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스탈린주의, 공동전선
레온 트로츠키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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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파시즘’이 준동하는 지금 , 다시 '공동전선'!
- 레온 트로츠키, [파시즘, 스탈린주의, 공동전선], 이수현 옮김, <책갈피>, 2019.

"파시즘은 두 가지 조건의 산물이다. 하나는 첨예한 사회적 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적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허약성이다.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허약성 자체는 두 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다. 하나는 사민당의 역사적 구실, 즉 사민당은 여전히 프롤레타리아의 대열 안에서 자본가계급의 유력한 대리인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공산당의 중간주의 지도부가 노동자들을 혁명의 깃발 아래 단결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 L. Trotsky, <독일:국제 정세의 열쇠>, [파시즘, 스탈린주의, 공동전선].

자유한국당의 기획적 망언과 광주 학살 치매골퍼 전두환의 '자서전' 등 '촛불혁명'으로 궁지에 몰린 극우 정치세력이 우리 민주주의 원천 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총공세를 시작했다. 시대에 '절망'한 '태극기부대'를 주력으로 하는 극우 '파시즘'이 준동하고 있다.
이명박근혜의 국정농단과 부정부패에 분노한 다수 민중들이 극우 정권을 몰아내고 혁명적 흐름에 편승한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나, 자본독재체제에서 대다수 민중들의 생활은 절망적 '헬조선'을 벗어나지 못한 '사회적 위기'와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꿀 혁명적 세력의 부재 혹은 '허약함'을 보면, 또한 현 민주정부가 '노동존중', '혁신적 포용국가' 등 일련의 사회민주주의적 수사를 붙인 정책을 내세우고 있지만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와 탄력적 노동시간제 개악, 경사노위 야합을 통해 '자본가계급의 유력한 대리인 구실'을 하고 있는 현 정세는 1930 ~ 1933년의 트로츠키가 규정한 '파시즘'이 득세하게 되는 바로 그 사회적 조건이기도 하다.

"파시즘의 역사적 구실... 파시즘은 프롤레타리아의 바로 위에 있는 계급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 대열로 전락하는 것을 늘 두려워하는 계급들이 들고 일어나게 만든다. 파시즘은 공식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금융자본의 돈으로 그들을 조직하고 무장시킨다. 그들을 이끌고 프롤레타리아 조직들을 혁명적 조직이든 보수적 조직이든 가리지 않고 박멸하려 한다.
파시즘은 보복, 무자비한 폭력, 경찰테러의 체제만은 아니다. 파시즘은 부르주아 사회내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요소들을 모두 뿌리뽑은 바탕위에 수립된 독특한 지배체제다."

- L. Trotsky,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같은책.

노동조건 개악은 물론 민주노총을 비롯한 일체의 민주적 노동자와 시민조직들을 '일베'와 '어버이' 등 중간계급(프티부르주아)을 금전지원 및 동원하여 박멸하려 했던 이명박근혜 정권은 엄연한 '파시즘' 정권이었다.
수많은 민중들이 '혁명적'으로 몰아낸 후 들어선 민주정부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고립된 극우정당인 자한당은 다시금 '파시스트'로서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이 미친 파시스트들이 '박근혜 사면'과 '5.18 망언'을 앞세우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동전선... 혁명적 변증법은 (스탈린주의적 관료적 최후통첩주의의) 그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이미 오래전에 제시했고, 아주 다양한 영역에서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 그것을 입증했다. 즉 권력장악을 위한 투쟁과 개혁을 위한 투쟁을 서로 연결시키고, 공산당의 완전한 독립성을 지키면서도 그 기구들을 활용하고, 의회연단에서 의회주의를 가차없이 비판하고, 개혁주의에 맞서 무자비하게 전쟁을 벌이면서도 부분적 투쟁들에서는 개혁주의자들과 실천적 협정을 맺었다."

- L. Trotsky,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같은책.

평생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와 '관료적 최후통첩주의', '교조적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초좌파주의'적 '국가자본주의'에 맞서 '소비에트 혁명'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다가 결국 스탈린에 의해 암살당한 트로츠키의 정세분석 문건이므로 이 책에서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은 가차없다.
그 중 '스탈린주의'의 가장 큰 오류는 당시 독일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하려 했던 독일 사민당도 '파시즘'과 쌍둥이라고 하면서 사민당을 지지하던 다수 노동세력을 이른바 '사회파시즘'으로 규정하고 '공동전선'을 펴지 못하도록 한 '초좌파주의'이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기획하던 '국제공산주의자'였던 트로츠키는 '혁명적 공산당'이 다음과 같은 '공동전선'을 적극 조직해야 한다고 강력 주장한다.

1. 소비에트유럽합중국 건설 : 정치경제적 모순이 첨예해진 독일이 당시 '국제정세의 열쇠'다.
2. '계급 대 계급(의 투쟁)' : 프롤레타리아 모든 조직들이 부르주아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에 참여해야 한다.
3. '공동전선'의 '실천적 강령' : 대중이 분명히 지켜보는 앞에서 조직들이 체결한 협정에 따라 결정된다. 모든 조직은 자신의 깃발과 지도부를 유지한다. 그러나 행동에서는 '공동전선'의 규율을 지킨다.
4. 소비에트 건설 : 프롤레타리아 '공동전선'의 최고형태인 노동자 소비에트를 선전하고 조직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5. 따로따로 행진하여 함께 공격 : 어떤 상황에서도 공산당은 완전한 조직적, 정치적 독립성을 항상 유지해야 한다.
6. 당(조직)내 민주주의 복원 : 프롤레타리아의 광범위한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7. 노동조합 정책방향의 급격한 전환 : 노조의 단결을 바탕으로 개혁주의 지도부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8. 노동통제 기관으로서 공장위원회와 산업경영참여기관으로서의 중앙집중적 소비에트 : 물가인하를 위한 투쟁과 임금삭감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이 투쟁을 노동자들이 생산을 통제하는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9. 혁명 : 사회주의로 변화시키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 L. Trotsky, 같은책.

트로츠키가 정세분석을 하던 1930 ~ 1933년의 독일은 이탈리아의 '파시즘의 방법론을 독일 신비주의 언어로 번역'한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나치당이 집권하기 전에 지지세를 늘리고 있던 시기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 프랑코 등으로 대표되던 유럽 집권 '파시즘'에 대항한 '일시적인 수세적 전술 이상의, 궁극적으로 패배를 공세로 전환시키기 위한, 민주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전략(에릭 홉스봄)'으로서의 1936년 이후 '인민전선' 이전에 트로츠키는 이미 '계급 대 계급'의 거대한 공세적 전선인 '공동전선' 전략을 강조한 것이다.

현재 우리 정세에서 극우 '파시즘'은 정신나간 일부 정치세력의 발악으로, 집권 가능성이 당장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독일의 정세를 분석하던 1933년까지 히틀러는 '오로지 성격이 매우 괴팍하고, 목소리가 남들보다 훨씬 크고, 지능은 평범하지만 자심감은 넘쳤기 때문'에 두각을 나타냈고 '모욕당한 1차대전 참전병사의 복수심 말고는 기존의 어떤 강령도 운동에 가져오지 않은' 상태로 집권 가능성이 역시 높지 않았다.
사민당도 포함된 개혁세력의 우유부단함과 단호해야 했던 혁명세력의 비겁함의 틈새에서 중간계급을 동원하여 자본가계급에 복무하게 만든 결과 히틀러는 '파시즘' 정권을 수립하고 대산업과 금융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 2차대전을 일으킬 수 있었다.

"파시즘 체제가 정치적으로 나아갈 길은 전쟁 아니면 혁명이다."

- L. Trotsky, <국가사회주의란 무엇인가?>, 같은책.

'파시즘'이 준동하는 지금, 민주정부를 지지하는 대다수 노동자들과 실천적으로 연대하는 '공동전선'을 통해 한국노총 같은 어용 지도부와 다수 노동자를 분리시키면서 사회체제에 절망한 중간계급을 노동자계급편에 서도록 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미친 '파시즘'의 종착지는 '전쟁'이고, '계급 대 계급'이 대결하는 거대한 '공동전선'의 목표는 '혁명'이다.

"공동전선 정책은 '계급 대 계급'의 투쟁이라는 근본적이고 냉엄한 현실에서 비롯한다."

- L. Trotsky, 같은책.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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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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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원근법'과 '인상주의'로 미술사를 돌아보다


"흔히 투시법은 서구 미술에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원근법이 유일한 투시법은 아니다. 파노프스키가 지적한 대로 그것은 가능한 많은 투시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원근법과는 다른 투시법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러시아 성상에 적용된 역원근법이다. 
르네상스 원근법은 움직이지 않는 시점을 전제한다. 러시아 성상에서는 시점이 움직인다. 이렇게 움직이는 시점으로 본 장면들을 하나로 통일시킬 때, 외려 가까이 있는 것일 수록 짧게 묘사되는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한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고전예술편>, 5장 '물구나무선 원근법'


'미학'을 대중적으로 풀어쓴 진중권이 '서양미술사'를 개괄한 대중서 4편이다. 
통시적으로 '고전예술편', '모더니즘편',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편'으로 '서양미술사'를 돌아봤던 기존 3편에 최근 '인상주의편'을 추가하였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나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등이 미술이나 예술 전문가들을 위한 학술고전 같은 성격이라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는 미술사를 처음 접하는 일반 대중들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미술의 역사이다 보니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있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두 가지 테마는 '원근법'과 '인상주의'다.

2차원 평면에 잠겨있던 고대와 중세의 그림에 3차원적 혁명을 불러온 것이 르네상스의 원근법이다. 진중권은 이 혁명이 하나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는 '고전적 원근법'에 불과하며, 실제 과학적인 사실은 여러개의 다양한 시선으로 대상을 보는 것으로서 '러시아의 역원근법'을 거쳐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알려진 폴 세잔의 '체험된 원근법'으로 풀어낸다.
즉, 우리의 안구와 지각을 통해 보이는 사물이나 대상은 하나의 고정된 시선이 아닌 다양한 시선으로 현상한다는 것이다.

미술사 또한 인류 역사처럼 '부정의 부정', 끊임없는 변증법적 혁명의 과정이다.
이런 미술사를 관통하는 첫번째 테마가 바로 '원근법'인 것이다.

'고전예술편'은 파노프스키, 뵐플린 같은 저명한 미술비평가들의 논문을 한편 한편 소개하는 방식으로 모더니즘 이전까지를 정리한다.
유시민도 올해 신작 [역사의 역사]에서 헤로도토스, 사마천, 마르크스, 카, 박은식과 신채호,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아랍 역사가 이븐 할둔까지의 역사서를 소개하면서 비슷한 서술방식를 취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서술방식이 좋아 진중권의 4편 중 ‘고전예술편’을 가장 추천한다.

역사도 그렇지만 미술사라는 것이 갖가지 '예술사조'로 도식화될 수 없다. 곰브리치나 하우저도, 진중권은 특히 그러한 도식화를 경계하고 있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전문분야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런 도식화가 불가피하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주로 '사실주의(또는 ‘리얼리즘’)를, 곰브리치는 '모더니즘'을, 하우저는 '낭만주의'를 분명하게 지지하는데, 진중권이 미술사를 읽는 두번째 테마는 '인상주의'다.

과학과 산업의 혁명적 발전을 배경으로 기존 '고전주의'를 부정한 쿠르베의 '사실주의'로부터 시작하여 진중권은 대상의 객관적 묘사에 복무하는 '사실주의'보다는 인간의 지각에 묘사된 사물을 그린 '인상주의'에 주목한다.

특히, 진중권은 '인상주의'를 넘어서 현대미술을 시작하는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폴 세잔에게서 현대미술의 '혁명'을 본다.

고전적 미술로부터 "색채를 해방시킨 '야수주의' 앙리 마티스"와 "형태를 해방시킨 '입체주의' 파블로 피카소" 둘 다 '후기 인상주의' 폴 세잔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진중권은 폴 세잔을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로 규정한다.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로서... 세잔의 작업은 고전미술이 현대미술로 이행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그의 화면에서 발견되는 '색채의 놀라운 풍부함'과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형태, '고전적 원근법'과 다른 '체험된 원근법'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초석이 된다. 마티스는 그에게서 색채의 효과를, 피카소는 그에게서 형태의 기하학적 단순화와 고전적 원근법의 파괴를 배웠다. 현대미술의 두 위대한 이정표 모두 세잔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그 때문이다...
마티스와 드랭의 야수주의,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 현대미술의 두 이정표도 세잔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거나, 혹은 그 탄생이 뒤로 한참 늦춰졌을 것이다. 세잔은 마지막 고전주의자이자 최초의 현대주의자였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 11~12장 '세잔'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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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사
레온 트로츠키 지음, 볼셰비키그룹 옮김 / 아고라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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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시대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자본주의 쇠퇴’이다(1709)
- 러시아혁명 100주년 : 카, [러시아혁명],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대중이 사회의 운명에 직접 개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이다… 역사 서술은 혁명 사건들의 뒤에서 일어나는 집단적 의식의 변화들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운동의 ‘자발성’이라는 자루 속에 모든 것을 처넣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이 추상적인 말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혁명은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이 말은 혁명 대중이 혁명의 법칙들을 인식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대중의 의식은 우연히 변화하지 않으며 이론적으로 설명 가능한 객관적 필연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대중의 의식은 예측 가능하며 지도가 가능하다."
 
- L.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2권과 3권 서문>, 1932.

 
러시아혁명의 주체 중 하나였던 레온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혁명은 억압받는 다수 피지배계급이 낡은 체제를 무너뜨린다는 사회법칙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적극 실천했던 볼셰비키라는 정치세력의 ‘지도’에 의해 가능했으며 다수 대중의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러시아혁명의 ‘비민주성’을 두고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고 판단한 칼 카우츠키와 계급투쟁의 운동방식으로서 대중파업의 ‘자발성’도 중시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대립하는 한편, 내부적으로 부르주아와 지주 계급 뿐만 아니라 즉각적 무장봉기에 반대했던 멘셰비키 등과의 투쟁 과정에서 혁명을 성공했고 집권 후에도 혁명을 지키기 위해 외무, 군사인민위원으로서 처절하게 내전을 치른 당사자로서는 당연한 평가일 것이다.
 
2017년은 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이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30년 만에 다수 대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종식시킨 역사적인 해이다.
2017년은 30년 전인 1987년 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독재권력을 끌어내리기까지 한 해이다.
우리 사회 동시대 민중들 덕분에 러시아혁명 또한 ‘사회주의’ 이념이나 ‘볼세비키’ 정치세력 중심보다는 ‘소비에트’라는 대중 조직의 ‘자발성’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1917년 10월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 과정을 그 해 2월 혁명부터 7월 봉기를 거쳐 8월 코르닐로프 반혁명, 10월 볼셰비키 혁명까지 르포처럼 엮은 미국의 역사가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1976)의 중심에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이 거스를 수 없는 다수 대중의 운동이자 권력의 한 축, 즉 ‘소비에트’가 있다.

 
"나의 주목표는 ‘밑으로부터의 혁명’의 발전과 1917년 2월과 10월 사이에 페트로그라드에 존재했던 각급 볼셰비키당 조직의 견해와 활동과 상황을 될 수 있는 대로 충실 하고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혁명의 이 두 가지 주요 측면과 볼셰비키의 궁극적 승리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규명하려고 시도했다… 나는 당대의 문서에 나타난 공장 노동자와 병사와 수병들의 열망을 연구하면서 이들의 관심사가 볼셰비키가 내놓은 정치, 경제, 사회 개혁 강령과 가까이 일치했던 데 반해, 다른 모든 주요 정당은 충분히 열의를 다해 의미 있는 대내적 변화와 러시아의 즉각적 종전을 추진하지 않아서 널리 불신을 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 결과, 대중의 이해를 얻음으로써 볼셰비키의 목표는 10월에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2월 혁명 기간 동안에 페트로그라드에는 1905년 혁명기간에 러시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잠시 존재했던 기관을 본뜬 노동자∙병사 소비에트(평의회)도 나타났다. 소비에트는 1917년 봄∙여름에 페트로그라드의 각 구에 설치되었으며, 소비에트와 함께 러시아 전역의 도시, 읍, 마을에서 유사한 풀뿌리 민주주의 기구가 생겨났다… 이것은 모두 합치면 임시정부보다 수적으로 더 큰 대표성을 띄었으며, 공장 노동자와 농민, 특히 병사 사이에서 충성심을 얻은 덕분에 잠재적으로는 임시정부보다 더 강력했다."
 
- A.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프롤로그>, 1976.

 
레닌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4월 테제]를 수정했든 말든,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가장 기민하게 현실에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2017년 ‘혁명’이 보여준 것처럼, 전위가 대중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대중이 소수 전위를 결국  ‘지도’한다.

 
"사실, 1917년에 볼셰비키의 증대하는 힘과 권위의 주요원천은 ‘평화(전쟁종식)∙토지(무상배분)∙빵(노동자 경영참여)!’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에서 구체화된 당 강령이 뿜어낸 자력이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의 공장 노동자와 병사, 크론시타트 수병의 지지를 얻으려는 운동을 아주 힘차고 능숙하게 벌였다. 이 집단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소비에트 안에 있는 모든 정당과 정파를 대표하고 즉각적 강화와 중요한 내부 개혁과 조속한 헌법제정회의 소집이라는 강령에 헌신하고 사회주의자로만 이루어지는 민주정부를 창출한다는 뜻이었다… 오직 볼셰비키만이 권력투쟁에서 군대가 필연적으로 지니는 결정적 의의를 간파한 듯 하다. 아마 훨씬 더 근본적으로는 볼셰비키의 경이로운 성공은 적잖이 1917년에 당이 띤 성격 덕택으로 돌릴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그 역사적 의의를 부정할 수 없는 레닌의 대담하고도 결단성 있는 지도력이나 비록 크게 과장되기는 했지만 흔히 언급되는 볼셰비키 조직의 통일과 규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 전통적 레닌주의 모델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 내부적으로 비교적 민주적이고 관용적이며 분권화한 당의 구조와 작동 방식,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당의 성격을 강조하고자 한다."
 
- A.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에필로그>, 1976.


트로츠키가 [러시아혁명사]를 맺으며 결론지은 노동자, 병사, 빈농 등 대다수 '모든 사람들'의 열망을 정치적으로 실현한 10월 혁명의 문화적 의의를 보자.


"혁명으로 파멸한 러시아 유산계급은 혁명이 러시아의 문화수준을 하락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0월 혁명이 타도한 러시아 귀족문화는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서구의 더 고상한 모델을 피상적으로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러시아 인민은 그것을 향유하지도 못했으며 그 문화는 인류의 문화적 보고에 근본적으로 기여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10월 혁명은 새로운 문화의 기초를 놓았다. 모든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즉시 국제적 의의를 획득한 것이 이 새로운 문화다. 불리한 조건과 적대세력의 공격으로 소비에트 체제가 일시적으로 타도될 수 있다고 잠시 가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10월 혁명의 지울 수 없는 자취는 인류 미래의 발전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L.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결론>, 1932.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저술로 보수적인 역사학자들의 허울 뿐인 ‘중립성’에 맞선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저술을 남겼는데 그가 대중서로 편집한 [러시아혁명 1917 – 1929](1979)은 제1장 <1917년 10월>에서 10월 혁명의 과정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고는 혁명 후 반동세력으로부터 혁명을 지켜낸 내전과 신경제정책(NEP)으로 농민의 입장을 지지했던 과정, 일국사회주의 선언과 ‘대약진’을 선포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 등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혁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혁명은 자본주의의 쇠퇴가 낳은 결과인 동시에 쇠퇴를 야기한 원인으로 볼 수도 있다."
 
- E. H. 카, [러시아혁명 1917 - 1929], <1917년 10월>, 1979.

 
이 시대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쇠퇴’이다.
 
 
(2017년 9월)
 
 
***


1. [E.H.카 러시아 혁명 1917 - 1929], E. H. 카 지음(1979), 유강은 옮김, <이데아>, 2017.
 
2.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 A. 라비노비치 지음(1976), 류한수 옮김, <책갈피>, 2017.
 
3. [러시아혁명사], L. 트로츠키 지음(1932), 볼셰비키그룹 옮김, <아고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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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 카 러시아 혁명 - 1917-1929
에드워드 H. 카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데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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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시대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자본주의 쇠퇴’이다(1709)
- 러시아혁명 100주년 : 카, [러시아혁명],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대중이 사회의 운명에 직접 개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이다… 역사 서술은 혁명 사건들의 뒤에서 일어나는 집단적 의식의 변화들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운동의 ‘자발성’이라는 자루 속에 모든 것을 처넣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이 추상적인 말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혁명은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이 말은 혁명 대중이 혁명의 법칙들을 인식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대중의 의식은 우연히 변화하지 않으며 이론적으로 설명 가능한 객관적 필연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대중의 의식은 예측 가능하며 지도가 가능하다."
 
- L.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2권과 3권 서문>, 1932.

 
러시아혁명의 주체 중 하나였던 레온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혁명은 억압받는 다수 피지배계급이 낡은 체제를 무너뜨린다는 사회법칙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적극 실천했던 볼셰비키라는 정치세력의 ‘지도’에 의해 가능했으며 다수 대중의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러시아혁명의 ‘비민주성’을 두고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고 판단한 칼 카우츠키와 계급투쟁의 운동방식으로서 대중파업의 ‘자발성’도 중시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대립하는 한편, 내부적으로 부르주아와 지주 계급 뿐만 아니라 즉각적 무장봉기에 반대했던 멘셰비키 등과의 투쟁 과정에서 혁명을 성공했고 집권 후에도 혁명을 지키기 위해 외무, 군사인민위원으로서 처절하게 내전을 치른 당사자로서는 당연한 평가일 것이다.
 
2017년은 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이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30년 만에 다수 대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종식시킨 역사적인 해이다.
2017년은 30년 전인 1987년 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독재권력을 끌어내리기까지 한 해이다.
우리 사회 동시대 민중들 덕분에 러시아혁명 또한 ‘사회주의’ 이념이나 ‘볼세비키’ 정치세력 중심보다는 ‘소비에트’라는 대중 조직의 ‘자발성’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1917년 10월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 과정을 그 해 2월 혁명부터 7월 봉기를 거쳐 8월 코르닐로프 반혁명, 10월 볼셰비키 혁명까지 르포처럼 엮은 미국의 역사가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1976)의 중심에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이 거스를 수 없는 다수 대중의 운동이자 권력의 한 축, 즉 ‘소비에트’가 있다.

 
"나의 주목표는 ‘밑으로부터의 혁명’의 발전과 1917년 2월과 10월 사이에 페트로그라드에 존재했던 각급 볼셰비키당 조직의 견해와 활동과 상황을 될 수 있는 대로 충실 하고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혁명의 이 두 가지 주요 측면과 볼셰비키의 궁극적 승리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규명하려고 시도했다… 나는 당대의 문서에 나타난 공장 노동자와 병사와 수병들의 열망을 연구하면서 이들의 관심사가 볼셰비키가 내놓은 정치, 경제, 사회 개혁 강령과 가까이 일치했던 데 반해, 다른 모든 주요 정당은 충분히 열의를 다해 의미 있는 대내적 변화와 러시아의 즉각적 종전을 추진하지 않아서 널리 불신을 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 결과, 대중의 이해를 얻음으로써 볼셰비키의 목표는 10월에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2월 혁명 기간 동안에 페트로그라드에는 1905년 혁명기간에 러시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잠시 존재했던 기관을 본뜬 노동자∙병사 소비에트(평의회)도 나타났다. 소비에트는 1917년 봄∙여름에 페트로그라드의 각 구에 설치되었으며, 소비에트와 함께 러시아 전역의 도시, 읍, 마을에서 유사한 풀뿌리 민주주의 기구가 생겨났다… 이것은 모두 합치면 임시정부보다 수적으로 더 큰 대표성을 띄었으며, 공장 노동자와 농민, 특히 병사 사이에서 충성심을 얻은 덕분에 잠재적으로는 임시정부보다 더 강력했다."
 
- A.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프롤로그>, 1976.

 
레닌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4월 테제]를 수정했든 말든,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가장 기민하게 현실에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2017년 ‘혁명’이 보여준 것처럼, 전위가 대중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대중이 소수 전위를 결국  ‘지도’한다.

 
"사실, 1917년에 볼셰비키의 증대하는 힘과 권위의 주요원천은 ‘평화(전쟁종식)∙토지(무상배분)∙빵(노동자 경영참여)!’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에서 구체화된 당 강령이 뿜어낸 자력이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의 공장 노동자와 병사, 크론시타트 수병의 지지를 얻으려는 운동을 아주 힘차고 능숙하게 벌였다. 이 집단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소비에트 안에 있는 모든 정당과 정파를 대표하고 즉각적 강화와 중요한 내부 개혁과 조속한 헌법제정회의 소집이라는 강령에 헌신하고 사회주의자로만 이루어지는 민주정부를 창출한다는 뜻이었다… 오직 볼셰비키만이 권력투쟁에서 군대가 필연적으로 지니는 결정적 의의를 간파한 듯 하다. 아마 훨씬 더 근본적으로는 볼셰비키의 경이로운 성공은 적잖이 1917년에 당이 띤 성격 덕택으로 돌릴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그 역사적 의의를 부정할 수 없는 레닌의 대담하고도 결단성 있는 지도력이나 비록 크게 과장되기는 했지만 흔히 언급되는 볼셰비키 조직의 통일과 규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 전통적 레닌주의 모델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 내부적으로 비교적 민주적이고 관용적이며 분권화한 당의 구조와 작동 방식,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당의 성격을 강조하고자 한다."
 
- A.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에필로그>, 1976.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저술로 보수적인 역사학자들의 허울 뿐인 ‘중립성’에 맞선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저술을 남겼는데 그가 대중서로 편집한 [러시아혁명 1917 – 1929](1979)은 제1장 <1917년 10월>에서 10월 혁명의 과정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고는 혁명 후 반동세력으로부터 혁명을 지켜낸 내전과 신경제정책(NEP)으로 농민의 입장을 지지했던 과정, 일국사회주의 선언과 ‘대약진’을 선포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 등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혁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혁명은 자본주의의 쇠퇴가 낳은 결과인 동시에 쇠퇴를 야기한 원인으로 볼 수도 있다."
 
- E. H. 카, [러시아혁명 1917 - 1929], <1917년 10월>, 1979.

 
이 시대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쇠퇴’이다.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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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H.카 러시아 혁명 1917 - 1929], E. H. 카 지음(1979), 유강은 옮김, <이데아>, 2017.
 
2.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 A. 라비노비치 지음(1976), 류한수 옮김, <책갈피>, 2017.
 
3. [러시아혁명사], L. 트로츠키 지음(1930), 볼셰비키그룹 옮김, <아고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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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 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지음, 류한수 옮김 / 책갈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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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시대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자본주의 쇠퇴’이다(1709)
- 러시아혁명 100주년 : 카, [러시아혁명],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대중이 사회의 운명에 직접 개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이다… 역사 서술은 혁명 사건들의 뒤에서 일어나는 집단적 의식의 변화들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운동의 ‘자발성’이라는 자루 속에 모든 것을 처넣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이 추상적인 말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혁명은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이 말은 혁명 대중이 혁명의 법칙들을 인식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대중의 의식은 우연히 변화하지 않으며 이론적으로 설명 가능한 객관적 필연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대중의 의식은 예측 가능하며 지도가 가능하다."
 
- L.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2권과 3권 서문>, 1932.

 
러시아혁명의 주체 중 하나였던 레온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혁명은 억압받는 다수 피지배계급이 낡은 체제를 무너뜨린다는 사회법칙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적극 실천했던 볼셰비키라는 정치세력의 ‘지도’에 의해 가능했으며 다수 대중의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러시아혁명의 ‘비민주성’을 두고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고 판단한 칼 카우츠키와 계급투쟁의 운동방식으로서 대중파업의 ‘자발성’도 중시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대립하는 한편, 내부적으로 부르주아와 지주 계급 뿐만 아니라 즉각적 무장봉기에 반대했던 멘셰비키 등과의 투쟁 과정에서 혁명을 성공했고 집권 후에도 혁명을 지키기 위해 외무, 군사인민위원으로서 처절하게 내전을 치른 당사자로서는 당연한 평가일 것이다.
 
2017년은 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이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30년 만에 다수 대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종식시킨 역사적인 해이다.
2017년은 30년 전인 1987년 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독재권력을 끌어내리기까지 한 해이다.
우리 사회 동시대 민중들 덕분에 러시아혁명 또한 ‘사회주의’ 이념이나 ‘볼세비키’ 정치세력 중심보다는 ‘소비에트’라는 대중 조직의 ‘자발성’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1917년 10월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 과정을 그 해 2월 혁명부터 7월 봉기를 거쳐 8월 코르닐로프 반혁명, 10월 볼셰비키 혁명까지 르포처럼 엮은 미국의 역사가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1976)의 중심에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이 거스를 수 없는 다수 대중의 운동이자 권력의 한 축, 즉 ‘소비에트’가 있다.

 
"나의 주목표는 ‘밑으로부터의 혁명’의 발전과 1917년 2월과 10월 사이에 페트로그라드에 존재했던 각급 볼셰비키당 조직의 견해와 활동과 상황을 될 수 있는 대로 충실 하고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혁명의 이 두 가지 주요 측면과 볼셰비키의 궁극적 승리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규명하려고 시도했다… 나는 당대의 문서에 나타난 공장 노동자와 병사와 수병들의 열망을 연구하면서 이들의 관심사가 볼셰비키가 내놓은 정치, 경제, 사회 개혁 강령과 가까이 일치했던 데 반해, 다른 모든 주요 정당은 충분히 열의를 다해 의미 있는 대내적 변화와 러시아의 즉각적 종전을 추진하지 않아서 널리 불신을 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 결과, 대중의 이해를 얻음으로써 볼셰비키의 목표는 10월에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2월 혁명 기간 동안에 페트로그라드에는 1905년 혁명기간에 러시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잠시 존재했던 기관을 본뜬 노동자∙병사 소비에트(평의회)도 나타났다. 소비에트는 1917년 봄∙여름에 페트로그라드의 각 구에 설치되었으며, 소비에트와 함께 러시아 전역의 도시, 읍, 마을에서 유사한 풀뿌리 민주주의 기구가 생겨났다… 이것은 모두 합치면 임시정부보다 수적으로 더 큰 대표성을 띄었으며, 공장 노동자와 농민, 특히 병사 사이에서 충성심을 얻은 덕분에 잠재적으로는 임시정부보다 더 강력했다."
 
- A.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프롤로그>, 1976.

 
레닌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4월 테제]를 수정했든 말든,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가장 기민하게 현실에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2017년 ‘혁명’이 보여준 것처럼, 전위가 대중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대중이 소수 전위를 결국  ‘지도’한다.

 
"사실, 1917년에 볼셰비키의 증대하는 힘과 권위의 주요원천은 ‘평화(전쟁종식)∙토지(무상배분)∙빵(노동자 경영참여)!’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에서 구체화된 당 강령이 뿜어낸 자력이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의 공장 노동자와 병사, 크론시타트 수병의 지지를 얻으려는 운동을 아주 힘차고 능숙하게 벌였다. 이 집단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소비에트 안에 있는 모든 정당과 정파를 대표하고 즉각적 강화와 중요한 내부 개혁과 조속한 헌법제정회의 소집이라는 강령에 헌신하고 사회주의자로만 이루어지는 민주정부를 창출한다는 뜻이었다… 오직 볼셰비키만이 권력투쟁에서 군대가 필연적으로 지니는 결정적 의의를 간파한 듯 하다. 아마 훨씬 더 근본적으로는 볼셰비키의 경이로운 성공은 적잖이 1917년에 당이 띤 성격 덕택으로 돌릴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그 역사적 의의를 부정할 수 없는 레닌의 대담하고도 결단성 있는 지도력이나 비록 크게 과장되기는 했지만 흔히 언급되는 볼셰비키 조직의 통일과 규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 전통적 레닌주의 모델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 내부적으로 비교적 민주적이고 관용적이며 분권화한 당의 구조와 작동 방식,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당의 성격을 강조하고자 한다."
 
- A.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혁명], <에필로그>, 1976.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저술로 보수적인 역사학자들의 허울 뿐인 ‘중립성’에 맞선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저술을 남겼는데 그가 대중서로 편집한 [러시아혁명 1917 – 1929](1979)은 제1장 <1917년 10월>에서 10월 혁명의 과정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고는 혁명 후 반동세력으로부터 혁명을 지켜낸 내전과 신경제정책(NEP)으로 농민의 입장을 지지했던 과정, 일국사회주의 선언과 ‘대약진’을 선포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 등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혁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혁명은 자본주의의 쇠퇴가 낳은 결과인 동시에 쇠퇴를 야기한 원인으로 볼 수도 있다."
 
- E. H. 카, [러시아혁명 1917 - 1929], <1917년 10월>, 1979.

 
이 시대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쇠퇴’이다.
 
 
(2017년 9월)
 
 
***


1. [E.H.카 러시아 혁명 1917 - 1929], E. H. 카 지음(1979), 유강은 옮김, <이데아>, 2017.
 
2.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 A. 라비노비치 지음(1976), 류한수 옮김, <책갈피>, 2017.
 
3. [러시아혁명사], L. 트로츠키 지음(1930), 볼셰비키그룹 옮김, <아고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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