 커피를 끓여 마실 수 있게 된 것도 다방 증가 둔화의 한 요인이었다. 다방은 설 자리를 급속도로 잃어가고 있었다. 커피 암흑기 후반기에 닥친 다방의 침체였다. - p.358

우리나라에서는 1979년에 문을 연 롯데리아가 체인점 문화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에는 서울 올림픽을 전후하여 버거킹, 맥도널드, KFC 등이 잇따라 등장했다. 커피전문점으로는 1979년 대학로에서 처음 문을 연 후 점차 매장을 늘려 한 때 전국적으로 60여개의 매장을 거느렸던 '난다랑'이 효시였다. 대학로의 1호 매장은 1986년에 '밀다원'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이렇게 시작된 커피 체인점 문화는 급속히 성장하여 1993년 신문 광고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 p.404

외환 위기는 커피 대신 국산 차 마시기 운동을 소환했다. 늘 그랬듯 절약이 필요한 시대에 커피는 모두의 공적이었다. 커피는 광고로 시대에 어필하려고 노력했다. 맥스웰하우스는 캔커피 광고에서 취업 준비생의 면접 장면을 다루었다. 면접에서 당황하여 실수한 취업 준비생을 보여준 후 "나를 알아주는 커피, 맥스웰 캔커피"라는 메세지를 전달했다. - p.432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평생을 살면서 평균 62년 정도 커피를 마신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균 2만5110잔의 커피를 마시고 9만145달러(1억2500만원)을 지출하는 셈이다.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이 커피 소비액이고 결코 함부로 마셔서는 안 되는 것이 커피임을 말해준다. - p.446

450여 페이지에는 베르뇌 신부가 처음으로 커피를 가져오고 아관파천한 고종이 커피를 입에 대면서 커피 문화가 본격화된 지 약 한 세기 반의 시간 동안 커피로 보는 우리네 역사를 담고 있다. 그러고보면 커피가 이땅에 정착하기에는 수많은 시련과 고난이 있었다는 점에서 여기까지 잘도 살아남았다 싶을 정도. 세상이 어려울 때마다 높으신 분들은 커피 탓으로 돌리면서 우리 소시민들의 입에서 빼앗으려고 갖은 애를 썼으니 말이다. 하긴 커피만의 얘기일까.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던가. 탄압에 맞선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마음껏 커피를 마시며 바쁜 일상 속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하지만 그 여유가 영원하지는 않을 듯 하다. 지구 온난화로 가뭄과 폭염, 병충해가 만연하면서 커피 수확량이 나날이 줄어들기 때문. 실제로 원두 가격의 폭등으로 당장 울 사무실 근처의 커피값도 300원이나 올랐더라. 더는 값싼 아메리카를 즐기지 못할지도. 특히 트황제 몽니 덕분에 엄청난 관세로 미국인들은 모닝 커피 한잔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고.

책을 읽다가 문득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커피의 우리식 명칭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 "양탕국"이 사실은 아무런 근거없는 얘기란다. 양탕국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해방 이후인 1968년 12월 26일 조선일보의 한 칼럼인데 그게 와전되어 마치 구한말부터 사용된 것마냥 여기저기서 언급되었다는 것. 주변 사람들과 커피를 마실 때마다 아는 척하면서 양탕국 타령을 했는데 앞으로는 못 써먹을 것같다.

TV 교양 프로그램에도 버젓이 등장하는 '양탕국'. 누가 보면 그 옛날 우리 조상님들이 여기에 밥 말아서 드신 줄 알 듯.

10월 1일이 한국커피협회에서 정한 커피의 날이라고 한다. 국군의 날과 겹치기에 아는 사람만 아는 날. 커피라는 주제로 이렇게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쓸 수 있나 싶다. 커피당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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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디자인 - 디자인의 선과 악, 다크 디자인 투어리즘
마쓰다 유키마사 지음, 조지혜 옮김 / 교유서가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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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북에서 인정한 세계 최초의 국기는 덴마크의 국기인 '다너브로(Dannebrog)'라고 한다. 유럽에서 교회의 위세가 절정이던 1219년 교황의 명령으로 발트해에서 십자군 원정에 나선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2세(Valdemar II)는 지금의 에스토니아 수도 틸린에서 벌어진 린데니세 전투(Battle of Lyndanisse)에서 이교도들의 기습을 받아 위기에 몰린 가운데 하늘에서 붉은 바탕에 흰색 십자가가 그려진 정체불명의 천이 떨어졌고 신의 선물이라고 여긴 덴마크군은 용기백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 물론 믿거나 말거나한 도시 전설이지만 아무튼 그때부터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아서 무려 800년이 넘도록 쓰고 있다는 것이 덴마크인들의 주장이다. 물론 덴마크의 정식 국기로 공식 지정된 것은 그보다 훨씬 나중인 1625년 5월 8일이지만 말이다.

1809년 덴마크 화가 크리스틴 오거스트 로렌젠(Christian August Lorentzen)이 그린 다너브로 전설. 하늘에서 저런 식으로 낙하했다고. 신이 천쪼가리만이 아니라 추 역할을 하도록 묵직한 깃대에 매달아서 공기역학까지 고려하여 투하한 모양. 공학도 신인가.


따지고 보면 전쟁에서 깃발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을 것이다. 수천, 수만명이 뒤엉킨 난장판 속에서 피아구분은 물론이고 병사들로서는 우리 쪽 깃발이 등 뒤에서 힘차게 펄럭이면 아군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며 꺾이고 찢겨진다면 싸움에 졌으니 도망쳐야 한다는 얘기이다. 아마도 원시시대에도 조잡한 뭔가를 만들어서 성물마냥 높이 쳐들고 싸우지 않았을까. 전쟁이란 서로의 깃발 뺏기 싸움이며 깃발은 아군에게는 결속과 용기를, 적군에게는 공포와 좌절을 주는 일종의 토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그저 아무거나 들고 다니는 대신 신이 부여한 색깔과 문양을 그려넣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어쨌든 싸움은 이겨야 하니까 말이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찾아 성지로 향한 엘프 대장장이의 여정을 다룬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십자군은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 문양을, 살라딘의 이슬람 군대는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깃발과 방패를 들고 있다. 가문과 세력을 상징하던 깃발은 근대에 와서 국기의 원형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깃발은 승리를 상징한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 해병대가 성조기를 세우는 광경이나 베를린 전투에서 독일 국회의사당 꼭대기에 소련군 병사가 소련 국기를 내거는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2차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를 각인시켰다.

총격 직후 성조기를 등 뒤로 피를 흘리면서 주먹을 치켜 올리는 트럼프. 워낙 절묘한 구도였기에 짜고 친 거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올 정도. 어쨌든 AP통신 기자 에반 부치(Evan Vucci)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은 이 꼴통 영감이 대선에서 이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깃발이 인간의 심리에 얼마나 영향력이 큰 지 보여주는 셈. 광화문에서 태극기 휘두르는 양반들도 그런 이치 아닐런지.


교유서가에서 나온 신작도서 <전쟁과 디자인>은 전쟁을 통해 돌아보는 디자인 에세이이다. 저자인 마쓰다 유키마사(松田行正)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원래는 법학도였지만 우연한 기회에 출판사 디자인을 맡게 되었고 디자인을 주제로 역사 에세이를 쓰고 있다고 한다. 국내에도 몇 권이 책이 나와 있는 유명 작가이기도.

저자인 마쓰다 유키마사 옹. 1948년생이니 내일 모레 팔순인데 젊게 사시는 듯. 무려 1년에 한권 출간이 목표라고. 노안 안 오시나.


제2차 세계대전하면 빼놓을 수 없는 문양은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일 것이다. 서양인들이 한국이나 일본에 관광왔다가 불교 사찰에 달린 卍자를 보고 깜놀한다는 이 문양은 히틀러 대굴빡에서 창안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만큼 역사가 오래 되었으며 원래는 행운의 상징이라고 한다. 심지어 대서양 너머 북미 인디언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기호가 발견될 정도. 사실은 외계인이 원조일지도. 그것을 1919년 나치의 수령이 된 히틀러가 자신들이 독일 민족의 구세주라는 이미지를 대중에 각인할 요량으로 나름 변형하여 자기네 당기로 쓴 것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하켄크로이츠의 모습이다. 덕분에 행운의 상징은 하루 아침에 악마의 상징으로 둔갑했고 유럽 전체에서 저주받은 기호 취급을 받고 있으니 억울하다고 할 듯.

하켄크로이츠는 나치가 정권을 손에 넣기 전부터 깃발과 완장에 사용되었다. 정권을 얻은 다음부터는 깃발과 배지, 종국에는 문구류 같은 소품에까지 등장해 독일 전역을 휩쓸었다. 반 나치 세력은 나치를 비난하기 위해 하켄크로이츠를 사용했으나 도리어 하켄크로이츠의 힘을 재인식하는 결과를 낳았다. - p.149

이 책은 군용기에 그려진 각국의 마크를 비롯하여 인류 전쟁사에서 디자인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해 왔는지를 얘기한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사용하는 국기들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전쟁이 탄생시킨 것이기도 하다. 유럽 국가 중에는 덴마크처럼 십자군 시절의 영향으로 십자 문양을 쓰는 나라들이 있는가 하면, 혁명과 해방, 자유의 상징으로 삼색기를 쓰는 나라들도 많다.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선이라고 믿었던 공산주의 국가들은 피를 상징하는 붉은 색을 선호한다. 냉전 시절 소련군의 이름은 '붉은 군대'였다. 중국 마오쩌둥 추종자들은 자신들을 홍위병이라고 불렀다. 그게 꽤 쓸만하다고 여긴 사람이 모방의 달인이었던 히틀러였다. 하켄크로이츠의 바탕이 하필이면 붉은 색인 것도 소련 적기를 베낀 것이며 나치의 거대한 대중집회 또한 공산주의자들의 방식이다. 인사할 때 손을 치켜드는 것은 무솔리니를 흉내낸 것이지만. 극좌와 극우는 통하는 법이라나. 총성이 난무하는 전장만이 아니라 설전과 암투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정치인들 또한 색깔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우리만 해도 언제부터인가 한쪽 당이 빨간색을 쓰니까 다른 쪽에서 파란색을 들고 나오더라.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푸틴은 해리포터 20주년 기념판을 금지했다. 표지색이 파란색과 노란색이라서 우크라이나 국기를 연상시킨다는 이유였다. 색깔을 가지고도 편을 가르고 싸우는 게 인간인 셈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국기의 색으로 싸운다. 트럼프와 바이든이 맞붙었던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트럼프 진영이 붉은 색, 바이든 진영이 파란 색으로 각자 국기 색상 중 하나를 휘감고 싸웠다. - p.17

러시아에서는 이렇게 색 대비가 두드러진 해리 포터의 파란색과 노란색 판본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되었다는 뉴스도 있다. 파란색과 노란색이 우크라이나를 나타내는 색이기 때문이다. - p.37

히틀러는 붉은 색을 사회사상 운동, 흰색을 국가주의 사상, 검은 색은 아리아 민족의 승리를 위한 투쟁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붉은 색은 아리아 민족, 흰색은 아리아 민족의 순결, 검은색은 아리아 민족 이외의 절멸을 나타낸다는 설도 있다. 국가의 색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다소 진부하지만 검은 색을 절멸의 색으로 보는 시각은 독특하면서도 공포스럽다. - p.62

사실 원래는 갈고리십자도 행운의 상징이었고 나치친위대의 해골 표식은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친다는 의미였다. 최종적으로는 사악한 상징으로 전락했지만 원래는 자유와 독립을 염원한다는 의미였기에 조직의 표식이 된 것이리라. - p.137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뒤인 1873년에 정식으로 육군을 발족하면서 프랑스 육군과 미 육군을 참고하여 군복 수칙을 정했다. 이때 별 모양을 군모와 계급장에 채택했다. 군모에도 계급장과 똑같은 개수의 별을 붙였다.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 문화가 들어와 '★'이 별이라는 의미가 되기 전까지 일본에서 별은 '●' 모양이었다. ★은 헤이안 시대 아베노 세이메이의 '세이메이 인'처럼 주술적인 기호였다. - p.171

키치너는 정면을 바라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영국은 당신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심리적인 압박은 크지 않지만 개인에게 직접 호소하는 디자인에 가슴이 뜨금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결국 키치너 포스터는 많은 지원자를 모아서 크게 성공했다. 고무된 영국 육군은 협박이 더 두드러지는 포스터를 만들었다. 영국을 의인화한 존 불이 정면을 가리키며 '아직도 전쟁에 불참한 건 당신인가'라고 묻는다. - p.211

크메르 루즈는 검은 인민복에 캄보디아의 전통적인 '끄러마'를 착용했다. 끄러마는 스카프 겸 수건이면서 머리에 두르는 터번이 되기도 했다. 크메르 루주는 붉은 색 깅엄체크 무늬의 끄러마를 둘렀다. 참고로 남베트남해방전선(베트콩)은 푸른색 깅엄체크 끄러마를 착용했다. - p.292

300여 페이지의 본문에는 십자군의 십자 기호, 러일전쟁 당시 일본 연합함대가 내건 Z깃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모병 포스터, 히틀러의 프로파간다가 써먹었던 게르만의 룬문자, 여성들에게 검은색 히잡을 강요하는 아프간 탈레반의 여혐, 푸틴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칼라풀한 사진과 함께 다양한 디자인이 등장한다. 인간 심리에서 색깔과 기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본격적인 역사서는 아니고 저자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에 가깝다. 각각 독립된 얘기인 것으로 보아서 저자가 어디에서 연재한 짧은 칼럼을 모아서 엮은 모양. 부담 없는 분량에 흥미로운 주제, 분잡한 명절에 방 한켠에서 편안하게 읽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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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쟁사 - 남북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마이클 오핸런 지음, 임지연 옮김 / 상상스퀘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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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17일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단련된 이라크군을 상대로 베트남전쟁 이후 또 다시 수렁에 빠질 지 모른다는 전문가들의 우려와 달리 싸움은 그야말로 일방적이었다. F-117 스텔스 전투기가 세계에서 가장 조밀하다던 이라크 방공망을 분쇄하고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들이 이라크의 눈과 귀를 파괴했다. 이라크 공군은 레이저로 유도되는 미군의 스마트 폭탄에 의해 변변히 떠보지도 못한 채 대부분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뒤이어 벌어진 지상전 또한 다국적군대의 압승이었다. 소련제 전차로 무장한 이라크군 기갑부대들은 서방제 전차의 압도적인 성능 앞에서 줄줄이 격파되었다. 2월 28일 작전이 종결될 때까지 40일 동안 미군이 보여준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20년 전 베트남전은 물론, 불과 2년 전 아프간에서 무력하게 철수한 소련군과도 대조적이었다. 그것은 그저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하이테크 전쟁이라는 새로운 전쟁이자, 천조국 미국이 단순 물량빨이 아닌 진정한 세계 최강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채 버려진 이라크 기갑차량들. 아랍 군대가 머리수만 많지 실속없다는 점은 이스라엘과 벌어진 4번의 중동전쟁에서도 이미 입증된 바 있었지만 미군이 보여준 경이로운 전투력은 이전의 중동전과도 차원이 달랐다. 베트남전쟁에서 물량빨이 전부일 뿐, 약에 쩐 약골 군대라는 이미지는 걸프전을 통해서 단숨에 날아가고 미군은 명실공히 넘사벽의 세계 최강으로 자리매김했다.


베트남전쟁 때의 오합지졸과 달리 최첨단 무기로 무장하고 고도로 훈련된 미군의 환골탈태한 모습은 아버지 부시보다 전임자였던 레이건 시절 군사개혁의 결과였다. 하지만 루스벨트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어줍잖게 일을 벌이다가 망쳤던 것과 달리 미군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철저하게 준비한 것은 아버지 부시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현명한 선택은 따로 있었다. 그는 당초 목적대로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쫓아내자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전쟁을 재빨리 중단했다. 미국의 능력에 환상을 품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사막의 폭풍 작전은 미국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인 전쟁으로 끝났다. 속전속결로 끝냄으로서 장기전의 수렁에 빠지지 않았다. 비록 후세인을 끝장내지는 못했지만 그건 미국 알 바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로부터 12년 뒤, 미국은 이라크와 또 한번 맞붙었다. 이번에는 아들 부시가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전편을 능가하는 속편은 없다는 오랜 격언마냥 임펙트는 덜했다. 물론 미군은 걸프전쟁 때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무기로 이라크군을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두들기고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미 눈높이가 한껏 높아진 관객들로서는 식상해진 내용에 CG만 좀 더 화려해졌다랄까. 아버지 부시와 결정적인 차이는 싸움에 이긴 뒤의 후속 처리였다.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졸속으로 전쟁을 밀어붙인 아들 부시는 미국을 또 한번 수렁에 빠뜨림으로써 베트남전쟁의 악몽을 되풀이했고 뒷처리는 후임자들의 몫으로 떠넘겨 놓았다. 게다가 아프간에서는 20년 동안 그토록 공을 들인 친미 정권이 하루아침에 붕괴되는 망신을 겪어야 했다.

그가 독선과 아집으로 벌여놓은 무모한 전쟁은 냉전 종식 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의 힘만 빼놓았다. 천조국 미국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결과였다. 미국이 아프간에서 무력하게 물러난지 반년 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했다. 중국 또한 공공연히 태평양에서 미국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여기에 트럼프는 만만한 동맹국들에는 한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안달이면서 막상 나서야 할 때는 뒷짐지고 물러서서 최소의 비용으로 숟가락 얹으려는 궁리만 한다. 미국의 처지가 그만큼 궁색해졌음을 드러내는 셈이다.

이스라엘이 이란을 기습하여 궁지에 내몰자 트럼프는 이란에게 2주 동안 생각을 할 시간을 준다면서 자기가 선심을 쓰는 척 하다가 오늘 새벽 느닷없이 뒷통수를 날렸다. 이런 연막 전술은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그랬어야지 일주일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이란이 멍청하게 당했을지 의문일 뿐더러, 상대의 불신과 분노를 사는 것은 물론, 미국은 역시 못 믿을 나라라는 이미지만 각인시켜 장기적으로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트럼프야 오늘이 중요하지 나중 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양반이라.


지난 한 세기 동안 패권 국가로서 미국이 보여준 위세는 다른 열강들은 물론이고 역사상 어떤 제국조차 비할 수 없다. 제아무리 예전같지 않다고 한들 여전히 미국은 독보적인 초강대국이며 그 힘은 지구 전역에 구석구석 미치고 있다. 세계 2/3가 미국의 동맹국이거나 그 영향력 아래에 있다. 하지만 미국 지도자들은 탐욕과 절제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치적거리 하나 남겨보겠다고 무리한 전쟁을 벌였다가 발목이 잡혀서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고 정작 미국의 도움을 필요할 때에는 우리도 사정이 안 좋다는 핑계로 매몰차게 나몰라라 한다. 그나마 예전 지도자들은 유무능을 떠나서 민주주의 진영의 수장으로서 최소한의 책임감이라도 있었다면 이제는 트럼프라는 협잡꾼이 국민들을 갈라치고 동맹국들이 등 돌릴 짓만 골라하는 판국이다.

과연 미국은 다시 위대해 질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평범해 질 것인가. 어차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 아닐지. 좋건 싫건 그리스 신화의 아틀라스마냥 국제 질서의 상당부분을 떠받치며 안정을 지탱하는게 미국이니 말이다. 미국이 사라졌을 때 우리네 세상은 지금보다 더 평화롭지는 않을 듯 하다.

상상스퀘어 출판사의 신작 도서 <미국전쟁사>는 1861년 남북전쟁부터 최근의 이라크 전쟁까지 미국이 주도한 160년의 전쟁사를 다룬 책이다. 한마디로 미국의 전성시대. 저자인 마이클 오헨런은 브루킹스 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의 수석 연구원으로 주로 미국의 해외 전략과 국방 분야 쪽의 연구를 맡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브루킹스 연구소는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무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싱크탱크 단체 중 하나. 정치, 경제, 사회, 국방, 외교 등 온갖 분야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보수니, 진보니 따위의 특정 정파에 쏠리지 않고 정치적 중립과 다양한 시각을 대표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그런 점에서는 정권 눈치 보기와 진영 싸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쪽 연구 단체들에 비하면야 역시 미국이랄지.

올초 트럼프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서울 모 호텔서 브루킹스 연구소 주최로 열린 한미동맹 관련 포럼. 대략 이런 일을 하는 단체람서.


이 책은 남북전쟁에서 시작한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이다. 노예를 해방해서가 아니라 피터지는 내전이 그때까지 느슨한 연합체였던 미국의 결속력을 한층 강화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오고가는 주먹 속에서 피어난 형제애랄까. 무엇보다도 남북전쟁은 미국을 신생 독립국에서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내전이 대개는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고 상처만 남긴다는 점에서 남북전쟁은 이례적인 결과였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사람이 링컨이었다. 북부의 승리는 단순히 경제력이 압도해서가 아니라 왜 우리가 굳이 저 검둥이들을 해방하겠답시고 죽기로 싸울 이유가 있느냐고 여기는 북부인들에게 전쟁의 대의를 설득하고 공감을 얻어낸 덕분이었다. 그 점에서는 남부도 마찬가지였다. 교과서에서는 남부가 링컨에 반발한 이유가 노예제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소수 대농장주들 얘기이고 절대 다수의 가난한 남부 소작농들로서는 노예가 해방되건 말건 솔직히 알 바 아니었다. 그럼에도 기꺼이 전쟁에 나선 것은 북부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이들에게는 얄미운 북부로부터의 독립전쟁이었다. 당시 분위기에서는 설사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어도 시기의 문제일 뿐 남북전쟁은 폭발했을 것이다. 하물며 트럼프였다면 상처에 소금만 뿌리는 격이었을 듯. 중남미 국가들이 독립 과정에서 시몬 볼리바르를 비롯하여 여러 지도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열된 것처럼 미국 또한 그리 될 수 있었다. 그걸 막은 것은 전적으로 링컨의 리더십이었다. 그는 남부연합에게 굴복하는 대신 끝까지 때려눕히는 쪽을 선택함으로서 내전을 장기화시켰지만 무자비한 복수 대신 포용을 통해 미국이 거듭날 기회로 삼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실수 또한 저질렀지만 말이다. 저자는 전쟁 배경과 주요 전투, 양측이 어떤 전략을 구사하고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어떤 교훈을 주는지 설명한다. 남북전쟁은 매우 중요한 전쟁임에도 막상 시중에 제대로 다룬 책조차 없다는 점에서 좋은 읽을거리이다.

남부와 북부 지도자 모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신속한 성공을 거둘 것으로 과신하면서 전쟁을 시작했다. 앞으로 자세히 다루게 될 이 단순한 생각은 현대 정책 입안자와 전략가들에게 남북전쟁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일반적으로 실제 결과보다 전쟁을 훨씬 잘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비극적 성향을 보여주며, 전쟁의 예측 불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 p.25

매클렐런은 남군을 공격하거나 리치먼드를 점령하겠다는 야심을 포기하면서 북군의 전술적 성공조차 전략적 패배로 묻혔다. 매클렐런은 리 휘하에 실제의 몇 배인 20만 명의 병력이 집결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아무런 즉각적인 후속 조치도 취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만약 매클렐런이 이 전역에서 리치먼드를 점령하여 남북전쟁과 분리 독립을 둘러싼 갈등이 비교적 초창기에 봉합되었다면 노예제는 보존되었을 것이고 남부연합의 11개 주는 수년 혹은 수십년 동안 자신들의 특별한 제도를 유지했을 것이다. 이때만 해도 북부의 전쟁 목표는 남부연합 영토 내 노예제 폐지까지 고려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 p.63

만약 북군이 더 빨리 움직였다면 더 빨리 승리했을 수도 있었다. 반대로 리가 베트콩이나 조지 워싱턴처럼 행동했다면 전장에서 더 오래, 북군의 인내심과 의지가 바닥날 때까지 버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북부가 채터누가 전략을 채택했거나 아나콘다 전략이 효과를 거둘 때까지 조금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버지니아 전선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격전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여러 선택지가 있었고 그 중 어떤 것은 어마어마했던 인명 피해를 좀 더 줄일 수도 있었다. - p.92

이 책에서는 오늘날 팍스 아메리카의 시대를 연 양차대전과 미국이 처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한 한국전쟁, 더욱 큰 댓가로 끝나야 했던 베트남전쟁, 모처럼의 성공인 사막의 폭풍작전, 그리고 아프간과 이라크에서의 불명예스러운 철수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경험한 굵직굵직한 전쟁을 다루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성공도 있고 쓰라린 실패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왜 실패했는가일 것이다. 저자는 지도자들이 과거의 교훈을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힘을 과신하고 손쉽게 이길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되려 지레 겁을 먹고 자신감을 잃어서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가령 한국전쟁에서 트루먼은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우유부단하기보다 세게 밀어붙이는 쪽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저자는 중간중간 다양한 질문을 던지면서 "만약 이랬더라면"에 대한 가정을 흥미롭고 짚어본다.

당시 미군은 소규모였고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은 강력했다. 그러나 미 육군은 빠르게 성장했다. 1917년에 약 10만명의 병력과 1만 5천명 정도의 해병대로 시작하여 1918년에는 400만 명이 넘어섰다. 1918년 3월 무렵 미군 30만명이, 8월에는 130만명, 종전 직전에는 200만 명이 유럽에 배치되었다. 전쟁 끝날 무렵 미국의 GDP 대비 군사비는 1915년 이후 4회계년도 동안 1%에서 14%로 늘어났다. - p.176

일본을 무찌를 더 간단한 방법은 없었을까. 거대한 단일 함대를 조직하고 막대한 군수물자 수송선단으로 이를 지원하면서 북쪽 해로를 통해 일본의 큰 섬 훗카이도를 향해 직진했다면 어땠을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를 고려하면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악천후나 일본이 건재한 공군력으로 효과적으로 본토를 방어하는 등 단 하나의 실패 요인으로도 쉽게 타격받을 수 있었다. 미국은 한 번의 기회에 모든 것을 걸기보다는 다단계 접근을 통해 전투 경험과 전문성을 쌓았다. - p.306

맥아더는 매튜 리지웨이 장군을 워커의 후임으로 요청했다. 이는 행운의 선택이자 맥아더가 인천 상륙 후 몇달을 통틀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음이 판명되었다. 리지웨이는 강인하고 자신만만했다. 전술적으로는 부대가 도로에서 벗어나 고지를 차지한 뒤 적당한 때 적진을 파고드는 식의 기본 보병술과 훈련을 강조했다. 그리고 맡은 지역을 제대로 정찰하지 않거나 전술 과제를 해내지 못하는 지휘관들을 해임했다. 그는 신병들에게는 큰소리치지 않았지만 고위 장교들에게는 냉혹했다. 부임 첫 3개월 동안 군단장 1명, 사단장 6명 중 5명, 연대장 19명 중 14명을 쫓아냈다. - p.337

리지웨이는 한국에서 돌아온 뒤 육군 참모총장 재임 시절 1954년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위해 베트남에 개입해서 안 된다고 경고했고 중국이 한국에서처럼 베트남에 직접 관여한다면 미군은 7개에서 12개 사단이 투입되어야 한다고 추정했다. 당시 그와 합참의 군인들은 "인도차이나에는 결정적인 군사적 목표가 없다"라고 밝혔다. - p.344

이라크군은 전반적으로 이번 전쟁에서 예상보다 잘 싸우지 못했다. 참호 진지 앞에 전위부대를 배치하지 못했고 참호에 들어간 부대의 위치를 감추기 위해 부근에 쌓아올린 흙을 제거하지 않았다. 작전 옵션도 부족했으며 융통성 있는 전술 능력도 제한적이었다. 이란-이라크전쟁 말에 어떤 발전을 이루었든 간에 사담 후세인이 유능한 장군들을 숙청하고 군 지도부를 정치화하여 성과가 쓸모없게 된 탓이었다. - p.413

트럼프는 임무 종료 직전까지 자주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였다. 짐 매티스 국방장관과 불편한 관계로 끝난 것은 2018년 12월 트럼프가 즉흥적으로 그 다음해까지 미군 임무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한 것과 밀접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맹국과 동맹 관계에 대한 허풍과 경멸로 유명한 것은 트럼프임에도 실제로 충분한 협의와 경고 없이 성급하게 임무를 끝낸 쪿은 노련한 바이든이었다. - p.477

보통 빠른 승리를 기대하면서 전쟁에 뛰어드는 정치가들과 군 지도자들은 이를 뒷받침할 논리와 개연성을 갖춘 승리론을 가지고 있다. 물론 상황이 뜻대로 흘러갈 때의 얘기이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그들의 뒤이은 결정은 무모하기 짝이 없다. 할 수 있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성공 계획이 실제 전쟁에서 어떻게 잘못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 p.498

미국은 수많은 실패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고 회복탄력성이 좋은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적어도 북미 지역 밖으로는 미국이 팽창주의적 강대국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큰 도움이 되었다. 다른 나라들이 미국을 싫어할 수는 있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으며 많은 경우 미국과 동맹을 맺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집단적으로 전 세계 GDP 3분의 2, 전 세계 국방비 3분의 2를 차지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 및 산업력 우위를 누리는 서방 동맹 체계는 그 영속성과 신뢰성이 입증되었다. - p.506

예전에 비하여 오늘날 미국이 한물갔으며 트럼프가 부유한 동맹국들을 자기 쌈짓돈마냥 삥뜯을 궁리를 하고 멕시코에 장벽을 쌓거나 덴마크더러 그린란드를 내놓으라는 둥 어거지를 부려도 여전히 많은 나라들은 미국에 기대고 미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쨌든 든든한 후원자로 삼기에는 이보다 더 나은 나라가 없으니 말이다. 만약 러시아, 중국이 미국의 자리를 대신한다면 훨씬 끔찍할 것이다. 한때 미국과 철천지원수였던 베트남조차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 접근하는 판국이다.

하물며 우리는 정치, 안보, 경제 어느 면에서도 미국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럼에도 막상 우리는 미국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시중에는 트럼프라던가 미중 갈등같은 최근 이슈에 대한 책은 하늘의 별만큼 많지만 미국의 역사나 그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성공과 실패를 다룬 책은 의외로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다소나마 미국을 이해하는데 도움되지 않을까 싶다. 아쉬운 점은 <미국전쟁사>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미국의 전쟁사가 아니라 미국이 참전한 주요전쟁사라는 점이다. 독립 이후 첫 위기였던 1812년 영미전쟁이나 소위 먼로주의를 고집하던 미국이 우물안 개구리에서 처음으로 바깥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 1898년 미서전쟁, 그리고 멕시코 전쟁까지 다루었더라면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또한 번역이 다소 매끄럽지 못하여 가독성이 떨어지고 앞뒤 맥락상 오역이다 싶은 부분도 종종 눈에 띄는게 옥의 티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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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를 떠나는 마지막 보트
헬렌 지아 지음, 박민정 옮김 / 마르코폴로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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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국공내전이 발발한 지 4년 차인 1949년 초, 전황은 완전히 공산주의자들에게 기울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전쟁의 결과가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지난 3개월 동안 동북과 화북, 화중에서 벌어진 이른바 3대 전역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정부군 정예부대를 일거에 결딴내고 전쟁의 승패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미국과 반대파들의 압박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장제스는 베이징이 공산군의 손에 넘어가는 그 날 하야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를 끌어내린 자들조차 이 공전의 위기를 헤쳐나갈 방안은 없었다. 국민당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중국의 2/3와 가장 인구가 많고 부유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지도자들의 좌중지란과 패배주의로 스스로 무너지는 판국이었다. 권력투쟁의 달인이었던 장제스는 궁지에 내몰릴 때마다 하야와 정치적 거래를 통해서 불사조처럼 부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른바 남북평화협상이 결렬되고 1949년 4월 21일 마오쩌둥과 공산군 총사령관 주더는 전군에 총진군령을 하달했다. 국공내전에 마지막 쐐기를 박는 순간이었다. 창장(양쯔강)에는 그동안 국민정부군이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대규모 방어선이 있었고 해공군력에서도 월등히 우세했지만 급조한 뗏목을 타고 벌떼처럼 내려오는 기세등등한 100만명의 공산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창장 방어선은 단숨에 돌파되고 24일 새벽공산군 제3야전군 제8병단 제35군 제104사단 선봉 부대가 난징에 입성하여 총통부에 홍기를 내걸었다.

총통부 옥상에 홍기를 내거는 공산군 병사들과 그 아래에 찢겨진 청천백일기. 1937년 12월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이후로 또 한번 적군에게 짓밟히는 순간이었지만 마지막까지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던 12년 전과 달리 싸움다운 싸움조차 없이 무혈함락되었다.


그러나 12년 전 일본군에 의해 잔혹하게 짓밟혔을 때나 26년 뒤 사이공이 함락되었을 때와는 달랐다. 지난 20년 동안 중국의 수도였으며 인구 260만명의 대도시 난징은 순순히 새로운 지배자를 받아들였다. 1937년처럼 무자비한 대량 학살도 없었고 대혼란 속에서의 탈출극도 없었다. 선전 효과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는 마오쩌둥은 전 세계의 시선에 몰려있는 도시에서 홍군의 질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강조했다. 관용을 베풀어 의구심 가득한 적들에게 제발로 투항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아직은 본색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봉건 지주와 자본가, 반혁명분자들을 숙청하는 일은 나중에 때가 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의 최대 무기는 기만과 선동, 자신의 속내를 숨길 줄 아는 인내였다. 속았음을 깨달았을 때는 늦었다.


중국판 사이공의 최후가 벌어진 쪽은 난징이 아니라 국제 도시 상하이였다. 5월 12일 상하이 전역이 시작되었다. 중일전쟁 초반 일본군을 상대로 3개월에 걸쳐 베르뎅 전투 이후 최대의 격전이 벌어진 것으로 유명해진 이 도시는 적어도 난징보다는 오래 버텼다. 하지만 5월 23일 공산군이 총공세에 나서고 지하에 암약하던 '제5열'이 일부 부대를 선동하여 반란이 일어나면서 27일 함락되었다. 20만 명의 수비대 중 타이완으로 철수한 부대는 5만명에 불과했다. 그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들의 엑소더스가 벌어졌다. 아편전쟁으로 동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개항된 도시 중 하나인 상하이는 지난 100년 동안 '동양의 파리'로서 중국의 모든 부가 모이는 사치와 환락, 암흑가의 장소였다. 600만명의 인구 중 상당수는 공산당의 지배를 두려워 할 명확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떠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일부는 자신들이 형편없는 어촌마을이라고 멸시했던 타이완으로, 일부는 홍콩과 동남아로 향했다.

국공내전 말기 상하이에서 타이완으로 향하던 2천톤급 여객선의 해상침몰사고를 다룬 영화 <태평륜>. 1949년 1월 27일에 있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상하이 엑소더스 이전에 벌어진 일이다. 실화가 모티브라지만 오우삼 감독 작품답게 영화 내내 고증 개 무시인지라.


이들의 탈출과 함께 화려했던 상하이의 황금 시대는 막을 내렸다. 모든 외국인들은 추방되었고 많은 기업가들이 박해를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사치는 금지되었다. 타이완으로 철수한 국민정부군은 한때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자금줄이었던 상하이를 되찾기 위해 때때로 폭격기를 보냈지만 1950년 3월 소련이 원조한 최신 제트 전투기인 미그-15와 다수의 대공포가 배치되자 더 이상 얼씬거릴 수 없었다. 기나긴 어둠은 마오쩌둥이 죽고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선택하면서 비로소 끝났다. 오랜 공백 덕분에 동아시아 글로벌 무역과 금융허브로서의 지위는 홍콩과 싱가포르에 빼앗겼지만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급성장과 함께 과거의 명성을 되찾아 가는 중. 공산당이 발목만 잡지 않는다면야. 시진핑 집권 이후 상하이방 힘이 다 빠졌다고.

중국 근대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만한 책이 나왔다. 마르코폴로 출판사에서 나온 <상하이로 향하는 마지막 보트>는 국공내전 말기 공산군의 함락을 눈앞에 두고 상하이를 탈출해야 했던 4명의 젊은 남녀 이야기를 다룬 논픽션 드라마이다.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 여성 작가로 실제로 본인 부모님이 그렇게 탈출한 당사자였다고 한다. 자전적 소설인 셈. 덧붙여, 미국 사회는 타이완과의 동맹관계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남북전쟁 이후 해방 노예 대체품으로 중국인들을 대거 영입하여 값싸게 부려먹었던 미국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을 제정하고 이민을 금지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이유로 걸핏하면 백인들의 공격에 시달렸고 심지어 살해되기도 했다. 1943년 장제스 정권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중국인 배척법은 명목상 폐지되었지만 미국 사회의 뿌리깊은 황인종 포비아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 MIT 출신으로 맨해턴 프로젝트에 참여한 미사일 전문가인 첸쉐썬(钱学森)이 추방되어 마오쩌둥에게 핵과 탄도 미사일을 선물한 것도 따지고 보면 미국의 인종차별주의가 자초한 결과. 암튼 낯선 미국 땅에서 온갖 차별을 당하면서 개고생한 것은 그 시절 우리 이민 1세대들도 마찬가지.

저자인 헬렌 지아. 독특한 헤어 스타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미국 최초의 동성 커플 중 한 사람이라고. 물론 이 책 내용과는 상관없다.


이 책에서 나오는 4명의 주인공은 아무런 관계도 없고 만나는 일도 없다. 처지 또한 제각각이다. 부유한 지주의 아들, 항일군인의 딸, 외국인에게 입양한 소녀, 악명높은 한간(친일파)의 자식도 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전쟁이 이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는 사실만은 같았다. 같은 시간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중일전쟁부터 국공내전과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겪어야 했던 격동의 역사를 서술한다. 여기에는 전쟁의 혼란 이외에도 전통적인 중국사회의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문화, 나라를 버리고 탈출해야 했던 중국 난민들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았던 바깥 세계의 모습까지 담고 있다. 도입부에서 어린아이의 순수했던 시각은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되어갈수록 잔혹한 현실 속에서 비정해진다. 인생이란 이런 것일까.


마지막에 가는 길도 달랐다. 누군가는 홍콩으로, 누군가는 미국으로, 타이완으로, 상하이를 빠져나오지 못한 채 남아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 아마도 십수년 뒤 문화대혁명에서 또 한번 혹독한 경험을 겪지 않았을까.

중국 조종사들은 일본 제국 해군의 주력 함선인 이즈모 호를 폭격하여 번드를 끼고 황푸강에 정박해 있는 일본 함대를 놀라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중국 조종사들은 계산을 심각하게 잘못하는 바람에 일본 함대를 빗맞히고 대신 국제 정착지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야" 어머니가 큰 소리로 말했다. 거리에는 전날 전투로 안전한 곳을 찾아 조계지로 들어온 수천명의 피난민들이 떼 지어 모여 있었다. - p.43

시작부터 여행은 악몽 같았다. 바로 전날, 호는 창수에서 어머니와 열다섯 살인 형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한번도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었던 그는 어머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을 보자 자신도 엉엉 울고 싶어졌다. 몇몇 마을 사람들이 누구라도 살아남을 수 있게 가족이 흩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형은 서쪽으로 더 먼 내륙, 쑤저우 시 근처 외딴 마을로 향했고 그와 누나 완위는 할머니와 함께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탔다. 그러나 선착장으로 가는 시골길은 믿기 힘들 정도로 막혔다. - p.63

이제 두 살이 된 안누오는 또다시 달아나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번에는 구이저우의 국민당 소속 아버지와 합류하기 위해 일본군에 점령된 상하이에서 도망쳐야 했다. 아버지는 안누오가 태어난 직후에 떠난 터라 아이에게는 낯선 사람과 다름없었다. 인도차이나와 중국 최남단의 구경을 드나들며 가는 곳마다 노래하고 춤을 추던 안누오는 마침내 아버지를 대면하게 됐다. 아이는 당당한 체격에 카키색 국민당 군복을 입은 키가 크고 잘 생긴 남자를 응시했다. - p.118

베니에게 76번지는 개인 공원과 같았다. 판 서장은 아들이 건물 주변의 넓은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도록 허락해주었다. 경비가 삼엄한 장소로 들어가는 일 자체가 소련에게는 짜릿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안뜰로 들어가기 전 삼중으로 된 문을 지키는 무뚝뚝한 경비들을 지나칠 때마다 소리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같은 반 친구 중 누구도 거기에서 함께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베니는 아버지 덕분에 자신이 상하이에서 가장 운 좋은 아이처럼 느껴졌다. 또 다른 소련 한명이 이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자전거를 탈 수 있었는데 일본 지휘부의 뜻에 따라 괴뢰첩보부를 운영했고 76번지 주요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리스취안의 아들이었다. 베니는 소년의 아버지를 전혀 몰랐지만 이곳에 드나드는 영광을 나누는데 이의가 없었다. - p.143

1943년 빙의 삶에 또다시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언니가 다른 여자아이를 입양해서 그러지 않아도 식구로 북적이는 집으로 데려왔다. 아메이는 열세살로, 빙처럼 버려진 아이였다. 버려진 소녀들이 중국 전역에 넘쳤지만 빙은 전에는 한번도 자신과 같은 아이를 알고 지낸 적이 없었다. 아메이는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어렸을 때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소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상하이에서 태어났다는 것 뿐이었다. - p.205

8월 15일 그들은 일본 천황으로부터 직접 질문의 답을 얻었다. 적이 항복하고 있었다! 호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왔다. "끝났어요. 끝났어요! 일본이 패하고 중국이 승리했어요!" 기쁨에 찬 호는 전혀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췄다. 그러나 호의 캠퍼스에서는 항복 선언 후에도 8년 동안 잔혹하게 도시를 점령했던 일본 군인들이 계속해서 거리를 순찰하자 곧 사람들의 분노가 뒤따랐다. 분노에 찬 학생들이 모여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본군이 중국인들과 북동부에서 충돌하면서 여전히 싸우고 있다는 게시판의 뉴스를 읽었다. 이는 국민당과 미국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 p.254

1947년 9월 8일 이른 아침, 호는 샌프란시스코에 들어왔다. 그의 마음속에는 열정이 넘치고 있었다. "오늘부터는 모든 것이 새로울테지.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전에는 듣지 못했던 것을 듣게 될 것이다." 고향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이 점점 더 격렬해졌다. 호와 동료 학생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그들이 곧 뒤따를 집단 탈출의 최선봉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p.288

화물 수송기는 동중국해를 끼고 본토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400마일을 비행한 후 대만 섬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안누오는 비행기가 하강하는 동안 프로펠러가 회전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자 마음을 가다듬었다. 안누오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학생들도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다급하게 도망치다가 충돌후 추락한 과적 비행기의 끔찍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 p.328

가족들은 가방을 내려놓고 씻고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신문 가판대를 지나던 그들은 이틀 전에 공산당이 귿르이 살던 도시를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상하이가 함락된 것이다! 언니는 계속해서 "세상에 맙소사!"라는 말을 되풀이했고 크리스티안은 기사를 자세히 읽으면서 덴마크어로 계속 중얼거렸다. 그들은 점령 당시 상황이 대체로 평화로웠다는 것을 알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빙은 도시가 일본과의 전쟁 때 당한 것같은 대량 살상을 면했다는 것에 고마웠다. - p.350

상하이 해방 후 중국 내에서 국민당의 시대가 끝나고 공산당이 곧 나라를 장악할 거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어지자 미국 내부에서는 중국 공산당 잠입자들에 대한 공포가 빠르게 커졌다. FBI는 중국인 학생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정보원 역할을 해줄 "호의적인" 학생들을 찾아냈다. 연방 요원들이 중국 학생단체와 그 지도자들을 조사하기 위해 전국으로 흩어지면서 호가 가입한 <중국학생기독교총연합회>는 FBI의 집중적인 조사를 받게 되었다. 폴린에게는 "광적인 친공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 P.402

영국인들은 원래 그 지역 출신인 사람들만 입국을 허가하고 상하이처럼 먼 지역에서 오는 난민들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 안타깝게도 광둥어로 대답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즉시 돌려보내졌다. 이러한 새로운 요구 조건이 생기기 전까지는 중국인들이 식민지를 출입하는데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이제 난민과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로우에 들어서면서 도린은 상하이에서도 고향 말투를 잃지 않았던 광둥성 출신 조상들에게 감사의 말을 속삭였다. - P.476

미국과 대만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 본토의 정부도 국가 안보의 명목으로 통제를 한층 강화했다. 마오쩌둥 주석은 "누가 우리의 적인가? 누가 우리의 친구인가? 이 질문은 혁명의 첫번째 질문이다"라고 쓴 바 있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내부의 적을 상대로 '반혁명 진압'운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대중 운동에 착수했다. 그 대상에는 반혁명적이고 우익으로 여겨지는 더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중국 사회에서 존경받았던 지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의 토지개혁운동은 상하이나 난징같은 도시 자본가와 중산층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미 제국주의자들과의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번 운동은 상하이의 도시 엘리트들에 대한 고삐를 더욱 바투 쥐게 했다. - p.540

도린 역시 상하이로, 그녀의 가족이 4대에 걸쳐서 살았던 항구 도시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코 홍콩에 머물 생각이 없었지만 어쩌면 이곳에 어떤 마법이 깃들어 있는지도 몰랐다. 앤드루 덕분에 홍콩은 그녀에게 더 고향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린은 그에게서 결혼 상대를, 어쩌면 미래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삶을 꾸려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에게는 상투적인 문구만 적힌 오빠의 짤막한 편지밖에 없었다. 적어도 베니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해가 지나면서 편지는 점점 뜸해졌다. 도린은 오빠가 자신이 보낸 돈이나 꾸러미를 받았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편지도 오지 않게 되었다. - p.561

베니는 더 많은 심문을 겪어야 했다. 그가 흑색 제국주의자들을 훈련하는 학교에 다닐 때 알던 외국인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들은 스파이였나? 그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나? 수업에서 왜 그는 영어로 "태양이 구름에 의해 가려진다. 태양은 구름에 의해 가려졌다. 태양이 구름에 의해 가려질 것이다."라는 문장을 가르쳤나? 태양인 마오 주석이 가려질 것이라는 얘기인가? 그렇다면 구름은 누구인가? 그들이 태양을 어떻게 가린다는 말인가? - p.576

혁명의 물결이 온 나라를 휩쓸었을 때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도망쳤는지 아는 이는 없지만 중국 전역에서 수백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넓게 펼쳐진 허술한 국경을 넘은 것은 확실하다. 오늘날까지도 중국 공산당은 두 가지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첫째 이 대규모 탈출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 둘째 상하이로부터 경제적, 사회적, 지적 자본이 유출되면서 중국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는 점이다. - p.589

예전에 읽은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이 아편전쟁 이후 서양세력을 등에 업고 상하이에 눌러앉아 엄청난 부를 누렸던 유대인들을 다룬다면 이 책은 격동의 시대를 자신의 힘으로 힘겹게 헤쳐나가야 했던 지극히 평범한 중국인들의 얘기이다. 영화 <국제시장>이 우리 아버지 세대가 경험했던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켠을 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주인공들은 모두 실존 인물이며 그 중 한 사람인 빙이라는 소녀는 저자의 어머니라고.

1949년 5월 상하이 엑소더스 한 장면. 저자의 어머니 또한 공산군을 피하여 상하이를 필사적으로 탈출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고향을 잃은 이들이 겨우 만난 바깥 세상 또한 구원의 땅은 아니었다. 온갖 박해와 차별을 당해야 했다. 집나가면 개고생인 법이라.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이런 생각이 든다. 20세기 어느 시대를 고르라고 해도 중국인으로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청나라가 망한 뒤 군벌들이 난립하는 혼란이 벌어지고 그보다 훨씬 참혹했던 중일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그 뒤에는 마오 치하에서 한국전쟁과 3천만명이 굶어죽은 3년 대기근, 문화대혁명의 동란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양안 너머 소위 '자유 중국'이라는 가식적인 타이틀이 붙은 타이완에서의 삶이 더 나을 것도 없었다. 대륙에서 적색 테러가 벌어지는 동안 타이완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서슬퍼런 세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우리보다 한술 더 뜨는 저임금, 고물가에서 청년들이 고달프게 살기는 양쪽이 판박이이다. 게다가 요즘 시진핑핑이 때문에 말로만 듣던 전쟁 위기까지 고조되는 판국이라.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다. 그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이 겪었던 단편적인 에피소드일 뿐이다. 저자는 전문적인 역사 학자가 아니라 작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사실에서는 걸려 읽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저자 특유의 드라마틱하고 사실적인 묘사는 읽는 내내 마치 내가 그 때 그 장소에 있는 느낌마저 준다. 저자의 필력이 놀랍다. 중국 근대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필히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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