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박기봉 옮김 / 비봉출판사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신채호, <일신서적>, 1988.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반드시 본위인 아가 있으면 따라서 아와 대치하는 비아가 있고, 아 가운데 아와 비아가 있으면 비아 가운데에도 아와 비아가 있다.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잦을 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 [조선상고사], 신채호, <1편. 총론>, 1924.


일제강점기 조선의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1880~1936)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규정하며 [조선상고사]를 시작한다. 우리 한반도 조선 민족을 '아'로 두고 그 기원을 고조선 이전 상고시대부터 연구하고자 한 거대한 기획은, 1924년도에 <총론>의 완성으로 시작되어 1931년부터 신문에 연재되었으나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백제의 멸망과 연개소문 사후 정국에서 멈춘 미완의 역작이다.
식민지 현실에서 일제에 대항하여 투철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옥사한 신채호가 '역사의 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내부의 주적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였다. 조선이라는 '아(我)'의 역사에서 사대적 유교주의자 김부식은 역사의 '비아(非我)'였으니 이를 물리치고 '역사의 승리자'가 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부식이 진압한 고려 중기 '묘청의 난'은 "조선 1천년 역사상 제1대 사건"이 되었고, 고구려의 마지막 중흥을 꾀한 '혁명가' 연개소문은 위대한 '민족의 영웅'으로 부각된다.

"고대 아시아 동부의 종족이 1) 우랄 어족, 2) 지나 어족의 두 갈래로 나누어졌는데, 한족(중국), 묘족, 요족 등은 후자(지나 어족)에 속한 것이고, 조선족, 흉노족 등은 전자(우랄 어족)에 속한 것이다.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 선비, 여진, 몽고, 퉁구스 등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이동하고 분산하여 돌궐(지금의 신강족), 흉아리(헝가리), 토이기(터키), 분란(판란드) 족이 되었다."
- [조선상고사], 신채호, <2편. 수두시대>

조선 역사의 기원을 추적하니 인류 문명의 '대혁명'인 '불의 발견'에서 시작하는데, "동서를 물론하고 고대의 인민들이 다 불의 발견을 기념하여 그리스의 화신, 프러시아의 화교, 지나의 수인씨 등 전설이있고", 조선은 "더욱 불을 사랑하여" 인명이나 지명을 지었는데 요동의 송화강을 중심으로 한 '부여'라는 공동체명의 유래가 '불'이라고 한다.
또한, 중국 정사 [삼국지]의 <위서> 말단에 '오환,선비,동이전'(이른바, '위지동이전') 변방에서 '위나라 동쪽의 여러 나라들' 중 하나인 '조선족'이 원래는 중원의 동북방을 지배한 민족이며(서북방은 '흉노족') 여기서 '여진, 선비, 몽고' 등의 민족이 분화되었다. 이는 더 거슬러 올라가면 탁록 전투에서 중국 황제 헌원씨와 싸운 치우천왕이나 중국 은(상)나라의 '용산 문화'의 뿌리가 '조선족'이라는 것이다.


"연개소문은 1) 고구려 9백년 이래로 전통의 호족공화의 구체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였고, 2) 장수왕 이래 철썩같이 굳어온 서수남진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의 정책을 세웠고, 그래서 국왕 이하 대신 호족 수백 명을 죽여 자기의 독무대로 만들고, 서국 제왕 당태종을 격파하여 지나 대륙의 침략을 시도했는데... 당시에 고구려 뿐 아니라 동방 아시아전쟁사 중에서 유일한 중심 인물이다."
- [조선상고사], 신채호, <11편. 고구려와 당의 전쟁>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신채호는 고려까지 [삼한고기], [해동고기], [삼국사] 등의 역사서가 있었으나, '사대주의 유교도' 김부식이 평양에 도읍을 두고 북벌을 하자는 '화랑 무사사상'의 불교도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에 "동, 북 두 부여를 떼어버려 조선 문화가 유래한 곳을 진토 속에 묻고 발해를 버려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를 초개 속에 던지면서"(총론) 이후 불행한 몽골 섭정기를 거치면서 김부식류의 '사대적 역사관'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신채호가 보기에 "앞뒤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것이 많아 거의 사적 가치가 없다."(총론)

"... 송 신종이 왕안석과 더불어 국사를 논의하며 말하기를, '당태종이 고구려를 쳤는데 어찌 이기지 못하였는가' 하니, (왕안석이) 말하기를, '개소문은 비상한 사람입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소문도 또한 재사인데 능히 바른 도로써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과 포학을 자행하여 대역에 이른 것이다."
- [삼국사기], 김부식, <열전9. 개소문전>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의 성을 '천'씨로 바꾸는데, 이는 당나라 고조의 이름이 이'연'이라 같은 한자를 피해 쓰는 사대적 발상이며 김부식에게 연개소문은 "재능은 있으나 잔인하고 포악한 대역죄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자료나 소설 '갓쉰동전'은 연개소문이 젊어서 중국 일대를 '서유'하며 당태종 이세민을 만난 적도 있음을 추정케 하는 바, 중국 정사인 [신,구당서]에서 "방자하고 야심찬 개소문" 등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당태종과 중국인들이 그만큼 '영웅' 연개소문을 두려워했음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고구려 서부대인 대대로직을 물려받게 되는 연개소문은 수나라를 망하게 한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서 신생국 당나라에게도 외교강경책을 주장하는데, 중국과의 평화책을 고수하는 영류왕과 호족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었으며, '고구려-당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는 국제정치의 숙적 당태종 이세민이 "더 이상 고구려를 넘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게 만든다.

"연개소문은 요동의 싸움을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 두 사람에게 맡기고 정병 3만으로 적봉진 등지를 습격하니... 당태종은 곧 군사를 돌이키려고 하였다. 오골성주 추정국과 안시성주 양만춘은 연개소문이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음과 당태종이장차 도망할 것을 짐작하고... 당태종은 말이 수렁에빠져서 꼼짝을 못하고, 양만춘의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아 거의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당의 용장 설인귀가 달려와서 당태종을 구하여... 가까스로 달아났다."
- [조선상고사], 신채호, <11편>

안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안시성주가 양만춘이라는 기록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시작된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와 오골성주에게 요동을 위임하고 대당 전쟁을 총지휘하며 신성 등의 큰 성에서의 승리와 효과적인 보급로 차단 및 양동작전 등으로 당태종을 물리쳤다. 한편, 중국의 역사에서는 당태종이 은혜를 베풀며 군사를 물렸다고 기록한다. 

신채호는 고구려의 '영웅' 연개소문이 추진한 대외정책을 '남수서진'이라 했다. "남쪽을 지키고 서쪽으로 진출한다." 고구려가 중국 동남쪽 변방이 아니라 중원과 아시아를 동서로 나누는 동등한 국가라는 의미다. 장수왕 이래 '서수남진'을 혁파하고 이를 주장하는 기득권을 척결했던 '혁명가' 연개소문. 한때 연개소문에게 감금당하기도 했고 당나라를 조선 민족 내전에 끌어들인 신라 무열왕 김춘추는 고구려의 멸망을 보지는 못했으나 이후 문무왕이 되어 삼국통일을 이루는 아들 김법민으로 인해 역사에서 살아나는 반면, 연개소문의 아들들은 내분으로 인해 망국의 원인을 제공하면서 연개소문은 중국과 김부식류가 날조한 '실패한 독재자' 이미지로 누누이 전해져 오기도 했다. 

중국 한무제에 이르러 사마천이 자신들의 역사를 아득한 '삼황오제'부터 시작하는 '통합족보'로 [사기]에 담았다면, 우리 조선족의 족보는 일제강점기에도 불구하고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를 통해 주체적으로 기초를 닦았다고 본다. 
그리하여 이후의 진정한 우리 역사가는 신채호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역사를 보아온 것 아닌가.

(2020년 3월 15일)

***

1. [조선상고사], 신채호, <일신서적>, 1988.
2.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김용만, <바다>, 2003.
3. [삼국사기],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2 세트 - 전2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대한 탐험가들'인가, '제국주의 첨병들'인가
- [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김영종 옮김, <사계절>, 2000.


"예수가 태어나기 1세기 전, (중국 한무제 시기) 장건이라는 이름의 모험심 많은 중국의 한 젊은이가 비밀 임무를 띠고 당시로서는 멀고도 신비스러운 서역으로 출발하였다. 비록 그의 목적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은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여행이 되었다. 그 까닭은 중국이 유럽을 발견하고 또 실트로드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여행가'는 황제로부터 대단히 명예로운 벼슬을 하사받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중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길을 처음으로 개척한 셈이었고, 이는 당시 두 강대국인 중국과 로마를 잇는 결과를 낳았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1장. 실크로드의 성쇠>

돈황 막고굴은 중국 서쪽 장안을 지나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 사이에 있는 '천불동'으로 유명한데, 중국 문화의 다양성을 꽃피운 4~5세기 '5호16국 시대'에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북위, 전진 등의 저, 강, 선비족 소수민족 정권부터 '혼혈정권'인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지며 수많은 석굴을 만들어 왔다고 한다. 역시 소수민족들의 활발한 교류와 문화적 유연성으로 동서 문화가 접목되는 지점이다. 또한 '제국'의 역사가 끼어들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당시의 '제국'은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레닌, [제국주의론], 1916.)"로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가 경쟁적으로 식민지 쟁탈을 시작하던 그 시기의 특정 체제였다.

돈황 막고굴에서 수많은 고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북방의 차르 제국 러시아가 제일 먼저 들었고 지질학자 오브루체프를 보내 돈황 고문서를 발견한중국인 왕원록 도사를 통해 일부 입수하지만 그 가치를 몰랐다. 지질학자이니 당연히 몰랐을 것인데, 당시 식민지 영토 확장이 주목표인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지도의 구체적 확정을 위해 지리학자, 지질학자, 지도제작자를 오지로 파견했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 탐험의 선구자는 스웨덴 출신 지리학자 스벤 헤딘이다. 1899년에 헤딘은 중국 고대국경도시였다가 이민족에게 넘어간 도시 '누란'을 최초로 발견한 유럽 최초의 '제국주의' 탐험가였다. 고대 불교 유적과 당시 사람들의 기록 등 소중한 유물들을 발견했음은 물론이고 왜소한 체구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가차없이 탐험에 도전하는 불굴의 의지는 과연 최고였다고 칭송받지만, 정치적으로는 결국 독일 제국주의 편에 선 '제국주의자'였다. 스벤 헤딘은 유럽 제국주의 탐험가의 시조다.


"일찍이 헝가리 지리학자 로치 라요시한테서 돈황의 장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스타인은, 그곳을 발굴하거나 걸작의 벽화를 뜯어올 계획이 없었던 당시에도, 거기에 가보는 것이 오랫동안의 꿈이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2장. 돈황 - 숨겨진 고대의 서고>

이제 '제국주의' 국가들은 지리학자들을 철수시켰고, '동양학자'들을 파견한다. 독일의 폰 르코크, 영국의 오렐 스타인이 대표적인데, 아주 우연한 계기로 돈황에 먼저 들어간 사람은 스타인이다. 헝가리 출신 동양학자 스타인은 헝가리어, 영어, 독어, 불어는물론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산스크리트어에 능했으나 정작 중국어를 몰라 왕도사와 돈황 고문서를 거래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도 수차례 원정을 통해 많은 고문서를 영국으로 가져갔는데 헝가리 출신인 스타인의 조상이 흉노를 연상시키는 훈족이라 동방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고도 도 한다.


"촛불 하나만을 밝힌 채, 스타인이 필사본을 가져감으로써 생긴 비좁은 공간에 쪼그리고 앉아, 펠리오는 먼지투성이의 꾸러미들을 뒤지면서 길고 숨막히는 3주일이란 시간을 보냈다... '처음 열흘 간은 하루에 거의 1천 개의 두루마리를 공략했다...' 그는 자신을 경주용 차와 같은 속도로 달리는 서지학자라고...비유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3장. 펠리오 - 품위 있게 적을 만드는 기술>

결과는 그렇지 않았으나, 스타인이 돈황에 처음 갈 때만 해도 유물 약탈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 서지학자 폴 펠리오는 대놓고 고문서 유출을 위해 그곳으로 갔다. 사마천의 [사기]를 처음으로 불어로 번역한 에두아르 샤반의 제자이며 13개 국어에 능하고 특히 동남아와 북경에도 거주하면서  중국어도 능통한 데다가 사교성도 좋아 [실크로드의 악마]에서 '품위 있게 적을 만드는 기술'을 지녔다는 천재학자. 이전 선배들이 고문서들을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면, 이 프랑스 천재 서지학자는 지식을 토대로 고문서들을 분류하여 영리하게 유럽으로 들여와 전시회까지 연다. 불세출의 천재학자 또한 업적 욕심에 '제국주의'를 비껴가지 못한다.


"... (랭던) 워너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벽화가 있는 동굴로 들어갔고, 먹을 때와 잠잘 때만 빼놓고 거기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것들을 처음 본 순간, 내가 왜 대양과 두 대륙을 건너고, 또 몇 달 동안을 수레 옆에서 지친 몸을 끌고 걸어왔는가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연대를비정하고, 교수들의 기존 이론을 보기 좋게 논박하고, 미술사의 영향들을 발견하기 위해 온 내가, 그저두 손을 호주머니에 쑤셔넣은 채 석굴 사원의 한복판에 서서 생각을 가다듬어 보려고 애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5장. 랭던 워너가 위업에 도전하다>

펠리오가 왕도사를 속여 몇 차례 수탈해 간 다음, 미국에서는 동양미술사학자 랭던 워너가 온다. 그는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모티브가 된 탐험가로 하버드대학 박물관 소속이었다. 그가 목숨걸고 돈황까지 온 이유는 불교벽화와 조상들을 훔쳐가기 위해서였다. 불굴의 이 미국인은 고대 예술품들을 닥치는 대로 미국으로 반출했다. 결국 워너는 중국 정부로부터 추방되었고 폴 펠리오와 '합동 약탈작전'까지 계획하는 등 여러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중국에 발을 들이지 못한다. 영화의 존스 박사와는 달리 정의나 양심 따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모두 세 차례에 걸쳐 탐험대를 파견한 오타니 백작은 '정토진종' 본파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부친의 죽음으로 물려받은... 종파의 지도자로 취임하기 위해 귀국할 때까지 그는 장시간 유럽 등지를 여행하며 보냈다... 그는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회원이었다... 종무를 맡은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자기가 중앙아시아에 파견한 탐험대들의 사진과 간략한 기사를 학회에 보냈다... (오타니의) 두 권의 정치적 문제에 관한 저작-하나는 중국, 또 하나는 만주에 관한 것-이 있다... 물론 이것은 스파이 우두머리로서 정교한위장이었을 수도 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4장. 실크로드의 스파이들>

랭던 워너의 약탈 이후 중국 정부는 돈황을 봉쇄하고 중국 화가 장대천, 상서홍, 조선 출신 화가 한락연 등이 돈황벽화 보존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는데, 1900년대 초반에 독일과 영국 등 유럽 '제국주의'가 거세게 밀려올 때 타클라마칸 주변에 정체모를 '일본 스파이들'이 암약하고 있었다. 이들 '스파이들'의 대장은 오타니 고즈이. 일본 불교의 한 일파인 서본원사 정토진종 본파의 세습교주로 권세가인 공작의 딸과 혼인하여 백작이 되었으며 수 차례 '오타니 탐험대'를 중앙아시아로 파견하여 파산까지 아르러 '오타나 컬렉션'은 뿔뿔이 흩어진다. 학자도 아닌 다치바나 즈이초라는 젊은 승려를 탐험대장으로 한 원정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눈에 신비롭고 의아했을 것이며 결국 피터 홉커크는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일본 '오타니 탐험대'를 '실크로드의 스파이들'이라고 규정한다. 동양을 배척하는 서양 '제국주의자'의 시각일 수도 있겠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공략을 위한 첩자질은 명확해 보인다.
유럽 '제국주의'들은 '악마'였고, 일본 '제국주의'는 '스파이'에 불과했다.


19~20세기에 유럽 '제국주의'가 탐험가들을 파견했다면, 고대에는 중국의 한나라의 탐험가 장건이 있었고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있었으며 우리 신라 승려 혜초가 있었다. 장건은 한무제에게 서역의 문화와 흉노의 기마력에 맞서는 '천마'의 군사력을 전했고, 현장은 '서유기'의 '삼장법사'로서 불교경전 원본을 전하면서 오렐 스타인이 가장 존경하는 탐험가였으며, 신라의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으로 중국의 승려들을 거꾸려뜨렸다.

피터 홉커크는 서양 탐험가들의 흥미로운 기록의 제목을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 지었다. 그러나 이는 동양인의 입장에서 부른 '악마들(Foreign Devils)'을 번역한 것일 뿐, '제국주의'의 '악마성'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만약 서양의 약탈이 없었으면 과연 방치되어 있던 그 유물들이 제대로 보존되었을 것인가'라는 우문은 '역사의 가정'이라는 부질없는 전제를 깔고 있으니, '만일 박정희 아니었으면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했을까' 같은 하나마나 한 질문에 불과하다.
선구적 탐험가들과 학자들의 불굴의 정신과 신비한 행적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결국, 식민지 분할전쟁 과정에서 '문화약탈'이라는 20세기초 국가독점자본주의로서 '제국주의'의 '악마성'만이 짙게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2020년 3월 14일)

***

1. [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김영종 옮김, <사계절>, 2000.
2.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중국편 1,2], 유홍준, <창비>, 2019.
3. [돈황 이야기], 마쓰오카 유즈루, 박세욱/조경숙 옮김, <연암서가>, 20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크로드의 악마들 - 중앙아시아 탐험의 역사
피터 홉커크 지음, 김영종 옮김 / 사계절 / 200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대한 탐험가들'인가, '제국주의 첨병들'인가
- [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김영종 옮김, <사계절>, 2000.


"예수가 태어나기 1세기 전, (중국 한무제 시기) 장건이라는 이름의 모험심 많은 중국의 한 젊은이가 비밀 임무를 띠고 당시로서는 멀고도 신비스러운 서역으로 출발하였다. 비록 그의 목적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은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여행이 되었다. 그 까닭은 중국이 유럽을 발견하고 또 실트로드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여행가'는 황제로부터 대단히 명예로운 벼슬을 하사받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중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길을 처음으로 개척한 셈이었고, 이는 당시 두 강대국인 중국과 로마를 잇는 결과를 낳았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1장. 실크로드의 성쇠>

돈황 막고굴은 중국 서쪽 장안을 지나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 사이에 있는 '천불동'으로 유명한데, 중국 문화의 다양성을 꽃피운 4~5세기 '5호16국 시대'에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북위, 전진 등의 저, 강, 선비족 소수민족 정권부터 '혼혈정권'인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지며 수많은 석굴을 만들어 왔다고 한다. 역시 소수민족들의 활발한 교류와 문화적 유연성으로 동서 문화가 접목되는 지점이다. 또한 '제국'의 역사가 끼어들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당시의 '제국'은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레닌, [제국주의론], 1916.)"로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가 경쟁적으로 식민지 쟁탈을 시작하던 그 시기의 특정 체제였다.

돈황 막고굴에서 수많은 고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북방의 차르 제국 러시아가 제일 먼저 들었고 지질학자 오브루체프를 보내 돈황 고문서를 발견한중국인 왕원록 도사를 통해 일부 입수하지만 그 가치를 몰랐다. 지질학자이니 당연히 몰랐을 것인데, 당시 식민지 영토 확장이 주목표인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지도의 구체적 확정을 위해 지리학자, 지질학자, 지도제작자를 오지로 파견했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 탐험의 선구자는 스웨덴 출신 지리학자 스벤 헤딘이다. 1899년에 헤딘은 중국 고대국경도시였다가 이민족에게 넘어간 도시 '누란'을 최초로 발견한 유럽 최초의 '제국주의' 탐험가였다. 고대 불교 유적과 당시 사람들의 기록 등 소중한 유물들을 발견했음은 물론이고 왜소한 체구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가차없이 탐험에 도전하는 불굴의 의지는 과연 최고였다고 칭송받지만, 정치적으로는 결국 독일 제국주의 편에 선 '제국주의자'였다. 스벤 헤딘은 유럽 제국주의 탐험가의 시조다.


"일찍이 헝가리 지리학자 로치 라요시한테서 돈황의 장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스타인은, 그곳을 발굴하거나 걸작의 벽화를 뜯어올 계획이 없었던 당시에도, 거기에 가보는 것이 오랫동안의 꿈이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2장. 돈황 - 숨겨진 고대의 서고>

이제 '제국주의' 국가들은 지리학자들을 철수시켰고, '동양학자'들을 파견한다. 독일의 폰 르코크, 영국의 오렐 스타인이 대표적인데, 아주 우연한 계기로 돈황에 먼저 들어간 사람은 스타인이다. 헝가리 출신 동양학자 스타인은 헝가리어, 영어, 독어, 불어는물론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산스크리트어에 능했으나 정작 중국어를 몰라 왕도사와 돈황 고문서를 거래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도 수차례 원정을 통해 많은 고문서를 영국으로 가져갔는데 헝가리 출신인 스타인의 조상이 흉노를 연상시키는 훈족이라 동방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고도 도 한다.


"촛불 하나만을 밝힌 채, 스타인이 필사본을 가져감으로써 생긴 비좁은 공간에 쪼그리고 앉아, 펠리오는 먼지투성이의 꾸러미들을 뒤지면서 길고 숨막히는 3주일이란 시간을 보냈다... '처음 열흘 간은 하루에 거의 1천 개의 두루마리를 공략했다...' 그는 자신을 경주용 차와 같은 속도로 달리는 서지학자라고...비유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3장. 펠리오 - 품위 있게 적을 만드는 기술>

결과는 그렇지 않았으나, 스타인이 돈황에 처음 갈 때만 해도 유물 약탈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 서지학자 폴 펠리오는 대놓고 고문서 유출을 위해 그곳으로 갔다. 사마천의 [사기]를 처음으로 불어로 번역한 에두아르 샤반의 제자이며 13개 국어에 능하고 특히 동남아와 북경에도 거주하면서  중국어도 능통한 데다가 사교성도 좋아 [실크로드의 악마]에서 '품위 있게 적을 만드는 기술'을 지녔다는 천재학자. 이전 선배들이 고문서들을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면, 이 프랑스 천재 서지학자는 지식을 토대로 고문서들을 분류하여 영리하게 유럽으로 들여와 전시회까지 연다. 불세출의 천재학자 또한 업적 욕심에 '제국주의'를 비껴가지 못한다.


"... (랭던) 워너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벽화가 있는 동굴로 들어갔고, 먹을 때와 잠잘 때만 빼놓고 거기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것들을 처음 본 순간, 내가 왜 대양과 두 대륙을 건너고, 또 몇 달 동안을 수레 옆에서 지친 몸을 끌고 걸어왔는가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연대를비정하고, 교수들의 기존 이론을 보기 좋게 논박하고, 미술사의 영향들을 발견하기 위해 온 내가, 그저두 손을 호주머니에 쑤셔넣은 채 석굴 사원의 한복판에 서서 생각을 가다듬어 보려고 애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5장. 랭던 워너가 위업에 도전하다>

펠리오가 왕도사를 속여 몇 차례 수탈해 간 다음, 미국에서는 동양미술사학자 랭던 워너가 온다. 그는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모티브가 된 탐험가로 하버드대학 박물관 소속이었다. 그가 목숨걸고 돈황까지 온 이유는 불교벽화와 조상들을 훔쳐가기 위해서였다. 불굴의 이 미국인은 고대 예술품들을 닥치는 대로 미국으로 반출했다. 결국 워너는 중국 정부로부터 추방되었고 폴 펠리오와 '합동 약탈작전'까지 계획하는 등 여러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중국에 발을 들이지 못한다. 영화의 존스 박사와는 달리 정의나 양심 따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모두 세 차례에 걸쳐 탐험대를 파견한 오타니 백작은 '정토진종' 본파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부친의 죽음으로 물려받은... 종파의 지도자로 취임하기 위해 귀국할 때까지 그는 장시간 유럽 등지를 여행하며 보냈다... 그는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회원이었다... 종무를 맡은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자기가 중앙아시아에 파견한 탐험대들의 사진과 간략한 기사를 학회에 보냈다... (오타니의) 두 권의 정치적 문제에 관한 저작-하나는 중국, 또 하나는 만주에 관한 것-이 있다... 물론 이것은 스파이 우두머리로서 정교한위장이었을 수도 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14장. 실크로드의 스파이들>

랭던 워너의 약탈 이후 중국 정부는 돈황을 봉쇄하고 중국 화가 장대천, 상서홍, 조선 출신 화가 한락연 등이 돈황벽화 보존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는데, 1900년대 초반에 독일과 영국 등 유럽 '제국주의'가 거세게 밀려올 때 타클라마칸 주변에 정체모를 '일본 스파이들'이 암약하고 있었다. 이들 '스파이들'의 대장은 오타니 고즈이. 일본 불교의 한 일파인 서본원사 정토진종 본파의 세습교주로 권세가인 공작의 딸과 혼인하여 백작이 되었으며 수 차례 '오타니 탐험대'를 중앙아시아로 파견하여 파산까지 아르러 '오타나 컬렉션'은 뿔뿔이 흩어진다. 학자도 아닌 다치바나 즈이초라는 젊은 승려를 탐험대장으로 한 원정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눈에 신비롭고 의아했을 것이며 결국 피터 홉커크는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일본 '오타니 탐험대'를 '실크로드의 스파이들'이라고 규정한다. 동양을 배척하는 서양 '제국주의자'의 시각일 수도 있겠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공략을 위한 첩자질은 명확해 보인다.
유럽 '제국주의'들은 '악마'였고, 일본 '제국주의'는 '스파이'에 불과했다.


19~20세기에 유럽 '제국주의'가 탐험가들을 파견했다면, 고대에는 중국의 한나라의 탐험가 장건이 있었고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있었으며 우리 신라 승려 혜초가 있었다. 장건은 한무제에게 서역의 문화와 흉노의 기마력에 맞서는 '천마'의 군사력을 전했고, 현장은 '서유기'의 '삼장법사'로서 불교경전 원본을 전하면서 오렐 스타인이 가장 존경하는 탐험가였으며, 신라의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으로 중국의 승려들을 거꾸려뜨렸다.

피터 홉커크는 서양 탐험가들의 흥미로운 기록의 제목을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 지었다. 그러나 이는 동양인의 입장에서 부른 '악마들(Foreign Devils)'을 번역한 것일 뿐, '제국주의'의 '악마성'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만약 서양의 약탈이 없었으면 과연 방치되어 있던 그 유물들이 제대로 보존되었을 것인가'라는 우문은 '역사의 가정'이라는 부질없는 전제를 깔고 있으니, '만일 박정희 아니었으면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했을까' 같은 하나마나 한 질문에 불과하다.
선구적 탐험가들과 학자들의 불굴의 정신과 신비한 행적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결국, 식민지 분할전쟁 과정에서 '문화약탈'이라는 20세기초 국가독점자본주의로서 '제국주의'의 '악마성'만이 짙게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2020년 3월 14일)

***

1. [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김영종 옮김, <사계절>, 2000.
2.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중국편 1,2], 유홍준, <창비>, 2019.
3. [돈황 이야기], 마쓰오카 유즈루, 박세욱/조경숙 옮김, <연암서가>, 20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국지 해제
장정일 외 지음 / 김영사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세상에 '중심'이란 없다 : '중(中)'국 아닌 중국 이야기
-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김선자 옮김, <메디치>, 2017.


"그(아틸라)가 장악한 흉노제국은 흉노 역사상 최후의, 그리고 가장 찬란했던 한 장을 써내려 갔다. 그는 '이로우면 나아가고 불리하면 물러난다. 도망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는 군사 책략을 발전시켰다. 수십만 군대를 지휘해 사방을 약탈했으며, 그 족적이 유럽 전체에 미쳤다. 441년, 아틸라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해 비잔티움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다가와 해마다 2,100만 파운드의 황금을 바치겠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그 뿐만 아니라 비잔티움제국은 발칸반도 대부분을 흉노에 양도해야 했다. 447년, 아틸라는 도나우강 유역의 교역시장에서 꼬투리를 잡아 대군을 이끌고 비잔티움제국으로 쳐들어갔다. 70여 개의 성를 공격해 무너뜨렸고, 비잔티움제국의 많은 지역을 유린했다... 이때부터 비잔티움 사람들은 아틸라를 '신의 채찍'이라고 불렀다."
-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1장. 흉노>


중국(中國)은 글자 그대로 모든 국가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아시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라 또는 민족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일텐데, 중국의 '동북공정'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오래전부터 '서북공정'으로 진행되어 오는 오만한 민족통합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동북공정'에는 우리 한반도의 오래된 한민족이 고조선 연구로 또는 '요동'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서 연구하는 '요동사'의 작업 등으로 대치하고 있으니 차치하고 '서북공정'에 대한 대항논리로 중국 서방의 '오랑캐', 즉 서방의 소수민족 역사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수많은 '오랑캐'의 시작은 중국의 기원전 6~8세기 춘추전국시대부터 등장하는 북방의 집단 '흉노'다. 

아득한 시절, '동이족'의 '용산문화'인 은나라를 물리치고 중원을 장악한 서방의 '앙소문화' 주나라는 수도를 서안(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며 '동주 열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었고 자신들을 중심으로 서북쪽의 '견융족'을 견제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통해 국력을 강화시켜 결국 최초의 통일을 이룬 나라가 바로 진시황의 진나라다. 사실 진나라는 '오랑캐' 견웅족'과 혼혈된 '오랑캐' 그 자체였겠지만 구분은 모호하고 중국이 통일된 후로는 농경이 가능한 연 강우량 15인치선을 기준(만리장성)으로 '중국인'과 북방 민족의 큰 전선을 긋게 된다.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그 북방민족을 중국인들은 '흉노(匈奴)'라 불렀다. '흉노', 즉 '흉측한 노예'라는 명칭을 북방인 스스로 불렀을 리는 없으나, 흉노의 왕은 '선우(單于)'라 불렀는데 우리의 시조 '단군'의 유래가 '선우'와 비슷한 한자인 '단간(單干)'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로 중국 문화와 크게 구분되는 북방의 거대한 역사문화적 공동체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도 된다.

유목의 흉노는 전국시대 진의 서북부와 연의 동북부를 자주 침범하여 농경 생산물을 약탈하고 도망가기를 반복하였는데 말이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은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수확의 계절보다 건강한말을 타고 흉노족이 노략하러 내려오는 무시무시한계절이었다. 


"'중국'이라는 말의 최초 기록은 (주나라) 성왕이 낙읍(뤄양/낙양)을 건설한 것과 관계가 있다... 성왕은 (주)문왕이 천명을 받은 일과 무왕이 상(은)나라를 멸망시킨 일을 회고하면서, 무왕이 하늘에 고하길 '제가 이 중국에 정착해 여기서 백성을 다스리겠습니다'라고 했던 말을 언급한다... '이 중국에 정착하다'라는 무왕의 말에 언급된 중국이 바로 '중국'이라는 용어의 최초 기록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된 중국은 국가 개념이 아니라 '천하의 중심'이라는 의미이며 낙읍, 즉 뤄양(낙양)이 바로 그곳에 해당한다."
-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2장. 뤄양>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중국의 역사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이 건설되면 다른 소수민족들은 약화되고, 제국이 분열하면 소수민족들이 강성하여 대륙을 분할하는 과정이 반복되어 왔다. 삼국지의 무대 후한 시기 잠시 집권한 동탁과 여포도 사실 서쪽 오랑캐인 강족 일파로 추정되는데 서방 양주 출신 동탁이 한나라 수도 낙양을 불태우고 서쪽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한 일, 조조가 원소를 소탕하며 원소를 도운 동북의 오환족을 멸망시킨 이야기, 사마염의 진나라가 '팔왕의 난'으로 무너지는 과정에서 전개된 '5호 16국' 시대, 즉 흉노, 갈, 선비, 저, 강족의 다섯 '호(胡;오랑캐)'의 16개 단명정권 시대를 통해 중국의 문화가 더욱 다양하고 찬란하게 채워졌음은 이미 다수설이다. 유방의 한나라 또는 사마염의 진나라를 끝으로 이후 중국의 통일정권은 모두 이민족(선비족의 수나라)또는 그 혼혈정권(선비족과 한족 혼혈 당나라)이었으니 '순수한 중국 민족'은 없다.

최초의 '오랑캐' 흉노족은 한무제에 의해 서방으로 더 밀려나며 5세기경 '신의 채찍' 아틸라는 서쪽 유럽의 비잔티움제국(동로마)은 물론 서로마까지 진출하는데, '신의 채찍'은 기독교적 프랑크인(동고트족 등의 유럽인)들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인간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죄를 많이 지은 자신들에게 신이 채찍을 내려 교훈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지은 별칭이었다. 말을 타고 약탈하고 도망가다가 갑자기 말 위에서 등을 돌려 활을 쏘아 반격하는 유목인의 기동전은 이후 몽골족 칭기즈칸 대제국의 기본동력이었고,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요동의 '예맥족' 고구려인의 모습과도 같다.

동북쪽의 '오랑캐', '동호족'은 이후 민족과 문화의 활발한 결합과 확장을 통해 오환족, 선비족, 거란족 등으로 대륙을 분할했고 아예 '숙신족' 여진은 금나라는 물론 청나라(후금)로서 중국 황제국의 마지막 역사를 장식했다.
서쪽의 '오랑캐', '흉노족'은 유라시아와 중근동 각 지역의 민족인 스키타이족 등과 섞이며 에프탈족, 마자르족 등의 모습으로 유라시아와 동유럽을 분할했다. 헝가리 제국을 세운 '훈족'의 조상이 '흉노족'이라는 역사적 증거는 찾기 힘들다지만, '중국' 중심에서 밀려난 아득한 거대 민족들이 전 세계를 유목하듯 누비며 열어젖힌 다양한 문화의 힘은 세계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피엔스]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가 "인류 역사에서 유일하게 효율적인 체제"로 꼽는 '제국'의 역사를 강조하며 "매번 전투에서 지면서도 전쟁에서 결국 이기면서 버티고 유지하는" '제국'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지만, '제국'이 기록한 역사에서 밀려나고 지도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소수 민족들은 알렉산더나 칭기즈칸, 나폴레옹 못지 않게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다양하게 하는 윤활유였다.

그 민족 자체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여 스스로의 이름도 없이 명멸해 가며 중국 역사서를 통해 이름지어진 수많은 민족들의 역사는, 오만한 '중심'으로서의  '중(中)'국 아닌 중국 이야기를 펼치면서 '전통 중국사'를 '절반의 중국사'로 만든다.

우리 자체의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며 지금껏 잘 살아온 우리 민족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역사를 배운 식민사관의 대부 이병도 무리의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역시,
세상에는 '중심'이란 없다.

(2020년 3월 13일)

***

1.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김선자 옮김, <메디치>, 2017.
2.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도현신, <서해문집>, 2013.
3.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4. [삼국지 해제], 장정일/김운회/서동훈, <김영사>, 20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中)'국 아닌 중국 이야기
-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김선자 옮김, <메디치>, 2017.


"그(아틸라)가 장악한 흉노제국은 흉노 역사상 최후의, 그리고 가장 찬란했던 한 장을 써내려 갔다. 그는 '이로우면 나아가고 불리하면 물러난다. 도망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는 군사 책략을 발전시켰다. 수십만 군대를 지휘해 사방을 약탈했으며, 그 족적이 유럽 전체에 미쳤다. 441년, 아틸라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해 비잔티움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다가와 해마다 2,100만 파운드의 황금을 바치겠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그 뿐만 아니라 비잔티움제국은 발칸반도 대부분을 흉노에 양도해야 했다. 447년, 아틸라는 도나우강 유역의 교역시장에서 꼬투리를 잡아 대군을 이끌고 비잔티움제국으로 쳐들어갔다. 70여 개의 성를 공격해 무너뜨렸고, 비잔티움제국의 많은 지역을 유린했다... 이때부터 비잔티움 사람들은 아틸라를 '신의 채찍'이라고 불렀다."
-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1장. 흉노>


중국(中國)은 글자 그대로 모든 국가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아시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라 또는 민족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일텐데, 중국의 '동북공정'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오래전부터 '서북공정'으로 진행되어 오는 오만한 민족통합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동북공정'에는 우리 한반도의 오래된 한민족이 고조선 연구로 또는 '요동'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서 연구하는 '요동사'의 작업 등으로 대치하고 있으니 차치하고 '서북공정'에 대한 대항논리로 중국 서방의 '오랑캐', 즉 서방의 소수민족 역사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수많은 '오랑캐'의 시작은 중국의 기원전 6~8세기 춘추전국시대부터 등장하는 북방의 집단 '흉노'다. 

아득한 시절, '동이족'의 '용산문화'인 은나라를 물리치고 중원을 장악한 서방의 '앙소문화' 주나라는 수도를 서안(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며 '동주 열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었고 자신들을 중심으로 서북쪽의 '견융족'을 견제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통해 국력을 강화시켜 결국 최초의 통일을 이룬 나라가 바로 진시황의 진나라다. 사실 진나라는 '오랑캐' 견웅족'과 혼혈된 '오랑캐' 그 자체였겠지만 구분은 모호하고 중국이 통일된 후로는 농경이 가능한 연 강우량 15인치선을 기준(만리장성)으로 '중국인'과 북방 민족의 큰 전선을 긋게 된다.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그 북방민족을 중국인들은 '흉노(匈奴)'라 불렀다. '흉노', 즉 '흉측한 노예'라는 명칭을 북방인 스스로 불렀을 리는 없으나, 흉노의 왕은 '선우(單于)'라 불렀는데 우리의 시조 '단군'의 유래가 '선우'와 비슷한 한자인 '단간(單干)'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로 중국 문화와 크게 구분되는 북방의 거대한 역사문화적 공동체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도 된다.

유목의 흉노는 전국시대 진의 서북부와 연의 동북부를 자주 침범하여 농경 생산물을 약탈하고 도망가기를 반복하였는데 말이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은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수확의 계절보다 건강한말을 타고 흉노족이 노략하러 내려오는 무시무시한계절이었다. 


"'중국'이라는 말의 최초 기록은 (주나라) 성왕이 낙읍(뤄양/낙양)을 건설한 것과 관계가 있다... 성왕은 (주)문왕이 천명을 받은 일과 무왕이 상(은)나라를 멸망시킨 일을 회고하면서, 무왕이 하늘에 고하길 '제가 이 중국에 정착해 여기서 백성을 다스리겠습니다'라고 했던 말을 언급한다... '이 중국에 정착하다'라는 무왕의 말에 언급된 중국이 바로 '중국'이라는 용어의 최초 기록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된 중국은 국가 개념이 아니라 '천하의 중심'이라는 의미이며 낙읍, 즉 뤄양(낙양)이 바로 그곳에 해당한다."
-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2장. 뤄양>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중국의 역사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이 건설되면 다른 소수민족들은 약화되고, 제국이 분열하면 소수민족들이 강성하여 대륙을 분할하는 과정이 반복되어 왔다. 삼국지의 무대 후한 시기 잠시 집권한 동탁과 여포도 사실 서쪽 오랑캐인 강족 일파로 추정되는데 서방 양주 출신 동탁이 한나라 수도 낙양을 불태우고 서쪽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한 일, 조조가 원소를 소탕하며 원소를 도운 동북의 오환족을 멸망시킨 이야기, 사마염의 진나라가 '팔왕의 난'으로 무너지는 과정에서 전개된 '5호 16국' 시대, 즉 흉노, 갈, 선비, 저, 강족의 다섯 '호(胡;오랑캐)'의 16개 단명정권 시대를 통해 중국의 문화가 더욱 다양하고 찬란하게 채워졌음은 이미 다수설이다. 유방의 한나라 또는 사마염의 진나라를 끝으로 이후 중국의 통일정권은 모두 이민족(선비족의 수나라)또는 그 혼혈정권(선비족과 한족 혼혈 당나라)이었으니 '순수한 중국 민족'은 없다.

최초의 '오랑캐' 흉노족은 한무제에 의해 서방으로 더 밀려나며 5세기경 '신의 채찍' 아틸라는 서쪽 유럽의 비잔티움제국(동로마)은 물론 서로마까지 진출하는데, '신의 채찍'은 기독교적 프랑크인(동고트족 등의 유럽인)들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인간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죄를 많이 지은 자신들에게 신이 채찍을 내려 교훈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지은 별칭이었다. 말을 타고 약탈하고 도망가다가 갑자기 말 위에서 등을 돌려 활을 쏘아 반격하는 유목인의 기동전은 이후 몽골족 칭기즈칸 대제국의 기본동력이었고,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요동의 '예맥족' 고구려인의 모습과도 같다.

동북쪽의 '오랑캐', '동호족'은 이후 민족과 문화의 활발한 결합과 확장을 통해 오환족, 선비족, 거란족 등으로 대륙을 분할했고 아예 '숙신족' 여진은 금나라는 물론 청나라(후금)로서 중국 황제국의 마지막 역사를 장식했다.
서쪽의 '오랑캐', '흉노족'은 유라시아와 중근동 각 지역의 민족인 스키타이족 등과 섞이며 에프탈족, 마자르족 등의 모습으로 유라시아와 동유럽을 분할했다. 헝가리 제국을 세운 '훈족'의 조상이 '흉노족'이라는 역사적 증거는 찾기 힘들다지만, '중국' 중심에서 밀려난 아득한 거대 민족들이 전 세계를 유목하듯 누비며 열어젖힌 다양한 문화의 힘은 세계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피엔스]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가 "인류 역사에서 유일하게 효율적인 체제"로 꼽는 '제국'의 역사를 강조하며 "매번 전투에서 지면서도 전쟁에서 결국 이기면서 버티고 유지하는" '제국'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지만, '제국'이 기록한 역사에서 밀려나고 지도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소수 민족들은 알렉산더나 칭기즈칸, 나폴레옹 못지 않게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다양하게 하는 윤활유였다.

그 민족 자체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여 스스로의 이름도 없이 명멸해 가며 중국 역사서를 통해 이름지어진 수많은 민족들의 역사는, 오만한 '중심'으로서의  '중(中)'국 아닌 중국 이야기를 펼치면서 '전통 중국사'를 '절반의 중국사'로 만든다.

우리 자체의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며 지금껏 잘 살아온 우리 민족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역사를 배운 식민사관의 대부 이병도 무리의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역시,
세상에는 '중심'이란 없다.

(2020년 3월 13일)

***

1. [절반의 중국사], 가오훙레이, 김선자 옮김, <메디치>, 2017.
2.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도현신, <서해문집>, 2013.
3.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4. [삼국지 해제], 장정일/김운회/서동훈, <김영사>, 20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