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천국의 가을 - 중국과 서양, 그리고 태평천국 전쟁의 역사 걸작 논픽션 33
스티븐 플랫 지음, 임태홍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와 비슷한 세대라면 어린 시절 주말의 명화에서 하던 <마지막 황제>를 한번쯤 보지 않았을까 싶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초기 서양인 감독이 자금성을 5주 동안 통째로 빌려서 찍었다는 이 영화는 청나라의 1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였던 아이신기오로 푸이의 눈을 통해서 격동의 중국을 서사적으로 묘사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궐앞에 수많은 신료들이 도열해 있는 자금성의 웅장한 모습은 엄청난 비주얼이었다. 당시 투자 유치와 이미지 개선에 진심이던 중국 정부가 열성적으로 지원한 덕분. 심지어 톈안먼에 걸린 마오 수령의 대형 초상화까지 뗐다고. 참고로 톈안먼 사태 터지기 2년 전 영화. 중국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 요즘처럼 호주머니 두둑하고 목에 힘주는 시진핑 시대라면 어림없는 소리겠지.


영화에서는 할머니 격인 서태후에 의해 생후 34개월에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푸이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 상황과 시대의 흐름에 휘둘리며 파란만장한 인생 역경을 겪는 과정을 인간적인 동정심을 섞어서 묘사하지만 한편으로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본다면 꽤 운이 좋은 편인지도 모른다. 당장 앞선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만 하더라도 푸이가 즉위한 그 자금성을 향해 사방에서 성난 농민군이 몰려오는 와중에 가족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자살했으니 말이다. 또한 남명 정권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는 청군에 투항한 항장 오삼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원래 망국의 황제들이란 최후가 썩 좋지 않은 법이다. 자살하거나 아니면 살해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루이 16세는 길로틴에서 목이 잘렸으며 청조가 망한 지 6년 뒤 러시아 마지막 차르인 니콜라이 2세는 볼셰비키에 의해 가족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어쨌든 푸이는 옥좌에서 쫓겨난 뒤에도 그럭저럭 부귀영화와 천수를 누렸다. 하물며 그 시절 가축과 다를 바 없었던 대다수 중국 민중의 삶에 비하면야.

말년의 푸이(가운데)와 루쭝린(왼쪽), 슝빙쿵(오른쪽) 루쭝린은 원래 군벌 출신으로 푸이를 자금성에서 쫓아낸 장본인이고 슝빙쿵은 신해혁명의 서막인 우창봉기를 일으킨 인물. 공산당에 의해 연출된 사진이기에 저 어깨동무가 어디까지 본심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듯. "웃는게 웃는 것이 아니야" 그래도 푸이로서는 말년이 남들 시선 신경쓰지 않고 제 의지대로 살았던 유일한 시간이 아니었을지.


청조는 푸이 대까지 갈 것 없이 진작에 망할 수도 있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시원하게 아작나면서 처음으로 콧대 높은 중화의 존엄이 짓밟힌 이후 청조는 문을 닫는 순간까지 동네북 신세였다. 그 중에서도 태평천국의 난은 이자성이 명나라를 끝장낸 것처럼 청조를 거의 결딴낼 뻔했다. 심지어 그 와중에 영국, 프랑스는 청나라의 버릇을 고치겠다면서 톈진을 침공했고 함풍제는 북쪽으로 달아나야 했다. 하지만 청조는 우여곡절 속에서 버텨냈고 반 세기나 더 살아남았다. 서태후를 가리켜 '중국 3대 악녀'라느니 청조를 말아먹은 여편네쯤으로 불리지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식으로 황제의 무능함을 죄다 주변 여자 탓으로 돌리기 십상인 중국 남정네들의 뿌리깊은 관념이 만들어낸 것일 뿐, 영화 <남한산성>에서 조선군을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그 거친 아재들은 어디가고 온실 속 화초처럼 담작고 심약한 사내들만 가득했던 만주족 황실에서 그나마 강단이 남아 있는 여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삼국지 초반에 동탁에 의해 제거되는 하태후마냥 그 바닥에서 진작에 퇴장당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그녀는 보수반동의 전형으로 꼽혔지만 청 말 자강운동은 그녀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반란이 일어난 신장성을 도로 복속하고 갑신정변에서는 조선과 일본을 상대로 모처럼 청조의 위엄을 보여주어 우리 아직 안 죽었음을 뼈저리게 각인시켜 주기도 했다. 청조를 찬탈하는 위안스카이조차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야심을 드러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한족의 도전과 외세의 핍박 속에서 다 쓰러져가는 청조를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구심점이었으며 서태후가 죽자 청조도 망했다.

근래에 와서 '권력과 사치의 대명사'라는 서태후에 대한 재평가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빵이 없으면 고기 먹으면 되지"라고 했던 마리 앙투와네트의 유명한 말이 가짜뉴스였던 것처럼 서태후의 실정 또한 캉유웨이를 비롯해 그녀를 원수로 여겼던 한족 지식인들에 의해 상당부분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정말로 권력 농단으로 중국에 지울 수 없는 해악을 끼친 악녀는 마오의 경박한 황후인 장칭이었다.


반대로 청조는 태국처럼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청일전쟁과 의화단 난의 재앙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자희 신정으로 서태후 말기에 오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서태후의 진짜 실수는 사치나 개혁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죽기 직전 세 살 짜리 어린아이를 옥좌에 앉혔다는 사실이었다. 푸이를 대신하여 섭정이 된 순친왕 짜이펑 또한 서태후에 비하면 20대 초반의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서는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거대한 제국을 지탱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하지만 다른 만주족들 또한 더 나을 것도 없었다. 우창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청조는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게 토벌하여 일벌백계할 수 있었음에도 지레 겁을 먹고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 마냥 야심 넘치는 위안스카이에게 모든 군권을 넘김으로서 자폭한 꼴이 되었다. 만약 순친왕이 좀 더 현명했거나 위안스카이가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했더라면 청조는 살아남았을까. 러시아나 오스만처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면서 자강에 노력했다면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후난성의 촌놈인 마오쩌둥은 동네 선생 노릇하다가 인생을 마감했을지도. 오늘날 시진핑이 트럼프와 대립각 세우는 동아시아는 좀 더 평온할까.



새해 벽두부터 중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눈 여겨 볼 신작이 나왔더라.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글항아리에서 나온 <천국의 가을>은 아편전쟁 이후 내우외환에 허덕이던 청조 최대의 위기인 태평천국의 난을 다룬 책이다. 저자인 스티븐 플랫은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중국사 교수라고. 주로 청나라쪽 역사를 다루는 모양. 태평천국의 난은 1850년부터 1864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중국 전토를 전란의 불길에 빠뜨렸다. 서북과 동북을 빼고 중원 18개 성 중에서 17개 성이 휘말렸으며 죽은 사람이 2천만명에서 많게는 8천만명까지 추산되어 당시 4억명 정도였던 중국 인구의 거의 1/5에 달했을 정도. 삼국지에 나오는 황건적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 기세. 가장 특이한 것은 태평천국의 지도자였던 홍수전이 중국 역사에서 흔히 등장하는 여느 농민 반란군과 달리 기독교에서 파생한 사이비 짝퉁 교주였다는 사실. 그런 사람 대한민국에도 많이 있지 않남. 차이가 있다면 '예수천국 불신지옥' 대신 '멸만흥한'을 외쳤다는 점. 하지만 서양과 한족 양쪽 모두를 내편 삼으려는 시도는 결과적으로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어 두 마리 물고기 모두 놓치게 되면서 결국 패망했지만 말이다.

전성기 시절 태평천국 판도. 한때 중원의 태반을 지배하고 베이징 코앞까지 육박하기도. 하지만 사이비 짝퉁 교리의 한계와 지도부의 내분, 홍수전의 리더십 부족으로 중국판 메이지 유신을 여는 데 실패함으로서 차라리 하지 않는 게 좋았을 민폐만 끼친 꼴이 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비중있는 쪽은 홍수전이 아니라 그의 사촌이자 태평천국 5천왕 중 한 사람으로 홍콩과 상하이에서 외국인 선교사 밑에서 서양물 먹고 서구식 근대화를 외쳤던 간왕 홍인간이다. 서구인들 입장에서 본다면 적어도 성경으로만 서양을 접한 동료들에 비하면 좀 더 깨였다는 것. 참고로 중국에서 철도와 보험 도입을 가장 먼저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급진적인 주장은 당시 중국의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이세계에서 산업혁명을 하자는 얘기였고 너무 시대를 앞서갔기에 실현되지 못했다. 원래 이론과 실천은 별개인지라. 그보다도 본인부터 귀동냥으로 들은 얘기를 써먹은 것이지 그렇다고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다보니 주변 사람들로서는 뭔 뜬구름 잡는 소리였을 것이다. 오히려 청조 관료들 중에서 그의 저서에 주목하여 시도해 본 게 양무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일본한테 폭망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수박 겉핡기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만 증명한 셈. 어쨌든 그 시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서양인에게는 신비로운 모양.

홍인간이 이야기했듯 언제나 돋보였던 인물은 그의 사촌인 아홉살 연상의 홍수전이었다. 그들은 광둥성의 성도인 광저우에서 약 50km 떨어진 서로 이웃한 마을에서 살았다. 맑은 날이면 광저우 동북쪽에 위치한 바이윈 산이 보일 만큼 광저우에서 가까운 마을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친척 사이로 과거에 세도가였던 한 씨족에 속해 있었다. 송나라 때에는 그들 중에서 고관과 황제의 참모가 다수 배출되었지만 이미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가난한 농민에 지나지 않았다. - p.61

어떤 중국인도 쉽게 칭찬하지 않았던 레그는 홍인간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을 품었고 그를 "내가 아는 가장 다정하고 다재다능한 중국인"이라고 묘사했다.레그의 딸도 이를 뒷받침해 까탈스러운 자기 아버지가 홍인간에 대해 "다른 어떤 중국인에게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특별한 애정과 따뜻한 감탄"을 느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홍인간의 성품에는 그와 함께 일한 많은 선교사들의 관심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은 그를 "기독교 진리를 분명하게 잘 이해하고 있는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인물의 소유자"라고 묘사했다. - p.72


이 책은 광둥성의 하카족(객가인)이자 과거 4수생이었던 홍수전이 낙방의 충격으로 정신줄을 놓고 느닷없이 신내림을 받았다더니 중생의 구원을 외치며 세상에 나서는 것부터 14년 동안 벌어지는 태평천국의 파란만장했던 흥망성쇠를 서양인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태평천국군은 오합지졸 도적떼에 불과한 황건적이나 나중에 등장하는 동네 양아치 집단인 의화단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훨씬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다. 5명으로 구성된 1개 분대부터 5개 분대가 1개 소대를, 4개 소대가 1개 중대를, 5개 중대가 1개 여단을, 5개 여단이 1개 사단을, 그리고 5개 사단이 1개 군을 구성했다. 서구식 사단에 해당하는 1개 군은 1만3천여명에 달했다. 군사 편제가 명나라 시절에 머물렀던 청군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다. 게다가 엄격한 규율과 서양 상인들로부터 구입한 서양제 최신 무기로 무장하여 기강 빠진 청군을 연달아 격파했다.

실제로 태평천국은 겁 많고 무능한 함풍제의 청조를 교체할 수도 있었고 하다못해 중국을 양분하여 북부보다 훨씬 풍요롭고 한족들이 사는 남부를 통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주원장의 홍건적과 차이가 있다면 한족 사회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서구 열강이라는 외부 세력의 개입이었다. 홍콩과 상하이를 통해 중국에 발을 걸친 서구 열강들은 중국인 반란군이 캐캐묵은 공자 대신 기독교를 내걸었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지만 결국 자신들의 판돈을 청조가 이기는 쪽에 걸기로 했다. 후난 성의 한족 관료인 증국번은 나약한 청군을 대신하여 '상군'이라는 새로운 군대를 조직했고 거의 아무런 지원도 없이 태평천국군과 일진일퇴의 싸움을 벌인다. 태평천국을 파멸시킨 것은 청조의 군사력이 아니라 증국번과 서구 열강이었다. 봉기 초기에 합류하지 못한 채 떠돌이 생활을 했던 홍인간은 홍콩과 상하이에서 서양 선교사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성경 너머의 서양 문명을 배웠다. 하지만 서구의 무관심과 태평천국 내부의 복잡한 권력 투쟁 속에서 그 인맥과 지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천국의 몰락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그의 운명은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엘프 주인공보다 훨씬 비극적이었다. 난징을 탈출한 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저자는 그 과정을 6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본문을 통해 서사적이고 흥미롭게 묘사한다.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하고 재빠른 몽골인 기병대는 다가오는 연합군의 왼쪽 측면을 향해 넓은 파도를 이루며 돌격했다. 연합군은 좌측에 기병대, 중아에 포병대, 우측에 보병대, 이렇게 세 개의 열을 이루며 진군했다. 중앙의 포병대가 돌격하는 몽골인 기병들을 상대하기 위해 대포들의 방향을 틀자 영국과 프랑스 기병들이 재빨리 흩어지며 비켜섰다. 그러자 암스트롱포들이 다가오는 청국군 기병대 대열 한가운데로 일제 공격을 퍼부었고 결과는 처참했다. 몽골 기병들이 혼비백산해 멈췄고 이 순간 영국 기병대는 전력을 다해 중앙부로 돌격하여 청군 방어선을 깨뜨렸다. - p.214

1854년 2월에 이르러 증국번은 전투에 투입될 준비가 된 육상 병력 13개 대대와 이를 지원하는 수군 10개 대대를 갖추고 있었다. 수군은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 함대는 200척 이상의 전함, 군용 물자를 나르는 100척의 정크선, 크고 넓은 기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책만 아는 증국번은 전술 지휘관으로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그는 육체적으로 서툴렀고 말을 타는 것도 간신히 했다. - p.247

홍인간은 태평천국의 정치적 선전물을 쓰고 출판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자신의 궁에 있는 서양식 납활자 인쇄기를 사용하여 그러한 선전물을 대량 인쇄했다. 그렇게 나온 출판물 가운데 어떤 것들에서는 산업화에 대한 그의 신념이 드러났다. 그는 철도, 기계식 무기, 증기선, 전신의 중요성과 전국적 신문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인쇄기 자체가 그런 혁신의 하나였고 그의 인쇄 담당 인력은 외국의 가동 활자 기술을 손쉽게 익혔다. 그 인력은 반란군 수도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축에 속했고 한 방문자의 기록에 따르면 그 도시에서 종교적 열정이 가장 적은 축에 속했다. - p.302

여름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매일의 쌀 배급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텃밭의 채소와 잡초는 남김없이 먹어치워버렸다. 쥐를 포함하여 모든 동물이 사라졌고 도시 안의 굶주린 사람 수천 명을 먹여살릴 것은 아무것도, 혹은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9월 5일 그 도시로 들어간 승자들은 그 동안에도 안칭의 시장이 문을 닫은 적이 없음을 알고 경악했다. 인육의 가격은 마지막까지 600그램(1근) 당 은화 반냥, 즉 1파운드 당 38센트에 달했다. - p.394

반란군 군대가 성안으로 진입했다. 하비 영사는 곧 이렇게 보고했다. "이제 닝보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스란히 태평천국 군대의 수중에 있다." 그것은 비교적 평화로운 정복이었다. 하비 영사의 예상과 달리 광범위한 학살은 없었다. 또한 청국군이 그 도시에서 도망쳐 나오기 앞서 불을 지른 것 말고는 화재도 없었다. 어느 정도의 약탈은 있었으나 반란군이 "굉장한 절제"를 발휘했다고 하비는 놀라워했다. 지휘관들은 전장에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우호적이었고 "모든 외국인과 우정 및 친선을 유지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다. 또한 외국인 시민과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다 처형하겠다고 말했다. - p.443

하비의 보고에 따라 이제 <타임스>는 영국의 경제적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은 태평천국을 괴멸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반란군은 "우리와 우리의 황금 사과 사이를 가로막는 용"이 되었다. 편집진이 독자들에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단순히 인도주의적인 문제였다. 만약 상하이와 닝보의 차 시장이 태평천국에 의해 파괴된다면 영국 정부는 차 무역으로 얻는 꼭 필요한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서 차에 대한 세율을 인상해야 할 것이며 랭커셔 섬유 산업 붕괴로 이미 굶주리고 있던 사람들을 포함해 차를 마시는 영국 사회 하층 계급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것이라는 논리였다. - p.509

당면한 전쟁의 압박으로 홍인간은 중국의 새로운 정부 구성과 외교를 위한 계획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군사 작전과 보급로 확보가 최우선이었고 그 전선들에서의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그가 꿈꿨던 국가의 시작은 점점 멀어졌다. 철도, 법원, 무역중개소, 신문, 광산, 은행, 산업 등 그가 소중히 여겼던 개혁들은 모두 미뤄질 것이었다. 수도의 지도부를 단결시키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군사적 패배가 짙어질수록 홍수전의 광기는 커져갔고 파멸의 조짐은 환영을 보는 그의 정신을 묵시록으로 몰아갔다. 그는 물러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만 의지했으며 추종자들에게 함부로 보상과 영예를 베풀기 시작하면서 그의 아들 유주가 이름을 다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새로운 왕을 만들어냈다. 그래서는 안될 시기에 수도의 관리들 사이의 다툼이 커지고 격해지고 있었다. - p.595

외국인이 마지막으로 홍인간을 본 것은 난징 함락 직전 후저우에서였다. 패트릭 넬리스라는 용병이 그곳에 있었는데 원래 셰러드 오즈본 함대의 선원이었으나 반란군에게 끌려가서 그 도시의 방어를 돕고 있었다. 7월 초였고 왕국은 사방에서 무너지고 있었지만 후저우의 성벽은 아직 버텨내고 있었다. - p.618

얼마 전에 읽은 <동인도 회사 : 제국이 된 기업>에서 아우랑제브 황제 사후 무굴 제국의 분열과 혼란상을 기회삼아 일개 기업에 불과한 영국 동인도 회사가 거대한 인도 대륙을 집어삼키는 과정을 설명한다. 어째서 중국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을까. 가장 큰 차이는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질 때에는 동인도회사가 없었다는 점이다. 영국 정치인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중국 내전에서 어느 쪽 편을 들지를 놓고 국가적 윤리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 사이에서 주판을 두들기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이게 정치인과 상인의 가장 큰 차이일지 모른다. 상하이에는 '상승군'이라는 소규모 용병 집단 외에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서 조직한 세포이 부대와 같은 거대한 현지인 고용병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서구 열강의 개입은 느리고 제한적이었으며 청조를 자신들의 괴뢰로 만들지도, 애초에 그럴 의사도 없었다. 중국인들로서는 그나마 다행이랄까.

저자는 태평천국을 우호적으로 바라보지만, 과연 태평천국이 이겼더라면 이후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쉽게 말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어야 한다고 여긴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들과 달리 광둥성의 산골 촌놈들이었던 태평천국 지도자들은 정체불명의 사이비 교리와 한족 천하를 되찾겠다는 슬로건 외에 근대 국가를 향한 구체적인 비전이 없었다. 이들은 머리를 깎거나 양복을 입는 대신 만주족의 상징인 변발을 잘랐을 뿐이다. 하지만 신진 세력답게 청조보다는 더 활기차고 역동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금방 발기부전의 무기력증에 빠지는 중국 왕조사들을 보건대 얼마나 오래 갈지는 의문스럽지만 말이다. 적어도 이건 분명하다. 태평천국의 난은 정권 교체에 실패했고 머리 굳은 청조의 영감님들이 구태의연하게 추진한 양무운동은 젊고 활기왕성하며 뇌주름이 유연했던 일본 지도자들의 도전 앞에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만약 일본 또한 막부가 도막파를 꺾고 승리했다면 청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책이지만 서양인의 시각에서 본 중국사다보니 중간중간 착각한 게 아닌가 싶은 부분도 눈에 띈다. 가령 p.617에는 태평천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증국번과 포로가 된 충왕 이수성을 가리켜 "백발의 두 총 지휘관이 처음으로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마치 남북전쟁 말기 코트 하우스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마주한 그랜트와 리를 연상케 하지만 이수성은 증국번보다 12살이나 아래로 당시 41살에 불과했다. 아무리 전쟁터에서 고생해서 얼굴이 좀 삭았다고 해도 백발 성성은 아닐 듯. 정작 이수성과 동갑인 이홍장에게는 p.459에서 "젊은 인재가" 어쩌구. 그럼에도 올해 내가 읽은 최고의 역사책 중의 하나로 손꼽기에는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인도회사, 제국이 된 기업 - 탐욕과 혼돈의 아수라
윌리엄 달림플 지음, 최파일 옮김 / 생각의힘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운명의 장난으로 신천지 가는 티켓을 얻은 사회 낙오자가 등짝 뻘건 익룡에 올라타더니만 페라리 막토 어쩌구 하면서 족장 딸래미도 꼬시고 알콩달콩 가정도 만들고 나쁜 놈들 때려잡아 우리 동네 영웅이 된다는 잉여 인간 성공기를 다룬 영화 <아바타>에서는 RDA(자원개발관리국)이라는 블랙기업이 흑막으로 등장한다. <에어리언>의 웨이랜드 유타니와 더불어 대표적인 악의 조직으로 아직 세상물 덜 먹은 외계인들에게 지구 자본주의자들의 탐욕 쩐 근성을 뼛속깊이 새겨준다랄까. 그래봐야 주인공 보정 앞에서는 알짤없지만 말이다.


RDA의 정예 용병들이자 주인공 앞에서는 추풍낙엽으로 쓸려나가는 비운의 잡졸들. 원래는 원주민 토벌이 아니라 기지방어를 위한 경비병들이지만 "착한 나비족은 죽은 나비족"이라는 캐캐묵은 논리로 행패를 부리다가 결국 참교육을 당하게 되는. 뇌가 근육이라.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어째서 머나먼 이역만리의 행성을 개발하는데 NASA나 유엔 산하의 범정부 기구가 아니고 일개 민간업체가 주도하여 지구인의 이미지에 똥칠을 하게 내버려둔 것일까. 영화 <마스>나 <인터스텔라>를 보더라도 대개 지구 바깥의 일은 나사의 역할인데 말이다. 게다가 공무원들이란 잘해봐야 본전이고 잘못되면 내 책임이기에 쓸데없이 일을 벌이지 않으려는 것이 만국 공통의 습성 아니던가. 판도라에서도 돈 독 오른 업자가 아니라 나사 공무원들이 맡았다면 자원 채굴 때문에 원주민들과 척지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하긴 그랬으면 주인공은 영화 내내 책상 위에서 도장이나 찍고 있었을 것이고 스토리 진행이 안되었겠지.


미국 공무원들이 <주토피아> 세계의 나무늘보들 현실판이라는 얘기도. 러시아인이 쓴 <지극히 사적인 러시아>에서는 미국 유학 시절 그 동네 공무원들을 겪어보니까 일처리 느리기로 악명높은 러시아 공무원들보다 한술 더 뜬담서. 판도라에 이런 늘보들을 보냈으면 쿼리치 대령이 홈트리 폭격하겠다고 윗선에 허가받는데만 수개월은 걸렸을 듯. 그럼 비명횡사하지도, 바랑과의 썸도 없었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국가 주도로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냉전 시절 미국의 아폴로 계획이 1972년 아폴로 17호를 마지막으로 11년만에 중단된 것도 예산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소련보다 먼저 달에 사람을 보내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것을 달성하자 열기 또한 금새 식었다. 그 다음은 혈세 낭비라는 비난의 목소리였다. 정치인들로서는 기약도 없는 달 정복보다 당장 다음 선거에 도움되는 사업이 우선인 건 당연하다. 반대로 정치논리와 무관한 게 기업이다. 돈이 된다 싶으면 어떤 리스크도 감수한다. 대신에 물주들 입장에서 투자금은 확실히 뽑아야 하지만 말이다. 요근래 달에 다시 사람을 보내니, 화성을 개발하느니 하는 양반이 돈 없는 나사가 아니라 초갑부인 일론 머스크인 것도 이 때문인 셈.

실제로 이런 일은 수백여년 전 대항해시대에 벌어졌다. 풍요로운 바깥세계를 알게 된 유럽인들은 고향을 떠나서 배에 올랐고 숱한 댓가를 치르면서도 결국 신세계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어떤 이는 개척민으로, 탐험가로, 상인으로, 또는 용병이 되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새로운 세상에서 일확천금을 얻어서 부자가 되겠다는 욕망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동인도 회사'라는 기업이 있었다. 주주회사였던 동인도 회사는 군주 한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에서 투자금을 끌어모았고 리스크가 크고 자금 회수가 불확실한 초기 단계를 버텨냈다. 실패는 경험이 되어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졌다. 영화 <아바타>처럼 도덕과 윤리는 개나 줘버리고 온갖 재앙을 안겨줬다지만 어쨌든 우리네 세상은 훨씬 좁아졌다. 이점이 정화의 원정과 근본적인 차이였다. 영락제의 전시성 사업이었던 정화의 원정은 거창했지만 권력자의 위엄을 과시하는 정치적 목적 외에는 실속이 없다는 점에서 아폴로 계획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물주 노릇을 한 황제의 죽음과 함께 원정 또한 끝났다. 중국인들이 제아무리 정화가 탄 거함이 콜럼부스의 배보다 훨씬 컸다고 자화자찬한들 그거 말고 뭐가 있는가.

생각의 힘 출판사에서 작년 가을에 나온 신작도서 <동인도회사 : 제국이 된 기업>은 역사상 가장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렸던 초거대기업 영국 동인도회사의 274년 흥망성쇠, 그 중에서도 무굴 제국 정복기에 대한 책이다. 중국과 더불어 당시 세상에서 가장 크고 부유했던 인구 1억 5천명의 대제국을 손에 넣음으로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인류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저자는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 역사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윌리엄 달플림(William Dalrymple). 영국 최고의 논픽션 도서상인 <베일리 기포드>와 <2020년 역사작가협회>를 비롯해 여러 도서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고 한다.


이 살집좋은 털보 아재가 저자인 윌리엄 달플림. 어릴 때부터 인도와 인연을 맺고 인도 역사를 주로 다루는 모양. 참고로 친가는 남작, 외가는 백작 가문에 찰스 국왕의 후처인 카밀라 왕비와는 무려 팔촌지간이라고. 만나본 적이 있을라나. 어쨌든 나름 금수저일세.


칼레 해전에서 12년 뒤인 1600년 엘리자베스 여왕은 동방 무역을 전담할 기업의 설립을 승인한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탄생이었다. 그때만 해도 세계 바다의 지배자는 스페인, 포르투갈이었고 이들 눈에 영국은 위대한 항로에 겁없이 뛰어든 뉴비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쟁쟁한 경쟁자들을 하나씩 격파하며 신세계 무역을 장악해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용병들을 고용하여 현지인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인도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 광대한 식민지까지 건설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지독한 수탈과 학살, 압제가 자행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막장기업의 모티브인 셈. 영국의 유명한 격언으로 "세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 어쩌구하는 말이 있다던가. 인도인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 듯. "뻥치시네." 그 중에서도 동인도 회사에 고용된 뒤 인도에서 활약하여 출세길을 연 대표적인 인물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때려잡아 명성을 떨치게 되는 웰링턴 공작이었다. 쿼리치 대령도 어리버리한 부하넘이 원주민 처자와 눈 맞아서 배신만 때리지 않았어도. "영화라서 다행인줄 알어 이놈아!" 그래서 옛말에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람서.

영국 리즈 시절 최대 판도와 동인도회사의 무역로. 뉴비로 시작해 바다의 정점에 서기까지 수많은 역경과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 책은 런던 템스강 너머 한 건물에서 한 무리의 상인과 뱃사람들이 모여서 회합을 여는 것에서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동인도 회사의 창립을 허락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그 중에는 악명높은 사략선 선장이자 스페인 무적 함대를 격파한 전쟁영웅이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도 있었다. 그리고 동인도회사가 수립된 지 8년 뒤인 1608년 젖과 꿀이 흐른다는 낙원의 땅 인도에 당도했다. 원피스...가 아니라 향신료를 찾아 동방 무역에 뛰어들어 부와 명성, 힘을 얻겠다는 영국의 꿈이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 넓은 줄 모르는 풋내기의 만용이었고 분수 모르는 짓을 하다가 호된 댓가를 치르기도 했다.

1599년 9월 24일,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서더크 글로브 극장으로부터 강 하류 쪽에 위치한 자택에서 <햄릿> 초고를 고심하던 때였다. 북쪽으로 1.5킬로미터쯤 거리 템스강 건너편으로 걸어서 20분이 채 안 걸리는 곳에 잡다한 런던 사람들이 중간 문설주가 있는 무수한 튜더 양식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 미로 같은 목조 건물에 모였다. - p.43

17세기 동인도 회사는 무굴 제국을 상대로 딱 한번 무력 사용을 시도했다가 처참한 결과를 맞았다. 무굴제국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던 차일드는 무력으로 대응하여 한 수 가르쳐주겠다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다. 그는 레든 홀가에 있는 이스트인디아하우스에서 "우리가 무역을 포기하거나 인도에서 잉글랜드 국민의 권리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국왕 폐하께서 우리에게 위임한 칼을 빼드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라고 선언했다. 그 결과 1686년 대포 200문을 탑재하고 병사 600명을 태운 전함 19척으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의 함대가 런던에서 출정하여 벵골로 향했다. - p.76


우리는 세계사 시간에 '무굴제국'이라고 배우지만 엄밀히 말하여 유럽인들이 편의상 붙인 이름일 뿐 청이나 조선과는 달리 정식 국명은 아니라고 한다. 몽골의 현지식 발음이라나. 지배계층이 몽골계였기 때문. 칭기스칸의 씨앗이 여기까지. 그들 스스로는 인도를 가리키는 '힌두스탄'을 칭했다고. 즉, 인도 제국이라는 것. 어쨌거나 동인도회사가 도착했을 때 인도는 무굴제국의 위세가 절정이었다. 우물안 개구리나 다름없던 이들의 겁없는 도전은 무굴제국 입장에서는 가소롭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아우랑제브 황제는 철저히 짓밟은 다음 영국인들이 두번 다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만들었어야 마땅했지만 자비를 베푸는 쪽을 선택했다. 후손들로서는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무굴제국은 신성로마제국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화되지 못한 수많은 봉건왕국의 집합체였다는 점이었다. 1707년 황제의 죽음과 함께 분열되어 군웅들이 부유한 땅을 놓고 쟁탈하는 춘추전국의 난세가 시작되었다. 죽다 살아난 동인도회사에게는 실로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아우랑제브는 1707년 2월 20일에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그라나 델리가 아니라 그가 발아래 굴복시키기 위해 애쓰면서 성년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으나 끝내 실패한 데칸 고원 중부 쿨다바드의 소박한 무덤에 묻혔다. 그가 죽은 뒤 무굴 국가의 권위는 데칸에서부터 와해되기 시작했고 위대한 전쟁 지도자 바지 라오가 이끄는 마라타 군대가 북쪽으로 향하면서 인도 중부와 서부에서도 점차 무너졌다. - p.87

"무굴인들의 정책은 형편없다."고 잉글랜드 출신 용병인 밀스 대령은 썼다. "그들의 육군은 더 형편없고 해군은 아예 없다. 이 나라는 에스파냐인이 아메리카의 벌거벗은 인디언을 압도한 것처럼 쉽게 정복당하고 지배당할지도 모른다." 마드라스의 신임 총독 토머스 손더스도 동의했다. "무어인들의 허약함은 기정 사실이며 어느 유럽 국가든 어지간한 군사력으로 그들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하면 나라 전체를 정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120

무르시다바드가 무너지는 동안 무굴 수도 델리의 상황은 더 나빠졌다. 승냥이 떼들이 앞다퉈 물고 뜯는 썩은 고깃덩이처럼 남쪽의 마라타 약탈자들과 북쪽의 아프간 침공자들이 번갈아 도시를 약탈하고 점령하는 가운데 델리에 아직 남아 있는 재물은 지나가는 군대의 간헐적인 먹잇감이 되었다. - p.241



북사르에서의 전투는 짧았지만 혼전을 거듭했고 희생자가 많았다. 회사는 전장에 배치한 7천명 가운데 850명을 전사나 부상, 실종으로 잃었다. 총 전력의 1/8이 넘는 셈이었다. 무굴 쪽 손실은 몇 배 더 컸다. 아마도 5천명 정도가 전사했을 것이다. 그날의 승패는 오랫동안 불확실했다. 하지만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북사르 전투는 궁극적으로 인도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였으며 심지어 7년 전 더 유명한 플라시 전투보다도 더 결정적이었다. 무굴 세계의 3개 대군이 회사를 무찌르고 인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힘을 합쳤다. 하지만 패배한 쪽은 무굴인들이었고 회사는 인도 북동부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북사르 전투는 벵골과 해안지방에 대한 회사의 지배를 확고히 하고 그들이 서쪽 내륙 깊숙이 영향력을 확대할 길을 열었다. 인도 해안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거점들에서 활약하는 무역 회사일 뿐만 아니라 남아시아 전반에 걸친 부유하고 광대한 영토 제국을 지배하는 통치자로 거듭난 것이었다. - p.313

1770~1771년 벵골 기근이 절정일 때 회사 경영진은 무려 108만 6,255파운드를 런던으로 이전시켰는데 현재 통화 가치로는 1억 파운드에 달할 것이다. 1770년 여름이 끝날 때쯤 회사 정책이 초래한 결관느 너무 처참해서 성벽으로 둘러싸인 캘커타 대저택에 틀어박혀 사는 가장 부유하고 둔감한 회사 관리들조차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 p.337

한동안 이사들은 인도인들의 군사적 역량이 급속히 향상되는 것에 갈수록 경각심을 느꼈다. 10년 전 플라시 전투 시절의 손쉬운 승리는 힘들어졌다. 회사의 초창기 성공을 이끌었던 군사기술, 전술, 규율 분야에서 인도의 각 세력이 유럽의 혁신을 따라잡는 데 30년 정도가 걸렸는데 1760년대 중반에 이르자 격차가 급속히 줄고 있다는 증거가 쌓였다. 이사들은 "원주민들이 전쟁 기술에서 이룬 지식의 진보는 벵골과 코로만델 해안 양쪽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을 만들고 있다."라면서 벵골 집행위원회에 "유럽인 장교나 병사들이 그나라 정부에서 복무하지 못하도록" 막고 "힘닿는 데까지 그들의 모든 군사적 향상을 저지"하라고 촉구했다. - p.367

드 부아뉴는 신디아의 마라타 군대에 높이와 발사 각도 조절이 가능한 나사로 최신식 시사와 조준 시스템을 갖춘 대포와 정교한 유럽식 군사 과학기술을 전수하고 고도로 훈련된 병사들이 분당 세발을 발사할 수 있도록 마라타 머스킷에 쇠막대를 도입한 장본인이었다. 세줄 대형으로 늘어선 보병이 구사할 경우 마라타 세포이들은 전례없는 살상력을 과시하면서 적에게 지속적인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어느 계산에 따르면 300미터 거리에서 부아뉴의 대대에 전속력으로 달려드는 기병 대대는 세포이들의 총검에 도달할 때까지 대략 3천발의 총알에 직면해야 했다. - p.436

회사의 많은 비행들을 의회에 해명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입증하고 회사의 부패와 폭력, 매수를 만천하에 알리는데 일조함으로써 정부 감독과 규제, 통제 강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1773년 규제법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회사의 정치, 군사 업무를 정부 감독하에 둔 1784년 피트의 인도법이 한결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70년 뒤인 1858년에 회사의 전면적 국유화로 절정에 달하게 되는 그 과정의 조짐은 1784년에 이미 보이고 있었다. - p.465

더욱 놀라운 것은 티푸가 자체 선박과 상관을 보유한 사실상의 국유 무역회사를 설립했다는 점이었다. 티푸가 통상 부문에 발행한 무역 규제 문서들이 지금까지 전해지며 그 안에는 스리랑가파트남을 통해 수입되거나 수출된 귀중한 품목들에 대한 국가 주도 무역의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티푸는 심지어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에 파견한 외교 사절들에게 바스라 항에 농장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유럽인들처럼 해외 정착지를 확보하여 자국 선박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 - p.472

영국인들에게 인도는 결코 손쉬운 정복지가 아니었다. 잉카나 아즈텍에 비하면 훨씬 강적이었다. 영국 인구가 다합해서 500만명 정도에 불과할 때 인도는 1억 5천만명이 살고 있었고 세계 GDP의 1/4을 차지했다. 만약 두 나라가 붙어 있었다면 상식적으로 정복당해야 할 쪽은 틀림없이 영국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책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서 손 털고 나오거나 심지어 문을 닫을 뻔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사들은 부패와 각종 범죄 혐의로 탄핵을 받았고 동인도회사를 정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안 로버트 클라이브는 자살했다. 역사책에서는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이 프랑스에게 승리하면서 인도의 패권을 장악했다고 강조하지만 동인도 회사에게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인도인들은 유럽인들의 군사적 선진성을 빠르게 배워나가며 격차를 줄였다. 제랄드 다이아몬드가 말하는 <총, 균, 쇠>는 인도에서는 강점이 될 수 없었다. 인도인들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비록 아우랑제브 이후 무굴제국은 껍데기로 전락했지만 중부의 마라타 동맹과 남부의 마이소르 왕국은 만만찮은 적수였다. 마이소르 왕국의 명군이었던 티푸 술탄은 유럽식 근대화 정책을 추구했으며 수차례 영국군에게 패배의 쓴맛을 안겨주었다. 특히 마이소르 로켓은 영국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영국판 짝퉁인 콩그리브 로켓을 만들어 나폴레옹에게 써먹는다.

그럼에도 결국 인도는 영국의 노예로 전락해야 했다. 그보다 훨씬 인구가 적고 허약했던 신대륙의 식민지조차 비슷한 시기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했는데 말이다. 미국이다. 반면 인도는 18세기 말에 오면 파국은 초읽기였다. 1799년 티푸는 전사했고 마이소르는 정복당했다. 4년 뒤에는 인도 대륙의 절반을 지배했던 마라타 동맹마저 아사예와 델레에서 연전연패하면서 대세는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아편전쟁에서 보여준 청군처럼 무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국군은 인도인들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운명을 바꾸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이 책은 이렇게 설명한다. 인도가 분열되었고 자금력에서 동인도회사가 월등했기 때문이라고. 여기에 아서 웰즐리, 즉 훗날 웰링턴 공작이 되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유능한 장군 중 한 사람이 때마침 등장한 덕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 어려운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1803년 9월 23일 인도 중서부에서 벌어진 아사예 전투. 백작가문의 희망없는 삼남으로 태어나 형에게 빌붙어 살던 아서 웰즐리는 이 전투의 승리로 인생 도약의 기회를 잡았지만 자칫 질 수도 있는 싸움이었다. 그로서는 워털루 전투만큼이나 아랫도리 떨렸을 듯.


얼마 전에 읽은 모친이 한국인인 영국인이 쓴 <지극히 사적인 영국>에서 영국 학생들은 "영국의 식민지배가 문명화의 기회 또한 제공했다."라고 배운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한국 방송에 출연하여 실상을 알고 충격을 받았담서. 세계사에 나쁜 일이 있으면 대충 영국이 있다나.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이 일본 극우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차이가 있다면 대개 가해자들이 입에 담을 뻔뻔한 논리임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 스스로 그것을 추종하는 인간들이 있다랄까. 그것도 일부 네티즌만이 아니라 정치인, 대학교수가 말이다. 어차피 내가 직접 피해를 본 것이 아니라면 내 알 바 아니라는 소시오패스적인 심보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식민지배란 국제 구호단체가 아프리카의 불쌍한 아이들을 대가없이 돕는 자원 봉사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지배자들이 식민지에 근대적인 공장을 남길 수는 있어도 그것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자본과 기술, 인력이 없다면 한낱 고철이자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지배의 산물이지 지배당하는 자들을 위한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식민지배는 자력으로 일어설 기회조차 박탈한다는 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본질을 호도하는 말장난일 뿐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한 세기 전 향신료를 바치라면서 인도인들을 채찍질하는 영국인들이 지금에 와서는 거꾸로 인도인들 눈치 보는 신세가 되었다는 점에서 실로 격세지감일 듯. 어떤 의미에서는 그때가 비정상이었고 지금이 제 자리 찾아간 것이라고 해야할지도.


예전에 인도를 가리켜 누가 "한번도 안 간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라고 했던가. 그 정도로 매력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인도는 여전히 멀고 와닿지 않는 나라이다. 황당하고 기상천외한 발리우드 영화 빼고는 말이다. <무굴제국의 역사>와 더불어 이 책이 인도를 이해하는데 도움되지 않을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 - 독일 제국의 탄생과 세계대전의 서막
레이철 크라스틸 지음, 이진모 옮김 / 책과함께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크리스토퍼 클라크 교수의 <몽유병자들>이 풍운의 발칸을 비롯하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폭발하기까지의 복잡한 유럽의 정세를 서사적으로 묘사한다면, 마가릿 맥밀런 교수의 <파리1919>는 이른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파리강화회담 6개월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에너지 충만했던 유럽 열강들은 4년의 지독한 싸움이 지나간 후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것은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어마어마한 파괴력의 결과였고 무모한 전쟁을 강행한 정치인들, 그리고 기술의 발전을 무시한 채 구태의연한 전술을 고집했던 늙고 고루한 장군들의 합작품이었다. 그 댓가는 기성세대의 아집 속에서 전장으로 내몰려야 했던 젊은 병사들이 치러야 했다. 한 세대가 사실상 파멸했다.

프랑스 만화가 자크 타르디의 그래픽 노블인 <그것은 참호전이었다>의 한 장면. "정신은 물질을 능가할 수 있다"라는 캐캐묵은 신념을 고집하는 책상물림 장군들에 의해 전장으로 끌려나온 병사들은 무시무시한 화력 앞에서 고기다짐이 되거나 아니면 미쳐버렸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자기 반성 대신 살육의 모든 책임은 패배자들의 몫으로 돌려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증오심 넘치는 쪽은 말할 것도 없이 독일의 철천지원수였던 프랑스였다. 선봉에 선 사람이 프랑스 전시 총리였던 조르주 클레망소와 연합국 총사령관이었던 페르디낭 포슈 원수였다. 이들은 독일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철저히 짓밟아야 한다고 외쳤다. 복수심에 불타는 프랑스의 목소리는 같은 연합국들조차 공감을 얻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이 보기에 물론 가장 큰 잘못은 독일에 있지만 프랑스 또한 이 전쟁의 원죄가 없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두 나라의 싸움에 애꿎은 다른 나라들까지 함께 피본 격이었다. 파리강화회담은 관용과 징벌 사이에서 절충되었고 어느 쪽도 만족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패배자인 독일은 싸움에는 졌지만 프랑스에게 진 것은 아니라며 기세등등한 반면, 승자인 프랑스는 독일의 부활을 두려워하며 겁에 질렸다. SF 소설가 조지 웰스가 거창하게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 무색하게도 불과 20년 뒤 더 큰 전쟁으로 이어졌다. 5천만명이 죽거나 다친 인류 최악의 살육전조차 부족했다는 얘기이다.

왜 프랑스와 독일은 그토록 피터지게 싸워야 했던 것일까.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문제였고 프랑스와 독일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어영부영하는 사이 정작 제1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가장 먼저 터진 쪽은 프랑스-독일 국경이었다. 동맹의 의무라기에는 양측은 유별나리만큼 악에 바쳐 있었다. 대화와 협상은 불가능했다. 어느 한쪽이 나가떨어져야 비로소 끝날 수 있는 싸움이었다. 이들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40년 전 보불전쟁의 연장이었고 그 때의 리벤지전이었다. 마가릿 맥밀런 여사의 또 다른 저서인 <평화를 끝낸 전쟁>를 보면 보불전쟁 이후에 두 나라가 중국 고사성어에 나오는 월나라 구천마냥 와신상담하면서 복수의 칼날만 갈았던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껄끄럽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은 희석되었고 1900년 파리 엑스포가 열렸을 때 독일은 보이콧하는 대신 많은 기업들이 참여했다. 의화단의 난이 폭발했을 때에는 공동출병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언제까지고 지난 일에만 매달리기에는 유럽의 역학 구도는 너무 복잡했고 신경써야 할 일도 많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끝까지 과거의 응어리를 끊지 못한 채 결국 전쟁을 선택했다. 지난 세대가 남긴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벌이고 인류 전체가 파국에 직면한 뒤에야 비로소 화해를 선택했다. 거의 한 세기 만의 일이었다.

작년 말 인문 전쟁 분야 전문 출판사인 책과 함께 출판사에서 역덕이라면 주목할 책이 나왔더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이다. 보불전쟁을 다룬 책으로는 국내 최초라고. 그러고보니 이 출판사에서 요근래 전쟁사 전문서적을 정말 많이 내는 느낌. 그렇다고 길 모 출판사처럼 밀리터리의 탈을 쓴 라노벨스러운 책이 아니라 하나같이 수준이 있다. 그래서 계속해서 서평을 쓰게 되는 듯. 읽고보니 그쪽 출판사 작품이던.

저자 아주매인 레이첼 크라스틸(Rachel Chrastil). 미국 자비어 대학 역사학 교수로서 주로 근현대 프랑스 전쟁사를 다루는 모양. 마가릿 맥밀런 여사도 그렇고 사학과에 여학생은 하늘의 별만큼 많지만 다들 졸업 후에 뭐하고 먹고 사나 싶은 우리와는 천양지차랄지.

이 책은 1870년 7월 15일에 시작한다. 프랑스와 독일 양국이 동원을 선언한 날이다. 나흘 뒤 선전포고와 함께 본격적으로 전쟁이 폭발한다. 바꾸어 말하여 그 앞에 있었던 엠스 전보 사건(Ems Dispatch)을 비롯하여 두 나라가 맞붙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은 빼놓고 있다. 프랑스인이라면 몰라도 한국인들처럼 보불전쟁이 뭔지 거의 접할 일 없는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다소 당혹스러울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날부터 프랑스군이 아작나고 나폴레옹 3세가 포로가 되었으며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2제국의 선포, 파리 국민방위정부(파리 코뮌)의 붕괴, 그리고 1871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의 체결까지 10개월의 시간을 담고 있다. 자부심 넘치는 프랑스인들로서는 치욕의 역사인 셈. 그래봐야 1940년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전쟁이다! 프랑스와의 전쟁!" 1870년 7월 15일 스물 두 살의 뮌헨 출신 장교 디트리히 폰 라스베르크는 바이에른이 곧 프로이센과 연합해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국 군대와 싸울 것이라는 발표를 듣고 흥분에 빠졌다. 그의 동생 루돌프 역시 군대에 있었고 전쟁 소식을 듣고 기뻐했지만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은 "그 기쁨을 함께 하지 않았다." 바이에른 병사가 프로이센에 맞서는 대신 두 나라가 연합해서 프랑스에 맞서 싸우는 것에 환호하는 모습은 전쟁이 통합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 p.24

많은 예비군은 소집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이미 군복무 의무를 마쳤다고 여겼던 그들은 점차 시무룩해졌으며 이동 중에 점점 더 무질서해졌다. 많은 병사들이 새로 개발된 샤스포 소총으로 정식 사격 훈련을 받지 못했기에 전투 현장에서 대충 배워야 했다. 프랑스군에서 7월 하반기에 실제로 자원 입대한 예비군은 겨우 4천여명에 불과했다. - p.71

프로이센 군대의 집중력은 완벽하진 않지만 충분했다. 프로이센 참모부의 철도 담당 부서는 50여개 노선을 운영했는데 일부는 민간, 일부는 공공, 일부는 민간-공공이 혼합된 방식이었다. 총참모부는 국가권력이 대단위로 작용하는 동원 기간 동안에 민간인의 철도 여행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평시에 집중 지역과 철도 시설을 둘려보고 특정 군단에 선로와 열차 시간표를 배정하는 둥 훈련을 시행했다. 또한 필요한 열차와 객차의 양, 화물 선적장의 위치, 각 노선의 방향, 그리고 각 열차에 수용할 군인과 말, 물자, 수송차량 등의 수를 결정했다. - p.90

8월 2일 나폴레옹 3세는 아무런 대전략적인 지침도 없이 프로사르의 조언에 따라 라인 팔츠의 르브뤼켄 마을을 공격했다. 바젠의 제3군단과 프로사르의 제2군단 소속 6개 사단은 마을을 쉽게 점령했다. 프로이센군 사상자가 83명이고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사망자 11명을 포함해 86명이었다. 나폴레옹 3세와 그의 황태자는 말을 타고 제2군단을 순시했는데 병든 황제에게는 고문과 같은 고통을 주었다. - p.105

1914년과 마찬가지로 보불전쟁은 두 나라 모두에게 준비되지 않은 싸움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보다는 프로이센이 좀 더 준비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프로이센은 1864년과 1866년에 두번의 큰 싸움을 치렀고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게다가 80여년 뒤 사방에 실속없는 싸움을 걸다가 폭망한 무솔리니와 달리 프로이센은 전쟁에서 얻은 경험을 무의미하게 날리지 않았고 그때마다 한층 일취월장했다. 1870년의 프로이센은 나폴레옹 이래 유럽 최강을 자랑하던 프랑스 대육군에 1:1로 도전할 자격을 가진 유일한 나라였다. 반면, 1850년대에 제정 러시아군을 상대로 지루하고 실망스러운 싸움을 벌였던 프랑스군은 그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에 안주했다. 변화와 개혁은 없었다. 두 나라의 마음 가짐도 달랐다. 프랑스라는 강적에게 도전하는 프로이센인들로서는 결코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라면, 프랑스인들은 분수 모르는 튜튼족을 참교육한 다음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은 심정이랄까. 무엇보다도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이 아니었다. 그는 덜 야심적이고 더 무능했으며 신이 삼촌에게 내린 군사적 재능이 없었다. 게다가 62살의 고령으로서 몸은 노쇠하고 병이 들면서 만사가 귀찮다는 식이었다. 기운 넘치는 옆동네 애송이와 타이틀전을 벌이느니 자기 궁전을 지키는 쪽이 나았겠지만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그에게 도리어 족쇄가 된 꼴이었다. 그 결과는 재앙적이었다.

프뢰슈밀레르에서 마크마옹은 휘하 제1군단과 제7군단의 각 1개 사단, 그리고 비치에서 오는 파이 장군의 제5군단을 보유했다. 후자는 긴 행군 끝에 8월 5일에 느린 속도로 도착했으며 무방비 상태로 국경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프랑스군 사령부 내의 혼란은 목표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여기저기로 이동 행군해야 했던 프랑스 군인들을 녹초로 만들었다. 비록 이동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비와 햇빛이 번갈아가면서 그들의 진을 빼놓았다. 제7군단 대부분은 독일군이 검은 숲 지대에 모여 벨포르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오판하여 더욱 남쪽에 집결했다. - p.121

8월 6일에 벌어진 두 전투는 프랑스에게 비극이었다. 프랑스군은 잘 싸웠고 잘 방어했으며 끈질기게 반격했다. 샤스포 소총은 약속했던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프뢰슈빌레르에서는 프랑스군이 수적으로 열세했고 스피셰렌에서는 독일군의 지원군이 계속 도착하면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독일군의 대포는 프랑스군을 그들의 진지에서 쫓아냈으며 그들이 전투 초기에 반격을 시도할 때 화력을 소진하도록 유도했다. 퍼커션 퓨즐르 사용한 독일군의 포탄은 물체에 충돌하면서 폭발했으며 포병들은 포탄이 표적을 정확하게 타격하도록 훈련받았다. 대포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 p.129

그날 저녁 바젠은 독일군이 왼쪽에서 위협 공격을 해올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16일 아침 5시 15분에 바젠은 라드미로 장군의 전황 평가에 동의했다. 즉 프랑스군은 퇴로가 완전히 막혀 있어 차라리 이동을 연기해야 프로이센의 공격에 더 잘 대응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나폴레옹 3세가 마침내 메스를 떠나 샬롱으로 향했을 때 바젠의 군대는 그 자리에 기다렸다. -p.158

8월 18일 저녁 6시 프랑스군은 모든 지점에서 확고한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작센군이 측면 공격을 시작하여 7시 즈음까지 캉로베르의 제6군단을 생프리바로 밀어내자 프랑스군의 오른편에서 전투의 흐름이 바뀌었다. 7시 30분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왕실 근위대와 작센군의 돌격을 저지할 수 없었다. 양측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약 한 시간에 걸쳐 육탄전을 벌였지만 결국 프랑스군은 일부는 무질서하고 일부는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다. 독일군은 마침내 생프리바를 점령했다. - p.193

나폴레옹 3세는 마침내 스당에 백기를 내걸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휴전을 요청하기 위해 의원 한명을 보내려고 준비했지만 여기에는 발랑으로 행군 중이던 현 사령관 윔펜 장군의 서명이 필요했다. 르브룅이 그를 찾았을 때 윔펜은 발랑에서 마지막 공격을 시도하겠다고 주장했지만 부하들은 그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패배를 인정하고 침묵 속에서 말을 타고 요새로 돌아갔다. - p.252

유럽대륙의 일인자를 놓고 벌어진 결정전은 결코 명승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쉬지 않고 잽과 훅을 날리는 독일군의 공세 앞에서 프랑스군은 정신없이 난타당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유럽판 청일전쟁이었다. 물론 프랑스군은 청군처럼 오합지졸과는 거리가 멀었고 때때로 독일군에게 강력한 어퍼컷을 날리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병사들의 용기가 부족하거나 무기가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의욕없는 황제와 무능한 장군들 때문이었다. 프랑스군의 최신 샤스포 소총은 한 세대 이전이었던 독일군의 드레이제 니들 소총보다 훨씬 뛰어났지만 정작 소총전에서 더 많은 사상자를 낸 쪽은 프랑스군이었다. 특히 프랑스군이 완전히 압도당한 쪽은 독일군의 신형 C64 6파운드 강철 후장식 대포였다. 나폴레옹 3세가 포병 개혁을 등한시한 결과였다.

프랑스군의 M1858 라히테(La Hitte) 전장식 대포(왼쪽)과 독일군의 크루프 C64 후장식 대포(오른쪽). 1866년 보오전쟁 때만 해도 오스트리아군보다도 뒤떨어졌던 프로이센 포병은 4년 사이 환골탈태했다. "신은 가장 강한 포병을 가진 편에 선다"라고 했던 나폴레옹의 격언은 프랑스군 대신 독일군이 새겨들은 셈이었다. 프랑스군은 혁신적인 '프렌치 75'를 개발하여 1914년에 앙갚음한다.

8월 2일 프랑스군은 의기양양하게 독일 국경을 넘었지만 대번에 독일군의 반격에 직면했고 꼭 한달 뒤 나폴레옹 3세는 스당에서 항복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차라리 전쟁이 여기에서 끝났더라면 서로에게 더 좋았을지 모르지만 오스트리아와 달리 프랑스인들은 이런 어이없는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파리에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고 결사 항전을 외쳤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잔다르크와 같은 구세주도, 소련군을 상대로 '비스와의 기적'을 일으켰던 폴란드의 피우수트스키 원수와 같은 전쟁영웅도 없었다. 파리의 지도자들이 가진 것은 의욕이지 능력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아집은 국가를 구하기는 커녕 프랑스인들에게 더 큰 고통만 안겨다 준 꼴이 되었다.

스당에서 독일이 승리하다 프랑스 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들도 이 경이로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 따른 정세 변화가 연달아 이어졌다. 나폴레옹의 제2제정은 몰락했다. 그런데 파리에서 새로운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새로운 군대를 창설해 국가를 방어하는 동시에 독자적인 정당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부담스러운 임무를 안고 새로운 프랑스가 등장한 것이다. 독일군은 승리를 손에 넣었지만 전쟁을 끝낼 수 없었다. 그들은 파리를 포위했지만 루아르 남쪽에서 다가오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이 계속되자 더욱 절망에 빠진 군인들의 침입으로 인해 더 많은 프랑스 마을과 촌락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군은 패배했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p.268

하지만 국민방위정부는 파리를 프랑스의 모든 노력이 집중되는 구심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독일군을 당황하게 만들 요소를 잃었다. 전쟁 초기 단계를 특징지었던 요소, 즉 적이 어디에 집결해 있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라진 것이었다.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했다는 사실, 그리고 프랑스 정규군이 수도 인근에서 벌어질 몇 차례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하여 파리를 구출하려고 시도할 거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분명했다.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보급선을 공격하는데 집중했다면 국민방위정부는 더 나은 성과를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전략은 너무 늦게 추진되었다. 물론 파리의 포기도 쉽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 p.325

전투에 이어진 몇주에서 몇달 동안 150여명의 마을 주민이 사망했다. 열명 중 한 명 꼴이었다. 83세의 위다르 부인은 군인들에게 걷어차이고 집에서 끌려 나와서 며칠 후 결국 사망했다. 계단에 묶여 있던 아르불로-랑베르씨는 6일 동안 그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는 6주 후에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마을을 떠났다. 마을 인구는 1870년에 2048명이었지만 5년 뒤에는 1470명으로 줄었다. - p.454

1월 내내 포위된 도시들이 계속해서 함락되었다. 메지에르, 로크루아, 페론, 롱위. 오직 비치와 벨포르만이 계속 버텼다. 비치는 8월 초에 포위되었고 9월에 포격을 받아 부분적으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벨포르는 70일에 걸친 포격으로 마을 주민 4천여명 중 300명이 죽거나 다친 뒤에 결국 굴복했다. - p.586

저자는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엄청난 배상금을 강요했지만 그 대신 나폴레옹이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철저히 발라버린 다음 항복을 애걸하는 독일인들에게 요구했던 내용보다는 덜 가혹했다고 말한다.

프랑크푸르트 조약은 프랑스가 1807년 프로이센에 강요했던 틸지트 조약만큼 가혹하지는 않았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정치에 간섭하려 하지 않았고 프랑스군의 규모를 제한하거나 프랑스 해군을 파괴하지 않았으며 프랑스의 해외 영토를 해체하지도 않았다. 프랑스는 여전히 강대국이었다. - p.630

과연 비스마르크가 틸지트 조약이나 나중의 베르사유 조약보다 더 관대했는지는 쉽게 말할 수는 없을 듯 하다. 또한 독일인들로서는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했으며 그 전에도 수없이 행패를 부렸다는 점에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자격은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은 완전히 짓밟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의화단의 난에서 청나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두번 다시 덤빌 엄두를 내지 못하게 싸울 의지를 철저히 꺾어놓기에는 부족했다. 물론 패배자의 징벌만이 아니라 자국의 평판도 신경써야 하는 이들로서는 더 가혹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패전의 충격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했던 청나라와 달리 프랑스는 금방 회복했고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복수심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비스마르크는 실패했다. 두 나라 사이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깊은 감정의 골이 파였다. 사라예보 사건이 없었어도 결국 두 나라는 언제이건 맞붙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인 <로미오의 줄리엣>처럼 비극적인 계기로 양쪽 모두가 스스로를 돌아보기 전까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두 나라의 증오는 양차 대전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세계의 패권이 미국과 소련으로 넘어간 1958년 드골과 아데나워의 극적인 화해로 끝났다.

한편으로 이런 의문도 든다. 만약 승자가 프랑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실제로 나폴레옹 3세가 좀 더 잘하거나 몰트케가 좀 더 무능했다면 프랑스가 이길 수도 있는 싸움이었다. 프랑스는 비스마르크만큼이나 가혹한 조건을 내걸었을까. 알 수 없다. 그 대신 신흥 강국 독일의 등장은 보다 늦었을 것이고 유럽의 시간은 좀 더 느리게 흘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양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 또한 알 수 없다. 우리는 또 어떠했을까.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개방을 선택한 일본은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자 자신들의 롤 모델로 프로이센을 선택했고 프로이센처럼 군대가 나라를 지배하자 침략전쟁에 나섰다. 결과는 패망이었다. 보불전쟁이 아니었다면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까. 지금의 세상은 우리가 아는 것과 많이 다를 수도 있고 어쩌면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역사란 우연과 필연의 연속이며 사소한 사건으로도 흐름이 바뀌거나 어떤 노력으로도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보불전쟁이 남긴 유산을 말한다. 그것은 유럽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자 새로운 전쟁의 서막이기도 했다. 원시적인 기관총이 등장하고 소총과 대포는 한층 강력해졌다. 양측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대규모의 군대를 등원했으며 전투의 양상 또한 달라졌다. 비록 그 결말은 유럽의 종말이었지만 말이다. 700여 페이지의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당시 현장을 옮겨놓은 듯한 저자의 필력과 깊이 있는 서술은 훌륭한 읽을 거리이다. 올해 전쟁사로서는 첫 책으로 1주일 내내 퇴근 후 쉬지 않고 읽은 듯. 다른 역덕들에게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리 1919 - 새로운 세계 질서를 향한 6개월
마거릿 맥밀런 지음, 허승철 옮김 / 책과함께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솥밥 전우로 보이는 병사 둘이서 명령서 한장 들고 하루종일 최전선을 내달리며 겪는 모험을 다룬 영화 <1917>은 영국군에게는 지옥도였던 파스샹달 전투가 배경이라고 한다. 영화 자체는 어디까지나 이름없는 쫄다구의 시각에서 묘사되다보니 돌아가는 전황이나 왜 그런 임무를 맡게 되었는지, 양측 군대 사정 따위의 복잡한 얘기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 건 원래 높으신 분들만의 전유물이라.

<1917>에서 러닝타임 내내 정신없이 구르며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를 보내야 했던 주인공. 특히 영화 막판에 영국군의 돌격과 그 사이를 뚫고 끝까지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하지만 전쟁 전체로 본다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일 뿐이라는.


제1차 세계대전이 20년 뒤에 벌어지는 2차 대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거의 마지막까지도 승부를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연합군의 한축이었던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나가떨어지자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모든 병력을 끌어모아 1918년 3월 21일 루덴도르프 공세에 나섰다. 총력을 기울인 독일군의 최후 공세는 연합군을 파멸직전까지 내몰았다. 쓸데없이 미국을 적으로 돌리는 삽질만 벌이지 않았다면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막판 뒤집기에 성공한 쪽은 미국의 지원을 얻어 낸 연합군이었다.

연합군과 동맹군은 4년 동안 그야말로 서로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난타전을 벌였다. 루덴도르프 공세를 격퇴한 연합군이 100일 공세에 나서고 1918년 11월 11일 11시에 휴전조약이 체결되어 모든 총성이 멈추었을 때 승리의 영광 대신 상처와 독기만이 남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물며 전쟁의 트라우마로 가득했을 그 시절 사람들을 향해 관용과 용서라는 도덕 교과서같은 말을 떠들 수 있을까 싶다. 산업혁명으로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서 객기마냥 벌인 어리석은 싸움의 결과라고 해도 말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역사 시간에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함이 독일인들의 분노를 자아내어 히틀러라는 악마를 탄생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고 배웠다. 물론 이 캐캐묵은 얘기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베르사유 조약이 관대하지는 않았어도 특별히 가혹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독일이 1871년에 프랑스에 강요한 것이나 1918년 2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러시아가 당했던 것에 비하면 독일인들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자격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긴 쪽이 독일이었다면 관용은 고사하고 패배자들의 영혼까지 탈탈 털어먹을 참이었으니 말이다. 진짜 이유는 베르사유 조약이 아니라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더 큰 전쟁에서 철저히 박살난 뒤에야 터무니없는 자존심과 오기가 비로소 꺾일 수 있었다. 하긴 그 덕분에 우리는 독립을 얻었고 세상은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었으니 모든 게 신이 짜놓은 판일지도.

2025년이 얼마 남지 않은 연말, 내가 즐겨 보는 출판사 중 하나인 책과 함께에서 역덕이라면 올해의 피날레를 장식할 대작 도서가 나왔더라. 제1차 세계대전의 결산이었던 파리 강화회의를 파헤친 <파리1919>이다. 저자는 이 바닥에서 보기 드문 여류 전쟁사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마거릿 맥밀런 여사. 그러고보니 이 할머니 또 다른 저서인 <평화를 끝낸 전쟁>의 서평을 썼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던. 재작년에는 다른 출판사에서 <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라는 책이 출간된 바 있으니 국내에서도 제법 인지도가 있을지도.

1943년생이라고 하니 벌써 82살인데 머리 염색과 사진빨인지 몰라도 정정하신 듯. 무려 외증조부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전시 총리였던 로이드 조지였다고. 정작 이 책에서는 로이드 조지를 우유부단한 인물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라.

지난 번에 읽은 <평화를 끝낸 전쟁>이 19세기 말부터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고 전쟁으로 돌입하기까지 유럽의 상황을 다루었다면 <파리 1919>는 그 기나긴 전쟁이 막을 내리고 종전 협상을 위해 당사국들이 파리에서 한 자리에 모인 반년을 다룬 책이다. 언제 어디서건 열강들의 복잡한 셈법은 한결같지만 파리 강화 회의는 1953년 7월 27일의 휴전이나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러 사이에서 지리하게 벌어지는 협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단순히 전후 처리만이 아니라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시도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최대 최악의 싸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나폴레옹 전쟁과 달리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고 원치 않았음에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작된 싸움이었다. 이런 싸움은 두번 다시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 시절 사람들의 바램이었다.

파리 강화 회의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주요 연합국 이외에도 루마니아, 그리스, 세르비아처럼 승리에 나름 기여를 했다고 여기는 약소국들과 중립국들, 패전국의 해체로 독립을 얻어낸 신생국가들까지 32개국을 망라하는 거대한 국제 모임이었다. 그 밖에도 공식 초청은 받지 못했지만 이참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파리에 도착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상하이 임시정부였다. 물론 열강들의 무관심과 일본의 방해로 회의석상에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세상은 힘 없는 자들의 편이 아닌지라. 반면,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볼셰비키 혁명 탓에 이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협정문에 서명하는 각국 대표단. 이 때문에 '베르사유 강화 회의'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지만 조약만 여기서 체결되었을 뿐, 회담 기간 내내 회의가 열린 장소는 파리 중심가의 오흑세에 있는 프랑스 외무부 건물이었다.


원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라지만, 파리 강화 회의는 사공이 너무 많았다는 점이 문제였다. 게다가 서로의 꿍꿍이도 제각각이었다. 세계 평화보다 제 나라 국익이 먼저였기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얻어낼 속셈이었다. 30년 뒤에 열리는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은 사실상 미국이 주도했지만 1919년에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 미국은 고립주의로 물러났고 영국은 독일을 혼내주는 일보다 프랑스가 너무 크지 않도록 견제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정작 프랑스는 영국 없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며 이탈리아는 능력은 없는 주제에 한 몫 단단히 챙기겠다는 욕심만 넘쳐났다. 저 멀리 떨어진 일본은 유럽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고 적백내전이 한창이던 러시아는 아예 참석도 못했다. 나머지는 숟가락 얹어볼 궁리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다 같이 절충할 방법을 찾아서 조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과제였을 것이다. 결국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언제나 그러하듯 강자들에 의한 밀실 야합과 뒷거래였다. 희생양은 약자들이었다.

빈의 중재자들이 그 시절 직면한 문제도 엄청나기는 했지만 파리 회의에 비하면 훨씬 단순했다. 단시 영국 외무장관 케슬레이 경은 14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빈으로 왔다. 1919년 영국 대표단은 거의 400명에 달했다. 그리고 1815년의 의제들은 차분하고 여유있게 해결되었다. 캐슬레이와 그의 동료들이 1919년 회의를 보았다면 대중의 철저한 감시에 놀랐을 것이다. 파리 강회회의에는 훨씬 많은 인원이 참가했다. 30여개국이 대표단을 보냈고 그 중 이탈리아, 벨기에, 루마니아, 세르비아는 1815년에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였다. 빈 회의는 노예무역을 비난하는 선언을 제외하고는 비유럽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파리 강화회의는 북극에서 남극까지 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대륙 전체에 이르렀다. - p.27

처음에 영국과 미국은 강화회의가 파리에서 열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흥분을 잘하는 프랑스인들은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고 회의에 필요한 차분한 분위기를 제공하기에는 독일에 대한 반감이 너무 컸다. 윌슨은 스위스가 거의 혁명 직전 상황이고 독일 스파이가 넘쳐난다는 경고를 듣기 전까지는 회의 장소로 제네바를 원했다. 클레망소는 파리에서 회의를 열어야 한다는 뜻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로이드 조지는 나중에 말했다. "나는 피를 많이 흘린 수도에서 회의를 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와 하우스 모두 중립 지역이 더 낫다고 여겼지만 그 노인이 워낙 눈물을 흘리고 항의하다보니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75


이 책은 자신의 이상주의를 반영한 14개조 원칙이 세상을 바꿀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을 비롯하여 각국 대표단들이 파리에 도착하고 첫 회의가 열리는 1919년 1월 18일부터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는 6월 28일까지 대략 반년에 걸친 시간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주요 열강들만이 아니라 여느 책에서는 기껏해야 한두줄 언급될 뿐인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중국, 그리스, 오스만 등 파리 강화 회의와 관련되었던 거의 모든 나라가 한 챕터씩 차지한다. 심지어 이승만도 등장한다. 딱 한번이지만. 분량만도 900여 페이지에 달할 정도. 저자의 방대한 연구와 지적 능력을 보여주는 셈.

클레망소가 생각하기에 로이드 조지는 위트는 있지만 기만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중동을 놓고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길고도 험악한 협상에서 클레망소는 로이드 조지가 양국 간 합의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보고 격분했다. 두 사람 모두 급진주의자였고 무자비할 정도로 효율적이기는 했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클레망소는 지식인이었지만 로이드 조지는 그렇지 않았다. 클레망소는 합리적이었지만 로이드 조지는 직관적이었다. 클레망소는 18세기 신사의 취향과 가치를 갖추었지만 로이드조지는 전형적인 중류층이었다. - p.86

로이드 조지는 전임자인 솔즈베리나 훗날 후임자가 되는 처칠처럼 외교 문제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의 지식에는 허점이 많았다. 1916년 로이드조치는 "슬로바키아인들이 누구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지리 지식도 얕았다. 1918년 그는 부하에게 뉴질랜드가 호주 동쪽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냐고 말하기도 했다. - p.101

강화회의가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며칠 전 약소국 가운데 벨기에와 세르비아만이 회담장에 초청될 것이라는 소문이 루마니아에 돌았다.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힌 루마니아 총리 이온 브러티아누는 연합국 대사들을 불러 모아 "루마니아는 정의에 대한 권리를 가진 동맹국이 아니라 동정을 받아야 하는 불쌍한 거지처럼 대접받고 있다."라고 불평했다. - p.246

훨씬 후에 분명해진 연합국의 실책은 강화의 결과 독일인 대다수가 자국의 패배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라인란트를 제외하고 그들은 점령군을 보지 못했다. 연합군은 독일군이 1871년 파리에서 한 것처럼 베를린에서 승리의 행진을 하지 않았다. 1918년 독일군은 질서정연하게 고향으로 돌아갔고 군중은 그들의 행진에 환호를 보냈다. 베를린에서 새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어느 적도 여러분을 정복하지 못했다."라는 말로 그들을 맞이했다. - p.304

역사학자들은 그 부담이 독일인들이나 독일에 동정적인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았다는 결론으로 점점 더 기울고 있지만 전쟁 배상금 문제는 파리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베르사유 조약의 440개 조항 대부분은 오래 전에 잊혔지만 전쟁 배상금을 다룬 일부 조항은 징벌적이고 단견적이며 독소적인 조약의 증거라는 것이 표준적 시각이다. 새로운 바이마르 민주주의 체제는 엄청난 부담을 안고 태어났고 나치당은 독일인들의 당연한 불만을 자극해 이익을 얻었다. 재앙과 같은 결과에 대한 책임은 1919년 중재자들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 p.343

보헤미아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업이 더 강력한 독일 경제에 흡수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베네시는 수데텐란트의 설탕 공장, 유리 공장, 면방직 공장, 용광로, 양조장이 없으면 제코슬로바키아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강변했다. 또한 체코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산과 언덕으로 이어진 옛 국경이 필요했다. - p.441

로버트 세실은 이탈리아 주재 영국 대사에게 이렇게 썼다. "이탈리아 외교정책의 탐욕은 사방으로 이탈리아를 심각한 어려움에 빠뜨리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인들이 정당한 권리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요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소니노의 고집과 이탈리아의 과장된 주장으로 인해 이제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우리 외에는 친구가 없다는 것이 사실이 되었으며 그 고립을 완성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 p.527

구웨이쥔은 산둥반도가 "중국 문명의 요람이고 공자와 맹자의 탄생지이며 중국인들에게는 성스러운 장소"라고 설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산둥반도가 외국의 통제에 들어가도록 허용한다면 "단검이 중국의 심장을 겨누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캐나다의 보든은 중국의 설명이 아주 뛰어났다고 말했고 랜싱은 구웨이진이 일본 대표단을 완전히 압도했다고 평가했다. 비공개를 전제로 한 클레망소의 따뜻한 축하는 그날 저녁 모두가 아는 사실이 되었다. 언변으로 본다면 중국이 분명한 승자였다. - p.612

사실 독일 외무부는 강화 협상을 준비하면서 군축과 라인란트의 비무장화 및 점령, 영토 손실, 적어도 600억 마르크의 배상금 등 대부분의 평화 조건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독일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1919년 4월 한 미국인 관찰자가 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인들에게는 희망 외에는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미국인들이 뭔가 해줄 거라는 희망, 최종조건이 정전 협정처럼 그렇게 가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에만 매달렸다. 독일인들은 잠재의식에서 자신들이 인식한 것보다 더 낙관적이었다." 그는 예상했다. "독일인들은 인쇄된 평화 조건을 보는 순간 강한 유감, 증오, 절박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 p.841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는 이 조약의 존재를 자신의 선전선동을 위한 천재일우의 재료로 사용했다. 그러나 독일이 과거 국경을 그대로 유지하고 원하는 군사력을 계속 유지하고 오스트리아와의 병합을 허용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더 많은 것을 원했을 것이다. 그는 독일국민이 확장할 공간과 유대인이건 볼셰비키건 적의 파괴를 요구했을 것이다. 베르사유 조약은 이런 것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 p.879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 처리였던 1815년 빈회의는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천년이 넘도록 끝없는 전쟁의 반복이었던 유럽에서 처음으로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물론 크림 전쟁이나 보불전쟁, 발칸전쟁 등 크고 작은 싸움은 계속 되었지만 적어도 그 이전에 비하면 훨씬 안정적이었고 더 이상 자기들끼리 치고박기보다는 넘치는 힘으로 다른 세계를 정복하는 쪽을 선택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그다지 파괴적이지는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 세상이 한 세기 뒤보다 훨씬 단순했던 덕분이기도 했다. 모든 것은 나폴레옹 한 사람이 나빴던 탓으로 돌려졌고 다시는 그런 인간이 등장하지 않도록 세력균형과 현상 유지에 합의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인들이 또다시 유럽을 정복하겠다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기에는 너무 많은 힘을 써버린 뒤였다.

파리 강화회담에 참여한 사람들 또한 자신들이 평화의 시대를 다시 한번 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평화는 커녕 불과 20년 뒤 인류는 더 큰 전쟁을 맞딱들여야 했다. 파리 강화회담의 주도자들이 빈 회의 참가자들보다 더 무능하거나 탐욕스러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일이 너무 커지고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 3대 연합국 지도자이자 파리 강회 회의를 이끈 윌슨, 클레망소, 로이드 조지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해야 했다. 관용을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피를 흘린 승전국 국민들은 보복과 응징을 원했고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아직 싸울 수 있는데 윌슨의 거짓 약속에 넘어가 너무 쉽게 기권했다고 착각했다. 모처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어낸 약소국들은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는 점에서 탐욕만큼은 열강들 못지 않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설령 메테르니히를 무덤에서 부활시켰어도 더 나을 수는 없었을 듯하다.

과연 파리 강화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없었을까. 독일에 좀 더 관대했더라면 히틀러는 등장하지 않을까. 베르사유 조약의 문제점은 정말로 가혹해서가 아니라 그 어느 쪽도 아니라는데 있었다. 오히려 독일의 재기는 막지 못하면서 그들에게 복수의 명분만 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1919년에는 예측할 수 없었던 결과론적인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결말부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이 좀 더 잘 할 수도 있었겠지만 더 나쁠 수도 있었다." 그 말에 공감한다. 파리 강화 회담은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했지만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았을 샌프란시스코 회담 역시 냉전을 막지는 못했다. 냉전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핵무기로 인한 공멸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몇 번이나 인류는 핵전쟁 문턱까지 갔고 그 위험은 푸틴이 불리할 때마다 핵공갈을 일삼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파리 강화 회담이 아니라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까지 깨닫지 못하는데다, 설사 불에 데이고 나서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까먹고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탓이 아닐까 싶다. 매일 퇴근 후 900여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차고도 넘치는 책이다. 올해의 독서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 굶주림 - 우크라이나 대기근, 기획된 종말
앤 애플바움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코로나의 여파 속에서 개막한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면서 막을 내린 지 불과 한 달여 뒤,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2022년 2월 24일 새벽 4시, 20만 명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푸틴은 자신의 행위가 침략이 아니라 돈바스의 친러시아 주민들을 우크라이나의 위협에서 보호하기 위한 ‘특별군사작전’에 불과하다고 선언했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도 개전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를 무차별 폭격하여 수많은 민간인의 피해를 초래했을뿐더러, 돈바스 주변에서 우크라이나군을 밀어내는 것을 넘어서 수도인 키이우를 노렸다. 그의 진짜 속셈은 이참에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고 자신에게 충실히 복종하는 괴뢰정권을 세워서 러시아의 속국으로 삼는 데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사흘이면 백기들고 항복할 거라고 여겼던 푸틴의 안이한 생각과 달리, 우크라이나인들은 끝까지 버텨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망명을 거부하고 수도에 남아서 항전을 지휘한 덕분이었다. 특히 포화가 쏟아지는 수도 한복판에서 그가 SNS에 직접 올린 “나는 키이우에 남을 것입니다.”라는 영상은 전 세계에 깊은 감동을 남겼다. 그때까지 코미디언 출신의 아마추어 지도자로만 여겼던 젤렌스키를 온 세상이 다시 보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사기가 올라간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을 막아내는 기적을 일으켰다. 2014년 크름 반도를 무기력하게 빼앗겼을 때와는 대조적이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병참선의 한계에 직면하면서 물러나야 했다. 전쟁의 첫 번째 전환점이자 푸틴의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강 건너 불구경하던 미국과 서방은 그제야 우크라이나가 이길 수도 있다는 것에 판돈을 걸기 시작했다.

개전 이틀 째인 2월 25일 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을 바꾸어 놓은 젤렌스키의 SNS 영상. 제 가족과 재산만 챙겨 해외로 달아난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에우나 아프간의 아슈라프 가니같은 쓰레기들과 달리, 그는 망명을 권유하는 미국을 향해 "내게 필요한 것은 피신차량이 아니라 무기입니다."라고 단칼에 거절했다. 이전의 부패하고 무능한 우크라이나 지도자라면 보여줄 수 없는 결단력이었다.


유엔이 러시아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전 세계가 공분하는 가운데, 여기에 앞장서야 할 서방의 일부 지식인들은 도리어 푸틴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양 두둔하고 나섰다. 물론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킨 것은 잘못이지만(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따지고 보면 우크라이나도 잘한 것은 없다는 둥, 전쟁 책임은 푸틴의 탐욕 때문이 아니라 돈바스의 친러 분리주의자들을 탄압한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포위할 요량으로 우크라이나를 무책임하게 선동했던 미국, 공공연히 나토 가입을 떠들어 푸틴을 자극했던 젤렌스키의 분별없는 행태가 더 크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은 물론이고 러시아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어떤 제제조차 실효성이 없다는 핑계로 발목잡기에 나서고 있다.

심지어 러시아와 그리 좋은 인연이 없는 국내에서도 함부로 푸틴에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군 장성 출신의 어느 정치인은 "우크라이나는 6.25 때 우리의 적이었는데 왜 도와야 하느냐"고 질타하기도 했다. 이런 걸 보면 우리가 말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지 정치하는 양반들의 역사 인식이 얼마나 무지하며 여전히 구한말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냉전 시절 우크라이나가 구소련의 일부였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알 뿐, 우크라이나가 어쩌다가 소련에 편입되었으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입장 바꾸어 우크라이나인들이 중국의 일방적인 선전만 듣고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카더라."라고 한다면 우리로서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이 지난 4번의 중동전쟁이나 1980년대의 이란-이라크 전쟁과는 달리 두 나라가 지역 패권을 놓고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이 극심한 경제난과 장기 집권에 따른 국민의 불만을 외부로 돌릴 속셈에 의도적으로 영국을 도발했다가 여지없이 박살났던 포틀랜드 전쟁과도 다르고 인도-파키스탄의 영토 분쟁과도 다르다. 이번 전쟁은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총을 쏘아서가 아니라 푸틴이 자신의 압도적인 힘을 믿고 약자인 우크라이나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침략전쟁이다. 그런 점에서 1937년 일본의 군부 모험주의자들이 저지른 불장난에서 비롯된 중일전쟁과 1939년 스탈린의 핀란드 침공, 1940년 무솔리니의 충동적인 그리스 침공을 연상케 한다.

푸틴은 그동안 나토의 동진이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했기 때문에 부득이 행동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사실상 무장 해제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나토가 러시아에 무슨 위협이 되었으며 유럽이 러시아의 석유와 천연가스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쏙 빼놓은 억지일 뿐이다. 그보다도 미국과 서방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쪽에 따질 일이지 만만한 우크라이나를 때리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평화를 깨뜨린 쪽은 서방이나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푸틴이지만 자신의 의심은 언제나 정당하며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런 합리적 의심을 들도록 만든 것 자체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라는 것이 그 양반 논리이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푸틴은 우크라이나라는 나라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어 왔다는 점이다. 원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였으며 1991년에 독립을 허용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러시아의 품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30년 전에 이혼한 옛 마누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마음을 돌리도록 애쓰기보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다고 폭력을 서슴치 않는 러시아 남자 특유의 썩어빠진 마초 근성을 보여주는 게 푸틴이랄까. 정작 자신은 마누라를 몇번이나 갈아치웠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는 서방의 압제에서 해방할 동포라고 여겨서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우크라이나의 자원과 우크라이나인들의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의 식민지라는 얘기이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 때부터 이어져 온 러시아인들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결같은 태도이다.

러시아군 철수 후 부차에서 발견된 시신 더미들. 부차만이 아니라 러시아군이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 발견된 전쟁 범죄의 현장이었다. 푸틴으로서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 의지를 철저히 짓밟고 러시아의 지배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 이번 전쟁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멀고도 먼 나라이지만 우크라이나가 당하는 모습은 결단코 남의 집 불구경할 일이 아니다. 우리 이웃에는 푸틴 이상으로 탐욕스러운 독재 국가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다. 실제로 시진핑은 예전에 트럼프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라고 발언하여 뒤늦게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트럼프 이후 제 잇속만 챙기는 행태로 미국과 동맹국들이 갈등을 빚는 가운데 중국이 그 빈틈을 노리고 있다. 오늘의 우크라이나는 내일의 우리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탈리아의 침략으로 망국의 황제가 된 하일레 셀라시에가 국제연맹에서 했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이며 여러분의 내일이 될 것입니다.(It is us today. It will be you tomorrow.)"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간의 관심이 쏠리면서 시중에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몇 권의 책이 나왔지만, 글항아리 출판사의 신작도서인 <붉은 굶주림>은 그 중에서도 '우크라이나의 눈물'을 다룬 책이다. 어째서 우크라이나인들이 그토록 러시아에 이를 박박 갈면서 푸틴에게 굴복하기를 거부하는지 이유가 담겨 있다랄까. 저자인 앤 애플바움은 미국 언론인이자 여류 역사학자로서 대표적인 반러 반푸틴 학자이기도. 특히 2000년 푸틴이 처음 권력을 잡았을 때 많은 서방 지식인들은 그가 비록 독재 성향은 있지만 친서방에 실용적이며 적어도 말은 통하는 상대일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생각이 얼마나 안이한 착각인지 지적하여 논란을 일으켰다고.

이 강단 있어 보이는 할머니가 저자인 앤 애플바움 교수. 말할 것도 없이 러시아에서는 기피인물이며 트럼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홀로도모르(Holodomor)'란 우크라이나어로 대기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책은 스탈린 시절인 1932년~33년 지구에서 가장 풍요로운 옥토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역사상 최악의 기근을 다루고 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500만명이 아사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600만명이라고 하니 여기에 비견될만한 참사였다. 기근의 원인은 경신대기근처럼 소빙하기나 천재지변이 닥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스탈린을 비롯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엉터리 농업 정책이 초래한 결과였다. 이들은 니콜라이 2세의 가장 무능한 관료들조차 감히 하지 않을 국가적 자살이나 다름없는 정책을 인민들에게 강요했다. 심지어 농업 총책임자였던 트로핌 리센코(Trofim Lysenko)는 식물들도 마르크스 이념에 따라 계급투쟁을 한다는 억지를 부리면서 비료와 살충제를 쓰지 못하게 하여 농사를 완전히 망치는 데 일조했다.

기근은 소련 전역에서 벌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쪽은 우크라이나였다. 남편이 아내를 잡아먹고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카니발리즘이 자행되었다. 그럼에도 소위 강성대국의 꿈에 눈이 먼 스탈린은 외화 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굶어죽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식량까지 빼앗아 외국에 수출했다. 국가로서의 존재 가치를 부정한 셈이었다. 그에게 인민은 구제가 아니라 수탈의 대상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경고를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악마의 속삭임인양 취급하면서 눈과 귀를 막고 고집스레 현실을 부정했던 스탈린은 체제 자체가 무너질 판국에 몰린 뒤에야 자신이 한 일에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반성과 개혁이 아니라 한층 강력한 통제와 억압이었다. 나는 옳았지만 남들이 지시에 제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은 우주의 섭리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 스탈린의 편협한 사고방식이었다. 게다가 불만 가득한 인민들의 분노를 억누르기에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 나머지 더욱 편집광적인 공포와 광기에 사로잡혔다. 결과는 스탈린 치세 내내 광풍으로 불어닥칠 ‘대숙청(Great Purge)’이었다.

하르키우의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아사자의 시신들. 피해 당사자인 우크라이나인들은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할 요량으로 일부러 대기근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반면, 러시아 학자들은 소련 전체에서 광범위한 기근이 초래되었다는 점에서 스탈린이 의도했다기보다 잘못된 경제 정책의 결과라고 일축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비옥한 땅에서 최악의 대기근이 벌어졌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스탈린은 막대한 식량을 강제 공출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가 제정 러시아의 일부이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언젠가 퀴리 부인 전기에서 나라 잃은 민족으로 말과 글을 쓸 수 없는 설움을 겪었고 옛 조국인 폴란드를 기리기 위해 자신이 발견한 원소에 '폴로늄'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일화를 읽었는데 그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 끼어서 갖은 구박에 시달렸던 것이 우크라이나. 원래 인간이란 내가 남에게 저지른 건 까먹어도 남한테 당한 건 두고두고 기억하는 법이라.

그런 우크라이나에게 가장 큰 실수는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었을 때 독립 국가를 세울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잠시나마 그들 역사상 최초의 민족국가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잠시 세웠지만 지도층의 분열과 독일과 폴란드, 소련의 침략, 무엇보다도 독립의 의지가 아직은 부족했기에 4년 만에 멸망했다. 레닌은 제정 러시아의 유산, 특히 '러시아의 빵바구니'였던 우크라이나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나라는 둘로 쪼개져서 서부는 폴란드에, 동부는 소련에 흡수되었다.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 중앙아시아 민족들 역시 소련군에 의해 진압되거나 자치권을 보장하겠다는 레닌의 약속만 믿고 독립을 포기했다. 이들이 볼셰비키의 거짓말에 속았음을 깨닫고 땅을 치고 후회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련 체제의 일원이 되는 것은 독립을 위해서 무수한 피를 흘리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악몽이었다.

짧은 존속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 정부는 얼마나 외교적 성공(나중에는 대부분 잊힌)을 거두었다. 1918년 1월 20일 독립 선언을 한 뒤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스물여덟살 난 외교장관 올렉산드르 슐힌은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불가리아, 튀르키예, 심지어 소련을 포함한 모든 주요 유럽 국가들로부터 사실상 승인을 얻어냈다. 12월에는 미국이 외교관을 보내 키이우에 영사관을 열었다. - p.58

레닌이 우크라이나 전선에 보낸 전문 내용은 이보다 더 노골적이기도 힘들었다. 그는 1918년 1월에 이렇게 썼다. "제발 부탁이오. 모든 힘과 혁명적 수단을 써서 곡문을 보내시오. 곡문을, 곡물을! 그러지 않으면 페트로그라드는 굶어 죽을 것이오." 3월 초 우크라이나를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에 빠르게 빼앗기자 모스크바는 분통을 터뜨렸다. 성난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민족 운동과 고집스러운 농민 지지자들을 비난했을 뿐 아니라 달아난 우크라이나 볼세비키도 욕했다. - p.74


1919년 레닌에게 곡물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집단 농업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이 공화국의 문제가 의제로 떠오를 때마다 그는 곡물 문제부터 꺼냈다. 우크라이나만 언급되면 레닌은 매번 얼마나 많은 곡물이 그곳에 있냐고 질문했다. 그리고 거기서 얼마나 가져올 수 있느냐, 또는 이미 가져온 게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 p.91

10년 뒤에도 그랬듯, 농민들은 개, 쥐, 벌레를 먹기 시작했다. 잎사귀와 풀을 끓여 먹었다. 식인 행위도 간혹 일어났다. 가까스로 사라토프에서 리가로 가는 열차에 올라탔던 일단의 피난민들은 그 도시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묘사했다. "낡은 쓰레기차들이 매일 돌아다니며 시체를 모았다. 사람들이 보통 쓰레기를 뒤지다가 쓰러져 죽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거리에서 페스트에 걸린 시체들을 숱하게 봤다. 이런 사실은 소련 언론에 전혀 나오지 않았다. 관리들은 전염병이 돌고 있음을 대중에 알리지 않았다." - p.143

한때 러시아 전역을 전란의 소용돌이로 빠뜨렸던 적백내전은 1920년에 오면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났다. 핀란드와 발트 3국, 폴란드 동부를 제외하고 제정 러시아 영토 대부분은 소련으로 계승되었다. 우크라이나도 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내전의 끝은 안정의 시작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고난이 닥쳤다. 새로운 적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 레닌의 '신경제 정책'이 자초한 결과였다. 차르 체제를 가리켜 무능하다고 비웃었지만 한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그는 자신의 이상주의를 앞세운 무모한 실험으로 소련 인민의 번영은 커녕 경제적 파국을 초래하고 나라 전체를 아사에 내몰았다.

하지만 진짜 지옥은 이제부터였다. 레닌 사후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정권을 잡은 스탈린은 인류 역사상 가장 광기어린 절대 권력자였다. 그가 진시황이나 네로, 이반 대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단순한 광기를 넘어서 자신만의 비뚤어진 신념으로 철저히 무장하여 인민의 일거수 일투족은 물론, 필요하다면 우주의 진리까지 내 방식으로 바꾸겠다고 굳게 결심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도 자기 손에는 조금도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 잘 되면 내 덕분이요, 안되면 남탓으로 돌려서 실패의 책임을 회피하는 비범한 재주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스탈린은 공포와 폭력으로 인간의 저항 의지를 어떻게 해야 굴복시킬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한 불만을 떠넘길 희생양을 교묘하게 만들어내어 죽는 순간까지 어떤 도전도 받지 않고 권력을 유지했다. 그 방법은 약자 중 한쪽을 '쿨라크(반동)'라고 규정하고 인민의 적으로 만들어 서로 싸움 붙이는 것이었다. 30년이나 이어진 스탈린 체제는 소련 인민 전체에게 악몽이었지만 그 중 가장 큰 피해자는 우크라이나였다. 특히 '대기근' 시절 이 비옥한 땅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수많은 증언과 폭로는 충격을 넘어 분노를 자아낸다.

1927년이 되자 체제는 다시 불안정해졌다. 그해 국가는 540만 톤의 곡물을 확보했다. 그러나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관료들에게 엄격하게 규정된 양의 빵을 나눠주던 식량 배급 기관은 곡물 770만 톤을 기대하고 있었다. 전 연방 조사에서 OGPU는 소련 전역의 식량 배급 줄에서 '폭도 진압과 고성을 지르는 싸움'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 p.187

코펠레프와 나디아, 그리고 이와 비슷한 사람들은 불만에 찬 시간을 보내왔다. 볼셰비키는 인민에게 부와 행복, 토지 소유권, 권력을 선물하겠다느 대담한 약속을 했다. 그러나 혁명과 내전은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웠으며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혁명 후 10년이 지나자 많은 사람이 실망했다. 그들에게는 볼셰비키 승리가 왜 공허한지에 관한 설명이 필요했다. 공산당은 그들에게 희생양을 제공해 왔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부추겼다. (중략) 어느 날 한 농부가 그에게 쿨라크를 너무 잔인하게 대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자 다비도프는 격렬하게 반박했다. "당신은 그들이 불쌍하군요. 동정심을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은 우릴 불쌍히 여긴 적이 있습니까? 적들이 우리 아이들의 눈물을 보고 운 적이 있나요? 부모가 죽은 뒤 남겨진 고아를 보고 운 적이 있단 말입니까?" - p.245

때로는 몰수가 신속하게 폭력적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체르니히우 주에서는 지역 단체들이 한겨울에 한 농민 가족을 집에서 내쫓았다. 길에서 온 가족의 옷을 벗겼고 난방도 되지 않는 건물로 끌고 가서 그곳을 새집으로 정해줬다. 베레즈네후바테 현에서는 열두 살 소녀가 셔츠 한벌만 빼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 옷이 벗겨진 채 어머니와 함께 거리로 내쫓긴 아기도 있었다. 한 활동가 단체는 10대 소녀의 속옷을 빼앗은 다음 알몸으로 길거리에 방치하기도 했다. - p.263

비밀경찰은 승리를 거두었다. 항의 시위가 집단화를 늦췄지만 국가는 대량 체포, 대량 추방, 대량 탄압으로 반격했다. 공산당은 일단 기다린 후 밀어붙였다. 스탈린이 '도취할 만한 성공' 기고문에서 사용한 온건한 말은 결국 말에 불과했음이 입증되었다. 동일한 정책이 계속 적용되었고 심지어 더 가혹해졌다. 1930년 7월 격렬한 3월 열병 시위가 일어난 지 불과 몇달 후 정치국은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다. 1931년 9월까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주요 곡물 재배 지역의 가구 중 최대 70퍼센트를 집단 농장에 가입시키는 것이었다. 1930년 12월 정치국 위원들은 자신의 열의를 증명하기 위해 목표를 전체 가구의 80퍼센트로 상향 조정했다. - p.324

스탈린의 바람대로 교육적인 언론 캠페인이 이어졌다. 법령 발표 후 2주가 지나자 프라우다는 붉은 건설자 집단 농장의 밭에서 곡물을 훔친 쿨라크 여성 그리바노바 사건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그는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우크라이나 언론은 오데사에서 절도죄로 총살당한 부부의 이야기를 포함한 세 건의 재판을 자세히 보도했다. 보도된 다른 사건 중에는 열 살짜리 딸이 주운 소량의 밀을 소지했다는 혐의로 총살당한 농민의 사건도 있었다. - p.364

여러 젊은 집단 농부, 마을 소비에트와 코펠레프 자신으로 구성된 팀들이 오두막, 헛간, 마당을 수색하고 저장한 씨앗을 모조리 빼앗고 소와 말, 돼지를 가져갔다. 그들은 성상, 겨울 외투, 카펫, 돈을 비롯한 귀중품은 무엇이든 가져갔다. 여성들은 집안의 가보를 붙잡고 히스테릭하게 울부짖었지만 수색은 멈추지 않았다. 코펠레프 자신도 이 일이 매우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혐오스러운 선전을 끊임없이 반복하면 당면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p.451

일부 매장 팀은 무관심을 넘어 잔인한 수준에 도달했다. 우크라이나 여러 지역의 생존자들은 심하게 아픈 사람들이 생매장당했다고 반복해서 증언했다. "반쯤 살아 있는 사람을 묻기도 했습니다. '시체'들은 이렇게 외쳤어요. '선량하신 여러분, 절 내버려두세요. 전 죽지 않았습니다.' 대답은 이랬어요. '지옥에나 떨어져! 내일 또 오란 말이야?'" 또 다른 팀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도 데리고 갔는데 어차피 내일이면 다른 거리에 쓰러져 있을테니 지금 데리고 가서 '시체' 하나 당 더 많은 보수를 받아 음식을 챙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총을 쏘지도 않았습니다. 총알을 아끼기 위해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구덩이에 밀어넣었죠." 심지어 가족들도 죽어가는 가족 구성원을 똑같은 방식으로 대했다. - p.499

1932년부터 쿠반에 숨어 있는 젤렌키 주, 보후슬림스키 현 출신의 50세 쿨라크 여성이 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옴. 그녀는 호로디센스카 역에서 코르순으로 가던 중 지나가던 열두 살 소년을 유인해 목을 그었음. 자익와 다른 신체 부위를 가방에 넣었음. 호리디세 마을에서 살던 시민 셰르스튜크가 하룻밤 재워줌. 그녀는 송아지 장기라고 속이고 노인에게 심장을 삶고 구워달라고 함. 노인의 온 가족이 그 심장을 먹었고 노인 자신도 먹었음. 밤이 되자 가방에 있는 고기 일부를 더 사용하려고 하던 노인이 잘게 잘린 신체 일부를 발견함. 범인들은 체포됨. - p.504

소비에트의 공식적인 세계에서 우크라이나 기근은 더 광범위한 소련 기근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일이었다. 신문에 나오지 않았고 대중 연설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국가 지도자와 지역 지도자 모두 기근을 언급하기는 커녕 앞으로도 언급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1921년에는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원조를 요청했다면 1933년의 대응은 소련 내외부 모두에서 심각한 식량 부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다. 목표는 기근을 치우는 것, 기근을 아예 일어나지 않은 일로 만드는 것이었다. - p.578

스탈린은 자신이 사실은 아주 무능한 인간이며 직접 관여했을 때 일이 잘되기보다 주로 망치는 쪽임을 인정하기를 끝까지 거부했다. 더 중요한 점은 그에게 감히 도전할 용기가 없었던 소련 인민들은 물론이고, 스탈린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서방 세계 또한 침묵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지배는 '지옥의 식민지'라면서 악명 높았으며 국제 사회의 엄청난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미국 특파원이었던 시어도어 화이트는 중국 허난성에서 발생한 대기근을 폭로하여 장제스 정권을 궁지에 내몰기도 했지만 무능한 지도자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초래한 천재지변이었다. 정작 서방 기자들은 소련에서 평화로운 시절에 벌어진 대기근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 했다. 오히려 불이익을 감수하고 용기 있게 폭로한 소수의 동료들을 비난하는데 앞장섰다. 서방 좌파 지식인들의 선별적인 분노와 이중 잣대가 어제 오늘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서방 정부 역시 정치논리에 따라 소련의 치부를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다는 이유로 방관했다. 이들은 엄연히 스탈린 체제의 공범자들이었다.

작가인 버나드 쇼는 1931년 하원의원 낸시 애스터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자신의 75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현외에 참석했다. 연회는 그의 기호를 고려해 채식 요리로 전비했다. 쇼는 매우 들뜬 기분으로 소련 관료와 저명한 외국인 청중 앞에서 연설했다. 그는 주최측에 감사를 표하면서 자신을 반소련 유언비어 유포자의 적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여행 중에 먹으려고 음식 통주림을 주었다고 청중에게 말했다. "친구들은 러시아가 굶주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소련 국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폴란드에서 모든 음식을 창밖으로 던져버렸죠." 한 기자는 청중이 숨을 맺을 듯 조용해졌다고 회상했다. "영국산 소고기 통조림 하나면 모임에 참석한 노동자와 지식인 가족은 기억에 남을 휴일을 즐겼을 것이다." 적어도 일부 소련 지식인들은 이 거만한 외부인에게서 냉소적인 피로감을 느꼈다. - p.597

월터 듀린티의 씁쓸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게임을 특히 잘 수행한 사람드에게는 추가적인 보상이 제공되었다. 듀런티는 1922년부터 1936년까지 모스크바에서 뉴욕 타임스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이 역할 덕분에 한동안 상당한 부와 명성을 얻었다. 그는 소련 정권에 매우 유용한 존재로 여겨졌고 모스크바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를 받았다. 그는 큰 아파트에서 살았고 장도차와 애인이 있었으며 어떤 특파원보다도 접근 권한이 높았고 모두가 탐내는 스탈린과의 인터뷰를 두번이나 할 수 있었다. 그가 소련에 아첨하는 보도를 한 주 동기는 그러한 보도를 통해 누릴 관심이었을 것이다. - p.601

1933년 말 새로운 루스벨트 행정부는 소련을 둘러싼 나쁜 소식을 무시해야 할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았다. 대통령 참모진은 독일이 발전하고 있고 일본을 봉쇄해야 할 필요도 있기에 이제는 미국이 모스크바와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루스벨트는 중앙 계획 경제와 자신이 생각했던 소련의 엄청난 경제적 성공에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상업적으로도 유익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 p.617

제정 러시아 시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농노였다면 스탈린 시절에는 아예 생존 그 자체를 위협받아야 했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일제 36년 동안 우리의 경험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무리 일제의 지배가 억압적이었다고 해도 적어도 수백만명이 굶어죽는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레닌의 말만 믿고 독립을 쉽사리 포기한 댓가를 뼈저리게 치른 셈이었다. 지금에 와서 제아무리 푸틴이 동포 운운하면서 서방 대신 "러시아의 품으로 돌아오라"라고 회유한들, 우크라이나가 베알이 없지 않고서야 순순히 굴복할 리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물며 푸틴은 과거사를 인정하기는 커녕 시계바늘을 그 시절로 되돌릴 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홀로도모르는 단순히 스탈린 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 괴물을 만들어낸 공산주의 체제의 산물이었다. 설령 스탈린이 없었어도 똑같은 일은 벌어졌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을 외치던 19세기의 독일은 산업혁명 속에서 돈에 눈이 먼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피를 무한 흡입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썩어빠진 세상을 때려 부수고 싶은 마음이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알았지만 정작 자신의 모순은 깨닫지 못했다는 점이 한계였다. 말로는 민주와 평등을 외치면서도 그 방법은 대화와 설득이 아니라 공포와 폭력이었다. 만약 그가 한 세기 뒤에 자신의 추종자들에 의해 벌어질 참사에 대해서 알았더라면 뭐라고 했을까. 나는 옳은데 무식한 놈들이 내 뜻을 함부로 왜곡했기 때문이라고 했을까. 아니면 이 저주받을 사상을 쓴 내 손목아지를 자르겠다고 했을까. 실로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