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언니 부자연습 - 가난한 공주 부자되기 프로젝트
유수진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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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집사람이 문득 이렇게 말했다.
"케이블 방송에서 어쩐지 어른을 봤는데 재태크에 대한 것이 나오더라. 그런데 내가 잘 몰라서 당신이 나중에 함 봐라."
"글쎄, 무슨 내용인데?"
"유수진이라는 여자가 강의를 하는데 우리나라나 선진국은 이미 경제 성장률도 낮고 금리도 낮아서 더 이상 돈 벌기 어렵다, 대신 인도나 베트남같은 개발 도상국에 투자를 해야 한다네."
"펀드? 베트남 펀드 요즘 별로인데"
"아니 펀드 말고. 말로는 설명 못하겠고 그냥 당신이 직접 봐."
집사람의 말에 가우뚱 하면서도 그거 찾아서 볼 짬은 없다보니 그냥 한귀로 넘겼다. 그런데 때마침 카페에서의 서평 이벤트. "당신이 말한 게 이거 아니야?" "맞아"

경제 서적은 몰라도 재태크 책은 거의 보지 않는다. 철없던 젊은 시절에야 돈을 벌어보겠답시고 부지런히 주식이니 경매이니 탐독하던 때도 있었지만, 어차피 본인들 돈 번 얘기이고 나름의 비법이라는 것도 우리같은 내공없는 일반인이 책 한권 보고 덜렁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려 <어쩐지 어른>에서도 나왔다고 하고 집사람의 얘기로는 귀담아 들어볼 부분도 있을 듯 하여 바로 신청.

어제 드디어 기다리던 책이 왔다. 퇴근 후 컴퓨터 앞에 앉아서 과연 어떤 내용인가 페이지를 한장씩 넘겨보았다. 그러기를 한시간반. 앞부분은 "부자가 되면 좋은 이유" "그런데 왜 당신은 부자가 되지 못하는가" 다이어트에 실패한 20대 동생 얘기도 나오고 50이 다되도록 결혼 못한 지인 언니 얘기도 나온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하는 말. "그래서 우리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

어이 여보시오, 작가 양반, 이거 재태크 책이요? 에세이요? 이 얘기하자고 무려 책의 절반을 쓴거요?

그 다음에는 GDP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나온다. 갑자기 경제 기초 상식에 대한 강의가 시작되었다.  미국 금리가 어쩌고 트럼프가 어쩌고... 이 정도는 그렇다 치자. 재태크 강의가 직업인 언니인데 그동안 상담하면서 투자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상식조차 결여된 동생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겠는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에도 분명히 있을테니 글 모르는 유아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기분으로 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게 전부다. 제3장 마지막에는 "부자 미션"이라면서 GDP 증가율과 경제 지표, 전문가들의 전망, 자본주의의 역사, 화폐의 역사, 근대사를 공부하라고 한다. 그리고 공부한 것을 실전에 대입하면서 노하우를 익혀나가라고 한다. 이걸로 뭐하라고? 뭐하라는거지? 무슨 실전? 화폐의 역사를 공부한 다음 어떤 실전에 대입하여 무슨 노하우를 익히라는건가?

아니야. 여기서 끝은 아닐꺼야. 이미 책의 80% 이상을 읽었지만 아직 나에게는 마지막 제4장이 남았다. 마지막 기대를 걸고 읽었다. 마침 앞서 얘기했던 그 베트남 투자 얘기도 나왔다. 주식에 투자하여 받은 배당금으로 함께 재태크 모임하는 여인들끼리 베트남을 다녀온 모양이다. 자신이 배당금으로 얼마의 수익금을 받았는지 반페이지만큼의 크기로 확대하여 강조한다. 2천만원 투자했는데 시세 차익 200만원에 수익금이 무려 68만원이란다!

"해외여행에서는 참 배울 것이 많다. 단 배당금 받아서 가자. 그리고 다녀와서는 그 나라에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가지로 모색해 보자"

참으로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베트남 가서 쇼핑만 하지 말고 그 나라에 투자할 방법을 찾으라는데, 재태크 책이라면 보통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투자했고 장점과 단점, 이것만은 꼭 알아야 할 유의 사항 등 구체적인 경험담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우리와는 금융 시스템이 전혀 다르다. 초보자가 이 언니 말만 듣고 덜렁덜렁 갔다가는 은행 가서 통장 하나도 못 만든다. 그 전에 돈푼없는 가난뱅이 동생들에게는 언니처럼 베트남 갈 여행경비 만드는 것부터 첫번째 난제일듯. 배당금 주는 주식을 살 돈부터 마련해야 하나.

설령 우찌우찌 베트남까지 가서 통장 만들어서 쌈짓돈 넣었다고 치자. 외국인에게 금융이 개방되어 있지 않아서 넣는 건 쉬워도 빼는 건 어려운 나라이다. 오는 건 니 마음이라도 나가는 건 니 마음대로가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환차손, 수수료 외에도 베트남 경제의 안정성, 정치적 안정도 등 고려해야 할 것이 아주 많다. 그냥 막연하게 개발 도상국이니 앞으로 고도 성장하겠지 묻지마 투자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다. 남자랑 데이트해도 분양 홍보관에서 하라느니, 당신 수중에 10억만 있으면 대출 10억 더 받아서 건물 사서 건물주가 될 수 있다느니, 믿을만한 자산관리사를 찾으라느니, 그 관리사도 100% 믿지 못하니 결국 너 스스로 공부하라느니. 여보시오, 이게 정말로 전부요? 이게 연봉 6억 언니의 조언이란 말이요!

또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책의 편집 구성인데, 쓸데없는 이미지들이 여기저기 페이지를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를 넣는 이유는 내용과 관련하여 텍스트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울 때 시각적으로 돕기 위함인데, 웹사이트를 단순 캡쳐한 사진을 도대체 뭐에 쓰라는 것인가. 게다가 이 책에는 이런 불필요한 이미지가 분량의 상당 부분을 잡아먹고 있다. 교양 서적으로도 그다지 많다고 할 수 없는 고작 250페이지에 불과한데, 설마하니 <어쩐지 어른>에도 출연한 연봉 6억의 달인이 그 분량을 못채워서 이런 정크 이미지로 땜빵질을 했단 말인가. 심지어 어떤 페이지에서는 "재태크"를 설명하면서 "재태크란 재무와 태크놀리지를 합한 글자로...."라는 말로 무려 종이 반장을 차지한다. 이게 무려 반 페이지에 걸쳐서 설명할 만한 내용인가. 세종 서적이라는 출판사가 신생 출판사도 아니고 그동안 꽤 많은 교양 서적을 내었던데 편집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구성했는지 모르겠다. 

집사람에게 책이 이러이러해서 영 실망이다, 라고 했더니 "나도 강의 들어보니까 뭔 말인지 도통 이해가 안되더라고. 그래서 당신보고 좀 보라고 한건데. 당신이라면 나보다는 나을테니까."

여보시오, 마눌님 이제와서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었소?!

여러모로 자괴감이 들게 하는 책이다. 서평 한두번 써본 것도 아니고 내 입맛에 맞지 않다고 해서 남에게도 그렇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서평을 쓸 때에는 "이 책은 이런 점이 좋지만 이런 오류가 있다. 따라서 어떤 독자가 이 책에 가장 걸맞을 것"라고 나름대로 솔직하면서도 신중하게 적는 편인데, 이런 경우에는 도대체 뭐라고 써야할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돈 쓸 생각하지 말고 돈 모을 생각을 하라"라는 뻔한 얘기의 나열이다. 팁이나 노하우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경제 서적도 아니고 언니가 그동안 얼마나 험난한 삶을 거치면서 이 자리까지 왔는지 고백하는 에세이도 아니다. 강의는 잘하는데 글에는 서툴러서인가. 모르겠다. 각자 알아서 판단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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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쿠스 2017-07-1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자되는 벙법은 재테크책 써서잘모르는독자에게 파는 겁니다

구데리안 2017-07-19 10:51   좋아요 0 | URL
그런데 다 아는 얘기만 적어놓았으니 문제라는 것이죠... 재태크란 재+태크의 합성어이다, 이런 말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말의 힘'으로 키우는 대화 육아 - 부모의 말이 바뀌면 아이의 미래가 달라진다
오수향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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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MBC에서 한글날 특집으로 말의 힘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먼저 두개의 통에 흰 쌀밥을 각각 넣은 다음, 한쪽에는 "고맙습니다" "아이 예뻐" 같은 긍정적인 말을 들려 주었고 다른 한쪽에는 "미워" "나빠" "짜증나" 같은 부정적인 말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한달이 지났을 때의 결과는 놀라웠다. "고맙습니다"를 들려준 쪽의 쌀밥은 구수한 누룩 냄새가 나는 하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반면, "짜증나"를 들려준 쪽의 쌀밥은 검은 곰팡이가 핀 채 완전히 썩어 있었다.

직접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도 놀라워 했다. 밥에 귀가 달린 것도 아닌데 고작 말 한마디에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이 프로그램은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가 평소 무의식 중에 내밷는 말이 단순한 전달의 역할만이 아니라 감정 그 자체가 실려 있다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정치인들이 본다면 함부로 막말을 하지 않을 것같다.

무생물에 불과한 밥도 이럴진데 하물며 귀가 있고 감정이 있는 사람은 어떠할까. 유머러스한 사람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만들 뿐더러, 주변 사람들까지도 행복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어쩌면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보다 아름답게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육아에서도 말은 중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외하고 육아의 90%는 "말"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아이와 대화하면서 칭찬하고 "사랑해"라고 말해주고 때로는 잔소리를 하거나 혼내기도 한다. 솔직히 말을 빼고 나면 육아에서 뭐가 남을까. 위의 쌀밥 실험처럼 부모가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하는가에 따라 시간이 지난 뒤, 아이의 모습은 확연히 다를 것이다. 고마워라는 말이 구수한 누룩내 나는 밥으로, 미워라는 말이 시커멓게 썩은 밥으로 만들 듯, 말은 아이를 긍정적으로도, 또는 부정적으로도 만들고 자신감과 행동, 사고력에 큰  영향을 준다. 아이의 건강도 예외가 아니다. 어릴 때 병약했던 아이가 부모의 끊임없는 격려 덕분에 어른이 되어서 누구보다도 건강한 사람이 되는 예도 얼마든지 있다.

오수향 교수가 쓴 신작 도서 <말의 힘으로 키우는 대화 육아>는 아이와의 긍정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알려주는 육아서이다. 참고로, 오수향 교수는 EBS <육아학교 PIN>에서 '초보 엄마를 위한 말하기' 강의를 맡았고 각종 온오프라인 매체와 SNS에서 강사로 활동 중인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2015년에는 대한민국 신지식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는 세계 제일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나라이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 사교육비에는 아낌없이 쓴다. 우리 아이가 남에게 조금이라도 뒤쳐질까 노심초사한다. 하지만 부모로서의 역할이 단순히 돈을 버는 기계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언어 폭력으로 아이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다. 화가 난다는 이유로 막 혼낸 다음 후회한다. 대다수 부모들의 모습이다. 왜 그랬냐고 하면 사는데 지쳐서, 내 몸이 피곤해서, 육아가 힘들어서, 라고 변명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우리가 아이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서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권위주의, 가부장 문화 속에서 우리도 그렇게 보고 자랐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 배울 기회도, 깨우칠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직장 생활이건 사회 생활이건 가장 어려운 것은 대인 관계이다. 부부 관계나 부모 자식도 마찬가지이다.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하다. 아이의 인생을 바꾸는 것은 사교육이 아니라 부모의 말 한마디이다. 이 책에서는 좋은 일화가 나온다. 어릴 때 말 더듬는 버릇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아이가 있었다. 주눅 든 그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네 두뇌 회전이 워낙 빨라서 혀가 따라가지 못하는 거야.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그만큼 네가 똑똑하다는 거 아니겠어? 너는 머리가 비상하니까 앞으로 큰 일을 할거야"

어머니는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 칭찬을 해 주었다. 이런 칭찬을 들으며 자란 그가 바로 세계적인 기업 제너럴 일렉트릭의 회장이자 세계적인 명강사로 이름을 떨치는 잭 웰치이다.

여기서 입장을 바꾸어 만약 나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너는 왜 그렇게 모자르냐?" "커서 뭐가 될래?" "걱정이다 걱정" 이렇게 말하면서 아이를 나무래고 질책하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을까. 한국인의 대화법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말을 훨씬 많이 쓴다고 한다. 흔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만 막상 평소에 남을 칭찬하는 일도 없고 칭찬을 듣는 일도 없는 것이 우리 문화이다. 왜 그럴까. 우리가 그만큼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특별히 다른 나라보다 더 힘들거나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

이 책은 저자가 각종 강연과 양육 상담을 통하여 부모들이 일상 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실수하는 부분, 반드시 지켜야 할 아이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다룬다. 세상에 태어난 아기는 부모를 통하여 언어를 배운다. 예쁜 말, 고운 말을 들을수록 아이 또한 예쁘고 곱게 자란다. 요즘 아이들 중에는 초등학생, 심지어 유치원생에 불과한데도 벌써부터 온갖 상스러운 욕설을 달고 산다. 혹자는 TV와 인터넷, 스마트폰, 또래 친구들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부모에게서 배운 것이다. 만약 아이가 부모 앞에서 욕설을 한다면 우선 나 자신부터 욕설을 달고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사고력과 어휘력을 높이기 위한 "수다쟁이가 되어라", 자존감과 공감력을 키우기, 자존감이 높은 아이와 낮은 아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아이의 말을 경청하는 요령, 상상력은 "왜?"라는 질문에서 나온다, 아이의 경제관념과 독립심 키우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밥상머리 교육 등.

어찌보면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얘기의 나열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여 육아책이란 누가 썼건간에 알맹이는 어차피 그기서 그기이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중요하면서도 막상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얘기도 된다. 머리로는 알지만 어렵다고, 다 어떻게 지키냐고 그냥 넘겨버리는 것이다. 대화법이라는 것도 단순히 알고만 있다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훈련과 연습이 필요한 법이다. 우리 사회는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면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상스럽게 여긴다. 남들 앞에서 자기 표현이나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 한다.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묻는 것은 체면이 깎인다고 여기고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묻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긴다. 자신의 주장을 남에게 말하는데 익숙해도 남의 의견을 듣는 것에는 서툴다. 우리 정치인들이 맨날 싸움박질만 하는 것도 경청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헬 조선"이 된 것도 과거 부모세대가 무조건 공부만 잘 하면 된다면서 대화 육아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부모가 아이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소홀히 하면 아이의 언어 발달은 당연히 뒤떨어질 수 밖에 없다. 더욱이 언어 발달이 늦어지면 사고력도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집중력, 학습 능력도 떨어질 수 밖에 없고 타인과의 공감 능력 역시 부족하여 사회성과 또래 친구와의 관계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를 육아 도우미의 손에만 맡기거나 TV, 컴퓨터 게임, 스마트폰에 방치했다가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다고 한다. 대화 육아가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부모와 대화를 많이 한 아이가 말하는 데 적극적이다.
칭찬과 격려를 많이 받은 아이가 일찍 말을 한다.
건강한 아이가 말을 더 빨리 배운다.
지능이 높은 아이가 말을 더 빨리 한다.
권위적인 교육은 말을 배우는 데 지장을 초래한다.
가족이 많을수록 아이가 말을 잘 한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보다 어휘 수가 더 많다.
경제적 여건이 좋은 아이가 말을 더 잘한다.

아이의 미래는 사교육이 아니라 부모가 만든다. 알면서도 그동안 아이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소홀하게 하지는 않았던가. 무의식 중에 내밷은 나의 말 한마디에 나도 모르는 사이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은 아닐까. 새삼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부모라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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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평전 - 현대 중국의 마지막 절대 권력자
알렉산더 V. 판초프.스티븐 L. 레빈 지음, 심규호 옮김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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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주석이 1956년에 죽었더라면 그의 업적은 불멸로 남았을 것이다. 만약 1966년에 죽었더라면 과오는 있지만 여전히 위대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1976년에 죽었다.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천윈(陳雲)

 

마오 시절 중국 국무원 부총리이자 중국 공산당 8대 원로의 한 사람인 천윈은 공산당 초창기 멤버이다. 1930년대에는 대장정에 참여하였고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하여 그가 소련 유학파 지도부를 몰아내고 주도권을 차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평생 마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했던 천윈의 평가만큼 신랄한 것도 없으리라. 

적어도 마오쩌둥이 정권을 차지한지 첫 10년 동안의 성과는 경이로왔다. 국공내전에서 우세한 장제스에게 완승을 거두었다. 1년뒤에는 한반도에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강렬한 어퍼컷을 먹임으로서 중국이 예전의 종이 호랑이가 아님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비록 장비와 화력은 여전히 빈약했지만 맥아더의 미군을 상대로 중국 공산군이 보여준 군사적 역량은 겨우 몇년 전만 해도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북양 군벌과 장제스의 군대를 기억하고 있었던 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더 이상 중국인들은 전쟁에 서툰 민족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중국의 부흥에 착수한 마오쩌둥은 소련식의 경제 건설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다. 마오 정권의 지도자들은 국가 경영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첫번째 5개년 계획(1953년~1958년) 동안 연 10% 이상의 경이적인 경제 성장률을 달성했으며 장제스가 1936년에 달성했던 중국 경제의 정점을 단숨에 갱신하였다. 게다가 이 실적은 국제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중국이 거의 자력갱생만으로 획득했다는 점이었다. 중국은 여전히 낙후되고 가난한 나라였지만 미국, 소련조차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천윈의 말대로 그 이후의 10년은 재앙이었다. 처음 10년의 성공에 고무된 마오쩌둥은 지나친 욕심을 부렸다. 2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고 10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면서 시작한 대약진운동은 겨우 2년만에 중국 경제를 거의 결딴내어놓았다. 당장 1959년부터 중국 전역에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악의 기아가 닥쳤다. 마오가 죽은 뒤 덩샤오핑 시절 정부에 의해 조사된 공식 통계만도 약 2천만명이 아사했다고 집계되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지나치게 낮게 잡은 것이며 일부 학자들은 3천5백만명에서 4천5백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당시 중국 인구가 약 6억명 정도였다는 점에서 인구의 5~8%가 굶어죽은 셈이다. 왠만한 중위권 국가의 인구와 맞먹는 숫자이지만, 이조차도 마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숫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는 공공연히 "핵전쟁으로 중국인이 수억에서 수천만명으로 줄어든다고 해도 중국 민족은 살아남을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 더 많아질 것이다."라고 떠들었다. 그런 마오쩌둥에게 대약진운동은 한낱 실험에 불과했고, 실험이 '조금' 실패하여 4천만명이 죽었다고 해서 뭐가 대단할 것인가.

대약진운동이 마오의 "실수"라면 다음 10년은 마오의 "광기"였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마오는 정치 일선에서 잠시 물러났다. 그 뒤를 이은 류사오치, 덩샤오핑은 마오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지 결코 중국의 흐루시초프가 될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마오의 편집광증인 의심병은 이들에 대하여 증오심을 품게 하였다. 그는 대약진운동의 기억이 어느 정도 희석될 무렵, 적절한 기회를 포착한 후 어린 10대 학생들을 부추겨 중국을 소위 "문화대혁명"의 광기로 몰아갔다. 마오의 한마디에 중국을 건설한 혁명 원로들은 하루 아침에 몰락하여 손자뻘에 불과한 아이들에게 온갖 수모와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왜 이들은 저항하지 못했는가. 중국의 이인자였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미국을 상대로 용맹함을 보여주었던 펑더화이, "국민의 총리"라 불리었던 저우언라이조차 감히 마오에게 맞서지 못하였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도 마오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면서 관용을 빌었다. 이는 소련에서 벌어진 스탈린 격하 운동과 대조적이다. 스탈린은 생전에는 절대 권력자이자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막상 그가 죽자 말자 권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그에 대한 비판에 앞장 선 사람들은 소련 국민이 아니라 흐루시초프를 비롯하여 그동안 스탈린 옆에 서서 숨죽이고 있었던 공산당 간부들이었다.

하지만 스탈린과 달리, 마오는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중국 사회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다. 마오가 부린 광기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던 덩샤오핑은 흐루시초프가 되는 대신, "공7과3(공이 7이고 실수가 3이다)"라는 말로 적당히 무마하였다. 마오는 중국 사회에 엄청난 해악을 남겼음에도 그의 과오는 "죄"가 아니라 한낱 "실수"가 된 것이다. 오늘날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을 모르는 중국인은 없지만 모두 "지나간 과거" 쯤으로 치부할 뿐이다. 오히려 마오의 고향이나 그가 머물렀던 장소, 옌안의 토굴은 중국인들에게 신성한 장소로서 매년 수십만명이 방문하는 관광지가 되어 있다.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물론 중국은 북한이 아니며, 우리 사회가 막연하게 생각하듯 중국에서 마오를 비판한다고 무조건 체포되거나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마오에 대한 욕설을 함부로 하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이다. 더욱이 고위 관료나 당 간부, 언론인, 대학 교수들이 마오를 직접적으로 비판할 경우 엄청난 국민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리에서 쫓겨날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는 북한이나 시리아 등 여느 독재 국가들처럼 단순히 국가에 의한 우상 숭배가 아니라 중국인들 스스로 마오를 예수나 석가와 동등한 신성 불가침의 존재이자 정신적인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낙후된 중국 사회의 봉건성을 보여준다. 중국은 외형적으로는 현대화되었지만 의식은 전근대적인 봉건 시대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오의 권위는 스탈린조차 능가했다. 스탈린도 정치적 위기가 여러번 있었으며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무시함으로서 최악의 패배를 당했을 때 그는 다른 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목숨을 잃을까 공포에 질리기도 했다. 하물며 문혁은 스탈린이라면 도저히 흉내낼 수조차 없는 일이다. 반면, 마오는 단순히 독재자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의 황제였다. 황제가 곧 중국이었듯, 그가 곧 공산당이고 중국 그 자체이기도 했다. 공산당이 있고 마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오가 있기에 공산당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마오가 없으면 공산당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를 거역할 수 있겠는가.

중국 역사에서 황제가 폭정을 휘두르는 일은 늘상 반복되어 온 모습이다. 그리고 황제가 죽고 다음 황제가 들어서면 폭정은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어도 백성들 앞에서 선대 황제가 저지른 행위를 비판하거나 진솔하게 반성하는 법은 없다. 과거의 일은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황제는 항상 신성 불가침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수는 인정할 수 있어도 죄를 물을 수는 없다. 이것이 중국인들의 뿌리깊은 가치관이다. 덩샤오핑이 마오의 과오를 덮어버린 것도,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이 마오의 과오를 묻지 않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이런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록 덩샤오핑이 중국의 개혁개방을 추진했지만 어디까지나 경제에 국한되었을 뿐, 정치와 사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 사회를 이해하려면 중국인들의 사고 방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중국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우리는 중국을 잘 모른다. 중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은 많아도 중국을 공부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시중에 중국에 관련된 책은 하늘의 별만큼 쏟아지지만 대부분 중국에서 어떻게 돈벌이를 할까, 중국 관광 문화를 소개하는 등의 단편적인 교양서적이나 시진핑, 리커창 등 몇몇 주요 지도자들을 소개하는 것에만 치중하고 있다. 정작 중국 현대사를 다룬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 마오쩌둥에 대한 제대로 된 평전조차 여지껏 없었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중국에 무관심한지 보여준다. 그렇다보니 중국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여전히 "우물안 개구리"에 머무른다.

얼마 전 민음사에서 <마오쩌둥 평전>이 출간되었다. 원제는 "MAO: The Real Story"로 저자는 러시아 출신의 학자인 알렉산더 판초프 교수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그동안 국내에서 마오쩌둥을 다룬 책은 많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마오쩌둥 평전"이라고 할만한 책이 있는가 싶다.

대표적으로 해리슨 E. 솔즈베리의 <새로운 황제들>나 중국의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인 왕단 교수가 쓴 <중국 현대사>, 대약진운동과 문혁기에 성장기를 보내면서 마오의 폭정을 몸소 체험해야 했던 전리군 교수의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프랑크 디쾨터 교수의 <마오쩌둥 삼부작> 등은 1949년 이후 마오쩌둥이 통치 과정에서 저지른 온갖 실정을 적나라하게 까발리지만 "그가 이러이러한 행동을 했다"라는 결과에만 주목할 뿐, 그가 왜 그렇게 했는가에 대한 것은 없다. 

마오쩌둥은 왜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졸속적인 대약진운동을 강행했는가. "참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그의 말 한마디에 수천만명이 참새 잡기에 매달렸는데, 마오쩌둥은 참새가 사실은 이로운 새라는 최소한의 상식조차 없었던 것인가. 문혁의 광기는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 마오쩌둥이 가지고 있던 모순과 부조리함, 극단적일 만큼의 편집광적인 사고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여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마오의 성장과정, 그 시절의 중국 사회가 처해 있는 현실,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으며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근본적으로 짚어보지 않으면 안된다.

오랫동안 서구 사회에서 마오쩌둥의 이미지는 중국의 민족주의자이자 진정한 혁명가였다. 이런 시각이 형성된 것에는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 에드가 스노의 책임이 크다. 뉴욕 선 잡지의 극동 특파원이자 당시 30대의 젊은 저널리스트였던 그는 1936년 여름 중국 공산당의 심장부였던 옌안을 방문하였다. 외부 세계와 완전히 고립된 이 가난한 촌락에 서방인이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정부군의 폭격을 피하여 토굴에 살던 공산당 지도부는 그를 크게 환영하고 선전 대상으로 삼았다.

에드가 스노는 결코 친소 공산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자유분방하면서 권위적인 정부와 자본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던 여느 젊은 미국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는 공산당 통치 구역을 여행하는 동안 "장제스 정권의 통치 구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봉건적인 모습을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공산당 간부들은 열의에 가득차 있으며 농민을 착취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적인 생활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이 먹을 것은 자기 손으로 만든다"라면서 극찬하였다. 에드가 스노 외에도 시오도어 화이트를 비롯하여 비슷한 또래의 미국인 저널리스트들 역시 중국에 체류하면서 장제스 정권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그 반대 급부로서 중국 공산당에 대한 환상을 만드는데 앞장섰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사에서 "직접 현장을 돌아보면서 과연 공산당이 선전하는 것이 사실과 부합하는지, 조금이라도 거짓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고 썼지만 과연 그러했는가. 같은 시기 옌안에 체류하던 소련인 고문들은 중국 공산당의 폭력적인 행태를 목격하고 모스크바에 보고했음에도 어째서 미국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가. 또한 고작 며칠에서 몇주 동안 체류하면서 어떻게 자신들이 모든 것을 낳낳이 안다고 굳게 단언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심지어 스노는 중국에서 기근이 절정이었던 1960년에 중국을 방문하고 직접 현장을 돌아보았음에도 귀국한 후 "나는 중국에서 기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목격하지 못했다. 이것은 서방의 날조에 불과하다고 믿는다"라고 말하였다. 결국 이들은 상대가 보여주는 것만 보면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었을 뿐이다. 그게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마오쩌둥 평전>은 마오쩌둥의 집안 환경과 성장기, 혁명에 가담하게 된 배경, 그리고 권력 투쟁을 통하여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고 나아가 중국 지도자가 되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약 80여년의 시간을 되돌아 본다. 이를 통하여 저자인 판초프 교수는 마오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에서 그가 왜 모순적이고 극단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은 어찌 그리 똑같은가? 그들은 모두 사회 평등을 위해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다른 이들과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 대중 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 p.59

"그렇다면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 친구도 죽여야 한단 말인가? 샤오위가 놀라서 소리치자 마오쩌둥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샤오위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야망 속에서 (권력을 위하여 과거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동료들을 모두 죽였던) 유방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 p.71

"중국의 다른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 역시 자신의 역량이나 심지어 존재까지도 전적으로 군대의 역량에 의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총구에서 나오는 거 ㅅ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어찌 자신의 군대를 일본군의 공격 앞에 내세울 수 있었겠는가?" - p.450 

"당연히 합작화를 가속시키기 위하여 동원된 간부들은 폭력을 사용하거나 잔혹한 명령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당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전횡을 저질렀다. 합작사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농민들은 몇시간, 심지어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에 서있어야 했다."   -p.592

"'핵전쟁이 일어나면 절반은 죽고 절반은 살 것이며 제국주의는 영원히 사라지고 전 세계가 사회주의가 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구 27억명은 회복될 것이며 어쩌면 그보다 더 많아질 것이다.'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가 마오쩌둥에게 물었다. '마오쩌둥 동지! 핵전쟁에서 살아남을 이탈리아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마오쩌둥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무도 없을 것이요. 이탈리아인들이 인류 발전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이오?'"   - p.631

"마오쩌둥은 당내 지도부에서 적대적인 쌍방의 평형을 유지하면서 권력 균형을 통제하는 능력만큼은 잃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조정 능력이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파벌의 지도자들이 오로지 마오쩌둥을 통해서 진리를 찾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 p.807

이 책이 기존에 나온 마오쩌둥 관련 서적과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것은 러시아의 시각에서 바라보았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역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물을 바라봄에서 어느 한가지가 아닌 다양한 시각, 다양한 가치관에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중국인이고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몸소 체험한 당사자라고 할지라도 100% 옳은 것은 아니다. 또한 미국인은 미국인의 가치관에서 중국을 바라본다. 사료가 반드시 진리도 아니고 모든 것을 얘기해 주는 것도 아니다. 역사 연구란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거리는 것과 같다. 한 가지 잣대로만 접근한다면 고정관념에 빠지게 되며 실제와는 동떨어지기 쉽다.

저자는 그동안 중국과 서방에서 나온 출간물 이외에도 러시아에서 기밀이 해제된 방대한 기록들을 찾아서 마오와 스탈린의 관계를 새롭게 파헤친다. 과거 마오에 대한 시각은 그가 스탈린과 거의 대등했으며 아무런 도움도 없이 전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중국 혁명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을 보면 오히려 마오는 스탈린에게 의존했으며 그의 지시에 복종하였다. 스탈린은 마오에게 항상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며 마오 역시 종종 스탈린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지만, 대체적으로 마오는 스탈린을 상전처럼 떠받들면서 마치 부하처럼 행동하였다. 이 점은 소련의 간섭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유고의 지도자 티토와 다른 점이다.
 
저자 판초프의 눈에 비친 마오쩌둥은 단순히 위대한 혁명가도, 폭군도 아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어느 한가지로 평가할 수 없으며 그야말로 다양한 면을 가진 모순적인 인간이다. 그는 농담을 즐겨 했으며 누구나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에드가 스노가 마오의 매력에 빠져든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동시에 마치 종교 지도자와 같은 경건함도 있었다. 1971년에 마오를 만난 키신저는 마오의 뒤에 아우라가 보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매우 권위적이고 딱딱하고 엄격하여 거의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했던 장제스에게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겉모습과 달리 속으로는 매우 격정적이었으며 일단 마음 속으로 누군가에 대한 증오심을 품으면 언제까지고 기억해 두었다. 또한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변덕스러웠기에 측근들조차도 마오의 기분을 종잡을 수 없었다. 한번 그의 눈 밖에 나거나 의심을 품게 한 사람들은 누구도 용서가 없었다. 펑더화이, 류사오치, 가오강, 천이, 린뱌오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또한 장제스에게는 없는 모습이다. 장제스가 마오보다 더 관대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궁지로 몰아서 비참하게 죽이는 일은 없었다. 그런 점이 어떤 의미에서는 장제스가 마오에게 패배한 이유이기도 하다. 원래 권력이란 비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여느 2류, 3류의 독재자들처럼 자신의 권좌에만 눈이 먼 독재자가 아니다. 그는 더 나은 중국 사회를 꿈꾸던 이상가이자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쉽, 행동력을 갖춘 지도자였다. 아편전쟁 이래 덩치만 클 뿐 외세의 먹이에 불과했던 나약한 중국을 다시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한 것은 마오쩌둥의 역량이다. 그는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 문제는 그 믿음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자신은 항상 옳다는 절대적인 믿음과 어떠한 오류와 무지함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독선이 자신은 물론이고 중국 인민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어떤 역사적 위인을 평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흔히 공과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말은 실상 과오가 큰 인물에 대하여 작은 공을 내세워 큰 과를 덮으려는 것에 불과하다. 애초에 공과라는 것이 무엇인가. 뭐가 공이고 뭐가 과인지 어떤 잣대로 나눈단 말인가. 더욱이 공이 있다고 해서 죄를 덮을 수 있는가. 마오쩌둥 역시 마찬가지이다. 덩샤오핑의 "공7과3"이라는 평가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발언일 뿐, 객관적인 근거나 설득력 있는 논리가 뒷받침된 것도 아니다.

마오의 과오는 분명하다. 그는 폭력과 기만으로 중국을 통치하였으며 의도가 어떠했건간에 마오가 죽었을 때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낙후되고 가난한 나라였다. 또한 마오는 중국이 서구에 비하여 뒤떨어지게 된 가장 큰 장애물이 중국 사회의 뿌리깊은 봉건 문화 때문이라면서 "우파 투쟁"을 반복했지만 그렇게 해서 얼마나 봉건 잔재를 없앴는가. 신분제 문화나 관료들의 권위주의, 극심한 빈부 격차, 허황된 미신은 마오쩌둥이 죄악이라고 규정했지만 아직까지도 중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는 마오가 봉건 잔재를 없앤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바로 봉건 잔재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의 황제였다. 그런데 어떻게 바꾼단 말인가. 이것이 마오식 개혁의 한계였다.

그렇다면 마오의 공은 무엇인가. 그는 공산당의 천하를 만들었다는 것 외에 아무런 공이 없는가. 그의 가장 큰 공은 중국인들에게 "중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에게 엄청난 의미가 있다. 원래 중국 역사에서 말하는 소위 "중화주의"란 왕조와 소수 지배계층의 사상일 뿐, 대다수 민중과는 상관없다. 솔직히 농민들 입장에서 지배자가 한족이건 이민족이건 뭐가 다른가. 그런데 20세기에 와서 처음으로 중국 민중에게 "중국인"이라는 의식을 심어준 것은 쑨원이었다. 쑨원의 뒤를 이은 장제스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국민 전쟁을 수행하였다. 중국 역사에서 반복된 주변 이민족의 침입은 왕조와 이민족의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들에게 봉건적인 개념에서의 이민족과의 항쟁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싸움으로 인식케 하였다.

그리고 마오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싸워 무승부를 이루어내면서 중국이 더 이상 외세에 무력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지금 중국이 세계 무대에서 당당하게 주장하는 대국굴기, 중국인들의 콧대 높은 중화사상은 다름아닌 마오가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중국인들이 마오를 "영웅"으로 평가하는 이유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중국은 많은 대가를 치루어야 했고, 주변국들에게는 중국식 제국주의로 비추어지지만 말이다.

1천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이조차도 마오라는 인간에 대하여 알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많은 중요한 부분이 수박 겉핡기식으로 넘어가는 느낌이다. 전반부는 주로 마오가 정권을 쟁취하는 과정에서의 권력 투쟁을 다루고, 후반부는 그의 삽질을 다룬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드물게 보는 마오 평전이기에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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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가족 - 최태민, 임선이, 그리고 박근혜
조용래 지음 / 모던아카이브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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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고기가 땅에 있으면 물만 보면 찾아가듯이 딱 그런 관계였다"
-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가 말하는 최태민과 박근혜

1973년 5월 13일자 대전일보에 〈영세계에서 알리는 말씀〉이라는 내용의 광고가 실렸다고 한다.

"영세계 주인이신 조물주께서 보내신 칙사님이 이 고장에 오시어 수천 년 간 이루지 못하던 불교에서의 깨침과 기독교에서의 성령강림, 천도교에서의 인내천 이 모두를 조물주께서 주신 조화로서 즉각 실천하신다 하오니 모두 참석하시와 칙사님의 조화를 직접 보시라 한다. 난치병으로 고통 받으시는 분은 극시 오시어 상담하시라."

얼핏 보기에도 사이비교의 냄새가 풀풀 나는 사람 낚는 광고이다. 국민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정부가 관여하던 서슬 퍼런 독재 정권 시절에도 이런 광고가 잘도 신문 일면에 나올 수 있었던 모양이다.

영세교 또는 영생교는 1973년 최태민이라는 사람이 불교, 천도교, 기독교 등을 적당히 섞어서 만든 잡탕 종교로, 2000년대 초반 신도들을 암매장한 사건으로 한창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조희성의 영생교와는 다르다. 그는 스스로를 "주물주의 칙사"이니 "단군"이니 자처하면서 신통력으로 난치병을 고치겠다는 둥, 대한민국이 곧 세계 주도국이 될 것이라는 둥의 헛소리로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한국판 라스푸틴" 최태민. 하지만 그가 라스푸틴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뒤에는 권력자의 어리석음과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법한일인가. 지금이라면 웃음거리가 될 일이다. 실제로 당시에도 그런 허황된 말에 넘어간 추종자들은 많아야 수십명에 불과했던 것같다. 사람 낚는 사기꾼이야 예나 지금이나 있는 일이고 그런 사기질이 얼마나 오래가겠냐만은 문제는 그 중의 한 사람이 박근혜였다는 사실이다. 한때 날던 새도 떨어뜨렸던 중앙정보부장이었으나 박정희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프랑스로 망명한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한 김형욱의 회고록에는 최태민이 1975년에 박근혜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것도 있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는 걸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 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 달라고 했다"

당시 박근혜는 23살. 제아무리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았고 정신이 없었던 시절이라고 해도 일면식도 없고 정체도 알 수 없는 사이비 교주의 허황된 소리에 넘어갈 수 있을까. 실로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박근혜는 최태민을 정말로 불러들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시작이었다.

보름 전 대한민국 헌장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현직 대통령이 자리에서 쫓겨난 것이다. 전직 대통령이 퇴임 후 이런저런 비리 문제가 불거지면서 검찰에 불러다닌 것은 항상 반복되어온 모습이라고 해도 현직 대통령이 임기 도중에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60년 전 이승만의 하야 이래 처음이다. 게다가 이것은 야당의 정치 공세 때문도 아니고 대다수 국민들이 대통령 불신임을 외친 결과이다. 그만큼 대통령의 신임이 땅에 떨어졌다는 얘기이다. 소위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조사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지만 이미 대통령 비서실장 김기춘, 조윤선 문광부 장관을 비롯하여 십수명에 달하는 굵직굵직한 정권 실세들이 굴비마냥 엮어서 구속되었다. 명색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과연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는가. 그리고 사건의 뒤에는 최순실이라는 여인이 있다.

모던 아카이브에서 주목할만한 신작 도서가 나왔다. 『또 하나의  가족 - 최태민, 임선이, 그리고 박근혜』 이 책의 저자는 놀랍게도 최태민의 의붓아들이었으며 최태민 왕국에 직접 가담한 바 있었던  故 조순제 씨이다. 조순제 씨는 최태민의 부인이었던 임선이가 전 남편 사이에 낳은 자식이다. 의붓 아버지인 최태민과는 썩 사이가 좋지는 못했으나 박근혜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한 최태민이 권력을 이용하여 대한구국선교단을 수립하자 조순제는 단체의 홍보실장을 하였다. 그 이후에도 박근혜가 소유한 영남재단 등에 관여하면서 박근혜의 전위 세력으로 앞장섰으나 최태민과 사이가 나빠지고 최순실을 비롯한 배다른 동생들이 등장하면서 밀려난 채 말년에는 사업 실패 등으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작년 가을 우리 사회에서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과 박근혜의 해괴한 관계에 대해서는 "그것이 알고 싶다" "썰전"을 비롯하여 여러 방송에서 다루어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준 바있다.

이 책에서는 조순제가 죽기 직전에 남긴 녹취록을 근거로 한국전쟁 당시 유부남이었던 최태민과 과부 임선이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으며, 최태민의 온갖 엽기적인 행적, 최태민과 박근혜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더욱이 명색이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가 지적 수준도 결코 높다 말할 수 없는 최태민에게 그토록 빠지게 된 이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의혹과 최순실을 비롯한 최씨 일가의 부정비리를 낱낱이 폭로한다. 심지어 이른바 박정희 시해 사건을 일으켰던 김재규는 재판 당시 자신이 박정희를 죽인 이유 중에는 최태민의 불법적인 행각를 눈감아 주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최태민은 단순히 한 여성을 농락한 일개 사기꾼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를 송두리채 흔들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 후로 박근혜와 최태민은 서로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교주가 되었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최태민과 만나는 박근혜는 욕망과 야망, 그리고 어떤 집착과 맹신같은 요소들이 뒤섞여 만드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 p.38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개인 성령이 뭔지 아무리 얘기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최태민이 한심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주창하고 떠드는 영세교에 대해서도 무슨 의미를 가진 종요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 p.59

"김경옥이 박근혜에게 링거 주사를 놓는 동안 곁에 있는 최태민이 박근혜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뒤로 돌아가서는 어깨를 주무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깊은 관계를 알고는 있었지만 눈앞에서 직접 자연스럽고 다정한 모습을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 p.74

"지금 네 할머니가 가진 돈은 너를 편히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죽게 할 수 있다. 할머니가 가진 돈에 대해서는 전혀 아쉽게 생각하지 말아라." - p.102

대목마다 실로 충격이다. 여색에 눈이 먼 최태민의 엽기 행각, 여기다 박근혜와 가까워지면서 권력까지 얻게 되었고 그는 이를 이용하여 별의별 추문을 뿌리고 다녔다. 돈이 된다 싶으면 달려들어서 거머리마냥 달라붙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뜯어내었다. 그렇게 축적한 재산이 수천억인지 수조인지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박근혜는 최태민과 나이 차이도 아버지와 딸 뻘이지만 더욱이 박정희의 영애이기도 하다. 그 때만 해도 박정희의 서슬이 퍼런 시절에 누가 감히 넘볼 존재인가. 박정희는 과연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전혀 몰랐는가. 충언을 해야 할 측근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로서는 가족일에 주제넘게 끼어들였다가 눈밖에 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봉건적인 독재 정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최태민이 죽은 뒤 그 역할은 최순실이 맡았고 최순실은 킹 메이커 역할을 맡아서 박근혜를 국회의원에서, 그리고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었다. 만약 박근혜에게 대통령으로서의 역량이 있었다면, 최순실이 좀 더 현명한 여자였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훨씬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는데 대한민국의 불행이 있다. 장차관의 인사권부터 재벌들과의 정경유착, 비자금의 형성, 그 과정에서의 불법적인 권력 남용과 협박 등. 대한민국 국가 기강은 완전히 땅에 떨어졌고 민주주의는 30년 이상 후퇴하였다. 이들은 우리 사회를 1970년대로 되돌려 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얻는 것도 어렵지만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민주주의조차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소수의 기득 세력들에 의해 금새 중우정치로 전락한다. 서구 선진국들은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서 수백년에 걸쳐서 군주, 귀족들과 같은 기득 세력들과 투쟁을 하였다. 2차대전 이후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제도적으로 서구식 민주주의를 수용했지만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정한 의미에서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나라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 촛불집회와 탄핵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이 보여준 모습은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다. 어떤 이들은 "대통령을 끌어낸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냐"라고 함부로 폄하하지만, 대통령은 봉건 군주도 아니고 특권을 누리는 절대 권력자도 아니다. 부끄러워 할  사람은 정치를 잘 못하여 국민의 신뢰를 저버린 대통령에게 있지, 당당하게 민주주의의 힘을 보여준 국민이 아니다. 만약 국민이 무관심으로 일관했더라면 이는 대통령에 대한 면죄부가 되었을 것이며 다음 대통령, 그 다음 대통령도 얼마든지 탈법, 불법을 저질러도 된다는 얘기이다. 국가 수장인 대통령이 대놓고 탈법, 불법을 저지르는데 아랫 사람들에게만 청렴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가. 결국 국가 기강이 전반적으로 땅에 떨어졌을 것이며, 가장 힘 없는 서민들에게 모든 피해가 돌아갔을 것이다. 

조순제는 이미 10여년 전인 2007년 이명박과 박근혜가 한나라당 경선을 벌이고 있을 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면서 이른바 "조순제 녹취록"을 이명박 캠프에 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경선에서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던 이명박 진영은 경선 이후 박근혜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이를 터뜨리기보다는 그냥 덮는 쪽을 택했다. 오히려 "터뜨려야 한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렸던 사람들이 명예훼손 등으로 구속되었다. 2012년 대선 때에도 최순실 게이트는 세간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이는 우리의 정치판이 정책 대결과 개인의 도덕성을 따지기보다는 이념 대결, 진영 대결로 흐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선거의 승패에 자신들의 사활을 걸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흑색 선전과 선동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린다. 심지어 엄중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국정원이 권력과 결탁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책이 매우 불편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또한 조순제라는 사람의 일방적인 얘기일 뿐,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현 시국에 편승하여 악의적인 흑색선전은 아니냐, 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어차피 누가 알겠는가. 사람이란 보고 싶은대로 보고 믿고 싶은대로 믿는 동물이다. 사실이라서 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었으면 하기에 진실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이 과연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읽는 이가 스스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분량이 적은 것이 아쉽다. 녹취록까지 합하여 200여 페이지 정도이다. 또한 조순제가 과거 최태민-박근혜의 주변에 있으면서 자신의 기억을 근거로 쓴 회고록이기에 주관적인 부분이 많고 우리가 궁금해 하는 수많은 의혹을 상세하게 파헤치지는 않는다. 이 책 하나로 모든 궁금증을 풀기에는 한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삼자가 아닌 <최순실 게이트>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사람이 폭로하는 이야기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호기심을 가지기에 충분하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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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의 미래
알랭 드 보통 외 지음, 전병근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이맘 때에 멍크 디베이트의 공개 토론을 번역한 《감시 국가》라는 책을 인상깊게 읽은 적이 있다. 국가 감시의 정당성을 놓고 2014년 5월 2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4명의 세계 정상급 지식인이 끝장 토론을 벌인 내용을 다룬 책이다.

참고로, 멍크 디베이트(Munk Debates)란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캐나다 오리아 재단이 2008년부터 주최하는 글로벌 토론회이다. 연 2회 국제적으로 가장 이슈가 되거나 중요한 현안을 가지고 2인씩 2개조를 이루어 토론을 벌인 후 청중들을 대상으로 찬반 표결로 승패를 가른다. 이 토론회는 영국 BBC와 미국 CSPAN이 실시간으로 중계할 정도로 전 세계적인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얼마 전 인류의 미래는 과연 유토피아일 것인가, 디스토피아일 것인가라는 해묵은 주제로 2015년 11월 3천여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90분 동안 날카로운 토론을 벌였던 《사피엔스의 미래(Do Humankind's Best Days Lie Ahead?)》가 출간되었다. 출판사는 감시 국가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존 F. 케네디의 13일, 0시 1분 전 등을 출간한 모던아카이브(前 모던타임스)이다.

그럼 "인류의 미래"를 놓고 토론에 참여한 4명의 석학은 과연 누구일까. 인류의 진보를 낙관하는 쪽에는 하버드대 교수로 타임지가 2004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한 스티븐 핑커 교수, 그리고 영국 옥스퍼드대 출신으로 저널리스트이자 영국 상원의원이기도 한 매트 리들리이다.

반대편에 있는 쪽은 스위스 출신 작가이자 대중 철학자인 알랭 드 보통, 그리고 워싱턴포스트 뉴욕 지부장이자 2005년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의 한 사람인 말콤 글래드웰이다. 네명 모두 오늘날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정상급 지식인들이며, 국내에서도 이들의 책과 강연은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토론 시작 전 실시된 "인류의 미래는 밝은가"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찬성이 71%, 반대가 29%였다. 그리고 90분 동안 열띤 토론을 펼치는 네명의 패널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는가에 따라서 청중의 의견 또한 달라지는 것이다.

가장 먼저 토론의 문을 연 스티븐 핑커는 "낙관론"을 제시하는 쪽이다. 그는 인간의 수명이 늘어났다는 점, 오랫동안 인간에게 치명적이었던 질병을 상당수 극복했다는 점, 물질적 번영과 전쟁의 감소 등 10가지 이유를 들어서 "앞으로의 미래 또한 밝다"고 단언한다.

다음 차례는 "비관론"을 제시하는 알랭 드 보통이다. 그는 스위스같은 가장 선진적인 나라조차 빈곤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전쟁과 질병의 위험 또한 여전히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인류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비관적인 결과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세번째는 다시 "낙관론"쪽의 매트 리들리이다. 그는 일부 학자들은 항상 "곧 위험이 닥친다"라며 떠들지만 지나고 보면 과장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또한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인류를 파멸로 내몰 것"이라던 멜서스의 경고와 달리 부의 불평등 해소, 경제적 번영, 환경 파괴의 개선 등 우리 주변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결국 진짜 문제는 "과거에 대해서는 좋은 추억만 떠올리면서 미래에 대해서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네번째는 "비관론"의 말콤 글래드웰이다. 그는 과거가 미래를 얘기해주지는 않는다고 단언한다. 또한 기술 발전이 테러 등 악용될 수 있다는 점, 환경은 개선되고 있지만 동시에 지구 온난화로 자연재해의 파괴력이 한층 더 높아진 점을 꼽아서 "과연 우리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들의 주장은 모두 논리적이며 설득력이 있다. 이들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얘기하는 것이지만 애초에 미래 예측이란 관점의 문제이므로 답이 나올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질 것"이건 "나빠질 것"이건 두리뭉실하면서 추상적인 대답일 뿐이다. 이것을 어떤 기준에서 어떻게 계량화할 수 있는가.

보다 미시적으로 말한다면 나아지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나빠지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가령 100년전과 지금을 비교했을 때 지금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와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풍요를 모든 사람이 누릴 수도 없을 뿐더러, 또한 결코 공짜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단 한가지도 거저 얻는 것이 없다. 한층 치열해진 생존 경쟁, 빈부 격차, 각박해진 삶, 단절되고 소외되는 인간 관계, 우리 인생에 대한 불확실성 등. 우리의 풍요로운 삶이 비록 빈곤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아프리카의 부족 사회보다 반드시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원시적인 삶으로 돌아간들 행복해질 것인가.

이는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라는 가치관의 문제이지 정답은 없다. 또한 우리의 미래는 너무나 예측불허이다. 상상도 못하는 재난재해가 덮치거나 핵전쟁이 일어난다거나 또는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이 절대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결론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날선 논쟁이 오가지만 우리나라처럼 격한 감정과 막말이 오가는 수준 낮은 토론회가 아니라 자신의 논리를 조리있게 얘기하면서 상대의 논리상 허점을 신랄하게 파고 든다. 책을 읽는 내내 과연 어느 쪽이 옳은지 결론내리기가 쉽지 않다. 역시 최고의 논객들답다. 또한 말콤은 반대편의 리들리와 핑커를 "폴리아나 부부"라고 지칭하면서 이들의 직업이 상원의원과 대학 교수라는 점을 들어서 "확실히 이 두분의 미래는 밝다"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나라였다면 인신공격이라며 흥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 유머러스하게 넘긴다. 이런 여유로움이 서구의 높은 토론 수준을 보여준다.

토론이 끝난 뒤 최종 투표 결과는 찬성 73%, 반대 27%였다. 찬성쪽이 2% 늘어났기는 했지만, 시작 전과 큰 변화는 없다. 그만큼 양측의 논리가 팽팽하여 서로 만만치 않았다는 얘기이다.

세계적 석학들의 토론이 어떠한지 보여주는 책이다. 만약 책이 아니라 TV를 통해 직접 생방송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지 않을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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