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 네버랜드 클래식 29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김영선 옮김, 노먼 프라이스 그림 / 시공주니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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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의 '어른들'
- [보물섬](188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김영선 옮김, <시공주니어>, 2006.



"트렐로니 지주와 리브시 판사를 비롯한 몇몇 양반들이 나에게 보물섬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쓰라고 요청했는데, 아직 가져오지 못한 보물이 남았으므로 보물섬의 위치만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기록하라고 했고 나는 17백 몇년의 어느 때로 돌아가서 펜을 들어야 했다. 내 아버지가 남긴 '벤보우 제독' 여관 처마 아래로 뺨에 큰 칼자국이 있는 늙은 선원이 처음 들어섰던 바로 그 때 말이다."
- [보물섬], 로버트 스티븐슨, <1장, '벤보우 제독' 여관의 늙은 선원>


내 어릴적 가장 감명깊게 읽은 동화책을 꼽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내놓는다.
초등학교 때 우리집 '세계명작동화전집'에 있던 [보물섬]. 그러나 어렸을 당시에 책을 열심히 읽었던 것은 아니고 TV에서 방영하던 [보물섬] 만화를 본 후에야 비로소 그 전집을 뒤졌던 것 같다.
당시는 몰랐으나 1970년대 후반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방송되었던 그 때.
주인공은 짐 호킨스,
바로 이 녀석이다.



내가 '최고의 동화'로 기억하는 첫째 이유는 '악역'으로서 해적들의 개성들과 그들의 오랜 관계에 관한 추억이었다.
원래 스티븐슨이 처음 이 소설을 썼을 때 제목은 [바다의 요리사(The Sea Cook)] 정도였다고 하는데, '외다리 실버'가 주인공이라는 것이리라.
화자인 짐 호킨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소설의 초반부에 등장한 무서운 해적들의 거대한 배후이자, 전설의 플린트 선장의 실질적 후계자. 첫 장면에서 짐의 벤보우 제독' 여관에 들어선 칼자국의 빌리 본즈 부선장이 가장 두려워 한 인물 '외다리 실버'는 실질적 '주인공'이니 만큼 부하들을 먼저 몇 명 보내고는 한참 후인 <제 2부> 즈음 되어서야 등장한다. 

나는 빌리 본즈 선장이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는데, 전설의 플린트 선장의 해적단에서 '1등 항해사'로서 2인자였으며, 플린트 사후 보물지도를 가로챈 도망자, 예전의 동료들로부터 쫓겨다니는 주정뱅이 늙은 선원이 등장한 소설의 그 첫 장면이, 망상에 쫓기면서 '검은 동그라미'를 받고 혼자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어갔을 그 허무함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1인자가 되지 못한 2인자의 최후가 내게는 그토록 애잔했다.

그 외에 잘린 손가락의 검둥개, 말발굽에 비명을 다한 쇳소리의 장님 퓨... 이들은 빌리 본즈 부선장이 얼굴에 칼자국이 나고, 2등 항해사 실버의 한쪽 다리가 날아갔던 오래전 '대전투'에서 함께 싸우다가 손가락을 잃고 눈을 잃었을 해적단의 '동지'였고, 보물지도를 둘러싼 '내부의 적들'이었다.
어린 내게는 히스파니올라호 선원들의 보물섬을 향한 모험보다는 소설이 '침묵'하는 이야기, 플린트 해적단의 아련한 모험이 더 좋았다.
망원경을 든 채 석양을 비껴 선 빌리 본즈 선장의 외로운 어깨와 보물섬을 향한 이룰 수 없는 아련한 꿈은 오래된 해적 동지들의 최후를 미리 보여주고 있었다.


"실버에 관해서는 더 이상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 어마어마했던 외다리 선원은 내 삶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어딘가에서 예전의 흑인 부인을 다시 만나고 앵무새 '플린트 선장'과 평안히 지내고 있을 것만 같다. 물론 그 가능성이 적을 것이기에, 나의 바램에 불과하겠지만... 
난 아직도 악몽을 꾸며 한밤중에 깨어 일어난다. 어떤 날은 그 보물섬의 높은 파도소리가, 또 어떤 때는 "8센트! 8센트!"를 외쳐대는 앵무새 플린트의 목소리가 귓속을 맴도는 채로."
- [보물섬], 로버트 스티븐슨, <34장, 마지막 이야기>

두 번째 감동의 지점이 [보물섬]의 핵심이다.
어린 화자 짐 호킨스에게 크고 '어마어마했던' 어른들, 특히 믿음과 배신의 양 극단을 알게 해준 '외다리 실버'로 대표되는 그 '어른들' 이야기다.
애초에 내겐 히스파니올라호나 대지주 트렐로니, 리브시 판사 등은 관심 밖이었고, 카리스마 넘치는 스몰레 선장의 위기극복 '리더십'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중에 글을 쓰는 짐 호킨스는 예전의 빌리 본즈보다, 외다리 실버보다 더 힘이 센 청년이 되었을 테지만, 그의 마음은 잠시나마 '아버지' 같던 빌리 본즈와 오랜 시간 '삼촌' 같던 실버보다 언제까지나 여릴 것이다.

다 큰 나는 안다.
어릴 때 가장 커 보이던 '아버지'가 사실은 얼마나 '초라'했을 때가 많았을지, 제일 힘세 보이던 '삼촌들'이 사실은 힘없는 다수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인지.
그럼에도, 그 '어른들'은 다 큰 내 마음 속에서 여전히  그 모습으로 계속 살아 계속 불려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어른'이 된 내가 그런 존재가 되어 있음을.
그리하여, 우리의 [보물섬]이 달리 '고전동화'가 아님을.


이 두 가지가, 내 아들이 한글도 익히기도 전, 잠자리에서 [보물섬]을 수 백번 읽어준 이유다.

***

1. [보물섬](188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김영선 옮김, <시공주니어>, 2006.
2. [Treasure Island], Robert Louis Stevenson, <Collins classics>, 2010.
3. [보물섬], <교원 애니메이션 세계명작동화>,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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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 비룡소 클래식 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에드워드 윌슨 그림, 정영목 옮김 / 비룡소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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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의 '어른들'
- [보물섬], 로버트 스티븐슨, 김영선 옮김, <시공주니어>, 2006.



"트렐로니 지주와 리브시 판사를 비롯한 몇몇 양반들이 나에게 보물섬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쓰라고 요청했는데, 아직 가져오지 못한 보물이 남았으므로 보물섬의 위치만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기록하라고 했고 나는 17백 몇년의 어느 때로 돌아가서 펜을 들어야 했다. 내 아버지가 남긴 '벤보우 제독' 여관 처마 아래로 뺨에 큰 칼자국이 있는 늙은 선원이 처음 들어섰던 바로 그 때 말이다."
- [보물섬], 로버트 스티븐슨, <1장, '벤보우 제독' 여관의 늙은 선원>


내 어릴적 가장 감명깊게 읽은 동화책을 꼽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내놓는다.
초등학교 때 우리집 '세계명작동화전집'에 있던 [보물섬]. 그러나 어렸을 당시에 책을 열심히 읽었던 것은 아니고 TV에서 방영하던 [보물섬] 만화를 본 후에야 비로소 그 전집을 뒤졌던 것 같다.
당시는 몰랐으나 1970년대 후반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방송되었던 그 때.
주인공은 짐 호킨스,
바로 이 녀석이다.



내가 '최고의 동화'로 기억하는 첫째 이유는 '악역'으로서 해적들의 개성들과 그들의 오랜 관계에 관한 추억이었다.
원래 스티븐슨이 처음 이 소설을 썼을 때 제목은 [바다의 요리사(The Sea Cook)] 정도였다고 하는데, '외다리 실버'가 주인공이라는 것이리라.
화자인 짐 호킨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소설의 초반부에 등장한 무서운 해적들의 거대한 배후이자, 전설의 플린트 선장의 실질적 후계자. 첫 장면에서 짐의 벤보우 제독' 여관에 들어선 칼자국의 빌리 본즈 부선장이 가장 두려워 한 인물 '외다리 실버'는 실질적 '주인공'이니 만큼 부하들을 먼저 몇 명 보내고는 한참 후인 <제 2부> 즈음 되어서야 등장한다. 

나는 빌리 본즈 선장이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는데, 전설의 플린트 선장의 해적단에서 '1등 항해사'로서 2인자였으며, 플린트 사후 보물지도를 가로챈 도망자, 예전의 동료들로부터 쫓겨다니는 주정뱅이 늙은 선원이 등장한 소설의 그 첫 장면이, 망상에 쫓기면서 '검은 동그라미'를 받고 혼자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어갔을 그 허무함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1인자가 되지 못한 2인자의 최후가 내게는 그토록 애잔했다.

그 외에 잘린 손가락의 검둥개, 말발굽에 비명을 다한 쇳소리의 장님 퓨... 이들은 빌리 본즈 부선장이 얼굴에 칼자국이 나고, 2등 항해사 실버의 한쪽 다리가 날아갔던 오래전 '대전투'에서 함께 싸우다가 손가락을 잃고 눈을 잃었을 해적단의 '동지'였고, 보물지도를 둘러싼 '내부의 적들'이었다.
어린 내게는 히스파니올라호 선원들의 보물섬을 향한 모험보다는 소설이 '침묵'하는 이야기, 플린트 해적단의 아련한 모험이 더 좋았다.
망원경을 든 채 석양을 비껴 선 빌리 본즈 선장의 외로운 어깨와 보물섬을 향한 이룰 수 없는 아련한 꿈은 오래된 해적 동지들의 최후를 미리 보여주고 있었다.


"실버에 관해서는 더 이상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 어마어마했던 외다리 선원은 내 삶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어딘가에서 예전의 흑인 부인을 다시 만나고 앵무새 '플린트 선장'과 평안히 지내고 있을 것만 같다. 물론 그 가능성이 적을 것이기에, 나의 바램에 불과하겠지만... 
난 아직도 악몽을 꾸며 한밤중에 깨어 일어난다. 어떤 날은 그 보물섬의 높은 파도소리가, 또 어떤 때는 "8센트! 8센트!"를 외쳐대는 앵무새 플린트의 목소리가 귓속을 맴도는 채로."
- [보물섬], 로버트 스티븐슨, <34장, 마지막 이야기>

두 번째 감동의 지점이 [보물섬]의 핵심이다.
어린 화자 짐 호킨스에게 크고 '어마어마했던' 어른들, 특히 믿음과 배신의 양 극단을 알게 해준 '외다리 실버'로 대표되는 그 '어른들' 이야기다.
애초에 내겐 히스파니올라호나 대지주 트렐로니, 리브시 판사 등은 관심 밖이었고, 카리스마 넘치는 스몰레 선장의 위기극복 '리더십'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중에 글을 쓰는 짐 호킨스는 예전의 빌리 본즈보다, 외다리 실버보다 더 힘이 센 청년이 되었을 테지만, 그의 마음은 잠시나마 '아버지' 같던 빌리 본즈와 오랜 시간 '삼촌' 같던 실버보다 언제까지나 여릴 것이다.

다 큰 나는 안다.
어릴 때 가장 커 보이던 '아버지'가 사실은 얼마나 '초라'했을 때가 많았을지, 제일 힘세 보이던 '삼촌들'이 사실은 힘없는 다수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인지.
그럼에도, 그 '어른들'은 다 큰 내 마음 속에서 여전히  그 모습으로 계속 살아 계속 불려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어른'이 된 내가 그런 존재가 되어 있음을.
그리하여, 우리의 [보물섬]이 달리 '고전동화'가 아님을.


이 두 가지가, 내 아들이 한글도 익히기도 전, 잠자리에서 [보물섬]을 수 백번 읽어준 이유다.

***

1. [보물섬](188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김영선 옮김, <시공주니어>, 2006.
2. [Treasure Island], Robert Louis Stevenson, <Collins classics>, 2010.
3. [보물섬], <교원 애니메이션 세계명작동화>,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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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저항
방현석 지음 / 일하는사람들의작은책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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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0년대 가장 현실적 '리얼리스트', 방현석
- [내일을 여는 집], 방현석, <창작과비평사>, 1991.



"창조적 리얼리스트... 사유와 감정이 사회적 존재로부터 형성되는 과정을 알며, 또 체험이나 감정들이 현실이라는 전체적 복합체의 부분이라는 점을 안다. 이때 그는 리얼리스트로서 그러한 부분이 삶의 전체적 복합체 속에서 어디에 속하며, 사회생활의 어느 부분에서 생성되었고, 무엇을 지향하게 되는지 등등의 문제를 보여준다."
- 게오르그 루카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1938.

'리얼리즘'은 '사실주의'와 다르다.
서양에서는 19세기 과학의 발전과 함께 기존 '낭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기 위해 '사실주의'가 시작되었으나, 서양사조가 여과없이 이식되던 식민지 조선에서는 '사실주의' 이후 '낭만주의'가 유행했는데, 우리 문학사에서 '사실주의'란 그 객관적 묘사의 자연적 확장이라는 '자연주의'와 구별이 모호했다. 
그로 인해, 원래 '사실주의' 원어로서 '리얼리즘'은 번역되지 못했고, 그냥, '리얼리즘'이 된다.

헝가리 마르크스주의 미학자 게오르그 루카치에게 "문학(예술)은 현실의 '특수한 반영'"이다.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를 기본으로, 복합적인 삶의 보편적 '총체성'을 개별적 '구체성'으로 '반영'하는 것이 '리얼리즘'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문예사조에서 "문제는 리얼리즘"이었다.

"리얼리즘적인 것은 사회적인 인과관계의 복합체를 발견하며... 계급의 관점에서 글을 쓰며... 따라서 민중성과 리얼리즘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들은 관대하면서도 극히 조심스럽게 선정되어야 한다... 기존의 리얼리스틱한 작품들이나 민중적인 작품들로부터만 그러한 기준을 끄집어내서는 안된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경우에는 그저 형식주의적인 기준들 밖에, 형식적인 리얼리즘 밖에 얻지 못할 것이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루카치에 대한 반론], 1938.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루카치의 '문예론'에 대한 반론으로, '리얼리즘'은 '계급적 관점'에서 현실을 '반영'하나 기존의 '민중적인 작품'들로만 가준을 삼아서는 안된다고 한다.
복잡한 현실 속에서 고뇌하는 개인과 집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리얼리즘'의 '문제'는 단순한 '사실주의'의 그것과 다르다.


우리 현대 소설 문학사에서 나는 '리얼리스트'를 단 세 명만 뽑는다.

1970년대, 황석영.
1980년대, 방현석.
1990년대, 김소진.

21세기 들어서 '리얼리즘'의 의미는 더 확장되었거나 문예사조로서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1970년대 [객지]를 썼던 황석영이나, 1980년대 [내딛는 첫발은]을 썼던 방현석이나, 1990년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썼던 김소진에게서 추출된 공통점은 '복잡한 현실에서 노동하는 다수 사람들의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심경들과 그들의 지난한 현실들'이었다.

방현석은 소설창작을 전공하고 인천에서 공장노동과 노동조합 활동를 하면서 그 경험을 토대로 1988년 [내딛는 첫발은]이라는 단편소설로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소설가다.
뜨거웠던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파도가 지난 후 자본의 개별적 역습, 그리고 노조운동의 패배와 승리의 과정에서 고뇌하는 노동자들의 심리와 현실을 그려낸 단편소설들을, 역시 치열했던 1991년에 [내일을 여는 집]으로 묶어냈다.

해고와 복직투쟁의 과정을 그린 [내일을 여는 집], 조선소 투쟁을 담은 [지옥선의 사람들], 굴종을 깨고 일어나는 파업 과정을 묘사한 [내딛는 첫발은] 등 당시 노동자들이 '노예'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당당한 '노동계급 주체'로 우뚝서는 모습들 말이다.

물론,
방현석의 '80년대 소설들이 '리얼리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당시 남한의 구체적 현실이 배경이 되었고, 당시 우리 현실에서 '사회적인 인과관계의 복합성'을 발견하고 그 특수한 현실을 '반영'한 산물이기 때문이었다.

이후로도 방현석은 같은 어조를 유지하면서 1999년에는 한국 현대 노동운동사(1970~1994)를 [아름다운 저항]으로 엮었는데, 1970년대 청계천 노동운동부터 1980년 광주, 1990년 울산 골리앗 투쟁, 1991년 전노협 건설과 1994년 전기협/전지협 파업까지 우리 노동운동 역사를 정리하기도 한다.


21세기에 아마도 '폐기'되었을지도 모를 우리의 '리얼리즘'은 그 본질이 '현실의 반영'인 한 여전히 '확장'되어야 한다.


"정식이 던진 스패너가 공중을 날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개처럼 살거야? 언제까지?'
...
15호기, 16호기가 꺼졌다... 스패너가 유리창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기계소리 대신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잇따랐다.
'나가자.'
누군가 외쳤다. 나가자. 가자. 나가자. 한순간이었다. 눈물이 분노로 불타올랐다. 모두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달려나가는 사람들의 손에 금형 받침목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 방현석, [내딛는 첫발은], <실천문학 봄호>, 1988.


내게 소설가 방현석은 등단작 마지막 장면으로, '80년대 가장 현실적인 '리얼리스트'로 언제까지나 기억되고 있다.

***

1. [내일을 여는 집], 방현석, <창작과비평사>, 1991.
2. [아름다운 저항], 방현석, <작은책>, 1999.
3. [당신의 왼편], 방현석, <해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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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집
방현석 지음 / 창비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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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가장 현실적 '리얼리스트', 방현석
- [내일을 여는 집], 방현석, <창작과비평사>, 1991.



"창조적 리얼리스트... 사유와 감정이 사회적 존재로부터 형성되는 과정을 알며, 또 체험이나 감정들이 현실이라는 전체적 복합체의 부분이라는 점을 안다. 이때 그는 리얼리스트로서 그러한 부분이 삶의 전체적 복합체 속에서 어디에 속하며, 사회생활의 어느 부분에서 생성되었고, 무엇을 지향하게 되는지 등등의 문제를 보여준다."
- 게오르그 루카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1938.

'리얼리즘'은 '사실주의'와 다르다.
서양에서는 19세기 과학의 발전과 함께 기존 '낭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기 위해 '사실주의'가 시작되었으나, 서양사조가 여과없이 이식되던 식민지 조선에서는 '사실주의' 이후 '낭만주의'가 유행했는데, 우리 문학사에서 '사실주의'란 그 객관적 묘사의 자연적 확장이라는 '자연주의'와 구별이 모호했다. 
그로 인해, 원래 '사실주의' 원어로서 '리얼리즘'은 번역되지 못했고, 그냥, '리얼리즘'이 된다.

헝가리 마르크스주의 미학자 게오르그 루카치에게 "문학(예술)은 현실의 '특수한 반영'"이다.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를 기본으로, 복합적인 삶의 보편적 '총체성'을 개별적 '구체성'으로 '반영'하는 것이 '리얼리즘'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문예사조에서 "문제는 리얼리즘"이었다.

"리얼리즘적인 것은 사회적인 인과관계의 복합체를 발견하며... 계급의 관점에서 글을 쓰며... 따라서 민중성과 리얼리즘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들은 관대하면서도 극히 조심스럽게 선정되어야 한다... 기존의 리얼리스틱한 작품들이나 민중적인 작품들로부터만 그러한 기준을 끄집어내서는 안된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경우에는 그저 형식주의적인 기준들 밖에, 형식적인 리얼리즘 밖에 얻지 못할 것이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루카치에 대한 반론], 1938.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루카치의 '문예론'에 대한 반론으로, '리얼리즘'은 '계급적 관점'에서 현실을 '반영'하나 기존의 '민중적인 작품'들로만 가준을 삼아서는 안된다고 한다.
복잡한 현실 속에서 고뇌하는 개인과 집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리얼리즘'의 '문제'는 단순한 '사실주의'의 그것과 다르다.


우리 현대 소설 문학사에서 나는 '리얼리스트'를 단 세 명만 뽑는다.

1970년대, 황석영.
1980년대, 방현석.
1990년대, 김소진.

21세기 들어서 '리얼리즘'의 의미는 더 확장되었거나 문예사조로서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1970년대 [객지]를 썼던 황석영이나, 1980년대 [내딛는 첫발은]을 썼던 방현석이나, 1990년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썼던 김소진에게서 추출된 공통점은 '복잡한 현실에서 노동하는 다수 사람들의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심경들과 그들의 지난한 현실들'이었다.

방현석은 소설창작을 전공하고 인천에서 공장노동과 노동조합 활동를 하면서 그 경험을 토대로 1988년 [내딛는 첫발은]이라는 단편소설로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소설가다.
뜨거웠던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파도가 지난 후 자본의 개별적 역습, 그리고 노조운동의 패배와 승리의 과정에서 고뇌하는 노동자들의 심리와 현실을 그려낸 단편소설들을, 역시 치열했던 1991년에 [내일을 여는 집]으로 묶어냈다.

해고와 복직투쟁의 과정을 그린 [내일을 여는 집], 조선소 투쟁을 담은 [지옥선의 사람들], 굴종을 깨고 일어나는 파업 과정을 묘사한 [내딛는 첫발은] 등 당시 노동자들이 '노예'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당당한 '노동계급 주체'로 우뚝서는 모습들 말이다.

물론,
방현석의 '80년대 소설들이 '리얼리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당시 남한의 구체적 현실이 배경이 되었고, 당시 우리 현실에서 '사회적인 인과관계의 복합성'을 발견하고 그 특수한 현실을 '반영'한 산물이기 때문이었다.

이후로도 방현석은 같은 어조를 유지하면서 1999년에는 한국 현대 노동운동사(1970~1994)를 [아름다운 저항]으로 엮었는데, 1970년대 청계천 노동운동부터 1980년 광주, 1990년 울산 골리앗 투쟁, 1991년 전노협 건설과 1994년 전기협/전지협 파업까지 우리 노동운동 역사를 정리하기도 한다.


21세기에 아마도 '폐기'되었을지도 모를 우리의 '리얼리즘'은 그 본질이 '현실의 반영'인 한 여전히 '확장'되어야 한다.


"정식이 던진 스패너가 공중을 날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개처럼 살거야? 언제까지?'
...
15호기, 16호기가 꺼졌다... 스패너가 유리창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기계소리 대신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잇따랐다.
'나가자.'
누군가 외쳤다. 나가자. 가자. 나가자. 한순간이었다. 눈물이 분노로 불타올랐다. 모두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달려나가는 사람들의 손에 금형 받침목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 방현석, [내딛는 첫발은], <실천문학 봄호>, 1988.


내게 소설가 방현석은 등단작 마지막 장면으로, '80년대 가장 현실적인 '리얼리스트'로 언제까지나 기억되고 있다.

***

1. [내일을 여는 집], 방현석, <창작과비평사>, 1991.
2. [아름다운 저항], 방현석, <작은책>, 1999.
3. [당신의 왼편], 방현석, <해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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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분열증 현대사상의 모험 1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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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물신성' 속 '욕망하는 기계'들
- [앙띠오이디푸스](1972),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최명관 옮김, <민음사>, 1997.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상품형태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물건들의 사회적인 자연적 속성)'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 외부에 존재하는 관계, 즉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인간의 눈에는 '물건들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실상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나는 '물신숭배'라고 부른다."
- 칼 마르크스, [자본론] 1권, <자본의 물신적 성격과 비밀>, 1867.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수단을 사유화한 자본가가 가진 것은 노동력 밖에 없는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그들의 '노동의 (사용)가치'가 아닌 '상품'으로서 '노동의 교환가치', 즉 '노동력의 가치'인 '임금'을 주는 생산관계를 그 경제적 토대로 한다. 여기서 '지불되지 않는 노동(부불노동)'은 '잉여가치'가 되고 자본으로 축적되며, 이러한 과정은 "스스로 자기증식하는 자본의 자기운동"이라는 헤겔식 표현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서술된다.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자본의 '자기증식운동'의 과정이 노동 '착취'며, 자본 축적의 본질은 생산수단의 '독점'인 바, 이것이 자본주의 본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생산관계가 '상품'이라는 '물적 관계'로 현상하면서 그 본질인 '인적 관계'를 은폐하는데, 마르크스는 이것을 '물신성(Fetishism)'으로 표현한다.

'기계'라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구조주의식 표현은, 말 그대로의 '기계'가 아닌 '은유'인데, 위와 같이 각 역사적 특정 단계의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자기운동'에 의해 가동되는 하나의 거대한 '구조'를 말한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 조차 자본주의를 '주체'도 없이 돌아가는 '구조'로 보는데, 고도로 발전한 복잡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온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의 영향이다.

질 들뢰즈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 '주변의 괴상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좌파 정신분석의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작업한 [앙띠오이디푸스]는 이와 같은 자본주의 생산관계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인간들을 '욕망하는 기계들'이라 표현하는데, 난해하지만, 거대한 '기계'와 연결된 장치로서 '부품'들이기는 하나 '욕망'이라는 본질이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았으되, 사회적 '생산관계'가 아닌 개인적 '가족관계'로 한정된 프로이트의 '무의식-초자아(id)'는 거부한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개념에 반대한다는 선언이 [앙띠-오이디푸스(Anti-Oedipe)]이다.


"오이디푸스가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탄생하는 것은 첫째 차원의 사회적 심상들이 둘째 차원의 가족적 삼상들에 일치하는 데서이다... 오이디푸스는... 돈-자본의 탈규준화한 흐름들을 타고 도래한다... 오이디푸스 개념은 자본주의 '기계'의 상상적인 오이디푸스의 개념이 됨으로써만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고 현실화한다... 이 오이디푸스 개념은 실로 세계사의 결과이거니와, 이것은 자본주의가 이미 세계사의 결과라고 하는 독특한 의미에서이다."
- 가타리/들뢰즈, [앙띠오이디푸스], <결국은 오이디푸스>, 1972.

스핑크스의 퀴즈를 풀고 왕을 죽인 후 왕비를 차지한 그리스 시대 오이디푸스가 결국 본인이 죽인 왕이 자신의 아버지이고 본인이 겁탈한 왕비가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고는 '정신분열'에 빠진 이야기. 프로이트는 '아버지-어머니-나'의 '가족적 삼각관계' 속에서 '오이디푸스'라는 '나'를 두고 '성적 억압'과 '정신분열'을 다루는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오이디푸스' 개념은 개인적 '가족관계'가 아닌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통해 현실화된다고 한다. 
[앙띠오이디푸스]의 '자기비판점'은' "가족에 포개는 일 밑에 무의식의 사회적 공급들의 본성을 발견하는 것. 개인적 환상 밑에 집단의 환상들의 본성을 발견하는 것" 혹은, "환영이 심상의 심상이기를 그치는 점까지 환영을 밀어붙여, 환영이 숨기면서 포장하고 있는 추상적인 형상들, 즉 '분열들-흐름들'을 찾아내는 것"인데, 사회적 '오이디푸스'인 '정신분열자' 분석의 과제는 개인적(가족적) 오이디푸스라는 "표상의 극장을 '욕망하는 생산'의 질서 속에 다시 옮겨놓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프로이트에 의해 개인적이고 가족적으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구조 속에, 그 특정 '생산관계'의 '질서' 속에 "이미-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의 영향이다.


"'욕망'은 생산의 질서에 속하며, 모든 생산은 욕망하는 것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리카도가 표상 가능한 모든 가치의 원리로서 '양적 노동(추상노동)'을 발견함으로써 정치적 혹은 사회적 경제학(정치경제학)의 기초를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욕망'의 대상들과 목표들의 표상 전체의 원리로서 '양적 리비도'를 발견함으로써 '욕망'하는 경제학의 기초를 세우고 있다... 리카도가 '단적으로 노동 자체'를, 또한 표상을 실제로 넘어서서 넘쳐흐르는 생산의 영역을 최초로 찾아낸 사람이듯이, 프로이트는 '단적으로 욕망 자체'를 찾아낸 사람이다."
- 들뢰즈/가타리, [앙띠오이디푸스], <정신분석과 자본주의>, 1972.

마르크스주의에서 소비에트 러시아혁명까지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세계체제 변혁이라는 '거대담론'을 고민하고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하는 '혁명'에 주력한다. 그러나, [앙띠오이디푸스]에 의하면, "레닌주의의 이 '절단'은 사회주의 자체에 국가자본주의가 되살아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따라서, 사회관계 속 개인들의 '욕망'이 부각된다. 사람들 개인의 '미시담론'이 해결되지 않으면, 사회체제와 정치권력의 정복이라는 '거시담론'이 해결되어도 미흡하다는 것인데, 계급 전반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물신성(물신숭배)'의 문제인 것이다.
[앙띠오이디푸스]는 "욕망하는 기계들은 사회적 기계로부터 나오며, 욕망하는 기계들 없는 사회적 기계 또한 없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세 가지 원천'(레닌)은 철학에서 독일의 관념론(칸트, 헤겔), 정치경제학에서 영국의 정치경제학(아담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사회주의에서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하는데,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에 대한 비판이듯, 들뢰즈와 가타리의 '반-오이디푸스론'은 프로이트의 '관념론적 오이디푸스'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제, '정신분열적' 난해한 이 책의 결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오이디푸스적' 정신분열자들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이다.

"혁명가는 더러운 관을 깨부수고, 홍수를 통과시키고, 흐름을 풀어놓고, 분열을 다시 절단한다. 정신분열자는 혁명가가 아니지만, 정신분열증적 과정은 '혁명의 잠재력'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자-분석의... 마지막 명제는 사회적인 리비도 공급의 두 극을 구별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 하나는 반동적이고 파시즘화하는 편집병적인 극이요, 다른 하나는 정신분열적인 극이다."
- 들뢰즈/가타리, [앙띠오이디푸스], <정신분열자-분석의 적극적 임무>, 1972.

자본주의적 '물신성' 속에서, 가족관계에 머무는 관념론적 '오이디푸스'는 '편집증'의 형태로 '반동화'되고 '파시즘화'되는 반면, '욕망하는 기계들'을 긍정하는 유물론적 '오이디푸스들'은 '정신분열'은 겪지만 '혁명의 잠재력'이라는 것이 이 난해한 저서의 결론이다.
즉, '욕망(리비도)'을 억압하는 '사회적 기계'를 전복하는 '잠재력'을 '욕망하는 기계들'의 '오이디푸스적 정신분열'에서 찾아낸다.

다만, [앙띠오이디푸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세 가지를 적고 있다.
첫째, 예술과 과학만이 혁명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둘째, 하부구조(경제적 토대) 자체 속에 근거를 두는 '계급'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셋째, '혁명가'가 '정신분열자'이거나 그 역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편집증'이 반동적 파시스트적이라는 '극단적' 의미로 '정신분열증'이 혁명적이라는 것이며, 그 전제는 위 두 가지일 것이다.

자본주의적 '오이디푸스'의 한 극단이 '파시즘적 편집증'이라면, 다른 극단은 '혁명적 정신분열증'이라는 결론인데, [앙띠오이디푸스]라는 책 자체가 '정신분열'적인 이유 아니겠는가.


"'욕망' 자체, 욕망의 위치의 문제가 제기... 즉, 욕망의 극단적인 두 극 간에,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술적인 '사회기계들' 간의 내재적 관계의 문제... 이 두 극의 한쪽에서는 욕망이 '파시스트적인 편집병적' 조직체들을 공급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정신분열' 기질의 '혁명적인' 흐름들을 공급한다."
- 들뢰즈/가타리, [앙띠오이디푸스], <부록>, 1972.

***

- [앙띠오이디푸스](1972),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최명관 옮김, <민음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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